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50)

41

* * *

황도로 가는 내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도, 네이선이 날 마중하러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시아 님! 오래 기다렸습니다! 와주셔서 기쁩니다!”

“…….”

“아이시아 님 덕분에 파티가 빛날 겁니다. 얼른 아이시아 님을 소개하고 싶군요!”

네이선은 들떠 있었다.

황제 앞에서도 나는 얼음 같은 무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입도 떼지 않았다.

네이선은 내 태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황궁을 구경시켜 드리죠. 저를 따라오십시오!”

델마가 날 따르려 했지만 황실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황족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아이시아 님께 파티장을 처음 공개하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

“파티장에 관심 없으시면 황실이 자랑하는 유리 분수대를 보여드릴까요?”

“…….”

“아이시아 님을 위해 직접 우린 차입니다. 제 정성을 봐서라도 한 모금 들어주시지요?”

그렇게 네이선은 나를 이곳저곳 끌고 다녔다.

나는 어떤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시위는 아니었다. 그저 억지웃음을 짓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

다소 지쳤는지 네이선이 날 놓아줬다.

“일단 방에서 쉬시지요. 아이시아 님을 위해 가장 좋은 방을 준비하라 명했습니다.”

“델마는요?”

“절 만나서 처음 하시는 말이 호위기사에 대한 안부입니까?”

“델마는요?”

망가진 인형처럼 다시 물었다. 네이선이 침울하게 답했다.

“곧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눈부실 만큼 사치스러운 방으로 안내되었다.

값비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내 시중을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황족이라고 해도 나는 약소국 출신 공작부인이었다.

시녀만으로 충분한데 귀부인들을 붙여준 이유가 뭘까?

마음에 걸린 부분은 또 있었다.

황궁에 도착한 후, 나를 공작부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였다.

날 둘러싼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세드나 공작부인이란 사람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아이시아 님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문보다 훨씬 아름다우신 분이시네요!”

“진주처럼 뽀얀 피부며,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릿결이며… 너무 부럽습니다.”

“최상급 루비를 닮은 눈을 좀 보세요! 가히 대륙의 보물이라 불릴 만하군요!”

나는 그녀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내가 귀부인들을 무시하는 건 명백한 결례였다.

부아가 치밀 법도 한데 귀부인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내키는 대로 행동할 자격이 내게 있다는 듯이.

“폐하께서 아이시아 님의 드레스를 준비하셨어요!”

“무려 스무 벌이나요! 한 벌 만드는 데 성 하나 값은 들었을 것 같지 않나요?”

“화이트 드레스가 제일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아이시아 님 생각은 어떠세요?”

귀부인 중 하나가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힌 화이트 드레스를 내 몸에 대주었다.

단아한 가슴선과 잘록한 허리, 풍성하면서도 우아한 치맛단이 돋보이는 드레스였다.

요정들이 별빛을 모아 만든 드레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며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네이선이 왜 내 의상을 준비한 걸까?

눈꽃처럼 하얀 드레스가 불안을 부채질했다.

“황제 대관식도 내일 파티보다 화려하지는 못할 거래요. 전부 아이시아 님 때문이겠죠?”

갈색 머리 귀부인이 부럽다는 투로 드레스를 흘끔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움찔 놀란 귀부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의미긴요. 그만큼 폐하께서 아이시아 님을 아끼신다는 거죠.”

“제국에서는 외간 남자가 여인에게 드레스를 함부로 지어줍니까?”

“네?”

“제 모국에서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라서요.”

내 표정을 읽은 귀부인들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제국에서도 비슷해요. 하지만 폐하와 아이시아 님은 특별한 관계이시잖아요?”

“맞아요! 외간 남자라 할 수 없지요.”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폐하와 제가 무슨 관계죠?”

“설마 못 들으셨어요?”

“뭐를요?”

“내일 파티에서 아이시아 님의 황후 대관식이 거행된다는 것을요!”

* * *

황제를 데려오지 않으면 황궁을 태워버리겠다고 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네이선이 내 방을 찾아왔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아이시아 님.”

내 말을 믿지 않는 시종들 때문에 불태운 벽을 둘러보면서 그가 싱긋 웃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가 내 분노에 불을 붙였다.

“이러려고 날 오라 한 겁니까?”

살기등등한 얼굴로 네이선을 노려봤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모시지 못할 것 같아서요.”

“황후 대관식이라니, 제정신이에요?”

“오래 고민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전 결혼한 몸이에요! 내 남편은 세드나 공작이고요. 당신 숙부를 잊어버렸나요?”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아이시아 님을 속인 건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아무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야 할 황제가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를 향해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감히 용서를 입에 올리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요.”

“…….”

“부끄러운 줄 아는 분이었다면 숙부의 아내를 훔치지 않았겠죠. 숙부와 그 영민들을 협박하면서요!”

“흐음.”

네이선이 곤란하다는 투로 턱을 쓰다듬었다.

“저도 세드나 령을 꽤 배려한 겁니다만.”

이 빨간 머리 개자식이 지금 뭐라는 걸까.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의 작위를 빼앗고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으면서 배려라니?

도무지 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저에겐 숙부의 아내를 훔쳤다는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아이시아 님과 숙부님을 위해 기꺼이 비난을 감수했다는 것은 알아주십시오.”

“그 방법이 뭔데요?”

“아이시아 님을 남편 없는 여자로 만들면 되었지요.”

“!”

“과부와 결혼하는 건 불법이 아니니까요.”

네이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비었다.

남편 없는 여자? 나 때문에 살로메디안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거야?!

마신의 계약자인 데다, 자기 혈족인데?

참기 어려운 분노가 핏줄을 타고 심장까지 내달렸다.

눈앞의 이 가증스러운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아니, 죽여야 했다.

그가 황제가 아니라, 신이라 하더라도.

푸른 불꽃으로 네이선과 황궁을 태워버리자.

반역자가 돼도 상관없어. 살롬과 제국을 떠나면 되니까!’

양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드래곤을 방불케 하는 불기둥을 만들어낼 작정이었다.

왤까? 방금까지만 해도 활활 타오르던 마력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은 상아 조각처럼 매끈하기만 했다. 불꽃은커녕 끓어 넘치던 마력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이 방에 마력 차단 마도구를 작동시켰습니다.”

네이선이 조심스레 충고했다.

“차에 약도 조금 탔고요.”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네이선이 미간을 좁혔다.

수치스러운 척하는 그에게 분노를 토했다.

“약까지 먹였다고요? 당신이 그러고도 제국의 황제입니까?”

뒷맛이 쓰고 떫던 차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저는 지금 황제가 아닙니다.”

네이선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저 아이시아 님께 눈먼 사내일 뿐입니다.”

쓸쓸한 목소리로 네이선이 읊조렸다.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집어치워! 하나도 안 멋지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데 눈앞이 핑 돌았다.

둔중한 졸음이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으읏……!”

그런 날 보며 네이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겨우 약효가 도는 모양이군요. 생각보다 늦어서 걱정했습니다.”

“!”

“아이시아 님은 약발이 잘 안 받는 체질이시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어쩌자고 네이선이 주는 차를 받아마셨을까.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졌으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방심했던 날 원망했다.

후회보다 대처가 우선이었다.

인륜도 모르는 파렴치한이 날 잠재우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피가 배어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기 힘들었다.

살로메디안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어쩌지? 델, 델마는……?

의식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네이선이 비틀거리는 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침대로 옮겨드리지요.”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배 속에서 매스꺼움이 치밀었다.

살로메디안이 아닌 남자에게 안겼다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의 옷자락에 토악질을 해주고 싶었는데 이미 졸음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의식이 점점 흩어졌다. 흐릿한 시야로 달싹이는 네이선의 입술이 보였다.

“곤히 주무십시오. 황후 대관식까지.”

* * *

대륙 각국의 축하 사절단이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은 귀빈들과 그들의 수행원으로 가득 찼다.

건국 700주년을 기념하는 파티가 아니라 황후의 대관식이라는 소식이 날개를 달고 퍼져나갔다.

“크로티무스 황제가 사랑에 눈멀었군! 아무리 여자가 좋대도 숙부의 아내를 황후로 앉힌다고?”

“그렇게 대단한 여자랍니까?”

“여신도 울고 갈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고 하더군. 마력은 최고위 기사보다 강력하고!”

“그 정도라면 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겠어. 엄청난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을 테니까!”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답니다. 황제가 세드나 공작의 혼인 서약서를 없애 버렸다고 하더군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던 발초프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에 망조가 들었어. 고작 계집 때문에 황제가 이성을 잃다니. 쯧쯧.”

발초프 후작을 수행하던 생니콜 자작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마신께서 노하실 만한 파렴치한 짓이지요.”

“마신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바실라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우리에겐 이득 아닙니까?”

“물론이지! 짐승 같은 세드나 공작이 아내를 뺏기고 가만히 있을 것 같나?”

“큭큭. 곧 황실과 세드나 공작령의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전 제국이 발칵 뒤집어지겠지요.”

“거사를 일으키기에 딱 좋은 상황이지.”

발초프 후작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실룩였다.

생니콜 자작이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흑룡기사단의 전력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대단하다지만 일개 기사단. 황실과 전면전까지 벌이면… 진짜 전쟁에서는 쪽도 못 쓰게 되어버릴 겁니다.”

“전쟁 보상금도 바실라칸 국왕 폐하께서 대주시기로 했지. 어차피 다 돌려받게 되어 있지만.”

“마신께서 후작님과 바실라칸 국왕 폐하를 굽어살피시는 겁니다. 두 분이 힘을 합쳐 대제국을 건설하시길 바라는 거라고요!”

“목소리를 낮춰. 여자에 미쳤다고 해도 황제가 있는 곳이다.”

“황제가 뭐가 무섭습니까? 테레사에게 대량 살상 마도구까지 받으면 우린 최강입니다.”

생각만 해도 좋아 죽겠다는 듯 생니콜 자작이 어깨를 떨었다.

가난한 시골 영지를 다스리며 마신의 교리를 연구한 보람이 이제 눈앞에 와 있었다.

마신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대제국 건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은 개국 공신이 되는 거였고!

마신은 크로티무스 제국을 버렸다.

마신과 계약했음에도 크로티무스 제국은 마신을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멍청한 짓까지 저질렀다.

그러니 온천이 사라지고, 마신의 계약자를 잃은 것이다.

새 제국을 건설해 마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자신이 사명이었다.

“외팔이 계집은 왜 꾸물거리는 거지? 바실라칸 국왕께서 마도구를 기다리고 계신데.”

발초프 후작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물었다.

“족쳐보겠습니다. 창녀 출신 어미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도망치진 못하겠죠.”

“지독한 계집이다. 끝까지 경계를 놓치지 말도록.”

“새겨듣겠습니다. 공왕 전하.”

생니콜 자작이 두 손을 비볐다.

대제국이 건설되면 일등 공신인 발초프 후작은 공국을 다스리는 공왕이 될 터였다.

벌게진 얼굴로 발초프 후작이 낄낄거렸다.

“공왕이라. 참 듣기 좋은 말이로군. 그대도 생니콜 공작이 되려면 얼른 마도구를 가져오게.”

공작이 될 날을 꿈꾸며 생니콜 자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곧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테레사는 제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요.”

* * *

아직 약이 덜 깬 걸까. 아니면 마도구 때문일까.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없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너무 밝아서 두통을 일으켰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도,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가슴 위엔 납덩이를 백 개쯤 올려놓은 듯했다.

안간힘을 써서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파티장 가장 높은 곳에 네이선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황후의 자리.

오늘은 나의 네 번째 결혼식이었다.

웅장한 음악이 연주되고, 새하얀 예복을 입은 대신관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황후의 왕관이 들려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네이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공석이었던 크로티무스 제국 황후 대관식을 거행하겠소. 영광된 자리에 함께해주어 기쁘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황후마마!”

“크로티무스 제국이여 영원하라!”

축복의 외침이 고막을 때리고 심장을 들쑤셨다.

파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내가 세드나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어째서 유부녀를, 그것도 숙부의 아내를 빼앗은 파렴치한을 욕하지 않는 걸까.

파렴치한이 황제라서?

아니면 살로메디안을 잊은 걸까?

어떻게 한 사람도 살로메디안 편에 서지 않을 수가 있지?

매년 제국 전역을 돌며 마물을 토벌해줬는데.

억울함이 끓어올랐다. 서러움과 미안함도 이어졌다.

약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워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안간힘을 쓴 덕분에 오른쪽 손을 꿈틀거리는 데 성공했다.

내 손목에는 호화로운 루비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처럼 생겼지만 마력을 억제하는 마도구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이건 아쿠아로드 왕족만 쓸 수 있는 마도구인데…! 어떻게 네이선이 가지고 있는 거지?’

순간 눈앞에 테레사의 오만한 미소가 스쳤다.

제 입맛에 따라 날 짓밟았던 테레사.

테레사의 마수가 황제에게까지 닿은 게 분명했다.

팔이 잘렸다고 하지만 테레사는 벌을 받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내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테레사. 언제까지 날 괴롭힐 작정이야? 널 동정하고 금화를 준 내가 그토록 저주스러웠니? 아님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비명이 새어나갈 것 같아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팔찌형 마도구를 떼어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천장에서 꽃가루와 금가루가 흩뿌려졌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축하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파티장을 맴돌았다.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네이선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아쿠아로드 왕녀 아이시아를 크로티무스 제국의 국모이자, 황제의 정비로 맞이하겠소!”

당당한 자세로 네이선이 선언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더해졌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행복하십시오!”

차라리 귀가 멀었으면 이 소리를 듣지 않았을 텐데.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괴물들로 가득한 외딴섬에 떠내려온 기분이었다.

향수를 뿌리고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한 괴물들이 날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던 때의 기억이 왈칵 올라왔다.

내 몸뚱이를 아래위로 훑던 첫 번째 남편의 눈빛.

나 때문에 수십만 골드를 썼다며, 그 빚을 몸으로 갚으라던 두 번째 남편의 목소리.

첫날밤 직전에 발견된 싸늘히 굳은 시체들.

비상식적으로 향상된 기억이 날 과거의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황후마마.”

시녀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날 일으켰다.

나는 대신관 앞에 무릎 꿇려졌다.

대신관이 황후의 관을 네이선에게 건네줬다. 네이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이제부터 제 아내가 되는 겁니다, 아이시아 님.”

오직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그 반반한 낯짝에 침을 뱉고 싶었다.

이대로 가축처럼 팔려갈 수 없었다.

나는 세드나 공작부인이니까.

“죽는다고 해도 당신 아내는 되지 않아요. 내 남편은 살로메디안 세드나, 한 사람뿐이에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네이선이 산뜻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이시아 님은 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후가 되실 겁니다.”

“살롬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세드나 공작은 절 해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저는 계약의 보호를 받고 있거든요.”

“……!”

“황제에게 살의를 갖는 순간 세드나 공작의 심장이 으스러집니다. 그걸 바라시지 않으시겠죠?”

“살롬이 못 하면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것도 불가능할 겁니다.”

네이선이 토라진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예언자라도 만난 걸까?

네이선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시아 님께서 자해하시거나 도망치시면, 아쿠아로드와 세드나 공작령을 멸망시킬 겁니다.”

“!”

“아이시아 님 어깨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겁니다.”

네이선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이 남자는 완전히 미쳤어!

한때는 네이선을 여느 권력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최강국을 이끌고 있으니까. 폐왕녀에 불과한 내게 그리도 깍듯했으니까.

하지만 그 역시 뻔하고 흔한 황족에 지나지 않았다.

네이선은 제 이익을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는 인간이었다.

백성을 인간이 아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 봤다.

그저 운이 좋아 황실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신은 뭘 해도 된다는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내 눈빛에 경멸이 가득 담겼다.

멋쩍은 표정으로 네이선이 변명했다.

“언젠가 아이시아 님도 제 절박함을 이해해주실 겁니다. 비겁한 모습만 보여서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하지 마세요.”

“진심입니다.”

“역겨운 진심이로군요. 어떻게 황제가 백성을 인질로 삼을 수 있죠?”

“제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아이시아 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당신은 미쳤어요.”

“네. 아이시아 님께 단단히 미쳤습니다.”

네이선의 뻔뻔함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을 위해 역경을 헤쳐 나가는 남자주인공에 빙의 중이었다.

나는 환상에 빠진 미치광이에게 잡혀 온 거였다.

“협박이 아니라 아이시아 님의 따스함에 구걸하는 겁니다. 아이시아 님은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시지 않습니까?”

네이선은 내가 살로메디안과 아쿠아로드에 잠입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다른 이들의 희생을 못 견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도망치면 정말 사람들을 죽일 거야…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역겨움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왕궁에서 도망쳤다가 테레사 앞에 다시 끌려갔을 때보다 더 처참했다.

네이선이 눈매를 접으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 성혼 서약서가 들려있었다.

“성혼 서약서에 사인하시겠습니까?”

그가 내게 만년필을 내밀었다.

벌레 보듯 그를 노려봤다. 네이선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을 보시지요. 아이시아 님의 결정을 돕기 위해 아쿠아로드 출신 치료 신관들을 준비했답니다.”

황실 기사단 옆으로 파리하게 질린 치료 신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손은 결박되어 있었다. 기사들이 신관들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사인을 거부하면 치료 신관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저항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터였다.

나와 살롬의 성혼 서약서는 태웠다고 했지…….

엄지를 물어뜯어 피 묻은 지장을 찍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네이선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쓰고 있었다.

성혼 서약서를 받아 든 네이선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뻐했다.

“정말 꿈만 같군요! 평생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아이시아 님!”

이 남자는 행복을 뭐라 생각하는 걸까.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보석 티아라를 쓰면 행복할 거라고 믿는 건가?

나는 정말 이대로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남편 조카의 아내가 되어 황금 새장에 갇혀야 한다고?

온몸에 털이 쭈뼛 서면서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무력함이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보이는 것은 끝 모를 어둠뿐이었다.

“황후가 된 아이시아 님과 첫날밤이라니. 너무 기대되는군요.”

네이선이 수줍어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뒤로 악마가 검은 혀를 날름거리는 듯했다.

첫날밤이란 단어가 숨통을 틀어막았다. 날 둘러싼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수백, 수천 마리의 거머리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럼 대관식을 마무리해 볼까요?”

네이선이 황후의 왕관을 가지고 다가왔다.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리 위에 황후의 관이 올려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보통 화살이 아니라 물로 만든 화살이었다.

쐐액!

물 화살이 왕관을 명중했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왕관이 떨어졌다.

무덤 속 같은 까마득한 적막이 찾아왔다.

네이선은 물론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귀빈들도 멍하니 바닥을 나뒹구는 왕관을 바라봤다.

잠시 후 파티장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꺄아악!”

“화살이에요! 황궁에 침입자가 나타났어요!”

“웬 놈이냐!”

“전투태세를 취하라!”

황실 기사들이 검을 높이 빼들었다. 도망치려는 사람과 침입자를 잡으려는 기사들이 뒤엉켰다.

병장기 부딪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얽혔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살로메디안이 들어왔다.

그의 두 눈은 오직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미소가 떠나지 않던 네이선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반면에 살로메디안은 도자기로 빚은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심장을 통해 그가 살의에 들끓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폭발하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을 갑옷처럼 두르고 뚜벅뚜벅 다가왔을 뿐이었다.

네이선은 이번에도 살로메디안과 정반대였다.

“감히 대관식을 방해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네이선이 외쳤다.

살로메디안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닐까?”

“……!”

“내 아내를 훔쳐다 도둑 결혼식을 올리는 놈을 내버려 두란 말은 아니겠지?”

“숙부님!”

“더러운 입으로 날 숙부라 부르지 마라. 내겐 조카가 없다.”

“기다리던 바입니다. 여봐라! 저 반역자를 체포하라!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네이선이 기사들에게 명했다.

기사들이 검을 높이 쳐들고 살로메디안에게 달려들었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반역자를 잡아라!”

곱게 자란 도련님들치고는 기백이 훌륭했다.

하지만 마신이라 불리는 남자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기사들의 공격을 피했다.

무료하다는 얼굴로 수백 개의 물 화살을 만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물 화살이 기사들의 팔다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으아아악!”

“내 팔! 끄악! 내 다리!”

파티장에 꽃잎 대신 피가 흩뿌려졌다. 노랫소리가 사라지고 고통에 찬 신음이 넘실거렸다.

얼핏 처참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기사들을 몰살시켜도 화가 풀리지 않을 텐데, 급소를 피해서 공격하고 있어!

그는 의미 없는 살생을 하지 말라던 내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역자가 되는 이 순간에서조차.

“쓸모없는 놈들!”

속속 쓰러지는 기사들을 보다 못한 네이선이 나섰다.

그의 손에서 시뻘건 불꽃으로 이루어진 검이 튀어나왔다.

살로메디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죽일 수도, 공격할 수 없는 적이 등장한 거였다.

“살롬, 조심해요!”

황제에게 살의를 품으면 계약 마법에 의해 세드나 공작의 심장은 으스러진다.

네이선이 일방적으로 공격한다면 천하의 살로메디안이라도 버틸 수 없을 거였다.

살롬의 계획은 뭐지? 황후 대관식이 열린다는 건 언제 알았고?

내가 바넷사와 함께 세드나 공작령을 떠난 건 나흘 전이었다.

네이선이 날 황후로 만들 거라는 이야기는 어젯밤부터 퍼졌다.

아무리 빨리 말을 달려도 세드나 공작령에서 황궁까지 꼬박 이틀은 필요했다.

살로메디안은 어떻게 대관식에 맞춰 올 수 있었던 거지?

살로메디안을 만났다는 기쁨이 쓸려 나가고, 애끓는 불안과 겹겹의 의문이 차올랐다.

“바넷사의 뒤를 밟으셨습니까?”

네이선이 검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살로메디안 역시 검을 빼 들었다. 물의 마력을 휘감은 검이 요요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내 아내를 호위했을 뿐이다.”

출발할 때부터 따라왔다고?

내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황궁으로 떠날 때 살로메디안은 날 배웅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마도구를 사용한 내게 실망해서 꼴도 보기 싫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살롬은 네이선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거야.

황실기사단과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날 파티에 보내준 척한 거고……!

살로메디안은 영지를 지키는 동시에 날 지켰다.

이보다 훌륭한 영주이자 남편이 어디 있을까.

가슴 벅찬 자부심이 밀려 올라왔다.

네이선은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일부러 대관식까지 기다리셨군요.”

“보안이 어이없을 만큼 허술해지더군.”

“아뇨! 당신은 각국 사절단 앞에서 날 망신 주고 싶었던 겁니다. 숙부의 아내를 훔친 개자식이라고!”

“모두가 아는 내용인데. 자기소개가 너무 길지 않나?”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네이선이 살기등등하게 물었다.

“마물 새는 어찌하신 겁니까?”

“없애버렸다.”

“불가능합니다! 세드나 공작은 마물 새를 없앨 수 없습니다!”

“난 못 하지만 마물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괴물을 알거든.”

“장난치지 마십시오!”

네이선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살로메디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키산드라 님께 부탁했구나……!

자존심 강한 살로메디안이 키산드라에게 부탁한 것이 놀라웠다.

키산드라가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물 새 한 마리쯤 없애는 건 키산드라에게 식은 죽 먹기일 거였다.

문제는 힘을 쓰면 쓸수록 마신화가 더 빠르게 진행된다는 거였다.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봅시다!”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에게 검을 휘둘렀다. 대련 때보다 훨씬 매서운 공격이었다.

“계약 마법만 믿고 설치는군.”

“700년 계약을 우습게 보고 설치는 건 당신입니다! 하압!”

네이선이 기합을 지르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네이선의 검 끝에서 불로 만든 뱀이 튀어 나갔다.

살로메디안이 몸을 비틀었지만 공격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큿.”

살로메디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상처가 그어졌다.

생채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뺨에 흐르는 피는 내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방어만으로 이길 수 없어! 네이선을 쓰러뜨리지 않고는 황궁을 떠날 수도 없고!

황실 기사단이 네이선을 엄호하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목이 터지라 외쳤다.

“살롬! 제게 화살을 쏴주세요!”

살로메디안보다 네이선이 먼저 반응했다.

“아이시아 님! 위험한 짓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닥쳐요!”

외마디와 함께 오른손을 높이 들어 보였다.

내 뜻을 알아챈 살로메디안이 물 화살을 쏘았다.

물 화살이 날 향해 날아왔다. 네이선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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