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화 (5/98)

<4>

"잘 생각했네."

그러나 표면적으로, 선우의 얼굴에 걸린 것은 그저 온화한 미소였다. 무거운 공기를 단번에 몰아내는, 초여름에 반짝이는 나뭇잎처럼 몹시도 싱그러운 웃음.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선우가 보나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과방에서 원준이가 너 기다리는 것 같더라."

"그래요?"

보나가 서둘러 구겨진 블라우스를 폈다.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살짝 옆으로 돌아간 치마를 바로 했다.

"나 과방에 가볼게. 너희들 먼저 카페에 가있어."

보나가 자리를 정리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연희는 선우를 보았다. 선우의 시선은 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그렇게 계속. 뽀얗게 날리는 먼지만 아니면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거짓말인데."

마침내 입을 연 선우가 정지된 시간을 깨뜨렸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소의 잔여물로 남아있는 채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 아닌데?"

다시 고개를 들고 마주한 선우의 눈은 나른하고 어두웠다.

"너무 시끄러웠다고 했잖아."

선우가 자신의 오른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말했다. 보나의 어깨에 닿았던 손이었다.

"나가면서 불 좀 꺼줄래?"

축객령을 내린 선우가 다시 구석진 곳을 향해 올라섰다. 겹겹이 쌓인 의자 뒤로 선우가 사라졌다.

조명 버튼을 누른 후 연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책상 위에 얹은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선우가 보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아니었다면 끝내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연희는 문을 완전히 닫아주었다.

* * *

"학교, 계속 다닐 거니?"

"……."

교수실로 연희를 불러들인 은경이 한숨을 쉬었다. 공식적으로는 학생 상담주간에 매칭된 학생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학과에서 너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들은 전해 듣고 있다. 하나같이 질이 안 좋던데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건가? 내 귀에 들어오라고?"

"…아니요."

"차라리 학교를 옮기는 게 너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것이었으리라.

은경은 연희의 지도교수이기 이전에 연희를 낳은 어머니였다. 다만 연희를 길렀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함께 살던 시절에는 연희를 방치했고, 연희가 여섯 살일 무렵에는 말없이 집을 나갔고, 그 이후로는 연희와 얼굴 한 번 마주한 적이 없었다.

연희가 학교에 입학해서 그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 은경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빨리 무표정한 가면을 되찾아 쓰며 자신의 진짜 속내를 가린 그녀는, 그 뒤로 철저히 연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찬 바람이 쌩쌩 부는지, 연희가 은경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연희와 관련된 첫 소문이었던 셈이다.

"공식적으로 네 아버지와 나는 원만하게 합의이혼을 한 사이야. 알지?"

일방적으로 떠난 은경이 이혼 서류를 보내 왔을 때, 연희의 아버지는 두말없이 그녀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원치 않게 이룬 가정 때문에 커리어를 망치기 싫다는 은경의 전언 때문이었다.

"네."

"그런데 왜 다 끝난 인연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 걸까?"

연극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는 은경은 작년부터 새로운 연인과 교제를 시작했다. 상대는 취미 삼아 문화예술 제작 사업에 발을 들인 재벌가의 자제라고 했다. 나이 차는 제법 있었으나 화려한 외모가 쌍둥이처럼 닮은, 외견 상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은경은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이른바 '성공한 여성'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실패한 첫 결혼 생활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가 노출될 위험요소라는 점에서도 연희는 그녀에게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난 너희 부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도 은경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마주해보고 싶었다는 말은 가슴 속에나 묻어두어야 할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요즘에는 작품만 잘 만든다고 대중에게 인정받을 수가 없어.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사생활이며 사상까지 유난 맞게 따져보는 시대잖니? 난 지난 일로 괜한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도 않고, 제자들 입에 이런 문제로 오르내리기도 싫다."

은경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온 은경은 여성의 사회참여 독려 활동뿐 아니라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문제에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사람이었다. 정작 자신이 아이를 방기했다는 말이 돈다면 애써 만든 모범적 이미지에 금이 갈 터였다.

"이 학교에서 네가 내 딸인 건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거, 알지?"

몇 번이나 같은 당부를 들었다. 연희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걱정 마세요."

"그래. 제발 널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렴."

무관심이 미움보다 낫긴 한 걸까? 연희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 * *

[오늘 저녁 7시 사회대 7051강의실로 모여주세요. 축제 관련 학과 회의 있습니다.]

학회장 이름으로 온 메시지를 보고 연희는 한숨을 쉬었다. 빠지고 싶은데 빠질 수가 없었다. 학과장이 축제 기간 동안 자신의 수업 출석을 축제에 참여하는 것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학점에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까지 날렸다. 관련 회의에 출석하고 축제 참여 사진을 제출하는 것이 정식 과제가 되었다.

연희는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까지 학교에서 버티려면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망가진 위는 한 끼를 거르거나 작은 충격을 받기만 해도 고통을 호소하기 일쑤였다.

"지연희 왔다."

식판을 챙겨든 연희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웬일일까? 평소에는 학생식당에 걸음 하지 않던 보나가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네 쌍의 눈이 나란히 연희를 쫓았다. 지난 번 강의실에서, 비교적 소극적으로 굴었던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보나의 권력은 그런 식으로 강화되었다.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버리고 다시 받아주는 행위를 통해 상대와 주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연희를 헐뜯는 목소리들이 평소보다 컸다.

"짜증 나. 쟨 학교 왜 안 그만두니?"

"눈치도 없나 봐."

하필 빈자리는 보나의 바로 옆 테이블뿐이었다. 별 수 없이 그곳에 앉았다. 식판에 든 음식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모래알 넘기듯 삼키고 있을 때,

"그래도… 혼자 다니는 거 보면 불쌍하잖아."

경미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기분이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다.

"하긴, 저렇게라도 버티겠다는데."

"용쓰는 꼴이 안타깝다."

아무리 태연함을 가장해도, 선심 쓰듯 내뱉는 동정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 연희 스스로 작아진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소한 행동 하나도 트집 잡히고 조롱받다 보니 무엇을 해도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덤덤한 표정을 연기하는 짓이 얼마나 우스운가 싶고.

손이 조금 떨렸던 걸까? 식탁이 흔들리더니 가장자리에 걸려있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

"야, 다 들었나 보다."

곧바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남의 남자한테 꼬리치고 돈이나 훔치면서 살랬나?"

"이건 뭐, 자존심도 없고. 양심도 없고."

떨어진 젓가락만 노려보다가 몸을 굽혔다. 저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먹던 것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었다. 젓가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먼저 젓가락을 대신 주워들었다. 젓가락이 다시 연희의 식판 옆에 놓였다. 더는 허리를 굽힐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연희도 자연스레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

"새 젓가락으로 바꿔 줄까?"

익숙한 목소리가 연희의 인사를 막았다.

남자가 등지고 선 조명 때문에 눈을 좁히자, 좁아진 시야 속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이 보였다. 친절한 웃음을 머금은 그는, 선우였다.

"이거 써. 새 거야."

선우가 식판과 함께 들고 있던 자신의 젓가락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곧 일어서려던 중이었어요."

"그래? 난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인데."

선우가 아랑곳 않고 연희의 앞에 새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오빠! 저희랑 같이 드세요."

보나가 밝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선우를 불렀다.

"너희는 밥 다 먹어가는 것 같은데?"

"오빠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다 드시면 저희 커피 좀 사 주세요!"

조금 전까지 비아냥거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천진하고 귀여운 말투가 풋풋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괜찮아. 난 그냥 여기 앉을게."

선우가 연희의 테이블에 식판을 내렸다.

"에이~. 혼자 드시면 심심하잖아요."

보나가 옆자리 의자를 빼며 손짓했다.

"혼자 먹는 거 아닌데?"

"네? 누구랑 같이 오셨어요?"

동그래진 눈들이 선우 주위를 살피자, 선우가 숟가락으로 연희를 가리켰다.

"얘 있잖아."

이번엔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희가 나 먹을 때까지 같이 있을 거야."

"……."

"기다려 줄 거지?"

선우가 연희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무안해진 보나 일행이 떨떠름하게 인사하고는 슬금슬금 식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그들에게도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진짜 기다려야 하는 건가?

선우를 바라보던 연희가 몸을 일으켰다. 선우의 고개가 다시 연희 쪽으로 돌아왔다.

"안 기다려주게?"

"아니요."

"그럼?"

"선배 젓가락 새로 갖다 드리려고요."

"됐어."

선우가 엉거주춤 서다 만 연희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연희가 놀라 얼어붙었다. 그 반응에 선우도 놀랐는지, 재빨리 손을 떼어냈다.

"이따가 해."

"……."

"쟤들 지금 일어서잖아."

선우가 연희의 맞은편에 앉으며 작게 말했다.

"지금 나가면 쟤들이랑 또 부딪혀야 할 텐데. 괜찮겠어?"

배려해주는 건가?

"또 싸우게? 그럼 난 재미있게 구경하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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