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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48/50)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외전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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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 * *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국법을 만들고, 귀족원을 꾸리고, 세금 체계를 정비하는 등 나랏일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다.

바바라가 축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나는 세드나로드의 건국 기념일조차 잊을 뻔했다.

“시간이 쏜살같네요. 벌써 1년이 지났다니…….”

국왕 집무실 책상 앞에서 중얼거렸다.

오늘도 나는 향긋한 허브티 대신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카포인 달인 물을 마셔야 했다.

살로메디안을 대신해서 왕좌에 앉은 지 1년.

국왕이란 왕세녀 시절 교육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고되고 힘겨운 자리였다.

폭군이 아닌 성군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더더욱.

“폐하, 건국기념제 기획서입니다. 궁정 파티, 거리 축제 예산과 초청 국빈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바바라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천문학적인 액수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산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해요?”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잡은 겁니다. 실무에 들어가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거예요. 폐하의 예복도 맞춰야 하고요.”

“예복엔 얼마나 필요한데요?”

“최소 1000골드 이상이죠.”

“그 돈이면 구빈원과 의료원을 몇 채나 세울 수 있어요!”

“나라의 위신을 세우려면 때론 내장이 뒤틀릴 만큼 귀찮고,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돈 아까운 일도 해야 한답니다. 으으.”

생각만 해도 괴롭다는 듯 바바라가 양손으로 앞섶을 움켜잡았다.

“저도 돈 아까워서 죽을 것 같아요! 하지만 드레스도 맞추셔야 하고, 건국기념제도 해야 해요.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요!”

“백성들이 축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1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맸으니까요. 거리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만으로 들뜬 분위기랍니다.”

“좋아요. 궁정 파티 규모는 축소하고, 백성들을 위한 거리 축제는 최대한 성대하게 치릅시다.”

“자애로운 결정이십니다, 폐하. 남은 문제는 예산 조달이네요. 하아…….”

세드나로드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다.

강대국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마도구 기술.

귀한 약초가 잡초처럼 무성한 마신의 숲.

마력 속성이 달라서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었던 귀족들을 구원해준 온천까지.

세드나로드는 건국과 동시에 온 대륙의 관심을 받았다.

평민들도 교육받을 수 있고, 돈 없는 사람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륙 각지에서 유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전쟁 때문에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신생 국가에 이주민들이 몰리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극빈자라면 어마어마한 국고를 써야 하죠.”

바바라의 동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고민도 바바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민들을 보호하는 게 당연하지만,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에메랄드 린삼을 채집할 수 없는 시기니까, 마도구 수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어요. 디에고를 쥐어짜면 가능할 거예요!”

“디에고가 과로로 쓰러진 것이 지난달 아닌가요?”

남편의 안부를 묻자, 바바라가 움찔 어깨를 튕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보기엔 비실비실해도 꽤 건강 체질이랍니다.”

“이번 휴가도 거절했다면서요?”

“디에고에겐 연구실이 휴양지인 걸 어쩌겠어요? 아직 쓸 만한 남자예요. 연구실에서나, 침실에서나.”

바바라가 남편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내비쳤다.

내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수출도 좋고, 연구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저는 폐하의 건강이 더 염려돼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셨잖아요. 망할 살로메디안 공은 맨날 놀고 자빠졌는데!”

살로메디안을 입에 올리자마자, 바바라의 연두색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에요. 아내와 충신이 뼈 빠지라 일하는데 취미생활이나 하고 앉았고!”

“살롬은 살롬의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기사 후보생들을 쫓아내는 게 그 인간, 아니 폐하 부군의 의무냐고요!”

바바라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살로메디안을 비난했다.

피로와 분노가 겹쳐진 탓에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바비. 어제 많이 못 잤죠? 피곤하니까 날카로워지는 거예요.”

그만 진정하라는 뜻으로 바바라의 손을 잡았다.

“어맛, 폐하!”

전염병에 걸린 개처럼 으르렁거리던 바바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보드라워졌다.

내가 다정하게 만질 때마다 바바라는 사랑에 빠진 십 대 소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연상이기는 했지만 그런 바바라가 막냇동생처럼 사랑스러웠다.

타인과 닿아도 구역질하지 않는 내 몸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둘만 있을 땐 시아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맞아요! 저에겐 그런 특권이 있었죠.”

“특권이라니요. 우린 친구잖아요?”

“시아와 저는 친구죠! 영혼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친구!”

바바라의 눈동자가 한층 더 촉촉해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뜨거운데? 의아함을 감추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바비.”

“제가 몇백 배 더 고마워요. 시아 덕분에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한 달 내내 야근해도 좋다고요!”

“바비… 우린 벌써 한 달째 야근 중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바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요?”

“나는 즉위식 날짜를 잊어버리고, 바비는 야근한 날을 잊어버렸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는 뭐든 할 수 있다고요. 하아, 하아…….”

바바라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빨갛게 상기된 볼, 거친 숨소리, 날 향해 다가오는 바바라는 몹시 이상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바라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바라봤다.

찻잔 안에는 새까만 카포인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런! 카포인을 얼마나 많이 먹은 거예요?”

“어제 열다섯 뿌리, 오늘 세 뿌리 정도? 졸릴 땐 카포인이 최고더라고요. 헤헤.”

“주전자에 한 뿌리만 넣어서 우려먹는 약초예요. 각성효과가 지나쳐서 위험하다고요!”

“그래요? 헤헤. 몰랐네요, 시아. 헤헤.”

바바라가 주정뱅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비틀거렸다.

카포인 과음에 따른 부작용이 틀림없었다.

“일단 앉아요.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바바라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려는데 바바라의 코에서 새빨간 코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코에서 딸기 주스가 나오네? 에헤헤.”

바바라가 반쯤 풀린 눈으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서둘러 도움을 요청했다.

“치료 신관을 불러주세요! 총리대신이 이성을 잃었어요!”

* * *

치료 신관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로메디안이 찾아왔다.

“시아, 괜찮은가!”

훈련 도중 달려왔는지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단추가 서너 개쯤 풀린 셔츠 사이로 잘 다듬어진 가슴 근육이 엿보였다.

어젯밤 나는 저 가슴에 매달려서 무슨 소리를 냈던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던 높은 신음.

살로메디안과 함께 하는 밤은 언제나 놀랍도록 달궈진 체온과 낯선 열기로 가득했다.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휘어 감으며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남자가 기억을 들쑤셨다.

맞닿은 피부의 촉감. 끈끈한 땀과 그보다 농밀한 체액.

뒤엉키다가 결국 하나가 되어 버린 체취.

밤은 길었고 살로메디안은 멈출 줄 몰랐다.

아니, 멈추지 않길 바랐던 것은 내 쪽이었다. 반사적으로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이시아! 총리대신이 쓰러진 위급 상황에서!

수줍은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변명하듯 바바라를 가리켰다.

“쓰러진 건 바비예요, 살롬.”

대신관이 치료 마력을 쏟아부었지만 바바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혈색 좋은 얼굴로 코를 도로롱 도로롱 골며 자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퍼 자는 것 같은데?”

“카포인으로 버티면서 며칠 밤을 지새웠어요.”

“한참 깨어나지 않을 것 같군.”

“이참에 푹 쉬게 하려고요.”

“그럼 정말 큰일인데.”

살로메디안의 단정한 얼굴에 근심이 가득 서렸다.

바바라를 걱정하는 살로메디안은 몹시 낯설었다.

“살롬이 웬일이에요? 바비를 초록 악마라고 부르던 분이.”

“이 악마가 퍼 자면 내 소중한 아내의 일이 늘어날 게 아닌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세상의 중심은 나고, 나 말고는 관심 없는 살로메디안 다운 대답이었다.

“거칠고 시끄러운 꼬마지만 업무 능력만은 쓸만하지. 얼른 일어나서 그대 몫까지 일해야 할 텐데.”

“어휴, 매정도 하셔라.”

“쉬어야 할 사람은 바바라가 아니라, 그대다. 그대가 쉬려면 이 꼬마가 필요하고. 찬물을 끼얹으면 정신이 들지 않을까?”

살로메디안이 꽃과 물이 가득 담긴 화병을 들어 올렸다.

“설마 바비한테 그 물을 뿌리려는 건 아니죠?”

“아, 미안. 꽃이 시들 뻔했군. 초록 악마에겐 이것으로 충분한데.”

사과와 동시에 살로메디안의 손에서 커다란 마력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내 집무실을 장식하는 꽃보다 총리대신을 하찮게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살롬 때문에 바비가 사직서라도 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바비가 없으면 전 못 버틴다고요.”

“이 꼬마가 그토록 소중한가?”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기운이 빠져있었다.

바바라 없이 건국기념제 준비를 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 아찔했다.

“제일 소중하죠. 바비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세드나로드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예요.”

“그럼 나는?”

살로메디안이 불쑥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눈꺼풀을 천천히 끔뻑거렸다.

“살롬이 뭐요?”

“나는 소중하지 않은가?”

“네?”

“나와 바바라 중에 누가 더 소중하지?”

살로메디안은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질문이 그래요?”

“어린애라 놀려도 좋아. 하지만 그대의 대답을 꼭 듣고 싶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내 전신을 꿰뚫었다.

그저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아랫배에서 시작된 찌릿한 감촉이 온몸을 훑어 내렸다.

살로메디안의 손가락이 뺨에 닿았을 때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잊히지 않은 어젯밤의 열기가 다시금 말초를 자극한 탓이었다.

“시아. 말해 줘.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지?”

벌꿀로 만든 크림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독한 갈증이 한순간 치솟았다.

살로메디안도 내 석류 빛 눈동자에 비친 열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시아.”

그가 다시 한번 은밀한 음성을 흘렸다. 늘 듣던 목소리인데 솜털이 바짝 서면서 입 안에 마른침이 고였다.

흘끔 곁눈질한 살로메디안은 언제 봐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을리지 않는 백옥 빛 피부는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매끄러웠고, 백금발은 크리스털 샹들리에보다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또 어떤가.

그 안에 담긴 터질 듯한 욕정의 불길은?

나도 모르게 속눈썹을 떨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히 살롬이 제일…….”

거기까지 말하는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코를 골던 바바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시아는 살로메디안 공이 제일 귀찮으시겠죠!”

“바비, 정신이 좀 들어요?”

“지금 제 건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언제 쓰러졌냐는 듯 바바라가 형형한 눈빛으로 살로메디안을 쏘아봤다.

“저도 항상 궁금했어요. 시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군지!”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왜 남편과 친구가 내 선택을 받으려고 안달 내는 거지?

“시아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죠? 평화로운 나라에 쓸모없는 살인귀인가요, 온몸을 바쳐 충성하는 총리대신인가요?”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부속품과 운명으로 맺어진 남편이 비교 대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 왜 구걸을 하셨을까? 시아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울 기세던데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바바라가 비꼬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시아. 어디가 불편한가?”

“두통이 조금 있어요. 두 분 덕택에요.”

“그만 침대로 가자. 건강이 상할까 몹시 염려된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싸 안자마자, 바바라가 대차게 콧방귀를 끼었다.

“흥! 머릿속에 야한 것만 가득 찬 늑대가 자상한 척하시네요.”

“뭐라?”

“살로메디안 공이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인다고요. 오늘은 시아를 얼마나 괴롭힐 작정이세요?”

“건방진 악마. 지옥으로 돌아가게 해주마.”

살로메디안이 바바라를 향해 물 화살을 만들었다.

위협용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크고 날카로운 화살이었다.

“역시 살인귀! 제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시아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쉬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바바라와 물 화살을 장전한 살로메디안을 진정시킬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닥쳐요. 활활 태워버리기 전에.”

내가 마력 불꽃을 일으켰다.

분노로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 난 뒤에야 바바라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시아. 그대 불꽃색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대의 불꽃은 바다를 닮은 청명한 푸른색이지. 건강이 상했을 땐 보랏빛이 비치고.”

살로메디안은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처럼 진지한 얼굴로 날 둘러싼 불꽃을 가리켰다.

“자줏빛이 도는 걸 보면 그대는 피로가 극심하고 우울한 상태다.”

“제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서 불꽃의 색이 변한다고요?”

“그대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

살로메디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피로하고 우울한 건 사실이에요. 살롬이 바비랑 자꾸 싸우니까요.”

“아니.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게 뭔데요?”

“일단 불꽃을 갈무리하도록.”

살로메디안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명했다.

누구 앞에서든 국왕으로서의 내 체면을 살려주는 그였다.

하지만 내 건강과 안위에 관련된 일이라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걸 잘 알기에 군말 없이 불꽃을 갈무리했다.

불꽃이 자취를 감추자, 살로메디안이 날 번쩍 안아 들었다.

“살롬!”

물씬 다가온 그의 체취를 맡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살로메디안의 품은 익숙하지만 바바라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덥석 안기는 건 여전히 부끄러운 탓이었다.

“뭘 하려는 거예요?”

“치료와 보호.”

살로메디안의 입매에 눈부신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만으로 한결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얄미웠는데.

살로메디안의 한 마디에 또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아내를 보호하겠다며 고집부리는 아름다운 남편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집무실 밖으로 사라지는 우리를 향해 바바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아에게 필요한 사람은 저예요! 살로메디안 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축제도 제가 완벽하게 성공시킬 거라고요!”

* * *

살로메디안의 섬세한 손이 내 어깨에 걸쳐진 실크 가운을 벗겼다.

싱그러운 밤바람이 맨 살갗에 닿았다.

살짝 한기가 돌면서 나는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아…….”

“긴장하지 마, 시아. 근육이 굳으면 더 피로해지니까.”

긴장하고 싶지 않지만, 살로메디안과 함께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서 그럴까. 그가 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피부를 더듬는 그의 시선이 달군 쇠처럼 뜨거웠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낯설고 부끄럽구나. 눈빛만으로도 어쩔 줄 모를 만큼.

살로메디안은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짐승이기도 했다.

그 양면성이 가끔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솔직해지자면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반쯤 미쳐있었다.

아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완벽히 미쳐있었다.

그도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가끔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면 참지 못할 것 같은데.”

달빛 아래 살로메디안의 치열이 하얗게 빛났다.

그는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속마음조차 낱낱이 읽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하나로 연결된 심장이 같은 간격으로 뛰었다.

살로메디안도 나와 똑같은 온도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내 목선을 스치는 손길,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기다릴 여력도 없었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몸을 내맡기고, 다시 없을 즐거움을 말초로 감각하고 싶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이 먼저 선언했다.

나는 애써 굳은 어깨를 펴고, 가쁜 숨을 삼켰다.

“…좋아요.”

“너무 서두르지 마. 너무 들뜨지도 말고.”

“놀리지 말아요. 이제 저도 익숙하니까요.”

“대단한 숙련자 같은데?”

살로메디안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조금은 관능적으로 보이길 희망하면서.

“그럼요. 리드할 테니까, 살롬은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용기 내어 살로메디안의 손을 잡았다.

고작 손을 잡았을 뿐인데, 현기증이 핑 돌만큼 아찔했다.

리드하겠다는 허풍이 들통나지 않도록 붉은 눈동자에 힘을 줬다.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용감한 아내에게 기대를 걸어보지.”

사뭇 여유롭게 말하고 있지만, 살로메디안의 얼굴에 감춰지지 않는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이었고,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자 애쓰는 포식자였다.

마른침을 넘기는 그의 울대.

그 사소한 움직임만으로 내 몸은 한껏 달아오르고 말았다.

지금은 살로메디안이 아닌, 온천욕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하아. 이게 얼마만의 온천인지 모르겠어요.”

미끄러지듯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매번 경험할 때마다 짜릿한 온천수의 촉감이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어줬다.

뜨끈하고, 싱그럽고, 편안했다.

알몸을 감싸던 리넨천을 벗어버렸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온천이 최고예요. 여긴 천국이라고요!”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못 말리겠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 너무 들뜨지 말라니까.”

“온천에서 어떻게 들뜨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살롬도 얼른 들어오세요. 저만 따라 하시면 최상의 온천욕을 하실 수 있으니까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온몸에 힘을 뺐다.

턱밑에서 찰랑거리는 온천수 위로 팔이 둥실,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에게도 온천욕의 진수를 꼭 알려주고 싶었다.

“바람 불면 나부끼는 갈대처럼 몸을 맡기는 게 중요해요. 온천을 믿고 날 던지는 거죠.”

“정말 대단한 숙련자로군.”

“심통 내지 마시고요. 절 온천에 데려온 건 살롬이잖아요?”

“그대의 피로를 푸는데 온천욕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그것마저 샘난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투덜거렸다.

“온천보다 내 품이 더 좋을 수는 없는 건가?”

“또 둘 중 하나를 고르게 하려는 거예요?”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살로메디안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양손을 올렸다.

“아내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지. 그대가 행복하다면 나도 좋다.”

“왕궁으로 이사하면 지금처럼 온천욕을 할 순 없겠네요.”

“왕궁터로 쓰기에 여기는 너무 외졌지. 마신의 숲 한가운데 있으니까.”

세드나로드의 왕궁은 새로 짓지 않고, 옛 아쿠아로드 왕궁을 조금 고쳐 쓰려 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대규모 증축이 필요했다.

빈센트가 진두지휘한 증축 공사가 곧 마무리되면 임시 왕궁인 세드나 공작저를 떠나야 했다.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온천을 두고 떠나는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아쿠아로드 땅에도 온천이 샘솟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신에게 부탁해봐. 도와줄지도 모르니까.”

마신이란 단어가 짜르르한 통증이 되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사경을 헤매는 살로메디안을 위해 마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키산드라.

저주해 마지않던 마신이 되어 700년을 버텨야 하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수천 개의 바늘을 삼킨 듯 괴로웠다.

“키산드라 님은 잘 계실까요?”

“인간이 신을 걱정하는 건가? 오만하고 뻔뻔하게 잘 있을 거다. 살아생전 그랬던 것처럼.”

“살롬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이셨어요.”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직 키산드라를 향한 죄책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은 키산드라의 희생 위에 세워진 거였다.

그녀를 지옥에 빠뜨리고 우리만 이토록 행복해도 되는 걸까.

키산드라는 우리를 미워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그녀가 앉아 있던 온천 바위에서 그녀를 불러보곤 했는데,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신은 신의 영역에,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걱정하지 마, 시아. 내가 곁에 있다.”

살로메디안의 다정한 목소리가 날 감쌌다.

그는 언제나 내가 옅거나, 혹은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줬다.

나도 그의 보호막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내 쪽에서 그의 품을 파고들 때가 더 많았다.

“맞아요. 살롬처럼 절 사랑하는 이들이 잔뜩 있지요.”

“너무 많아서 탈이지. 휴고는 우리 아이를 지킨답시고 기사단까지 새로 꾸렸더군. 왕세녀 전하 수호대라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기사단을요?”

“그래.”

“게다가 왕세녀 수호대라고요? 왕세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사내아이일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던데.”

기가 차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날 친딸 이상으로 아끼는 휴고라면 더한 일을 해도 놀랍지 않았다.

미래의 왕세녀, 혹은 왕세자를 위해 근위대장 자리마저 내려놓은 휴고였으니까.

“빈센트는 또 왕궁 증축 현장으로 떠났다. 그 녀석이 근위대장인지, 공사 반장인지 모를 지경이야.”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왕궁을 만들겠다고 열의를 보이더라고요.”

“그 열의를 델마에게도 좀 보여주면 좋겠는데.”

살로메디안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깜짝 놀라 무심한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살롬도 델마의 연심을 알고 계셨어요?”

“그걸 어찌 모르겠나. 델마는 빈센트만 곁에 있으면 돌덩이처럼 굳어버리는데.”

“어색해서 그러는 걸 거예요.”

“빈센트가 사라지면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군. 차라리 고백을 하든가. 쯧쯧.”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혀를 찼다.

“델마를 응원하시는 거예요?”

“내가? 설마.”

“제가 델마랑 있을 때 꼭 빈센트를 부르시잖아요.”

“남의 연애사엔 관심 없다. 내 관심사는 내 사랑뿐이야.”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물속에서 전해지는 단단한 팔 근육. 화들짝 놀란 내가 몸을 뒤로 빼자, 그가 올가미처럼 날 감쌌다.

“도망가지 마. 더 참을 수 없어지니까.”

살로메디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타는 듯한 시선을 견디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마터면 그에게 참지 말라고 할 뻔했다.

온천 뒤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 * *

“누구냐?”

살로메디안이 나를 품 안에 가두며 외쳤다.

가운을 잡아채 내 어깨를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입자일까? 아니면 마물?

둘 다 불가능했다. 이곳은 이중삼중으로 보호받는 왕실 전용 온천이었다.

대륙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는 흑룡 기사단이 외부인 출입을 철통처럼 막고 있었다.

마물을 쫓아내는 마도구도 사방에 깔려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살벌한 음성을 내뱉었다.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라.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주위로 수백 개의 물 화살이 떠올랐다.

“나, 나갈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앳된 목소리와 함께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 후보생인가?”

진흙과 나뭇잎 따위로 더러워졌지만, 소년이 입은 옷은 분명 기사 후보생 단복이었다.

“네 녀석은 트리탄 아니더냐?”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가파른 각도로 휘어 올라갔다.

“살롬도 아는 아이인가요?”

“대공 전하께서 절 아십니까?”

트리탄이라 불린 소년과 내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차가운 눈빛으로 트리탄을 노려봤다.

“훈련번호 221. 유민 출신. 물 속성 마력을 가졌으나, 치료 능력은 없음. 3개 국어를 할 줄 알고, 기마술에 능한 편. 홀어머니와 여동생이 유민자치구에 거주 중.”

“그, 그걸 어떻게?!”

“정체도 모르는 놈을 내 아내의 기사단에 넣었을 것 같나?”

살로메디안이 ‘내 아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답했다.

그가 기사단에 애정을 보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개 후보생의 정보까지 줄줄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트리탄을 바라봤다.

밝은 갈색 머리칼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었다.

유민이라면 크로티무스 제국인도, 아쿠아로드 출신도 아니라는 뜻인데.

살로메디안이 유민 중에 재능있는 아이들을 기사 후보생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다는 말 또한.

“귀때기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어째서 국왕 폐하의 목욕을 훔쳐보고 있었지?”

살로메디안은 대리석 조각처럼 무표정했으나, 전신에서는 화살보다 예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대로 변명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트리탄이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용서해주십시오! 폐하를 욕보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설명해.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사, 사냥 때문입니다.”

“뭐라?”

“마물 실습 시간에 먹어본 럼블크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가족들에게 맛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럼블크 사냥을 나왔다?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트리탄을 겨냥하던 물 화살이 파르라니 빛났다.

입 한번 잘못 벙끗하면 소년은 수백 개의 물 화살에 꿰뚫릴 처지였다.

“굶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우매한 짓을 벌였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네 말은 거짓이다. 유민자치구에 충분한 식량을 배식하고 있으니까.”

“유민자치구엔 아사 직전의 주민들이 여럿 있습니다!”

“거짓은 그쯤 해둬라. 네놈의 배후는 누군지?”

“배후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저는 첩자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겁에 질린 것인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살로메디안이 야속한 것인지 트리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목욕 가운을 여미며 내가 끼어들었다.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이 아이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잖아요.”

“그대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그러나 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테레사의 명을 받고 날 납치하기 위해서 숨어든 소녀 피오넬.

피오넬은 내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마신의 숲에 버려진 제물인 척했다.

덕분에 숨겨진 신전과 성물을 찾을 수 있었지만, 살로메디안은 날 위험에 빠뜨린 치명적인 실수를 두고두고 곱씹고 있었다.

피오넬을 거두자고 조른 것은 나였음에도.

“어린아이라고 무조건 믿는 건 아니에요.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내가 살로메디안의 손을 잡았다.

매섭게 굳어있던 그의 입매가 조금쯤 부드러워졌다.

이럴 때 보면 바비랑 똑같다니까.

슬쩍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감추고, 트리탄에게 말했다.

“네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철저히 조사하겠다. 만약 거짓이면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제발 예비 기사단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쫓겨나는 것이 두려우냐?”

“제가 쫓겨나면 어머니를… 어머니를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이 수치스러운지 트리탄이 벌겋게 부푼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첩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네놈이 국왕 폐하의 안전을 위협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전하!”

“묻겠다. 네가 근위대장이라면 그런 놈을 기사단에 둘 수 있겠느냐?”

트리탄의 둥그런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년이 몸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장 쫓아낼 겁니다…….”

“그럼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알겠구나.”

“예.”

“아주 멍청이는 아니군.”

“죗값을 치르기 전에 자비를 구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옵니다.”

소년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했다.

유민이라고 하기엔 고급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는 아이인가?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유민 출신 기사 후보생을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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