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 * *
아이시아가 즉위한 후로 살로메디안은 수많은 후회를 했다.
첫째. 나라를 괜히 세웠다.
둘째. 아이시아에게 성군이 되라고 응원했다.
셋째. 아이시아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
아이시아가 간절히 바랐으므로 건국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도와줄 능력이 없다는 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라도 제왕학을 배워야 하나? 경제학이나, 외교학 같은 거?’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 골이 지끈거렸다.
살로메디안은 살인 병기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고, 평생을 전쟁터에서 뒹굴었다.
취미는 훈련, 특기는 살인. 가장 잘하는 건 전쟁에 승리하는 것.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바라의 말이 옳았다.
평화로운 신흥 국가에서 전술이나 용병술은 무의미했다.
적군을 섬멸하는 맹장보다, 셈이 빠른 문관이 귀중한 시기였다.
「살로메디안 공은 아무 쓸모 없어요! 축제도 제가 완벽하게 성공시킬 거라고요!」
바바라의 얄미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살로메디안은 두려웠다. 아이시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오게 될까 봐.
무력하게 그녀의 고민을 지켜봐야 할까 봐.
요즘 아이시아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건국기념제였다.
마신의 숲 약초는 무분별하게 채취할 수 없었고, 마도구도 더 빨리 생산할 수 없었다.
마도구의 핵심은 마법진인데, 마법진을 새기는 건 극소수의 마도사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세드나 공작령의 보물을 팔아서 예산을 충당하자고 제안했으나, 아이시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선대의 보물에 의존할 수 없어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해요.」
며칠 머리를 싸맸지만 아이시아가 바라는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우정을 핑계로 아이시아를 독점하려는 초록 악마는 이 순간에도 머리를 굴리고 있을 텐데.
이대로 바바라에게 아이시아를 빼앗길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니, 그녀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는 영웅이고 싶었다.
하지만 영웅이 되기는커녕, 아내 얼굴 보기도 힘든 나날이었다.
부부 사이에 꼭 필요한 다정하고도 은밀한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왜 아무도 후계자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 거지? 잉태를 위해 온 백성이 기도해야 할 때 아닌가?’
물론 살로메디안은 조금의 틈도 놓치지 않고 아이시아와 사랑을 나눴다.
괴로운 듯 찡그려진 눈썹과 달리 환희에 찬 신음을 뱉는 입술.
솔직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허리.
살로메디안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 쭉 뻗는 두 다리.
아이시아는 점점 더 대범하게 살로메디안에게 매달렸고, 하얗고 자그마한 손으로 그의 탄탄한 등을 더듬었다.
살로메디안은 날마다 새롭게 아이시아에게 중독되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은데 아이시아를 향한 사랑은 끝도 없이 몸집을 불렸다.
아이시아는 살로메디안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 그 자체였다.
아이시아와 함께 하는 모든 밤이 그랬다.
그러나 다음 날 눈 밑이 거뭇해진 아이시아를 볼 때면 죄책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이시아가 집무실에 들어가고 나면 바윗덩이 같은 자괴감이 살로메디안을 괴롭혔다.
‘이대로 침대에서만 유능한 남편이어서는 안 된다. 시아를 위해 나도 발전해야 해.’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이시아 옆에 딱 달라붙은 초록 악마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유민자치구에 살롬도 같이 가시겠다고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비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근위대장이 자리를 비웠지 않나. 내 손으로 국왕 폐하를 지킬 것이다.”
“델마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정식 행차도 아니니까요.”
“밀행이라면 더더욱 함께해야지.”
트리탄을 만나고 난 뒤 나는 유민자치구의 식량 문제를 검토했다.
서류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건강한 유민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했고, 노약자들에게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식량을 배급했다.
나는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적어도 내 나라에서 굶어 죽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교육과 치료 부분에서도 유민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장차 이 나라의 신민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발 때문에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유민들에게 가야 할 식량을 빼돌리는 인간이 있다는 거죠.”
“내 손으로 그놈을 잡겠다. 부디 맡겨다오.”
살로메디안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각오가 남다른 그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델마랑 저는 변장하기로 했는데. 살롬도 괜찮겠어요?”
아픈 기억이 떠올랐는지 살로메디안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설마 유랑극단으로 변장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올 생각이에요. 물의 요정 에스메랄다를 다시 보고 싶지만.”
“시아.”
“살롬의 여장은 정말 최고였어요. 대륙 제일 미녀라고 해도 믿었을걸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썹을 찌푸린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날 놀리는 것이 재미있나?”
“솔직해지자면, 무척요.”
“내 아내가 장난꾸러기인 줄은 몰랐는데.”
“사람은 가끔 변하는 법이죠.”
“그럼 나도 변해볼까?”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한순간 뒤바뀌었다.
자상한 남편에서 굶주린 맹수로.
살로메디안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고요했던 공기가 한순간 뒤집히면서 심장이 가슴 안쪽을 빠르게 때렸다.
“이 장난꾸러기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
당장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살로메디안이 내 아랫입술을 노려봤다.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숨쉬기가 괴로웠고, 희미한 통증 탓에 아랫배가 우지끈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쉽사리 날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버릇을 고쳐줘야 할 것 같은데.”
내 허벅지를 긁듯 쓸어 올린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
나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탄식을 깨물었다.
찌릿한 촉감이 들불처럼 전신으로 번져갔다. 예민한 피부에 오소소,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곳은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 아닌가?
밤새도록 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남편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남자에게 한계란 없는 건가?
체력이 이렇게 강해도 되는 거야?
몇몇 질문을 삼키며 주춤 물러섰다.
“살롬. 제발 고정하세요.”
“용서를 구하는 건가?”
“그, 그래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살로메디안은 대꾸가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침묵은 참을 수 없이 농밀해졌다.
달큰한 긴장감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다시 한번 애원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져서 어쩐지 더 부끄러웠다.
“다시는 여장 이야기 꺼내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대는 이미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네?”
“한 달 동안 함께 침실에 처박히기로 하지 않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원치 않은 여장을 대가로 그가 요구한 조건이었다.
침실에서의 한 달.
살로메디안에게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휴가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즉위식 이후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 없었으니까.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쉬 뱉을 줄이야.”
사뭇 안타깝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매일 밤 놓아주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볼 안쪽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으로 꾹 참았다.
지금의 살로메디안은 너무 위험했으니까.
“시아. 한 나라의 국왕이 약속을 안 지키면 되겠나, 안 되겠나?”
그가 엄지로 내 턱을 위로 치켜올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푸른 눈동자 안에 이글거리는 욕망을 그대로 마주 봐야 했다.
“몹시 바빴잖아요.”
“책임지지 않겠다는 건가?”
“그런 뜻은 아니에요. 살롬이 이해해줄 거라 믿어요.”
“아니, 울며 빌어도 이해해줄 수 없어.”
살로메디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박혔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진심을 보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몇 번이나 경험했다.
제발 봐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내 몸은 의지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살롬……!”
익숙한 갈증이 뱃속을 달구었다.
살로메디안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집무실 책상 위에 반쯤 눕듯이 몸을 기댔다.
드레스 자락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더는 살로메디안을 말릴 수 없었다. 나도 참기 힘들어졌으므로.
그때 시종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폐하. 델마 경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이를까요?”
“힉.”
화들짝 놀란 내가 기묘한 소리를 냈다.
시종과 델마가 동시에 당황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한창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고? 아니면 짐승으로 변한 남편을 길들이는 중이었다고?
나는 조심스레 살로메디안을 올려다봤다.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그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겼다.
일단은 물러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고쳤다.
“들어와요. 델마.”
* * *
우리는 유민자치구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떠돌이 상인으로 변장했다.
떠돌이 상인 중엔 여성이 드물었으므로 나와 델마는 남장을 했다.
허름한 옷을 걸친 우리는 늙은 조랑말을 끌고 유민자치구로 향했다.
델마를 향한 살로메디안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빈센트가 없어서 실망이겠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집무실에 불쑥 들어올 때부터 빈센트를 찾던데?”
“…근위대장께 전할 말이 있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 설마 고백이라도 하려고 했었나?”
고백이라는 말에 델마의 얼굴이 희끗하게 질렸다.
연심을 들켰다는 당혹감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몰라? 아, 아니. 전혀 몰랐는데?”
뒤늦게 말을 바꿔봤지만 소용없었다.
델마가 착잡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전부 알고 계셨군요.”
“얼른 고백하든지, 사귀든지 하도록. 시아가 신경 쓰지 않게.”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말했다.
집무실에서 벌어질 뻔한 ‘무언가’를 방해한 델마에게 심통을 부리는 거였다.
“살롬. 델마의 사생활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사생활은 심각하게 침해받았는데?”
“엄연한 업무시간이었어요.”
“업무시간을 방해한 건 나란 뜻인가?”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델마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별거 아니란 말에 모자 아래로 드러난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애써 외면하며 델마에게 말을 돌렸다.
“빈센트에게 하려던 말이 뭐야?”
“디에고 오라버니가 왕궁 증축 현장에서 사용할 마도구를 개발하셨다고 합니다.”
“마도구?”
“주춧돌처럼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라고 합니다.”
“거중기라면 이미 사용 중일 텐데.”
“그 마도구가 있으면 한 명이 열 사람 몫의 일을 할 수 있다는군요.”
“큰 도움이 되겠네! 디에고 같은 마도사가 한 명만 더 있으면 세드나로드는 금방 강대국이 될 거야.”
“…….”
“마법진을 그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질 줄은 몰랐어. 마도사 후보생들이 얼른 졸업하면 좋겠다.”
부쩍 어두워진 얼굴로 델마가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오라버니처럼 마도사였다면 폐하께 큰 힘이 되었을 텐데…….”
“무슨 소리야! 델마는 충분히 큰 힘이 되고 있는걸?”
“그럴까요?”
“그럼! 각자 역할에 충실한 것이 최고야. 요즘처럼 바쁠 때는 더더욱.”
살로메디안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세를 바르게 고친 델마가 다시 한번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사로운 일에 정신 팔지 않고 폐하를 모시는 데 전념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내겐 델마의 사적인 행복도 중요하다고.”
“저는 폐하를 모실 때 가장 행복합니다.”
“델마도 가정을 꾸려야지? 결혼은 알아서 하더라도 연인이 생기면 삶이 훨씬 더…….”
“폐하의 앞길에 보탬이 되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델마가 살로메디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작도 못 해본 델마의 연애는 이대로 끝나버리는 걸까?
목석같은 호위 무사와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근위대장을 떠올리며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바보들.
* * *
유민자치구의 경비는 생각보다 삼엄했다.
몇몇 상인과 군인, 치료사를 제외한 사람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자치구 밖에 일자리를 구한 유민들조차 정해진 시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걸까요?”
조랑말에서 내려 고삐를 쥔 델마가 물었다. 내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백성을 억압하는 게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놈들이 있지. 델마, 이곳 책임자는 누구지?”
“아쿠아로드 출신 알란도 남작입니다, 폐하.”
“그는 세드나 공작령과 아쿠아로드 통일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인간이었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쿠아로드 왕실 방계 혈족으로서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알란도란 방계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알란도 남작의 할머니가 전전대 국왕의 처20촌이라 하더군요.”
완전 남이라는 뜻이잖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치구 꼴을 보니, 그 남작이라는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뻔하군.”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민자치구의 실상은 참담했다.
낡은 천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텐트는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처리되지 못한 오물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비쩍 마른 아이들은 뛰어놀 힘도 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군인들이 자치구 내부를 순찰하고 있었지만, 병자를 치료소로 옮기거나,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진 않았다.
아사 직전의 유민들이 많다는 트리탄의 말은 진실이었다.
“나리. 먹을 것 주세요. 썩은 감자라도 좋아요.”
서툰 대륙 공용어로 젊은 여자가 구걸했다.
나는 여자 품에 안긴 아기의 움푹 팬 볼을 보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내가 좋은 왕인 줄 알았어. 사람들이 예전보다 나은 세상에서 사는 줄 알았고…….’
죄책감으로 얼룩덜룩해진 내 마음을 읽은 살로메디안이 말했았다.
“시아. 어떤 성군도 모든 빈곤을 없앨 수는 없다.”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그대는 지금도 훌륭한 국왕이니까.”
“책임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나는 바쁜 틈을 쪼개 임시 왕궁 주변을 시찰했다.
활기 넘치는 시장과 시장 곳곳을 누비는 통통한 아이들을 보며 남몰래 뿌듯하곤 했다.
내 손이 닿지 못한 곳에 어떤 그늘이 드리워졌는지 모른 채.
“알란도 남작을 잡아다 그대 앞에 무릎 꿇리마.”
살로메디안의 말에 도리질 쳤다.
“알란도 남작을 잡아들이면 더 큰 분란이 일어날 수 있어요.”
“죄지은 자를 처벌하는데 분란이라니?”
“왕실의 유민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아요. 우리에겐 이민족 떠돌이들에게 나눠줄 돈이 없다는 거죠.”
“자기들 배를 불릴 생각이 아니고?”
“그 명분에 설득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이민족을 쫓아내고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자는 건가? 남을 도울 만큼 부유하지 않으니까?”
“안타깝지만 바로 그거예요.”
왕실에서 원조하고 있지만, 각 지역 토호들이 인력과 토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유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린다는 이유로 남작을 처벌한다면, 귀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었다.
귀족들이 백성들까지 선동한다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바바라에게 알란도 남작의 뒤를 캐보라고 할게요. 우리는 이곳의 실상을 증언할 증인을 찾아보죠.”
내 말에 델마가 난감해했다.
“나설 사람이 없을 겁니다. 유민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면 어딜 가든 차별받으니까요. 남작의 눈치도 봐야 하고요.”
“국왕보다 당장 빵을 나눠주는 남작이 무섭다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델마와 셀로메디안을 향해 내가 씩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요.”
“어쩌시려고요, 폐하?”
“나만 믿어. 꼭 유민자치구 문제를 해결할 거야.”
* * *
일단 우리는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인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각종 생필품 사고팝니다! 비누, 밀가루, 감자, 버터, 소금과 무명천도 있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몇몇 유민들이 다가왔다.
대부분 자신의 물건을 식량과 바꾸길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상인 나으리. 이걸 드릴 테니 밀가루와 소금을 주십시오. 고국에서 귀하게 팔리는 향로입니다.”
70대 노파가 은으로 세공된 향로를 내밀었다.
“비싸 보이는데 밀가루로 되겠어요? 은화 50개 쳐 드릴게요.”
“돈은 필요 없으니까 먹을 거로 주세요!”
“은화 50개면 몇 달 치 식량을 사실 수 있을 텐데요?”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파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화를 가졌다는 게 들키면 모조리 빼앗깁니다. 거주비 명목으로요.”
“거주비라고요?”
“국왕 폐하께 성의를 표하라고 영주님께서… 물론 영주님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드려야지요!”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지 노파가 허둥지둥 변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는 말이야? 배식도 제대로 안 하면서?
노파는 향로를 팔지 못하게 될까 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조랑말에 싣고 온 밀가루, 소금을 듬뿍 퍼서 노파의 자루에 담아줬다.
말린 고기와 감자도 덤으로 챙겨줬다. 하지만 노파의 향로는 받지 않았다.
“향로는 그대가 간직하는 것이 낫겠다.”
“네?”
노파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올려다봤다.
그가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사랑하는 이의 명복을 빌며 향을 피워야 하지 않은가.”
“나리께서 모아니아 왕국의 전통을 어찌 아십니까?”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녔으니까.”
“상인이시니 전 대륙을 여행하셨겠군요.”
노파는 금방 납득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 드리워진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얼마나 많은 나라를 가봤을까.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그 전쟁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까.
“이건 혼쿠 섬 특산품인 자수정 수공예품이로군. 저건 데이오눌 산맥 민족의 가죽 가면이고.”
살로메디안은 모아니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꿰고 있었다.
검밖에 모르는 기사인 줄 알았는데, 그는 전통문화 학자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살롬. 그걸 어떻게 전부 기억해요?”
“내 부하였거나, 내 부하들 손에 죽어간 사람들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
“그들이 남긴 역사까지 짊어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살로메디안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살인에만 능한 전쟁광이 아니었다.
맞서 싸워야 했던 적군의 생명 또한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살인귀로 불리며 전쟁터를 떠돌았다니.
덧없이 스러져 간 목숨과 적의 피를 뿌릴 때마다 상처 입었을 내 남자가 못 견디게 안쓰러웠다.
“제 물건도 사주세요!”
“이것도 귀한 거예요!”
유민 아이들은 떠나온 고향에 대해 잘 아는 잘생긴 상인에게 열광했다.
살로메디안은 아이들에게 식량을 넉넉하게 나눠주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혼쿠의 전사들은 밤새도록 싸워도 지치지 않지. 너도 지치지 말도록 하거라.”
“데이오눌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용맹하고 생명력이 강하다. 너도 누구보다 끈질기고 강한 전사가 될 거다.”
예기치 못한 응원을 받은 아이들은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살로메디안의 입매에도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그림으로 그려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남편에게 또다시 반해버린 나는 달아오른 뺨에 손부채질하며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시아,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픈가?”
“좀 더워서요.”
어쭙잖은 변명에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모았다.
“찬 바람이 부는데 덥다고?”
“요즘 체온이 오르락내리락해요.”
“정말 감기인가?”
살로메디안이 예고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체취와 함께 그의 백금발이 사라락 이마에 닿았다.
“읏.”
그와 맞닿은 이마에서 기분 좋은 서늘함이 전해졌다.
동시에 심장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굴 전체가 농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해버렸음은 물론이었다.
“정말 열이 있군. 바로 돌아가서 진찰을 받도록 하자.”
나는 건강하다는 걸 증명하듯 날랜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괜찮다니까요! 어서 증인을 만나러 가야죠!”
“증인을 맡겨두기라도 한 것 같군.”
“맡겨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자신만만했고, 살로메디안은 의아해했다.
조랑말의 짐을 정리하는 델마를 불렀다.
“델마. 잠깐 심부름을 해줄 수 있을까?”
“명령만 내리십시오. 폐하.”
“별건 아니고…….”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내 명을 받은 델마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암살자는 그만뒀지만, 그 시절에 익힌 기술은 전혀 녹슬지 않은 모양이었다.
* * *
유민자치구 안쪽에는 몇 채의 움막이 있었다.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텐트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움막 주민들도 굶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인. 계십니까?”
내가 인기척을 냈다.
문 대신 달아놓은 거적이 들썩이며 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누구십니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놀라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야위긴 했지만 까무잡잡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시선을 잡아끌었고, 청회색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그녀는 세 살 남짓의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내가 아는 어떤 소년과 꼭 닮은 아이였다.
“아드님 일 때문에 세드나로드 왕실에서 나왔습니다.”
“설마 트리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더럭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여인이 물었다.
너무 어려 보여서 긴가민가했는데 트리탄의 모친이 맞는 모양이었다.
“혹 트리탄이 훈련 중에 다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에서 자세한 말씀 나누도록 하시지요.”
“손님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힌 여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낡아빠진 옷을 입고 있지만, 그녀의 행동에서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살로메디안이 내게 살짝 귓속말을 건넸다.
“모아니아 귀족인 것 같다. 그 나라 귀족 여성은 결혼 후 귓바퀴에 은귀걸이를 하거든.”
트리탄 어머니의 귓바퀴에는 새끼손톱만 한 작은 은귀걸이 걸려있었다.
트리탄도 보통 유민 같지 않더라니,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인 듯했다.
“모아니아 왕국도 연합군의 일원이었죠?”
“대 크로티무스 전쟁에서 참패한 뒤 몰락했지.”
“우리나라가 세워질 때 모아니아 백성들은 모국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거네요.”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권력자겠죠. 고통받는 건 평범한 사람들뿐이고요.”
전쟁이 끝나면 어떤 나라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나라가 사라진다고 그 나라에서 살던 이들까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타국에서 부랑자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질긴 목숨을 이어가겠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맛이 씁쓰레했다.
“차라도 내드려야 하지만 보시다시피 형편이 여의치 못해 죄송합니다.”
트리탄의 어머니 역시 정확하고 매끄러운 대륙 공용어를 사용했다.
나와 살로메디안이 상인 행색을 하고 있음에도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는 트리탄의 어미인 클로엘입니다. 두 분께서 찾아오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 트리탄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요.”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검술을 배워본 적 없는 아이라 큰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클로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로메디안이 무슨 꿍꿍이냐는 눈빛으로 날 흘겨봤다.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트리탄이 유민자치구의 비리를 고발했습니다. 저희는 그 진상을 파악하러 온 거고요.”
“트리탄이요?”
“이 자치구에 아사 직전의 유민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13살 답지 않게 대범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들 칭찬을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클로엘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내려앉았다.
“불의를 못 참는 건 아비를 꼭 닮은 모양입니다.”
“부군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연합군에 힘을 보태선 안 된다고 왕에게 충언하다 살해당했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모국이 패망하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요.”
클로엘이 미소 지었다. 억지로 꾸며낸 웃음이 아니라 가슴 한편이 더욱더 쓰라렸다.
“남편이 죽기 전에 세드나 공작령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곳이라면 안전할 거라고요.”
클로엘의 시선이 창가에 올려둔 향로에 머물렀다.
사랑하는 이의 명복을 비는 은 향로가 이곳에도 있었다.
모아니아 유민들이 가져온 향로는 얼마나 많을까.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나무로 만든 토끼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소녀는 아비의 사랑을 모르고 자랄 테고, 소년은 어미를 지키기 위해서 낯선 검을 들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도 절로 가벼워질 리 없었다.
“부인. 알란도 남작의 폭정을 증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거절하면 트리탄이 저지른 실수를 밝힐 생각이었다.
아들의 기사 후보생 신분을 유지해주는 대가로 증언을 요구하면 어떤 어미가 거절할 수 있을까.
내 계획이 무색하리만치 클로엘이 즉답했다.
“물론입니다. 저와 제 이웃들이 겪은 고통을 법정에서 증언하겠습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곤란을 당하실 수 있으니 고민해보십시오.”
“고민할 여지는 없습니다. 이곳엔 모아니아 동포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부인…….”
“아들도 제가 나서주길 바랄 겁니다. 저도 이런 기회가 생기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로엘의 흔들림 없이 곧은 눈을 보며 나는 트리탄을 떠올렸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다던 소년.
그 소년을 키운 건 기개 높은 어머니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아버지였을 것이다.
“좋습니다. 관리를 보낼 테니 아이와 함께 왕궁으로 드시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로라의 장난감만 챙기면 되니까요.”
클로엘이 어린 딸의 뺨을 쓸어내렸다.
로라에게는 토기 인형 말고도 여러 개의 목각인형이 있었다.
모양새가 정밀하고, 관절이 구부러지는 것으로 보아 일류 장인이 만든 물건 같았다.
“모아니아 특제 인형인가요?”
“네. 로라의 오빠가 만든 거랍니다.”
“트리탄이 직접요?”
“손재주가 좋지요. 모아니아에서 예술가나 기술자는 천한 취급을 받기에 남편이 말렸지만…….”
아들을 엄히 훈육할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인형을 사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클로엘이 슬픈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내 조용하던 살로메디안이 입을 열었다.
“그대 아들인 트리탄은…….”
설마 트리탄을 기사단에서 쫓아내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년이라고 해도 트리탄은 내 목욕을 훔쳐본 죄인이었다.
게다가 살로메디안은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한없이 괴팍해지는 남자였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속으로 간절히 외쳐봤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기사보다 기술자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소.”
뭐야. 트리탄의 재능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거였어?
살로메디안을 오해한 것이 멋쩍어서 뺨을 긁적였다.
“기마술이 뛰어나긴 하지만 기초 체력이 부족해. 지금까지 훈련을 버틴 것도 용할 지경이오.”
“나리께서는 트리탄의 교관이십니까?”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소.”
클로엘은 살로메디안의 신분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움막을 찾아온 이가 국왕과 그 남편인 대공이라는 것도, 그 대공이 일개 후보생에 대해 꿰고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울 테니까.
“트리탄에게는 기술직이 적성에 맞을 것 같긴 합니다.”
“세드나로드에서는 예술가와 기술자를 귀히 여기오. 뛰어난 솜씨를 가졌으니 그대 아들은 크게 성공할 것이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물론 트리탄의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겠지만.”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말이었지만, 살로메디안의 따스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트리탄을 쫓아내겠다고 펄펄 뛸 줄 알았는데, 그는 소년의 미래까지 염려하고 있었다.
역시 내 남편.
사랑을 가득 담아 살로메디안을 바라보다가 클로엘에게 물었다.
“부인. 트리탄이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마도구 함정을 빠져나온 것이 신기해서요. 마물 용이긴 했지만 일급 기사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남편이 아쿠아로드 마도구의 열렬한 신봉자였습니다. 트리탄은 남편 몰래 마도구를 해체해보곤 했지요. 대개 망가졌지만요.”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는지 클로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트리탄은 로라에게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어요. 이곳에 올 때도 마도사 학교 입학을 원했고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만…….”
많은 이들에게 마도사가 될 기회를 주고 있지만, 유민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마도구 제작 기법이 국외로 유출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트리탄처럼 재능 있는 아이를 포기하는 게 오히려 손해 아닐까?
트리탄을 마도사 학교에 입학시켜주면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 정도는 국왕의 재량으로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시아. 그만 떠나야 한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로라와 클로엘이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내 고민을 다 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말씀이 울려 퍼졌다.
「아이시아. 국왕은 한 사람을 구원해주는 존재가 아니란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을 굽어살필 줄 알아야 해.」
어머니, 제가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너무 많고, 답은 보이지 않아요.
짙은 패배감과 무거운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움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오늘 대화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모시러 올 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아들의 소식을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클로엘이 우리를 배웅했다.
토끼 인형을 내려놓은 로라가 살로메디안의 다리에 매달린 건 그때였다.
“오빠, 가지 마. 오빠!”
로라에게는 트리탄이나 살로메디안이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걸까?
보기 드물게 잘생겼다는 것만 빼면 비슷한 점은 하나도 없는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살로메디안의 바짓단을 흔드는 로라와 돌덩이처럼 굳은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당황한 클로엘이 로라를 말렸다.
“로라야! 어른께 그러면 못써!”
“오빠! 오빠!”
“트리탄 오빠는 훈련받으러 갔다고 했잖니?”
“우잉. 오빠아앙……!”
오빠가 오랫동안 그리웠는지 로라가 울먹였다.
살로메디안이 떠나면 한바탕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나리.”
클로엘이 황급히 사과했다.
살로메디안이 한 손을 들어 클로엘을 저지했다.
“괜찮으니 짐을 꾸리도록 하시오.”
“그, 그래도 될까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로엘이 살로메디안의 눈치를 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살로메디안이 무릎을 굽혀 로라와 눈을 맞췄다. 단지 그것뿐인데 로라의 얼굴에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오빠!”
로라는 살로메디안의 반짝거리는 백금발을 잡아당기며 헤헤 웃었다.
자그마한 분홍색 손과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오빠 이뻐.”
“이뻐서 좋겠어요, 살롬.”
부럽다는 투로 내가 말했다. 로라가 금방 내 말을 따라 했다.
“살롱 오빠 이뻐.”
로라가 어릿한 말투로 살로메디안의 애칭을 발음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장난을 거는데도 살로메디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기색이었다.
“살롱 오빠. 로라 좀 봐주세요. 큭큭.”
“장난치지 마라, 시아. 가만히 있는 것도 힘겨우니까.”
“가만히 있지 말고 안아주시면 되잖아요?”
“내가?”
“로라가 살롬을 저렇게 좋아하잖아요. 한번 안아보세요.”
안아준다는 말이 나오자, 로라가 기대감을 듬뿍 담아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아본 적 없다.”
“이번 기회에 도전해보세요.”
“다치면 어떡하려고?”
“안아주는데 왜 다쳐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도르륵 옆으로 굴러갔다.
그가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럼요! 곧 태어날 우리 아기를 위해서라도 연습해두셔야죠.”
“우리 아기?”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왈칵 뒤집혔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그를 보니,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혹시… 혹시, 그대 임, 임신한 것인가?”
평소답지 않게 그는 말까지 더듬었었다.
애써봤지만, 흥분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지 그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휴, 아니에요! 언젠가 생길 거란 이야기였어요.”
“분명 곧 태어난다고 했는데?”
“살롬과 제가 열심히 노력 중이니까… 곧 태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죠.”
노력이라는 표현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아서 나는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참 부족하다.”
“네?”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리 하지 못 했다.”
“살롬,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두 손으로 내 양팔을 움켜잡았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번쩍거리는 그의 눈빛엔 이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살롬 눈빛이 무척 무섭거든요?”
“그대에게 미안해서 그런다. 그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최선이 아니었다고요?!”
내 입술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빠져나갔다.
살로메디안이 괴롭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의 일정과 건강을 위해 자제하고 또 자제했지.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하마.”
“살롬이 열과 성을 다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뭘 걱정하는 거지? 설마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해치기라도 할 것 같은가?”
살로메디안이 다소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기묘한 열기로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와 한껏 고양된 그의 표정 때문에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허리랑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로메디안의 머릿속엔 ‘곧 태어날 아기’로 가득해 보였다.
살로메디안이 망설임 없이 로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기 안는 연습도 더 열심히 해야겠군.”
“꺄아아아!”
내 속도 모르고 로라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움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이, 클로엘. 설마 대낮부터 낯선 남자를 끌어들인 건 아니겠지?”
값비싼 비단옷을 차려입은 40대 남자가 수하들을 거느린 채 거들먹거렸다.
염소수염과 기름진 낯짝,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버릇을 가진 남자였다.
클로엘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알란도 남작님을 뵙습니다.”
“그냥 영주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딱딱하게 남작님이 뭔가?”
이 인간이 알란도 남작이라고?
깜짝 놀란 살로메디안과 내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곳에서 처단해야 할 범죄자와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으므로.
“내 제안은 아직도 고민 중인가, 클로엘?”
“거절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유민 따위가 감히 날 거절한다고? 대귀족의 첩실이 되는 영광을 준다는데!”
남작이 말할 때마다 진흙 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텁텁했다.
유민들의 식량을 가로채고, 국왕을 팔아 거주비를 뜯어낸 데다가, 남편 잃은 여자에게 추근거린다고?
내 나라에서 이런 쓰레기가 귀족이랍시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다니.
짜증과 황당함을 뛰어넘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살로메디안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푸른 불기둥을 뿜어냈을지도 몰랐다.
“클로엘. 좋게 말할 때 내 밑으로 들어와.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다니까?”
“아이들을 키우며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런다고 정숙해 보일 줄 알아? 이 나라에 흘러들 때까지 온갖 잡놈들한테 치마를 들췄을 거면서!”
“뭐라 모욕하셔도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내 말 한마디면 네 아들 새끼도 딸년도 끝장이라는 거 몰라?!”
남작이란 이름의 쓰레기는 어린아이들을 이용해 협박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겁에 질린 로라가 살로메디안의 뒤로 숨었다.
“오, 오빠아…….”
“로라……!”
이런 일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로라를 돌아보는 클로엘의 얼굴에 슬픈 체념이 가득했다.
이래서 트리탄이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고 했구나.
클로엘이 고발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클로엘은 진창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노리는 남자가 과연 알란도 남작뿐이었을까?
만약 내게 조국도, 마력도, 살로메디안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홀몸으로 소중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전쟁으로 파괴된 여자의 삶에 대해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을 후벼파는 통증과 함께.
“살롬.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클로엘에게 정신이 팔린 알란도 남작은 상인 나부랭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살로메디안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목을 베고 싶지만, 그대가 원하지 않겠지?”
“섣불리 남작을 치면 역풍이 불지도 몰라요. 우리 신분이 들켜서도 안 되고요.”
“죽여서도 안 되고 신분을 밝혀서도 안 된다, 내 아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만 내는군.”
못 당해내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보다 뜨겁게 분노해야 할 그의 표정에 여유가 가득했다. 뭔가 방법을 찾은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실 생각이세요?”
“모아니아 왕국 남자들에는 어머니나, 누이를 희롱하는 무뢰한을 벌한 권리가 있다.”
“권리라고요?”
“무뢰한을 마음껏 때려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로메디안이 싱긋 웃더니, 제 다리에 매달린 로라를 바라봤다.
“로라가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값을 치러줘야지.”
그가 품에서 키산드라에게 물려받은 단도를 꺼냈다.
보석으로 세공된 단도는 정확히 알란도 남작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더러운 손으로 클로엘 부인을 건드리지 마라.”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살로메디안을 돌아본 남작이 황당하다는 듯 비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나한테 한 말이냐?”
“그래, 너. 더럽고 냄새나는 쓰레기에게 한 말이다.”
“죽고 싶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 하찮은 장돌뱅이놈이 하늘 같으신 영주에게!”
“네놈 같은 쓰레기가 하늘이면, 나는 조물주쯤 되겠구나.”
“여봐라, 미친놈의 사지를 찢어버려라! 저런 놈에겐 재판도 아깝지!”
남작이 너덧 명의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거구의 사내들이 하나둘 장검을 빼 들었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살로메디안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키 큰 사내일 뿐이었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남신상처럼 완벽한 근육도 헐렁하고 남루한 옷에 감춰져 있었다.
“영주님께 대든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해주마!”
“건방진 놈들에겐 매가 약이지!”
대륙 최강의 기사를 알아보지 못한 남작의 수하들이 죽어서도 후회할 말을 내뱉었다.
하여간 어딜 가든 명줄을 재촉하는 인간들이 꼭 있다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쯧쯧, 혀를 찼다.
그때 클로엘이 보호하듯 살로메디안 앞을 가로막았다.
“이분은 제 손님입니다! 벌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반반한 얼굴에 칼자국 나기 싫으면 비켜!”
“제발 이분을 해치지 마십시오!”
클로엘이 무릎 꿇고 빌었다.
승리감에 젖은 남작이 혀로 두꺼운 입술을 훑었다.
“네년이 내 노예가 된다면 이 정신병자를 살려주마.”
“남작님!”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내 앞에 엎드려 봐. 그럼 용서해줄지도 모르니까. 큭큭.”
남작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클로엘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살로메디안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개소리를 지껄인 걸 후회하게 해주마.”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인데 피부를 찌르는 강렬한 살기가 살로메디안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전투에 대해 무지한 클로엘마저 어깨를 오그릴 만큼 압도적인 기세였다.
사내들의 낯빛이 대번에 푸르죽죽해졌다.
“네놈은 누구냐?!”
“클로엘의 친척.”
“네놈도 모아니아 유민이란 소리냐?”
“마음대로 생각해. 시간은 별로 없겠지만.”
그 말과 동시에 사내들의 팔다리에서 피가 튀었다. 비명도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아악!”
“크아악!”
살로메디안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나조차도 희뿌연 그림자만 쫓았을 뿐이었다.
귀신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놀라운 몸놀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몇 초 만에 수하들이 쓰러지자, 남작이 사색이 되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자빠진 사내들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살로메디안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소란이 일자, 유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살로메디안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미모 때문에 유민자치구 일대가 마비되었을 테니까.
“남작이 또 클로엘 부인을 괴롭히러 온 건가?”
“남작 부하들이 다 쓰러진 것 같은데? 꼴좋다!”
“죽여버려요! 가난한 사람들 등쳐 먹는 나쁜 새끼예요!”
남작을 향한 비난이 한바탕 쏟아졌다. 용기 있는 몇몇은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그동안 유민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거, 거, 건방진 놈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남작이 주춤거리며 물러섰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단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살로메디안에게 남작이 외쳤다.
“날 해치고도 멀쩡할 것 같으냐!”
“넌 모아니아 여성을 희롱했다. 모아니아에서는 그런 쓰레기를 처벌하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망한 나라를 누가 신경 쓸까 보냐? 여긴 세드나로드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아니아인들은 법적으로 세드나로드 백성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유민자치구고.”
“뭣이라?”
“유민의 문화를 인정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내가 모아니아 관습에 따라 널 패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하고.”
살로메디안의 논리는 실로 완벽했다.
내 남편은 잘생긴 것도 부족해서, 똑똑하기까지 하구나!
이 광경을 바비가 봤다면 살롬을 밥버러지 취급하지 않을 텐데.
내가 살로메디안의 기지에 감탄하는 사이 남작이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난 국왕 폐하께 보호받는 대귀족이야! 폐하께서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내가 널 보호한다고? 왕좌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너 같은 쓰레기는 보호 안 해!
남작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내 손에서 피어오른 푸르스름한 불꽃을 본 클로엘이 서둘러 귓속말을 건넸다.
“고정하십시오, 나리.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 알려줘서 고마워요.”
“마력을 형상화하시다니! 나리께서도 교관님처럼 대단한 무인이시군요.”
놀라움과 존경심을 가득 담아 클로엘이 날 바라봤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따르면 내 마력은 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그에게 나눠 받은 심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심장 위에 손을 올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남작은 왕족 혈통이라고 하던데… 저 때문에 두 분께서 곤경에 처하실까 봐 두렵습니다.”
“거짓말입니다. 폐하께서 남작의 폭거를 아셨다면 진작에 처형하셨을 겁니다.”
그 전에 살로메디안이 남작을 반쯤 죽여놓을 거고요.
관람객들이 꽤 모였으니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만들어 줄 거예요.
내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살로메디안은 제일 먼저 단도로 남작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국부를 가린 천 쪼가리만 남긴 채 남작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웃음을 받으며 남작이 두 손 모아 빌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 부, 부디 용서해주게!”
“이 상황에서도 하대가 나오느냐?”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싫어. 네발로 기어도 소용없다.”
차가운 한 마디를 내뱉은 후 살로메디안이 남작을 공격했다.
급소를 내리쳐서 기절시키는 자비는 베풀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극도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는 부위만 쏙쏙 골라 남작을 때렸다.
전투가 아니라 그냥 동네 개싸움처럼.
“끄아아악! 살려줘! 제발!”
“싫다니까.”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네놈의 처형은 재판장에서 결정될 거다. 우선 좀 맞아.”
“꾸웨엑!”
남작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남작에게 핍박받았던 많은 유민들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긴장하기는 했지만 클로엘도 조금은 개운한 기색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떠들썩한 소문이 돌았다.
왕족을 사칭하던 알란도 남작이 모아니아 유민 여성을 희롱하다가 동포에게 짓밟혔다는 내용이었다.
몇몇 이들이 난폭한 유민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곧 묵살됐다.
남작의 파렴치한 범죄가 속속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빈민들의 식량을 착복하고 거주비까지 내라고 했다면서?”
“고향 잃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나라 망신이에요!”
“일거리를 제공한다는 핑계로 젊은이들을 가축처럼 부렸대요. 예쁘장한 여자들은 성노예로 삼고!”
“그 인간 때문에 세드나로드의 국격이 떨어졌어! 이 기회에 유민자치구 책임자들을 조사해야 해!”
유민자치구 점검과 책임자 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세드나로드를 가득 채웠다.
유민들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고,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자는 논의도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였다. 거기에 살로메디안과 상의한 내용을 덧붙였다.
“세드나로드에 유민은 없다. 이제 모두 똑같은 세드나로드의 백성일 뿐이다.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 백성을 핍박하는 자는 엄하게 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