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50)

44

* * *

모두가 연합군의 승리를 점칠 때, 크로티무스 제국의 황제가 등장했다.

“침략자들에겐 죽음뿐이다! 제국의 저력을 보여주마!”

네이선은 최전방에서 군사를 이끌었다. 직접 불의 검으로 적군의 목을 베어내기도 했다.

불의 정령 콰이엘도 무릎 꿇을 만큼 강력한 마력이라고 했다.

다 죽어간다던 황제의 등장에 백성들은 감격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는 건 역시 거짓 소문이었어!”

“적을 괴멸시키기 위해 작전을 쓰신 거라던데?”

“폐하께서 지나가시면 연합군의 목이 늦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진대요! 우리는 이제 살았어요!”

네이선이 키산드라의 계약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마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로메디안의 칼을 맞은 네이선이 전쟁터를 누빌 수 없었을 터였다.

그가 원했던 건 마신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거였을까.

전대 마신과의 계약이 사라지면서 살로메디안은 치유력을 잃었다.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던 마력도 잃었다.

지상 유일의 쌍 속성은 사라졌다.

세드나 공작가를 짓누르던 700년의 저주가 완전히 막을 내린 거였다.

새로운 계약 조건은 무엇일까.

네이선은 어떤 대가를 치르기로 한 거지?

키산드라는 네이선에게 대륙을 정벌할 정도의 힘을 주지 않았다.

네이선을 치유하고 마물들을 사라지게 한 것. 그리고 다시 온천을 샘솟게 한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신의 입김은 그 정도였다.

마신의 계약자라도 네이선이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는 없었다.

황도를 지켜내는 대신 제국군은 고립됐다. 연합군이 제국군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어갔다.

매일 사상자가 넘쳐났다. 보급품도,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연합군은 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참전을 망설이던 약소국들을 연합군의 깃발 아래 모으기 위해서였다.

대륙의 맹주를 사냥하기 위해 수십 마리의 개떼가 모여든 격이었다.

그때 살로메디안과 흑룡 기사들이 나타났다.

* * *

“죽고 싶은 자는 덤벼라! 소원대로 죽여주마!”

검은 용의 깃발을 나부끼며 흑룡 기사들이 진격했다.

공성전에 정신이 팔렸던 연합군의 뒤통수를 때린 거였다.

너무 빨리 승리의 축배를 들던 연합군은 혼비백산했다.

일당백의 기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전쟁의 신 살로메디안.

그들만으로 천하무적일 텐데 디에고의 특제 마도구까지 더해졌다.

살상용 마도구는 불법이었으므로 최대한 은밀히 사용해야 했지만 말이다.

나는 휴고에게 명령했다.

“마도구는 살롬의 마력을 방출할 때만 쓰세요. 적군들이 마도구인지, 살롬의 힘인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공작부인. 효율을 높이자면 자주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승패를 좌우하는 건 마도구가 아니라 군사들의 사기예요.”

“오호라!”

“살롬이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터를 지배해야 해요. 그래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어요.”

살로메디안은 마신의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인간계 최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전투 방식에선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비장의 패가 있었으니까.

“마도구로 예전과의 격차를 좁힐 거예요. 위대한 전쟁의 신이 우리 편이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줘야죠.”

“영민하십니다, 공작부인! 각하의 등장만으로 침략군 놈들은 오줌을 지릴 겁니다!”

“마도구는 살롬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에 불과해요. 불필요한 인명 살상은 피하도록 하세요.”

내 계획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마도구 덕분에 살로메디안의 전투는 더욱 화려하고 강력해졌다.

“살아있는 마신이다!”

“으으악! 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강할 수 없어!”

“죽기 살기로 도망쳐라! 괴물이 쫓아온다!”

살로메디안의 참전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연합군은 세드나 공작령의 깃발만 봐도 도망치기 바빴다.

애초에 조직력도, 충성심도 없었던 군대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살로메디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휩쓸리지 마! 마신은 연합군을 가호하고 계신다! 다 이긴 전쟁이라고!”

사령관인 바실라칸 국왕이 악을 써봤지만 탈영하는 군사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포로는 필요 없다! 투항도 후퇴도 용납하지 마라!”

살로메디안은 침략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인 자들에겐 더욱 가혹한 죽음을 내렸다.

살로메디안과 흑룡기사단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 폭풍이 휘몰아쳤다.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살로메디안을 추앙했다.

“공작 각하가 있으면 제국은 무적이야! 위대한 전쟁의 신!”

“신이 우릴 버리지 않으셨어요!”

“현상수배전단은 뭐였을까요? 폐하께서 공작 각하 내외분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잖아요?”

“침략자 놈들의 술수겠지! 각하께서 반역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살로메디안의 전술은 전설 그 자체였다.

연합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군사를 지휘하던 귀족들이 제일 먼저 본국으로 탈주했다.

전쟁의 승패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후방에서 보급선을 구축하고 병자들을 치료했다.

세드나 영민들이 약초 채집을, 의료 교육원 입학생들이 긴급 구호를 맡았다.

재원은 바바라가 공작가의 보물 창고에서 넉넉히 충당했다.

황도에까지 보급선이 닿자, 제국군도 활기를 띠었다.

“흑룡에게 의지하지 마라! 황실을 지키는 건 황실기사단이다!”

“침략자들을 몰아내자!”

“부상자들은 세드나 치료소로 옮겨라! 거기에 약과 음식이 있다!”

“공작부인께 도움을 청하면 뭐든 도와주실 겁니다! 치료사들을 지휘하시는 분도 공작부인이세요!”

내 이름 앞에 ‘제국의 구세주’란 낯부끄러운 별명이 붙었다.

전쟁을 지배하는 건 황제나 세드나 공작이 아니라, 세드나 공작부인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쓸데없는 소문에 귀 기울일 짬이 없었다.

부상자들은 물론 병든 백성들까지 치료소로 몰려들었다.

약초는 넘쳐났지만, 환자를 살필 치료사의 수가 너무 적었다.

“의료 교육원 입학생들은 기초적인 응급 처치밖에 못 합니다. 중상자들은 너무 많고요!”

황실의 도움으로 치료소를 늘렸다.

하지만 제국엔 쓸 만한 치료사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몰려든 환자들에게 돌아가라 할 수도 없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무슨 소용일까?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 아들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면?

* * *

나는 급히 델마를 불렀다.

“델마. 에단과 함께 아쿠아로드로 가줘.”

“소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국왕 전하를 만나 뵙고 이걸 전해줘. 치료 신관과 치료사들을 파견해 달라는 문서야.”

“제국인들을 위해 아쿠아로드 치료사들을 부리시겠다는 뜻이십니까?”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지불할 거야.”

“국왕 전하께서 받아들이실 리 없습니다. 아이시아 님께서 전하의 통보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쿠아로드 국왕은 내 귀국을 원했다.

전쟁에 휘말리지 말고 통일 신국 건설을 준비하란 뜻이었다.

하나뿐인 딸을 지키고 싶었던 아비의 마음이 섞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쿠아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날 왕좌에 앉힐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지 델마의 얼굴이 어두웠다.

“제안을 받아들이실 거야. 국왕께서 예전의 판단력을 되찾으셨다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치료사 파견은 제국보다 아쿠아로드에게 훨씬 큰 이익이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치료사를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건 제국인걸요?”

“치료사는 전쟁의 승패와 무관해. 어차피 우리가 이기게 되어있어.”

“!”

“아쿠아로드는 제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 중에 유일하게 연합군에 합류하지 않았어. 그것만으로 몸값이 크게 올라가지.”

“제국이 승리하면 아쿠아로드도 덕을 본다는 건가요?”

“우리를 침략한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뱉어내라고 할 거거든. 영토도 듬뿍 뜯어내고.”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바라에게 배운 바로 그 미소였다.

“남의 나라를 넘봤으면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피눈물을 흘릴 때까지 짜내주겠어.”

“그럼 아쿠아로드는…….”

“치료사를 파견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될 거야. 승전국의 최대 지원국이란 명판을 달고.”

“아이시아 님! 통일 신국은 포기하신 겁니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세드나 공작가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말은 사라졌다.

황실기사단도 예를 갖춰 우리를 대했다.

세드나 공작부인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되찾은 거였다.

델마는 그것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직 이야기할 수 없지만 다 계획이 있어.”

“아이시아 님!”

“그러니까 델마는 국왕 전하를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해줘.”

델마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두드린 듯했다.

“에단은 신전에 인맥이 많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테레사의 동태도 살펴봐 줘.”

“실은… 피오넬에게 받은 정보가 있습니다.”

“피오넬이 무슨 말을 했는데?”

“테레사는 염색약을 직접 만든다고 합니다. 효과는 뛰어나지만 부작용이 심하답니다.”

“부작용?”

“극심한 간지럼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약이 없으면 잠도 못 잘 정도로요.”

그러고 보니 죽은 르윈의 편지에서도 간지럼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그게 염색약 부작용이었구나……!”

“르윈이 사망한 뒤 간지럼 약을 전담하던 치료 신관이 있답니다.”

“그 신관을 추적하면 테레사의 행방을 알 수 있겠구나!”

뜻밖의 도움에 얼굴이 환해졌다.

피오넬의 입을 여는데 델마가 큰 역할을 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테레사는 계속 염색을 해야 할 겁니다. 가짜 왕녀라는 명목으로 친위세력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내 생각도 같아. 마도구 사용권도 왕족만의 특권이니까 포기할 수 없을 거야.”

“연합군에 마도구를 넘긴 건 테레사겠죠.”

“그렇겠지.”

“디에고 오빠의 마도구랑은 비교하면 저급품이지만 꽤 성가신 물건입니다.”

“마도구 쪽은 나랑 디에고가 해결할게. 델마는 당장 아쿠아로드로 떠나줘.”

“명을 받습니다!”

델마가 아쿠아로드로 떠났다.

매일 승전보가 들려왔다. 이겼다고 해도 모두가 멀쩡할 수는 없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연합군의 사상자는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았다.

산처럼 쌓인 적군의 시체가 내 마음을 헝클어뜨렸다.

이 땅에서 죽어가는 건 전쟁을 시작한 권력자들이 아니었다.

전사자 대부분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전쟁터에 끌려온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제국이나 연합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이 날 오래도록 잠 못 들게 했다.

* * *

네이선이 연합군 사령관의 목을 잘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에겐 자비를 내릴 것이니!”

연합군의 항복은 너무 빠르지도, 매우 늦어지지도 않았다.

군대를 파견했던 국왕들은 점잖은 척하지만 비굴하기 짝이 없는 문서로 패배를 받아들였다.

전쟁 보상금을 줄이기 위한 각국의 사신들이 제국으로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국과 내통한 매국노들을 색출하는 것만 빼면.

“매국노들을 고발한 자에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겠다. 자수하는 자들은 사형을 면할 수 있다.”

네이선이 갖은 애를 썼지만, 바실라칸 국왕과 결탁한 귀족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사이 전쟁 피해복구가 시작되었다.

가장 바쁜 건 황실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바넷사였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전쟁 보상금 문제는 저보다 바바라가 훨씬 유능합니다. 몇 주라도 좋으니 바바라를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작 각하의 무공과 아쿠아로드의 협력을 이끌어낸 공작부인의 공 역시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바쁘시겠지만 황도로 걸음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바넷사의 편지를 받고 잠시 멍했다.

진심일까? 또 함정이면 어떡하지?

바바라는 길길이 화를 냈다.

“제가 무슨 가축이에요? 빌려주긴 뭘 빌려줘요?”

“그래도 반역자 취급은 더 이상 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지들도 대가리가 있는 인간이면 고마운 줄 알겠죠! 우리가 아니었으면 제국은 쫄딱 망했을 테니까요!”

바바라의 말이 옳았다.

초대 황제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는지, 네이선은 새로운 마신에게 절대적인 힘을 넘겨받지 않았다.

마신의 도움이 있었지만 황실 단독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네이선과 살로메디안. 두 기둥이 힘을 합쳐 이뤄낸 승리였다.

그걸 네이선과 바넷사가 모를 리 없었다.

모른 척할 거였으면 이런 편지도 보내지 않았겠지.

물론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었다.

정중히 초대해놓고 뒤통수를 후려친 인간이 네이선이었으니까.

“그래도 바넷사가 바비의 실력을 인정한 건 기분 좋아요.”

바바라가 입을 삐죽거리며 으스댔다.

“제 두뇌가 언니보다 월등하니까요! 특히 삥 뜯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흐흐흐.”

“저는 당분간 치료소 운영에 전념해야 해요. 바비는 황도에 다녀오세요.”

“흐음. 황실에 빚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닌 척했지만 바넷사가 한 수 접고 들어오자 바바라는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라고 한 건 나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위험해지면 당장 연락하고요. 기사단을 이끌고 바비를 구하러 갈게요.”

내 걱정에 바바라가 코웃음 쳤다.

“황실 인간들은 절 못 건드려요! 저한테는 디에고가 만들어준 마도구가 있거든요!”

“살상 마도구요? 그건 너무 크고 무겁잖아요?”

“후후.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연발포를 제가… 아니, 디에고가 만들었어요. 전 천하무적이에요!”

바바라가 음흉하게 웃었다.

어쩐지 요새 디에고 얼굴을 보기 힘들더니.

또 바바라에게 들볶였던 모양이었다.

“저 없는 동안 디에고가 탈주할까 봐 걱정이에요. 그래도 황궁에 가야겠죠? 연합군 놈들에게 최대한 뜯어내야 우리가 챙길 것도 많아질 테니까요.”

“고마워요, 바비.”

“디에고 감시를 부탁드려요. 가끔은 목을 졸라서라도 쉬게 해야 해요. 과로사한 마도사 시체는 보고 싶지 않아요.”

쌀쌀맞게 말하기는 했지만 디에고를 향한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바바라가 누굴 이렇게 챙기는 건 처음인데? 남동생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반역자로 몰린 우리가 숨어 다닐 때 바바라와 디에고는 바넷사의 감시 아래 있었다.

둘이서 보물 창고를 찾았고, 마도구를 이용해 함께 탈출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바라를 바라봤다.

“요즘 디에고랑 부쩍 붙어 다니던데… 혹시 두 사람.…….”

본격적인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바바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바바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손사래 쳤다.

“어휴, 아무 사이 아니에요!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디에고를 남자로 본 적 없어요! 미친 마도사 따위는 제 스타일이 절대 아니라고요!”

“두 사람이… 좋은 동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요?”

“네엣? 도, 도, 동료요? 친구도 아니고 그냥 동료?”

“바바라가 디에고처럼 지저분하고 마도구 연구에 정신 팔린 남자랑 친구가 될 리가 없죠. 안 그래요?”

나는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바바라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그, 그래도 디에고는 천재잖아요? 천재는 천재랑 끌리는 법이고… 자세히 보면 눈도 맑아요. 오래 가진 않지만 씻겨놓으면 꽤 잘생겼고요.”

“벌써 씻겨봤어요?!”

내 목소리가 벌컥 높아졌다.

바바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시아! 더러운 걸레 빠는 거랑 똑같았다고요!”

“직접 씻겨줬다는 소리예요?!”

“몰라요! 더 이상은 묻지 마세요! 끄아아악!”

바바라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십 대 소녀처럼 순수하고 솔직한 반응에 넋을 잃은 건 나였다.

공작저의 악마 집사, 지옥에서 돌아온 돈 귀신, 바바라가 왜 이러는 거지?

정말 디에고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어색하긴 했지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는 했다.

한쪽은 돈에, 다른 한쪽은 마도구에 살짝 미쳐있으니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두뇌 역시 공통점이었다.

나와 살로메디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라는 점도 똑같았다.

디에고는 바바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 *

“시아. 그대는 쉬어야 한다.”

치료소로 쳐들어온 살로메디안이 선언했다.

“안 돼요. 제가 돌봐야 할 병자가 수백 명이라고요.”

환자에게 붕대를 감으며 대꾸했다.

“치료 신관들이 수두룩하다.”

“저만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어요. 아직 피곤하지 않으니까 돌아가세요.”

치료사들과 그들을 돕는 영민들은 물론 환자들까지 ‘또 시작이군.’이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팔짱을 낀 살로메디안이 내 쪽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설마 오늘 밤도 혼자 자라는 거냐?”

심통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이 남자가 남의 직장에 쳐들어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내가 집게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떡해요!”

“한창 신혼을 즐겨도 모자랄 새신랑이 이 정도 말도 못 하는가?”

살로메디안이 힘주어 물었다.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우리가 무슨 신혼이에요?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발끈했다.

살로메디안이 반발하기 전에 주위에서 이런저런 훈수가 들려왔다.

“아기가 없으면 신혼이지요, 공작부인. 새신랑을 혼자 두면 못 써요!”

“암요. 처음부터 따로 자면 큰일 나요! 얼른 각하를 따라가세요!”

“부부 금슬은 낮이 아니라 밤이 좌우하는 법입니다. 사내의 자신감도 밤에 시작되지요.”

“곧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기씨가 태어나시겠네요. 호호호.”

치료소 안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내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졌는데 살로메디안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의 아이라면 천사보다 더 아름답겠지.”

“아, 아이라뇨?!”

쇳소리 비슷한 비명이 빠져나갔다.

살로메디안과 한 침실을 쓴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이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아직 내 세상은 살로메디안으로 충분했다.

아이를 낳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나와 시아의 아이가 보고 싶은가?”

살로메디안이 치료소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물론입니다, 각하!”

“아들 넷, 딸 넷 정도는 낳으셔야 합니다!”

“그럼 시아를 데려가도 불만이 없겠군?”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기사들 앞이 아니면 입도 떼지 않던 그였다.

사용인들이나 영민들과 넉살 좋게 대화할 줄도 몰랐다.

살로메디안의 변화가 만족스러웠지만, 부부 생활을 응원받고 싶지는 않았다.

“공작부인을 모셔 가십시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거 아닙니까?”

“우리 공작부인 오늘 밤잠 다 주무셨네요. 호호호!”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 상상하지 마시라고요!

나는 그렇게 외치는 대신 살로메디안을 끌고 치료소 밖으로 나왔다.

“살롬은 정말 약았어요! 매번 이러기예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아직도 뺨이 화끈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가 과로로 쓰러질 거다.”

“델마가 에메랄드 린삼 즙을 계속 챙겨줘요. 쓰러질 일은 없어요.”

“그건 나도 즐겨 먹고 있지.”

“살롬이 린삼 즙을 마신다고요? 약초라면 질색하는 분이요?”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평생 살아온 살로메디안은 약초를 질색했다.

치유력을 잃었음에도 그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

그런 살로메디안이 아프지도 않은데 린삼 즙을 챙겨 먹는다는 건 의외였다.

살로메디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이게 다 그대를 위해서다.”

“점점 모를 소리만 하시네요.”

“시치미 뗄 건가? 어젯밤에도 린삼의 효과를 체험했을 텐데?”

살로메디안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소름이 쭉 돋으면서, 어젯밤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살로메디안의 나신. 체온으로 덥혀진 방 안 공기.

맨 살갗이 마찰하는 노골적이고도 선정적인 소리까지!

기억 재생 마도구 덕분에 내 기억력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쉰 듯한 목소리로 내뱉던 달뜬 신음과 살로메디안의 등을 파고들던 손톱의 감촉 또한 잊히지 않았다.

“노파심에 말해두는데. 린삼을 먹지 않아도 그 정도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살로메디안이 강조했다.

나는 자그마한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때렸다.

“그만하세요. 다른 사람 듣겠어요!”

“언제나 최선의 상태로 그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

“알겠으니까 그만하라니까요?”

“못 믿겠다면 오늘은 린삼 즙을 음용하지 않겠다. 그대 몫은 챙기도록 해. 밤새도록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입꼬리가 요염하게 올라갔다.

확실히 그는 말이 많아졌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예전과 똑같았지만.

쩔쩔매는 건 항상 나였고, 그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늘 나였다.

방에서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무는 것도 나였는데, 가끔은 심통이 나서 살로메디안의 등을 손톱으로 긁기도 했다.

정작 그는 내 손톱자국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 * *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깼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걸까. 살로메디안은 날 놓아주지 않았고, 나도 그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제대로 씻지 않은 탓에 목덜미가 끈끈했다.

목욕 생각이 간절했다.

뜨끈한 욕조에 담그면 살로메디안 때문에 흐물흐물해진 몸도 깨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망설이는 사이 살로메디안이 일어났다.

“저 때문에 깨셨어요?”

“그대가 없으면 잘 수 없는 거지.”

잠에 취한 살로메디안이 날 더듬다가 중얼거렸다.

“난 딸보다 아들이 좋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딸에게 작위를 잇게 할 수 있지만 명문가의 아들 선호는 오래된 악습이었다.

그래도 살로메디안이 아들을 바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배신감을 지우기 어려웠다.

“후계자는 꼭 아들이어야 하니까요?”

“후계 따위는 아무 상관 없는데?”

내 물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왜 아들이 좋은데요?”

“그대를 닮은 딸이면 내가 견뎌내지 못할 것 아닌가.”

“…뭐라고요?”

“너무 귀여워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자그마한 시아라니… 상상만으로 돌아버릴 것 같군.”

살로메디안이 숨쉬기 곤란하다는 투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가정교사를 들일 수도 없고, 왕립 학교에도 보낼 수도 없을 거다. 흑룡 놈들은 어떻게 하지?”

“네?”

“내 딸을 저 지저분한 사내들 틈에서 키울 수 없지 않은가. 내 딸에게 접근하는 사내놈들은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살롬. 진정하세요.”

“감히 내 딸을 노리다니…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지. 지옥에서도 후회할 만큼 괴롭혀 주겠어. 남자친구? 약혼자? 사지를 찢어도 모자랄 놈들……!”

살로메디안이 살기를 뿜으며 허공을 노려봤다.

우리 사이에 이미 딸이 있고, 그 애가 다 자라 결혼 적령기라도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잖아? 수녀로 키울 게 아니라면!

과장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딸을 걱정하느라, 다리까지 달달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내 이상으로 딸에게 집착하는 남자가 될 것 같았다.

정말 딸은 위험하겠는데? 우리 딸 근처의 남자들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진심이다.”

“그러니까 문제라고요.”

“남자는 모두 늑대다.”

날 놓아주지 않던 살로메디안의 집요한 손길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백인가요?”

“그래서 싫은가?”

살로메디안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올렸다.

찌릿,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여지없이 전율했다.

그것도 잠시, 땀 냄새가 날까 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냄새가 나더라도 어차피 그와 똑같을 테지만 수줍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좀 씻을래요.”

일어서려 내 손목을 살로메디안이 잡아챘다.

“가지 마.”

“수건을 적셔오려고요. 냄새 때문에 그냥 못 자겠어요.”

“달콤하기만 한데.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살로메디안이 내 살갗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이보다 좋은 향수는 없다는 듯 느슨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또다시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놔 주세요.”

“그럼 내가 닦아주겠다.”

살로메디안이 몸을 일으켰다.

달빛이 그의 근육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떡 벌어진 어깨와 늘씬한 허리, 꽉 짜인 복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매끈한 피부 위에 울긋불긋한 열꽃은 내가 만든 거였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도와준다니까.”

“순수한 의도가 아니잖아요.”

“내 아내는 눈치도 빠르군.”

살로메디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날 향한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다시금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악기를 연주하듯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끝 탓에 배 속이 화끈거렸다.

“진짜 더 이상은 안 돼요. 이러다 쓰러진다고요!”

애원해 봤지만, 살로메디안은 태연했다.

“염려하지 마. 여러 번 실험해봤는데 그대는 보기보다 훨씬 건강하다. 때론 나보다 더 강하지. 후후.”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해봤다는 거야? 내가 더 강하다는 건 무슨 뜻이고?

감당하기 힘든 전율을 떨치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살로메디안은 요즘 너무 위험했다.

항상 굶주려 있었고, 갈증 어린 눈으로 날 노려봤다.

틈만 나면 날 끌고 침대로 향했다.

덕분에 항상 잠이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간 에메랄드 린삼의 약효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약속한 한 달은 시작도 못 했는데.

문득 살로메디안과 보낼 한 달이 두려워졌다.

“나도 씻고 싶어서 그런다. 같이 목욕하자.”

“이 시간에요? 사람들을 깨울 수 없어요.”

“이럴 때 딱 좋은 곳이 있잖아?”

살로메디안이 입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그가 어딜 말하는지 나도 그제야 눈치챘다.

* * *

봄이 오는 건가. 새벽바람도 예전만큼 매섭지 않았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어스름한 하늘을 밝히는 별을 바라봤다.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별이 사랑스러웠다.

별을 보면서 온천욕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 시간에 온천욕을 하다니. 꿈만 같아요.”

나도 행복하다거나, 그대가 행복하니 기쁘다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살로메디안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천 좀 벗어버리면 안 되나?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살로메디안이 내 몸을 감고 있는 천을 지적했다.

두 팔로 가슴 앞섶을 가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취향 존중해주시죠.”

“목욕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하는 말이다.”

“전혀 방해되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엔 방해가 된다.”

그렇게 말하며 살로메디안이 날 뒤에서 껴안았다.

내 몸을 옭아매는 두 팔과 등 뒤로 닿는 그의 나신.

온몸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체온이 가파르게 올랐다.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이럴 작정이었군요?”

“알고 따라온 줄 알았는데.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절대요! 순수하게 온천욕만 하려고 했어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뜻이지.”

온천수의 온도가 조금 전보다 뜨거워졌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도 변했다.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욕망으로 둔탁해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부근이 지근거렸다.

“시아.”

그가 부르는 애칭이 날 옭아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끝내 살로메디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밤하늘이 핑크색으로 덧칠되었다. 별은 샹들리에 불빛보다 밝아졌다.

그와 하나가 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서로 다른 육체를 지닌 타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과 불, 완전히 다른 성질을 타고났으면서도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니.

살로메디안이 쌍 속성이 아니었다면 우린 서로의 몸을 탐할 수 없었을 거였다.

아이를 낳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을 거였다.

그러니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마력 속성과 상관없이 부부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바바라랑 디에고도 이어줄 수 있고.

바바라는 불 속성을, 디에고는 물 속성을 타고났다.

서로에게 끌린다고 해도 부부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울 방법이 없을까?

살로메디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아. 그대의 마력이 달라진 것 같지 않나?”

“마력이요?”

“원래 불 속성치고는 물에 친숙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더 있는 것 같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내가 화들짝 놀랐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어요? 요즘 제 마력에 물 속성 마력도 깃든 것 같았거든요.”

“그거참 이상하군. 사실 나도 그렇거든.”

“네?”

“쌍 속성도 잃었고, 마신의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완전히 물 속성이 되어야 맞는데… 불 속성 마력도 쓸 수 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대 덕분이 아닐까? 내 심장을 가진 그대를 매일 안고 있으니까.”

살로메디안이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날 끌어안았다.

“매일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잠들고, 온천욕도 하지 않나? 그러니…….”

“잠깐만요!”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심장이 왈칵 뒤집혔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살롬이 불 속성 마력을 쓸 수 있었던 게 언제부터였죠?”

“언제부터라니?”

“잘 생각해 보세요. 엄청 중요한 문제니까요!”

무섭도록 진지한 날 보고 살로메디안이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왜 묻는 거지?”

“살롬의 물 화살은 항상 푸른색이었어요. 종전 2주 전, 라코드 광야 전투에서 물 화살 색이 바뀌었어요. 약간 붉은 빛이 돌았거든요!”

“대단한 기억력이군.”

“뭔가 다른 게 느껴지진 않았나요?”

“불 마력이 조금 돌아왔던 게 기억난다. 온천욕 덕분에 건강이 돌아왔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

“맞아요! 라코드 광야 전투 전에 처음 온천욕을 했었죠! 온천수가 다시 채워졌다고 살롬이 절 온천으로 데려갔잖아요!”

내 목소리가 들떴다.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그리 들뜰 일인가? 그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만.”

“목욕 때문인 것 같아요!”

“으응?”

“살로메디안에게 불 마력이 돌아오고, 제게 물 마력이 생긴 게 목욕, 특히 온천욕 때문인 것 같다고요!”

생각을 정리하는 듯 살로메디안이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살롬이 그랬잖아요! 제가 처음 마력을 익힐 때요!”

그제야 살로메디안도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뜨거운 목욕이 마력을 체화하는 데 도움 될 거라고 했지. 폭주할 때도 불이 아닌 물이 도움이 됐고.”

“전혀 다른 성질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뜨거운 물! 온천에서는요!”

나와 살로메디안은 자주 함께 목욕했다.

살로메디안은 그것이 제국식 부부 문화라고 했다.

온천이 되살아난 후부터는 같이 대욕장을 찾는 날보다 온천에 가는 날이 훨씬 많았다.

살로메디안에게 불 속성 마력이 돌아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온천은 물과 불이 합쳐진 유일한 공간이에요. 쌍 속성인 마신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속성이 다른 남녀가 함께 온천욕을 하면 마력 성질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건가?”

“바뀐다기보다는 서로를 닮아가는 거죠!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현기증을 넘어선 두통 때문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이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마력 문제로 헤어져야만 했던 커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확인해 볼 수 있을까? 그대와 나는 큰 도움이 안 될 텐데.”

살로메디안 말대로 우리는 가설을 증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쌍 속성이었고, 나는 물의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아주 적당한 실험체가 있어요. 마력 크기는 비슷한데 성질은 정반대인.”

살로메디안이 미심쩍다는 투로 턱을 쓰다듬었다.

“보통 신분으로는 온천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것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그 사람들에게는요.”

“대체 누군데?”

“황제랑 그의 집사요.”

* * *

전쟁 보상금 징수가 끝나고 논공행상이 시작됐다.

황제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세드나 공작가를 제일 먼저 황궁으로 불렀다.

델마가 혹시 모를 위험을 지적했지만 나와 살로메디안은 황궁으로 향했다.

네이선을 피할 이유가 더는 없었다.

흑룡의 최정예 기사단이 우리를 호위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우리는 마차 창을 열고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공작 각하 만세!”

“공작부인 만세! 공작부인 덕분에 제 아들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두 분이 없었다면 나라가 무너졌을 겁니다!”

들꽃을 수줍게 건네주는 아이도 있었고, 갓 구운 빵을 선물로 주는 여인도 있었다.

살로메디안의 미모를 확인한 젊은 아가씨들이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날 보느라 넋을 잃은 청년들도 있다고 했다.

“황제도 우릴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네요. 전쟁 후 민심을 다독이려면요.”

내가 미소 지었다. 살로메디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함부로 해도 상관없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계약이 끝나지 않았나? 이제 언제든지 네이선을 죽일 수 있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양손을 풀었다.

우두둑, 관절에서 나는 소리가 살벌했다.

“그놈이 그대를 넘보는 걸 보면서 몇 번이나 이를 악물었는지…….”

“살롬?”

“참지 않아도 된다고. 심장을 찢어도 되고, 머리를 갈라도 된다. 참으로 기대되는군.”

오래 숙성된 분노가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눈빛만으로도 네이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지 마세요. 여긴 황도고, 우린 황제에게 포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에요.”

얌전히 손이나 흔들라는 뜻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었다.

그가 삐딱하게 눈을 치떴다.

“그래? 나는 버릇없는 조카를 훈육하러 가는 건데.”

“문제 일으키면 화낼 거예요.”

“예의범절을 가르쳐야지. 그동안 개처럼 굴어도 내버려 뒀으니까.”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얌전히 있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자중하세요. 정말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잖아요?”

“통일 신국 말인가?”

“네.”

“흐음. 제국이 우리를 순순히 독립시켜 줄 리가 없는데.”

살로메디안의 미간을 찌푸렸다.

세드나 공작령과 아쿠아로드를 통일하려면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수적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뭐니 뭐니 해도 황제였다.

“그렇겠죠. 마신의 숲 경비, 마물 토벌, 전쟁까지… 영원토록 세드나 공작가의 피를 쪽쪽 빨아대고 싶을 테니까요.”

“그대도 네이선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은가?”

“물론이죠! 황제랍시고 살롬을 이용하기만 했잖아요? 살롬이 없었으면 그 잘난 황좌를 지킬 수나 있었겠어요?”

“…….”

“반역자라고 현상 수배할 때는 언제고. 공작님, 공작님 하면서 알랑거리는 것도 재수 없어요. 흥!”

당차게 콧방귀를 끼었다.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살로메디안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시아. 그런 표정은 어디서 배운 거지?”

“제 얼굴이 이상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다 드러난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정말요?”

“그대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 모르겠나?”

살로메디안이 턱짓으로 마차 밖을 가리켰다.

꽃가루를 뿌리던 아이들이 울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선을 향한 분노가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나 화 안 났어. 아하하…….”

아이들을 향해 억지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무표정해서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받았었는데.

언제부터 감정을 이토록 쉽게 드러내게 되었을까.

그 질문이자 답인 남자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는 그대 감정을 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겠어.”

“이상하지 않아요?”

“너무 사랑스럽다. 꿈틀거리는 눈썹, 도발적으로 치뜬 눈,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입술 모두.”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내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날 향하는 시선은 봄볕처럼 따스했다.

양 볼이 은은히 달아올랐다. 아랫배 안쪽이 찌릿했던 것 같기도 하다.

괜한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뾰족하게 답했다.

“환영 인파를 향해 인사나 하세요.”

“여기서 참도록 하지.”

살로메디안 치고 순순히 물러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기습적으로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쪽, 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민망한 소리가 났다.

“살롬!”

내가 그의 애칭을 부르는 동시에 환호성이 높아졌다.

“와아아아!”

“과감하십니다, 각하! 제국 제일의 사랑꾼이세요!”

“공작부인 같은 부인이라면 나라도 못 참지!”

사람들이 놀리듯 휘파람을 불어댔다.

내 얼굴은 순식간에 탐스러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살로메디안의 옆구리를 힘주어 비틀었다.

약간은 아파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런 내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투였다.

“계속 귀여운 짓 하면 나도 못 참는다.”

“살롬이 뭘 참았는데요? 공개 뽀뽀까지 했으면서!”

“이래 봬도 꽤 참고 있는 거다. 온 세상 앞에서 그대가 내 아내임을 증명하고 싶으니까.”

“어떻게요?”

“…궁금하면 가르쳐줄까?”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한층 더 요염해졌다.

푸른 눈동자에 욕망의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은 아닐 게 뻔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마부를 찾았다.

“얼른 황궁으로 가줘요! 폐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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