<7>
"밖에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연희가 선우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고맙고도 미안했다. 선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떼기 전까지는 그랬다.
"널 볼 때마다 왜 항상 이런 상황이지?"
선우가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연희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제대로 본 선우의 얼굴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의도치 않게 남의 일에 몇 번이나 관여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도와주지 않으셔도 되요."
진심이었다. 애당초 선우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상황이 계속 이렇게 되잖아. 네가 계속…."
선우가 말을 이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기분 나빠하면서까지 왜 자신을 도왔던 걸까. 이유를 생각해 보던 연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몇 년 전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선배는 저한테 신세진 거 이제 없으세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년 전 선우에게 건넨 잠깐의 호의 때문이라면, 이미 충분히 돌려받았다. 그러니 더 이상 귀찮은 일에 말려들 필요가 없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선우의 표정이 단번에 굳은 가운데, 치켜뜬 눈썹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어어.
그제야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먼저 과거를 입에 담지 않은 이상, 자신이 먼저 그 일을 언급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지나간 일은 잊자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대체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
선우가 연희에게 다가와 바싹 몸을 붙였다.
"나를 배려하고 싶었다면, 잊을 일조차 없는 것처럼 굴었어야지."
생각 이상으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고개까지 숙여 다시 사과했는데도 선우의 인상은 더 험악해지기만 했다.
"근데 넌 지금 왜 이 모양이 된 거야? 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선우가 연희에게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오후의 햇살을 가린 선우의 몸 그대로, 연희의 얼굴 위에 그림자가 졌다.
"네?"
곱지 않은 말투에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자, 비뚜름한 입매가 먼저 보였다.
"아까는 왜 참고만 있었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불쌍한 얼굴로."
"안 그랬는데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평소와 다르지 않게 굴었던 것 같은데. 그럼 평소의 나는 어때 보였던 걸까?
"수업 다 끝나도록 그렇게 벌 서는 것처럼 가만히 기다리려고 했어?"
"…따져봤자 시간만 더 지체될 거 같아서요. 그건 효율적이지 않잖아요."
강의가 엮인 일이니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곤란한 얼굴로 고개 숙이는 정도야 할 수 있었다. 그럼 자존심을 세운 주영이 어떻게든 해결해주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빠르진 않았겠지만 마냥 시간을 끌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효율적이지 않아서."
선우의 입가가 더 비뚜름해졌다. 그러고는 다시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왜 시비지?
급한 걸음으로 선우를 쫓아 나란히 걷는데, 선우가 말을 이었다.
"그럼 그때도 보나한테 그냥 사과하지 그랬어? 괜히 학생식당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덜덜 떠는 것보단 대충 타협하고 화해하는 게 나았을 거 아냐?"
"네?"
"그땐 해볼 만한 것 같았어? 하긴 조교보다는 동기가 더 만만하긴 하지."
설마.
다수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고군분투하던 그 상황이, '해볼 만했다'라고 말한 건가?
연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상대 가려가며 대하는 줄도 모르고 난 네가 자존심을 꽤 잘 지키는 애인 줄 알았네."
선우의 빙글거리는 웃음이 더는 부드러워 보이지도, 친절해 보이지도 않았다.
"상황이 다르잖아요."
"뭐가 다른데?"
선우가 고개를 기울여 연희를 보았다. 온통 검은 동공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얼음조각이 닿은 뱃속에서 울컥함이 터져 나왔다.
"할 말 있으면 돌리지 말고 제대로 해요.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입매를 비튼 선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제 알겠어?"
"뭘요?"
"상대가 원치도 않는 도움을 주고 나서 어쭙잖은 충고를 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이게 무슨 소리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예전 청룡각에서 선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시는 거면…."
"……."
"그냥 남기셔도 된다고요. 억지로 먹는 것도 고문이잖아요."
그때 선우의 표정이 어땠더라?
유쾌하지 않아 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할 정도였나? 몇 년 뒤에 대갚음하고 싶어 할 정도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연희가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뗄 때였다.
"얼른 들어와요! 곧 강의 시작할 거니까."
강의실 문가에 서 있던 은경이 외쳤다. 강의실 안에는 센터에서 나온 조교가 먼저 도착해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다녀오느라 수고했어요."
은경의 시선은 선우에게만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한 선우가 아무 일도 없던 양, 산뜻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뒤로 고개를 돌린 연희가 저도 모르게 선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선우는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연희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친밀한 후배를 보듯 그렇게.
그 여상함에, 조금 전까지 선우의 행동을 해석해 보려 애쓰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늦춰진 시간만큼 몰아치는 강의를 필기하면서도 무엇을 쓰고 있는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우의 예상치 못했던 시비와 지나치게 산뜻했던 뒷마무리가 자꾸만 떠오른 탓이었다.
왜 나한테 지랄이야?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자신이 지금 누구의 강의를 듣고 있는지도, 주영이 오늘 어떻게 자신을 괴롭혔는지도 잊게 될 정도였다.
* * *
강의는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20여분을 장비 문제로 날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어지는 수업은 다른 건물에서 진행되기에, 연희는 급히 짐을 정리했다. 한참을 뛰다시피 걸었다. 덕분에 다음 건물에 이르러서야 뒤에서 적당한 거리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알아챘다.
설마.
왜 그런 예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순간,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연희 뒤에는, 연희를 따라 걸음을 멈춘 선우가 있었다.
"혹시 더 비꼴 말이 남았어요?"
"아니."
"그럼 뭐 또 도와주실 게 있어서 그래요?"
"아직은 없는데 곧 생길 것 같아서."
"네?"
"조금 전 강 교수님 수업 말이야. 곧 조 과제 줄 거라던데 같은 조 할 사람 있어?"
"절 선배 조에 넣어주겠다고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강 교수님 수업은 유독 신경 쓰지 않아? 나랑 같이 과제하면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
은경을 가리키는 말에 연희의 몸이 잠깐 굳었다. 자신이 은경을 의식하는 태도가 남의 눈에 띌 정도였던가? 나름 행동을 잘 갈무리해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당황스러웠다.
"어차피 더 시간 끌어도 조원 구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일 거 아냐?"
물론 어느 조에도 편입되지 못해 쩔쩔매는 꼴을 은경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고마운 제안일 텐데….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어 보이는 표정과 느긋한 말투마저 짜증이 났다.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선배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네요."
선우가 입가를 잠깐 달싹였으나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연희가 먼저 물었다.
"어려운 사람 돕는 게 취미예요?"
"아니."
"그럼 돕는 척하다가 뒤통수치는 게 취미에요?"
"그럴 리가."
"그럼 대체 뭔데요?"
연희의 조소를 감상하듯 바라보던 선우가 주변을 확인했다. 오가는 사람 중에 학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선우가 연희의 귀에 얼굴을 붙여 속삭였다.
"좀 재미있어졌거든."
"뭐가 재미있다는 거예요?"
"네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는 거라든지,"
"……."
"참다 참다 팡 터뜨리는 꼴을 보는 거라든지."
"뭐라고요?"
연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지친 나머지 화낼 기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선우가 선배라는 것도, 그동안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준 사람이란 것도 잊었다. 머리끝까지 피가 몰렸다. 연희가 선우의 소맷귀를 잡고 확 잡아끌었다.
"따라와요."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가는 동안, 선우는 즐거운 얼굴을 했다. 일부러 '어어어' 외치며 억지로 끌려오는 척 하는 꼴이 함께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왜 그래?"
나 좀 떨리는데, 하며 선우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이 구석진 곳에서 해야 할 말이 뭘까?"
"뭐일 거 같아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선우가 턱을 쓸었다. 검고 진한 눈동자에 연희가 가득 들어찼다.
"흠. 고백이면 곤란한데"
"하!"
연희가 코웃음을 치자, 선우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런 거 아니면 얼른 갈까?"
선우가 빠져나가려 몸을 틀었을 때.
턱.
연희가 한쪽 팔로 선우의 가슴팍을 막았다. 연희가 두 팔로 선우를 가둔 채 올려다보자, 선우가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옴찔대는 손가락 끝에 장난기가 걸려있었다.
"왜 이렇게 비뚤어졌어요?"
"뭐?"
선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배가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 내가 본 게 그렇게 짜증나요?"
정곡을 찌른 걸까? 둥글었던 선우의 입매가 직선을 그렸다.
"이렇게 대놓고 따질 줄 몰랐는데."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괴롭히고 싶은 거예요? 한쪽만 해요. 그럼 나도 고마워하던지, 무시를 하던지 한 가지만 할 테니까."
"너, 제대로 화났구나?"
"네."
"의왼데?"
"뭐가요?"
"난 네가 조금 더…."
선우가 눈을 위아래로 한 바퀴 굴렸다.
"조금 더 뭐요?"
"참을 줄 알았거든."
"근거가 뭔데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멋대로 연희를 판단했다는 게 웃겼다.
"지금 넌 지쳤잖아. 이럴 때 손 내밀면 고분고분하게 잡는 게 보통 아닌가?"
"내가 왜 선배 손을 잡아요?"
"달리 너 도와줄 사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