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50)

40

* * *

내가 찾아간 곳은 살로메디안의 방이 아니라 첨탑 감옥에 위치한 디에고의 연구실이었다.

밤이 깊었음에도 디에고는 설계도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 옆으로 음식물 찌꺼기가 말라붙은 그릇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둘둘 말린 모포와 수건, 비누 따위도 눈에 띄었다.

어엿한 숙소가 있음에도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저보고 기억 재생 마도구를 또 내놓으라고요?”

어이없다는 투로 디에고가 물었다.

자세한 내막을 설명할 수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디에고가 채근했다.

“예전에 드린 아이는요? 설마 분실하신 건가요?!”

“그게… 사정이 있어서요. 여분 없나요?”

“없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퍼부어야 탄생하는 아이입니다! 싸구려 양산형 마도구랑 다르다고요! 그걸 잃어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잃어버린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 아이를 쓰세요! 저한테 달라 하지 마시고요!”

마도구가 걸린 문제라서 그런지 디에고가 성을 냈다.

기억 재생 마도구는 정말 하나뿐이었을까? 있으면서 내놓지 않는 걸까?

마도구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디에고라면… 최고의 기술이 담긴 마도구를 내게 넘겼을 리가 없었다.

상대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더 있을 거야. 내게 준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나는 신중하게 낚싯바늘을 드리웠다.

“어쩔 수 없죠. 기꺼이 디에고의 실험체가 되어드리려고 했는데.”

나는 최대한 쌀쌀맞게 등을 돌렸다.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디에고가 바짝 다가왔다.

“공작부인!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디에고가 연구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기억 제거 마도구와 재생 마도구를 모두 사용해본 실험체를.”

“설마……!”

“결심이 섰어요. 제가 직접 마도구를 써보려고요.”

디에고에게서 기이할 정도로 밝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 모양이었다.

마지막 챔질을 위해 낚싯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가 실험체가 되어드리면… 디에고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쿠아로드에 숨어들 필요가 없죠.”

“!”

“한 나라의 국왕을 실험체로 내놓으라고 할 필요도 없고요. 안 그래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디에고가 침까지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도구를 드리겠습니다!”

“없다면서요?”

“우연하게도 어제 하나 더 만들었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디에고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말을 바꾸었다.

그가 잽싸게 연구실을 뒤졌다. 몇 겹으로 이루어진 보안 마도구를 해체하고, 그 안에서 펜 모양의 기억 재생 마도구를 꺼냈다.

드디어 살로메디안의 계약 마법을 확인하고 어머니를 떠올릴 방법이 생긴 거였다.

“부작용은 알고 계시죠?”

마도구를 소중히 품에 안은 디에고가 조심스레 물었다.

“각오는 되어 있어요.”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실험체가 되기에 딱 알맞은 분이시군요.”

“…살롬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씁쓸하게 웃으며 조언했다.

제 목을 겨누던 살로메디안의 검이 떠올랐는지 디에고의 안색이 희끗해졌다.

“사용하기 전 주의하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 아이를 만들다가 발견한 건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 파장이 있을 겁니다.”

디에고가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기에 첨탑 감옥 안에서 눈치를 보는 걸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디에고가 목소리를 낮췄다.

“잠깐 귀 좀 빌리겠습니다, 공작부인.”

의아해하는 내 귓가에 디에고가 마도구의 비밀을 속삭였다.

내 눈이 점점 확장됐다.

그가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시녀들도 모두 물렸다.

적막에 휩싸인 방에서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떨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마도구가 든 상자를 열었다.

펜 형태의 몸체가 흑요석처럼 빛났다. 그 끝에 달린 펜촉은 잘 벼린 창보다 날카로웠다.

「펜촉처럼 보이는 부분을 목덜미 뒤쪽에서 정수리 방향으로 깊숙이 찔러 넣으셔야 합니다.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 거기 있거든요.」

디에고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살을 찌르는 고통은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심한 통증도 얼마든지 견뎌냈었으니까.

마도구를 들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건 오직 살로메디안 때문이었다.

분명 실망할 거야. 자신을 의심해서 마도구까지 사용한 걸 알면…….

살로메디안의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담기지 않은 푸른 눈동자.

「날 의심하다니 불쾌하군.」

마지막 말과, 국경을 가로지르는 장벽처럼 막막하던 그의 뒷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나 때문에 살로메디안이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그의 실망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흔들리지 마, 아이시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가슴 밑에 차오른 불안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물론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를 향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가 날 속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살로메디안은 날 해치려거나 이용할 남자가 아니었다.

누가 무슨 이야길 해도, 내가 어떤 사실을 보게 된다 해도 그것만은 온전한 진실이었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심호흡을 한 후 마도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목덜미 쪽으로 찔러 넣었다.

“읏!”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찔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각오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이었다.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기어코 신음이 빠져나갔다.

“으읍…!”

눈앞이 새까매졌다가, 새하얘지길 반복했다.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영혼이 구둣발에 짓밟히는 것 같았다.

코앞에서 폭죽이 터지면 이런 느낌일까. 귀가 먹먹하고 심장이 뒤틀렸다.

극도의 메슥거림 탓에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손에서 마도구가 굴러떨어졌다.

몸이 옆으로 기우는 것도, 바닥에 쓰러지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아프다는 건 왜 말해주지 않은 거야!

디에고를 원망했다.

뺨에 닿는 양탄자의 촉감을 느끼며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또렷한 음성이었다.

어머니와 살로메디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 딸 아이시아. 너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특별한 여인이 될 거야.」

「그럼 증명해.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란 말이다.」

「미안하다, 아이시아. 엄마가 너무 미안해…….」

「계약 마법을 걸겠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그대를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의식이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졌다.

하지만 과거에서 돌아온 기억만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선명했다.

어머니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질감, 이마에 맺힌 땀방울, 창밖으로 들리는 소음까지 뚜렷했다.

살짝 찌푸려진 살로메디안의 미간, 그의 손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물방울, 기하학적인 무늬의 계약 마법진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이 뇌리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집중했다. 계약 마법진을 읽어내야 했으므로.

“으읏!”

기억이 이어질수록 뇌가 불타는 듯한 고통이 심해졌다.

내장이 뒤집히는 울렁거림도 거세졌다.

이를 악물고 마법진을 더듬더듬 읽어 나갔다.

진짜 부부처럼 행세할 것,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 등등 계약 마법 조건들은 살로메디안이 말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심장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도 달랐다.

[살로메디안(이하 S)은 아이시아(이하 A)의 심장을 요구할 수 없고, A는 S에게 심장을 돌려줄 수 없다.

만약 S가 A의 심장을 흡수하려 하거나, 누군가 A의 심장을 노리면 S의 나머지 심장은 A에게 전달된다.

이를 어기면 S의 나머지 심장은 A에게 전달된다.

S가 사망하게 되더라도 A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심장을 돌려주는 건 나여야 하는데 왜 살롬의 심장이 내게 전달된다는 거지?

흡수한다는 건 또 뭐고?

내 것과 내 것이 된 살로메디안의 반쪽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내용투성이였다.

그즈음 나는 생살을 갈라서라도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내 심장을 가져가 봤자 쌍 속성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약 마법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정말 살로메디안이 내 심장을 흡수할 수 없었다면… 전생에서 내 심장을 뜯어내지 않았을 거였다.

내 심장을 흡수하면 살롬은 쌍 속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아찔한 충격이 머리를 후려쳤다.

의식과 정신이 몸에서 분리되어 아주 먼 곳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마신의 계약자를 지키기 위해 내 심장을 노리는 이들이 생길 터였다.

나 한 사람만 죽으면 제국은 사라진 쌍 속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내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오한 탓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살로메디안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계약 마법을 걸고 조건을 내게 숨긴 거였다.

누군가 내 심장을 빼앗으려 하면 살로메디안의 나머지 심장이 자동으로 내게 전달되도록 해놓았다.

그럼 살로메디안 대신 내가 쌍 속성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날 노릴지도 모르는 누군가에 자신 스스로도 포함시켰다.

오직 날 지키기 위해.

나보고 도둑이라고 했으면서! 이런 계약 마법을 걸었다고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왜? 내가 뭐라고!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 가슴을 옥죄였다.

이제야 읽을 수 있게 된 마법진을 외면하고 싶었다.

내 해석이 틀리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진실은 너무나 선명해서 숨기려야 숨겨지지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만 기억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내 머리는 과거를 넘나들며 모든 기억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 * *

눈앞의 장면이 마신의 숲으로 뒤바뀌었다.

마물 새의 사체와, 심장 발작으로 쓰러진 내가 보였다.

테레사에 의해 지워진 기억의 일부였다.

두 개의 마도구가 충돌하는 걸까. 달군 쇠로 머리를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는 눈부신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독한 두통 속에서 날 치유하는 살로메디안과 처음 폭발하던 푸른 불꽃이 어른거렸다.

불꽃의 열기에 휩싸여 그의 심장을 먹어치우는 내 모습도 펼쳐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내가 살로메디안을 맹수처럼 덮치고 있었다!

벗어 던져진 옷가지와 한 몸처럼 맞붙은 남녀.

굶주려 달려드는 여인과 애써 밀어내지만 결국 무너지고 마는 남자.

찐득한 체온과 살갗의 마찰음. 본능적으로 뜨거워지는 몸!

살로메디안은 필사적으로 나를 떼어내려 했지만, 불의 심장을 얻은 나는 욕망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이를 악물고 떠오르는 기억을 떨치기 위해 애썼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환상이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첫날밤을 치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신의 성물을 처음 사용했을 때, 나는 욕실에서 그날의 기억 일부를 어렴풋 되찾았다.

하지만 내가 살로메디안을 덮친 거였다니?

어떻게 생전 처음 본 남자에게 그럴 수 있지? 타인과 접촉하지도 못하는 몸으로?

* * *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델마와 바바라, 휴고를 포함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대 뜻대로 해라.”

화를 내는 대신 그는 말없이 돌아갔다.

침묵 속에 혼자 남겨졌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구에게도 날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날 둘러싼 소문이 공작저를 가득 채웠다.

아쿠아로드에 있을 때 듣던 소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였다.

“공작부인께서 편찮으시다면서요?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신다던데. 이거 어쩌나…….”

“향수병이 아니실까요? 대단한 분이라 우리 모두 까먹고 있지만, 이제 겨우 스무 살이시라고요!”

“신전에 가서 기도라도 올려야지. 공작부인이 오시고 우리 영지가 정말 살기 좋아졌잖소?”

“없어서 안 될 분이시지요.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향수병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방 앞에 꽃다발과 마멀레이드, 직접 구운 과자 등등이 쌓이기 시작했다.

날 걱정해주는 다정한 이들의 방문도 끊이지 않았다.

‘전 건강해요. 저 때문에 마음 쓰지 마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떨치고 일어날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입 벙끗할 기운이 없었다.

금방 일어나리란 자신도 없었다.

음식을 씹는 것과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장마철의 눅눅한 공기처럼 무거운 무기력감이 날 휘감았다.

이불을 둘둘 말고 숨어도 하루에 열두 번씩 죄책감과 환멸이 찾아왔다.

살롬은 나 때문에 심장을 포기했어. 세드나 공작으로서의 의무도 내팽개쳤고.

그것도 모르면서 살롬을 의심해? 남자를 덮쳐서 순결을 빼앗은 여자가!

살로메디안을 의심했던 칼날은 고스란히 내게 되돌아왔다.

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사나웠다.

살로메디안은 날 위해 반쪽 심장마저 포기하려 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빼앗으려 하면 계약 마법에 의해 살로메디안의 나머지 심장이 내 것이 된다.

그 누군가가 살로메디안 자신이라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날 지키기 위해 자신조차 믿지 않았던 거였다.

죄책감에 시달릴 나 때문에 계약 내용조차 비밀에 부쳤다.

그런 그를 의심했다. 고작 테레사가 탈옥했다는 걸 숨겼다는 이유로.

나 때문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제국도 계약자를 잃었다.

모든 사달의 장본인인 나만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변명거리가 되지 않았다.

죽어 가면서 나는 억울함에 몸부림쳤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고, 오히려 빼앗기기만 했다고 절규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가해자들의 공통점인 모양이다.

나는 세 번째 남편이 살인귀 세드나 공작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내가 그에게 저지른 짓은 잊은 채 피해자인 척 굴었다.

살로메디안의 분노는 정당했다.

내 가슴을 갈라 심장을 가져가는 것 또한 옳은 결정이었다.

키산드라의 도움으로 회귀한 나는 결혼식을 강행했다.

그 뒤엔 뻔뻔하게 계약 부부가 될 것을 제안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쿠아로드를 떠나기 전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 일부가 돌아왔습니다. 마신의 숲에서 각하를 뵈었습니다. 마물 새를 죽인 직후 심장 발작이 있었고요.」

「그 뒤의 일도 기억이 나는가?」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입니다.」

「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대가 기억하도록 해. 그대가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조건이다.」

글로 적힌 대화를 읽는 것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디에고가 새롭게 발견한 마도구의 효능 때문이었다.

기억 재생 마도구를 사용한 후 흐릿한 기억 따위는 사라졌다.

「이 마도구를 사용하면 놀라울 정도로 기억력이 향상됩니다! 모든 정보가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 저장된단 말입니다!」

디에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기억이 제거된 부분을 복구하면서 모종의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실험체가 더 필요해요!」

「기억 제거 마도구와 재생 마도구 모두를 사용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현상인가요?」

「그렇습니다. 상용화되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어요! 수천 권의 책을 기억하게 될 테니까요!」

「…….」

「한 번 배운 기술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이 마도구는 인류의 발전을 이룰 위대한 발명품이라고요!」

천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권력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터였다.

마도구를 소유한 공작령과 개발자인 디에고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기억 재생 마도구의 효능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대신 제 실험에 적극 동참해 주시는 겁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는 몹시 만족한 기색이었다.

「마도구 부작용을 없앨 방법을 연구하겠습니다. 기대해주십시오, 공작부인.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대단한 천재가 됐으니까요!」

디에고의 말이 맞았다.

방 안에 틀어박힌 일주일 동안, 내 기억력은 놀랍도록 향상됐다.

슬쩍 넘긴 책도 모조리 외웠다. 예전에 봤던 보고서도 그대로 필사할 수 있었다.

펜 모양의 마도구를 움켜쥐었다. 이 작은 마도구의 효력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초인과도 같은 기억력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날 바라보던 살롬의 눈빛이 떠올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앞에서 허망해하던 그 모습이 생생히…….

보석처럼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고 실망이 차오르던 순간.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질감과 바람에 흩날리던 살로메디안의 머리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리 조각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방금 경험한 일처럼 또렷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날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살로메디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약 마법도 없애지 못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살로메디안 옆에 남을 수 있을까?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지금 네가 징징거리고 있을 때야? 과거 따위가 뭐 대수라고!

오랜만에 듣는 키산드라의 외침이었다.

마도구를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좌우를 살폈다.

하지만 키산드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키산드라 님? 어디 계세요?”

-온천에 있다. 온천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키산드라의 목소리에 조급한 분노가 실렸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온천에 매인 몸이라고 하지만 키산드라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걸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키산드라가 대꾸했다.

-힘을 더 사용하면 마신이 돼 버릴 테니까!

“변화가 느껴지시나요?”

-힘이 넘쳐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 너는 아직도 마신 죽이는 법을 못 찾은 거냐?

“확실하지 않지만 실마리를 발견했어요.”

-바로 나부터 찾아왔어야지! 방구석에서 왜 궁상떨고 있어?!

“하지만 저는…….”

-당장 온천으로 튀어와! 마물 떼가 공작저를 쑥대밭 만드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 * *

-그러니까 불과 물, 둘 중에 한 가지 속성을 잃으면 가능할 것 같다고?

키산드라의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얼토당토않은 가설에 실망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살롬은 물 속성이 되면서 계약자 자격을 잃었잖아요. 치유력도, 마신의 힘도 사라졌고요.”

-…….

“만약 키산드라 님께서 한 가지 속성을 포기할 수 있다면 마신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키산드라가 대답 대신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는 육체가 없어. 그래서 빼앗길 심장도 없고.

“다른 사람한테 줄 수는 없나요?”

-그게 쉬울 것 같냐? 살로메디안이 쌍 속성을 잃은 건 너라는 특별한 아이 덕분이라고!

키산드라가 손가락으로 내 쇄골 부근을 짚었다.

“특별하다니요?”

-네 몸 안엔 불의 마력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심장 발작으로 마력이 폭발하는 순간 살로메디안이 널 만난 거야.

눅진한 죄책감이 내 발목을 끌어당겼다.

미간을 좁힌 키산드라가 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앗.”

-그런 표정 짓지 마. 너 때문에 살로메디안은 구원받았으니까.

구원이라니?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국 유일의 쌍 속성이 사라진 거잖아요. 저 때문에 살롬은 평범한 사람이 됐다고요.”

-그게 구원이라고.

키산드라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부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쌍 속성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부자연스러운 존재야. 신의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누군 쌍 속성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줄 아느냐?

“…….”

-치유력이 어쨌는데? 늙지 않고, 죽지 않고 게 부러워?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역겨운 삶을!

“하지만 제국엔 계약자가 필요…….”

내 말을 자르며 키산드라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왜 세드나 공작은 제국을 위해 희생만 해야 하지? 조국이 우릴 위해서 뭘 해줬다고?

“…….”

-나랑 살로메디안은 희생양에 불과하다. 괴물 같은 힘 따윈 필요 없어. 평범하게 살 수만 있다면.

키산드라가 한 문장, 한 문장 힘주어 발음했다.

인간이고 싶었지만 평생 인간일 수 없었던 여인.

죽어서도 죽지 못한 여인이 슬픔에 어깨를 떨고 있었다.

-나는 살로메디안이 미치도록 부럽다. 네 덕에 세드나 공작이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먼 허공을 응시하는 키산드라의 눈가가 붉어졌다.

키산드라에게도, 살로메디안에게도 세드나 공작이란 이름은 족쇄에 불과했다.

살로메디안은 쌍 속성을 잃음으로써 운명의 족쇄를 벗었다.

나는 그에게 꼭 심장을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쌍 속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쌍 속성이 되고 싶을까?

날 만나기 전, 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거라고 했는데?

희미한 희망이 번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두 손을 포개어 가슴에 올렸다.

“살롬도 저를 구원이라 생각할까요?”

키산드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은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른다. 너한테 완전 미쳐 버렸거든.

“!”

-제정신인 인간이 그따위 계약을 하겠냐?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제 심장을 포기하는 놈이라니!

“살로메디안의 계약 마법에 대해서 알고 계셨군요…….”

-후계자를 키운 줄 알았는데 사랑꾼을 키웠지 뭐냐. 쳇.

“언제 아셨어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짓을 할수록 마신이 되는 게 빨라지겠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키산드라가 중얼거렸다.

문득 내가 물었다.

“키산드라 님. 마신화가 가속화된 게 살롬이 쌍 속성을 잃은 뒤부터죠?”

-쓸데없는 소리.

“계약자가 사라지고 마신과 제국의 계약이 깨졌어요. 그래서 새로운 마신 탄생 일정이 당겨진 거 아닌가요?”

키산드라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만으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때문에 키산드라 님이……!”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돋은 소름이 목구멍까지 틀어막은 듯했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살로메디안을 구원했다고 치자.

하지만 키산드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의 친구이자 내 생명의 은인인 키산드라는?

키산드라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놀랍게도 따뜻했다.

-자책하지 마라, 아이시아.

“키산드라 님……!”

-헬레나의 편지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날 바라보는 키산드라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마치 나를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고 있는 듯했다.

-네가 어떤 아이가 될지, 너와 내가 어떤 인연을 맺게 될지,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어머니 때문에요?”

-그래. 사랑스러운 헬레나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을 발음하는 키산드라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낄낄거리는 인위적인 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 미소만으로 어머니와 키산드라 사이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애틋한 우정, 그 이상의 연대감이 두 사람에게 싹텄던 모양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사랑의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씩 배우는 중이었다.

-너는 나와 헬레나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자라줬어. 망할 꼬맹이를 구해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키산드라 님은요?”

키산드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걸친 옷처럼 차갑고 뻣뻣했다.

발밑에 그림자도 보였다.

하나로 땋은 머리칼과 깊은 눈빛도 죽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신화가 너무 많이 진행된 탓이었다.

심장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 마신이 되어버리면 700년을 더 사셔야 하잖아요?”

-내가 마신의 선택을 받은 게 네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키산드라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넌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 인간이다, 아이시아.

맞아. 나 스무 살이었지…….

나도 내 나이를 잊고 있었다.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싸워야 할 것, 이겨야 할 것, 견뎌야 할 것이 많아서.

문득 나이보다 훌쩍 성숙한 스스로가 서러웠다.

-모든 걸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것도 오만이야.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날 감쌌다.

왠지 콧날이 시큰거렸다.

-그냥 어리광 좀 부릴 때도 있어야지.

어리광이란 말이 낯설었다.

그것도 잠시,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고집을 받아주고, 투정도 이해해주던 남자.

언제나 내 편이고, 나보다 더 날 아껴주는 남자.

처음이든 두 번째든 내게 모든 걸 주고, 내 모든 걸 가진 남자.

그리움이 북받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소매로 눈가를 찍었다.

-나는 최대한 힘을 안 쓰고 버텨볼 요량이다. 쌍 속성을 버릴 방법을 궁리해 보자꾸나.

“포기하진 않으신 거군요?”

-너무 동안이라 잊었나 본데, 이래 봬도 170살이나 먹은 세드나 공작이야! 마신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키산드라가 가슴을 쭉 펴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나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도 굴복하지 않을게요.”

-좋은 기세다, 아이시아. 세드나 공작부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키산드라 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돈 좀 주세요.”

* * *

전쟁을 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마도구를 개발하는 것과 의료 교육원을 세우는 것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다.

마신의 숲에 황금보다 귀한 약초들이 많지만 당장 현금이 필요했다.

살로메디안은 가난의 이유를 키산드라 탓으로 돌렸다.

세드나 공작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창고를 키산드라가 감췄다는 거였다.

보물 창고를 알려달라는 말에 키산드라는 펄쩍 뛰었다.

「망할 꼬맹이는 걸핏하면 내 탓이지! 숨기긴 누가 숨기냐? 지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지!」

「살롬은 보물 창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던데요?」

「웃기시네! 보물 창고 입구가 어디 있냐면…….」

키산드라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사건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물 창고의 입구는 살로메디안이 제일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황금부터 찾자!”

숨겨진 보물을 찾을 생각에 활력이 돌았다.

나로 인해 살로메디안이 구원받았다는 키산드라의 말 덕분이기도 했다.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서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탈옥한 테레사를 잡고, 혹시 모를 전쟁에도 대비하려면 없던 힘도 짜내야 했다.

내가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어디 다녀오시나 봅니다, 공작부인.”

바넷사의 은테 안경이 반짝거렸다.

그녀 뒤에 황금용 문장을 단 황실 기사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갑옷과 병장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투태세를 갖춘 건 흑룡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공작저를 점령하고 있었다.

“공작부인! 아무 일 없으셨습니까?”

기사단 맨 앞에 서 있던 휴고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저 여자가 공작부인을 압송하러 왔답니다!”

나쁜 짓 한 친구를 이르는 아이처럼 휴고가 바넷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공작저에 진입하려는 황실기사단과 그를 저지하는 흑룡기사단이 대치 중이던 모양이었다.

빈센트가 무거운 얼굴로 휴고의 말을 고쳤다.

“바넷사 누님은 공작부인을 모시러 왔습니다. 공작부인께서 따르지 않으시면 각하를 압송하겠다고 했고요.”

“그게 그거지! 감히 우리 고귀한 공작부인을 모신다니! 내 허락도 없이! 아니, 각하 허락도 없이!”

“단장님…….”

“공작부인 몸에 손끝이라도 대면 바로 전면전이다! 안 그런가, 제군들?!”

휴고의 물음에 흑룡기사단이 우렁찬 기합으로 답했다.

“공작령의 구세주는 우리 손으로 지킬 겁니다!”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각하라면 얼마든지 내줄 테니까 공작부인은 내버려 두라고!”

“황제 똘마니들은 물러가라!”

마력이 담긴 함성 탓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상전에 그 부하라더니.

황제 모독하는 솜씨도 살로메디안을 그대로 빼닮은 기사단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고 바넷사에게 말했다.

“기사들의 말투가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바넷사 님.”

“흥분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공작부인에 대한 존경이 하늘을 찌르니까요.”

“폐하께서는 저를 왜 찾으시는 거죠?”

“여러 차례 전달했지만 공작부인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파티 초대 때문입니다.”

“제가 건국 기념 파티에 가는 것이 그리 중합니까? 황실 기사단과 흑룡기사단이 대치할 만큼?”

“제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셔야 할 것은 공작부인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면 각하께서 황족 재판정에 서셔야 한다는 겁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넷사가 답했다.

딱딱하리만치 사무적인 태도는 지난번과 마찬가지였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비아냥 이상의 적의가 그녀에게서 느껴진 탓이었다.

“누님. 공작부인께 결례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빈센트가 바넷사에게 경고했다.

바넷사는 막냇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네 누나로 여기 온 것이 아니다. 폐하의 칙명을 받들러 온 것이지.”

“폐하의 명령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칼에는 생각이 없다. 주군이 휘두르는 대로 움직일 뿐.”

“폭군이 마검을 휘두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감히 폐하를 폭군이라 칭하는 것이냐?!”

바넷사의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살로메디안과 검을 겨루던 네이선과 비교할 만큼 강력한 마력이었다.

그저 집사로서의 분노일까? 그 이상의 감정이 섞인 것 같은데…….

붉은 눈을 반짝이며 바넷사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지고한 충심이라고만 생각했다.

황제를 보필하는 데 인생을 건 것도, 늦은 밤 황제의 처소를 혼자 바라보던 것도.

네이선의 마음을 내게서 떼어놓으려 한 것도 말이다.

황제와 집사 사이의 연심이라니.

사랑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바넷사가 불의 마력을 가졌다면 황후 후보였을 텐데…….

다소 차갑기는 하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가문의 위상도, 제국을 향한 충성심도 다른 귀족 영애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딱 하나, 마력의 성질이 황제와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마력이 같아야만 하는 걸까? 사랑에 마력 속성이 무슨 상관이라고?

마력과 상관없이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살로메디안이 등장했다.

“살롬……!”

일주일 만에 보는 살로메디안은 깜짝 놀랄 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베일 듯 날이 서버린 턱. 움푹 꺼진 눈과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백금발.

토벌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도 이토록 얼굴이 상하진 않았다.

나 때문일까?

바짝 마른 입술을 씹을 때쯤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네이선이 드디어 나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모양이군.”

그 주위로 수천 개의 물 화살이 떠올랐다.

황실 기사단을 향하는 화살보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살로메디안이 내게 위태로운 풍랑을 일으켰다.

* * *

살로메디안의 물 화살이 심장을 겨누고 있는데도 바넷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중하십시오, 각하. 저희는 황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나도 내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각하의 일이 폐하의 수하들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대라면 네이선을 납치하려는 자들을 살려 보낼 건가?”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물었다.

잠깐에 불과했지만 바넷사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폐하께서는 황실 기사단을 쫓아낸 각하의 방종을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자비는 없을 겁니다!”

“잘됐군. 나도 네이선의 자비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황족 재판정에서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결정해라, 바넷사. 살아서 걸어갈 건지, 시신이 되어 실려갈 건지.”

“각하!”

“수하들의 혈족이라 배려한 것이다. 두 번의 자비는 없다.”

살로메디안이 준엄하게 외쳤다.

빈센트의 낯빛이 까맣게 죽었다.

살로메디안의 말이 한 치도 과장 없는 진실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충돌을 피할 수 없겠군요.”

바넷사도 쉬 물러서지 않았다. 사전 지침이 분명했는지 황실 기사단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가 나섰다.

“제가 황궁으로 가겠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날 향했다. 이번에는 살로메디안도 날 바라보았다.

내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파티에 가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제가 움직이도록 하죠.”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공작부인. 좀 더 빨랐으면 좋았겠지만요.”

바넷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예의를 갖췄지만 위엄을 담아 바넷사에게 말했다.

“당신의 칭찬을 받고자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내 선택을 평가하지 마세요, 바넷사.”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바넷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그것만 봐도 그녀의 인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쓰레기는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니까.

“당신은 폐하의 집사지, 폐하가 아닙니다. 포장한 말로 황족을 모욕하지 마세요.”

바넷사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디 제 실수를 용서하십시오.”

“잊지 마세요. 내게도 두 번의 자비는 없습니다.”

살로메디안이 했던 그대로 말을 읊으며 허리를 곧게 폈다.

날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에 짙은 감동과 존경이 서렸다.

휴고는 두 손을 맞잡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속 시원합니다, 공작부인! 우리 공작부인이 정말 최고예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휴고가 두툼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그 파티엔 꼭 가셔야 합니까? 왠지 불길한데요?”

“불길하긴요. 그냥 파티일 뿐이에요. 세드나 공작가를 대표해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모두가 그렇게 믿어주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누가 파티에 가도 좋다고 했지?”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나도 드레스 자락을 꼭 쥔 채 입매에 단단히 힘을 줬다.

“제 선택을 존중해주세요, 살롬.”

아무 죄 없는 당신이 재판정에 끌려가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나보고 무뢰배들에게 아내를 내주는 멍청이가 되라는 말인가?”

일주일 전보다 마르고 강퍅해진 살로메디안의 입술 사이에서 위험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뢰배가 아니라 폐하의 충신입니다.”

“내겐 그놈이 그놈이다.”

분을 참지 못하는 짐승처럼 살로메디안이 으르렁거렸다.

“황실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어요.”

“왜?”

“반란이니까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내가 외쳤다.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반란이라도 상관없다. 그대를 지킬 수 있다면.”

살로메디안이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닿은 부분이 데일 듯 뜨거웠다.

날 바라보는 눈빛도, 그의 체온도 일주일 전과 질감이 달랐다.

왜일까. 불길한 그림자가 심장을 두드렸다.

“각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바넷사가 외쳤다.

살로메디안은 그녀의 말에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 * *

살로메디안이 날 데려간 곳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내겐 낯선 남자의 침실처럼 낯선 공간이었다.

“살롬. 도대체 왜…….”

뭐라 말문을 열려 하자, 그가 입술로 내 말을 막았다.

“읏.”

살로메디안의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뜨겁고 집요한 키스가 이어졌다.

언제나 그와 닿아 있고 싶었다. 스스로 매번 놀랄 만큼 가까워지고 싶었다.

원초적 욕망이 심장을 달구었으나, 지금 살로메디안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포식자와 맞닥뜨린 초식 동물이 된 기분이랄까?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뺐다.

도망가지 못하게 살로메디안이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몸부림칠수록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실렸다.

그에게 옥죄인 채 쏟아지는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흐음… 읏.”

입술이 맞붙고 신음이 엉켰다. 살로메디안은 내 영혼까지 빨아 당길 작정 같았다.

아찔한 섬광이 눈앞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민감하게 달궈진 감각이 혀끝에 집중됐다. 날 탐닉하는 살로메디안과 그에게 반응하는 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전율만이 남았다. 어깨가 떨리고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여린 살점이 얼얼해질 정도로 정열적인 키스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더 멀리, 더 깊이 가고 싶어서.

“시아.”

살로메디안의 목소리 역시 위태로운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푸른 눈동자에 스치는 슬픔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살롬,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대답하지 않고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다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손이 지나는 자리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내 드레스를 벗기려 했다.

살로메디안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뭔가 확인받고 싶은 사람처럼.

일주일 동안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의심한 것에 화가 나 있는 걸까.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을 잡았다. 살로메디안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싫은가?”

“……!”

“싫으면 말해. 안 할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멈추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계속했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입술을 달싹였다.

“싫지 않아요.”

“그럼 계속하지.”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잖아요.”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를 보내줄 마음은 없어.”

“반역자로 몰리더라도요?”

“그래.”

“재판정에 서게 되더라도요?”

“그래.”

“공작위를 잃는다 하더라도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래.”

살로메디안은 ‘그러니까 해도 되지?’라고 묻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그 못지않게 뜨거워진 상태였다.

머뭇거리는 날 홀로 내버려 두고 살로메디안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살롬!”

아직 해가 중천인데. 커튼도 치지 않고, 문도 제대로 닫지 않았는데!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전투로 단련된 근육이 늘씬하고 강인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음영을 드리운 흉근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복근.

천재적인 조각가가 만들어낸 전사상처럼 근육의 경계가 선명했다.

내 시선이 노골적이었는지 살로메디안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제가 보긴 언제 봤다고 그래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꿍얼거렸다. 손부채질을 열심히 해봤지만 별 소용없었다.

“뚫어져라 보던데.”

위압적인 상체를 드러낸 채 살로메디안이 다가왔다.

나는 벽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짙어지는 체향 때문에 현기증이 밀려왔다.

벽에 등을 붙인 나와 한쪽 손으로 벽을 짚은 살로메디안.

그가 내 쪽으로 고개 숙였다.

“시아. 보지만 말고 벗겨주는 건 어때?”

그 물음과 동시에 침실의 공기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네, 넷?”

얼이 반쯤 빠져 묻고 말았다.

살로메디안이 손끝으로 내 턱을 위로 추켜올렸다.

그의 손길에 반응하듯 어깨가 움찔 튕겼다.

“내 부탁이 무례한가?”

“우린 부부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날 바라보며 살로메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내가 벗겨주도록 하지.”

“!”

“그대만 보는 건 억울하지 않나. 나는 일주일 동안 그대의 그림자도 못 봤는데.”

“살롬!”

“그대가 날 밀어내는 걸 무려 일주일이나 참았다. 더 이상 참으라는 말은 아니겠지?”

귓불이 열기로 홧홧해졌다. 목덜미는 물론 가슴팍까지 잘 익는 사과빛으로 물들었을 것 같았다.

긴장감 탓에 고인 침도 넘기기 어려웠다.

내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살로메디안이 드레스 자락을 걷었다.

내 대답 따위는 별로 상관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손길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게다가 능숙하기까지 했다.

여자 옷은 왜 이렇게 잘 벗기는 거야? 내가 처음이면서!

의문이 사라지기도 전에 시녀 도움 없이는 꿈쩍도 않던 드레스 끈이 투둑, 힘없이 풀렸다.

“살롬……!”

탄식과도 같은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바윗덩이 같은 살로메디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찍어 눌렀다.

그 사소한 저항으로 그를 멈추기란 불가능했다.

“이제 그만둘 수 없다.”

날 바라보며 살로메디안이 선언했다.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짐승으로 돌변할지 모를 눈빛이었다.

더운 숨결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 드레스를 벗기는 그의 손짓이 다급해졌다.

그때 무언가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디에고에게 새로 받은 기억 재생 마도구였다.

키산드라와 바넷사 때문에 따로 빼두는 걸 잊었던 것이다.

“이건……!”

살로메디안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그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마도구를 사용한 건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눈빛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둔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틀어박힌 거야?”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살로메디안은 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거짓말까지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하지 말았어야지.”

살로메디안이 신랄한 어조로 읊조렸다.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마도구까지 사용하다니. 내가 그토록 못 미더운 남자인가?”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저는… 저는…….”

변명이 쉬 나오지 않았다. 마도구를 사용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 상황까지 예상했다.

살로메디안이 상처 입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외면하고, 기억을 택했다.

믿는다고 했지만 실은 믿지 못했다.

내게 모든 걸 준 남자를.

“살롬이 저를 위해 심장을 포기했을 줄 몰랐어요.”

“…….”

“나머지 심장까지 제게 주려 했다는 것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살로메디안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쾅!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에서 예리한 분노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젠 만족하는가?”

“!”

“이제는 나를 좀 믿어주겠는가?”

살로메디안의 질문이 칼날처럼 가슴에 파고들었다.

심장이 으스러질 듯 아파 왔다.

입도 떼지 못하는 날 대신해서 그가 대답했다.

“실망만 커졌겠지. 제멋대로 계약 마법을 걸고, 그대에게 숨겼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살롬이 누구보다 절 아껴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럼 왜 믿지 못했지?”

살로메디안이 다시 추궁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 올라있었다.

차가워진 손끝이 덜덜 떨렸다. 어떤 말로도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 살로메디안을 잃게 될까 봐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 손을 그가 매섭게 떼어냈다.

“됐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

“살롬!”

“파티에 가는 걸 허락하겠다.”

“!”

“대신 내게서 도망치는 건 허락하지 않아. 그게 우리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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