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2-2)화 (3/98)

대과거 

대학에서 연희가 선우를 처음 본 것은 갓 3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3월이 되자마자 지독한 감기몸살과 위통에 시달렸다. 덕분에 2주를 쉬고 나온 학교에는 드문드문 낯선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지금 연희를 스쳐 지나가는 긴 생머리의 미인이 그랬고.

"혜진아, 빨리 좀 와!"

"선우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짓하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너 먼저 들어가서 앉아 있지 그랬어?"

"그래도 되는 거였어?"

혜진도, 선우도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들 같았다. 백도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와 결 좋은 머릿결, 부드러운 인상까지 판박이 같았다. 다만 작고 아담한 혜진과 달리, 선우는 185cm 언저리의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강의실 앞문에 기대어 선 모습이 여유롭고도 당당해 보였다.

"김선우! 나는 안 챙기냐?"

혜진의 뒤를 쫓아오던 동훈이 선우에게 가벼운 타박을 했다. 동훈과 선우는 체격이 비슷했으나 이미지는 전혀 달랐다. 자유분방한 몸짓의 동훈이 장난스러운 소년 같다면, 절제된 몸짓과 표정을 구사하는 선우는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굳힌 어른 같았다.

"와. 저 사람들이 그 유명한 '선동혜'예요? 연예인이 따로 없네요."

"셋이 나란히 휴학하더니 복학도 동시에 하네. 앞으로 눈은 즐거워지겠네."

"아, 동훈 형이랑 선우 형은 군대 다녀왔다고 했죠? 그럼 혜진 누나는 왜 휴학한 거예요?"

"학교 같이 다니려고 그런 거겠지, 뭐. 하여튼 유난들이라니까."

앞서 걷는 선배와 새내기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이 들렸던 걸까? 혜진과 동훈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선우는 여전히 문가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잠깐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우가 그네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주 반갑다는 듯이.

"안녕?"

"어…어! 안녕?"

잘못 본 건가? 분명 냉랭한 눈초리로 훑어봤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짧은 호기심은 금방 잊히고 말았다. 앞에 선 사람들의 화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우리 과에 선남선녀가 많네요. 보나 누나나 원준 형도 그렇고, 연희 누나도…."

"야.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데, 보나 앞에서 그런 얘기 하면 큰일 난다. 지연희의 '지'자도 꺼내지 마."

"왜요?"

"신입생이라 잘 모르나 보구나? 연희 걔 소문이 좀 지저분해. 보나랑 꽤 친했는데도 보나 남자 친구한테 몰래 작업 걸다가 들켰대."

"원준 형한테요? 와…. 우리 학과에서 그러면 완전 매장되는 거라면서요."

"안 그래도 그전부터 선배들한테도 단단히 찍혀 있었거든…. 주영 조교님이 학회장일 때, 학생회비 유용으로 학생인권위에 신고했는데 별 증거가 없었다더라고. 그래놓고 자기는…."

탁.

두 사람이 강의실 문 앞에 당도하기 직전, 갑자기 문이 닫혔다. 선우가 강의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문을 닫아?"

고개를 갸웃한 선배가 문고리를 몇 번 돌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고장 났나? 왜 문이 안 열리지?"

하는 수 없이 뒷문을 향해 방향을 틀던 선배가 등 뒤에 서 있던 연희를 발견했다.

"어…. 너도 이 수업… 들었었나?"

당황한 얼굴을 무시하고 연희도 뒷문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 나 눈으로 욕한 것 같지 않아?"

"에이, 설마요."

"하여튼 버릇이 없어. 얼굴만 반반하면 뭐해? 인상이 날카로우면 좀 웃고 다니기라도 하던지…."

지레 찔려서 투덜대는 뒷말이 들렸다.

연희가 다니는 H대 미학과는 모집인원이 극히 적어서인지 예체능 계열 못지않은 군기와 단합을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몇 명 되지 않는 학과생 모두가 학과에서 운영하는 전공 학회에 강제로 가입되어야 했고, 숱한 학과 모임과 수업 외 활동에도 무조건 참여해야 했다. 그때마다 교수와 학생들은 우리가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라고 자랑하듯 외치곤 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 밖에는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 겉돌거나 조직에서 내쳐져 비난받는 사람이 있었다. 연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단순히 비난만 받으면 다행인데, 악의 섞인 헛소문까지 널리 퍼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소문 속에서 더럽게 엮인 원준이라도 군대에 가면 좀 나아지려나 했건만.

"참, 원준 형, 재검에서 군 면제 받으셨다면서요?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무릎 연골 때문에 수술했었다던데? 하여튼 요즘 보나 신경 날카로우니까 조심해라. 원준이랑 연희랑 또 엮일까 봐 전전긍긍이더라."

사실 연희를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바람기 많은 남자 친구의 끼부림을 연희 탓으로 돌려버린 보나, 학부생 때 고발당한 일을 마음에 담아둔 주영, 그들과 절친한 몇몇 사람들.

다만 연희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연희를 자신의 무리에 끼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학과 분위기를 꽉 잡고 있는 보나와 원준의 눈치가 보여서인지, 울타리 밖으로 손을 내밀다가 자신까지 떠밀려나갈까 불안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희 역시 굳이 사람들 사이에 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겉으로 친절했던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는 연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같이 다니다가 우리까지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보나나 원준이랑 부딪히긴 좀 부담스럽잖아."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글쎄. 걔들은 몰라도 주영 조교님한테는 찍힐 것 같던데?"

"헐, 몇몇 교수님 강의는 주영 조교님이 대신 시험지 채점한다는 소문 있지 않았나? 괜히 불이익 당하는 거 아니야?"

연희는 차라리 혼자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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