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연희가 가게 뒤뜰에 나간 것은 정 회장 일가가 돌아가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우욱."
식당 뜰 구석에서 반복되는 소음이 연달아 들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곧 쭈그리고 앉아 먹은 것을 게워내는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선우였다.
왜 여기 남아 있는 거지?
생각하는 사이에 선우가 비틀대며 일어섰다. 선우는 벽을 짚은 채 자신의 토사물을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
연희와 선우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 정적이 일었다.
"…괜찮으세요?"
순식간에 더욱 창백해진 낯빛을 보며, 연희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선우가 얼른 몸으로 토사물을 가렸다.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도 힘 빠진 몸이 휘청거렸다.
"빗자루나, 휴지나 뭐든지 청소할 걸 좀 가져다 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아요. 제가 치울게요."
어차피 식당 근처를 청소하는 일은 직원의 몫이었다. 게다가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청소는 할 수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연희가 청소도구를 가져오자마자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청소도구를 낚아챘다.
"제가 할게요."
아픈 몸으로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돌아선 선우의 뒷덜미가 달아오른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막아선 공간을 내주지 않고 고집스레 서 있는 모양새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흔적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명백히 드러냈다.
"네. 그럼…."
연희는 식당에 다시 들어갔다. 쓰레기봉투를 챙기는 김에 따뜻한 보이차도 같이 챙겼다. 다시 선우에게로 갔을 때, 선우는 여전히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다 연희가 차를 내밀자 지나치게 놀란 표정을 했다.
"속 좀 진정되실까 해서요."
"…감사합니다."
선우가 입 끄트머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연희는 마주 웃는 대신 식당에 구비되어 있던 소화제를 내밀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기에, 아예 선우의 손에 소화제를 쥐여 주었다. 닿은 손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우는 다 쓴 청소도구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일이 익숙지 않은 사람 같았다.
"저…."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평소답지 않은 참견을 했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시는 거면…."
"……."
"그냥 남기셔도 된다고요. 억지로 먹는 것도 고문이잖아요."
의무처럼 음식을 먹는 남자에게, 그래서 끝내 체한 것 같은 남자에게 누구나 할 법한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선우의 반응은 여상스럽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뭐 해?"
때마침 밖으로 잠깐 나온 한철이 연희를 불렀다. 연희는 선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한철을 향해 뛰어갔다. 한철의 실없는 농담에 조금 웃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선우는 아직 연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세를 바로 한 선우가 뒤돌아섰다. 넓지만 쓸쓸한 어깨가 천천히 길가로 멀어져 갔다.
"아이고. 저 친구, 내가 오늘 화장실에 오래 있어서 거기 있었나 보다. 미안해서 어쩌나?"
뒤늦게 선우를 본 한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핏기가 영 없는 게 오늘도 다 게워냈나 보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요?"
"그 사람, 올 때마다 남자 화장실에서 아주 살아. 가게 음식이 몸에 안 받는 것 같은데 굳이 오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때 생각했다. 우연히 마주한 쓸쓸한 뒷모습은, 당사자를 위해 얼른 잊어줘야겠다고.
이후 청룡각에서 선우를 한 번 더 보았다. 매화실을 지키고 있던 홀 매니저가 물티슈와 행주를 잔뜩 가져다 달라고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연희가 들어갔을 때는 메인 요리 두 개와 수저통이 식당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매니저와 함께 바닥에 흩어진 것을 치우고 엉망이 된 테이블을 정리했다. 얼룩진 곳들은 행주와 티슈를 이용해 부지런히 닦았다.
첫 번째로 들고 간 물티슈는 죄다 선우에게 건네주었다. 선우의 얼굴부터 옷까지 음식이 튀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국물 하나 튄 자국이 없었는데 선우만 그랬다.
선우가 옷을 닦는 동안 가족 중 누구도 선우에게 시선을 건네지 않았다. 선우에게 튄 음식물이 무슨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 앉아 담소를 나누었을 뿐이다. 연희만이 선우의 붉어진 얼굴을 발견했다.
선우 앞은 유독 휑했다. 쏟아진 음식물로 더러워진 앞접시와 수저를 치워버렸으니 당연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어 선우 앞에 새로 놓아 주었다.
한동안 선우는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계절마다 정 회장 가족이 오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 속에 선우는 없었다. 마침내 싫어하는 식사 자리에서 벗어났나보다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손님을 마주치면서 기억 속 선우는 다른 얼굴들 속에 묻혀 갔다.
선우에게 약을 받아 들던 날, 그 떨리는 어깨를 보지 않았다면 연희는 선우를 끝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잊어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숨어있었던 것이다.
선우가 최근까지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군대에 가 있었을 것이다.
선우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 * *
학교에서 본 선우와 그날 본 선우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깨닫지 못한 이유는 연희가 선우의 예전 얼굴을 완전히 잊어서는 아니었다. 연희가 아무리 외적인 기준에 무감해도, 이후 마주친 다른 얼굴들이 그 위를 덮었어도, 선우의 얼굴은 확실히 눈에 띌 만큼 튀었으니까.
아마 너무도 다른 표정과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의 끄트머리에 서서 어딘가 모르게 주눅 들어 보이던 학교 밖 선우와 다르게, 학교 안에서의 선우는 언제나 당당하기만 했으니까.
그 이질감을 한 번 상기하고 나자 선우를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선우와 듣는 수업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이었다. 지금 듣고 있는 「연극 미학의 이해」수업도 그랬다.
"이거 화면이 왜 이래?"
담당 교수인 은경이 짜증을 냈다. 처음부터 덜컹거리던 대형 스크린이 반쯤을 남겨놓고는 더는 내려오지 않은 탓이었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간격이 짧아짐에 따라 달칵거리는 소리도 점점 사나워졌다.
"누구, 학과 사무실 좀 다녀올래요?"
가장 앞자리에 앉은 연희와 은경의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드르륵.
학과 사무실 문을 열자 주영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학생 왔는데."
전화를 끊으려던 주영이, 연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매서운 눈으로 픽 웃었다.
"아니. 전화 안 끊어도 될 것 같아."
시답잖은 통화가 이어졌다. 기다리다 못한 연희가 주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주영이 싸늘하게 반응했다.
"예의 없이 어딜 만져?"
"2305강의실 스크린이 작동하지 않아서요. 교수님께서 봐 달라고 하세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해?"거긴 우리 학과 담당 강의실도 아니잖아."
"그럼 어디에 물어봐야 할까요?"
"모르니까 네가 직접 알아 봐."
지금 이용하는 강의실이 다른 부서에서 관리하는 강의실이었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학과 조교인 주영이 담당 부서를 모를 리는 없었다. 본인이 직접 대여했을 테니까.
"정말 모르세요?"
주영은 연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수화기에 다시 귀를 붙였다.
"아니, 누가 찾아와서 어이없는 걸 물어보네?"
조소가 이어졌다. 그래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부서인지 알아봐 주실 수 없을까요?"
"모른다고."
주영이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는 것도, 한낱 후배에게 적의를 숨기지 않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사람은 얼마든지 유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릇에 비해 큰 권력을 가졌을 때다.
얼마나 더 곤란해하는 꼴을 보여야 마음이 풀리려나?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한숨을 내쉴 때였다.
"교양교육센터가 관리하는 강의실 아니었나? 전화기 옆에 번호 붙어 있는 것 같은데, 그거 확인하는 게 많이 힘들어?"
몇 번 들었다고, 그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우 오빠?"
"아까부터 문밖에서 기다렸는데 좀처럼 해결이 안 나는 것 같아서."
당황한 주영이 전화를 끊었다. 선우는 주영의 선배이자, 교수들의 '관심' 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유력 집안의 자제였다. 선우의 말 한마디가 자신의 평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응. 아주 급한 전화였나 봐? 우리도 많이 급한데."
아랫입술을 깨문 주영이 그대로 연희에게 화살을 돌렸다.
"급한 일이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니?"
연희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선우가 말을 가로챘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거 알지? 이미 교수님 기분이 많이 언짢아지셨을 것 같은데."
"교수님요?"
"강은경 교수님 성격 알면서 그래?"
연희를 골탕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교수의 존재를 잊었던 주영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은경이라니.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주영의 지도 교수가 은경이었다.
"넌 왜 강은경 교수라고 말 안 했어? 어떤 강의인지 알았으면 나도 담당부서가 금방 기억났을 거 아냐?"
주영이 연희를 노려보고는 급히 강의시간표를 확인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있나?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한 문제 아니야?"
"네. 그렇죠."
주영이 얼른 선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화기 좀 쓸게."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간 선우가 여유롭게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자세히 보니 전화기 옆에 부서별 전화번호가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교양교육센터죠? 사회대 2305 강의실 장비에 문제가 있어서 강은경 교수님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인력을 요청하셨는데요."
툭.
수화기를 내려놓은 선우에게 주영이 사과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네가 이렇게 바쁜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가 도울 걸 그랬네."
선우의 눈치를 살피던 주영이 얼른 책상 위에 있던 음료를 건넸다.
"이게 뭐야?"
"대신 처리해주셨잖아요. 감사해서…."
"감사하고 말고 할 게 있나?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되는 일인데."
달리 말하면,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는 일인데 주영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선우가 주영이 내민 음료를 힐끗 보기만 하고는 그대로 연희에게 다가갔다.
"얼른 가자. 늦었어."
연희에게 고갯짓한 선우가 성큼성큼 걸어 학과 사무실 밖을 나갔다. 연희도 뒤를 따라 나갔다. 사색이 된 주영만이 삐걱대며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