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3)화 (4/98)

<3>

『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합니다. 』

연희가 서둘러 달려온 강의실에는 휴강 공지만 덜렁 남아 있었다. 불 꺼진 계단식 강의실이 어둡고도 적막했다

이전 강의 때 교수가 따로 전달한 사항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의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조교를 통해서든 과대를 통해서든 별도 공지가 있었던 것이리라.

하긴 자신만 빗겨나간 소식이 한두 번 있었던가. 숨을 고른 뒤 강의실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문 밖에서 뻗어 온 손이 연희를 강의실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곧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 앞쪽에 걸린 조명등이 켜졌다.

"어…."

휘청대는 몸을 가누고 나니 눈앞에 보나가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연희에게만 휴강 공지를 하지 않았던가 보다. 주영 조교도 기꺼이 동조했을 테고.

"여기 있었네? 너랑 둘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 됐다."

한쪽 입꼬리만 끌어당긴 보나가 연희에게 다가섰다. 보나 뒤로는 그녀의 친구들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무슨 얘긴데 그래?"

"올해 원준 오빠가 학회장 된 거 알지?"

"그런데?"

"작년 학회비 구멍 난 거 때문에 곤란해 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훔쳐간 학회비는 대체 언제 돌려줄 거니?"

"그 학회비, 내가 안 훔쳤다니까?"

작년부터 이미 몇 번이나 주고받은 말들이었다.

"네가 훔친 걸 본 사람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알면 가서 따지게?"

"그럼 억울하게 당하고만 있으란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난 그날 과방에 들어간 적도, 금고를 만진 적도 없어."

보나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너도 참 얼굴 두껍다. 그러니까 원준 오빠한테도 꼬리친 거겠지만."

"오해라고 했잖아. 그건 원준 선배가,"

"그만!"

말을 막은 보나가 눈만 굴려 주변 친구들을 한번 보고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가녀린 어깨를 늘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친구에게 배신당한 가련한 피해자였다.

"왜 이렇게 자존심을 세워?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록 누가 힘들어지는지 모르겠어?"

애초에 보나는 연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2년 전, 연희가 원준과 단둘이 만나는 걸 본 이후로 쭉 그랬다.

그날 원준이 뭐라고 문자를 보냈더라? 술자리에서 보나가 몹시 취했으니 도와달라고 했던가? 울면서 연희를 찾고 있다고도 했었다.

연락을 받고 나간 자리에는 원준 혼자 앉아있었다.

"그냥, 네 얼굴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돌아서려 했을 때 원준이 연희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했다. 억지로 잡아온 손을 미처 떨쳐내지도 못할 정도로.

하필 그 자리에 들어서던 보나 무리를 마주친 것은 또 무슨 우연인지. 원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거짓을 말했다.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와봤더니 연희 혼자 있지 뭐야?"

그날부로 연희의 마음속에서 원준은 개자식이 되었다.

"왜 원준 선배 말만 믿는 건데?"

"원준 오빠 마음 약한 건 내가 잘 알아. 자꾸만 엉겨 붙는 너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라. 내 친구라 차마 말도 못하고."

기가 차니 외려 웃음이 샜다.

"잘 알아보고나 말해. 원준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그날 원준은 엿 같은 말을 몇 가지 더 했었다. 여자 친구가 있어도 매력적인 여자가 있으면 끌리는 건 남자의 본능이라고. 자신의 관심을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면 안 되겠냐고. 손해 볼 것도 없다고.

다른 애들도 그랬다고.

하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대담했을 것이다. 연희를 불러낸 술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과 사람들도 종종 찾는 곳이었다. 그때까지 들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네가 조금만 생각이 있어도 원준 선배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챘을걸. 이럴 시간에 진짜 상대를 찾아보지 그래? 한 둘이 아니겠지만."

입을 꾹 다문 보나가 눈에 띄게 부들거렸다.

"힘들면 잘난 친구들한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하든지. 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잖아."

보나의 친구들이 수군댔다. 독하고 뻔뻔한 것 좀 보라고. 그러니까 친구의 남자 친구도 뺏을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난 더 할 말 없으니까 가볼게."

연희가 빠르게 걸음을 떼자, 보나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가 문가에 서 있던 경미를 향해 외쳤다.

"잡아."

"응?"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경미가 눈을 끔뻑거렸다. 한때 연희의 친구이기도 했던 경미는, 보나와 함께 다니는 무리 중 타인의 말에 가장 잘 휘둘리는 이였다.

"못 나가게 잡으라니까?"

짜증스러운 음성을 뒤로 하고 연희는 강의식 문턱을 밟았다. 한 걸음만 디디면 복도였다.

순간, 연희의 어깨가 뒤로 확 젖혀졌다. 신경질적인 재촉을 못 이긴 경미가 저도 모르게 연희를 강하게 잡아챈 것이었다. 제풀에 놀란 경미가 얼른 손을 떼었다가, 다시 연희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 얘기 안 끝났는데, 가긴 어딜 가?"

보나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양, 나머지 친구들이 연희에게 바싹 다가섰다. 군중심리에 기댄 까만 눈들이 적의 혹은 흥미로 반짝거렸다.

"네가 이렇게 혼자 잘난 줄 알고 매번 사람 말을 무시하니까 따돌림을 당하는 거야."

"뭐?"

기가 막혔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무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는 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그 이유가 피해자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금까지는 학과 생활이 그럭저럭 버틸만해서 이러나 본데, 두고 봐. 지금까지는 예고편이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보나가 연희의 뺨 위에 손을 얹고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악의가 담긴 부드러운 손짓에 소름이 끼쳤으나 양 팔이 잡힌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대학생씩이나 돼서 언제까지 이렇게 유치한 '왕따 놀이'를 할 거냐고 비웃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피해자가 자신일 때는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유명 예술재단 이사장을 아버지로 둔 보나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었고 학과 내의 분위기메이커였다. 자신의 마음에 들면 재단에 입사시켜 줄 수 있다는 암시를 종종 던지기도 해서 딱히 내세울 점 없는 졸업 예정자 중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보나의 비위를 맞추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보나를 잘못 건드리면 최소 2년은 피곤해진다는 말도 있었다. 그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연희였고.

얼마나 더 괴롭히겠다는 걸까? 지금까지 갖은 조롱과 험담 속에 밀어 넣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날선 말들이 귓가를 떠돌았다. 있을 곳을 찾지 못해 서성이던 걸음, 외면당하던 시선, 혼자 남은 그림자가 눈앞을 검게 만들었다. 꽉 붙잡힌 양 팔이 갑갑하고 저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마저 가빠질 때였다.

"그만하지?"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계단식 강의실의 가장 뒤쪽, 어둠이 뭉쳐진 벽 모서리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일렁였다. 구석에 높이 쌓인 의자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책상 끌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좀 쉬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선우 오빠가 왜 여기 있어요?"

남들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독 신경 쓰는 보나였다. 특히 그 '남'이 저보다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면.

보나의 낯이 하얘졌다. 제 편만 있을 줄 알고 마음껏 성격을 드러냈는데 변수가 생긴 것이다. 연희의 뺨 위에 머물던 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들 모여 계실까?"

단 몇 걸음 만에 계단을 내려온 선우가 연희를 붙든 경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자연스럽고도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기도 했다. 경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만들 하지?"

가벼워진 팔의 무게를 실감하고서야 비로소 시야에 선우가 잡혔다. 선우의 단단하고도 넓은 가슴을 보면서, 연희는 천천히 호흡을 되찾았다.

"어…."

보나가 눈알을 굴리며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다분히 누군가를 의식하는 행동이었다.

"내가 좀 나답지 않게 굴었지? 미안해."

보나가 연약한 목소리를 냈다. 틈틈이 선우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널 워낙 믿고 아꼈잖아. 그런데 네가 자꾸 거짓말만 하니까 나도 모르게…."

"너도 모르게?"

"그래. 우연히 만난 김에 대화를 좀 해보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과민하게 구니까 나도 흥분한 것 같다."

'우연히'가 아니었다. 일부러 연희를 혼자 있게 만들었다. 제가 가진 집단의 힘을 빌려 모욕 주고 무릎 꿇리려 했다.

"사과 한 마디면 될 걸 연희 너도 참 그렇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해?"

"…너야말로 제대로 사과하지 그래?"

"뭐?"

"근거도 없이 나 몰아세운 거, 제대로 사과하라는 얘기야.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네 탓이 우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에 적당히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연희가 강하게 나오자 보나의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봤죠?"

보나가 선우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이 같잖은 화해의 연극이 피해자가 아닌, 목격자를 위한 행동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얘가 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어떻게 화가 안 나겠어요? 오빠, 얘가 어떤 애인지 아세요? 글쎄…."

"그만."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보나의 말을 막았다.

"굳이 나한테 뭘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 없어."

보나는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듯했다. 모두 이해한다는 배려인지, 껄끄러운 상황에 끼기 싫다는 귀찮음인지.

이윽고 자신이 편한 대로 결론을 내린 보나가 한발 물러섰다.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에 천천히 다시 이야기하자."

자신의 너그러움을 자랑하듯, 보나가 선우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연희는 확실히 보았다. 일순 선우의 얼굴에 스친 경멸을. 미소 띤 입술 아래 숨긴 감정은 분명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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