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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디에고는 만나 봤어?”
“첨탑 감옥에 있더군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디에고가 원한 일이야.”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도구에 푹 빠져서 절 거들떠보지도 않더군요. 몇 년 만의 재회인데.”
“어쩔 수 없을 거야. 디에고가 바라 마지않던 실험체에 대해서 알려줬거든.”
“실험체가 뭡니까?”
“기억 제거 마도구와 재생 마도구를 동시에 사용한 사람.”
나는 디에고에게 국왕의 존재를 알렸다.
그가 두 가지 마도구를 사용했고, 두 종류의 부작용에 시달렸다는 것도 전달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디에고는 당장 아쿠아로드로 떠나겠다고 난리였다.
그 실험체를 직접 연구해야겠다는 거였다.
마도구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없앨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왕실의 허락도 없이 조국을 탈출한 마도사 주제에 말이다.
“겨우 말리긴 했는데 언제 아쿠아로드로 떠날지 몰라.”
“부끄러운 오라버니입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디에고가 와준 덕분에 엄청난 마도구를 갖게 됐는걸? 디에고 성격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오라버니에게 대인 살상용 마도구를 개발하라고 명령하셨다고요?”
델마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금기시된 일이지만…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아서.”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아이시아 님이 어떤 결정을 하시든 따를 테니까요.”
“고마워, 델마. 꼭 전해야 할 소식은 뭐야?”
내가 묻자 델마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소식이야?”
“너무 놀라시지 마십시오.”
“왜 겁을 줘? 놀라지 않을 테니까 말해 봐.”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잠시 망설이던 델마가 씹어 뱉듯 말했다.
“테레사가 탈옥했습니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뒷덜미에서 시작된 아득한 통증이 머리를 휘감고 눈알을 찔러댔다.
테레사가 도망쳤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컴컴한 밤, 진창에 빠져도 이보다 황망하진 않을 듯했다.
“외부인의 조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괴한들이 침입해 간수들을 죽이고 테레사를 데려갔답니다.”
“…….”
“그 과정에서 테레사의 한쪽 팔이 잘렸답니다. 탈옥에는 결국 성공했지만요.”
델마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드디어 어머니 앞에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거대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벽 위로 테레사의 어여쁜 얼굴이 그려졌다.
날 벌레 보듯 쳐다보는 눈빛과 오만한 미소까지도.
「언니는 영원히 내 거야.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해.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 살아야 하고!」
테레사의 생생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지금이라도 테레사의 우악스러운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욕과 학대가 다시금 날 덮쳤다.
뼈마디가 부서지고, 살갗이 지져지는 고통.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아무도 날 거들떠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난 안전해. 살롬도 있고 델마랑 휴고, 빈센트도 있잖아!
심호흡해 보려 했지만 숨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알몸으로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손발이 덜덜 떨렸다.
“아이시아 님!”
델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장을 뒤집는 메슥거림이 엄습했다.
델마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냈다.
“송, 송구합니다.”
상처 입은 듯한 델마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돌아왔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아닙니다. 소신이 주제넘었습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 몸에 닿으면 구역질을 해. 델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체질이 그래.”
진심이 닿길 바라며 두서없이 말했다.
델마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언제부터요?”
“응?”
“어릴 적엔 안 그러셨습니다. 아이시아 님께선 제 손을 항상 먼저 잡아주셨습니다.”
예절 교육을 엄격하게 받은 델마는 날 어려워했다.
델마와 친해지고 싶어서 손을 내민 것은 나였다.
델마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던 것도 항상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살로메디안이 아닌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었다.
상대가 무해한 어린아이라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건들지 말라고. 날 제발 내버려 두라고. 부디 살려 달라고.
“테레사 때문이군요?”
델마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해.”
“왜 아이시아 님께서 사과하십니까? 잘못은 테레사가 저질렀는데요?”
“…….”
“테레사를 죽여야 했습니다. 제 손으로 아이시아 님의 원수를 갚았어야 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델마가 발을 굴렀다.
“내가 오만했어.”
“아이시아 님.”
“기회가 있을 때 테레사를 처리했어야 했는데… 정당하게 처벌받게 하겠다고 고집부렸잖아.”
마음속으로 난 테레사를 깔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매춘부의 딸 주제에 정통 왕세녀인 날 대적할 수 없다고.
나는 천박한 계략으로 똘똘 뭉친 너와 다르다고.
너는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지만, 나는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널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날 비웃듯 테레사는 감옥을 빠져나갔다.
비록 한쪽 팔을 잃기는 했다지만.
“저는 세드나 공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있던 델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롬이 왜?”
“테레사가 탈주했다는 사실을 아이시아 님께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검은 매가 날아오지 않았습니까?”
“!”
“아쿠아로드에서 보낸 매였습니다. 테레사 탈주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요!”
* * *
테레사는 잘린 팔을 보며 비명을 삼켰다.
왼쪽 팔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가느다란 손목도, 상아처럼 빛나던 매끈한 손도!
남은 건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모멸감뿐이었다.
“약속대로 마도구를 가져오지 않으면, 나머지 팔다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테레사를 구한 괴한이 복면을 벗으며 협박했다.
그는 발초프 후작의 최측근 기사였다.
발초프 후작의 명령을 받은 제국인들이 테레사를 구한 건 오직 마도구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왕세녀였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폴은 어디 갔지? 어머니는 뭘 하는 거야?
내 돈을 받아 처먹던 인간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팔에서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버려 뒀다간 상처가 곪을 것이다. 어깨까지 잘라내야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죽을 수도 있겠지.
테레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팔을 치료해주세요.”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고작 가짜 왕녀에게?”
“제가 죽으면 발초프 후작께서 곤란하실 텐데요?”
“끝까지 간교한 계집이로군. 각하께서 네년의 천박함을 진작 눈치채셨어야 했는데. 쯧쯧.”
한낱 기사 따위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테레사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옥 같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도, 출중한 마력과 탁월한 지능도 소용없었다.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네까짓 년이 발버둥 쳐봤자 매춘부밖에 더 되겠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뒷골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위로 올라갔는데.
아이시아가 날 때부터 손에 쥐고 있던 걸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피 토하는 심정을 눌러 담았다.
절 내려다보던 아이시아의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때까지 제국 귀족들을 이용해야 했다.
“폐왕녀가 절 모함하려고 가짜 소문을 퍼뜨린 거예요. 제가 진짜 아쿠아로드의 왕녀입니다! 흑흑.”
테레사가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
남자들은 여자의 울음에 약했다. 특히 자신처럼 예쁘고 어린 여자의 눈물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어차피 매춘부의 딸이 아닌가?”
“!”
“같은 아쿠아로드 출신이라고 해도 세드나 공작부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그녀는 진짜 왕세녀였으니까.”
테레사가 다짐했다.
‘힘을 되찾는 날, 너부터 죽여줄게. 아이시아보다 먼저 갈기갈기 찢어주마. 개자식아.’
눈물이 통하지 않는 걸 깨달은 테레사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네놈이 계속 무례하게 굴면 자결할 테다.”
“뭐라고?”
“발초프 후작은 마도구를 얻지 못하겠지. 막대한 돈을 써서 전쟁까지 벌였는데… 그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해!”
“이년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발초프 후작의 수하가 벌컥 화를 냈다.
테레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내 마도구를 원하면 나한테 잘하란 뜻이야. 멍청아.”
피를 너무 흘린 탓에 테레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래서 미소가 더욱 괴기스러웠다.
“마도구를 빼앗은 다음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계획을 바꾸는 게 좋을 거야. 사용법은 절대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하! 왕국을 상대로 사기를 칠 만한 계집이로군!”
“칭찬은 그쯤 해두고 치료 신관이나 데려와. 내가 당신들에게 보내준 놈들로!”
잘린 팔을 부여잡고 테레사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끝난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내가 팔이 잘리면 너는 목이 잘릴 거다, 아이시아……!’
* * *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에 붉은 입술을 떨었다.
“살롬이 알고 있었다고?”
델마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진실이 사람의 모습을 가졌다면 델마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제가 아는 걸 세드나 공이 모를 리 없지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그런 걸 거야. 적당한 때가 되면 알려줬겠지.”
살로메디안을 대신해서 변명했다.
그런 내가 애처로워 보였는지 델마의 눈빛이 어둠 속에 잠겼다.
“과연 그럴까요? 세드나 공은 아이시아 님을 독점하고 싶어 합니다.”
“…….”
“테레사가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시아 님께서 아쿠아로드로 돌아가려 하셨겠죠. 그래서 일부러 숨긴 겁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누구보다 날 사랑했다. 그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날 믿지 못했다.
「그대는 내게만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대는 아쿠아로드인들에게도 공평하게 다정하지 않나? 그대의 백성도 아니거늘.」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사정이 있다 해도 테레사의 탈옥을 숨긴 건 너무하지 않나?
내가 공작령을 내팽개치고 아쿠아로드로 떠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그 정도로 무책임해 보였나? 공작령을 위해서 누구보다 애썼는데…….
살로메디안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이 거세게 충돌했다.
어떤 정리도 내리지 못했으면서 살로메디안을 변호했다.
“살롬은 잘못한 거 없어. 그 사람한테 믿음을 주지 못한 건 나야.”
“아이시아 님…….”
“나 때문에 살롬이 솔직하지 못했던 거야. 내가 충분히 믿음을 주었으면 이런 일은 없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붉게 부푼 눈가에 또 눈물이 맺혔다.
울고 싶지 않은데. 여기서 또 울면 안 될 것 같은데.
초조하게 입술을 씹는 날 향해 델마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드나 공이 아이시아 님께 정보를 숨긴 건 처음이 아닐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델마는 살로메디안을 비난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내 남편을 모욕하지 말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예감이 곰팡이처럼 번져 갔다.
“에단을 찾기 위해 정보 길드와 접촉했습니다. 길드장의 협조 덕에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고요.”
아쿠아로드 암흑가 사람들은 벽보를 붙이는 것까지 도왔다.
그 이후로도 왕궁의 동태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테레사를 그토록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을 거였다.
“그 사람들이 어쨌다는 거야?”
“정보 길드에서 테레사가 탈옥했다는 소식과 함께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 왔습니다.”
차마 날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듯 델마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테레사의 탈옥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뭘까?
누군가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조차 견딜 수 없었다.
“얼른 말해줘. 무슨 소식인데?”
내가 다급히 물었다. 델마가 겨우 입술을 뗐다.
“헬레나 전하는 병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암살당하셨습니다. 그것도 흑룡기사단 일원이었던 본에게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다음엔 델마를 의심했다.
하지만 델마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함부로 내뱉을 사람이 아니었다.
충격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눈앞을 가로막은 어둠이 짙어졌다.
의식이 뚝뚝 끊겨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델마의 말을 반복했다.
“어머니가 본에게 살해당하셨다고……?”
“본은 테레사가 부리던 암살자였습니다. 헬레나 님을 암살하고 흑룡기사단에 입단한 것도 테레사의 명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은 큰 공을 세운 자신이 국외로 추방당한 것에 억울해했다고 했다.
본이 세웠다는 큰 공이 어머니를 암살한 거였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어머니의 주치의도 병사라고 그랬어!”
“테레사는 독 전문가입니다. 국왕의 주치의들도 테레사가 쓴 독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능숙한 암살자가 테레사의 독을 이용해 헬레나 전하를 암살했다면 아무도 밝히지 못했을 겁니다.”
높은 이명이 고막을 때렸다.
사실 어머니의 죽음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폐위당하고 어머니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병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르윈은 정신적 충격 탓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도 실감하지 못했다.
테레사의 본격적인 학대가 시작됐을 즈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내겐 어머니의 죽음에 의문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문제를 제기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이 또한 알고 계셨을까. 무력하고도 어리석은 딸을.
“세드나 공은 헬레나 님을 죽인 암살자를 오랫동안 수하로 부렸습니다. 기사들의 과거를 따지지 않는다는 걸 자랑하면서요. 저는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살로메디안은 본에게 속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본의 정체를 안 후엔 누구보다 격노했다. 직접 본을 심문하기도 했다.
델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뼈와 살이 남지 않을 만큼 심한 고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본이 진실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살롬이 일부러 내게 숨겼다는 거야?”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겨우 답했다.
델마의 얼굴이 괴롭다는 듯 찌푸려졌다.
“정황상 의심스럽습니다. 아이시아 님을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델마. 살롬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저도 아이시아 님의 부군을 욕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드나 공이 아이시아 님께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 건 확실합니다.”
“…….”
“세드나 공이 무언가 숨긴다고 느끼신 적 없습니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얼버무린다든지요.”
왜일까. 델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살로메디안과 계약 부부가 됐을 때가 떠올랐다.
살로메디안이 내게 계약 마법을 걸었다.
나는 계약 마법에 사용된 고대 마법어를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계약인지, 무슨 조항이 있는지 몰랐다.
조건을 물었을 때도 살로메디안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계약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대가 내 심장을 가졌다는 걸 비밀로 해.」
「네?」
「우리가 계약했다는 것 또한 들키면 안 돼.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처럼 굴어야 한다.」
「그게 전부라고요?」
「아니,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서 도망치지 말 것. 그것이 계약의 조건이다.」
심장을 돌려주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조건뿐이었다.
그는 왜 그런 계약을 맺었을까. 계약 내용은 그가 말한 그대로일까.
아니면 다른 조항이 또 숨겨져 있었을까.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살로메디안은 그때마다 대답을 피했다.
불신의 진흙과 의심의 이끼로 가득한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날 구해줄 사람은 없었고, 진실은 너무 멀었다.
“아이시아 님? 뭔가 걸리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야.”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델마가 안타깝다는 투로 조언했다.
“의심스러운 건 꼭 확인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델마의 의심이 너무 지나친 거야. 나랑 살롬은 부부라고.”
어머니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살로메디안은 날 행복하게 해줄 남자라고.
날 빤히 바라보던 델마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부부가 너무 많습니다.”
“델마…….”
“아이시아 님께서 상처받지 않길 바랍니다.”
델마가 꾸벅 허리 숙였다.
델마의 뒷모습을 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서 있을 기운도 남지 않았다.
곧 살로메디안이 돌아올 텐데.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본이 어머니를 암살했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테레사의 탈옥은 왜 숨기셨어요?’
‘계약 마법의 진짜 내용은 뭐였죠?’
수많은 질문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내버려 뒀다간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미 반쯤 터져버린 것 같기도 했다.
물어보면 진실을 말해줄까? 숨기면 어쩌지?
진짜 두려운 것은 나였다.
살로메디안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나.
한 번 싹튼 불신은 곰팡이처럼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솔로 문질러도 닦이지 않는 곰팡이가 우리 사이에 생길 줄은 몰랐다.
우리 사이를 너무 맹신하고 있었던 걸까. 처음 겪는 사랑이 너무나 달콤해서 중요한 무언가를 외면했던 건 아닐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살로메디안과 기사들이 귀환하는 모양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물어봐야 해. 살롬이 어떤 대답을 하든.”
* * *
아이시아를 만나기 전 살로메디안은 편지 몇 통을 태웠다.
전부 네이선이 보냈거나, 네이선의 명으로 발송된 편지였다. 황제의 문장이 찍혀 있으니 편지보다는 명령서에 가까웠다.
내용은 한결같았다.
[아이시아를 건국 기념 파티에 참여시켜라. 거부하면 황족 재판정에서 처벌받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작위를 박탈할 수 있다.]
코웃음이 절로 튀어 나왔다. 네이선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런 편지를 보내면 겁을 먹고 아이시아를 황궁에 보낼 줄 안 건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살로메디안은 네이선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너무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겉만 뻔드르르한 쓰레기다. 권력을 이용한 협박이 주특기인.
‘내가 우스워 보이는 건가? 작위 따위를 지키느라 시아를 보낼 만큼?’
가능하기만 했다면 작위 따위는 언제든 내놓았을 것이다.
살로메디안에게 세드나 공작이란 이름은 더러운 운명의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을 떼어버릴 수만 있다면 한쪽 팔쯤 기꺼이 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아니다.
살로메디안이 죽어도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아이시아였다.
네이선이 음흉한 꿍꿍이를 품은 게 분명했다.
아이시아를 파티에 참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식의 협박은 곁들이지 않을 터였다.
‘뭘 숨기고 있는 거냐, 네이선. 감히 날 상대로!’
안타깝게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순수한 살의가 살로메디안을 점령했다.
겉보기엔 무표정했지만, 피가 끓고 내장이 활활 타올랐다.
당장 흑룡기사단을 이끌고 황궁을 습격하고 싶었다.
두 손으로 네이선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가 피를 나눈 혈육이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네이선은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를 앗아가려는 날강도에 불과했다.
살로메디안은 제 것을 훔치거나, 훔치려 했던 자를 용서한 적 없었다.
딱 한 번, 아이시아를 제외하면.
아이시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물 새 사체 옆에서 거의 숨이 끊어져 있던 여인.
상처와 땀, 흙먼지투성이였음에도 아이시아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 실크보다 부드러운 검은 머릿결.
예술가가 빚어놓은 듯 섬세한 콧날과 입술.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 아이시아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는걸.
심장 반쪽을 주고 얻은 인생의 빛, 삶의 이유, 그 밖의 모든 것.
살로메디안은 서둘러 아이시아를 보고 싶었다.
아이시아만이 살의와 분노에서 자신을 건져줄 수 있었다.
“시아는 어디에 있지?”
“공작부인께서는 대욕장에 계십니다.”
아이시아의 방을 정리하던 하녀가 대답했다.
대욕장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길 끝에는 아이시아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미소가 살로메디안을 구원해줄 거였다.
* * *
희붐한 수증기가 대욕장을 가득 채웠다.
싱그러운 목욕물과 허브 향기가 날 선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살로메디안은 욕조 안에서 아이시아를 발견하고 웃음을 지었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가 아름다웠다. 물결에 흔들리는 흑발은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시아는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도 마신의 성물을 두르고 있겠지? 하여간 성실하다니까.’
최근 아이시아의 마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오로지 마신의 성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목욕을 거듭할수록 아이시아가 점점 더 강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황실 기사단 앞에서 불기둥을 내뿜었을 때, 살로메디안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가끔 아이시아의 마력에 물 속성이 깃든 것 같다는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쌍 속성도 아닌데.
“시아.”
그녀의 애칭을 발음하는 것만으로 기쁨이 번졌다.
아이시아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살로메디안의 기쁨이 강렬한 당혹스러움으로 뒤바뀌었다.
어떤 보석보다 빛나던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 어디 불편한가?”
“…….”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
아이시아의 침묵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찍어 눌렀다.
아이시아의 표정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허파를 가득 채웠다.
분위기만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뭔가 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살로메디안은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아이시아의 감정을 읽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뒤범벅된 불안 탓에 아이시아의 감정을 읽는 게 불가능했다.
아이시아와 결혼하기 전, 살로메디안은 그녀의 감정을 낱낱이 읽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손끝으로 더듬듯 그녀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살로메디안에게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흙으로 구운 인형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았기에 아이시아가 내뿜는 총천연색 감정들을 모조리 관찰할 수 있었던 거였다.
아이시아를 만나고 살로메디안은 기쁨과 행복을 배웠다.
두려움과 불안도 뼈저리게 익혔다.
제 감정을 처리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더 이상 아이시아의 감정을 촘촘히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살로메디안을 날카롭게 찔렀다.
“살롬. 테레사가 탈옥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영원과도 같던 침묵을 깨고 아이시아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쿵, 바닥을 찧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상대의 표정을 읽는 건 아이시아가 한 수 위였다.
“알고 계셨군요.”
“…….”
“왜 제게 알려주지 않으셨나요?”
아이시아의 목소리에 원망이 담겼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누가 알려준 거지?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아이시아의 상한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이 먼저였다.
“잠시라도 그대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테레사가 자유로이 돌아다니는데 제가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음에도 아이시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살로메디안은 눈보라에 휘말린 조난자처럼 몸을 떨렸다.
하지만 이마와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제가 아쿠아로드로 떠날까 봐 숨기신 건가요?”
“시아……!”
“살롬은 절 믿지 못한다고 하셨죠. 제가 살롬에게만 다정한 여자가 아니니까요.”
아이시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솔직해지자면 질투 섞인 어리광이었다.
자신만 바라봐 달라고 조르는 대신 졸렬한 말을 내뱉었다.
솔직하지 못했고, 한 남자로서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시아를 탓하고 말았다.
아무도 보지 말고, 나에게만 다정해 달라고 말했으면 달랐을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음에도 아이시아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함께 딛고 있던 땅을 쪼개버린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이시아가 불쑥 물었다.
“본이 어머니를 죽인 암살자란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살로메디안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이시아가 무슨 의미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의도를 알아야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사이였던가.
의문은 슬픔을 가져왔다. 슬픔보다 모멸감이 앞섰다.
살로메디안이 무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다.”
“본을 직접 심문하셨잖아요?”
“헬레나 전하에 대한 진술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사실인가요?”
“날 믿지 못하는 건가?”
그 질문이 살로메디안의 가슴에 깊고 예리한 흉터를 남겼다.
아이시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큰 파랑을 일으켰다.
자신은 아이시아를 믿지 못하노라고 말했던 주제에 그녀의 눈빛에 상처 입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왜 이리 지독한 상처를 입는 거지?’
살로메디안은 감정, 특히 사랑에 관한 문제에서는 7살짜리 어린애보다 서툴렀다.
그것이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아이시아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녀의 온기에 기대 차가워진 심장을 덥히고 싶었다.
“시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것만은 믿어줬으면 좋겠다.”
비루하게 들리지 않길 바랐지만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잠겼다.
애정을 갈구하며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시아도 허접한 본성을 눈치챈 듯했다.
“저도 사랑해요.”
담담하고도 차분한 어투였다.
그녀 역시 진심임을 살로메디안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시아의 눈동자에 스치는 슬픔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얇게 덧씌워진 외로움의 막을, 그 위를 덮은 불신의 그림자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토록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짜르르한 통증이 전신을 훑고 지났을 때 아이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약 마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계약 마법이란 말에 살로메디안이 휘청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 거였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숨기는 것이 없으시다면 알려주세요.”
“내가 뭘 숨겼다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가 계약 부부가 됐을 때 어떤 조항을 걸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이제 저도 마법어를 읽을 수 있으니까요.”
아이시아의 눈동자에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했다.
그 길은 진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내가 조건을 조작했다는 것까지 알게 된 건가?!’
살로메디안은 계약 마법에 대해 전부 말하지 않았다.
아이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심장 도둑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아이시아는 패닉에 빠졌다.
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가져가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살로메디안은 이미 아이시아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계약 마법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 아이시아를 지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이런 순간이 올까 봐 두려웠는데. 시아가 내게 실망할까 봐. 결국엔 날 떠나버릴까 봐.’
왜 네이선의 얼굴이, 네이선의 품에 안긴 아이시아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계약 마법에 대해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까?
그러면 시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
끝없는 어둠이 살로메디안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고민은 영원 같았다. 정답을 찾기 위해 살로메디안은 말없이 발버둥 쳤다.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바늘 끝처럼 예리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숨기는 건 하나도 없다. 날 의심하다니 불쾌하군.”
이번에도 내놓을 수 있는 건 초라한 거짓말뿐이었다.
* * *
어떻게 대욕장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는 것만 어렴풋 떠올랐다.
목욕물은 여전히 따뜻했는데, 이유 모를 한기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의심스러우신 건 꼭 확인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델마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의 말과 행동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가 의심을 말끔히 해소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대화하는 내내 그는 내 눈을 피했다.
불쾌하다는 말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척할 만큼 사랑에 눈멀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을 의심하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 자신도 없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했다.
그가 숨기는 것들을 알아내고도 싶었다.
살롬은 말해주지 않을 거야. 계약 마법진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초조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나도 허공에 떠오른 계약 마법진을 봤다.
의미 불명의 무늬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피오넬에게 마법어를 배우고 아쿠아로드에 있을 때도 꾸준히 복습했다.
다시 마법진을 본다면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다. 마법진의 일부라도 기억해낸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디에고의 얼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기억 재생 마도구!’
그것만 있으면 숨겨진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던 때의 기억을 돌이킬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내게 암시를 남겼을지도 몰랐다.
늙고 병든 국왕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기억 재생 마도구를 사용한 후 국왕은 자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만큼 효과는 뛰어났다.
왕은 과거를 다시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떠올랐다고 했다.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 내용을 확인해야 할까?
잠깐만 사용한다면 부작용은 없지 않을까?
어머니라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잠시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초상화 한 장 간직하지 못했다.
기억 재생 마도구라면 우리가 행복했었던 시절의 어머니를 보여줄 거였다.
그 기대만으로도 어두컴컴하던 마음이 환해졌다.
마도구를 사용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기억 재생 마도구는 살로메디안에게 압수당한 상태였다.
살롬이 순순히 마도구를 내줄리 없어. 훔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훔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마도구를 어느 서랍에 넣어놨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도둑질은 우리 사이의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이 벌려 놓을 게 뻔했다.
살로메디안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견뎌내는 사이 밤이 깊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눈을 감고 어머니를 떠올려 봤다.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청결한 침대 시트의 향이 섞인 어머니의 체취가 선연했다.
대신 얼굴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햇살 같던 어머니의 미소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강을 건넌 어머니의 파리한 얼굴이 내 기억을 점령했다.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는 견딜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숄을 걸쳤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구두 대신 솜을 덧댄 슬리퍼를 신었다.
오늘 밤 외출을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됐다.
몰래 다녀오자. 살롬도 나중엔 이해해 줄 거야.
마침 달이 구름 뒤로 얼굴을 감췄다. 나도 어둠 속에 몸을 감췄다.
* * *
델마가 에단을 찾았을 때, 그는 피오넬과 함께 있었다.
“이 아이가 자네 딸인가?”
델마의 시선이 짙은 푸른 머리칼을 가진 피오넬에게 향했다.
야위긴 했지만 초롱초롱한 눈매가 범상치 않았다.
이복자매라 그럴까.
인형처럼 예쁜 외모와 왠지 모르게 까칠한 분위기가 테레사와 비슷해 보였다.
“맞습니다, 델마 경.”
“자네를 많이 닮았군, 에단.”
“얘야, 델마 경께 인사드려라. 아버지를 아이시아 님께 데려다주신 기사님이시다.”
에단이 피오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제 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피오넬이 델마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처음 입궁했을 때 테레사도 딱 이런 눈으로 자신을 관찰했다.
입맛이 썼다.
델마도 피오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피오넬이 석판에 또각또각 글자를 적었다.
목소리를 잃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무슨 기사를 해요?]
적개심이 가득한 물음이었다.
당황한 에단이 딸을 나무랐다.
“무례하구나! 델마 경은 최고의 기사이자, 아이시아 님의 최측근이시다.”
[앞으로 이 언니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에요?]
“제발 말조심해라. 피에타!”
[어차피 저는 말을 못 해요. 그리고 제 이름은 이제 피오넬이에요. 공작부인께서 정해주셨다고요!]
입술을 뾰족하게 피오넬이 석판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공작부인도 아버지께 존댓말을 하는데, 왜 델마 경은 하대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부하도 아닌데.]
“델마 경은 아쿠아로드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
[지금은 아니잖아요? 테레사의 호위기사 노릇을 하다가 도망쳤다는 거 저도 알아요.]
에단이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피오넬은 분필을 놀렸다.
틈틈이 델마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단은 영리하지만 되바라진 딸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피에타, 아니 피오넬. 너는 하나 남은 내 자식이다. 너마저 잃고 싶지 않은 아비 마음 좀 알아다오.”
[말조심하지 않으면 델마 경이 절 죽일까요?]
“피오넬!”
울 듯한 얼굴로 에단이 외쳤다. 물론 피오넬은 태연했다.
델마가 에단에게 물었다.
“피오넬과 단둘이 이야기해도 될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보다시피 아이가 아직 온전치 않습니다…….”
에단이 변명하듯 대답했다. 피오넬이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운 기색이었다.
“괜찮네. 피오넬도 건강해 보이고.”
“어미와 동생들을 잃은 가엾은 아이입니다.”
에단이 변명했다.
피오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가 가여워요? 저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해질 거예요! 테레사한테 복수할 거라고요!]
분노 탓에 글자가 일그러졌다. 분필을 움켜쥔 작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에단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단둘이 되자마자 델마가 피오넬에게 물었다.
“정말 복수하고 싶으냐?”
[당연하죠! 테레사는 우리 가족의 원수예요. 나도 이용하다 버렸고요.]
“그럼 솔직히 말해라.”
[제가 뭘 숨긴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이시아 님께 들었다. 너한테 고대 마법어를 배우셨다고.”
[그런데요?]
“제대로 알려드린 거 맞느냐? 단어 뜻을 다르게 알려드리진 않았고?”
“!”
피오넬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테레사가 예언서 문구를 조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델마는 그 눈동자에 깃드는 당혹스러움과 모멸감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쓰디쓴 후회와 패배감까지도.
‘피오넬이 일부러 고대 마법어를 틀리게 가르쳐드렸다면… 아이시아 님께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어린아이라도 간과해서는 안 됐다. 이 아이는 테레사의 이복동생이자 심복이었으니까.
가능하다면 아이시아 곁에서 떼어 놓고 싶었다.
적당한 때를 봐서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에단에게는 미안하지만 테레사의 정체를 밝힌 지금 에단과 피오넬은 가치를 잃었다.
이들 부녀는 아이시아의 앞길에 장애물이 될지도 몰랐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더 나을 터였다.
테레사가 탈옥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제가 공작부인을 납치하려고 해서?]
“테레사는 네게 기대를 많이 했다. 너도 기꺼이 테레사의 하수인이 되었고.”
[협박당한 거예요.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겉으로는 복수 운운하지만 몰래 테레사와 내통하는 거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 상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피오넬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목을 가로지르는 검붉은 선이 드러났다.
주변 살이 패이고 피부가 일그러질 만큼 심한 흉터였다.
어떤 치료를 해도 흉터를 지우진 못할 듯했다.
[테레사는 제 손으로 죽일 거예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피오넬이 쓴 글자를 보며 델마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나는 말 몇 마디로 사람을 믿지 않는다. 상대가 아이시아 님을 해치려 했던 전력이 있다면 더더욱.”
피오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델마가 건조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이시아 님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겠지만 나는 다르다. 널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고, 고문할 수도 있다.”
[기사라는 사람이 최악이네요!]
“맘대로 생각해라. 아이시아 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더러운 짓도 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원하는 게 뭔데요?]
“테레사에 대한 모든 것.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네가 아는 모든 걸 털어놔.”
[말하면 절 믿어줄 건가요?]
“나중에 판단하겠다. 네 정보가 쓸만하면 너와 네 아비를 지켜주마.”
피오넬이 억울하다는 듯 글자를 써 내려갔다.
[당신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 아이시아 님이 절 지켜주신다고 했다고요!]
피오넬을 내려다보는 델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아이시아 님을 위해 너는 뭘 했지?”
델마를 바라보는 피오넬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델마의 물음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처형당해 마땅한 죄를 저질렀으면서 아이시아 님의 보호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말할 셈이냐?”
파랗게 질린 피오넬이 아랫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동안 자신이 상대해 온 어른들과 델마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델마가 피오넬을 한 번 더 압박했다.
“너희 부녀를 지켜주겠다고 한 건…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릴게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제야 피오넬이 항복했다. 델마는 예의상으로나마 웃지 않았다.
“도움이 되어야 할 거다. 어머니와 동생들 뒤를 따르고 싶지 않으면.”
[당신 정말 기사 맞아요? 기사라기보다 암흑가 두목 같은데?]
질렸다는 투로 피오넬이 물었다.
델마가 피식 웃었다. 제법 눈치 빠른 아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