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그러니까 저를 부르신 이유가… 부사장님이 사라졌단 얘기를 하시려고…."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연희가 처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일어선 남자가 그대로 없어졌다니까요?
테이블에 몸을 바싹 붙인 수정이 궁금하지도 않은 앞뒤 정황을 덧붙여 설명했다.
"심지어 그날은 싸우지도 않았다고요."
"…그러셨군요."
할 말이 없어 대충 긍정했더니 수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이 약속 시각에 약간, 그러니까 1시간 반쯤 늦긴 했지만 그 정도야 자주 있는 일이었다고. 남자도 그 부분은 깔끔히 포기한 지 오래였다고. 이제 와서 화가 나 연락을 끊을 리는 없지 않겠냐고. 아무리 사랑보단 계약에 가까운 결혼을 앞둔 사이라지만 일언반구 없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진 게 황당해 죽겠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딴 건 안 궁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황당하다고 웃을 수도 없고.
수정의 약혼자가 사라진 건 모처럼 온전한 휴일을 맞이한 연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연희는 수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수정의 약혼자'인 김선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지금'의 김선우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남의 일일 뿐이었다.
"지연희 씨? 지금 제 말 듣고 있어요?"
"네."
이런 일로 수정이 자신을 찾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수정과 연희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기는 했다. 두 사람은 '수형문화재단'이라는, 같은 회사에 소속된 몸이었다. 하지만 결코 동료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연희가 회사를 드나드는 이유가 '돈을 벌려고'라면, 수정이 회사를 드나드는 이유는 '아버지의 회사여서'였다. '대외협력실장' 직함은 있었지만, 일개 말단직원인 연희로서는 정확히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프로젝트 좀 잘 나간다 싶으면 왜 그렇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거야? 잘못되면 책임 질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든 숟가락은 얹어야 자기도 일 좀 한다는 소리 들을 거 아냐."
가끔 이런 속삭임이 들리긴 했다. 물론 그런 속삭임은 수정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뚝 그쳤다. 이사장이 그리도 귀애하는 딸 앞에서 누군들 바른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연희는 그녀에 대한 말을 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왔다. 직접 대화 한번 안 해본 사람을 제멋대로 판단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그녀와 제대로 대화한 지 30분도 안 돼서 떠도는 말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졌다. 귀엽기보다는 가벼웠고, 도도하기보단 오만했다.
"결혼식도 몇 개월 안 남았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정말."
반말과 존댓말을 왔다 갔다 하던 수정의 말투가 점점 반말 쪽으로 기울었다. 연희는 앞에 놓인 자몽차를 들이켰다. 씁쓰레한 뒷맛이 혀끝에 달라붙었다.
"결혼하면 문화재단하고 패션 사업은 내가 받기로 했는데 이러다가 다 엎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종합선물세트에서 과자 뽑아 먹는 것도 아니고. 재벌가의 결혼 선물은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연희는 자신이 결혼 선물로 받았던 옷이나 문화상품권, 외식상품권 따위를 떠올렸다. 몇 장 안 되는 문화상품권과 외식상품권은 진즉 다 써버렸고 지나치게 화려한 옷들은 이혼할 때 모두 버렸다. 남은 거라고는 누군가가 잘못 보낸 게 분명한 익명의 축의금뿐이었다. 언제 돌려달라고 할지 몰라 통장 안에 고이 모셔두고만 있는.
"게다가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 봐. 다들 내가 차였다고 쑥덕거릴 텐데. 쪽팔려서 어떻게 사냐고?"
수정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감정의 진폭에 따라 만들어 내는 소리가 참 다양한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바늘 같은 시선을 느끼면서, 연희는 슬쩍 얼굴을 가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드디어 본론을 말하는 건가 싶어 수정을 보았다. 수정 역시 그런 연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샘 작업으로 거칠어진 피부와 기미가 낀 눈가, 스트레스로 어둑해진 낯빛 따위를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깡마른 팔과 다리까지 천천히 스캔한 그녀가 다시 연희를 보고 미소 지었다. 연예인 뺨치게 화려한 이목구비에 미소까지 더해지자 그 나이다운 귀여움과 발랄함이 떠올랐다.
그 남자가 왜 선택했는지 알 것 같기도….
"남편하고 이혼할 때 끝이 꽤 추잡했다면서요."
아니다. 모르겠다. 그 남자의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모르겠다.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럼 지금 만나는 사람은 따로 없나요?"
이 여자가 난데없이 남의 사생활에 왜 관심을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없습니다."
"왜요?"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대답했다.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서요."
무시하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도, 수정이 이사장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눈에 들고 싶지도 않았지만 모나게 구는 직원으로 각인되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전 퇴사한 장 차장만 해도 수정의 면전에서 바른 말을 하다가 쫓기듯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일단 주어진 질문에는 대답하되, 이곳을 나가자마자 이 어이없는 해프닝을 잊는 게 연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흐음…."
진실을 말하는지 가늠하듯, 연희의 표정을 관찰하던 수정이 이윽고 어깨를 으쓱했다.
"할 수 없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남녀관계에는 촉이 좀 발달한 편인데, 적어도 지연희 씨가 남자한테 질린 건 믿어지거든요."
"네?"
"그래서 그 정도로 그냥 넘어가려고요."
대체 뭘 그냥 넘어간다는 건데?
"그러니까 찾아서 데려와요."
수정이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연희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요?"
"누구겠어요? 내 약혼자, 김선우지."
"네?"
한숨이 나왔다. 휴일에 뜬금없이 불러내 얼토당토않은 과업 지시를 남기는 직장 상사라니.
게다가 문제의 남자 김선우는, 연희가 다시 만날 일 없는, 정확히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제가 J호텔 부사장님을 왜… 아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수정이 코웃음을 쳤다. 장난하지 말라며 손사래까지 쳤다.
"대학시절에는 선우 씨 있는 곳을 귀신같이 잘 찾아낸다고 유명했다면서요? 선우 씨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고 누가 그러던데."
8년 전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연희의 낯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 씨는 연희 씨한테 그런 쪽으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
"그런 사람이랑 또 엮여서 행사 준비까지 하느라, 연희 씨도 속이 편치는 않았겠어요. 그죠?"
그 '행사'란 것이 자선바자회를 가장한 선우와 수정의 약혼식이었다. 바자회 수익이 수형 문화재단 이름으로 기부된다는 명분만 아니었다면, 연희가 행사에 발을 들일 일도 없었을 텐데.
"편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저에게 행사 의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요."
단호하게 말했으나 수정은 달리 생각하는 눈치였다.
"흠. 그렇다기에는… 또 내가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
대체 무엇이 걸린다는 걸까?
"내가 오늘 왜 지연희 씨를 찾아왔는지 알아요?"
"아니요."
"그 사람 집을 샅샅이 뒤지다가 고물 휴대폰을 하나 찾아냈거든. 비번이야 본인 생일이라 어렵게 풀고 말 것도 없었고."
…본인 허락 없이 그래도 되나?
며칠 전 사내에서 의무교육이라며 이수했던 개인정보보호 교육이 떠올랐다. 재단 직원이면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고 해서 소중한 두 시간을 날렸는데, 사주의 가족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나 보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가 딱 두 개 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당신 거였어."
수정이 손가락으로 연희를 콕 찍었다
"…잘못 저장하신 모양이죠."
설마. 연희의 등에 슬슬 식은땀이 어렸다.
"전화도 안 되는 관상용 휴대폰에 굳이 당신 번호를 잘못 저장할 이유가 뭔데?"
무슨 꿍꿍인지 알 게 뭔가? 그저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럼 나머지 번호로 연락해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저보다야…."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러지."
수정이 단호히 말을 끊었다.
"왜…."
"죽은 지 벌써 20년은 된 사람이거든."
이게 무슨 소리지?
작게 입을 벌린 연희에게 수정이 제안했다.
"계약기간이 2개월 남았다지? 그때까지 할 수 있는 만큼 해봐요. 이쪽 일에 전문인 사람도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박하려 했으나 수정은 여전히 제 할 말만 했다.
"찾아내면 정규직 전환 보장하고 성과에 따라 직급도 조정하는 걸로. 조건 괜찮죠?"
"……."
"연희 씨 사정이 딱해서 내가 기회를 주는 거야.
수정의 뒷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뒤져볼 만한 곳에 숨겨 둔 휴대폰. 집착 강한 여자 친구가 쉽게 풀 수 있는 비밀번호.
연희는 확신했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도, 이 모든 건 김선우가 계획한 일일 게 분명하다. 김선우가 끼면 늘 이랬다. 한 번도 일이 얌전하게 굴러간 적이 없었다.
또 이용당했다. 대학 때 질질 끌려 다니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