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 * *
천연 대리석과 초대형 석상으로 장식된 황궁 알현실에 입장했다.
네이선은 계단 끝 가장 높은 자리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을 차려입은 문무 대신들과 갑옷을 걸친 황실기사단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날 저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
텅 빈 황후의 옥좌를 보며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살로메디안은 뻣뻣한 자세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나마저도 예의를 잊을 수는 없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황좌에서 일어난 네이선이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눈부신 흰색 제복과 황금 왕관이 그의 붉은 머리칼과 그림처럼 잘 어렸다.
단정한 외모와 부드럽게 접힌 눈매는 전과 똑같았지만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였다.
전쟁 처리하느라 피로해서 그런가. 아니면 마신과의 계약 때문인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늘이 네이선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성가시다는 투로 목을 죄던 제복 단추를 풀었다.
“다시 숙부로 불러주는 건가? 언제는 당신이라더니.”
그는 일부러 도발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살기를 풍겼다.
마력 비는 쏟아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위압감이 알현실을 짓눌렀다.
황실기사단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나와 살로메디안에게 철저히 짓밟힌 경험 탓인지 그들은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움직이지 말라는 뜻으로 네이선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살로메디안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숙부님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 과오를 용서해주십시오.”
황제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래도 되나? 사적인 자리도 아닌데?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대신들이 앞다투어 외쳤다.
“폐하! 만인지상의 지존께서 어찌 고개를 숙이십니까!”
“황제는 무치입니다! 아무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시면 아니 됩니다!”
“상대가 혈육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노인네들이 난리 치는 걸 보니 역시 안 되는 거였나 보다.
하지만 네이선은 쉽사리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 숙부님께서 용서해주실 때까지 나는 죄인이다.”
“예법에 어긋납니다! 폐하!”
“숙부님이 아니었으면 예법 운운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 손에 목이 잘렸을 테니.”
네이선이 나지막이 일갈했다.
알현실은 껄끄러운 적막에 사로잡혔다.
이 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황도를 버리고 도망친 귀족들이었다.
네이선이 뭔가 꾸미는 건가?
나는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바넷사를 바라봤다.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평소의 무표정 그대로였다.
“쯧. 너는 뭘 해도 짜증스럽구나.”
네이선의 붉은 머리통을 한참 들여다보던 살로메디안이 짧게 혀를 찼다.
“숙부님께서 원하시면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네이선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라라도 망한 것처럼 대신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통촉하여 주십시오!”
몇몇은 엎드린 채 울부짖기까지 했다.
잘못을 했으면 황제라도 무릎을 꿇어야지?
그게 뭐 대수라고 난리람.
잘난 목숨을 지키느라 나라 밖으로 내빼던 인간들이 충신인 양 설치는 꼴이 역겨웠다.
물론 네이선은 진지했다. 그건 살로메디안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다.”
“숙부님.”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으면 시아에게 물어라.”
네이선의 시선이 날 향했다.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내가 바란다면 엎드려 빌기라도 할 기세였다.
“무릎 꿇지 마세요. 고개 숙이실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 없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네이선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절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아이시아 님?”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내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네이선의 그늘이 갑절 이상 짙어졌다.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습니까?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아무 짓도 안 하면 되고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이시아 님의…….”
“일단 절 아이시아 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우리가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의 말을 뚝 자르며 첫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네이선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롬이 숙부면, 저는 숙모 아니겠어요? 숙모님이라고 부르기 껄끄러우면 그냥 공작부인이라고 하세요.”
철모르는 어린애에게 훈계하듯 말하는 날 보며 대신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저런, 되먹지 못한!!”
“약소국 출신 폐왕녀라더니 기본 예의도 모르는군!”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망발입니다! 엄벌로 위엄을 세우십시오, 폐하!”
네이선과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돌려 뭐라 호령하려 했다.
나는 두 남자를 밀치고 대신들에게 직접 일갈했다.
“예법이 폐하의 위엄을 세워줍니까? 적군이 폐하와 황도를 짓밟을 때 공들은 뭐 하셨는데요?”
“뭐, 뭣이?”
“약소국 폐왕녀 출신인 저도 제국을 지키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애썼습니다. 병사들과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사재를 털었고요.”
“!”
“이 자리에 제 출신을 들먹일 만큼 떳떳한 분이 하나도 없는 거로 아는데. 제가 틀렸습니까?”
나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운 인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당당히 말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대신들이 살로메디안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계집애가 따박따박 옳은 소리 하는 꼴은 보기 싫지만 세드나 공작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입매가 실룩거렸다.
‘역시 내 아내가 최고야. 내 아내보다 똑똑하고 예쁜 여자는 없지.’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는 표정이었다.
네이선이 무거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다. 오늘은 숙부님과 숙, 숙… 아니 공작부인의 공을 기리는 자리다.”
숙모님이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보다 어린 여자, 그것도 찝쩍거리다가 대차게 차인 여자를 숙모라고 부르는 건 힘들겠지.
약간의 동정을 담아 네이선을 바라봤다.
네이선은 당장 빚을 갚으라는 압박으로 느낀 것 같았지만.
“두 분이 아니었다면 역사에 큰 죄를 지었을 겁니다. 원하시는 건 뭐든지 들어드리겠사오니, 말씀만 하십시오.”
드디어 내가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정말 뭐든지 들어주시는 건가요?”
“황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두 분께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을 졌으니까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독립시켜 주세요.”
“…네?”
“공국도 싫어요. 폐하의 입김이 닿지 않는 완벽한 국가로 독립을 허가해 달라는 청을 드리는 겁니다.”
아이시아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살로메디안보다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독립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급히 내실로 자리로 옮긴 네이선이 울상을 지었다.
“뭐든 들어 주겠노라 말씀하신 건 폐하십니다.”
소풍 나온 소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이시아가 대꾸했다.
살로메디안은 그런 아이시아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멋있어. 진짜 사랑스럽다. 이런 여인이 내 아내라니. 세상에 나보다 운 좋은 남자는 없을 거다.’
입도 떼지 않았는데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독립이란 폭탄을 터뜨린 장본인들치고는 너무 태연자약했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네이선이 말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안정을 찾으려면 멀었습니다. 세드나 공작가와 황실의 단합만이 백성들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 전쟁을 자초하셨나요?”
아이시아가 네이선의 약점을 훅 치고 들어왔다.
그는 찔리는 바가 컸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도 독립만은 안 됩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요!”
“세드나 공작가를 계속 이용해 먹고 싶어서요?”
아이시아가 또 한 번 예리한 칼을 휘둘렀다.
네이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대 세드나 공작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
“앞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다. 마물 토벌과 마신의 숲 경비에 필요한 비용도 황실이 지불하겠습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 아이시아가 상큼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 없어요. 저희도 엄청 많거든요. 전쟁 때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아이시아의 말대로 세드나 공작가가 푼 황금이 아니었다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고질적인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작가였는데.
돈이 어디서 난거지? 온천에서 황금알이 솟아나기라도 한 걸까?
“폐하께서는 저희에게 빚이 있다 하셨습니다.”
아이시아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한마디 꺼낼 때마다 네이선은 생명이 쭉쭉 닳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만.”
“잊으신 것 같은데 백성들이 믿지 못하는 종류의 빚도 있죠.”
네이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시아가 꽃잎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숙부의 아내와 억지로 결혼하려 하다니. 그것도 축하 사절을 잔뜩 모아놓고. 쯧쯧.”
“…….”
“그 일만 아니었다면 전쟁도 터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걸 백성들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공작부인!”
“전쟁으로 가족을 잃을 사람이 한둘이어야지요.”
웃음기를 지운 아이시아가 백성들을 대신해 네이선을 노려봤다.
네이선이 심장이 고통으로 우그러졌다.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신이 새로운 계약을 제안했을 때 바넷사의 만류를 뿌리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백성들의 목숨을 잃게 한 황제로서 속죄하기 위해서.
“독립을 허가하지 않으시면 폐하의 추태가 전국 방방곡곡을 뒤덮을 겁니다.”
“황제인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 아니라 예언이에요. 꼭 이루어질 거거든요.”
아이시아의 미소가 한층 더 농밀해졌다.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데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렵기도 했다.
소름이 쭉 돋은 팔을 문지르며 네이선이 주춤 물러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시아가 달려들었다.
“대신 마지막으로 제국에 큰 선물을 드릴게요.”
“선물이라니요?”
“세드나 공작을 제국에 잡아두는 것보다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드리려고요.”
아이시아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어떤 보석보다 고귀해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눈동자였다.
굶주린 맹수의 눈동자란 것도 모르고.
‘나는 어쩌자고 이런 분을 탐낸 거지? 숙부님은 어떻게 아이시아 님을 감당하시는 거지?’
혼란에 빠진 네이선을 대신해서 바넷사가 나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이시아가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시겠다는 겁니까?”
“조국을 팔아치우려고 한 매국노들을 잡을 수 있게 해드리죠.”
“!”
“매국노들을 일벌백계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아이시아의 말이 백번 옳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제 이익을 위해 타국과 내통한 자. 백성의 안위를 팔아넘긴 자.
조국과 황제를 배신한 자.
모두 살려둘 수 없었다.
“국력을 쏟아부었는데도 색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놈들을 잡을 비책이 있으시다고요?”
“저는 빈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고요.”
아이시아가 사랑을 듬뿍 담아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살로메디안도 낯간지러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그대가 원하면 신이라도 잡아줄 수 있지.”
“고마워요, 살롬.”
“당장 잡아 올까?”
“아직은 괜찮아요.”
몇 마디 말만으로 핑크빛 기류를 만들어내는 두 사람이었다.
사람이 한번 변하면 무섭다더니.
네이선은 헛바람을 삼키고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알던 살로메디안이 맞는지 확인했다.
“매국노를 처벌하는 것이 세드나 공작을 붙잡아두는 것보다 이익 아닐까요? 역사에 지은 죄도 씻어내셔야 할 텐데.”
아이시아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분명 매력적인 조건이었으나 세드나 공작령을 잃을 수는 없었다.
위험하기는 해도 진귀한 약초가 넘쳐흐르는 땅 아닌가?
아이시아는 네이선의 계산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 땅이 탐나세요? 마물이 득실거려서 아무도 찾지 않던 척박한 땅을요?”
민망함이 치솟았지만 지금은 국익이 우선이었다.
“세드나 공작은 제국의 검이자 방패입니다. 숙부님도, 마신의 상징인 세드나 공작령도 잃을 수 없습니다.”
네이선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바넷사도 옆에서 거들었다.
“공작가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습니다만 공을 세울 때마다 독립시키면 제국은 무너질 겁니다.”
아이시아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바넷사는 작은 승리에 들뜨지 않았다.
“영지를 원하시면 비옥한 땅으로 골라 드리겠습니다. 권력을 원하시면 총리대신 이상 가는 재량권을 드리지요.”
“독립만은 안 된다는 거네요?”
“공작부인께서 황제라도 같은 결정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바넷사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었다. 아이시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도 않았다.
바넷사가 자랑스러워서 네이선은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전쟁을 해야겠네.”
* * *
숨이 턱 막혔다.
전쟁이 무슨 다과회도 아니고!
“숙부님! 그게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이선의 목에서 쇳소리가 넘어왔다.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대답했다.
“말이 안 통하면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내 방법이다.”
“전쟁 영웅에서 역적이 되고 싶은 겁니까?”
“이미 되어 봤다. 뭐라 불리든 상관없다.”
“공작령 독립은 아무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따위가 내게 중요할 것 같은가?”
살로메디안이 가소롭다는 투로 물었다.
그의 몸에서 칼날 같은 살기가 치솟았다. 인간 같지 않은 마력도 함께 내뿜었다.
쌍 속성을 잃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예전엔 얼마나 강했던 거지?
아이시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살로메디안은 최강의 사내였다.
마신의 계약이 사라졌음에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상처는 다 나았는데도 살로메디안에게 찔린 가슴 부근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명분이 있다.”
“그게 뭡니까?”
“내 아내가 원한다는 것.”
“네?”
“그것보다 강력한 명분은 없지.”
살로메디안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어쩌다가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아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처가가 되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에 네이선은 할 말을 잃었다.
“얼른 골라라. 네이선. 전쟁인지 아니면 독립인지.”
“숙부님……!”
“전쟁이라면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목부터 따줄 테니까.”
살로메디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심한 푸른 눈에서 희미한 기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숙부님은 나한테 복수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전쟁을?’
살로메디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런 남자의 아내를 훔치려 했다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뺨을 갈겨주고 싶었다.
“그만 하세요, 살롬. 전쟁은 바라지 않아요.”
아이시아가 네이선을 지옥에서 건져주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우리는 황실과 마찰 없이 독립하고 싶을 뿐입니다, 폐하.”
“꼭 그러셔야 합니까?”
“전대 마신과의 계약은 끝났습니다. 폐하가 제일 잘 알고 계시겠지요?”
“…….”
“황실은 더 이상 세드나 공작가의 희생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충성은 700년으로 충분해요.”
잔말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오만하리만치 차가운 아이시아를 보며 네이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 * *
새로운 마신이 탄생하면서 전대 마신과의 계약은 사라졌다.
나라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네이선은 마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병상에 누워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검은 안개를 휘감은 마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흔쾌히 힘을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대신 계약의 낙인은 너의 심장에 새기겠노라.』
마신의 말 한마디가 네이선을 뒤흔들었다.
「왜 세드나 공작이 아닌 제게 계약자가 되라 하십니까?」
『힘은 네가 얻었는데 계약은 세드나 공작보고 하라고? 너는 아들을 바친 초대 황제보다 비겁한 놈이구나.』
「!」
『꾸물거리지 말고 뭐든지 말해라. 내 힘을 많이 빌리면 빌릴수록 무시무시한 계약이 따를 테니까.』
신을 보려 하는 것 자체가 불경일 수 있지만, 네이선은 마신의 얼굴이 궁금했다.
검은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신은 분명 고소하다는 듯 낄낄거리고 있었다.
정말 마신인가? 악독한 마법 아닌가?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몇 개월을 치료해야 할 상처를 단박에 낫게 하는 건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네이선은 새로운 마신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은 황제의 심장에 새겨졌고, 황좌를 얻는 자가 계약을 이어갈 터였다.
* * *
“계약 조건이 뭐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이시아의 물음이 네이선을 상념에서 깨웠다.
“아이시아 님은 정말 모르시는 게 없으시군요.”
“예로부터 세드나 공작가는 마신과 가장 가까웠으니까요.”
아이시아의 얼굴에 쓸쓸함이 번졌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네이선도 마신과의 계약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래알처럼 깔깔한 적막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시아의 붉은 눈이 예리해졌다.
“마신과 계약을 하셨으니 이해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세드나 공작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걸요.”
“그냥 전쟁을 하자, 시아.”
전쟁만이 해결책이라는 듯 살로메디안이 불퉁하게 말했다.
“꼭 죽이고 싶은 놈도 있고.”
살기로 번들거리는 두 눈은 네이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바넷사가 네이선의 옷깃을 그러잡았다.
“세드나 공작령의 독립을 허가하십시오, 폐하.”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네이선이 움찔했다.
바넷사가 공작령을 포기하다니?
절대 안 된다고 끝까지 반대할 줄 알았는데?
“지금의 황실은 세드나 공작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내전이 터지면 또다시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될 겁니다.”
“바넷사?”
“저는 두렵습니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바넷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네이선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바넷사가 두렵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제 옷깃에 매달린 것도, 녹색 눈을 굴리며 살로메디안을 흘끔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황제인 자신보다 더 황제 같았던 바넷사의 여린 모습에 네이선의 가슴이 헝클어졌다.
오직 그녀를 위해 세드나 공작령의 독립을 허락하고 싶었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 때문에.
아니, 바넷사 때문에.
“내게 황후도 없고, 후계자도 없고, 최강의 기사마저 없는 껍데기 황제가 되라는 건가.”
밀려오는 무력감 속에서 네이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희를 독립시켜 주시면 훌륭한 황후를 얻게 해드리죠.”
아이시아가 인심 쓰듯 한마디 덧붙였다.
네이선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황후가 될 만한 마력을 가진 여인은 공작부인뿐입니다. 제가 억지를 부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요.”
“불 속성이 아니어도 된다면요?”
“절 놀리시는 겁니까? 황후는 무조건 불 속성이어야 합니다!”
네이선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속성을 따지지 않고 결혼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황후를 맞이했을 거였다.
그걸 아이시아가 모를 리가 없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걸까.
“나와 내 남편, 영지민 모두의 미래를 걸고 장난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
아이시아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물 속성인 여성을 황후로 맞이할 수 있다면. 제가 그 방법을 폐하께 알려드린다면요?”
아이시아가 도도하게 물었다.
마지막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찬 태도였다.
하지만 네이선은 아이시아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은 바넷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나라에 보탬이 되며, 이제는 제 심장마저 떨리게 하는 여자를.
* * *
아무리 긁어도 두피의 간지럼이 가라앉지 않았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과 떨어져 나온 각질 조각을 보면서 테레사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간지러워!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다고!”
대답이라도 하듯 마물들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뚝에 부산한 소름이 돋았다.
며칠째 씻지 못한 몸에서 비릿한 땀내가 올라왔다.
드레스는 넝마가 된 지 오래였다. 거울을 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폴! 언제까지 이 역겨운 숲에 있어야 하는 거야?!”
“조금만 참으십시오, 테레사 님.”
“정말 아쿠아로드로 가는 길 맞아? 며칠째 같은 자리만 빙빙 도는 것 같은데?!”
테레사를 마신의 숲으로 이끈 것은 폴이었다.
아쿠아로드로 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숲.
병자나 노인, 그 밖의 쓸모없는 것들을 내다 버리는 숲.
그 저주받은 땅에 자신이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시아와 피오넬도 이 숲을 헤맸겠지.
제 발톱의 때만도 못한 계집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이 원통하고 분했다.
‘날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마도구를 달라고 빌 때는 언제고! 제국의 개돼지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전쟁은 연합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국왕을 잃은 바실라칸은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다른 참전국들은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치르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서약했다.
개중엔 패배를 테레사 탓으로 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테레사가 가져온 마도구가 효력을 발휘하는가 싶더니, 아군을 향해 포격을 난사했기 때문이었다.
마도구 때문에 발생한 아군 사상자만 수천에 달했다.
재수 없게도 그즈음 살로메디안이 등장했다.
“마도구가 왜 망가진 거지?! 하여간 마도사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고정하십시오, 테레사 님.”
“내가 고정하게 생겼어? 반역 귀족 놈들이 애국자인 척 황궁으로 몰려갔다는데?”
“발초프 후작도 포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라를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요.”
처벌받아야 할 놈들이 높은 작위와 포상금을 받았다는 말에 테레사는 속이 뒤집혔다.
가장 열 받는 건 아이시아와 살로메디안이 영웅으로 칭송받는다는 거였다.
“황제가 그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지? 내 발닦개 따위에게 굽실거릴 정도면 황제 수준도 뻔하다!”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지만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시아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자신은 거지꼴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아이시아의 금화를 받았던 어린 시절과 똑같지 않은가.
‘난 창녀의 딸이 아니라 왕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왕궁으로 돌아갈 거야. 전부 내 것이니까!’
구질구질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테레사가 고개를 양옆으로 털었다.
테레사의 어금니에서 까드득,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입만 뻥끗하면 발초프 후작도, 생니콜 자작도 다 죽은 목숨이야.”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테레사 님?”
“반역자 명단을 넘기는 대가로 황제에게 군대를 빌려 달라고 해야지.”
“군대라니요?”
“아쿠아로드 국왕과 그 친위대를 싹 쓸어버려야지.”
“!”
“그리고 왕세녀인 내가 진짜 왕이 되는 거야!”
“전쟁을 또 일으키시겠단 말씀입니까?”
“피를 흘리지 않으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법이야.”
“제국군이 점령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폴. 지금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거냐?”
테레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요즘 폴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먹을 것도 제대로 구해오지 않았고, 제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기도 했다.
물론 폴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쟁 통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폴 따위에게 말끝마다 말대꾸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떠돌이 놈을 고귀한 왕세녀의 집사로 만들어 줬더니. 건방지게 말대꾸를 해?”
“…….”
“내가 아니었으면 넌 평생 반역 가문의 딱지를 달고 살았을 거야!”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날 쾌적하고 안전하게 모실 궁리나 해!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이토록 굶주린 것은 돌다리 창녀촌을 떠나온 이래 처음이었다.
허기가 만들어내는 통증과 비참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창녀촌을 탈출했는데! 이게 전부 아이시아 년 때문이야!’
아이시아만 아니었다면 연합군이 패할 리가 없었다.
왕세녀 자리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도려내 개 먹이로 던져준다 해도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예언서 따위 무시하고 진작 죽였어야 하는데!
후회와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폴이 숲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목적지가 보이는군요.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마신의 숲 한복판인데!”
“전 왕족을 모시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둔킨 가문의 후예입니다. 왕녀님을 속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폴……?”
“왜 그러십니까, 테레사 님?”
폴이 싸늘한 눈으로 테레사를 응시했다.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폴이 절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꼬박꼬박 왕녀님, 혹은 왕세녀 전하라고 불렀었는데… 언제부터 테레사 님이라고 부른 거지?’
테레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멀리서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폴. 네가 모시는 왕녀님이 나 맞지?”
그 물음에 폴이 눈을 크게 떴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설마요. 당신은 가짜잖아요?”
“폴?!”
“더러운 염색약으로 날 이용하다니… 당신을 모시는 척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폴이 경멸 어린 눈으로 테레사의 머리칼을 응시했다.
두피에서 돋아난 짙은 남색 머리칼이 빛바랜 하늘색 머리칼과 섞여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진짜 왕녀님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당신을 살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테레사의 심장을 후벼 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폴은 제 오른팔이자 유일한 심복인데.
“설마 아이시아랑 내통한 거냐?!”
“둔킨 가문의 후예로서 왕족의 명에 따른 것뿐입니다.”
“폴, 네 주인은 나잖아?!”
“제 주인은 진짜 왕녀이신 아이시아 님뿐입니다. 저기 기사들이 오는군요.”
폴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숲 너머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가슴엔 흑룡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이 박혀 있었다.
겁에 질린 테레사가 주춤 물러섰다. 등 뒤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 *
테레사가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나는 피오넬을 찾아갔다.
에단의 보살핌 덕분에 피오넬은 예전의 귀여운 외모를 되찾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네 덕분에 테레사를 잡을 수 있었어. 고마워, 피오넬.”
[공짜는 아니에요. 공작부인께서 저와 아버지를 보호해주신 대가지.]
석판에 적힌 피오넬의 글씨체는 여전히 까칠했다.
“네가 없었다면 간지럼 약을 만든 치료사를 찾지도, 폴과 접선할 수 없었을 거야.”
[공작부인이 유능한 덕분이겠죠. 폴을 이용해서 테레사를 생포하다니. 저는 상상도 못 했어요.]
“칭찬 고마워.”
[테레사가 가짜라는 걸 알고 폴이 팔짝 뛰었겠네요.]
“처음엔 자결하려고 했어.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야.”
[그냥 미친놈이에요. 테레사랑 같이 나쁜 짓만 골라서 한 놈이라고요.]
“폴을 용서하겠다는 뜻은 아니란다. 테레사 생포하는 걸 도왔으니 죄를 조금 감해주는 정도지.”
[테레사는 어떻게 되나요?]
피오넬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반역자들을 실토하게 만든 다음 처형할 거야.”
피오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피오넬도 테레사와 함께 처형당했을 거였다.
영리한 피오넬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동굴에서 죽었을 거예요.]
“살고자 하는 네 의지가 널 살린 거야. 자부심을 가져, 피오넬.”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피오넬이 머뭇거리며 글자를 적었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뭐든 말해 보렴. 안 그래도 네게 상을 주려고 했으니까.”
나는 피오넬이 작위를 달라거나 귀족 학교에 보내 달랄 줄 알았다.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최고위 치료 신관을 붙여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오넬의 소원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테레사를 처형하기 전에 귓가에 속삭여주세요. 네가 죽인 매춘부들과 그 아이들이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피오넬……!”
[그래야 나 때문에 돌아가신 엄마랑 동생들이 천국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피오넬이 눈을 감았다.
아이의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방울이 첫서리보다 시렸다.
조숙하고 되바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애였다.
게다가 자기 때문에 엄마와 동생들이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뤘을까.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
“네 잘못이 아니야, 피오넬.”
[저는 살았고 엄마랑 동생들은 죽었는데. 제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이죠?]
울음을 감추려고 피오넬이 새빨개진 눈매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나와 똑같은 슬픔을 혼자 견뎌야 했던 작은 소녀를 안아주고 싶어서.
품 안에 아이의 몸이 닿았다. 놀랍게도 따스했다.
“제가 피오넬을 안아 줬다니까요!”
내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구역질이 올라왔을 텐데 어떻게 참았지?”
“메슥거리지도 않고 아주 멀쩡했어요!”
“흐음…….”
“진짜예요! 정말 살롬을 안은 것처럼 괜찮았다고요!”
확인시켜 주겠다는 뜻으로 살로메디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매끄러운 뺨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등을 톡톡 두들기기도 했다.
“이런 기분은 너무 오랜만이에요. 평생 살롬만 만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내 손을 내려다봤다.
피오넬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던 감촉이 선명했다.
가슴으로 전해지던 미세한 떨림과 긴장을 풀고 내게 안겨 오는 움직임을 잊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저주가 풀려버렸다.
“이제 바비 머리칼도 쓰다듬을 수 있어요! 휴고 님이나 빈센트 님과 악수할 수도 있고요!”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살로메디안의 백금발을 쓸어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을 부여잡고, 아래위로 흔들기도 했다.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내게는 눈물이 고일 만큼 특별한 선물이자 증거였다.
날 짓밟았던 테레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는 증거.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
내 주위에 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 가득하다는 증거.
테레사 생포 소식보다 내겐 짜릿한 사건이었다.
이상한 것은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는 거였다.
“정말 실망스럽군.”
같이 기뻐해줄 줄 알았는데 실망스럽다고?
내 눈동자를 보고 살로메디안이 힘주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의 특이 체질이 좋았다.”
“왜요?”
“그대의 몸과 본능이 오직 나만 허락하는 것 같아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팔짱을 끼고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이제 나만의 시아가 아니게 됐군. 평생 독점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간단한 스킨십도 못해서 제가 얼마나 불편했는데요!”
“멀쩡한 남편을 두고 왜 남들과 스킨십해야 하지?”
납득할 수 없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고구마를 물 없이 삼킨 것처럼 뻑뻑해진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살롬은 사회생활이라는 말 몰라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저도 잘 몰랐는데 공작저에 온 다음부터 배웠어요. 서로 믿고 의지한다는 게 얼마나 따스한지요!”
“그런 건 마음으로만 해라. 몸으로 하지 말고.”
살로메디안이 유독 ‘몸’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억울하고 황당한데 얼굴부터 빨개지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들으면 남편 내팽개치고 바람피우는 유부녀인 줄 알겠어요!”
“현 남편보다 어리고, 지체 높은 남자랑 결혼할 뻔했지.”
살로메디안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덜컥,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네이선 옆에 섰다.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들 틈에서 황후의 관을 쓸 뻔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살로메디안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혹시 절 원망하시는 거예요?”
살로메디안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 오직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정시켰다.
“저 똑바로 보세요. 진짜 절 원망해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가느다래졌다.
제 매력과 아름다움을 아주 잘 아는 고양이처럼 요염한 눈빛이었다.
“그럴 리가. 그냥 토라진 척해 본 거다.”
“왜요?”
“당황하는 그대도 너무 귀여우니까.”
“놀랐잖아요!”
다부지게 말아 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내려쳤다.
살로메디안이 희미하게 웃으며 제 손으로 내 주먹을 덮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주고 손바닥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기도 했다.
“그렇게 세게 치면 그대의 손이 다친다.”
뭉근한 온기가 온몸으로 번졌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달콤해서 짓궂은 장난도 용서해주고 싶었다.
이래서 잘생긴 남자는 위험하다니까.
“얼마든지 때려도 괜찮지만 그대가 아프지 않도록 해.”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날 아끼는 진심이 느닷없이 전해져 코끝이 알싸해졌다.
“그런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놀랐단 말이에요.”
“가끔 불안하다. 그대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아서. 결국엔 내 손이 닿지 않게 될까 봐.”
“제가 살롬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몰랐나? 그대를 얻고 나서 난 엄청난 겁쟁이가 되었다.”
살로메디안이 두 팔로 날 감쌌다.
문득 태산처럼 넓은 등이 외로워 보였다.
황제는 물론 마신이 와도 겁먹지 않을 남자가 오직 나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도, 두려움을 다독여 줄 사람도 오직 나뿐이었다.
“언제나 살롬 곁에 있을 거예요.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나는 지옥에 그대를 끌고 갈 만큼 이기적인 놈은 아니다.”
“제 발로 갈 거예요. 살로메디안이 있다면 어디든지!”
눈에 힘을 바짝 주고 말했다. 그에게 내 마음이 닿길 바랐다.
그래서 불안도 두려움도 녹일 수 있기를.
그 자리에 변치 않는 믿음이 피어날 수 있기를.
“고맙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보답하듯 아름다운 미소를 선보였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움에 눈이 환해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이 남자는 어쩌자고 이렇게 예쁜 걸까.
속눈썹은 왜 이리 길고, 입술은 어쩜 저렇게 도톰할까.
갓 피어난 꽃의 여왕도 살로메디안 앞에서는 빛을 잃을 듯했다.
이 미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게, 마르고 닳도록 바라보고 심지어 만져도 된다는 게 좋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시아. 얼굴이 붉다. 어디 아픈가?”
“괜찮…….”
내가 말을 맺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붙였다.
“체온이 좀 높군.”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에 그의 살갗이 닿으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긴장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흔들리는 침대와 농밀한 체취, 아찔한 전율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지나치게 향상된 기억력 탓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곤혹스러웠다.
“진짜, 완전, 100퍼센트, 아무렇지 않아요!”
나는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살로메디안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인다.”
당연하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남자랑 한 방에 있는데 멀쩡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려다 심호흡을 했다.
일단 머릿속을 점령한 음란 마귀를 몰아내야 했다.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살로메디안 손목을 잡고 침대로 가고 싶어질 테니까!
내가 이렇게 야한 여자였나? 살롬이 알면 기뻐서 달려들 텐데? 약속한 한 달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살로메디안과 외딴 방에서 보내게 될 한 달이 못 견디게 간절해졌다.
우습게도 내 몸이 그를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은 그대로였다.
그 마음을 살로메디안에게 들킬까 봐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별장에서 소식은 왔나요? 온천은 지난주에 복구되었다면서요?”
“온천이 복구되자마자 네이선이 찾아갔다. 바넷사를 데리고.”
“역시 바넷사도 폐하를 좋아했군요!”
“취향도 특이한 것들이야. 끼리끼리 만난 거겠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바넷사는 네이선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네이선도 바넷사를 오랫동안 눈여겨봤던 것이 분명했다.
한낱 집사를 지키기 위해서 살로메디안의 검 앞으로 달려들지 않았을 테니까.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간 두 사람.
마력 속성만 아니었다면 좀 더 빨리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터였다.
“온천이 두 사람을 연결해주면 좋겠네요.”
“이미 연결된 것 같다.”
“무슨 뜻이에요?”
살로메디안이 품에서 구깃구깃해진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오늘 이런 게 도착했거든.”
구겨진 편지를 펴본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크로티무스 제국은 세드나 공작령의 독립을 지원할 것이며 영원한 우방이 될 것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