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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둠 속에서 나타난 폴을 보고 테레사가 소리쳤다.
“폴! 왜 이제야 온 거야!”
잘린 왼팔의 고통을 잠시 잊을 정도로 반가웠다.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지만 한낱 집사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왜 내 연락을 무시한 거야?”
테레사는 여러 차례 폴과 접촉을 시도했다. 대량 살상 마도구를 건네받기 위해서였다.
“소인이 테레사 님을 무시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테레사 님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심문당했습니다.”
“제국 놈들이 마도구를 안 가져오면 날 죽이겠다고 했다고!”
“송구합니다.”
“어떻게 탈출한 거야?”
“이 마도구 덕분이지요.”
폴이 등짐에서 커다란 원형 형태의 마도구를 꺼냈다.
“마력을 3배 이상 키워주는 마도구입니다. 조작법이 복잡하지만 숙련되면 연발탄을 쏠 수도 있습니다.”
“드디어 개발에 성공한 건가!”
테레사가 마도구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었다.
기대한 만큼의 효력은 아니지만 쓸모가 있을 터였다.
“수고했어, 폴. 다른 놈들은 모조리 도망갔는데… 너만은 끝까지 충성을 지키는구나.”
“소신은 아쿠아로드 왕실의 충복입니다. 왕실의 피를 이으신 테레사 님을 따르기로 맹세했고요.”
“거짓 선동에 놀아나지 마. 내가 가짜 왕녀라니. 말도 안 되지!”
하나 남은 손으로 두피를 긁으며 테레사가 중얼거렸다.
“간지럼 약은 가져왔어?”
“물론입니다.”
“역시 너밖에 없어.”
폴이 건네주는 약병을 받으며 테레사가 미소 지었다.
사라진 팔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짓밟힌 자존심은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초프 후작에게 마도구를 드리실 겁니까?”
“내가 왜? 발초프는 바실라칸 국왕의 졸개일 뿐이야. 주려면 연합군 사령관인 바실라칸 국왕에게 줘야지.”
“발초프 후작이 왕비님을 인질로 잡고 계시지 않습니까?”
“죽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해. 귀찮은 여자를 대신 처리해주면 고맙지.”
“그런 다음엔요?”
“몰라서 물어? 제국을 패망시키는 데 일조해야지! 그래야 바실라칸 국왕이 콩고물이라도 떼 줄 거 아니야?”
“이젠… 콩고물에 만족하시는 겁니까?”
폴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테레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폴. 말본새가 건방지다?”
“송구합니다. 그저 테레사 님이 염려되어서…….”
“입조심해. 아무리 너라도 날 무시하면 죽여버릴 테니까.”
테레사의 눈에 핏발이 도드라졌다. 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테레사의 빛바랜 푸른 머리칼에 닿아 있었다.
* * *
가슴에 붕대를 감은 네이선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연합군이 쳐들어왔다고?”
“바실라칸 국왕이 사령관이랍니다.”
“광신도 놈이 미쳤군!”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폐하.”
바넷사가 네이선을 부축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네이선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걸음을 옮기기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살로메디안의 검이 가슴을 꿰뚫던 순간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독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죄책감은 그보다 짙고 끈질겼다.
“제국이 위태로운데 황제란 놈은 침대 신세로구나.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외세의 침공도 없었겠지.”
자조적인 목소리로 네이선이 읊조렸다.
“그대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바넷사.”
“소신이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대는 언제나 옳았다.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내가 문제야.”
아이시아를 가지고 싶었다.
아이시아만 있으면 1%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오롯이 사랑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시아의 아름다움엔 살로메디안의 그림자가 깃들어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었던 숙부.
그가 소유한 천사를 닮은 여인.
그를 향한 질투심과 호승심이 소유욕으로 변질되었는지도 몰랐다.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제국의 검이자 방패였던 세드나 공작은 쓰러졌다.
최강의 기사단은 반역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대륙의 지배자를 물어뜯기 위해 승냥이 떼가 몰려들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모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적들의 위치는?”
“생니콜 자작령을 본거지로 삼고 진군 중이라 합니다.”
“흐음.”
“세드나 공작이 없다고 해도 국경이 너무 빨리 무너졌습니다. 내통자가 있는 듯합니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지. 황제가 이 모양이니까.”
네이선이 제 상처를 바라보며 쓴웃음 지었다.
바넷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은색 안경테를 추켜올렸다.
“자조 섞인 비아냥은 관두십시오. 불쌍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도 쓸모없고요.”
“그대는 이 순간에도 참 냉정하군.”
“다정하길 바라십니까?”
네이선이 입을 다물었다. 바넷사를 지키려다 입은 상처였다.
생색낼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다.
네이선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바넷사가 딱 잘라 말했다.
“폐하께 눈곱만큼도 고맙지 않습니다.”
“바넷사……!”
“저 때문에 제국은 강인한 황제를 잃었습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는데.”
네이선이 볼멘소리를 냈다.
바넷사의 악다문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만 아니었다면 폐하께서는 기사들을 이끌고 적군을 무찌르셨을 겁니다.”
“그대 잘못이 아니다.”
“아뇨! 저는 폐하를 위험에 빠뜨린 최악의 신하입니다!”
울먹이는 것처럼 바넷사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천하의 바넷사가 눈물을 보일 리 없지만 말이다.
“불충한 몸으로 폐하를 섬길 수 없습니다. 국난이 마무리되는 날 바로 사직하겠습니다.”
바넷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바넷사! 그게 무슨 말인가?”
“저 때문에 폐하는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반역자도 잡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세드나 공작을 데려오라며 난리입니다!”
“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님께서 정략결혼 상대를 준비해주실 겁니다. 혼인 탓이라면 폐하라도 신하의 사직을 막으실 수 없습니다.”
“날 떠나기 위해서 결혼까지 하겠다고?”
“좀 늦었지만 못 할 것도 없죠.”
네이선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바넷사가 자신을 떠난다는 것만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바넷사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결혼만은 절대 안 된다!”
네이선이 고통을 참고 바넷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목은 생각보다 훨씬 가냘팠다.
바넷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것이 네이선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바넷사는 떨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
“왜 말리시는 겁니까?”
바넷사의 물음에 네이선은 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울먹이고 있다는 것만 겨우 눈치챘을 뿐.
“왜 저를 구하신 겁니까?”
바넷사가 질문을 바꿨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살로메디안이 바넷사를 노린다는 걸 깨닫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성도 논리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바넷사가 죽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제 목숨을 내놓더라도 말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바넷사가 나한테 뭔데?’
그 물음에 네이선은 아직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유도 없이 목숨을 걸 만큼 어리석은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나도 혼란스러우니까.”
“혼란스러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물 속성이니까요!”
“여기서 마력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폐하께서 절 들쑤셨으니까요!”
내가 뭘? 억울함을 토로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바넷사의 뺨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참고 또 참았는데… 절대 내색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는 절 흔들어 놓으셨잖아요!”
“그대답지 않게 왜 울고 그러는가?”
“저다운 게 뭔데요? 대체 제가 폐하께 뭡니까?”
바넷사의 날 선 물음이 살로메디안의 검보다 아프게 네이선을 찔렀다.
그녀의 초록 눈에 맺힌 눈물 또한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우는 바넷사를 품에서 다독여주고 싶었다.
‘바넷사는 집사일 뿐이잖아? 아니, 보통 집사는 아니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충신이자, 오른팔이자…….’
거기서 네이선이 생각을 멈췄다.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인생의 동반자.”
“네?!”
“그대는 내 인생의 동반자다. 그대 없이는 황제 노릇도 할 수 없어.”
거짓 한 점 섞이지 않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걸 연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이시아를 원했을 때처럼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일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넷사는 은은한 향을 머금은 차 같았다.
바넷사 덕분에 하루를 시작했고, 바쁜 일정을 소화했으며, 지친 하루를 마무리했다.
바넷사가 없는 나날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바넷사를 바라보는 네이선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피부. 꾸미지 않아도 숨겨지지 않는 단아한 미모. 총명하고 싱그러운 눈동자와 깔끔하게 넘긴 녹색 머리칼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바넷사가 이토록 아름다웠나……?’
네이선이 휘청거렸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바넷사가 제 마음을 비난할 줄도 몰랐다.
“닥치세요! 딴 여자 좋다고 이 난리통을 만들었으면서! 인제 와서 그런 말 하면 얼씨구나 좋아라 할 줄 알았어요?”
“바, 바넷사?!”
“폐하는 구제 불능 쓰레기예요! 바람둥이보다 못한 하급 멍청이라고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바넷사가 네이선의 얼굴에 전쟁 보고서를 내던졌다. 그리고 횡 하니 떠나버렸다.
네이선은 바넷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나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도 바넷사가 옳다.
자신은 구제 불능 하급 멍청이가 분명했다.
* * *
연합군은 크로티무스 제국을 점령한 것처럼 거칠게 행동했다.
마을이 불타고, 젊고 어린 여자들이 끌려갔다.
평생 모은 재산과 겨우내 먹을 식량을 빼앗겼다.
기습이었다고 하지만 제국군의 대응은 형편없었다.
선두에서 제국군을 지휘해야 할 황제는 병상에 누워있었다.
절대적인 힘으로 적들을 공포에 빠뜨려야 할 세드나 공작은 사라졌다.
그것이 제국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반대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디에고가 개발한 것과 비슷한 위력의 마도구를 운용하고 있었다.
제국군이 후퇴를 거듭하자 연합군은 더 악랄하게 민가를 약탈했다.
아쿠아로드와 세드나 령을 통일해 신국을 건설하자는 계획은 연기되었다.
백성들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흑룡 기사들은 신분을 감추고 산개하여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매일 부상자가 속출했다.
공작저를 감시하던 황실 기사들도 후방으로 후퇴했다.
덕분에 우리는 빈 공작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의료 교육원 입학자들을 모아 응급 처치 기술을 가르쳤다.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도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쓰러진 지금은 내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델마는 한술 더 떴다.
“당장 아쿠아로드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델마도 통일 신국을 세우는 데 동의했잖아? 연합군에 영토를 빼앗기면 아무 소용이 없어.”
“아이시아 님께서 돌아가시면 그거야말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난 안 죽어.”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세드나 공도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델마!”
“국왕께서도 아이시아 님의 귀국을 독촉하고 계십니다. 내일까지 제국을 떠나지 않으시면 통일 신국은 없던 일로 하실 거랍니다.”
“!”
“세드나 영민들을 생각하신다면 더더욱 아쿠아로드에서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기사들을 더 잃기 전에요!”
델마의 말대로 기사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제국군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제국군은 우리를 여전히 반역 잔당 취급했다.
우리도 언제 뒤를 칠지 모르는 제국군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함께 싸울 수 없었다. 연합군을 상대하는 건 더욱 무리였다.
이대로 가다간 건국의 주춧돌이 되어줄 기사들만 잃을 터였다.
살로메디안은 나날이 수척해져 갔다.
가끔씩 고통에 찬 신음을 뱉는 것 말고는 미동도 없었다.
두렵고 끔찍한 나날이 이어졌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 버틸 수나 있을지 미심쩍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신의 숲에서 흉보가 도착했다.
“공작부인! 마물 떼가 몰려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 마수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이 땅의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나는 여신인지 마신인지 모를 신을 찾았다.
응답은 바라지 않았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호위 몇몇만 남기고 모든 기사들이 마물과 맞서 싸웠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괭이와 도끼를 들고 따라나섰다.
“끼에에엑!”
“마물을 처리해라!”
“후퇴하지 마라! 가족들을 지켜야 해!”
“아아악!”
절망으로 가득한 비명이 끓어 넘쳤다.
거리엔 피가 흐르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황실은 황도를 지키느라 필사적이었다. 연합군의 승리가 목전이라는 소식이 파다했다.
연합군 사령관이 항복을 요구했고, 황제는 도망 중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세드나 공작께서는 어디 계시지? 왜 우릴 구해주시지 않는 거야!”
“공작 각하만 계시면 연합군 놈들을 전부 쓸어버리실 텐데!”
“조금 더 기다려요! 흑룡기사단을 이끌고 오시는 중일 거예요!”
살로메디안을 찾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졌다.
살로메디안이 가사 상태 빠졌다는 사실을 백성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살로메디안은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망이 겹칠 때쯤 내 앞에 키산드라가 나타났다.
“키산드라 님?!”
예상치 못했던 손님을 보며 숨을 집어삼켰다.
키산드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시아.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냐?
비난조는 아니었는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키산드라의 입가에 항상 걸려있던 비소도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안개가 키산드라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악하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쩐지 두렵고 음습한 기운이었다.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나한테 마물들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지 않지? 연합군을 격퇴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
-아니면 살로메디안을 살려달라거나.
키산드라의 물음이 유리 파편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나도 몇 번이나 키산드라를 찾아가고 싶었다.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고 싶었다.
살로메디안을 살려달라고, 그가 눈을 뜰 수 있다면 목숨도 내놓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온천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키산드라에게 기도하지도 않았다.
살로메디안을 구해 달라는 부탁은 키산드라에게 700년 동안 마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유쾌하고 짓궂지만 너무나 외로운 사람.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운명을 떠안은 사람.
평생 제국을 위해 희생했고, 죽어서도 평안하지 못했던 키산드라.
그녀를 지키려 한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했다.
어머니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키산드라를 저버릴 수 없었다.
“저도 키산드라 님을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키산드라에겐 가소롭겠지만 그것이 진심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부탁을 참는 것뿐이라도 말이다.
-너는 헬레나의 이상한 부분을 닮았단 말이야. 이 망할 놈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키산드라가 얄밉다는 듯 창백한 살로메디안의 뺨을 쿡쿡 찔렀다.
살로메디안은 밀랍인형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만약 여기 쓰러져있는 것이 너였다면 살로메디안은 무조건 널 살려 달고 했을 거다. 내가 마신으로 칠백 년, 아니 칠천 년을 살건 말건.
“살롬이라면 그랬겠죠.”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로메디안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지 눈으로 지켜본 것처럼 훤했다.
그는 키산드라의 멱살을 잡고 ‘당장 시아를 살려내!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하란 말이야!’라고 외쳤을 터였다.
제 목숨보다 날 사랑한 남자. 언제나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줬던 남자.
그가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었어요.”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우중충한 죄책감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헬레나가 무슨 소리를 했는데?
키산드라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어머니의 편지와 내 망설임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어머니께서 키산드라 님의 미래를 봤다고 하셨어요.”
-고작 그것 때문에 망설였다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짚이는 바가 있는지 키산드라가 피식 웃었다.
“고작이라니요? 어머니의 예언에 따르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키산드라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괜히 머뭇거릴 필요 없어. 나도 헬레나의 예언을 들었으니까.
“!”
-헬레나는 내가 마신이 되는 미래를 여러 번 봤다고 했지.
허허로운 눈빛으로 키산드라가 중얼거렸다. 분노보다 맹렬한 체념이 담긴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제발 틀리길 바랐던 마지막 예언은 ‘마신이 된 키산드라’였다.
“피하실 수 있어요! 거의 다 왔잖아요? 키산드라 님이 쌍 속성을 버릴 수만 있으면……!”
-그만해, 아이시아.
“키산드라 님!”
-헬레나와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는 잘 안다.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눅눅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슬픔 대신 은은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너희 둘 덕분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희망이란 걸 아주 오랜만에 가져봤거든.
“포기하시면 안 돼요!”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라면?
키산드라가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녀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바닥에 깔린 안개가 벽을 타고 천장을 휘감았다.
검은 안개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상은 깊은 밤처럼 어두워졌다.
키산드라의 두 눈만이 섬뜩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종류의 빛이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으로 알았다.
-마신이란 놈이 제멋대로 날 끌고 다니는 건 질색이다. 700년을 더 사는 것도 정말 최악이지.
“키산드라 님……!”
-어차피 결정된 미래라면 마지막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마신이 되시겠다는 건가요?”
키산드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살로메디안이 마물 새를 죽여 달라고 했을 때 이미 결정됐다. 마신의 힘을 너무 많이 썼거든.
“그럼 지금은……?!”
키산드라가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휘몰아치며 어떤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둘 달린 드래곤.
키산드라는 이미 마신이 되었던 것이다.
* * *
-온천도 다시 솟아오를 거다. 마물들도 곧 잠잠해질 거야. 기뻐하렴, 아이시아.
키산드라의 고단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까마득한 벼랑 끝으로 떠밀린 기분이 이럴까.
아니, 소중한 이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린 기분이었다.
현기증인지 메스꺼움인지 모를 감각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드레스 자락을 붙든 손끝이 차갑게 굳어갔다.
내가 이럴 진데 당사자인 키산드라는 어떨까.
『키산드라 님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운명을 떠안으신 가엾은 분이야. 네 남편과 힘을 합쳐 그분을 도와주렴.』
편지를 읽었을 뿐인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막막함을 가누지 못하고 키산드라를 붙잡았다.
타인에게 손을 뻗은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
“얼른 무르세요! 마신은 절대 못 하겠다고 버티시란 말이에요!”
-아이시아…….
“키산드라 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170년이나 세드나 공작이셨잖아요? 누구보다 강한 분이시잖아요?”
키산드라의 옷깃에서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침범한 기분이었다.
터질 듯한 두려움을 나는 악으로 맞서 싸웠다.
“왜 이제 와서 항복하시는 거예요? 끝까지 버티셨어야죠?!”
-그러게. 참 이상하지?
“키산드라 님!”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내 아이를 살리고 싶더구나. 이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어.
키산드라의 말에 내 눈이 보름달처럼 커다래졌다.
키산드라의 시선이 살로메디안을 향했다.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다.
“아, 아들이라고요?”
-오만하고, 재수 없고, 위험한 내 아들이지. 나랑 꼭 닮은.
“!”
-이 녀석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느냐.
“키산드라 님께서 마신이 되면… 살로메디안이 깨어나나요?”
-물론. 전대 마신과 제국의 계약은 끝나는 거니까.
살로메디안이 깨어난다니!
태양을 가렸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키산드라를 향한 송구스러움과 죄책감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기대가 날 뒤흔들었다.
-망할 꼬마는 발광을 하겠지만 지가 어쩌겠어. 내가 그리하겠다는데.
키산드라의 눈동자에 낯선 온기가 담겼다.
그것은 마신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이었다.
키산드라는 살로메디안을 언제부터 이런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난 두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키산드라는 700년을 바쳐 살로메디안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가사 상태에 빠진 건 네게 심장 반쪽을 준 덕분이다.
키산드라가 날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던졌다.
“네?”
“계약을 어긴 세드나 공작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고통받는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에겐 심장이 반쪽밖에 남지 않았지.”
“그게 다행인 건가요?”
-이 상태로는 통각을 느끼지 못할 테니 다행 아니냐? 네게 고맙구나, 아이시아.
키산드라가 살로메디안의 백금발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가끔씩 몸부림치는 살로메디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는데 원래는 더 고통스러워했어야 했다고?
꾹꾹 눌러 담았던 분을 터뜨렸다.
“대체 계약 마법이 뭔데요! 황제가 뭔데 우리 살롬만 고통받아야 하는 거예요?”
-글쎄, 왜였을까. 너무나 당연해서 궁금해한 적도 없구나.
“권력은 독점하면서 왜 책임만 떠넘기는데요? 희생양이 되기 싫으면 권력을 포기하든지! 권력이 좋으면 자기가 책임을 지든지!”
-그거참 좋은 아이디어구나! 권력을 가진 자가 책임을 함께 진다는 거!
키산드라가 방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미심쩍은 눈으로 키산드라를 훑어봤다.
“키산드라 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새로운 마신이 탄생하면 새로운 계약이 필요하지 않겠니?
“!”
-나라 꼴을 보니까 마신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간절한 것 같은데?
키산드라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오금이 저릴 만큼 음산한 기운이 폭발했다.
“네이선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안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래. 세드나 공작가는 마신의 계약에서 해방이다. 앞으로 마신의 계약자는 황제가 될 거야.
“!”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까 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살로메디안이 깨어나는 것도 모자라,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바보 같은 황제가 계약자가 된다니!
심장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질주했다. 감당할 수 없을 크기의 기쁨이 가슴을 꽉 채웠다.
‘살롬!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키산드라 님이 다 해결해주신대요!’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살로메디안의 공포를 알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170년이나 홀로 살아온 키산드라 밑에서 자랐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다는 것이 죽음보다 쓸쓸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무감각했던 것이 아니라 감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소중한 이들이 생길까 봐. 그래서 그들을 잃었을 때 더 고통스러울까 봐.
고요한 죽음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마신의 계약도 끝이래요! 키산드라 님께서 살롬을 위해서 그렇게 해주신대요!”
살로메디안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목청껏 외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키산드라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을, 평생 지우지 못할 미안함을 어찌해야 할까.
키산드라의 희생을 밟고 행복해도 되는 걸까.
있는 힘껏 참았건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일그러졌고 흐른 눈물이 입술 위쪽에 맺혔다가 떨어졌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시아……!”
잇새를 스치는 사랑스러운 발음.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살롬! 정신이 들어요?”
“시아… 누… 렸지? 데… 니까…….”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살로메디안이 깨어났으니까.
“잘 안 들려요!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의 입가에 귀를 바짝 붙였다.
더운 숨결과 함께 살로메디안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보다 또렷해진 목소리와 함께.
“누가 그대를 울렸지? 데려와. 죽여줄 테니까.”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키산드라가 사라졌다는 걸 몰랐다.
살로메디안을 보느라. 또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느라, 키산드라의 마지막 말도 듣지 못했다.
나는 살로메디안의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심장 위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던 마법진을 확인했다.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가슴 근육과 매끈한 피부를 더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진이 사라졌어요!”
숨 막힐 듯한 기쁨이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덕분에 살로메디안의 허리를 깔고 앉아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제 해방이에요! 살롬을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시아…….”
“정말 꿈만 같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두 손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팍을 주물렀다.
손바닥을 활짝 펴서 심장 부근을 둥글게 문지르기도 했다.
내 밑에 깔린 살로메디안이 어떤 심정일지는 상상도 못 했다.
“알겠으니까 그만 내려오겠나?”
“네?”
“나도 위험하고, 그대도 위험해질 것 같은데.”
살로메디안이 입술 끝자락을 씹다가 낮게 읊조렸다.
귓바퀴가 은은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허리에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정확히 살로메디안의 어딘가를 깔고 앉아 있었다.
내가 뭘 했던 거지? 들썩이다가 흔들지 않았나?
“으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살로메디안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조심해!”
살로메디안이 강인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챘다.
그 모습이 평소와 똑같아서 눈물이 밀려 올라왔다.
그가 깨어났을 뿐인데 모든 근심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는 모든 것이 괜찮으리라는, 심지어 완벽히 해결될 거라는 극단적인 낙관에 사로잡혔다.
내 곁에 살로메디안이 깨어있다는 것만으로.
“왜 이렇게 마른 거야. 속상하게.”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몸무게를 재보겠다는 듯 내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덥석 들어 올렸다.
길에서 구조된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제가 고양이에요? 그만 내려주세요.”
“고양이보다 가볍겠군.”
“저보다 살롬이 더 말랐어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까요.”
“난 괜찮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사내구실은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염려 마.”
살로메디안이 요염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불이라도 붙인 듯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살롬!”
발버둥을 치자 그가 날 내려놓았다.
“그대 덕분에 확인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뭘 어떻게 확인했는지는 몰라도 살로메디안은 자신의 남성적 건강이 꽤 흡족한 모양이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은 불만투성이였지만.
“그대를 잡아먹으려면 한참 걸리겠어. 토실토실 살부터 찌워야 할 테니까.”
“지금 그런 말 하실 때예요? 나라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아시느냐고요?”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살롬…….”
“그냥 우리끼리의 시간을 즐기면 안 될까. 잠시만이라도.”
살로메디안이 날 지그시 바라봤다.
왜 이런 부탁을 할 때만 눈동자가 커지지? 입술은 왜 깨무는 거야?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울먹이는 눈망울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살롬은 정말 약았어요.”
내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건가?”
“아주 잠시라면… 기사들도 이해해주겠죠.”
“허락해줘서 고맙소. 부인.”
살로메디안이 격식을 갖춰 고개 숙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후 나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엔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담겨있었다.
“시아. 보고 싶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이 스몄다.
민망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두 팔로 살로메디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살로메디안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낸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내 심장도 비로소 뛰는 듯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살롬.”
“그대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아주 지독한 꿈을 꿨거든.”
“무슨 꿈이었는데요?”
“…….”
“꿈꾸는 동안에도 고통스러우셨나요?”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옮기면 내가 똑같이 아파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실 대신 궁색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키산드라의 드레스룸에 갇히는 꿈. 그 어처구니없는 천 쪼가리 사이에서 길을 잃는 꿈이었다.”
그보다 심한 악몽은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목을 움츠렸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굉장한 악몽이었겠네요.”
“냄새도 최악이었지. 키산드라는 남자들을 꾀러 갈 때마다 괴상한 향수를 뿌리곤 했거든. 그 냄새가 남자들을 발정시킨다나?”
“그건 너무 심하네요.”
“그대에게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버텼다. 내 아내, 내 여인, 나의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그의 품에 갇힌 나는 달콤한 안락함에 어깨를 떨었다.
내 가슴 위로 그가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체취를 빨아들였다.
그래야만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듯.
“오랫동안 혼자 둬서 미안하다, 시아.”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그대를 울게 해서 미안하다.”
“이젠 괜찮아요. 살롬이 있으니까요.”
“다시는 그대 곁을 떠나지 않겠다.”
살로메디안이 진지한 얼굴로 굳게 맹세했다.
그를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부디 그래 주세요.”
“날 용서해주는 건가?”
“온 세상 사람들이 용서 못 할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저만은 살롬을 용서할 거예요.”
“이제야 안심이군.”
“그리고… 용서는 제가 빌어야 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는 그동안 내놓지 못했던 말을 수줍게 꺼냈다.
“살롬을 믿지 못해서 미안해요. 속여서 미안해요. 약속을 어기고 마도구를 써서 정말 미안해요.”
찰나에 불과했지만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저를 용서해주시겠어요?”
살로메디안은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깔끄러운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그의 상처를 대변하는 침묵이었기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이번에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용서해주지.”
가슴 밑에 가라앉아 있었던 끈끈한 찌꺼기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기쁨에 겨워 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고마워요!”
“고마워하긴 일러. 벌을 줄 테니까.”
“벌… 이라고요?!”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였다.
살로메디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벌 받을 각오도 없이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나?”
“하지만 저도 살롬을 용서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살롬!”
“싫으면 용서받는 건 포기해.”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우물쭈물 그의 눈치를 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앞으로 정말 잘할게요.”
“시아. 귀여운 거로 때우고 슬쩍 넘어갈 생각은 마라.”
“제가 언제 그랬어요?”
부끄러운 마음에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다.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여자에게 의심받는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지.”
살로메디안 답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내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 대하소설을 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살로메디안의 토로가 길어질수록 내 얼굴은 푸르죽죽해졌다.
“알았어요! 벌 받으면 되잖아요!”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나?”
살로메디안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끈적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대체 무슨 벌을 주려고 그러는데요?”
“그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주일. 그걸 한 달로 늘리도록 하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벌써 잊은 건가? 아발론 도서관에 잠입할 때. 약속하지 않았나?”
“아! 살롬이 여장했을 때요?”
“…그래.”
수치스러움이 되살아났는지 살로메디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히기로 했지.”
살로메디안을 설득하기 위해 주워섬긴 말이었는데 그에겐 큰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그걸 한 달이나 하자고요?”
“정확히 한 달. 하루도 모자라면 안 된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텐데요?”
“싫으면 용서는 없던 거로 하지.”
협상 결렬이라는 뜻으로 살로메디안이 날 내려놓으려고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약속하는 거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벌이 되는 거예요?”
살로메디안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대답했다.
“직접 경험해보면 알게 될 거다.”
“네?”
“정 궁금하면 미리 좀 알려줄 수도 있고.”
그가 단단한 손끝으로 내 날개 뼈를 더듬었다.
“으읏.”
말초의 감각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살로메디안의 손이 미끄러졌다.
뜨거운 꿀이 등에서 허리로, 또 엉덩이 아래쪽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조금 거칠지만 너무도 그리웠던 입술이 닿았다.
혀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숨결이 얽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간절하게 내 입술을 탐했다. 나 역시 그랬다.
“사, 살롬……!”
우리의 몸이 하나로 포개졌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였던 것만 같았다.
부득이 헤어졌다가 겨우 다시 만난 것처럼. 그래서 다시는 떨어질 수 없다는 듯 맞붙었다.
“이제 그만.”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살로메디안의 어깨를 밀었다.
그가 날 해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덜컥 겁이 났다. 본능적으로 느낀 위기감이었다.
“꿈속에서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나?”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들끓었다.
“오직 그대를 안을 생각으로 버텼다.”
“!”
“그대의 모든 걸 내 것으로 만드는 상상을 했어.”
그가 뿜어내는 남성적인 체취가 한결 더 짙어졌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이미 살롬 거예요.”
부끄러움을 삼키고 겨우 수줍은 목소리를 흘렸다.
잠시 배부른 포식자 같은 표정을 짓던 살로메디안이 엄지로 내 입술을 훑었다.
“이 입술도?”
찌릿, 날카로운 촉감이 감각을 달궜다.
진정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더듬었다.
“이 목덜미도?”
“흐읏.”
입 안에서 신음이 부서졌다.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살로메디안이 더욱 격정적으로 내 여린 살갗을 빨아들였다.
“확인시켜 줘. 엉망으로 울게 되더라도.”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간지러움이 타올랐다.
간지러움이 낯선 희열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악……!”
숨을 쉴 수 없었다.
항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살로메디안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건 나도 그가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건 벌이 아니라 상이잖아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어떻게 변모할지 두려웠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