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 * *
살로메디안의 화살이 정확히 아이시아의 팔찌를 맞췄다.
루비가 산산조각 나며 팔찌가 끊어졌다.
마력을 되찾은 아이시아의 눈빛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시아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랬다.
“감히 내 남편 얼굴에 상처를 내?!”
아이시아의 분노는 참으로 특이했다.
‘네이선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가 있는데. 내 상처가 그리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살로메디안은 그런 아이시아가 고맙기도 하고, 느닷없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뿜어낸 푸른 불꽃은 귀여움과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푸른 불기둥이 활활 타올랐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이었다.
드래곤이 와도 이보다 거센 불길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역시 내 아내가 나보다 강하군.’
쓴웃음을 삼키며 살로메디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아이시아에게 모든 걸 맡길 수만은 없었다.
마신의 성물 탓에 아이시아의 마력은 급성장을 거듭했다.
육체가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마력은 고삐 풀린 폭주마처럼 날뛰게 된다.
육체의 주인은? 당연히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죽는다.
“시아, 내게 맡겨라!”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시아는 물러서기는커녕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살롬이야말로 빠지세요. 직접 네이선을 죽여선 안 돼요.”
“나 대신 네이선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살로메디안의 심장은 내가 지켜요.”
아이시아의 눈빛은 비장했다.
정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모양이었다.
이 작은 여인이 날 지켜주려는 구나.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괴물을 살리려고 황제에게 검을 겨누는구나.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싸움에서 물러나 있으란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못 견디게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전, 공작부인 아이시아 세드나이니까요.”
아이시아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살로메디안을 위해 싸울 수 있어서 기쁜 기색이었다.
“네이선을 죽이면 그대도 반역자가 돼.”
“저 자식의 아내가 되느니 반역자가 되겠어요.”
“시아…….”
“어차피 살롬도 반역자잖아요? 반역자나, 반역자의 아내나 뭐가 다르겠어요.”
살로메디안을 돌아보며 아이시아가 되물었다.
샛별보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표정이 다시 한번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아이시아를 향한 마음이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사랑스럽다거나 아름답다는 말로 감히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터질 듯 팽창한 사랑, 낯선 감동 가운데 아이시아가 꼿꼿이 서 있었다.
‘시아. 어디까지 날 끌고 갈 거지? 이미 난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이시아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걸.
“아이시아 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성혼 서약서에 사인까지 하셨으면서요!”
네이선이 사뭇 상처 입은 얼굴로 소리쳤다.
아이시아가 성혼 서약서를 흔들었다.
“이거 말인가요?”
저건 언제 챙긴 걸까?
도둑보다 손 빠른 아내를 보면서 살로메디안이 고소를 머금었다.
“법적 효력이 담긴 문서입니다! 저와 아이시아 님은 이미 부부라고요!”
“종이 한 장 따위로 부부가 되진 않아요. 그런 부부는 세상에 없답니다.”
아이시아가 곱게 눈매를 접으며 성혼 서약서를 불태웠다.
네이선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아아… 안 돼!”
푸른 불꽃에 사로잡힌 종이는 금방 재가 되었다.
아이시아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털었다.
몇 점 남은 검은 가루를 허공에 흩어졌다.
혹시 불씨라도 남았을까 봐 아이시아는 재를 발로 밟기까지 했다.
네이선을 짓밟고 싶은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아이시아 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모습에 네이선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아이시아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응수했다.
“저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요.”
“저는 황제입니다! 누구도 날 용서할 자격 없어요!”
“사기, 납치, 약물 투여, 강제 결혼, 인질극… 당신 같은 범죄자가 황제라니 크로티무스 제국의 백성으로서 몹시 부끄럽네요.”
네이선의 눈에 핏발이 섰다. 홍염의 검 역시 거대해졌다.
네이선의 화를 돋워서 좋을 건 없지만 아이시아가 하는 말은 듣기 좋았다.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시원하고 청량한 음료를 원샷한 기분이랄까.
자랑스러운 아내는 황제 앞에서도 거침없었다.
“어차피 반역자인데 공문서 파기쯤이야.”
“아이시아 님, 마지막 기회를 드리지요. 제게 오세요. 그럼 오늘 일은 없었던 거로 해드리겠습니다.”
“시끄러워요.”
“아쿠아로드와 세드나 공작령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요?”
“당신 손에 멸망할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에요.”
거추장스러웠는지 아이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북 찢었다.
비단이 찢어지며 치맛자락에 붙어있던 다이아몬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샹들리에 불빛을 반사한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 빛났다.
아이시아를 둘러싼 불꽃도 더욱 거대해졌다. 불길이 바람을 일으켰다. 아이시아의 흑발이 함께 흩날렸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아이시아 님이라고 봐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끝나고 나서 해요.”
아이시아가 네이선을 공격했다.
움직임은 서툴렀지만 그녀의 마력은 네이선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살로메디안은 황실기사들을 견제하면서 아이시아의 공격을 도왔다.
직접 네이선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마다 키산드라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네 뜻대로 마물 새를 죽여주마. 하지만 네이선은 죽이지 마. 그놈을 건드리면 네 심장이 부서질 거다.」
「심장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
「아이시아도 그러길 바랄 거라 생각하느냐, 멍청아?」
「…….」
「전대 중 황제가 미웠던 놈이 없었을까 봐? 황제를 죽이려 한 세드나 공작은 모조리 심장이 터졌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
「이 또라이놈아. 죽어지지도 않는다고! 세드나 공작은 죽지도 못해! 다음 대 쌍 속성이 태어날 때까지 죽음보다 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다!」
「!」
「10년이고, 100년이고 무의식 속에서 계약을 어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야!」
그것이 700년간 이어진 계약의 실체였다.
황당할 정도로 일방적이고 부조리한 계약.
마신의 계약에 비하면 아이시아와의 계약은 소꿉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쓰러지면 시아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겠지. 내 곁을 떠나지도 않을 거다. 그러니 참아야 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시아를 위해 살로메디안은 살의를 짓눌렀다.
하지만 아이시아의 신음은 살로메디안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으읏.”
아이시아가 주춤 물러섰다.
그녀의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번졌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시아!!”
아이시아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
마력이 절대 우위라고 하더라도 상대는 평생 검을 단련한 네이선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사용한 탓에 아이시아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아뇨. 제가 마무리해야 해요.”
“나보고 그대가 쓰러지는 걸 지켜보라는 거냐?”
“저를 위해 참아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를 공격하면 안 돼요!”
차마 아이시아를 바라볼 수 없었다.
내장이 고통스레 뒤틀렸다.
아내를 구하기는커녕 사지로 내몬 자신이 원망스럽고 수치스러웠다.
물론 살로메디안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황궁에 쳐들어온 건 아니었다.
아이시아를 데리고 안전히 탈출할 방법이 있었다.
그 시각, 흑룡기사단이 인근에서 대기 중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명령만 내리면 기사들은 목숨 걸고 황제와 맞서 싸울 것이다.
황실 기사들은 결코 흑룡기사단을 이길 수 없었다.
번드르르한 제복을 입고 검술 교본 시늉을 내는 샌님들이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을 어찌 이긴단 말인가.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말 한마디에 흑룡 전체가 반역자가 된다. 세드나 공작령은 불바다가 될 테고, 기사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겠지.’
출신과 계급이 다양한 것이 흑룡기사단의 특징이었다.
노동계급 이하의 제국인들이 제일 많았고, 그 뒤로 떠돌이 용병 출신이 많았다.
고국에서 억울하게 추방된 자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엔 도망 노예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지킨 덕분에 흑룡 단원들은 기사 작위를 받았다.
어엿한 귀족으로서 대우받게 된 거였다.
겨우 발붙일 곳을 마련한 수하들에게 반역자가 되라고 명할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의 고민을 아이시아도 이해하는 듯했다.
“저를 믿어주세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입가에 흐른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아이시아가 말했다.
“황제의 마력도 줄고 있어요. 멋있게 이기진 못하겠지만, 결국 제가 이길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이선이 검을 쳐들었다.
“착각이십니다! 기필코 아이시아 님을 황후로 만들고 말겠습니다!”
네이선의 눈동자가 분노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대관식 문턱에서 아이시아를 놓치게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움직임도 눈빛도 정상이 아니었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약도 없지.’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허리를 껴안고 읊조렸다.
“시아. 일단 후퇴하자.”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네이선을 죽이진 못해도 따돌리는 건 가능하다.”
살로메디안이 물 속성 마력을 이용해 희뿌연 연무를 만들어냈다.
구름 속에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파티장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가려졌다.
시야가 차단된 네이선이 불꽃을 쏘며 성을 냈다.
“당신답지 않게 약은 수를 쓰시는군요! 도망치지 마십시오!”
하지만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의 뒤를 추적하지 못했다.
무능한 황실 기사단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무사히 탈출할 줄만 알았는데, 안개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면 안개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때 파티장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살로메디안이 쏟아내는 마력 비처럼 강력하지는 않지만 안개를 없애기엔 충분한 빗줄기였다.
안개가 걷히고 실용적인 드레스 대신 은빛 갑옷을 입은 바넷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도 마력을 실체화할 줄 알았더냐?”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안경에 닦은 물방울을 닦으며 바넷사가 대답했다.
“빈센트가 저를 반만 닮았어도 기사가 되는 걸 허락했을 겁니다.”
“…대단하군.”
“반역자에겐 죽음뿐입니다. 순순히 항복하시지요.”
바넷사의 힘을 파악하지 못한 건 명백한 실수였다.
바넷사는 네이선과 어깨를 견줄 만한 강자였다.
전투에도 꽤 익숙해 보였다.
“아이시아 님을 내놓으세요!”
바넷사가 아이시아를 감싼 살로메디안의 팔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악물었다.
바넷사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사이 아이시아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네이선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바넷사의 등장을 예상치 못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바넷사! 누가 나서라고 했느냐?!”
“잠자코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빠져! 불복종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 명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폐하.”
바넷사가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네이선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세드나 공작은 널 죽일 수 있다! 계약 마법에 보호받는 건 나와 황후뿐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도 아이시아 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바넷사!”
살로메디안의 외침에도 바넷사는 멈추지 않았다.
매서운 공격이 아이시아에게 퍼부어졌다. 아이시아는 푸른 불꽃을 방패처럼 사용했다.
영리한 선택이었으나, 여전히 부족한 체력이 문제였다.
‘바넷사부터 처리해야겠군.’
살로메디안은 물 화살을 바넷사에게 조준했다.
충신들의 혈육이라 하더라도 아이시아를 노리는 인간을 살려둘 수 없었다.
“그만둬!”
네이선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바넷사가 수없이 쏟아지는 물 화살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 역시 살로메디안의 계획대로였다.
살로메디안이 검을 들고 바넷사의 퇴로를 막았다.
“크흡.”
허를 찔린 바넷사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바넷사의 마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살로메디안은 최강의 마신이었다.
그의 검이 바넷사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바넷사는 아이시아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줄 작정이었다.
“안 돼!”
네이선의 비명이 고막을 내리쳤다. 새빨간 불꽃이 번뜩였다.
바넷사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쓴 모양이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검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확하고도 빠른 솜씨로 상대의 심장을 찔렀다.
바넷사가 아닌, 그녀 앞을 가로막은 네이선의 심장을.
“크흡!”
네이선의 몸이 짚 인형처럼 무너졌다.
그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새하얗게 질린 바넷사가 두 손으로 네이선의 가슴을 짓눌렀다.
“폐하!”
“바, 바넷사… 무사하느냐…….”
“왜 절 보호하신 겁니까?! 제가 뭐라고요!”
“너는… 너는…….”
네이선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폐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바넷사는 응급 처치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소금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의 심장에서 고대 마법어로 적힌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황제를 시해한 세드나 공작에게 내리는 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컥!”
살로메디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곧이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손에서 검이 떨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것도, 아이시아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살롬!”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흩어졌다.
생살이 불태워진다고 하더라도, 사지를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그 누구라도 감당하지 못할 통증이었다.
차라리 모든 감각이 사라지길 바랐다.
죽음을 허락해 달라고 엎드려 애걸하고 싶었다.
“살롬, 안 돼요…! 이건 정말 안 돼요!”
살로메디안이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너무 소중해서 마음껏 만지지도 못했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손이 닿질 않았다.
대신 흐느낌이 들려왔다.
어떤 고통도 그 흐느낌보다 아프지는 않을 터였다.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 * *
살로메디안이 황제를 시해하고 황후 대관식을 중단시켰다는 소식이 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그 과정에서 황제가 중태에 빠졌다고 했다.
세드나 공작 역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들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공작 각하가 무서운 분이시긴 하지만, 폐하의 숙부 되시는데!”
“폐하께서 공작부인을 황후로 맞이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천륜을 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작자들이 헛소리를 만들어 낸 거야!”
“요즘 경비병들의 움직임이 이상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질 거란 소문도 있던데?”
“전쟁이 뭐가 무서워? 공작 각하랑 흑룡기사님들께서 우릴 지켜주실 텐데!”
일반 대중들의 의심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귀족들은 말을 아꼈다.
앞에서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지만, 황제가 욕먹어 마땅한 짓을 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폐하께서 너무 심하셨소. 공작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내를 훔치다니.”
“솔직히 말해서 이 나라에 세드나 공작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황족인 데다가 공신인데… 폐하께서 큰 실수하신 거예요.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황실의 추태가 알려지면 백성들이 동요할 게 뻔합니다. 최대한 숨겨야 해요.”
귀족들에게 백성들이 날뛰는 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었다.
황권이 흔들리면 권력 구조가 흔들린다. 제국 귀족들은 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쉬쉬하기 바빴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국제 정세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세드나 공작이 무너졌다는 건 제국의 방어막이 무너졌다는 뜻 아닙니까?”
“황실에서는 세드나 공작령 전체를 반역자로 몰려고 하던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국경은 누가 지키라고?”
“골치 아프군. 세드나 공작은 없어서도 안 될 존재니까.”
제국의 양대 축인 황실과 공작령의 충돌.
모두가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거였다.
본국으로 돌아간 축하 사절단은 대관식에서 벌어진 일을 낱낱이 보고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황제와 공작의 불화는 타국 권력자들에게 더없이 달콤한 소식이었다.
“네이선 크로티무스… 대륙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잘난 척하더니 꼴좋구나!”
“이 기회에 크로티무스 제국의 독식을 막아야 해.”
“대륙 최강이라는 세드나 공작이 실각했다면 크로티무스 제국도 이빨 빠진 호랑이지!”
“황후도 후계자도 없는 황제가 쓰러졌다? 이것이야말로 대륙의 맹주가 될 기회 아니겠는가?”
크로티무스 제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나라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발초프 후작과 결탁해 제국을 침략하려던 바실라칸 국왕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마신 바실리키의 은총이 쏟아지는구나! 내 시대가 도래한 것이야!”
그는 제국 인접국 정상들과 몰래 접촉했다.
강대국의 횡포를 성토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자고 부추기기 위해서였다.
“연합군이 힘을 모으면 크로티무스 제국을 삼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제국을 무너뜨리자고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제국은 주인 잃은 양 떼나 마찬가지입니다. 양 떼를 지키는 개도 쓰러졌고요. 이 기회를 놓치겠단 말씀입니까?”
“하, 하지만…….”
“천혜의 자원이 넘치는 비옥한 땅이 탐나지 않으십니까? 대륙의 주인이 될 기회가 700년 만에 처음 왔는데요!”
겁먹고 망설이는 왕들에게 바실라칸 국왕은 큰소리쳤다.
“저는 오래전부터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대귀족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고요.”
“오오오! 내부자가 있다면 일이 훨씬 쉽지요.”
“게다가 우리에겐 비장의 마도구가 있습니다.”
“마도구라니요? 살상용 마도구는 개발 금지 아닙니까?”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그저 저를 믿고 힘을 보태주시기만 하면 감사하겠습니다!”
바실라칸 국왕을 선두로 연합군이 꾸려졌다.
그들의 목적은 각기 달랐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크로티무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700년간 군림해온 제국이 멸망의 폭풍우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네이선이 쓰러진 틈을 타 나는 살로메디안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탈출했다.
델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조차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흑룡기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세드나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바넷사가 발 빠르게 나와 살로메디안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황제 시해자를 돕는 자는 똑같은 반역죄를 묻겠다고 덧붙였다.
황실 기사단과 제국군이 나와 살로메디안의 뒤를 쫓았다.
우리는 그들의 포위망을 피해 마신의 숲으로 도망쳤다.
마물들이 들끓는 그곳만이 우리를 받아줄 유일한 땅이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각하 상태가 위중하십니다. 공작저로 돌아가면 안 됩니까? 공작부인께서도 많이 쇠약해지셨고요.”
휴고가 조심스레 물었다.
2주가 넘도록 우리 일행은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했다.
마물 고기 덕분에 굶주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약초가 흔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었다.
살로메디안에게는 어떤 약초도 도움이 안 됐지만.
“공작저는 이미 포위됐어요. 황제가 쓰러졌다고 해도 바넷사가 건재하니까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델마가 몰래 다녀왔어요. 저와 살로메디안의 현상 수배 벽보가 사방에 붙었다더군요.”
평소라면 화를 펄펄 냈을 휴고가 말없이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시체처럼 창백한 살로메디안에게 닿아 있었다.
황궁에서 도망친 이래로 그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심장 부근에 어른거리는 마법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살로메디안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고통에 찬 살로메디안의 신음 소리가 심장을 옥죄었다.
이렇게 아파하는 건 처음이야.
살롬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이 있긴 있는 걸까?
살로메디안의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눈 밑엔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입가에 약초즙을 흘려 넣어봤지만 모두 토했다.
그는 끝없는 고통 속에서 기약 없이 헤매고 있었다.
계약 마법에 정통한 마도사, 신관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마신의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나는 어떡하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공포가 숨통을 조였다.
먹을 수도, 잘 수도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계속 버틸 수는 없습니다.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휴고의 말이 옳았다.
식량과 약초가 있다 해도 마신의 숲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마물 떼가 호시탐탐 우리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쉬지 않고 벌어졌다.
기사들은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경계해야 했다. 기사들의 사기와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흑룡기사들을 모아놓고 허리를 곧게 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여기서 우리 헤어집시다. 각자 살길을 찾아서 떠나세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 기사들이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몇몇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공작부인은 농담에 소질이 없으십니다. 괜한 말씀 마시고, 좀 쉬십시오.”
“맞습니다. 하나도 안 웃깁니다.”
“저희 보고 떠나라고요? 생각해 보니 엄청 웃기네요. 우하하하!”
힘없는 웃음이 잠시 일었다가, 잠잠해졌다.
떨떠름하고 눅눅한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낡고 더러워진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내가 선언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오늘부로 흑룡기사단의 해산을 명합니다.”
“공작부인,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와 살롬은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살롬의 작위와 영지는 박탈당했고요.”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각하를 모시지 않으면 누가 모신다는 말입니까!”
휴고가 침을 튀기며 항변했다.
내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에겐 흑룡기사단을 꾸릴 여력이 없습니다. 살롬과 저 둘뿐이라면 도피도 더 쉬울 겁니다.”
며칠 동안 준비했던 거짓말을 내뱉었다.
칼로 생살을 저며내듯 고통스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혼자 되는 두려움도, 갈 곳 없는 막막함도 이겨내야 했다.
살로메디안이 사랑하고, 내가 존경하는 흑룡 기사들을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공작부인은 농담에도 소질이 없으시지만, 거짓말은 정말 꽝이십니다!”
잠자코 있던 빈센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나섰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거추장스럽습니다. 제가 살려면 여러분이 떠나야 해요.”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빈센트를 바라봤다.
감정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울음을 삼키는 법을 익혀두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버림받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을 터였다.
‘살롬 힘을 줘요. 기사들이 우릴 떠날 수 있도록. 제가 기사들을 지킬 수 있도록.’
살로메디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에 힘을 줬다.
조금은 동요해 주길 바랐는데 빈센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날 향한 목소리가 한결 따스해졌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공작부인을 욕하면서 떠날 줄 아십니까?”
“!”
“공작부인은 저희를 너무 모르십니다. 흑룡기사들은 가란다고 가고, 오란다고 오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빈센트 경…….”
“흑룡에겐 돈도 명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흑룡은 흑룡의 전통으로 움직입니다. 흑룡의 전통이 무언지 아십니까?”
조개처럼 입을 다문 나를 대신해 흑룡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있는 마신의 방패!”
“살아있는 마신의 방패!”
“살아있는 마신의 방패!”
우렁찬 함성이 마신의 숲을 뒤흔들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목숨을 걸고 마지막 전투에 임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각하께서 살아있는 마신이라면 저희는 마신의 방패입니다. 방패가 주군을 어찌 떠난단 말씀입니까?”
빈센트가 고요한 얼굴로 물었다.
휴고가 부복하며 간절히 외쳤다.
“빈센트의 말이 맞습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각하와 공작부인을 따르겠습니다!”
질세라 다른 흑룡 기사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군을 배신하는 비겁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기사로 목숨을 건지느니 반역자로 당당히 죽겠습니다.”
“각하와 흑룡은 한 몸입니다!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공작부인!”
“각하가 없으면 흑룡도 없습니다! 각하를 떠날 수 없습니다!”
기사들의 진심이 가슴을 거칠게 때렸다.
눈매가 붉어지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울고 싶지 않아서 얼른 고개를 위로 들었다.
심호흡을 해봤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따스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기사들이 넉넉히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살롬과 흑룡을 위해서도 힘내야 해. 방법이 있을 거야.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그때 델마가 다가왔다.
“아이시아 님. 아쿠아로드로 가시지요.”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 * *
아쿠아로드로 돌아간다고?
살로메디안과 흑룡기사들도 함께?
멍하니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델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국왕께서 아이시아 님과 세드나 공은 물론 기사들 전부를 받아주실 겁니다. 아니, 누구보다 기뻐하실 겁니다.”
“…….”
“반역자로 쫓기면서 제국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숨이 턱 막혔다. 뭐라 대답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델마는 내 궁색한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 남으시면 황제가 아이시아 님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세드나 공도요.”
“…….”
“아이시아 님께서 지키고 싶어했던 공작저는 빼앗겼습니다. 아이시아 님의 소중한 분들을 모두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델마가 딱 잘라 말했다.
“아쿠아로드 국왕으로 즉위하셔야지요.”
“델마!”
“가짜 왕세녀는 사라졌습니다. 국왕 전하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요. 이대로라면 아쿠아로드도 곧 내전에 휩싸입니다.”
델마의 말대로 최근 아쿠아로드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국왕이 권력을 되찾았지만, 그에겐 나라를 이끌 만한 체력이 없었다.
국왕의 무능을 탓하는 백성들의 성토도 끊이지 않았다.
테레사의 탈옥 때문에 책임 공방이 벌어졌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범죄가 횡행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귀족들도 늘었다.
‘이러려고 테레사를 끌어내린 것이 아닌데. 내가 테레사를 죽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죄책감은 나날이 깊어졌다. 델마는 그 틈을 노리고 있었다.
“아이시아 님이 국왕이 되시면 아쿠아로드인들은 평화를 되찾을 겁니다. 흑룡 기사들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주어질 테고요.”
아쿠아로드의 마도구 기술과 흑룡 기사들의 무력이 더해진다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최정예 치료 신관들이 세드나 공을 돌볼 겁니다. 신학자들이 마신의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고요.”
델마가 쐐기를 박았다.
델마의 말만 들으면 고민이 무의미했다. 당장 아쿠아로드로 떠나는 것만이 해결법 같았으니까.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작저는 빼앗겼지만 영민들은 여전히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룡이 사라지면 영민은 누가 지켜주지?
공작저 사용인들과 바바라는? 의료 교육원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나와 살로메디안이 반역자로 몰리면서 영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을 터였다.
마신의 숲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야 겨우 살 만해졌는데, 내가 떠나버리면…….
“세드나 영민들은 제국인입니다. 제국인은 잘난 황제가 알아서 하겠지요.”
델마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랑 살롬 때문에 차별받고 박해받을 거야.”
“무능력한 권력자 때문에 박해를 받는 건 아쿠아로드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이시아 님께서 모든 백성을 구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세드나 공작부인도 아니시고요. 세드나 영민들을 책임지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델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더욱 아렸다.
‘델마 말이 맞아. 내가 신도 아니고,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몇몇 얼굴들이 눈앞을 스쳤다.
아쿠아로드에서 도망쳐온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세드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하는 일마다 박수를 보내주었다. 감사 인사도 수없이 들었다.
「공작부인 덕분에 살맛 납니다!」
「공작부인이 오시고 나서 너무 좋아졌어요! 공작령의 구세주세요!」
수줍게 미소 짓던 사람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살로메디안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내게 무슨 조언을 해줬을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그리웠다.
살로메디안의 중저음 대신 카랑카랑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뇨! 공작령의 구세주인 아이시아에게 한계란 없어요! 아쿠아로드 백성들도 세드나 영민들도 모두 구할 수 있다고요!”
연두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바바라가 나타났다.
그 뒤로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진 디에고가 보였다.
“바바라! 디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전쟁 통에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나도 이보다 기쁘진 않을 것 같았다.
“시아!”
바바라가 날 향해 깡총깡총 뛰어왔다. 지친 표정의 디에고가 바바라 뒤를 따랐다.
“어떻게 탈출했어요? 바넷사의 감시가 심했을 텐데요?”
내 물음에 바바라가 한쪽 눈을 찡끗했다.
“초록 마녀도 절 막을 수 없죠! 우리에겐 디에고가 있잖아요?”
“칭찬은 필요 없으니까 제발 저 좀 풀어주십시오. 바바라님……!”
디에고가 울먹였다.
바바라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숲에서 노숙한 기사들보다 얼굴이 상한 디에고였다.
바바라가 들뜬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디에고는 초 천재예요. 그냥 천재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천재요! 픽픽 쓰러지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또 기절했구나. 기억력은 더 향상했고.
그것이 기억 재생 마도구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디에고. 도대체 또 뭘 만든 건가요?”
“별거 아닙니다. 공작부인께서 주문하셨던 마도구를 완성했을 뿐이거든요.”
“대량 살상 마도구 말인가요?”
디에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상용 마도구가 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바라는 뻔뻔했다.
“효력이 끝내주던데요? 대포같이 생긴 마도구에 마력을 주입하면 마력이 10배쯤 뻥튀기돼요!”
“증폭된 마력을 탄환 형태로 연속 발사하는 기관포 마도구입니다. 폭탄형 마도구도 있고요.”
“마력을, 뭐 어쨌다고요?”
디에고의 설명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었다.
바바라가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돼요. 저도 모르니까요!”
“바비…….”
“하지만 진짜 굉장해요! 저 혼자서 최정예 기사들을 쓸어버렸거든요!”
“바바라 혼자서 마도구에 마력을 주입했다고요? 디에고는요?”
“디에고는 마력이 전혀 없다던데요?”
바바라가 해맑게 물었다.
델마와 내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디에고는 왕실 호위기사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가문을 이을 만큼 강한 마력은 없지만, 보통 귀족 이상의 마력은 가지고 있었다.
‘싸움에 끼기 싫어서 숨겼구나…….’
멋쩍게 시선을 돌리는 디에고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 정도 거짓말은 애교로 봐줘야 할 것 같았다.
“아이시아 님께서 어떻게 세드나 영민과 아쿠아로드인 모두를 구한다는 거죠?”
델마가 매서운 눈으로 바바라를 바라봤다.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마도구는 도구일 뿐입니다. 아이시아 님은 황족도, 제국인도 아니시고요.”
“그것도 모르고 말했을까 봐요?”
“…….”
“난 망할 세드나 공작을 7년이나 모신 베테랑 집사예요! 모든 가능성을 전부 살폈다고요!”
“그 대단한 방법이나 말씀해 보십시오.”
델마가 재차 물었다.
허리춤에 팔을 올린 바바라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아이시아 님께서 나라를 세우면 되죠! 아쿠아로드와 세드나 공작령을 통일해서!”
* * *
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마신의 숲을 짓눌렀다. 숲의 산새들도 입을 다물었다.
통일?! 건국?! 바바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기사들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만 데룩거렸다.
허튼소리는 집어치우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귀신에 홀린 듯 바바바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우리 각하는 작위랑 영지를 모두 빼앗겼잖아요? 계약 마법도 깨졌으니까 더 자유롭게 싸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고요?”
델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바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에겐 대륙 최강의 흑룡기사단이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제대로 붙으면 우리가 최고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국을 점령하자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황제가 세드나 영지를 내놓을 때까지만 짓밟아 주자고요! 호호호!”
손으로 입을 가린 바바라가 호쾌하게 웃었다.
시장에 가서 양배추 한 통 사오자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내가 지끈거리다 못해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바비. 기사단만으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요.”
“돈이 문제라는 건가요?”
“당연하죠! 전투식량, 군마, 병장기도 준비해야 하잖아요? 마도구를 만드는 데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요!”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한 거였는데 오히려 바바라의 웃음이 짙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금이라면 내다 버려도 될 정도로 많으니까요.”
“황금이 많다고요?”
“너무 많아서 썩어나갈 지경이랍니다!”
바바라가 흥겹게 어깨를 들썩였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영지는 허물어진 저택을 수리하지도 못할 만큼 가난했다.
약초를 발견한 덕분에 살림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부유하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바넷사의 감시 때문에 약초를 팔 수조차 없었다.
“바넷사 누님께 고문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어디 편찮으세요?”
누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빈센트가 바바라의 이마를 짚었다.
“내가 미쳤을까 봐 걱정하는 거냐?”
“이미 미치신 것 같은데요.”
빈센트가 순순히 답했다.
바바라가 작은 손으로 빈센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난 멀쩡해! 세드나 공작의 보물 창고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바바라의 말에 내가 화들짝 놀랐다.
“바비. 보물 창고를 찾았어요?!”
“시아가 그랬잖아요. 키산드라 님의 드레스룸을 잘 찾아보라고요.”
“!”
“드레스룸 안에 지하 보물 창고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던데요? 디에고가 도와줘서 금방 찾았어요.”
키산드라에게 나는 돈 좀 달라고 부탁했다.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가 보물 창고를 숨겼다고 했지만, 키산드라의 말은 달랐다.
『숨기긴 누가 숨기냐? 지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지!』
키산드라는 어린 살로메디안에게 걸핏하면 옷을 골라 달라고 했다.
그것도 남자들을 유혹할 때 입을 만한 짧고 야한 드레스를.
살로메디안은 그 선정적인 천 조각을 혐오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모조리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살로메디안이 죽기보다 가기 싫어했던 곳.
보물 창고의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히 증오했던 곳.
키산드라의 드레스룸에 보물 창고가 숨겨져 있었다.
“바넷사의 감시를 피하는 게 성가셨지만, 제가 누구겠어요?”
“문이 잠겨있지 않던가요?”
“자물쇠가 삭아 버렸더라고요. 보안 마도구도 없었고요. 세드나 공작들은 황금을 돌멩이 취급한 것 같아요.”
“대신 찾아줘서 고마워요, 바비.”
“천만의 말씀을요. 시아 덕분에 우린 대륙 최고의 부자가 됐어요! 황실 재산도 그 정도는 안 될 거예요!”
“전대 공작들은 황금을 쓸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요.”
세드나 공작들이 전쟁터를 떠도는 동안 황금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700년이 흘렀다.
흔한 은접시가 최고가 골동품이 되고도 남을 세월이었다.
“하늘 아래 최대의 유물 창고예요! 보검이나 명화 수집처럼 사랑스러운 취미를 가진 공작님들도 계셨나 보더라고요!”
바바라가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봤던 바바라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오랫동안 돈에 쪼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물 창고는 세드나 공작과 그 부인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살롬도 전대들도 이해해주겠지.
‘고마워요, 키산드라 님.’
델마도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델마는 내가 아쿠아로드의 국왕이 되길 바랐다.
그 나라가 아쿠아로드보다 크다면 싫을 이유가 없을 터였다.
“우리에겐 세드나 공작의 보물이 있어요. 상대가 누구라도 이길 힘도 있어요. 나라 하나 세우는 게 어렵나요?”
바바라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물음이었지만 기사들의 심장을 달구기에 충분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휴고였다.
“어려울 게 뭐 있나? 우리에겐 누구보다 현명한 공작부인이 계신데!”
그가 기사들을 향해 바윗덩이만 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언제까지 황제 똥구멍만 바라볼 수는 없지! 우리 고향은 제국이 아니라 세드나 공작령 아닌가?!”
상기된 얼굴의 기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땅을 찾아옵시다!”
“피똥 싸면서 마물 토벌해줬더니, 반역자 취급을 해?! 황제와 제국 귀족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요!”
“새 나라를 세웁시다! 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요!”
흑룡 기사들이 뜨거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이 무엇보다 커다란 용기가 돼 주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렬한 열정이 핏줄을 휘감았다.
아직 살로메디안은 깨어나지 못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 나보다 강한 사람. 나보다 창의적인 사람. 나보다 충성스러운 사람. 나보다 신중한 사람.
내가 최고가 아니어도 좋았다. 최고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으니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나라가 아니라 대륙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힘을 합쳐서 새 나라를 세웁시다!”
내가 선언했다. 하늘을 찢고 땅을 흔들 법한 함성이 울렸다.
“우와아아아아아!”
흑룡기사단을 해산하기로 한 날, 우리는 새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살로메디안에게 얼른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차갑게 굳은 살로메디안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는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