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숨을 쉰 연희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 사이 선우가 콩자반을 입에 넣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국을 떠먹고도 같은 표정을 했다.
"반찬이 늘 이래?"
방황하는 시선을 보니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듯했다.
"그냥저냥 먹을 만은 한데요."
"그런 것치고는 너도 먹은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과연, 딱딱하기만 한 콩자반이며 고기 없는 고깃국, 종잇장 같은 불고기 따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맛 때문에 남긴 것은 아니었다. 저를 두고 떠드는 소리 때문이었지.
원래대로라면 식판의 음식은 남김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위의 문제와는 별개로, 연희는 지극히 무던한 식성을 갖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를 보는 것 같은 선우의 표정에 괜히 오기가 솟아서, 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색해서, 연희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결국 연희는 식판에 담긴 밥과 반찬을 깨끗이 비웠다. 말 한마디 없이 전투적으로 식사를 끝내고 나니 선우가 대단하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 드신 거예요?"
선우의 식판에 있는 음식은 여전히 줄어든 것이 없었다.
"그냥 나가서 다시 사 먹으려고."
"그래도 버섯볶음은 먹을 만하던데."
"별로 안 좋아해서."
다 남길 거면 왜 여기에 왔지? 눈을 슴벅이는 연희를, 선우가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다 먹었으면 먼저 나가지?"
또 축객령이었다. 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일어섰다. 윗배가 살짝 아픈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퇴식구를 향해 바삐 걸어갔다.
* * *
축제 관련 회의는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회의 중간중간 연희는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위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회의실을 나가면 사람들의 눈에 띌 터였다. 보나가 또 비아냥대는 말을 듣느니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나았다.
"그럼 우리 학과는 주점 운영하기로 한 거다? 1학년부터 2학년은 무조건 이틀 이상 참여하되 고학번은 제외하는 걸로. 다들 괜찮지?"
다들 괜찮은 건 아닌지 1,2학년들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츄러스나 솜사탕처럼 비교적 간단한 아이템을 주장했다가 깨끗이 무시당한 참이었다. 반면 즐기기만 하면 그만일 고학번들은 원준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부스 운영은 보나한테 물어보고 허락받는 걸로 하자."
원준은 학생회 집행부이기도 해서 축제의 전반적인 운영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권력을 이양받은 보나가 시원스레 웃는 것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다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웬만한 사정이 없는 한 무조건 참석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달리 챙겨줄 사람도, 챙길 사람도 없는 연희는 예외였다. 연희는 일부러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가장 마지막에 나갈 생각이었다.
이쯤이면 다들 나갔겠지? 슬슬 일어설까?
"우리도 뭘 좀 도와야 하지 않겠어?"
강의실에 남은 사람이 있었나?
커다란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원준과 동훈, 선우가 강의실 앞쪽에서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성격 좋은 말투의 주인은 동훈이었고, 선우는 그런 동훈에게 붙들려 있었다.
"후배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형님들은 많이 팔아나 주세요. 주위에 홍보도 해주시면 좋고요."
"그럼 얘만 믿어! 얘가 주점에 앉아있으면 홍보는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동훈이 선우를 가리키자, 선우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고개는 천천히, 조금씩 옆으로 기울었다. 교실 구석에 있던 연희를 향해서였다. 선우의 시선을 따라온 원준 역시 연희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연희도 아직 밥 먹으러 안 갔구나?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
그리고 쓸데없는 권유를 해왔다.
원준이 포함된 삼각관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이후, 연희는 이런 자리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뒤풀이에 가봤자 원준의 쓸데없는 친절에 힘입어 보나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견뎌야 할 테니까. 원준도 연희의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권하는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넓은 아량을 뽐내고 싶어서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죄 없는 자신에게 잘못을 덮어씌운' 상대마저 감싸는 모습을 전시하려고.
"오늘 보나는 못 온다니까 걱정 말고."
보나가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게 아니어도 원준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뒷말은 연희의 몫이 될 터였다.
뭐라고 말해야 저 끈질긴 인간이 받아들이려나? 남의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성격이니 아프다고 해봤자 핑계라며 넘겨버릴 텐데.
"안색이 별로인 거 같은데 집에 얼른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다행히 선우가 먼저 입을 떼 주었다.
"우와. 너 진짜 눈 좋다. 이 정도 거리에서 안색이 보여?"
동훈이 꽤 떨어진 거리를 가늠하며 눈매를 좁혔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희가 대답하기 무섭게, 원준이 원치 않는 호의를 또 제안해 왔다.
"그래? 그럼 얼른 같이 나가자. 내가 가는 길에 약 사줄게."
"아니요. 혼자 가는 게 맘이 편해서요."
"아픈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둬? 나랑 가자."
원준이 연희가 든 가방을 빼앗듯 가져갔다. 연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싸늘한 분위기에 동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선우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밥 먹으러 갈까?"
무슨 오해를 했는지 선우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려는 기색이었다. 슬그머니 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은 동훈을, 선우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뭐?"
동훈이 멍한 눈을 깜빡였다. 선우가 한숨을 쉬고는 동훈의 손을 제 어깨에서 떼어냈다.
"너는 가. 난 안 가."
"오늘 안 가세요? 항상 잠깐이라도 들르셨잖아요."
원준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응.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 그럼 얼른 가보셔야겠네요. 연희야. 우리도 나가자."
원준이 연희를 끌어당기려는 손을 선우가 막았다.
"그냥 내가 연희랑 같이 가면 될 것 같아. 같은 정류장이거든."
원준의 손에 들린 연희의 가방을 선우가 부드럽게 뺏어 들었다.
"자. 받아."
선우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연희에게 가방을 돌려주었다. 가방을 품에 안은 연희가 선우를 따라 대기 의자에 앉았다.
"자꾸 신세를 지게 되네요."
선우가 픽, 웃었다.
"신세랄 것까지야. 지금 나랑 간다고 당장 몸이 좋아질 것도 아니고."
민망해지려는 찰나, 선우가 제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네."
선우가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하얗고 둥근 약통과, 짜먹는 액체형 제산제였다. 언뜻 보이는 가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약이 즐비했다.
"소화제가 필요해, 진통제가 필요해. 아니면 제산제?"
"…제산제랑 진통제요"
선우가 골라낸 약을 연희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약을 많이 갖고 다니시네요?"
"내가 자주 아픈 편이라서."
여상하게 대답한 선우가 물병을 던지듯 건넸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볼 수 없게 만드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연희가 두 손으로 물병을 잡는 사이, 벌떡 일어선 선우가 등을 돌렸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먼저 간다."
선우가 버스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어서 선우만 태운 버스가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 버스, 우리 동네도 가는데.
연희 혼자 정류장에 덩그러니 남았다. 반쯤 비운 물통과 약 껍데기를 손에 쥔 채.
플라시보 효과일까? 약기운이 벌써 돌 리 없는데 고통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연희는 다급하게 돌아서던 선우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잠시 흠칫 떨렸던 선우의 어깨가 추워 보였다. 결코 추울 리 없는 한창때의 봄인데도.
그 뒷모습에서, 연희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 * *
연희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연희가 '청룡각'이라는 중식당에서 주말 파트타임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기도 했다. 청룡각은 주택가에 자리 잡은 어정쩡한 위치와 소박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맛집이었다.
"정 회장님 댁은 한 시간쯤 뒤에 오신다네. 어제 말한 건 준비됐죠?"
홀 매니저가 들러 주문표를 확인했다. 연희가 홀에서 정리한 접시를 주방에 전하고 있을 때였다.
"원래 예약 손님은 안 받는다면서 매번 여기만 예외네요?"
"정 회장님은 좀 특별한 손님이라 그래. 여기 사장님이 예전에 그 집안 전속 요리사로 일했었대."
주방보조인 한철과 주방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홀 매니저가 남기고 간 주문표를 슬쩍 보았다. 기본 코스에 없을 뿐 아니라 평소에 식당에서 아예 만들지 않는 요리들까지 수기로 적혀 있었다. 표고버섯튀김이나 은이버섯 수프 같은.
버섯 성애자인가?
"오늘 매화실 서빙은 내가 맡을게."
카운터를 주로 보는 홀 매니저가 직접 서빙을 전담하고, 한동안 주방에서 손을 떼었던 사장이 팬을 직접 잡을 정도라니 엄청난 귀빈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 뒤 홀 매니저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둔 곳에는 체격이 건장한 노인과 세련된 옷차림의 중년 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랄해 보이는 연희 또래의 여자가 그 뒤를 따랐고, 마지막으로는 제법 큰 키의 젊은 남자가 멀찍한 간격을 둔 채 따라 들어왔다.
마지막에 선 남자는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농담을 던지고 웃을 때 그만은 웃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묵묵히 걷는 모습이 가족이라기보다는 수행원이나 비서처럼 보였다.
연희는 그 일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단한 집안을 마주한다는 신기함 때문이 아니라, 이물질처럼 튀어나와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우묵한 눈으로 바닥만 응시하던 남자가 연희의 시선을 느낀 듯 식당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눈매도 코도 지나치게 반듯해 잘 만든 인형처럼 보였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식당 안에서 그 남자만 고요했다. 모두가 한 공간에 있는데 그 사람만 다른 시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탁.
문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매화실 문이 닫히기 직전, 남자의 굳은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을 보았다.
바쁘게 오가면서도, 연희의 눈길은 잠깐잠깐 매화실에 머물렀다. 잠시 미닫이문이 여닫힐 때마다 눈에 띈 남자는 그저 고요했다.
남자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앞접시에 담긴 요리를 정갈하게 집어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 안의 음식을 씹어 삼켰다. 먹는다기보다는 어떤 의무를 행하는 몸짓이었다.
2년 전에 연희가 처음 본 선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학교 밖에서, 선우는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