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38화 (38/50)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5권

차 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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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38

* * *

네이선은 아이시아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바넷사를 찾았다.

“아이시아 님의 답신은 아직인가?”

“기사단이 떠난 것이 그제입니다.”

“지금쯤이면 아이시아 님을 만나 뵀을 텐데.”

“이제 막 귀환하셨지 않습니까. 편지를 작성할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기사단이 아이시아 님께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이선이 안락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시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면 알수록 매력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매력을 발견할수록 그녀와 자신 사이에 강력한 무언가가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운명이 아니면 필연으로 만들어버리면 되니까.

제국을 위해서 아이시아를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황후감은 아이시아 님밖에 없어.’

네이선이 집무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황후 후보 초상화를 흘낏 보았다.

마력은 물론, 미모, 지혜, 성품까지 뭐 하나 아이시아보다 나은 여인이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살로메디안과 싸우지 않기 위해 아이시아를 포기하느니, 아이시아를 위해 살로메디안을 없애버리자고.

어차피 그는 더 이상 마신의 계약자도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 그토록 완벽한 여인이 있을까? 총명하고, 저돌적인 데다가 놀랍도록 인자해.”

아이시아를 떠올리며 네이선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불의 천사를 닮은 외모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지. 안 그런가, 바넷사?”

“대단하신 분이긴 하지요.”

바넷사가 쌀쌀맞게 답했다.

네이선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지나치게 박한 평가로군.”

“폐하처럼 찬사를 늘어놓는 재주가 없어서요.”

“아직도 날 이해하지 못하겠나?”

“잘 모르시나 본데요, 폐하. 숙부의 아내를 탐하는 주군을 이해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랍니다.”

바넷사의 눈동자에 경멸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충신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네이선은 아이시아를 놓지 못했다.

잊으려고 해봤지만,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만 부채질할 뿐이었다.

“제국을 위해서라고 변명하지는 않겠다. 나는 아이시아 님을 꼭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바넷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이선은 허공에 아이시아의 얼굴을 그리며 다짐했다.

“나와 혼인할 수 있는 여인은 그녀뿐이다.”

“대신들과 원로들의 반발은 어찌하시렵니까?”

“마땅한 황후 후보가 없으니 이해해줄 거다. 내가 황후도 후계자도 없이 홀아비로 늙어 죽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네이선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바넷사가 문득 물었다.

“폐하께서 물의 마력을 지녔다면 아이시아 님을 넘보지 않으셨겠지요?”

네이선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강력한 불의 마력을 타고났다.

아내로 맞을 수 있는 상대도 불의 마력을 지닌 여인뿐이었다.

물 속성 여인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까워져 봤자 상처만 남을 게 뻔한 관계 아닌가.

“내가 물 속성이라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지금이라도 생각해보십시오.”

“글쎄, 지금보다 황후감을 구하긴 쉬웠겠지? 강력한 물의 마력을 지닌 영애들은 더러 있으니까. 그대처럼 말이야.”

네이선이 피식 웃으며 바넷사를 가리켰다.

바넷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궈진 냄비처럼 빨갛게 변했다가 이내 새파랗게 식었다.

무슨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바넷사 치고는 희한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네이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도 아이시아 님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을까? 그녀가 가진 건 마력만이 아니니까.”

“폐하의 이상형인 불의 천사를 닮으셨고요…….”

“적안과 흑발이 몹시 치명적이긴 하지. 하하.”

네이선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황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바넷사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넷사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는군. 아이시아 님 때문에 큰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건가?’

네이선은 안경 뒤에 가려진 바넷사의 진심을 읽으려고 애썼다.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과 곧고 단정한 자세가 돋보였다.

자신과 제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천재.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충신.

가정을 꾸리지 않고 황실과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바넷사에게 항상 고마웠다.

잔소리가 지나칠 때면 적당한 상대를 만나서 시집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네이선이 아는 한, 이 나라에 바넷사를 아내로 맞을 만한 남자는 없었다.

마력도, 신분도, 성품도.

‘아무에게나 내 오른팔을 내줄 수 없지.’

네이선은 바넷사가 연애편지를 쓰는 모습을 딱 한 번,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안경을 벗고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바늘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집사님이 아니라, 십 대 소녀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네이선은 기분이 퍽 상했다.

아끼는 보물을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기분이랄까.

네이선에게 들키자마자 바넷사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누구에게 쓴 편지냐는 물음에는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만약 아이시아 님께서 폐하의 초대에 응하지 않으시면요?”

바넷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바넷사. 오늘따라 질문이 많은데?”

“대답해주십시오. 아이시아 님께서 거절하시면요?”

“꼭 오실 거다.”

“낙천적이시네요. 살로메디안 님께서 따라오실 텐데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네이선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바넷사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이시아 님을 황후로 맞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숙부님이다. 숙부님을 처리하지 못하면 아이시아 님을 얻을 수 없어.”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숙부님을 세드나 공작에서 폐할 것이다.”

네이선이 웃음기 지운 얼굴로 말했다.

창백해진 바넷사가 빽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정신 나가셨습니까?”

“조용히 말해도 들린다. 이럴 때 보면 바바라랑 그대는 자매가 분명하단 말이야.”

따가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네이선이 투덜거렸다.

바넷사는 분노인지 황당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괴물을 제국에 풀어놓으실 작정입니까?”

“숙부님은 쌍 속성을 잃으셨다. 예전만큼 두려운 상대가 아니야.”

“폐하는 그 살로메디안 님께 무참히 패하셨지요.”

바넷사가 네이선의 뼈를 후려팼다.

꽤 아픈 걸 보면 패배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루기 까다롭긴 하지만… 살로메디안 님은 없어서 안 될 존재입니다. 제국을 위해서도, 황실을 위해서도요.”

“과연 그럴까.”

네이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700년간 이어진 마신과의 계약에 균열이 생겼다. 급격히 늘어난 마물, 말라붙은 온천, 갑자기 등장한 성물까지.”

“살로메디안 님께서 쌍 속성을 잃으셨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마물을 새로 관찰한 결과 이상한 징조는 숙부님께서 멀쩡하실 때부터 시작됐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모든 걸 세드나 공작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바넷사가 입을 다물었다.

네이선이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여자에게 홀려 이성을 잃은 남자 같지는 않았다.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라면 모를까.

“계약을 빌미로 제국과 황실은 세드나 공작을 이용했다. 의존했다는 말이 더 적확하겠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니까요.”

“세드나 공작 앞에서는 황제도 권위를 잃는다. 이것이 옳은 걸까? 한 사람에게 제국의 안녕을 맡기는 것이?”

“…….”

“나는 세드나 공작이 황제보다 막강한 권력을 갖는 걸 원치 않는다.”

“살로메디안 님의 권한을 축소하시겠다는 겁니까?”

“대신 지나친 의무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

“!”

“숙부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내 뜻에 따라주시기만 한다면.”

살로메디안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가 얼마나 세드나 공작이란 운명을 저주했는지 네이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죽지 않고도 세드나 공작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거였다.

‘아이시아 님만 양보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해드리지요, 숙부님.’

만약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황제로서 힘을 보여줄 셈이었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살로메디안도 뼈저리게 느껴 봐야 했다.

“바넷사, 파티 준비를 서둘러 다오. 아이시아 님께서 사교계에 데뷔하시는 영광스러운 자리니까.”

* * *

휴고는 날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았다.

“으허헝! 공작부인!!”

“휴고 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공작부인 걱정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바위 못지않게 거대하던 휴고가 바람 빠진 가죽공처럼 홀쭉해져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고생 많았죠?”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공작부인께서 가장 힘드셨겠죠. 바바라에게 들었습니다. 악녀 테레사를 쳐부수셨다고요?”

“네. 곧 처형당할 거예요.”

“드디어 원수를 갚으셨군요! 마음 같아서는 제 손으로 직접 목을 분질러놓고 싶은데!”

“휴고 님 마음만 받을게요. 고마워요.”

“돌아와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공작령의 천사께서 오셨으니 이제 고생은 끝이네요! 핫핫핫!”

휴고가 목을 뒤로 젖히고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살로메디안도 없이 전쟁을 치르느라 힘들었을 텐데 흔한 생색 한 번 내지 않았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공작부인.”

“시아! 드디어 오셨군요!”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빈센트와 바바라 남매가 앞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운 얼굴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시아, 각하께서 사고 치지 않았나요? 아쿠아로드에서 깽판 치고 도망친 거 아니죠?”

바바라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부쩍 초췌해진 바바라의 얼굴 때문에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비,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십 대 중반부터 노화가 시작되는 법이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하지만…….”

“시아야말로 고대하던 복수를 끝낸 사람 같지 않은데요?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요?”

바바라의 눈치는 귀신처럼 빨랐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황제의 편지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내장을 썰어서 닭 모이로 던져져도 모자를 놈 같으니라고! 뭐?! 파티에 참가하면 우리 각하를 용서해줘?”

바바라가 핏발 선 눈으로 편지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래도 폐하의 친필 서신인데…….”

라고 말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남의 집 안주인은 왜 넘보고 지랄이야? 거시기를 잘라도 시원치 않을 놈! 잘라 낼 거시기도 안 달렸을 놈! 달리긴 달렸는데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놈!”

원색적이고 창의적인 욕설이 퍼부어질 때 빈센트가 바바라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렸다.

폭주하는 바바라를 말려주겠구나, 싶어서 한시름 놓으려는데 빈센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말해봤자 누님 목만 아픕니다. 욕은 참았다가 그놈 면전에서 하시지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당장 황궁으로 가자!”

“누님 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확성 마도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디에고라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야! 황제 귓구녕에 욕을 때려 박아 주자고!”

바바라가 눈을 반짝이며 찬성했다.

내버려 뒀다간 우리 영지 전체가 반역자로 들끓게 될 것 같았다.

“빈센트까지 왜 이래요? 상대가 폐하란 걸 잊지 말아 주세요.”

내가 두 손을 모으며 읍소했다.

“황제든 황제 할아버지든 기본 예의를 지켜야 인간 취급을 해주는 겁니다.”

언제나 신사답고 교양 넘치는 빈센트였지만 이번만은 완강했다.

바바라가 손뼉 치며 맞장구를 쳤다.

“오랜만에 옳은 말하는구나, 빈센트! 인간 짓을 해야 인간이지. 짐승 짓 하는 놈이 무슨 황제야?”

나는 뒷골을 잡았고, 살로메디안은 ‘내가 부하들은 잘 뒀군.’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께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내 친구이자 디에고의 여동생인 델마예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서둘러 델마를 소개했다.

모두 앞에서 델마가 짧게 고개 숙였다.

“아이시아 전하를 모시던 델마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델마. 여기에선 공작부인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그냥 아이시아라고 부르든지.”

“알겠습니다, 아이시아 님.”

공작부인이라는 말은 끝내 할 수 없다는 듯 델마가 대답했다.

델마를 관찰하는 바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델마도 바바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델마 씨는 흑룡기사단에 입단하시는 건가요?”

“제가 아쿠아로드 출신이라 마음에 걸리십니까?”

“질문에 먼저 답부터 해줬으면 좋겠는데.”

바바라가 턱을 쳐들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델마는 동요하지 않았다.

“세드나 공께 분에 넘치는 제안을 받았지만 사양했습니다. 저는 아이시아 님의 호위일 뿐입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바바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니 무슨 뜻이지?

나와 델마가 시선을 교환했다.

“용병은 퇴직금과 시간 외 수당이 없다는 거 아시지요?”

“네?”

델마는 바바라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포함한 공작령 사람들은 슬슬 감을 잡았지만.

“봉급은 넉넉히 챙겨드립니다. 하지만 후유 장애 위로금이나 사망 위로금은 없습니다. 사인하실래요?”

바바라가 조급하게 굴었다.

델마가 비정규직 호위기사를 때려치우고 정식 입단을 원할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역시 돈 문제였어. 바비는 참 한결같단 말이지.

쓴웃음을 삼키려는데 델마가 대답했다.

“아이시아 님을 지키는 것은 저의 사명입니다. 봉급은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바바라 마음에 드는 말이 어디 있을까?

바바라가 델마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환영합니다, 델마 경! 평생 우리 영지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아요!”

델마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날 돌아봤다.

돈 밝히는 이 꼬마는 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델마에게서 바바라를 떼어냈다.

“시끄럽다, 바바라. 지금 봉급 운운할 때가 아니다.”

좌중을 돌아보며 살로메디안이 팔짱을 꼈다.

“귀족 나부랭이들이 우릴 상대로 전쟁놀이를 한 이유가 무엇이지?”

* * *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의 편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영지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니콜 자작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빈센트가 보고서 뭉치를 꺼냈다.

부기사단장으로 싸우면서 보고서까지 만들었다고?

나는 빈센트의 성실함에 혀를 내둘렀다.

“명분도 조악합니다. 아이시아 님 때문에 각하께서 선제공격을 했다니.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탄로 날 거짓말까지 하면서 전쟁을 벌인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건가요?”

내 물음에 휴고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흑룡기사단이 강했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상대는 우릴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친 거죠.”

“전쟁은 그리 쉬 벌어지지 않습니다, 기사단장님.”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이 하나둘인가?”

휴고는 빈센트에게 딴죽을 걸었다.

내가 휴고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휴고 님. 이 세상에 흑룡기사단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은 없어요.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예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휴고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공작부인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그놈들의 검은 속셈이 뭐였을까요?”

휴고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휴고를 향해 모두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생니콜 자작과 폐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시아, 그게 무슨 말이지?”

“폐하는 생니콜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어요. 가짜 명분으로 내란을 일으켰는데 왜 제국군을 출정시키지 않았을까요?”

“…….”

“마신의 성물을 발견했다는 걸 폐하께 알린 것도 생니콜 자작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생니콜 자작은 테레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뭘 꾸민 거지? 테레사…….

국왕을 시해하기 전 테레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테레사를 직접 심문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내게는 권한이 없었다.

제국 황족이란 신분 탓에 내정 간섭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왕위를 계승하려는 의도로 비춰지는 상황도 사양이었다.

테레사는 일주일 뒤면 처형될 것이었다.

테레사의 목이 광장에 걸릴 때까지 편히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폐하가 생니콜 자작의 도발을 눈감아줬다는 겁니까?”

빈센트가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요.”

“망할 놈들! 피해 보상금을 잔뜩 뜯어내야겠네요! 황제 놈이랑 결탁되어 있다면 황금은 넘쳐날 테니까요!”

바바라가 갈퀴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땅을 파는 시늉을 했다.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쪽 피해가 커요.”

“아닙니다, 공작부인. 부상자는 더러 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적들에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줬거든요!”

휴고가 두꺼운 가슴 근육을 땅땅 치며 자신감을 보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흑룡기사단은 최선을 다해줬죠.”

“물론입니다! 영지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게 문제예요.”

“…네엣?”

“우리 쪽 전력이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니까요.”

순간 물 끼얹은 듯한 적막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저들의 진짜 목적이 우리 측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간을 본 거라고요?”

얼빠진 얼굴로 휴고가 물었다.

목숨 바쳐 영지를 지킨 기사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제 추측일 뿐이지만, 이번 전쟁으로 그들이 얻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 전력을 확인했다는 건…….”

“진짜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거죠.”

휴고와 빈센트는 물론 살로메디안까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창백해진 빈센트가 보고서를 빠르게 넘겼다.

“적들의 초반 공격은 꽤 위협적이었습니다. 흑룡이 총공세를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팽팽한 대치가 유지됐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 실력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정예 부대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상대 쪽 사상자의 수는 파악되나요?”

“최소 300명 이상입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너무나 참혹한 패배였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휴고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다음 전쟁에서 이기려고 300명을 개죽음시켰다는 말씀입니까?!”

“…….”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시는 거라면…! 폐하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휴고 님, 고정하세요.”

“죄송하지만 고정하기 힘듭니다, 공작부인! 사람이 무슨 파리 목숨도 아니고! 파리라도 그렇게 죽이면 안 되는 법입니다!”

휴고의 목에 핏대가 도드라졌다.

나도 휴고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흥분은 금물이었다.

“더 강한 적이 몰려올지도 몰라요. 우린 그때를 대비해야 해요.”

조용히 듣기만 하던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적이 제국군일 수 있겠군.”

“살롬!”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그 네이선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네이선이 보낸 협박장과 초대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이선은 노골적으로 날 원하고 있었다.

제국 최강, 아니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권력을 손에 쥔 남자였다.

살로메디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이선은 살로메디안을 공격할 수 있지만, 살로메디안은 네이선을 해칠 수 없었다.

700년간 이어진 계약 탓이었다.

납덩이를 얹은 듯 가슴이 답답했다.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나와 비슷한 심경일 거였다.

그때 창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반짝이는 노란 눈과 야무진 부리를 가진 검은 매였다.

한동안 보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나 보네.

살로메디안이 매가 가져온 쪽지를 확인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쪽지를 와그작, 구겼다.

“살롬. 무슨 연락이에요?”

살로메디안이 마른고기 조각을 매에게 먹였다. 그의 목소리가 무심했다.

“마신의 숲에서 온 전언이다. 순찰 중에 사고가 생긴 모양이다.”

“큰 사고예요?”

“아니. 좀 번거로워졌을 뿐이다.”

“전쟁 중에도 순찰을 빼놓지 않는군요. 기사님들께 위로품을 전달해야겠어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 시아.”

가만히 날 응시하던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돌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눈동자에 담긴 온도가 달랐다.

뭐라 꼬집긴 어렵지만 그냥 넘기기엔 껄끄러운 무언가가 읽혔다.

괜한 넘겨짚기일까?

내 착각일 거라 믿으며 불안감을 지웠다.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심장이 낯선 박자로 뛰고 있었다.

낯선 느낌이 신경을 자극했지만,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이 일로 살로메디안에게 크게 실망하게 되리란 것을.

* *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끝났다.

살로메디안은 흑룡기사단을 이끌고 마신의 숲과 영지를 시찰하러 떠났다.

목욕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헬레나 전하께서 남기신 편지예요. 혼자 읽으실래요?”

바바라가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색 바란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것만으로 콧날이 시큰거렸다.

20년 넘게 보관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지 봉투는 깨끗했다.

밀랍 봉인에는 어머니가 결혼 전 사용했던 월계수 문장이 찍혀있었다.

멸문당한 발렌티아 후작가의 문장이었다.

[내 딸에게.]

미려한 어머니의 필체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지기라도 하듯이.

짙은 그리움과 응고된 슬픔이 심장을 들쑤셨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편지 봉투를 뜯으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어머니는 내가 울길 바라지 않으실 거야.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뱉었다. 그리고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어머니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소중한 내 딸 아이시아.]

아이시아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최초 여왕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아버지가 지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지어두셨던 걸까? 예지력 덕분에 알게 되신 걸까?

입 안에 고인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 * *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아름다운 숙녀가 됐겠지?

분명 너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멋진 사람이 됐을 거야.

항상 널 지켜주고 싶었는데… 열다섯 살부터 넌 늘 혼자더구나.

미안하다, 아이시아.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네가 겪을 슬픔의 무게를 알면서도 막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널 두고 먼저 떠나서 너무 미안해.

나는 평생 내가 가진 능력을 저주하며 살았단다. 살이 떨릴 만큼 끔찍하고 무서웠어.

내가 불행한 미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미래 때문에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키산드라 님을 만나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어.

너도 키산드라 님을 만나 뵙겠지? 유쾌하고 짓궂지만 너무나 외로운 사람을 말이야.

엄마는 널 살려달라고 키산드라 님께 부탁했단다.

그건 널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키산드라 님을 위한 일이기도 했어.

오직 너만이 키산드라 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네 고된 미래를 보면서 엄마는 수없이 울었어. 그래도 마냥 울기만 했던 건 아니란다.

키산드라 님과 주치의 르윈, 심지어 악녀 테레사까지…….

널 살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작정이란다.

네 인생을 시궁창에 빠뜨렸을 테레사가 그 안에 끼어 있다는 게 이상하지?

나도 그래.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어.

엄마는 가짜 왕족이 우리를 몰락시키는 미래를 봤다.

너의 폐위와 사랑하는 내 가족, 발렌티아 후작가의 멸문과정도 봤어.

나는 가문을 지키지 못할 테지만, 너만은 포기할 수 없어.

약간의 운이 따라줬단다. 이곳에서 역사학자 조르주를 만났거든.

그리고 역사학자들이 진짜 예언서를 감췄다는 걸 알게 됐어. 진짜 예언서의 내용도.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어서 알아낸 사실이야.

예지력을 가진 내가 아발론의 예언서를 훔쳐 읽었다는 것이 웃기지 않니?

나는 미래의 테레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작정이란다.

많이 놀랐니? 그 애가 예언서를 이용할 것이 뻔한데.

안타깝지만 그 애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우릴 무너뜨리게 되어 있어.

그래서 예언서를 주는 거야. 예언서를 봤다면 널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너는 희망의 씨앗, 아쿠아로드에 새 하늘을 열 위대한 여인이잖아?

테레사는 널 죽이려 하겠지만 역사학자들이 반대하겠지.

그리고 진짜 예언대로 너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인이 될 거야.

엄마는 네가 만들 새 세상은 보지 못할 테지만, 못 봤다고 상상할 수 없는 건 아니야.

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믿을 수 있단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아이시아.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어. 그게 죽음이라 하더라도!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맞아. 하지만 엄마는 행복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널 위해 기도할 수 있으니까.

네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웃을 수 있으니까.

한 가지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 아이시아.

어린 너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서 미안하지만… 키산드라 님을 부탁한다.

키산드라 님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운명을 떠안으신 가엾은 분이야.

네 남편과 힘을 합쳐 그분을 도와주렴. 분명 그분도 너와 네 남편을 구해주실 거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남편을 이야기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그는 널 행복하게 해줄 남자야.

그를 만난 다음부터 너에겐 어떤 불행도 없을 거야.

왜냐고?

세 번째 남편이 등장한 이후의 네 미래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거든.

엄마가 질 나쁜 미래만 본다는 거 알지?

그래서 나는 순수하게 네 행복을 믿을 수 있단다.

사랑하는 아이시아, 부디 건강하렴.

엄마가 하늘에서 항상 널 지켜볼게.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는 않을게. 엄마랑은 아주 늦게, 정말 늦게 만나자.

남편이랑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 다음에… 지겨워질 때쯤 엄마한테 오렴.

인사는 그때 해도 돼. 네가 많이 보고 싶을 테지만 참을 수 있어.

네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그 가엾은 남자를 이해해줘.

-널 목숨보다 사랑하는 엄마 헬레나.]

* * *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은 이내 서러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온몸의 물이 눈물로 바뀌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울어도 잦아들지 않을 그리움이었다.

“엄마……!”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엄마, 헬레나.

날 바라보던 아련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에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슬픔을 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르윈이 내게 의술서를 가져다준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기적인 줄만 알았던 회귀도 어머니의 계획이었다.

심지어 테레사가 날 살려둔 까닭도 어머니 덕분이었다.

날 둘러싼 모든 것에 우연이나 행운은 없었다.

그저 누구보다 딸을 아끼는 어머니가 계셨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편지가 눈물에 젖지 않도록 품에 안는 것뿐.

“너무 보고 싶어요, 엄마. 엄마한테 지금의 제 모습을, 살롬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요……! 흑흑흑.”

길고 질긴 울음이 이어졌다.

서러움은 현기증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목욕을 하지 않았음에도 온몸이 젖어 들 만큼 눈물을 토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델마가 물과 손수건을 내밀었다.

“델마, 언제 왔어? 흑.”

울음을 삼키며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꼭 알려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봐. 미안.”

“제가 전하를 방해한 겁니까?”

“괜찮아. 전하 말고 아이시아라고 부르는 것만 잊지 마.”

“송구합니다, 아이시아 님.”

델마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자신이 내 소꿉친구가 아니라 신하일 뿐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듯이.

옛날처럼 다정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델마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아쿠아로드의 국왕이 되어 달라고 읍소하는 델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델마. 넌 내 소중한 친구야. 네 충성심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잠시 망설였다.

델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델마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델마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내가 원치 않는 목표를 위해 그녀는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와 함께 있고 싶다면 아쿠아로드의 왕이 되란 말은 하지 마.」

「전하!」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죽는 날까지 세드나 공작부인이고 싶어. 네가 뭐래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아.」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리던 델마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혹시 세드나 공 때문입니까?」

「살롬 때문이기도 하고, 나 때문이기도 해.」

「…….」

「아쿠아로드는 날 버렸고, 나도 아쿠아로드를 버렸어. 내 나라는 제국도, 아쿠아로드도 아니야. 그냥 세드나 공작령이지. 내 가족도 모두 거기 있어.」

「제가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는 건가요?」

「그래. 내가 아쿠아로드 국왕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넌 날 떠나야 해.」

날 위해 기사의 자긍심을 버린 델마에게.

나 대신 복수를 해온 델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델마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졌다.

그녀의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이기적인 날 위해 델마는 또 한 번 조국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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