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희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무서우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역시나. 다정하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목소리라도 좀 덜 감미롭던지.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거절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으면서도 이상하게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또 뭔데요?"
23살의 연희는 31살의 연희보다 훨씬 더 어리숙했고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선우는 연희의 그런 점을 일찍부터 알아본 이였다.
"지수라는 애 혹시 아니? 올해 신입생인데."
"그런데요?"
"네가 걔한테…."
경험상 선우가 저렇게 뒷말을 끄는 건 아주 위험했다.
"…말하지 마요."
연희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봤자 같은 강의실, 바로 옆에 앉은 선우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네가 걔 좀 막아주면 안 돼? 나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연희가 멀어진 만큼 바싹 더 다가온 선우가 연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눈알을 굴려 오른쪽 뒤편을 가리켰다. 과연, 그쪽에서 유독 강하고 애절한 눈빛이 선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애절함은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건물 벽도 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졌지만.
"자꾸 이럴 거예요?"
"그동안 내가 너한테 베푼 온정을 떠올려 봐."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한텐 충분하지 않았는데?"
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얻은 것들을 생각해 봐."
사실이긴 했다. 선우가 찍어주는 시험문제 적중률이 족보보다 5배는 훌륭했다. 조별발표나 과제는 또 어떠한가? 선우가 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평소의 1/10 정도만 노력해도 놀라운 효과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연희에게 따라붙었던 악의적인 소문들은 누가 다 잠재워 주었던가.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선배 연애 문제에 내가 왜 관여해야 하는데요?"
"알잖아. 내가 말해봐야 소용없는 거."
"매번 착한 척하면서 '네 생각보다 내가 많이 부족하다', '너는 더 좋은 사람이 어울린다' 이딴 말이나 하니까 그렇잖아요!"
"그렇다고 직접 대놓고 '넌 나한테 부족하다'고 말하면 얼마나 상처 받겠어?"
"나한테 하는 거처럼 솔직하게 굴어요. 정이고 뭐고 금방 떨어질 테니까."
"안 돼. 난 이미지 관리해야 해."
"내 이미지는요?"
"넌 이미 나쁘잖아."
선우가 얄밉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물론 '얄밉다'는 건 연희나 알아볼 만한 것이고, 사정 모르는 이들은 '천사 같은' 미소라고 일컫는 표정이다.
"설사 내가 선배랑 특별한 사이라고 말해도 안 믿을걸요. 한두 번 써먹었어야지."
매번 과정은 같았다. 연희가 나서서 선우와 뭐라도 있는 것처럼 굴면 상대가 '정말인가?' 하며 한발 물러선다. 연희와 선우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일이 많으니 연희의 말이 그럴싸해 보일 것이고, 이 좁디좁은 학과의 철칙은 남의 애인을 넘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밀려드는 소개팅 제안을 선우가 거절하지 않는 데다, 연희도 그런 선우를 제지하지 않는다. 연희가 옆에 있어도, 선우의 여자 친구는 쉴 새 없이 바뀌어 간다.
관찰할수록 별것 없는 관계라는 게 밝혀질 때쯤엔 보통 상대의 감정도 시들해진다. 왜냐하면 그때쯤엔 선우가 제게 보인 미소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그저 형식적인 예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 선우를 찾아오는 -더불어 올 때마다 사람이 바뀌는- '진짜' 여자 친구를 한 번이라도 본다면 감히 도전할 용기조차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미모든, 재력이든 범상치 않은 사람들뿐이었으니.
결국 '고백하지 않길 잘했어', '괜히 선배 곤란하게 하고 나도 쪽팔릴 뻔했네.' 같은 결론이 남는다.
그래서 선우가 학과 내에서 공식적으로 직접 고백을 받은 횟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전혀 없지는 않아서, 선우는 가끔 연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진짜든 가짜든 간에 다른 학교에 여자 친구가 있다는 핑계를 대도 될 텐데 선우는 꼭 연희에게만 곤란한 부탁을 했다. 존재를 확인하기 힘든 다른 학교의 누군가보다는, 눈앞의 연희가 훨씬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연희는 '김선우 스토커'로 공식 인정받고 말았다.
그런데도 선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말대로 저 역시 도움을 받은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필 유독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선우가 있어주었기 때문에. 이쯤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내민 손이 든든했기 때문에.
"아냐. 지금 쟤 눈 보니까 믿을 거 같아."
"그러니까요. 눈에 불나는 거 안 보여요? 나 머리채 잡힐 거 같다고요."
내키지 않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연희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덕분에 효과는 더욱 확실해졌고. 선우는 그걸 참 재미있어 했다.
차라리 진짜 누구라도 진득하게 좀 만났으면.
하긴, 선우에게 정말 소중한 누군가 생긴다고 해도 그가 하는 요상한 부탁들은 여전히 연희의 몫이 될지도 몰랐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무 데나 아무렇지 않게 써먹지는 못할 테니까.
연희가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문제의 후배가 따라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어떤 아침드라마 멘트를 날려야 하려나?
"구경 가고 싶은데 아쉽다."
선우가 입 모양으로만 '파이팅'을 외쳤다. 톡톡, 한 쪽 다리를 흔드는 소리가 어쩐지 경쾌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