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50)

36

* * *

안전하게 도서관을 빠져나온 뒤 델마와 재회했다.

양팔이 결박된 조르주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내가 붉은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밤하늘로 짜낸 비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흑발이 쏟아졌다.

날 알아본 조르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델마가 내 앞에 푸른 상자를 내밀었다.

“이 안에 진짜 예언서가 들어있다는 건가요?”

조르주에게 물었다. 그가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으으읍!”

“소란 일으키지 말아요.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진 않을 테니까.”

델마가 조르주의 턱밑에 단도를 들이댔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조르주가 소리를 낮췄다.

“으으으…….”

“델마. 재갈을 풀어줘.”

델마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내 명령에 따랐다.

가쁜 숨을 내쉬던 조르주가 원망을 담아 날 올려다봤다.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왕세녀 전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신을 신임할 수 없으니까요.”

“전하께 예언서의 필사본을 전달한 것은 접니다!”

조르주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예언서를 전달했는데 왜 핍박하느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필사본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예언서의 원본입니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상대는 역사학자들의 우두머리. 테레사와 결탁해 나와 왕국의 운명을 바꾼 인간이었으니까.

“억울합니다, 전하. 제가 보여드린 내용 그대롭니다!”

“금고를 열어요. 필사본으로는 테레사의 죄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테레사를 대륙 법정에 세우시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그럼 이 나라는 무너집니다!”

조르주의 말에 조소가 터져 나왔다.

“어떤 나라를 말하는 거죠? 테레사가 곧 나라라는 뜻인가요?”

“!”

“아니면, 테레사 편에 선 역사학자들의 나라가 무너진다는 겁니까?”

조르주의 턱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나라라면 얼마든지 무너뜨려야죠. 하지만 아쿠아로드는 무사할 겁니다. 아쿠아로드에 사는 백성들도요.”

“테레사는 전하의 상상보다 훨씬 무서운 여자입니다.”

“당신은 계속 무서워하세요. 저는 복수할 테니까.”

나는 그에게 싸늘하게 일갈했다.

늙은 역사학자가 비틀거렸다.

델마가 조르주의 품을 뒤져 열쇠를 찾았다.

나도 보관하고 있던 도서관장의 열쇠를 꺼냈다.

“그 열쇠를 어떻게 전하께서 가지고 계십니까?”

조르주가 침을 튀기며 물었다.

“설마 암살자를 부린 것이 전하십니까?”

“…….”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복수를 원하셔도 그렇지, 무고한 이들을 암살하시다니요! 그런 천인공노할……!”

조르주의 말에 내 눈빛이 달라졌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닥쳐.”

감정이라고는 담기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조르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누가 무고하고, 누가 노한다는 거지?”

“!”

“테레사와 당신 역사학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입에 올리는가?”

마력과 함께 왕세녀 시절의 위엄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때보다 더 고결한 기운이 서려 있다고 자부했다.

나는 살아있는 마신의 아내, 세드나 공작부인이었으므로.

“테레사는 대역 죄인이다. 왕실의 피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매춘부의 딸이 왕녀를 사칭했으니.”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악에 찬 조르주가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당신이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

“학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냔 말이다!”

학자의 자존심이 남아 있다는 건가.

겁먹은 개처럼 내 눈치를 살피던 조르주의 표정이 조금은 결연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말씀드리지요.”

에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자네는…! 촉망받던 신관이 왜 여장을 하고 있는 거지?”

조르주의 물음에 에단이 씁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붉은 입술연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에단이 말했다.

“딸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 * *

밤사이 아쿠아로드 전역에 벽보가 붙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벽보 앞으로 몰려들었다.

벽보에 적힌 내용은 경악, 그 자체였다.

“예언서가 가짜였다고?”

“폐왕녀가 저주의 씨앗이 아니란 말이야?”

“테레사가 가짜라는 건 또 뭐지?!”

“누가 좀 읽어줘요! 난 까막눈이란 말이에요!”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외쳤다.

멀쑥한 차림의 사내가 문맹인 여인들을 위해 큰 소리로 벽보를 읽어 내려갔다.

“5년 전 아쿠아로드를 뒤집어 놓았던 예언서는 모두 가짜다.

악녀 테레사가 헬레나 왕비와 아이시아 왕세녀를 모함하기 위해 계략을 부린 것이다.

왕세녀 자리를 차지한 테레사는 떠돌이 신관과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다.

왕족도 귀족도 아닌 테레사에게 국왕과 온 백성이 농락당했다.

위대한 예언자였던 아발론의 진짜 예언서 원본은 아래와 같다.

흑발, 적안을 가진 희망의 씨앗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것이다.

부정한 학자들과 가짜 왕족이 아쿠아로드를 역사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허나 슬퍼하지 말라. 가짜 왕족은 처형될 것이고, 새 나라의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예언서 내용이 밝혀지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게 진짜 예언서라고?!”

“아직 안 끝났잖아! 마저 읽으라고!”

벽보를 읽던 사내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폐위된 아이시아 왕세녀는 크로티무스 제국의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었다.

제국 황족이 되었음에도 아쿠아로드 백성들을 위해 테레사의 악행을 밝히고 있다.

성녀 헬레나 왕비의 딸. 적통 왕세녀. 예언서에 등장한 흑발 적안의 희망.

그대들은 매춘부의 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의 편에 설 것인가?”

벽보는 물음으로 끝을 맺었다.

벽보는 아쿠아로드 최고 권력자인 테레사를 모욕했다.

심지어 테레사의 근본마저 부정하고 있었다.

사실이든 날조든, 벽보의 위력은 대단했다.

흥분한 이들이 침을 튀기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예언서가 가짜일 리 없잖아?! 학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학자들이 테레사랑 짠 게 아닐까요? 자기들이 나라를 멸망시킬 징조로 몰릴 테니까요!”

“헬레나 왕비님이 살아계실 때가 좋았어! 테레사 때문에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매춘부의 딸이 국왕이 된다니! 세금 올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가!”

벽보가 퍼지면서 아쿠아로드 전역이 거대한 솥처럼 들끓었다.

그동안 쌓여있던 울분이 폭발한 거였다.

왕실 기사단과 경비대가 총동원되어 벽보를 뜯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벽보를 유포하거나 입에 올린 이들을 체포했다.

그럴수록 벽보는 널리 퍼졌다.

벽보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분노에 찬 백성들의 요구가 높디높은 성벽을 넘었다.

“테레사가 진짜 왕족이라는 걸 증명해라!”

“진짜 예언서를 공개하라!”

“역사학자들을 재판정에 세워라!”

벽보를 거짓 낭설이라 낮잡아봤던 귀족들도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브리니티는 매음굴의 싸구려 매춘부였어. 브리니티의 시녀들이 제 입으로 떠들어댔잖아?”

“테레사는 폐하와 닮은 구석이 없지요. 아이시아 님은 흑발일 뿐이지 눈매가 젊은 시절 폐하를 쏙 닮으셨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테레사 측근에서 권력을 독점했던 것도 이상하오.”

“귀족들을 핍박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가짜 예언서를 숨기려고!”

귀족들은 테레사의 천한 출신을 못마땅해했다.

테레사를 왕세녀로 떠받든 건, 헬레나 왕비의 가문처럼 멸문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벽보는 역병처럼 번졌다.

테레사에게 진실을 촉구하며 백성들이 거리를 행진했다.

귀족들이 앞다투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이시아 왕녀님을 모셔오자!”

“아이시아 님이야말로 아쿠아로드를 구할 영웅! 희망의 씨앗이시다!”

“테레사를 벌하고 아이시아 님을 국왕으로 추대하자!”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귀족들의 요구는 테레사를 흔들기 충분했다.

* * *

두 개의 열쇠 구멍에 두 개의 열쇠를 넣었다.

찰칵, 맑은 소리와 함께 푸른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 수백 년 전 작성된 진짜 예언서가 담겨 있었다.

양피지의 질감도, 아발론의 필체도 5년 전 내가 봤었던 예언서와 똑같았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였다.

“군데군데 지워진 글씨가 없잖아요? 희망의 씨앗은 또 뭐죠……?”

충격적인 진실 앞에 분노가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숨을 뱉는 것도 들이마시는 것도 잊어버렸다.

키산드라의 말이 맞았다.

테레사는 단어 몇 개를 바꾸거나 지워서 내용을 완전히 틀어버렸다.

나는 저주의 씨앗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의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학자들과 테레사였다.

“사라진 예언서를 테레사가 발견했다는 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죄책감으로 물든 얼굴로 조르주가 입을 열었다.

테레사의 정체를 알게 된 조르주는 만백성 앞에서 역사학자들의 죄를 고백하기로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에메랄드 린삼이 없었다면 그를 설득하기 어려웠을 거였다.

조르주의 딸은 사지가 썩어 들어가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르윈이 준 에메랄드 린삼 덕분에 호전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조르주의 딸을 위해서 평생 에메랄드 린삼을 제공하기로 했다.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조르주는 결심을 굳혔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질 테니 다른 역사학자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고마워요. 바비 덕분에 조르주를 설득할 수 있었어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에메랄드 린삼을 챙겨줬던 바바라에게 감사하며 조르주에게 물었다.

“왜 반만 맞다는 건가요?”

“예언서는 사라졌었던 것이 아닙니다. 역사학자들이 숨겼던 것입니다.”

“뭐라고요?!”

“아발론 국왕의 예언서는 사라진 적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에 내놓지 못한 것뿐이지요.”

“일부러 숨겼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수백 년간 사라졌다고 알려진 예언서가 숨겨진 거였다니.

그것도 진실을 탐구해야 할 학자들 손에.

내 눈에 담긴 경멸을 읽었는지 조르주가 짓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언서가 등장하면 학자들은 떼죽음을 당했을 겁니다.”

“그래서 테레사의 범죄에 가담했다고요?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죄를 부정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하오나…….”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차갑게 조르주의 말을 잘랐다.

조르주가 내 발밑에 엎드렸다.

“죄송하다는 말로 부족합니다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내 혈족들은 당신의 사과를 듣지 못해요.”

“전하!”

“당신의 사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조르주의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늙은 몸뚱이를 떨며 조르주가 고백했다.

“흑발 적안을 가진 왕녀님이 태어나셨을 때, 저희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 것이지요.”

“테레사가 학자들의 비밀을 알고 협박한 거군요.”

“테레사는 고대 마법어에 능통합니다.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는데 악마적인 재능이 있고요.”

“…….”

“악마가 테레사에게 재능을 줬다면, 그건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모험 정신일 겁니다.”

매춘부의 딸에서 왕의 서녀가 되었음에도 테레사는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면 뭐든지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가짜 예언서를 만들지 않으면 진짜 예언서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고작 14살짜리 아이가…….”

“테레사는 7살 때 아버지를 버리고 가짜 왕녀가 되기로 한 애예요.”

“폐하의 친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테레사는 하늘색 머리칼과 물의 마력을 가졌으니까요.”

염색약으로 만들어진 하늘색 머리카락에 모두가 속았다.

나는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소중한 이들을 잃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예언서를 숨긴 역사학자들? 예언서를 이용한 테레사? 예언서만 믿고 날 쫓아낸 사람들?

추악한 편견에 승자는 없었다.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딱 한 사람, 테레사만 빼고.

“세드나 공작령에서는 어떤 연구를 한 거죠?”

내 물음에 조르주가 깜짝 놀랐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머니께서 당신과 같이 유학하셨다는 것도 알아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왜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귀국했나요?”

“실현이 불가능한 가설이었기 때문입니다.”

“?”

“저는 마신의 탄생을 연구했습니다. 물과 불을 합칠 수 있다면 또 다른 마신이 탄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었죠.”

“물과 불을 합친다고요?”

순간 내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신의 성물을 두르고 욕조에 들어갔을 때, 전신을 휘감았던 전혀 다른 성질의 마력을.

물과 불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힘을.

찰나에 불과했지만 내 안에서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힘이 하나가 되었다.

그럼 나도 새로운 마신 후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못 들은 거로 해주십시오. 물과 불을 합칠 방법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조르주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불쑥 튀어 오른 영감을 지우지 못했다.

살롬은 물 속성이 되면서 계약자 자격을 잃었어. 놀라운 치유력도 잃었고. 만약 마신에게서 한 가지 속성을 빼앗을 수 있다면… 마신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가설에 불과했지만 심장이 욱신거렸다.

온통 새까맣던 동굴 속에 빛줄기가 비치는 느낌이었다.

“당신의 논문을 보여주세요. 전부 다요!”

* * *

벽보를 붙이자는 건 델마의 생각이었다.

“증거가 있다고 해도 여론을 움직이지 못하면 테레사를 실각시킬 수 없습니다.”

테레사는 아쿠아로드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테레사를 재판정에 세운다 해도 국왕이 죽으면 끝이었다.

테레사는 바로 즉위하게 될 것이고, 타국의 황족인 내가 아쿠아로드의 국왕을 벌하는 건 불가능했다.

진실을 밝히라는 백성들의 요구도 반역으로 몰면 그만이었고, 테레사라면 분명 그리하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었다.

“여론은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불길과 같다. 시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살로메디안은 델마의 제안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가짜 예언서에 휘둘려 나를 쫓아낸 아쿠아로드인들을 믿지 않았다.

증오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살롬, 시간이 없어요. 국왕이 살해당하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해요.”

에단의 동기생인 치료 신관이 국왕의 주치의 중 한 명이었다.

최근 국왕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치료 신관은 조심스레 중독 가능성을 밝혔다.

대륙 재판정에 테레사를 끌고 갈 수 있다 해도, 촉박한 시간이 문제였다.

“테레사에게 반격할 틈을 줘선 안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벽보가 최선이에요.”

“벽보를 붙일 인력이 필요할 텐데?”

살로메디안의 질문에 델마가 차분하게 말했다.

“에단을 찾는 걸 도왔던 이들이 우리와 함께할 겁니다.”

“정보 길드 쪽 사람들이라고 했지?”

내가 물었다.

“암흑가 인간들이라 꺼려지십니까?”

델마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다. 숨기고 싶은 비밀을 발각당한 사람처럼.

델마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에단을 찾지 못했을 거였다.

에단이 없었다면 진짜 예언서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괜찮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은 똑같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실행해야 합니다.”

델마는 적극적이었다.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엄습했지만 델마의 충심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시아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바로 귀국하겠다.”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석연치 않아 했지만, 마지못해 찬성했다. 영지를 비운 지도 벌써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좋아. 벽보를 써서 진짜 예언서를 알리자!”

“전하께서 건재하시다는 것도 밝혀야 합니다.”

델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가의 손을 빌려 벽보는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나갔다.

내가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어 영지를 다스린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테레사의 악행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날 지나치게 포장한 것은 마음에 걸렸다.

“죽어가는 영지를 살려낸 구세주, 가엾은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지도자…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요, 살롬?”

“전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평범한 인간이에요. 서사시에나 나올 법한 성녀가 아니고요!”

구세주니, 천사니, 하는 말은 공작령에서 수없이 들었다.

아쿠아로드에서까지 그렇게 불리자 못 견디게 껄끄러웠다.

과장된 찬사를 진실이라 주장하던 살로메디안이 폭발한 것은 귀족들 때문이었다.

“감히 지들 맘대로 내 아내를 아쿠아로드 국왕으로 만들겠다고!”

이번에는 내가 살로메디안을 다독여야 했다.

“화 푸세요, 살롬. 그냥 하는 말일 거예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저주의 씨앗이라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테레사를 벌하려면 귀족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들이 그대를 빼앗아간다면?”

“저에겐 국왕이 될 마음도, 자격도 없어요. 제집은 공작저인걸요.”

내가 말에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정말인가?”

“왜 그렇게 물으세요? 설마 절 못 믿으시는 거예요?”

장난처럼 한 말이었는데 침묵이 돌아왔다.

어색한 정적 뒤에 살로메디안이 대답했다.

“가끔. 그대는 내게만 다정한 사람은 아니니까.”

“!”

“내게만 다정했으면 좋겠는데… 그대는 아쿠아로드인들에게도 공평하게 다정하지 않나? 그대의 백성도 아니거늘.”

쉰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발끝부터 밀려 올라왔다.

살로메디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공작부인으로서의 의무보다는 내 복수를 더 중요시했다.

토벌과 정복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두고, 복잡하고 힘겨운 길을 택했다.

아쿠아로드와 아쿠아로드 백성들을 위해서.

그 때문에 세드나 공작령 사람들은 뒷전이 됐다.

영주를 포함한 흑룡기사단의 최정예가 한 달째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로메디안이 날 못 믿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서운했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웠다.

내 욕심이 너무 큰 걸까?

“시아. 정말 아쿠아로드 국왕이 되는 건 아니겠지?”

다짐을 받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지 살로메디안이 집요하게 물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라는 건 테레사가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뿐이에요.”

“그럼 테레사를 잡으러 가자.”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그와 함께 있는데도 어쩐지 외로웠다.

그의 팔을 살짝 밀어내면서 답했다.

“그 전에 대비책을 만들어야 해요.”

“대비책이라니?”

“모든 계획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야죠.”

내 시선이 왕궁 쪽을 향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추억과 지옥이 뒤섞인 곳.

죽기 살기로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테레사는 왕궁 알현실에서 귀족원 수장을 만났다.

수장만 오는 줄 알았는데 귀족원을 대표하는 대귀족들이 몰려왔다.

‘이것들이 나를 압박하러 왔나? 건방진 놈들.’

명문가 당주들의 면면을 살피며 테레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만백성 앞에서 진실을 밝혀주시길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내가 왜 허무맹랑한 거짓 소문을 상대해야 하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술렁거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인가요?”

“우매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해시키는 것 또한 왕실의 책무입니다.”

수장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테레사는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었다.

그 교훈을 준 사람이 아이시아와 살로메디안이었다.

“반역자를 잡을 궁리나 하시지요.”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반역자가 아이시아 님이십니까.”

“아이시아 님? 폐왕녀에 대한 존경심이 그리 강한 줄 몰랐네요.”

테레사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수장이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예언서가 날조되었다면 아이시아 님은 복권되어야 마땅합니다.”

“날조라니. 황당하군요.”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역사학자들이 공범이라면.”

귀족원 수장은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예언서 때문에 헬레나 왕비님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필히 밝혀야 합니다.”

“예언서에 손을 댄 자들이 있다면 엄히 벌해야 할 것입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죽어 마땅합니다.”

점잖을 떨면서 귀족들이 테레사의 반응을 관찰했다.

‘아주 자신만만하군. 날 떠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증거를 가진 걸까.’

테레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리를 꼬았다.

쥐새끼처럼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기세등등해진 까닭이 궁금했지만,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즉위 즉시 싹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예언서가 가짜라는 증거를 가지고 오세요. 역도들로 몰리기 싫다면.”

귀족들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장이 귀족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지금 저희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누가 누굴 협박하는지 모르겠네요.”

“귀족원이 바라는 건 진실뿐입니다.”

“진실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요? 나는 거짓이고?”

테레사가 코웃음을 쳤다.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지 수장은 쉬 물러서지 않았다.

“진짜 예언서라고 발표했던 역사학자들을 모아주십시오. 소신이 직접 심문하겠습니다.”

“…….”

“아발론 도서관에 보관된 예언서 원본도 열람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전하를 둘러싼 의혹이 모두 해소될 겁니다.”

“불충하군요! 아바마마 전하께서 위독하신 이때, 반역자들 농간에 놀아나겠다니!”

“거리낄 것이 없으시다면 당당하게 증명하시면 됩니다. 테레사 님의 푸른 머리칼도요.”

수장을 비롯한 귀족들의 시선이 테레사를 향했다.

송충이 100마리가 기어가는 듯한 간지럼이 두피에서 치밀었다.

“나, 나는… 피하는 것이 없습니다.”

테레사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톱으로 두피를 박박 긁고 싶은 욕망 탓에 손끝이 떨렸다.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귀족들이 테레사를 빤히 바라봤다.

의심스런 눈초리가 간지럼을 부채질했다.

피가 날 때까지 긁어도 잦아들 것 같지 않았다. 목구멍이 마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전하께서는 국사를 돌보시느라 많이 피곤하십니다.”

테레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폴이 축객령을 내렸다.

귀족들이 즉각 반발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네!”

“전하마저도 쓰러지시면 이 나라는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

“살아있을지도, 죽었을지도 모르는 폐왕녀에게 맡길 계획은 아니겠지요?”

폴의 날카로운 물음에 귀족들이 물러났다.

물론 그냥 떠난 것은 아니었다.

“국내 문제 때문에 대륙 재판소에 갈 마음은 없습니다. 하루빨리 전하께서 결단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 *

간지럼 치료제를 바르고, 살아있는 장난감 하나를 곤죽으로 만든 뒤에야 테레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테레사가 폴에게 말했다.

“아이시아가 아쿠아로드에 있는 모양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르주 늙은이가 진짜 예언서를 들고 사라졌어. 병든 딸과 함께.”

“에메랄드 린삼으로 조르주를 꼬여낸 걸까요?”

“공작부인이 되더니 잔대가리가 많이 늘었네.”

여유로운 척했지만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르주가 나서서 역사학자들의 죄를 고백한다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될 거였다.

“더 큰 문제는 내 출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는 거야.”

“천벌을 받을 놈들! 테레사 님이 가짜 왕족이라니!”

“…….”

“전하의 핏줄을 의심하는 건 명백한 반역입니다! 그자들을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평소의 폴답지 않게 침착함을 잃었다.

폴은 테레사가 예언서를 조작했다는 건 알지만, 가짜 왕녀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심한 간지럼증에 시달린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염색약 부작용이라는 것도 몰랐다.

‘진실을 다 알고도 폴이 내 편에 설까? 아니면 배반할까?’

문득 폴의 충성심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때였다.

“일단 어머니의 시녀들을 죽여야 해.”

“벽보를 붙인 놈들을 먼저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시아가 증인을 조작할 가능성이 커. 어머니 시녀라면 금화 몇 푼에 거짓 증언을 술술 내뱉겠지.”

“폐왕녀에게 포섭당하기 전에 처리해야겠군요.”

“폴만 믿을게.”

“영광입니다. 전하.”

테레사에게 독초 사용법을 배운 폴은 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폴이 천한 시녀들을 처리하고 나면 다음은 왕비 차례였다.

테레사는 친모를 자살로 꾸밀 작정이었다.

‘그러게 입조심했어야지, 브리니티.’

테레사는 지능이 낮고 욕심만 많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이시아의 공격에 잠시 휘청거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테레사에겐 옥새가 있었다.

군사들을 이끌 권리도, 국경을 폐쇄할 힘도 있었다.

“나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야. 국경을 넘지 않고도 아이시아를 납치할 수 있으니까.”

“세드나 공작이 함께 있다면요?”

“세드나 공작은 귀국할 수밖에 없어. 곧 내전이 벌어질 테니까.”

테레사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내일이면 생니콜 자작과 발초프 후작이 첫 번째 계획에 돌입한다.

아무리 아이시아가 중요하다고 해도 살로메디안은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영지를 내팽개친 공작을 황제가 용서할 리 없었으니까. 호호호.”

테레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높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폐왕녀를 잡을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숨어 다닌 걸 보면 변장을 한 것 같은데.”

“아이시아 말고 조르주의 딸을 찾아.”

“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니까 어딜 가든 눈에 띌 거야. 조르주는 딸과 함께 있을 거고.”

“아……!”

“조르주만 없애버리면 아이시아가 가진 진짜 예언서도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야.”

“과연. 현명하십니다, 전하.”

세드나 공작이 본국으로 떠나고, 조르주까지 사라진다면?

아이시아는 테레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었다.

‘자존심이 대단한 계집이니까 정면 돌파를 선택하겠지. 제 발로 날 찾아올 거란 말이야.’

그때 아이시아를 잡으면 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난감과 마신의 성물이 손에 들어오는 거였다.

이틀 뒤, 테레사의 예상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 * *

크로티무스 제국에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이 대륙을 휩쓸었다.

지상 최강의 기사 세드나 공작이 생니콜 자작령을 먼저 공격했다고 했다.

생니콜 자작이 공작부인을 납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부인했지만, 세드나 공작은 자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생니콜 자작이 반격을 시작했고, 세드나 공작의 폭거에 맞서기 위해 귀족들이 힘을 보탰다.

이것이 거짓 소문의 요지였다.

“전하! 조르주의 딸을 잡았습니다! 조르주도 함께요!”

폴이 병든 여자와 그녀를 간호하던 조르주를 끌고 왔다.

테레사는 추악한 흉터로 뒤덮인 여자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여자의 몸에서는 형용할 수 없이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더러운 것들을 첨탑에 가둬!”

딸을 인질로 잡은 덕에 조르주가 순순히 자백했다.

“세드나 공작은 어디 있지?”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벌하겠다고 아쿠아로드를 떠났습니다.”

“아이시아는?”

“귀족원과 접촉 중입니다. 내일 왕궁으로 쳐들어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꽤 당돌하네.”

“귀족들이 자신을 국왕으로 추대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전하의 죄를 밝히겠다고 합니다.”

정정당당이란 말에 테레사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계략이나 권모술수 따위 없어도 된다 이거지? 모두에게 떠받들리면서 깨끗한 꽃길만 가겠다고? 여전히 건방진 년이야!’

테레사는 기사들을 풀어 귀족원의 동태를 살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귀족들이 비밀 회합을 열고 있었다. 사병들도 무장시켰다.

조르주의 말대로 아이시아와 함께 왕궁으로 쳐들어올 계획인 듯했다.

모두 테레사의 예상대로였다.

이제 국왕만 죽어주면 모든 게 완벽했다.

즉위식 전이라도 국왕의 사망과 동시에 테레사는 새 왕이 된다.

명분이 무엇이든 왕명으로 아이시아와 귀족들을 체포하면 그만이었다.

테레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국왕의 침전을 찾았다.

먹구름이 보름달을 가리고 있었다. 누군가 죽기에 딱 좋은 밤이었다.

“아바마마!”

“…….”

“테레사가 귀한 약을 가져왔어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바마마를 위해서요.”

품 안에서 독약을 꺼내며 테레사가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침전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조용히 간호하고 싶다는 핑계로 주치의와 호위기사는 물론 시종들까지 모두 내보낸 상태였다.

테레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바마마?”

시체보다 창백한 낯빛을 가진 남자가 지나치게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었다.

한때는 나라를 호령했던 남자.

헬레나 왕비 덕분에 잠시나마 성군이라 불리기도 했던 남자.

그가 무력하게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아바마마의 소중한 딸이 전부 해결할 테니까요.”

테레사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독약 병뚜껑을 열었다.

찰랑거리는 흑적색 액체를 국왕의 입술에 떨어뜨리려는 순간, 푸른 불꽃이 테레사의 손을 때렸다.

“꺄악!”

깜짝 놀란 테레사가 독약 병을 떨어뜨렸다.

화끈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누, 누구냐?”

침전은 여전히 적막했다.

난데없이 푸른 불꽃이라니… 환상이라도 본 걸까?

하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커다란 침대 뒤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멎어버릴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테레사가 아랫입술을 떨었다.

“너… 너는……!”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먹구름이 걷히고 창가에 달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검은 비단처럼 새까만 흑발을 늘어뜨린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붉은 눈동자.

얼음 조각처럼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

내장이 얼어붙을 듯한 공포를 느끼며 테레사가 짓눌린 신음을 터뜨렸다.

“아이시아……?”

어떻게 아이시아가 왕궁 안에 있지? 누가 이 계집을 들여보내 준거야?

테레사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시아가 말했다.

“날 들여보내 준 건 너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게 확인을 잘했어야지.”

아이시아가 테레사 앞으로 가짜 흉터가 덕지덕지 붙은 가면을 툭, 던졌다. 조르주의 딸이 가진 흉터와 똑같은.

테레사가 가면을 움켜쥐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날… 속였구나!”

* * *

테레사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조르주와 그 딸은 첨탑에 갇혔을 텐데?”

“왕궁 첨탑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수없이 갇혀봤거든. 네 덕분에.”

“조르주를 통해 거짓 정보를 흘렸구나!”

테레사의 눈에 핏줄이 불거졌다. 속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런 감정 따위에 속상하기도 하겠지.

처형대에 오르면 사소한 것들은 잊게 되겠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속더구나.”

그게 내 솔직한 평이었다.

왕궁에 숨어들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일이 이토록 쉽게 풀릴 줄 몰랐다.

“너는 날 얕잡아 보고 있었어. 내가 네 손바닥 위에 있다고 착각했고.”

“뭣이!”

“넌 내가 변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지. 그 오만함이 오늘의 결과를 만든 거야.”

물론 테레사의 멍청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진짜 예언서를 훔치고, 벽보를 활용해서 테레사를 압박했다.

쫓기는 테레사는 계획을 서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크고작은 실수들을 저질렀다.

본인은 아직 모르겠지만.

“네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새 국왕이 되는 건 나야!”

테레사가 악을 썼다. 여유로운 자세로 내가 물었다.

“왜 새로운 국왕이 필요하지?”

“국왕이 죽었으니 당연히 왕세녀가 뒤를 이어야지!”

“반역자라는 걸 네 입으로 증명하는구나. 테레사.”

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어깨를 움츠린 테레사가 국왕의 침대를 흘낏 바라봤다.

그때 국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꺄아아악!”

그 모습을 보고 테레사가 비명을 질러댔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쿨럭, 쿨럭.”

국왕이 마른기침을 뱉었다.

나와 함께 숨어있었던 델마가 국왕의 입가에 물 잔을 가져다줬다.

“어떻게… 어떻게……!”

테레사가 양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테레사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동자에 노여움을 뛰어넘는 살기가 번졌다.

“날 독살하려 하다니! 더러운 계집!”

국왕의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눈빛도 열일곱 가지 독에 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죽어가던 국왕이 살아난 거였다. 테레사가 숨겨야만 했던 진실을 가지고.

“아쿠아로드 왕좌를 걸고 말한다.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둔 적 없다!”

“아바마마!”

“여봐라. 당장 죄인 테레사를 포박하라!”

왕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전 문이 열렸다.

쏟아지듯 들어온 왕실 기사단이 테레사의 양팔을 붙들었다.

“이거 놓지 못해? 감히 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테레사가 마력을 쓰며 발버둥 쳤지만, 기사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테레사의 입에 쇠로 만든 재갈이 채워졌다.

두 손과 두 발도 결박당했다.

죄인을 묶은 뒤 기사들이 나와 국왕 앞에 부복했다.

“국왕 폐하와 아이시아 왕녀님을 뵈옵니다!”

뜨겁고 꾸덕꾸덕한 무언가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런 말을 듣자고 돌아온 것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어머니께서 지금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까?

장하다고, 잘 버텨왔다고 칭찬해주실까?

이거면 됐다고. 이제 좀 쉬라고 말씀해주실까.

밀려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며 뒤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국왕에게 사용하던 독을 늘린 건 테레사의 실수였다.

주치의였던 치료 신관이 중독 가능성을 처음으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치료 신관은 에단의 친구였다.

그리고 내겐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는 에메랄드 린삼이 있었다.

왕궁에는 외세의 침략을 대비해 만든 비밀 통로가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길이었다.

국왕을 돕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살려야 테레사의 즉위를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이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치료 신관이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 두통에 시달리신 건 테레사 님과 단독 면담을 하신 후였습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찍힌 상처가 머리에서 발견됐습니다.”

“못이나 칼 종류인가요?”

“못보다는 납작하고 칼보다는 둥급니다. 펜촉 모양이라 할 수 있겠네요.”

기억 제거 마도구! 그 부작용이 분명했다.

테레사가 그 위험한 물건을 국왕에게도 사용한 거였다.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면 국왕과 단둘이었다는 걸 들켰을 리 없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도구를 쓰면서까지 지우고 싶었던 국왕의 기억은 뭐였을까.

내전 소식을 듣고 심란해하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시아, 왜 고민하는 건가? 우리에겐 기억 재생 마도구가 있는데.”

“부작용이 심하잖아요.”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네?”

“린삼을 주지 않으면 국왕은 어차피 죽는다. 멀쩡한 인간이라면 나라를 위해 헌신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할 거다.”

“…….”

“뭐, 멀쩡한 인간이 하나뿐인 딸을 그리 내치진 않았겠지만.”

살로메디안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리고 내게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던 마도구를 건네줬다.

고민 끝에 나는 기억 재생 마도구를 국왕에게 사용했다.

죄책감은 갖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테레사에게 심한 짓을 당했을 때도, 국왕은 미안해하지 않았으니까.

“아이시아!”

정신이 들자마자 국왕이 내 이름을 불렀다.

울먹이는 목소리와, 슬픔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날 불편하게 했다.

“내 딸 아이시아!”

“내가 왜 당신 딸입니까? 죽어버려야 할 저주의 씨앗 아닌가요?”

나는 5년 전 아버지를 잃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는 남자는 나와 무관한 인간이었다.

“못난 아비를 용서해라. 아이시아! 아니, 용서하지 말아라……! 아아, 아이시아!”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던 국왕이 혼절했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이 남자가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날 이용하려고? 아니면 방심하게 하려고?

의심으로 똘똘 뭉친 내게 치료 신관이 말했다.

“정밀 검사해본 결과 폐하의 몸 안엔 열일곱 종류의 독이 쌓여있었습니다.”

“!”

“최소 10년 이상 독에 당하셨습니다.”

“테레사가 입궁한 직후겠네요…….”

“진작 밝혀냈어야 했는데 정말 송구합니다.”

“어떤 종류의 독인지도 아십니까?”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독, 원초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독, 금단 증세를 일으키는 독, 세 종류밖에 밝히지 못했습니다.”

순간 가면 같던 무표정이 무너졌다.

땅이 꺼지는 듯한 감각에 무릎이 떨려왔다.

믿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전부 독 때문이었다는 거야? 술과 여색에 빠진 것도, 나와 어머니를 버린 것도? 전부 테레사 때문이었다고?

생살을 찢으면 이렇게 아플까. 까마득한 통증과 함께 현기증이 엄습했다.

변해버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는데.

이제 와서 전부 독 때문이라고?

「마력이 없어도 괜찮단다. 심장도 아비가 어떻게든 고쳐주마. 사랑하는 내 딸, 아이시아.」

날 무릎에 앉히고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시던 아버지.

「누가 네 아비더냐? 저주받은 계집 주제에. 쓸모가 없으면 인내라도 있어야지!」

날 노예 취급하며 테레사의 학대를 부채질하던 남자.

둘 사이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아. 후회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자.”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쌌다.

“이 남자가 없어도 테레사를 무너뜨릴 수 있어. 그러니 그대가 편한 선택을 해라.”

“에메랄드 린삼을 줄래요.”

“괜찮겠나?”

“저는 5년 전 아버지를 잃었어요. 아쿠아로드 국왕은 우리에게 유용한 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러니 흔들릴 이유도 후회할 이유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었다.

“이것으로 생명은 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에메랄드 린삼이 더 필요하실 겁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치료 신관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국왕을 해독하느라 에메랄드 린삼을 다섯 뿌리나 사용했다.

“린삼 값을 지불하도록 하세요. 적당한 값만 치른다면 앞으로도 린삼을 팔도록 하죠.”

독을 몰아냈다고 해도 마도구 부작용을 없앨 수 없었다.

기억 재생 마도구의 부작용은 기절이었다.

디에고도 쓰러졌었지. 살롬 때문에 무서워서 기절한 줄 알았는데. 마도구 부작용이었어.

마도구를 제 몸에 실험해본 디에고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실험체가 내 눈앞에 있었다.

기억 제거 마도구와 재생 마도구를 모두 사용해본 당사자.

때때로 의식을 잃긴 했지만 국왕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눈빛도, 표정도 내가 어릴 적 기억하던 아버지와 흡사했다.

몹시 늙고 병들긴 했지만 말이다.

“브리니티의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테레사가 떠돌이 신관의 딸이라는 것과 염색약으로 머리칼을 물들였다는 것을.”

그는 내게 변명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편지를 믿으셨나요?”

“처음엔 믿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요?”

“테레사의 수족이 된 기사단이 아닌 시종장에게 편지 내용을 확인해 보라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

“브리니티의 단골이었던 마도사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염색약을 연구했다는 사실도. 네 마도구 덕에 진실이 더욱 또렷해졌다.”

의아해하는 내게 국왕이 설명했다.

“브리니티를 만났던 그날 밤 기억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떠올랐다.”

“!”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그 여자가 술에 탄 약을 마시고 의식을 잃었으니까. 내 딸은 너 하나뿐이다, 아이시아.”

국왕의 얼굴이 시체처럼 파리했다.

아주 옛날 일까지 세세히 기억난다더니… 디에고의 말이 맞았어.

마도구의 놀라운 효능에 기함했다.

국왕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쉬 입을 떼지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개 그렇듯이.

“이쪽이 테레사의 친부인 에단이에요. 역사 학회장인 조르주는 우리 쪽에서 증언하기로 약속했어요.”

나는 국왕에게 진짜 예언서를 보여주고 에단과 조르주를 소개했다.

쾌차하지 못한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진실이었다.

다시 혼절했다가 깨어난 국왕은 10년쯤 더 늙은 것 같았다.

“너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아이시아.”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전하.”

“그래. 나는 평생 부끄러워하면서 홀로 죽어갈 것이다. 죽어서도 헬레나를 만나지 못하겠지. 그녀는 천국에 있을 테니까…….”

영혼의 불빛이 꺼진 멍한 눈으로 국왕이 창밖을 응시했다.

문득 이 남자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나한테 귀한 약초를 쓰지 마라.”

“무료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네가 준 약초를 먹을 자격이 없다.”

“…뜻대로 하십시오.”

“테레사와 그 일당들은 국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다. 그것만은 네게 약속하마.”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 덕분에 귀족원이 사병을 일으켰다. 테레사를 따르는 왕실 기사단에게는 명분이 없으니 끝까지 저항하지는 못할 것이다.”

“테레사의 악행도 드디어 끝이로군요.”

테레사가 처형당하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제국 귀족들이 살로메디안에게 누명을 씌워 내전을 일으켰다.

아직 가설에 불과했지만 마신을 없앨 실마리도 찾았다.

키산드라가 새로운 마신이 되어버리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가야 했다.

“너는 어찌할 계획이냐?”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이곳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남자는 내 가족이 아니었다.

아내도, 자식도, 충신도 없는. 그저 나와 피만 이어졌을 뿐.

“이런 말 하는 것이 염치없지만… 부디 건강하거라, 아이시아.”

바라보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듯 국왕은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 나라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고 부디 행복해지려무나.”

“…….”

“너는 어딜 가도 사랑받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내 딸… 아니, 헬레나의 딸이니까.”

국왕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흔하고 값싼 눈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물 앞에 가슴이 헝클어졌다.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 탓이었다.

「자랑스러운 내 딸. 아이시아!」

「세상에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까! 네 붉은 눈동자는 나라의 보물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어린 소녀의 해맑은 웃음소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기억이 끈질기게 날 괴롭혔다.

얼른 공작령으로 돌아가고 싶다. 테레사니, 후계자니 하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말자. 나머지는 아쿠아로드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데 국왕이 날 불러 세웠다.

“아이시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답해 줄 수 있겠느냐?”

“질문을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우물거리던 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물었다.

“심장은… 네 심장은 다 나은 거냐?”

욱신. 다 나은 줄 알았던 심장이 아파 왔다.

국왕의 질문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밤에 잠은 잘 자느냐? 제국 음식은 입에 잘 맞고? 세드나 공이 네게 잘해주느냐?”

시집간 딸을 걱정하는 아비처럼 그가 물었다.

주름진 뺨에 굵은 눈물이 가로질렀다.

그는 너무 늙었고, 또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외치지 못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묻지 마.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 척이야? 독 때문이었다고? 독에 당한 것도 당신 잘못이야!

난 절대 못 잊어. 어머니와 날 버리던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고!

더 괴로워해.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 죽어.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

끓어 넘치는 분노가 가슴을 두드렸다.

증오로 똘똘 뭉친 말을 내뱉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태어나고 자란 왕궁을 떠나기 전, 단 한 마디를 남겼다.

“심장 발작은 다 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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