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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제의 문장도 찍혀 있어요! 공식 문서 맞죠?”
아이시아의 발그레해진 뺨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겠지.”
“와! 드디어 독립이군요! 독립 만세!”
아이시아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맑게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그 어떤 노랫소리보다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시아가 소리 내어 웃을 수 있게 되었지?’
벅찬 감동이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시아는 웃는 방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을 때면 주변의 공기까지 얼어붙었다.
웃을 줄도, 울 줄도 몰랐던 작은 소녀.
망가진 마리오네트 같았던 아이시아는 이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여장부가 되었다.
구김 없이 웃을 줄 알게 되었고, 그 웃음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게 됐다.
눈부시도록 성장한 아이시아를 보며 살로메디안은 또 한 번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독립하길 잘했어. 시아의 밝은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물론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네이선을 처벌할 기회를 잃었군.”
“정말 전쟁하실 작정이셨어요?”
“전쟁은 아니더라도 네이선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황제가 누구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롬 덕분에 황제는 마신과 계약까지 했어요!”
“네이선을 노린 검이 아니었지 않나.”
살로메디안이 투덜거렸다.
아이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중요해요? 살롬 때문에 황제가 다쳤는데.”
“엄청 중요하지. 내 검을 받으며 그놈은 그대를 넘본 죄를 반성해야 하니까.”
살로메디안이 어금니를 깨물며 황궁에 있을 네이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살려두고 싶지 않지만, 그대를 봐서 참는 거다.”
“바비와 빈센트를 위해서라도 참아주세요. 황제는 곧 바넷사의 남편이 될 테니까요.”
“바넷사가 순순히 같이 온천욕을 했다는 게 희한하군. 안 된다고 버틸 줄 알았는데.”
바넷사가 네이선을 흠모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태우는 걸 우연히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미처 타지 못한 편지 조각이 살로메디안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편지의 수신인은 네이선이었다.
연서라기보다는 보고서에 가까운 건조한 문장이었지만 편지에는 네이선을 향한 사랑이 꾹꾹 담겨 있었다.
‘네이선이 아이시아에게 미쳐 날뛰는 꼴을 옆에서 봐야 했으니 속이 뒤집혔겠지. 결혼하면 고생 좀 하겠어.’
황제를 틀어쥘 바넷사와 그런 황후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는 네이선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어떤 의미론 둘을 연결해준 건 복수와 다름없었다.
살로메디안의 속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바넷사가 왜 버텨요? 부부끼리 목욕하는 건 원래 제국 전통이라면서요?”
아이시아가 해맑게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움찔했다.
‘부부가 같이 목욕하는 문화 같은 건 없었다고 말해줘야 하나? 또 거짓말했다는 걸 알면 화내겠지?’
푸른 눈동자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아이시아의 원망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은근히 보수적이고 부끄러움 많은 여인 아닌가.
그런 면이 귀여운 거지만.
‘이걸 어쩐다. 시아와 목욕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은데…….’
망설임 끝에 살로메디안은 침묵을 택했다.
그것이 소극적인 거짓말이 되더라도 말이다.
“이 사실을 바비한테도 알려줘야겠어요!”
아이시아의 들뜬 한마디가 살로메디안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바바라한테? 굳이 필요가 있을까?”
제 거짓말이 바바라 귀에 들어가면 적어도 10년은 놀림당할 게 뻔했다.
놀림뿐이랴. 바바라의 현란한 말솜씨로 천하의 불한당, 색정마로 몰릴 터였다.
바짝 굳은 얼굴로 살로메디안이 설득을 이어갔다.
“시아. 전에도 말했듯이 목욕은 부부 사생활이라 타인에게 발설하는 건 가급적이면 지양하는 것이 일반적인 에티켓…….”
“살롬.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어요.”
“으응?”
“마력과 상관없이 결혼할 수 있다면 전 대륙이 흥분할 거예요! 온천욕을 하려고 줄을 설 테고요!”
아이시아가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예요? 돈이 된다는 거죠!”
“돈……?”
바바라와 가까이 지낸 탓인지 아이시아는 셈이 빨랐다.
그것이 득일지 실일지 알 수 없지만, 아이시아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마력을 가진 건 귀족뿐이에요. 귀족 상대로 온천 장사를 하면 거금을 모을 수 있다고요!”
“그런가…….”
“마신의 숲에 온천까지! 저주받은 땅이라 불렸지만, 세드나는 천혜의 자원이 넘치는 축복받은 땅이에요!”
“모두 그대 덕분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시아의 관심이 제국의 목욕 문화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마물도 귀중한 먹거리가 될 거예요. 마신의 숲에서 대대손손 귀한 약초를 얻을 수 있고요!”
“아무렴, 그렇고말고.”
살로메디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시아가 장밋빛 미래에 집중하길 바라면서.
“아쿠아로드의 기술력과 노동력이 합쳐지면 제국에 버금가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대가 다스리는 나라니까 당연하지.”
살로메디안이 맞장구치자마자 아이시아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제가 왜 다스려요? 국왕은 살롬이 되어야 하는데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그가 어리둥절해 했다.
아이시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였다.
“제가 국왕이 되면 제2의 아쿠아로드처럼 느껴지잖아요? 살롬이 즉위해야 제국에서 독립한 첫 나라! 이런 느낌이고요.”
“고작 느낌 때문에 국왕을 안 하겠다고?”
“나라 이미지가 국제 정세에 얼마나 중요한데요? 통일 신국을 강국으로 만들려면 첫 시작이 중요해요!”
아이시아가 열심히 설명했다.
일단 살로메디안은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물론 국왕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국왕 노릇이 귀찮다거나, 검을 단련할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아처럼 훌륭한 제왕을 두고 전쟁밖에 모르는 내가 즉위한다고? 난 기사단장 정도가 적당해. 그냥 국왕의 남편도 좋고.’
아이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살로메디안은 통치, 정치 쪽으로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시아가 오기 전까지 영주 업무의 대부분은 바바라가 처리했다.
바바라의 독설을 참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자.”
살로메디안이 슬쩍 말을 돌렸다.
어차피 바바라와 델마 등이 쌍수를 들고 반대할 거였다.
내버려 둬도 국왕이 되는 건 아이시아였다. 괜히 사랑스러운 아내와 입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엄청 중요한 문제인데…….”
아이시아가 꿍얼거렸다.
동그랗고 앙증맞은 어깨에 팔을 걸치며 아이시아가 혹할 만한 말을 꺼냈다.
“시아. 테레사를 심문하러 갈 건데. 같이 가겠나?”
순간 아이시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입을 삐죽이는 귀여운 소녀에서 먹이를 쫓는 사냥꾼으로.
* * *
이게 정말 테레사라고?
시궁창 쥐처럼 불결하고 냄새나는 여자가?
지하 감옥에 갇힌 테레사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원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싯누렇게 변한 드레스, 찢어진 치맛자락 밑으로 드러난 상처투성이 발.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은 불쏘시개처럼 앙상했다.
테레사는 언제나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는데. 하늘색 머리칼은 비단보다 부드러웠고…….
테레사의 자랑이자 왕실의 자랑이었던 하늘색 머리칼은 퀴퀴한 악취를 풍기며 떡져 있었다.
굽실거리는 하늘색 머리칼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테레사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갈 때마다 내 가슴은 지독한 패배감으로 얼룩졌다.
까마귀 같은 흑발이 죽도록 원망스러웠고, 검은 머리칼로 태어나야만 했던 운명을 증오했다.
폐위된 것도, 어머니를 잃은 것도, 학대당하는 것도 모두 하늘색 머리칼을 갖지 못해서라고 믿었다.
“염색약으로 만들어낸 환상인 줄도 모르고…….”
테레사의 두피엔 짙은 남색 머리카락이 삐죽빼죽 자라 있었다.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하늘색 머리칼은 없었다.
매춘부의 화장처럼 천박한 푸른색 빗자루라면 모를까.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이시아.”
쉴 새 없이 두피를 긁어대며 테레사가 음침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는 척하지 마!”
“…….”
“넌 천국에 있고 난 지옥에 있는 것 같지? 넌 고귀하고 난 천박해 보이지?”
테레사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있었다.
나는 버려진 개보다 더 비루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운이 좋아서 왕녀로 태어난 주제에! 하지만 난 달라! 전부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
“너만 아니었으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네 어미가 죽은 것도 전부 네 탓이야!”
테레사의 개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하면 간지럼증이 사라져?”
“뭣이?”
“내가 막 자책하고 그럴 것 같아?”
“…….”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전부 나 때문이라고 괴로워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달라.”
“건방진 년이 뭐라고 떠들어?!”
“운이 좋아서 왕녀로 태어난 거 맞아. 노력 없이도 모든 걸 얻었지. 그런데도 가진 걸 하루아침에 전부 빼앗기니까 허탈해서 미칠 것 같더라.”
내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사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왜 나만 고통받아야 하냐고 신도 원망했어.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왜 그 평범함조차 허락해주지 않느냐고.”
“닥쳐!”
“괴로워서 감정도 버렸어. 생각도 안 했어. 하면 괴로우니까. 그냥 네가 때리면 맞고, 먹을 게 없으면 굶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고.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살로메디안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저주받은 폐왕녀였고, 팔려 가는 가축이었으며, 죽는 날만 기다리던 테레사의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보다 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이 내 힘이자 자랑이었다.
“난 이제 자책하지 않아. 죄지은 거 없고 당당하거든. 인간이길 포기하고 온갖 죄를 지은 너와 달리.”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으로 테레사를 응시했다.
테레사가 발작하듯 외쳤다.
“갖고 싶은 걸 가진 게 왜 죄야! 네가 유능했다면 내가 널 폐위할 수 있었겠니?”
“끝까지 남 탓만 하는구나.”
“모두 저주받은 너 때문이야! 네가 금화만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왕궁을 꿈꾸지도 않았을 거라고!”
한때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던 말들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내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다. 반성하는 척했으면 살려줄지 말지 약간 고민했을 텐데.”
테레사가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내 증언이 없으면 반역자를 못 잡잖아?”
“순진하네, 테레사.”
“뭐라고?!”
“너 따위는 살려두지 않아도 반역자 잡는 방법은 너무 많아.”
내가 펜 모양의 마도구를 꺼내 보이자 테레사가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그게 뭐냐?”
“디에고의 신제품. 기억 조작 마도구를 개량한 건데… 이걸 쓰면 네 의지와 상관없이 진실만 말하게 돼.”
“마도구를 쓰겠다고?! 정신 조작 마도구가 얼마나 위험한데!”
테레사의 두 눈이 공포로 확장됐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바들바들 떠는 걸 보면 정말로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날 둘러싼 한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잊은 거야? 넌 위험한 걸 알면서도 나한테 썼잖아. 아버지한테도.”
“!”
“네 손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마도구 부작용 걱정을 하는 거지?”
“하, 하지만 난……!”
“변명하지 마. 증언도 필요 없어. 그냥 마도구를 쓸 거니까.”
“아이시아!”
“급히 만든 거라 부작용이 심할 거야. 눈알이 빠지고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 정신착란, 환각, 실금 또 뭐였더라?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나네.”
손가락을 꼽아가며 부작용을 설명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레사의 공포가 가중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널 처형 못 하리란 기대는 접어둬. 마도구 부작용보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할 테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레사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살려줘, 아이시아 언니!”
“언니라고……?”
“언니, 내가 다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미쳤나 봐요!”
무릎걸음으로 기어 온 테레사가 철창 밖으로 하나 남은 손을 내게 뻗었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반역자 명단은 당장 써드릴게요!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요!”
테레사는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땟국 사이로 흐르는 눈물 탓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비참해서 언니가 너무 부러웠어요. 언니를 닮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처럼 되고 싶었어요!”
“테레사…….”
“외팔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죽이지만 마세요! 제발, 제발 부탁드릴게요!”
테레사가 철창을 긁으며 울부짖었다.
빼빼 마른 몸에 핏줄이 붉어지고 경련이 일었다.
잘려나간 팔 때문에 빈 소매가 펄럭거렸다.
테레사에게 모든 걸 빼앗긴 나조차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정말 속죄하면서 살 수 있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테레사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신전 노예로 봉사하면서 살게요! 도망가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셔도 돼요.”
“평생 갇혀도 괜찮다는 거지?”
“물론이죠!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요.”
“흐음…….”
“하늘에 계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성하며 살게요. 한 번만 믿어주세요!”
테레사가 맹세하듯 한쪽 손을 심장 위에 올렸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이시아 언니! 절 살려주시는 건가요?”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테레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향해 내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럴 리가 있겠니.”
“뭐, 뭐라고요?”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야. 네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걸.”
“반성하면 살려준댔잖아요?!”
“고민해 볼 수도 있다고 했지.”
“큭!”
첫사랑에게 배신당한 소녀처럼 테레사가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테레사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경멸을 듬뿍 담아 말했다.
“그리고 네 모친은 죽지 않았어. 네가 약속을 깨고 바실라칸 국왕에게 마도구를 넘기는 바람에 죽을 뻔했지만.”
“!”
“네가 버린 어머니를 팔다니… 정말 금수만도 못하구나. 신도 네 속죄 따위는 필요 없을 거야.”
내가 한 마디 뱉을 때마다 테레사의 얼굴이 기괴하게 굳어갔다.
10년은 늙어 보이는 낯짝 어디에도 후회나 반성은 없었다.
“그럼 반역자 명단을 들어볼까?”
내가 마도구를 들고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날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짓밟은 죄인에게 첫 번째 벌을 내릴 차례였다.
“가까이 오지 마! 혀 깨물고 자결할 거야!”
사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테레사가 감옥 귀퉁이로 도망쳤다.
“아냐. 너에겐 죽을 자유도 없어.”
“날 속이다니, 더러운 년! 네년도 언젠가 버림받을 거다! 나보다 더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고!”
언제 반성의 눈물을 흘렸느냐는 듯 테레사가 악을 썼다.
그 모습이 너무 테레사다워서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경비병을 불러 마도구를 사용하려는데 살로메디안이 불쑥 들어왔다.
그가 한 말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시아. 마도구 사용을 불허한다.”
* * *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응시했다.
“살롬. 왜 절 말리시는 거죠?”
“시아.”
진정하라는 듯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신기하게도 떨림이 잦아들었다.
떨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한때 그대의 이복동생이었던 여자다. 아쿠아로드의 왕세녀이기도 했고.”
“그래서 대우해주라는 건가요?”
“…….”
“테레사는 고문당해도 싸요! 게다가 마도구 부작용 같은 건 고문 축에도 못 끼잖아요?”
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테레사가 절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끓는 물을 붓고 유리 조각을 짓이기고… 상처를 지지기도 했어요.”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덧씌워졌다.
잊었다고 생각한 서러움이 날 선 외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 잔인한 짓을 순전히 심심풀이로 했다고요! 절 닮은 여자애들을 납치해서 고문하기도 했대요!”
“그대가 당한 것처럼 테레사를 고문하면 기분이 나아지겠는가?”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움찔 어깨를 튕겼다.
테레사에게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테레사의 살갗이 타들어 가고 테레사의 비명을 듣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꿈꾸는 복수는 뭐였을까.
깊이 심호흡했다. 테레사를 앞에 두고 흥분했던 걸 인정해야 했다.
살로메디안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대는 남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기분 전환이 되는 사람이 못 된다. 악몽이나 안 꾸면 다행이지.”
“…….”
“저런 쓰레기 때문에 그대 손과 마음을 더럽히지 마. 내 목숨보다 소중한 손이고 내 심장보다 귀한 마음이다.”
살로메디안이 보석을 쥐듯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들었다.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억세게 쥐고 있던 마도구도 가져갔다.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살롬.”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테레사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어머니도, 외가 친척들도, 피오넬의 가족들도 위로받지 않을까.
“그대가 바라는 건 테레사를 법정에 세우는 거였다. 마땅한 벌을 받도록.”
살로메디안의 자상한 목소리가 날 감쌌다.
내가 항변하듯 대꾸했다.
“그래도 포로 대우를 해주는 건 부당해요.”
“포로 대우를 왜 해주지? 살아있는 걸 후회할 만큼 찢고 썰고 부수고 빻아서 짓이겨놓을 작정인데?”
살로메디안이 조금 전 꿈결같이 달콤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네? 살롬이 마도구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마도구를 사용하면 심문할 기회를 잃으니까.”
“그럼 부작용을 걱정한 게 아니라…….”
“인생 전체를 후회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고. 심문하는 내내.”
그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감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바라와 휴고, 델마, 디에고 등등이 줄지어 들어왔다.
“시아. 저만 쏙 빼놓고 무슨 고문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제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쇠톱을 든 바바라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휴고는 커다란 집게와 쇠 징이 박힌 몽둥이를 짊어지고 있었다.
“제가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반역자 명단을 빠짐없이 받아내겠습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듣지 않을 거지만! 크핫핫핫!”
“유린당한 아쿠아로드인들을 위해 저도 거들겠습니다. 피오넬의 특별한 부탁도 받았고요.”
단도의 새파란 날을 확인하며 델마가 말했다.
바바라 눈치를 보던 디에고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러분이 작업하실 동안 죄인이 의식을 잃지 않도록 각종 마도구를 준비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테레사를 위한 ‘특별 심문 코스’가 마련된 모양이었다.
그 코스를 위해 세드나 최고의 전문가들이 팀을 꾸렸고.
이성을 잃은 테레사가 철창을 흔들며 악을 질렀다.
“재판받게 해줘! 나는 왕녀다! 아무도 날 고문할 수 없다고!”
물론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살로메디안만 빼고.
“시아의 바람대로 넌 재판정에 설 거다. 그래도 고문… 아니, 심문은 피할 수 없어.”
“난 포로야! 내가 고문당하면 전 대륙이 너흴 욕할 거다!”
“그것도 모를까 봐? 재판 전에 말끔히 치료해줄 테니 걱정 말도록.”
살로메디안이 손바닥 위로 물방울을 띄웠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최고위 신관보다 훌륭한 치료술을 쓸 수 있다는 걸.
“네가 시아에게 했던 것처럼 괴롭히고, 치료해주마. 다 나으면 또 괴롭히고 또 치료해주지.”
“말, 말도 안 돼. 끄으윽!”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테레사가 까무러쳤다.
앞으로 닥칠 고통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기절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테레사를 흘낏거리며 바바라와 디에고가 머리를 맞댔다.
“일단 깨워야 할까. 네 생각은 어때, 디에고?”
“또 기절할 수 있으니 마도구를 먼저 쓰죠. 이 아이를 사용하면 절대 기절하지 못합니다.”
“호오. 아주 흥미로운 아이네? 다른 감옥에서도 서로 사겠다고 난리 칠 거야. 아주 잘했어.”
“바바라 님이라면 이 아이의 진가를 알아봐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넌 마도구나 만들면 된다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바바라 님……!”
바바라를 바라보는 디에고의 눈빛에 존경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십 대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바바라의 동안이 근엄하게 빛났다.
감옥에서 이 무슨 핑크빛 기류란 말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델마에게 물었다.
“디에고가 바비보다 연상이지 않아?”
“4살 연상이죠.”
“왜 바비는 하대하고 디에고는 존대하는 거지? 바비가 집사라서?”
“위계 문제가 아니라 기세 문제겠지요.”
“흐음.”
“디에고 오빠에게 바바라 님은 여신 이상일걸요? 재료비를 대주고, 자식 같은 마도구를 높이 평가해 주니까요.”
“바비는 돈 벌 궁리만 하는 건데.”
“그래도 인정은 인정이죠. 오빠는 저런 관심에 굶주려 있었을 겁니다.”
델마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디에고와 바바라는 마도구 개발과 마도구 판로 확보에 대해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두 사람 덕분에 감옥이 아니라 티 파티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살로메디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은가?”
“뭐가요?”
“떨고 있었잖아.”
“살롬과 바비 군단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그거 다행이군.”
살로메디안이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일부러 데리고 온 거죠?”
“뭘 말이냐.”
“다 알아요. 제 긴장을 풀어주려고 사람들을 전부 끌고 오신 거잖아요.”
“순수한 자원봉사자들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테레사를 마주하면 내가 과거를 떠올릴 테고, 그때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살로메디안은 만약을 대비해 든든한 둑을 만들어주었다.
사랑과 우정, 믿음으로 만든 둑이었다.
“그대는 그대 생각보다 훨씬 강한 여자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테레사는 잊고 통일 신국에 집중해줘. 나라 이름도 생각해두고.”
“그건 왕이 해야 되는 일 아닌가요?”
내 물음에 그가 햇살 같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대가 해줘. 부탁이다.”
* * *
아쿠아로드와 세드나 공작령의 통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쿠아로드 국왕과 적통 왕세녀인 내가 결정한 일이기에 귀족들은 반발하지 못했다.
세드나 공작령 사람들은 척박한 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네이선의 협조도 큰 도움이 됐다.
[보내주신 명단 덕분에 제국을 배신한 매국노들을 모두 색출할 수 있었습니다.
또 두 분이 아니었다면 바넷사를 황후로 맞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두 분은 제 가족이자, 은인이시니까요.]
황제의 지원 덕분에 성가신 독립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반면에 테레사의 재판은 꽤 길어졌다.
너도나도 테레사의 죄를 증언한다고 나선 탓이었다.
특별 심문 팀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레사는 넋이 빠진 채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침을 흘리거나 머리를 긁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처형은 광장에서 진행됐다.
테레사와 함께 백성의 고혈을 짜냈던 귀족들도 같이 처형대에 올랐다.
그들의 처형 방법은 화형으로 결정되었다.
테레사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테레사의 몸에 기름을 뿌렸다.
나는 피오넬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네가 죽인 매춘부들과 그 아이들이 너한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속삭이자 테레사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으아아악!”
화염이 테레사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테레사를 휘감은 불길이 하늘 높이 솟았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악녀의 시대가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