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 *
새 나라의 이름은 세드나로드였다.
세드나란 이름은 ‘숭고한 지배자’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숭고한 지배자가 가는 길이라니.
내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새 나라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국호였다.
아쿠아로드 출신 일부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제국처럼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나라의 근간이 될 치료사와 마도사 양성이었다.
아쿠아로드 출신 치료 신관들이 의료 교육원을 맡았다.
왕립 마도사 학교도 문호를 개방해 더 많은 이들이 마도사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도 이용할 수 있는 마도구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총리대신은 바바라가 맡았다.
“제가 아니면 누가 그 중임을 맡겠어요? 대륙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제국쯤은 금방 씹어 먹을 거라고요!”
자신만만한 바바라와 달리 왕실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빈센트는 걱정을 앞세웠다.
“휴고 님께서 맡으셔야 할 일을… 부족한 제게 너무 무거운 책임을 내리셨습니다.”
나도 처음엔 휴고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휴고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비밀입니다. 사명이 내릴 때까지 일개 근위 기사로서 두 분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말 붙일 겨를도 주지 않고 휴고가 도망쳤다.
그래서 휴고의 사명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델마에게 아쉽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전하의 호위기사가 더 큰 영광입니다. 전하를 측근에서 모시는 것으로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델마는 왕실 기사단장 가문의 후계자잖아.”
“아쿠아로드 왕실에 미련 없습니다. 제 조국은 세드나로드입니다.”
역시 디에고는 마도사 학교 교장에 취임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값싼 보급형이라고 해도 성능이 떨어지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아이를 만들어낼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바바라와 사귀기 시작한 후 디에고는 제법 말끔해졌다.
디에고와 바바라 둘 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치고는 너무 일에만 빠져있긴 했지만.
마력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건 법으로 금지했다.
대신 마력이 달라서 결혼할 수 없는 부부에게 무료로 온천을 개방했다.
마신의 숲에서 새로운 온천이 여러 개 터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신의 상징인 온천이 생기다니! 마신의 가호가 내린 나라다!”
“세드나로드에 광영이 비추는 징조야!”
“대륙에 새로운 태양이 떴다!”
대귀족과 왕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온천을 백성들에게 개방하자, 살로메디안과 내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야! 보통 왕족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제국을 구한 두 분 아니신가? 세드나로드도 제국처럼 강한 나라가 될 거라고!”
“새 세상이 오려나 봐요. 살아있길 잘했어요!”
봄과 함께 희망의 바람이 찾아왔다.
사람들 얼굴에 미래를 향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 * *
대관식 하루 전날.
나와 살로메디안은 치열하게 대치 중이었다.
“누가 국왕인지 아직 안 정해졌다는 게 말이 돼요? 내일이 대관식인데.”
팔짱을 낀 내가 선공을 날렸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짐짓 여유를 부렸다.
“그냥 그대가 하면 되잖나?”
“살롬이 한다고 했잖아요!”
“고민해 보겠다고 했을 뿐이다.”
기가 막히고, 코도 막히는 상황이었다.
대관식 준비도 끝났고, 축하 사절단도 도착했는데!
“내가 즉위하면 바바라는 사직한단다. 델마는 날 암살하려 들지도 몰라. 남편이 걱정되지 않는 건가, 시아?”
살로메디안이 꿈결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날 빤히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번만은 미남계에 넘어갈 수 없었다.
“무조건 국왕은 살롬이 되어야 해요!”
“왜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군.”
“나라와 저를 위해서라고요! 살롬이 해주세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로메디안의 옷깃을 흔들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입술을 삐죽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내 부탁에 약하다는 걸 알고 시작한 작전이었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정말 그러길 바라는가?”
“제발 부탁이에요!”
두 손을 모으고 연신 눈망울을 깜빡였다.
그 눈빛에는 당해낼 수 없다는 듯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지.”
드디어 항복을 받아냈다! 세드나로드의 국왕은 살로메디안이야!
두 손을 높이 들고 기쁨을 터뜨렸다.
“만세! 드디어 해결이네요!”
“대신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 국왕이 됐다고 나란 인간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살로메디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찬물을 끼얹었다.
불길함이 불쑥 치밀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대가 국사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고, 보물 창고가 어디 있는지 망각하며, 하루 종일 기사들과 흙먼지 속을 뒹구는 국왕을 탄생시켰다는 뜻이다.”
“살롬!”
“백성보다 아침 식사를 남긴 아내를 더 걱정하는 남자를 국왕으로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그대 뜻에 따르지.”
“그러면 안 되죠!”
“어차피 국왕의 업무는 그대의 차지가 될 거다. 경험해봐서 잘 알 텐데?”
살로메디안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검과 기사단밖에 모르는 남편 때문에 종일 집무실에 처박혀있었던 나날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그래도 왕이 됐는데…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한다. 살인광에서 애처가가 된 것으로 충분해.”
기대하지 말라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손을 내저었다.
“초대 국왕의 책임은 막중하지. 정치, 외교, 경제, 행정, 통합… 해결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야.”
“그, 그렇겠죠?”
“이 상황에 꼭두각시 왕을 만들고 싶나, 시아?”
“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세요! 살롬이 열심히 통치하면 되잖아요?”
“열심히 하면 더 문제다.”
“…네?”
“나는 정치에 까막눈이 아닌가? 그런 자가 국왕이랍시고 고집을 부리면? 그것도 열심히 부리면? 응? 나라 꼴이 어떻게 될까?”
비틀거리던 내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처음 세드나 공작저로 향할 때 바바라가 써줬던 편지 구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각하는 전쟁에 정신이 팔려 영지 경영을 내팽개친 분입니다.
여러 방면에서 무능한 각하께서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살육이지요!]
살로메디안이 외교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할까?
분명 전쟁부터 하자고 할 게 뻔했다.
상대가 날 모욕했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질 터였다.
모두가 말려도 왕권을 이용해 폭력투쟁을 고집한다면?
세드나로드는 대륙의 싸움꾼으로 낙인찍힐 테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겠지!
“…제가 할게요, 국왕.”
내가 힘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기껏 만든 나라를 망가뜨릴 수는 없으니까.
“잘 생각했다. 그대처럼 훌륭한 왕제를 두고 내가 즉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 손을 밀치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시끄러워요.”
“이미 왕관도 그대에게 딱 맞게 만들어뒀다.”
“언제요? 아니, 왜요?”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로메디안이 빙긋 웃었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픈 그였다.
몹시 얄미웠지만 못 견디게 아름답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왕좌에 앉히고 싶었거든.”
“왕좌가 그리 귀찮으셨어요?”
서운함이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두 팔로 날 감쌌다.
그의 손길이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익숙한 감촉에 말초가 먼저 반응했다.
고막이 녹아내릴 듯 달콤한 음성이 이어졌다.
“나보다 훨씬 더 잘해 내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대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여인 아닌가?”
“살롬…….”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대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인이 될 거라고.”
누구보다 날 믿고 사랑해주셨던 어머니.
슬픈 미래를 보셨지만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
어머니도 내가 왕이 되길 바라셨을까?
“예언서도 잊으면 안 된다.”
기억을 상기시켜 주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흑발, 적안을 가진 희망의 씨앗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것이다. 가짜 왕족이 아쿠아로드를 역사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허나 슬퍼하지 말라. 가짜는 처형될 것이고, 새 나라의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 흘릴 것이니!”
우아하고 화려한 몸놀림으로 살로메디안이 내게 손을 뻗었다.
“함께 기뻐하자, 시아. 오래된 예언이 이루어졌으니까.”
그 손을 잡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처럼 내게 와준 살로메디안.
그와 나눠 가진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좋아요. 대신 평생 제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그의 손을 쥐며 부탁했다.
살로메디안이 영혼에 새겨 간직하고 싶을 만큼 황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은 말이오, 부인.”
* * *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살로메디안이 아닌 내가 왕관을 쓰는 것을 보고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바바라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흑흑! 세상 쓸모없는 살로메디안 님 따위가 즉위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이제 걱정 없이 일만 하면 돼! 흑흑흑.”
“바바라 님께서 우시니 제 가슴이 찢어집니다. 눈물을 멈추는 마도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바바라를 다독이던 디에고가 노트를 꺼내 새로운 아이디어를 끼적였다.
대관식에서 눈물을 보인 건 바바라뿐이 아니었다.
“아이시아 님께서 국왕이 되셨으니 지금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델마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녀의 낯선 모습에 빈센트가 크게 당황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만드실 나라를 직접 눈으로 보셔야지요. 보필도 하셔야 하고요.”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저는 테레사의 호위기사였고…….”
“과거일 뿐입니다. 델마 경이 건국 일등 공신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부디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대관식 이후에 두 사람이 급격히 가까워졌던 걸 보면 빈센트의 위로가 델마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왕 폐하 만세! 만세!”
휴고는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내 즉위를 축하했다.
틈만 나면 만세를 부르는 통에 이상한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휴고 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빈센트? 우리 아이시아 님이 국왕 폐하가 되셨는데!”
“저한테 기사단장 자리도 떠맡기시더니… 노망이 나신 것도 아닐 테고, 대체 왜 이러십니까?”
“내 사명을 안다면 부러워서 미칠걸?”
“그 사명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폐하가 낳으실 아기님의 호위기사가 되는 것이지!”
“네엣?”
“나는 아기님의 호위기사가 될 거란 말이야! 대륙 최고 미녀인 폐하의 후계자를 내 손으로 지켜드릴 거라고! 우하하하!”
휴고가 왕실 기사단장 자리를 사양한 것은 오직 그 때문이었다.
황당하게도 휴고의 야망은 기사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이제 숙모님이 아니라, 국왕 폐하라고 불러야겠군. 어쩐지 쓸쓸한걸.”
귀빈석에 자리 잡은 네이선이 중얼거렸다.
바넷사가 매서운 어조로 충고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자세를 바로 하시고 황제의 위엄을 갖추십시오.”
“알겠소, 황후.”
“세드나로드는 무섭게 성장할 겁니다. 혈맹이라고는 하나 대륙의 패권을 잃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소. 황후 말에 따르리다.”
네이선은 바넷사에게 꽉 잡혀 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막상 나는 대관식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드디어 해냈다는 흥분과 지나치게 무거운 왕관 탓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없었다면 각국의 축하 사절단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내 눈부시고, 가슴이 설렜다.
내 옆자리를 살로메디안이 지켜줬기에 더욱 그랬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오색빛깔 꽃가루를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꿈만 같아요.”
“오래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면 잘 믿기지 않는 법이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대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그래도 걱정돼요.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데 실망시킬까 봐.”
“너무 잘하려고 하면 실수가 생긴다. 어깨에 힘 빼고 지금처럼 진심만 다 하면 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국왕을 하시질 그랬어요?”
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살로메디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쓸모 있는 장소는 전쟁터뿐이다.”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게 제 목표인데 어쩌죠?”
“그럼 다른 쓸모를 찾아야지. 이를테면 침대 위라던가.”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들끓는 욕망으로 혼탁해졌다.
침대 위에서의 기억이 날 덮쳤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짙은 체취와 내 안을 파고드는 살로메디안의 존재감.
그에게 점령당하고, 그를 점령해나갔던 시간들.
왕관을 썼을 때보다 심장이 바삐 뛰었다.
체온이 주는 따스함을, 함께 목욕하는 짜릿함을, 완전히 하나가 되는 충만함을 처음 가르쳐준 내 남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 놀랍고도 행복했다.
“시아. 대관식이 끝나면 뭘 하고 싶은가?”
살로메디안의 물었다.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목욕부터 해야죠. 온천욕이 최고지만 오늘은 대욕실로 만족할게요.”
아쿠아로드 왕궁을 임시로 보수한 세드나로드 왕궁엔 나름대로 소박한 욕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와 살로메디안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가끔은 대담한 놀이도 서슴지 않았다.
욕실은 우리 둘만의 세계였다. 야릇하고도 특별한 역사 또한 오직 우리의 것이었다.
“시아. 사실 고백할 것이 있는데…….”
살로메디안이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사실 부부가 같이 목욕하는 문화 같은 건 없다.”
내가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살로메디안의 얼굴색이 희게 질렸다.
“속여서 미안하다.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대와 함께 목욕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아서…….”
어설프게 변명하는 살로메디안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동안 사실을 숨겨왔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진작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고?”
“온천을 개방할 때 바비한테 들었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를 속인 천하의 개망나니, 색정광이라고 하던데요?”
“큼큼.”
살로메디안이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발그레 달아오른 그의 귓가에 내가 더운 숨결을 밀어 넣었다.
“저도 살롬과 목욕하는 게 좋아서 모른 척했던 거예요.”
“정말인가?”
“그럼요. 오늘도 같이 목욕하실래요?”
살로메디안의 눈동자가 한껏 헤집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금빛 속눈썹이 내 심장을 조였다.
그가 사랑스러워서 그동안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슬쩍 던졌다.
“이제 아쿠아로드식 목욕 문화는 그만둘까 싶은데… 어때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살로메디안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천을 몸에 두르고 욕조에 들어가는 내게 항상 불만이었으니까.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그 말과 함께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내렸다.
도톰한 살점을 헤집고 뜨거운 숨결이 밀려들어 왔다.
아랫입술을 삼킨 그가 부드럽고 섬세하게 내 안을 더듬었다.
미끄러지듯 파고드는 살로메디안을 받아들이며 익숙하고도 낯선 전율을 삼켰다.
“우와아아아!”
국왕 부부의 키스에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 소리조차 점차 멀어질 만큼 정열적인 키스였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행복과 가슴 벅찬 기쁨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감기 전에 환상처럼 엷은 안개를 본 듯했다.
안개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이젠 행복하기만 하거라, 아이시아. 헬레나의 딸. 불과 물 모두를 가진 아이. 나는 너의 수호신이 되어주마.』
그것은 눈물 나도록 그리운 신의 음성이었다.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