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 * *
세드나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길.
말을 타겠다고 아이시아가 고집을 부렸지만 살로메디안은 양보하지 않았다.
전쟁 따위야 어찌 되었든 아이시아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아이시아는 마차 안에서도 쉴 생각이 없었다.
“생니콜 자작이 테레사와 내통하는 것 같아요. 성물에 대한 정보도 자작이 황실에 흘렸겠죠.”
이슬을 머금은 5월의 장미보다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발그레 달아오른 양 뺨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릿결까지.
아이시아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로메디안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마신의 숲을 노리고 싸움을 걸어온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모해요.”
새초롬하게 실룩이는 입술.
그 입술이 남자를 미치게 한다는 걸 아이시아는 알고 있을까?
“몇몇 가문이 연합한다고 해도 흑룡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쳐들어온 거죠? 우리가 선제공격했다는 거짓말까지 지껄이면서.”
살로메디안이 아무런 대꾸하지 않자, 아이시아의 고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롬.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물론이다.”
“딴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숙제를 검사하는 깐깐한 가정 교사처럼 아이시아가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손을 뻗어 아이시아의 뺨을 쓸었다.
꽃잎처럼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내 아내지만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거짓 한 점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미심쩍다는 듯 아이시아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갔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이뤘음에도 그대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기쁘다기보다는 혼란스럽고 허탈하겠지.”
“살롬이 틀렸어요. 혼란스럽지도 않고 허탈하지도 않아요. 저는 아주 개운해요. 앓던 이가 쑥 빠진 것 같다고요.”
가슴을 편 아이시아가 낭랑하게 말했다.
“처형당하는 건 못 봤지만, 테레사가 체포되는 걸 봤잖아요. 지금쯤 지하 감옥에서 인생의 매운맛을 보고 있겠죠.”
“그걸로 만족하는가?”
“아뇨. 테레사를 제 손으로 죽인다 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이시아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도 이걸로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이시아가 집중하고 싶은 미래는 세드나 공작부인으로서의 미래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미래일까.
살로메디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병든 아비를 두고 떠나는 것이 편치 않겠지. 냉정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정 많고 여린 여인이니까…….’
국왕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시아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늙고 병든 국왕은 아이시아의 동정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쿠아로드엔 후계자가 없었다.
계승 서열이 높은 왕족들도 실종되거나, 테레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악녀가 사라진다고 해도 아쿠아로드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시아는 아쿠아로드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 교육받았고,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전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아쿠아로드에 좀 더 남고 싶었겠지?”
“제가 할 일은 다했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샛별처럼 빛나는 아이시아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델마와는 이야기가 잘 끝났나?”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아이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쿠아로드를 떠나기 전 델마와 아이시아는 언쟁을 벌였다.
델마가 병든 국왕 대신 아이시아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현 국왕은 백성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전하께서 떠나신다면 아쿠아로드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여기 남을 수 없어. 나는 세드나 공작부인이니까.」
「그저 세드나 공작부인이셨다면 아쿠아로드를 정벌하셨겠지요.」
「옛정을 베풀었을 뿐이야.」
「아니요! 전하께서는 아직도 아쿠아로드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
「전하처럼 나라를 아끼는 분이 국왕이 되셔야 합니다! 진짜 예언서에도 그리 적혀있지 않습니까?」
「예언서는 비밀에 부치라고 했을 텐데?」
아이시아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델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은 예언서 구절을 낭송했다.
「희망의 씨앗 없이는 나라의 미래도 없나니. 씨앗을 지켜라. 그리하면 새 하늘을 열게 될 것이다!」
「델마!」
「부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초대 국왕이 예언한 구국의 영웅이십니다!」
「…….」
「테레사가 눈엣가시였던 전하를 왜 살려뒀겠습니까?」
예언서는 여러 곳에서 아쿠아로드의 멸망을 암시했다.
멸망의 징조이자 장본인인 테레사와 역사학자들은 고심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나라가 무너지면 겨우 잡은 권력도 휴지 조각이 된다.
그래서 테레사는 아이시아를, 희망의 씨앗을 움켜쥐고 있었던 거였다.
「전하께서 아쿠아로드의 국왕이 되셔야 합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델마. 넌 내 소중한 친구야. 네 충성심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이시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사이 살로메디안은 자리를 피했다.
아이시아가 제 기척을 눈치챈 것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엿듣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시아가 예언서대로 아쿠아로드의 새 역사를 쓰겠다고 할까 봐…….’
살로메디안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이시아가 떠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진심으로 떠나길 바란다면 보내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심장 반쪽 대신 두려움이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채운 듯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전에 없던 불안을 얻었다.
아이시아가 아플까 봐. 누군가 아이시아를 노릴까 봐.
아니면 아이시아가 자신에게 질릴까 봐. 그래서 떠난다고 할까 봐.
제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건 상상보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이시아는 누군가의 지배 아래 있을 여인이 아니었다.
그것이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제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시아가 다스린다면 아쿠아로드도 기술력을 자랑하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출중한 재능과 지혜,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갖췄다.
빌어먹을 오욕의 예언서까지 더해졌다.
새 미래와 새 역사를 쓸 희망의 씨앗.
그 운명을 타고난 아이시아가 제 곁에만 있어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몰랐다.
‘시아의 꿈은 복수였을까. 아니면 아쿠아로드인들의 행복이었을까.’
너무나 궁금했지만 솔직하게 묻지 못했다.
제 바람과 다른 대답을 듣게 될까 봐.
아니, 실은 음험하고 눅눅한 독점욕 탓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가 넓은 하늘을 훨훨 날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 품에 가두고 저 혼자만 아이시아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미소도, 손짓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길 바랐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독점욕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옥죄였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어요.”
아이시아가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 같던데.”
“친구들끼리 가끔 싸우고 그러는 거죠.”
델마는 호위기사로서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시아가 델마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그녀 역시 호위기사 소임을 사양했을 수 있었다.
아이시아는 소중한 친구의 간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무슨 말을 했기에 델마가 잠자코 따라오는 걸까.
‘왜 나한테 숨기는 거지? 나는 그대의 남편이거늘.’
가슴 속에 피어난 불씨가 불꽃이 되어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웠다.
이 의심 많고 비루한 남자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살로메디안이 반쪽밖에 남지 않은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두루뭉술한 감정이 아니라 아이시아의 생각을 낱낱이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 *
“황제 폐하께서 생니콜 자작의 말을 믿으시면 어쩌죠?”
반반하지만 불쾌한 조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로메디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닐 거라 믿는다.”
“폐하는 살롬을 미워하잖아요.”
“미워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내를 뒀으니.”
손가락으로 콧날을 톡 건들자, 아이시아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솔직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잠시 시름을 잊었다.
“괜한 말씀 마세요.”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이시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부끄러울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뛰어난 왕의 재목이라는 걸 누가 믿어줄까.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고 싶은데 아이시아의 재능은 숨기려야 숨겨지지 않았다.
“그대에 관한 말은 늘 진심이다, 시아.”
“그거참 영광이군요.”
“누군가 그대를 훔쳐 갈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살로메디안을 바라보는 아이시아의 표정도 어색하게 굳어갔다.
“살롬은 제가 의심스러우세요?”
“그게 무슨 소리지?”
“절 믿지 못하니까 불안하신 것 아닌가요?”
아이시아의 시선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꿰뚫었다.
살로메디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온전히 믿는 사람은 딱 한사람뿐이었다.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람도,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사람도 딱 한 명이었다.
무방비할 정도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 의심스럽냐는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흘러내린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기며 살로메디안이 되물었다.
“내가 아내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살롬은…….”
아이시아의 아리따운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희뿌연 슬픔과 아릿한 쓸쓸함이 심장을 적셨다.
이 감정이 제 것인지 아이시아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무언가 오해가 생긴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실수를 저지른 걸까.
마른 입술을 축인 후 살로메디안이 말문을 열었다.
“시아, 내 말은…….”
그때 마차 밖에서 수십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을 울리는 불길한 진동이 발끝을 때렸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보호하듯 감싸며 마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크로티무스 제국 기사단이 마차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나 공작은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으시오! 도주하거나 불응하면 반역죄로 다스리겠소!”
국경을 넘자마자 황실 기사단이 그들을 잡으러 온 거였다.
* * *
살로메디안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마땅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뭐라 지껄였느냐. 나보고 반역자라고?”
살로메디안이 황금용 문장을 가슴에 단 황실 기사단장을 노려봤다.
나는 그가 황실 기사단장의 목을 베어 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살로메디안의 옷깃을 쥐고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절대 죽이지 마세요. 일이 복잡해져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알면서도 살로메디안은 날 외면했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 앞에서도 황실 기사단장은 오만했다.
“폐하의 뜻을 계속 거스르시면 반역자로 몰릴 수 있다고 말씀 올린 것이지요.”
살로메디안이 아름답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땅에서 날 막는 놈은 죽어 마땅하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각하.”
“유언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냥 죽어라.”
언제 뽑았는지 모르겠지만 살로메디안의 손에는 날 선 검이 쥐어져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칼날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가 내뿜는 살기에 모든 황실 기사들이 신음했다.
“왜 이러십니까? 소신은 폐하의 친서를 전달하러 왔을 뿐입니다!”
파리하게 질린 황실 기사단장이 외쳤다.
살로메디안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마 기사단을 끌고 내 마차를 포위했으면서?”
“실수였습니다!”
“너희들은 명백히 날 위협했다. 사냥감을 모는 사냥꾼처럼 내 마차를 쫓았고.”
“우연히 각하를 만나서 서두른 것뿐입니다! 위협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거짓말까지 하는 걸 보니 정녕 빨리 죽고 싶은가 보구나.”
살로메디안의 입술 사이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폐하는 살롬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다 안다고 했지?! 마물 새를 이용해서 관찰한다고 했어!
황제는 마신의 계약자인 세드나 공작을 감시하기 위해 마물 새를 부렸다.
살로메디안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죽인 마물 새가 바로 그것이었다.
황제는 나와 살로메디안이 아쿠아로드에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생니콜 자작령을 선제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밖에 없었다.
생니콜 자작과 귀족들은 거짓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황제는 귀족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각하! 고정하십시오!”
살로메디안이 겨누는 검 끝에서 기사단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살로메디안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열 받게 해놓고 고정하라는 건 좀 이상한데.”
“폐하의 친서를 가져왔다니까요!”
“궁금하지 않다.”
“제발 궁금해해 주십시오!”
“거절한다. 내가 궁금한 건 네놈들의 목뿐이다.”
“공작부인! 제발 친서를!”
기사단장이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이제야 살로메디안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한숨을 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살롬. 잠시 물러나 계세요.”
“…….”
“폐하의 친서라잖아요. 읽고 나서 죽이셔도 늦지 않아요.”
나는 기사단을 훑어봤다.
기사대장이 해쓱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미친 공작을 말려줄 줄 알았던 공작부인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쩌면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어깨를 으쓱한 뒤 황금용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열었다.
[숙부님께.
외유가 너무 길어지시는 것 아닙니까?
눈 감아드리려 했지만 이제는 무리입니다.
제국의 방패인 세드나 공작이 한 달이나 영토를 비우다니요.
타국의 내정 간섭이 중죄라는 건 아십니까?
아쿠아로드 왕세녀 체포 배후에 숙부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제국이 곤경에 빠집니다.
전 대륙이 제국을 견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행동은 지나치게 경솔하셨습니다. 여러모로 실망스럽습니다.
마신의 성물도 몰래 감추셨다고 하더군요.
세드나 영지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마신의 성물은 제국의 유물.
그 소유권은 황실에 있습니다. 숙부님께서 납득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마신의 성물을 가지고 조속히 황궁으로 오십시오.
황실의 이름으로 황족 재판을 열려 합니다. 숙부님의 징계는 황족 재판을 통해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은 조카가 아닌 황제로서 쓰는 서신입니다.
숙부님께 마지막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네이선의 편지를 읽고 난 후 살로메디안의 얼굴에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사라졌다.
도자기로 빚은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엔 살기도,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태롭고 외로워 보였다.
“황족 재판이라는 게 뭐죠?”
황실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반역이 아닌 이상 황족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황족의 위엄을 존중하기 위해서지요. 대신 황족 재판에 넘겨집니다.”
“각하께서 왜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목소리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기사단장이 불만스레 답했다.
“항의는 폐하께 하시지요. 소신은 명령에 따를 뿐이니까요.”
“명을 전달하려면 똑바로 설명하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부인. 황족 원로들께서 직접 판결을 내리실 겁니다. 만장일치가 아니면 각하를 처벌할 수 없고요.”
“…….”
“각하께서 무고하시다면 피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예를 다해 모시겠으니, 함께 가시지요!”
대단한 아량을 베푼다는 듯 기사단장이 빈정거렸다.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끈이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감히 내 남편을 죄인 취급하는 건가요?”
순간 내 몸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마력 폭주는 아니었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푸른 불꽃은 분노와 닿아있었다.
분노가 강해질수록 불의 심장은 더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곤 했다.
오늘의 불꽃은 유독 특별했다.
불기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크고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이글거리는 열기 덕분에 살갗이 화끈거렸다.
손가락을 튕기면 주변이 불바다가 될 것 같았다.
“장관이로군.”
살로메디안의 눈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곡예를 구경하는 사람처럼 느긋한 태도였다.
마력이 더 세진 건가? 내가 뭘 했다고?
의구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목숨을 건 훈련을 반복해도 쉬 늘지 않는 게 마력이었다.
마신의 성물을 두르고 목욕하는 것밖에 없는데 왜 마력이 느는 걸까?
휴고에게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기사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뻔했다.
살로메디안이 드래곤이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놀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게 마력 불꽃이라고?!”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황실 기사단은 물론 기사단장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정하십시오, 공작부인!”
“각하! 공작부인을 말려주십시오!”
황실기사들이 살로메디안에게 애원했다.
방금까지 내게 살로메디안을 말려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순식간에 거꾸로가 되었다. 약간은 우스운 마음이 들어 불꽃을 거둬들였다.
“역시 대륙 최강 타이틀은 그대에게 넘겨야겠어.”
살로메디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달아오른 뺨에 손부채질하며 변명했다.
“죄송해요. 좀 흥분했어요.”
“우린 참 닮은 부부야. 안 그런가, 시아?”
살로메디안이 황홀한 미소를 머금었다.
흥분해서 폭주하는 건 닮고 싶지 않은데.
기사단이 몰려들어 죄인 취급하는 건 기분 나빴지만,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한쪽 팔을 턱 올려놓았다.
“우린 그만 돌아가겠다. 너희들도 꺼지도록.”
주눅 든 기사단장이 우물거렸다.
“폐하께서 각하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갈 수 없다 전해라.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내 영지에 전쟁이 터졌거든.”
“내전이라면 벌써 끝났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와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교환했다.
휴고와 바바라에게 순조롭게 적을 해치우고 있다는 전갈은 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는 보고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사실인가?”
거짓이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기사단장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다. 내전은 흑룡기사단이 완벽하게 제압하고 끝이 났습니다.”
“…….”
“대단한 기사들을 수하로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감, 감축드립니다. 각하.”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석연치 않았다.
이렇게 빨리 끝날 전쟁을 시작했다는 말이야? 바보들도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었나?
이번 전쟁의 경우 상대 영지를 노린 점령전 성격이 강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상대 영지를 빼앗을 수 있지만, 패하면 사상자 위로금을 포함한 막대한 전쟁 자금을 물어내야 했다.
지면 피해가 막심하기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점령전인데 이렇게 빨리 도망쳤다고?
상대가 대륙 최강이라는 흑룡기사단이라고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살롬.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굳은 얼굴로 살로메디안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방해꾼들을 죽여도 될까?”
허락만 해주면 금방 처리하겠다는 듯, 살로메디안 주위로 물 화살 수백 개가 떠올랐다.
마력 불꽃을 보고 정신이 쏙 빠진 기사들이 살로메디안의 물 화살에 질겁했다.
“으아악! 물 화살이다!”
“마력 화살을 피한다고 해도 불벼락이 쫓아올 거야!”
고위 귀족들로만 이뤄진 엘리트 집단이라고 들었는데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번쩍번쩍한 제복에 황금용 문장을 달고 잘난 척하지만, 황실 기사단의 실체는 실전 경험이 없는 도련님 집단에 불과했다.
마물 토벌 같은 더럽고 힘겨운 일은 모두 흑룡기사단의 몫이었다.
우리 기사들이 개고생할 때 농땡이를 부렸단 말이지?
우왕좌왕하는 황실 기사들 꼴을 보니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바보 같은 놈들! 자랑스러운 황실 기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기사단장이 부하들을 꾸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싹 없애버리고 싶다.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살로메디안이 부디 굽어살펴 달라는 어조로 말했다.
허공에 떠 있던 물 화살이 기사들의 심장을 조준했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기면 기사들은 물 화살에 벌집이 될 터였다.
“무의미한 살생은 싫지만, 저도 무능하고 무례한 사람들은 딱 질색이에요.”
“역시 우리는 통하는군, 시아.”
“살롬이 죽이면 또 황족 재판 운운할지 모르니까, 마물에게 짓밟힌 것처럼 꾸밀까요?”
내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기사들은 사망 선고라도 받은 사람들처럼 이성을 잃었다.
“살려주십시오, 공작부인! 저희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단장님, 퇴각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상대는 살아있는 마신 부부입니다!”
“여기서 개죽음당할 순 없습니다! 저는 가문의 후계자라고요!”
“닥치고, 날 보호해라! 난 너희들의 상관이다!”
기사단장도 패닉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살로메디안이 물 화살을 거대한 물 망치로 변신시켰다.
“이걸로 찍어버리면 마물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겠지?”
살로메디안이 소년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기사들에겐 낫을 든 사신처럼 보였음은 물론이었다.
내버려 두면 다 큰 남자들이 엉엉 우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손을 내저었다.
“오랜만의 귀환인데 자비를 베풀도록 하시죠. 저분들을 기다리는 가족들도 있을 테니까요.”
오합지졸을 죽이느라 살로메디안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사들을 죽이면 황제가 또 꼬투리를 잡을 테고.
“그대는 너무 착하다. 정말 문제다, 시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은혜를 기억할 줄 알 거예요. 안 그래요, 기사님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황실 기사들을 훑어봤다.
“물론입니다, 공작부인!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 영지를 방문해주십시오. 꼭 보답하겠습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기사단장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마차를 포위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칠까 봐 기사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그럼 우린 이만.”
살로메디안과 함께 다시 마차에 오르려는데 기사단장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공작부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요?”
“송구합니다만 폐하의 친서를 드려야 해서…….”
“친서라면 이미 받았는데요?”
불쾌한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를 흔들었다.
기사단장이 품에서 또 다른 편지를 꺼냈다.
편지 중앙엔 살로메디안이 받은 것과 똑같은 황금용 문장이 찍혀있었다.
하지만 금박을 입힌 분홍색 봉투가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폐하께서 공작부인 앞으로 남기신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로메디안이 황금용 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낚아챘다.
그리고 북북 소리가 나도록 봉투를 뜯어버렸다.
제 몸이 찢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사단장이 사지를 떨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은 따로 있군.”
편지를 읽는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 *
[그리운 아이시아 님께.
아쿠아로드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 되셨습니까?
핍박받던 고국으로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아이시아 님께서 고생하실 걸 생각하면 저 역시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룻밤이면 아쿠아로드를 정복하실 수 있으면서 지난하고 어려운 방법을 택하시다니요.
그것도 아이시아 님을 내친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서…….
아이시아 님의 고결한 성품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아이시아 님을 탄생시켰다는 것만으로 아쿠아로드는 분에 넘치는 영광을 가진 겁니다.
그 영광을 지키지 못한 것 또한 그들의 운명이겠지요.
아쿠아로드에서 아이시아 님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국 황족에게 건방진 소리였지만, 아이시아 님은 척박한 영지를 책임지는 공작부인으로 남기엔 아까운 재목이십니다.
아이시아 님께서는 한 나라의 국왕이 되고도 남으실 인재시지요.
이 사실을 저만 아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이시아 님께서 건국 기념 파티에 참여해주신다면 제국 귀족들이 아이시아 님의 놀라운 재능을 알게 될 겁니다.
부디 걸음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을요.
아이시아 님께서는 제 초대에 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죠.
이번 기회에 아이시아 님께 제국 황실 요리의 진수를 맛보여드리겠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숙부님의 죄를 사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아이시아 님은 정이 많은 분이시니, 못 이기는 척 제 뜻에 따라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존경을 담아 네이선 씀.]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