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 * *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구해주시고, 마도사 학교에도 입학시켜 주시고…….”
알현실 바닥에 무릎 꿇은 트리탄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나는 황금으로 만든 왕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누가 들으면 내가 권력을 남용한 줄 알겠구나. 네 힘으로 입학시험에 통과한 것뿐이다. 그것도 최연소, 최고점으로.”
“폐하께서 유민들을 백성으로 받아주시지 않으셨다면 시험조차 보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와 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남작의 죄를 몰랐을 거다. 내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도 몰랐을 테지.”
“폐하!”
“네 덕에 귀중한 백성을 여럿 얻었다. 성군이라는 칭송도 받았지. 참으로 고맙다, 트리탄.”
내가 진심을 담아 감사를 건넸다. 트리탄의 잘생긴 얼굴이 감동으로 일그러졌다.
“폐하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평생토록 충성하겠습니다!”
“너라면 훌륭한 마도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거든 내게도 보여주렴.”
“정진, 또 정진하겠습니다!”
어린 소년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다짐했다.
디에고의 무거운 짐을 덜어줄 수 있는 또 한 명의 천재가 탄생하길 기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네 성을 묻지 않았구나. 귀족인 것 같은데 어느 가문 출신이냐?”
“저는 사익스 모아니아 가문의 장자 트리탄입니다.”
“모아니아라면… 설마 왕족?!”
나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부끄럽다는 듯 트리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송구하옵니다.”
“그럼 왕에게 충언하다 돌아가셨다는 아버지는?”
“모아니아 국왕의 동생, 사익스 대공이셨습니다.”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무려 왕족일 줄이야.
나는 차가워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아한 미모의 소유자인 클로엘은 보통 귀족이 아니라 대공 부인이었다.
살로메디안을 오빠라 불렀던 꼬마 로라도 한때는 공녀 전하로 불렸을 테고.
“대공 부인께서는 왜 망명 신청을 하지 않으셨지? 그 신분이라면 어떤 나라에서도 받아주었을 텐데?”
“백성에게 망국의 설움을 안긴 죄인이 무슨 낯으로 망명을 청하겠습니까?”
“그래도 움막에서 무뢰배의 농지거리를 견디실 필요는 없었다.”
“모국이 패망하는 날, 신분은 사라졌습니다. 제 가족은 다른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폐하의 신민일 뿐입니다.”
트리탄이 소년답지 않게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의 신분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트리탄과 클로엘은 패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족으로서 고결한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들의 앞날을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모아니아 전대 왕비 전하와 내 어머니는 친분이 깊으셨다.”
“돌아가신 할머님과 폐하의 모후께서요?”
“그대는 내 어머니 친우의 혈족이니, 마땅히 예를 다하려 한다.”
“할머님께 아쿠아로드 왕실과 연이 닿아있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요?”
어리둥절해진 트리탄이 물었다.
다소 억지스럽기는 했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라 안팎으로 친구가 많으셨으니, 모아니아에도 한 명쯤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그 친구가 트리탄의 할머니가 아니란 보장도 없고.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트리탄을 바라봤다.
“소원을 말하라. 국왕의 이름을 걸고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마.”
“말씀을 부디 거둬 주십시오! 제 가족은 폐하께 이미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양하지 말라.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기리는 일이니.”
“폐하!”
“작위를 달라면 요직에 갈 수 있는 작위를 줄 것이고, 영토를 달라면 기름진 땅을 하사할 것이다. 거절은 거절하겠다.”
인생을 바꿀 행운이 닥치자 트리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트리탄이 겨우 입술을 뗐다.
“제 소원은…….”
어린 소년의 소원은 날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 *
살로메디안은 국왕 집무실에서 아이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의 집무실에 바바라가 똬리를 틀고 있지 않았더라면,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했을 거였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어린 소녀처럼 상기된 아이시아가 뛰어 들어왔다.
“예산을 대폭 줄이면서 축제를 치를 방법이 생겼어요!”
머리 위의 왕관이 조금 흐트러질 정도로 아이시아는 흥분한 상태였다.
뺨은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랐고 도톰한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살로메디안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밤하늘 별빛처럼 빛나는 아이시아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살로메디안이 속삭였다.
“조심해라. 뛰다가 다칠라.”
“좋은 소식을 얼른 전하고 싶어서요.”
“이 세상에서 그대보다 소중한 건 없다. 그걸 잊지 마.”
바바라가 고깝다는 듯 끼어들었다.
“대단한 사랑꾼 나셨네요. 시아랑 저는 국정을 논의해야 하니까 사랑꾼께서는 좀 빠져주실래요?”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뭐라 답하기 전에 아이시아가 바바라를 저지했다.
“살롬도 함께해야 해요. 축제 문제를 해결한 일등 공신이니까요.”
“살로메디안 공께서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 같은 천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전후 사정을 들으면 바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요?”
아이시아가 새초롬하게 웃었다.
그 도발적인 미소가 잠잠하던 살로메디안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은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시아. 날 추켜세워주는 건 좋은데, 내가 뭘 해결했다는 거지?”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이시아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살로메디안은 트리탄이 모아니아 왕족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이 모아니아 전통을 이용해 남작을 짓밟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살로메디안 공께 그런 지능과 지혜가 있다고요?! 말도 안 돼!”
“트리탄의 소원이 놀랍군. 보통 아이 같으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챙기기 바빴을 터인데.”
트리탄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점은 너무나 아이시아다워서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 꼬마애가 소원으로 모아니아의 전통문화를 선보이게 해달라고 했다고요?”
바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이시아가 갓 피어난 장미보다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것도 건국기념제에서요! 모아니아 말고도 고향 문화를 선보이길 바라는 사람들도 무척 많대요.”
“세드나로드는 다양한 이민자들이 함께하는 나라가 되었다. 건국기념제에서 소수민족의 문화를 널리 알리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바바라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과 그 이상일 거예요! 예산도 줄일 수 있고, 백성들의 자긍심도 하늘을 찌를 거라고요!”
“왕실의 품격도 올라가겠지.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문화를 인정하면서 융합을 도모하는 거니까.”
“놀랍도록 완벽한 계획이에요! 시아는 신이 내린 성군이세요! 국왕 폐하 만세!”
흥분한 바바라가 아이시아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불쾌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바바라의 손을 아내에게서 떼어냈다.
“슬그머니 남의 것 함부로 만지지 마라. 때 탄다.”
바바라가 도끼눈을 떴지만 잠시뿐이었다.
아이시아가 입술이 마르도록 살로메디안을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살롬은 대륙 각국의 문화에 정통해요. 빈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도량도 가졌고요.”
“칫. 살로메디안 공보다 시아의 활약이 훨씬 더 눈부신데요?”
“트리탄이 그랬어요. 대공 전하께서 모아니아 인형을 인정해줘서 그런 소원을 말한 거라고요.”
이래도 아니라고 할래요? 라고 묻고 싶은 듯 아이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 우물거리던 바바라가 씹어뱉는 것처럼 말했다.
“개똥도 가끔 약으로 쓴다더니. 살로메디안 공이 웬일로 밥값을 하셨네요.”
“바비도 그만 인정하세요. 살롬은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예요!”
“저도 시아에게 꼭 필요한 인재예요! 제가 궁정 파티 예산을 줄일 놀라운 방법을 생각해냈다고요!”
살로메디안이 모든 공을 차지할까 봐 두려웠는지 바바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예복에만 1000골드를 써야 한다면서요?”
“한 푼도 쓰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떻게 하려고요?”
“가면무도회를 하는 거예요. 최대한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복장으로요!”
* * *
건국기념제와 거리 축제는 백성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
“모아니아 출신들이 인형극을 한다며? 아쿠아로드 출신들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쿠엘 여신께 올리는 물의 기도 체험은 어때? 다른 민족들도 흥미를 갖지 않을까?”
“크로티무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소. 쌍두 드래곤 조형물을 초대형으로 만듭시다!”
소수민족은 물론 아쿠아로드와 크로티무스 출신 사람들도 고유한 문화를 자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고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에 더욱더 열성적이었다.
귀족들도 가면무도회를 반겼다.
“허례허식만 가득한 파티는 지겨웠는데 너무 잘됐어요!”
“아내와 딸 드레스에 들일 돈을 아낄 수 있으니 대만족이오. 내 딸은 나비 분장을 한다더군.”
“건국기념제의 취지를 살리면서 실리도 잃지 않는 묘수야. 왕실과 폐하의 앞날이 기대되네.”
건국기념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임시 왕궁에도 들뜬 분위기가 가득했다.
빈센트에게서 좋은 소식도 당도했다.
만찬장에서 홀로 저녁 식사를 마쳤을 즈음 델마가 찾아왔다.
“이쪽으로 불러서 미안해. 얼른 듣고 싶어서.”
“건국기념제에 맞춰 신궁 신축 공사가 끝날 것 같습니다.”
“훨씬 늦어진다고 하지 않았어?”
“거중기 마도구가 큰 역할을 한 모양입니다.”
“빈센트 경은 만나봤어?”
나는 은근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델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무척 야위셨더군요.”
“다른 건 뭐 없어? 둘이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거나.”
“차를 권하셨지만, 그 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빈센트 님께 나을 것 같아서 사양했습니다.”
“그럼 내가 델마를 거기까지 보낸 보람이 없잖아!”
답답한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내 의도를 눈치챈 델마가 딱 잘라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개인적인 감정은 내려놓았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폐하를 보필하는 것이고 또…….”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델마의 말을 싹둑 잘랐다.
델마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서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델마의 인생엔 검술과 기사도, 나에 대한 충성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숙맥처럼 살아온 것이 전부 내 잘못 같아서 속이 쓰라렸다.
“델마. 주군이 아닌 친구로 충고 하나 할게.”
“뭐든 말씀하십시오. 뼈를 가는 각오로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비장해지지 말고. 건국기념제에 델마와 빈센트에게 특별 휴가를 줄 생각이야. 휴가 동안 뭔가 해봐.”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고백을 하든 데이트를 하든, 빈센트 경이랑 뭐라도 해보라고!”
고백이라는 말에 델마의 낯빛이 푸르죽죽해졌다.
“고, 고, 고백 말씀이십니까?”
“빈센트 경도 델마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아. 이럴 때 밀어붙여야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빈센트 님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수도 없이 보셨을 테니까요.”
“예쁜 여자는 봤겠지만, 델마처럼 특별한 매력을 가진 여자는 못 봤을걸?”
미심쩍다는 투로 델마가 날 흘끔거렸다.
“폐하. 절 위로하려고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폐하께서 절 아끼시니까 과대평가하시는 것일 수도…….”
짧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델마의 눈빛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언제나 날 지켜주던 친구가 이토록 여리고 가냘파 보이긴 처음이었다.
어떻게 자신감을 북돋아 줘야 하지? 괜한 참견하는 걸까?
내가 애꿎은 빵을 나이프로 푹푹 찌르고 있을 때 만찬장 안으로 살로메디안이 들어왔다.
인사말도 건네지 않고 그가 델마에게 말했다.
“빈센트는 가문의 반대를 물리치고 기사의 길을 택한 남자다.”
“대공 전하?”
“여성의 몸으로 최고의 기사가 된 그대를 몹시 존경한다고 말하곤 했다.”
델마가 아랫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빈센트 님이 절 존경한다고 했습니까?”
“내가 쓸데없이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
“하지만 빈센트 님은 제가 테레사의 명에 따라 거짓 증언을 한 것까지 봤습니다. 절 믿지 못하겠다고도 하셨고요…….”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내게는 잊힌 과거였지만, 델마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상처였나 보다.
기사의 명예를 저버리고 테레사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
그 시간이 델마의 가슴 속에서 곪아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진심으로 친구의 행복을 빈다고 했으면서.
죄책감으로 먹먹해진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빈센트 경이 그랬잖아. 델마는 개국 공신이라고, 누구보다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폐하.”
“왜 델마는 자기한테 좋은 건 외면하고, 나쁜 것만 기억해? 왜 자기를 깎아내리느냐고?”
“하오나 소인은…….”
“왜 행복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설마 자기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던 델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모두 제가 못난 탓입니다.”
델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뭐든 자책하고 미안해했다.
제 상처는 감추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게 옳다고 믿었다.
살로메디안이 없었다면 나도 델마와 똑같을 거였다.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잖아! 나는 그냥 델마가……!”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 탓에 목소리가 격앙됐다.
그만하라는 뜻으로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델마가 내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나도 델마에게 힘이 되고 싶은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시아. 나머지는 나에게 맡겨라.’
어떻게 하시려고요?
살로메디안이 냉담한 어조로 델마에게 물었다.
“델마. 진심으로 시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폐하를 향한 충심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앞으로도 충심으로 살 것입니다.”
“그럼 빈센트 경과 결혼해라.”
고백도 못 하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결혼하라고?
까마득한 침묵이 만찬장을 짓눌렀다. 현기증을 느낀 듯 델마가 잠시 비틀거렸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갑자기 무슨 결혼이에요?”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델마의 충성심이랑 결혼은 아무 상관 없잖아요.”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살로메디안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진지하고도 근엄한 표정으로.
“세드나로드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우리 왕실도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고.”
“살롬. 제발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주실래요? 델마가 졸도하기 직전이라고요!”
“왕실을 지키는 건 기사다. 왕가의 후계자를 얻는 것만큼 근위대장 가문을 탄탄히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나라의 장래를 위해.”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빛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아쿠아로드 왕실기사단장의 후계자였으니 잘 알 것 아닌가?”
살로메디안의 지적에 델마가 멈칫했다.
“…혼인하여 왕실을 받들 후계를 만들란 말씀이십니까?”
“그 역할마저 받아들일 충심이 진실로 그대에게 있다면.”
살로메디안이 아주 그럴듯한 미끼를 던졌다.
충성심의 화신인 델마가 그 미끼를 외면할 리 없었다.
“폐하와 세드나로드를 위해서라면 결혼도, 재혼도, 삼혼도 할 수 있습니다!”
“델마… 세 번째 남편과 사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결혼은 그냥 한 번으로 충분해.”
내 충고가 들리지도 않는지 델마가 살로메디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빈센트 님과 결혼해야 합니까?”
“빈센트라서 불만인가?”
“그럴 리가요. 빈센트 님이 아이를 낳는다면, 성품도 훌륭하고 신체 능력도 뛰어날 겁니다. 물론 외모도 아름답…….”
자신의 상상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델마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팔짱을 끼며 픽 웃었다.
“내 수하를 종마 취급할 생각은 없다.”
“그럼 왜 저와 빈센트 님을 이어주시려는 겁니까??”
“자네가 아니면, 빈센트는 영영 홀아비로 늙어 죽을 테니까.”
“빈센트 님은 훌륭한 남편감입니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영애들이 빈센트 님을 모셔 가려 할 겁니다!”
델마가 사뭇 억울하다는 투로 빈센트를 변호했다.
진심으로 빈센트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혀를 찼다.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윗스 가문 인간들이란 뼛속부터 일벌레다. 바넷사 황후, 바바라 총리대신을 보고도 모르겠는가?”
“네?”
“시아가 짝을 찾아주지 않았더라면 바넷사도 바바라도 골방에서 일만 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의 빈센트처럼.”
제가 바넷사와 바바라의 짝을 찾아줬다고요?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하던데요?
반박할 겨를도 주지 않고 살로메디안이 덧붙였다.
“시아는 모든 면에서 탁월하지만, 백년해로의 배필을 찾아주는 데에는 특출난 촉이 있다.”
살로메디안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감명을 받았는지, 델마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런 혜안을 가지신 폐하가 제 남편감으로 빈센트 님을 점찍으셨다는 겁니까?”
“물론이다. 어떤 귀부인이 일벌레 기사 남편을 이해해주겠는가? 빈센트를 구원할 여인은 자네뿐이라는 거지.”
살로메디안은 짝사랑 때문에 머뭇거리는 델마를 빈센트를 구원할 영웅으로 뒤바꾸어놓았다.
그것이 델마의 가치관을 온통 흔들어놓았음은 물론이었다.
“강요는 아니다. 자네가 사감을 버리고, 대대로 왕실에 충성할 마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니까.”
살로메디안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결과는 뻔했다.
“빈센트 님과 혼인하여 대대손손 왕실을 수호하겠습니다!”
“진심인가?”
“넵! 제 목숨 바쳐 빈센트 님을 제 부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델마. 이건 전쟁이 아니라, 결혼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델마는 적진을 향해 진격할 채비를 마친 장수가 되어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지금 당장 혼인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델마,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
“휴가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만들어주신 인연, 죽을 때까지 이어가겠습니다!”
“휴가를 당장 준다고 하지는 않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델마가 쌩하니 사라졌다.
설마 아이부터 갖자고 빈센트를 덮치는 건 아니겠지? 그 유명한 선 임신, 후 결혼?!
델마의 사랑을 응원하기는 했지만 이런 모습을 상상한 건 아니었다.
어쩐지 빈센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델마는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여자였으므로.
“시아. 왜 기뻐하지 않는 거지?”
살로메디안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다는 자부심이 그의 얼굴에서 반짝거렸다.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결론은 똑같았을 거다. 이왕 갈 길이면 질러가는 편이 좋지.”
“델마가 다짜고짜 청혼부터 하면 어떡해요?”
“그거야말로 빈센트에게 좋은 일이다.”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정하는 건데…….”
“내가 하나 묻지.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빈센트가 어떻게 신궁 증축 현장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델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짜요?”
“빈센트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임시 왕궁엔 델마 경이 있으니, 자신은 마음 놓고 신궁을 살필 수 있다고.”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빈센트는 어떤 경우에도 근위대장의 소임을 소홀히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빈센트 경도 델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가요?”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빈센트 경을 부추겨보지 그러셨어요! 델마와 사귈 수 있도록!”
“빈센트에게 그런 주변머리가 있을 것 같나? 제 마음을 깨닫고도 델마 주변을 빙빙 돌면서 시간만 낭비했을 거다.”
그 꼴만큼은 못 봐주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델마가 결심했으니, 혼인은 시간문제지.”
“두 사람은 살롬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그대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빈센트의 결혼 따위 나랑 상관없으니까.”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누구보다 빈센트 경의 행복을 바라시잖아요.”
“하지만 새치기는 용서 못 한다.”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못 박았다.
“새치기라니요? 우린 이미 결혼했잖아요.”
“먼저 아기를 갖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기란 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 익숙한 불길이 일었다.
“내 아내가 델마를 신경 쓰는 것 반만큼만 후계자 문제에 신경 써주면 좋을 텐데.”
그가 내 목덜미 위에 입술을 올렸다. 간질거리는 촉감 때문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그가 뜨거운 숨결을 한 번 더 불어 넣었다.
“으흣.”
온몸의 감각이 목덜미에 집중됐다. 피가 쏠리며 심장이 가슴 안쪽을 빠르게 때렸다.
만찬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살로메디안,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만들어내는 우리의 그림자밖에는.
“살롬. 여긴 식당이에요.”
“모를까 봐?”
“알면서 단추는 왜 푸르세요?”
아랑곳하지 않고 살로메디안이 제복 윗단추를 완전히 열어젖혔다.
곧은 목선에서 연결되는 드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근육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도, 손등 위에 도드라진 핏줄도 내 입술을 마르게 하기 충분했다.
가쁜 숨을 내뱉는 날 보며 살로메디안이 여유를 부렸다.
“그대는 식사를 마친 모양이군.”
“그런데요?”
“이건 치워도 되겠지.”
살로메디안이 빈 접시를 옆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테이블보가 어쩐지 침대보를 연상시켜서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발가락이 오그라들 만큼 긴장했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살롬은 저녁 드셨어요?”
“아니.”
“조리장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할게요.”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살로메디안이 두 팔 사이에 날 가뒀다.
날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아슬아슬했다. 이어진 한 마디는 더욱더 위험했다.
“필요 없다. 다른 걸 먹을 계획이거든.”
동시에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내렸다.
예민한 감각을 헤집으며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뜨거웠고, 쏟아지는 체취는 농밀했다.
실오라기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가 집요하게 날 빨아당겼다.
내 뒷덜미를 감싼 커다란 손. 이성을 지우고 본능만 남기기에 충분한 열기.
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테이블보를 세게 쥐었다. 굶주린 맹수가 사납게 탐욕을 드러냈다.
그의 굶주림이 내게도 옮은 걸까. 나 역시 그를 맛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은촛대 위의 촛불이 춤추듯 일렁거렸다. 하지만 꺼지지 않았다.
그날 촛불은 흰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 * *
“세드나로드 건국 1주년을 기념하며, 힘을 모아 이룬 영광을 함께 나누자!”
아이시아가 붉은 와인이 담긴 황금잔을 높이 들었다.
종일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아이시아는 건국기념제 축사를 훌륭하게 마쳤다.
살로메디안은 국왕의 남편으로서 아이시아 곁을 지켰다.
그러나 축배를 들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세드나로드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세드나로드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가장무도회에 참여한 귀족들과 각국의 축하 사절들이 환호성을 쏟아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신분은 알 수 없지만, 파티를 즐기는 마음은 똑같았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살롬. 표정 좀 풀어요.”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가 부루퉁하게 답했다.
“가면을 썼는데 무슨 상관인가?”
살로메디안은 바바라가 준비한 늑대 가면을 썼다.
얼굴의 반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빼어난 미모는 쉽사리 감춰지지 않았다.
질기게 따라붙는 여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들 즐거워하잖아요. 대체 뭐가 불만이세요?”
“내 아내의 기분 나쁜 분장 때문이지.”
살로메디안이 원망을 숨기지 않고 아이시아를 노려봤다.
아이시아는 오늘도 예뻤다.
키산드라가 생전에 사용하던 검을 차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예뻤을 것이다.
키산드라처럼 한쪽으로 땋은 머리도, 키산드라의 제복 바지도, 마신을 상징하는 뿔 두 개 달린 검은 가면도 못마땅했다.
왜 하필이면 키산드라일까? 아이시아를 꼭 닮은 요정도 있고, 천사도 있는데.
‘키산드라로 분장한 아이시아와 키스할 수 있을까? 시험을 해봐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아이시아가 새초롬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키산드라 님은 전설의 여기사잖아요. 아이들한테 얼마나 인기라고요.”
“그대가 가짜 서사시를 유포한 탓이지.”
“…약간의 미화라고 해두죠.”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아이시아가 와인을 홀짝였다.
“그건 미화가 아니라 날조라고 하는 거다.”
살로메디안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빠져나왔다.
아이시아는 음유시인에게 키산드라의 일대기를 다룬 서사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170년 동안 운명과 싸워야 했던 미모의 여기사에게 백성들은 과도하게 열광했다.
심지어 키산드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까지 등장했다.
물론 키산드라의 희생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직도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키산드라로 변장한 아이시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백성을 사랑한 불패의 여기사라고? 키산드라는 미남의 가슴 근육 밝히는 변태일 뿐이다.”
“키산드라 님을 기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신궁 옆에 마신의 신전을 지었잖아. 그거면 충분해.”
“더 많은 이들이 키산드라 님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700년이란 긴 시간이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요.”
“…….”
“살롬이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네?”
아이시아가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흔들었다.
그때마다 벨트에 달린 늑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이시아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살로메디안은 바바라에게 가면무도회 의상을 맡긴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을 놀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 한 것이 분명했다.
꼬리를 떼어내려고 하자, 아이시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계속 달고 계시면 안 돼요?”
“그대도 날 늑대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살로메디안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시아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달짝지근한 숨결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살롬 같은 늑대라면… 언제나 환영인걸요?”
“그 말 후회하지 않겠지?”
살로메디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번만큼은 아이시아의 도발을 모른 척해줄 수 없었다.
단단히 각오하라는 뜻이었는데, 아이시아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살롬이야 말로 괜찮으세요?”
“무엇이?”
“늑대 잡아먹는 마신을 감당할 수 있으시겠느냐고요. 후훗.”
아이시아가 가면에 달린 검은 뿔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시아?”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절 감당할 수 있겠냐며 자극하는 아이시아라니?
낯선 아내의 모습에 살로메디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남편이 귀엽다는 듯 아이시아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황하는 게 뻔히 보이네요. 늑대님.”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숨이 가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시아가 다시 한번 장밋빛 입술을 나풀거렸다.
“살롬. 축제 끝나면 우리도 휴가 가요. 한 달 동안.”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겠지?”
“못 믿으시겠으면 계약 마법이라도 걸까요?”
살로메디안에게 팔짱을 끼며 아이시아가 몸을 밀착시켜왔다.
도톰한 입술을 핥은 분홍색 혀.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관능적인 눈빛.
살로메디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원래도 미치도록 예뻤지만 유혹하는 아이시아는 혼이 쏙 빠질 만큼 예뻤다.
“시아.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침착한 척 물었지만, 살로메디안은 귀족들이 건네오는 인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이시아에게 홀린 상태였다.
“그냥 솔직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질문 따위나 던지는 살로메디안에게 서운하다는 듯 아이시아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왜?”
“…이런 저는 싫으세요?”
아이시아가 새빨간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다.
묵직한 한 방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싫을 리가 있습니까? 계속 솔직해주십시오!’
하마터면 존댓말로 그렇게 말할 뻔했다. 아이시아가 이토록 대담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으므로.
“건국기념제고 뭐고 당장 떠날까?”
시험하듯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롬이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건 그때였다.
“그대라면 거리 축제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다른 무엇보다 살롬이 더 간절한걸요?”
아이시아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런!”
살로메디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이시아가 든 황금잔이 텅 비었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와인을 마신 건가?”
“그랬을걸요?”
“국왕의 건배주는 보통 와인보다 훨씬 독하다. 그걸 한 잔이나 마셨다고?”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가면을 위로 벗겼다.
가면 아래에 드러난 아이시아의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끈뜨끈했다. 아이시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긴장해서 조금 마시긴 했는데. 저 취했어요?”
“멀쩡해 보이진 않는다.”
“살롬이 틀렸어요. 저는 아주, 완벽히, 멀쩡해요. 딸꾹.”
행동으로 증명하겠다는 듯 아이시아가 앞장섰다.
사정없이 좌우로 비틀거리는 그녀의 걸음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짜릿하고도 관능적인 말이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이시아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빈들이 국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이시아의 가면을 다시 씌웠다.
그리고 초록색 트롤 분장을 한 바바라를 찾았다.
“시아가 취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하지만 저는……!”
바바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어차피 축사는 끝났다.
국왕의 빈자리를 채워줄 총리대신도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다리가 풀린 아이시아를 부축해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오늘의 빚은 꼭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며.
* * *
살로메디안의 치유력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리 축제도 보지 못하고 종일 숙취에 시달렸을 게 뻔했다.
“축제를 보러 가자고? 술주정으로 날 농락했으면서 내 아내는 참으로 뻔뻔하군.”
“술 다 깼어요. 살롬 덕분에요!”
“숙취해소제 취급은 사양하겠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과음하지 않을게요!”
“기억이 안 난다니 더욱더 괘씸하다.”
내 술주정 때문에 살로메디안은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제발 부탁드려요. 네? 인형극만 잠깐 보고 올게요!”
트리탄이 준비한 모아니아 전통 인형극은 오늘 밤에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살로메디안도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축제 인파에 섞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단출한 옷을 입고 우리는 임시 왕궁을 빠져나왔다.
거리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인들은 설탕을 입힌 과일과 숯불 꼬치구이, 버터를 끼운 시나몬 빵을 싼값에 팔았다.
여러 나라의 풍습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거리 공연도 대성황이었다.
“볼거리가 엄청 많아요. 간식거리도 많고요!”
나는 꼬치구이를 한 손에 들고 산악 민족의 춤과 크로티무스 전통 민요 공연을 둘러봤다.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거리 축제도 대성공이에요.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다행이군.”
“살롬은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다들 행복해 보이잖아요!”
“그대가 세운 나라에서 그대의 보호를 받는 백성들이니 행복해야 마땅하지.”
살로메디안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세상 누구보다 날 믿어주는 그이기에 새삼 고마웠다.
“그럼 트리탄의 연구 성과를 보러 갈까요? 스승의 도움을 받아 자동인형을 완성했다던데.”
우리는 인형극이 열리는 공터로 향했다.
마도구가 사용된 자동 인형극이란 광고 덕분에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넘실대는 인파 속에서 디에고를 발견했을 때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디에고!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마도구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스스로 춤추고 연기하는 인형이라니 굉장하지 않습니까?”
“디에고도 트리탄의 자동인형을 알아요?”
“폐하야말로 제 제자를 어찌 아십니까?”
디에고가 되물었다.
천하의 디에고가 제자를 들였다고? 트리탄이 말한 스승이 디에고였어?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라 신선한 자극을 주더군요. 연구 열정도 대단하고요. 어릴 적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쑥스럽다는 듯 디에고가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연구 시간 뺏기기 싫다고 마도사 학교 교장도 거절했잖아요. 제자를 들이라고 한 건 바비인가요?”
“총리대신님의 충고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내를 총리대신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디에고밖에 없을 거예요.”
“저 같은 놈에게 과분할 정도로 훌륭한 분입니다. 폐하 덕분에 총리대신님을 모시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목소리 낮추세요. 폐하라고 부르면 변장을 한 의미가 없잖아요?”
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주변 눈치를 보던 디에고가 서둘러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인형극 소감을 들려주십시오!”
나는 살로메디안와 나란히 앉아 인형극을 관람했다.
사자, 늑대, 곰, 토끼, 사슴 등 다양한 동물 친구들이 모험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저 인형들 좀 봐! 마법에 걸린 것 같아!”
“줄도 없는데 누가 조종하는 거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자동 인형극에 흠뻑 빠져들었다.
무대가 끝나고 트리탄과 디에고가 인사를 하러 나왔다.
관람객들은 마도사와 그 제자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트리탄의 밝은 미래와 세드나로드 마도구의 발전을 빌며 나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시아, 그만 돌아가자.”
살로메디안이 날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언덕 아래로 축제의 불빛이 보였다. 빛으로 물결치는 바다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년에도 이런 축제를 열 수 있겠죠?”
“오늘보다 훌륭한 축제가 될 거다.”
“자동 인형극 전용 극장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명물이 될 거예요.”
“그런데 목소리 연기는 누가 하는 거지?”
“모아니아 출신 변사가 한다고 들었어요. 한 사람이 열 사람의 목소리를 낼 줄 안대요.”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하다니, 대단하군.”
감탄했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거중기도 그랬잖아요. 마도구가 있으면 능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가요.”
내가 개발한 마도구는 아니었지만, 자부심이 가득 차올랐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법진을 자동으로 그리는 마도구를 만들면 어떨까요?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요!”
“그게 가능할까?”
“천재 디에고와 그 제자가 있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어낼 거예요!”
“마도구가 개발된다면, 마도사 10명이 할 일을 1명이 할 수 있겠군.”
“마도구 수출도 배 이상 늘릴 수 있어요! 예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고요!”
골치 아픈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이 소식을 들으면 바비도 기뻐하겠지? 세금을 덜 걷고도, 백성들은 더 부유해질 거야!
새로운 희망이 눈앞에 어른댔다.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없겠지만 힘을 합쳐 끝까지 노력할 작정이었다.
내 나라, 내 사람들을 위해.
“그대는 내 자랑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날 향한 사랑과 믿음이 듬뿍 담겨있었다.
누군가의 긍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실감하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전부 살롬 덕분이에요. 살롬이 없었다면 전부 불가능했어요.”
“진심인가?”
“신께 맹세해요. 살롬을 만난 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에요.”
“오늘에야말로 대답을 들을 수 있겠군.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지?”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그윽했다. 내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당신이에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그것도 살롬, 당신이죠.”
“좋아.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그 자리만큼은 양보 못 한다.”
미래의 아기와 경쟁하려는 살로메디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기가 그렇게 기다려지세요?”
“그대를 빼닮은 아기를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대가 원치 않으면 포기할 수 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든 내 뜻에 따라주는 살로메디안이었지만, 왕실의 후계까지 포기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만들어야 한다면서요?”
“핑계였다.”
“무슨 핑계요?”
“그대를 마음껏 안을 수 있는 핑계.”
그 말과 함께 살로메디안이 하나로 땋아 내렸던 내 머리칼을 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달빛보다 그의 입가의 드리워진 미소가 아름다웠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늑대 같은 남편이라 미안하군.”
나는 두 눈을 감고 살로메디안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떨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길 바라며.
“말했잖아요. 당신 같은 늑대는 언제나 환영이라고.”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린 것과 그가 내 아랫입술을 머금은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폭풍처럼 밀어치는 입맞춤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신 입술의 감촉에 의지해 살로메디안을 느꼈다.
콧날이 스치고, 숨결이 흩어졌다.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 한결 포근해졌고, 우리는 그 포근함에 기대 조금씩 더 깊숙이 서로를 탐닉했다.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충만함이 일상이 되어 우리의 삶을 오래도록 비추리라.
가끔씩 토라지고, 또 가끔 외로운 날도 있겠지만 오늘의 반짝임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붉고 푸른 불꽃이 밤하늘을 수 놓을 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사랑해요. 세상 그 누구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로메디안은 내 마음을 읽고 있을 터였다.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심장을 통해.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