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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살로메디안은 바닥만 보고 걸었다.
긴 가발 때문에 목덜미가 근질거렸고, 장신구끼리 부딪히는 짤그락 소리가 거슬렸다.
발에 휘감기는 옷자락도 살로메디안의 분노를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죽고 싶다. 아니, 죽이고 싶군.’
수치스러움 때문에 죽고 싶었던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이시아가 원망스러웠던 것도 처음이었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여장이라니!
“살롬. 화 많이 났어요?”
아이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그대와 말하고 싶지 않다.”
“살롬의 미모가 너무 특출나서 그런 거잖아요. 검댕이나 누더기로도 가려지지 않는다고요.”
“…….”
“누가 그렇게 예쁘게 태어나래요? 여자보다 더 예쁘면 어쩌자고요.”
아이시아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새빨갛게 물들인 탓에 입술이 평소보다 도톰해 보였다.
살로메디안이 사랑해 마지않는 붉은 눈동자도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치장했는데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에서 태어난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한 송이 장미꽃.
자신이 아이시아에게 진심으로 화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살로메디안이었다.
“서두르자. 이런 짓까지 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지.”
체념을 섞어 대답했다.
아이시아의 얼굴의 조금 밝아졌다.
“고마워요. 살롬!”
“대신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그럼요. 일주일을 열흘로 늘려도 좋아요.”
일주일 동안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면서 시간을 늘리다니.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의 해맑음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이시아에게 약속받는 순간부터 살로메디안의 머릿속은 한 가지 질문으로 꽉 찼다.
‘어떻게 하면 일주일을 알차게 쓸까?’
의문은 계획이 되었고, 계획은 또 다짐이 되었다.
그동안 상상으로 만족해야 했던 일들이 차례차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중엔 아이시아가 기겁할 만한 몇 가지 시도도 있었다.
건강을 해치거나 위험한 도전은 아니었다.
사회 규범에서는 살짝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수정할 마음은 없었다.
살로메디안에겐 상상을 현실로 누릴 자격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지레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시아는 언제나 살로메디안의 예상을 뛰어넘는 열정을 보여주지 않았나?
‘일주일 동안 오히려 내가 끌려다닐지도 몰라. 시아는 뜨거운 여인이니까.’
그런 생각조차 미묘한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살로메디안은 두 눈에 힘을 줬다.
수치스러운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기 전에 예언서를 찾아서 탈출해야 했다.
약속된 일주일을 위해서.
“조르주 씨는 연구실에 있을 겁니다. 원래 여흥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에단이 짙은 화장과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아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까지 두 시간 남았으니까 서두르죠. 델마는 망을 봐 줘.”
“맡겨주십시오, 전하.”
아이시아의 명을 받은 델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암살자로 활약해온 덕분일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좋은 몸놀림이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빈센트의 맞수로 충분해. 흑룡에 꼭 필요한 인재야.’
살로메디안도 차츰 델마의 솜씨와 됨됨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델마는 아이시아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주군의 복수를 위해 암살자가 된 충신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델마는 살로메디안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 * *
폭죽도 없고 술도 없었지만, 도서관도 1년에 한 번뿐인 축제에 들뜬 분위기였다.
로즈 곡마단 전 순서는 하프 연주와 시 낭송이었다.
에단이 도서관 관계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와 살로메디안은 조르주를 만나보기로 했다.
순순히 금고 열쇠를 건네줄까? 예언서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 믿어주기나 할까?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등 뒤가 서늘했다.
조르주의 증언과 진짜 예언서만 있으면 테레사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눈덩이처럼 커다래졌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심장을 조여 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데도 불길한 운명이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머니가 말씀하셨잖아. 희망을 잃으면 거기서 끝이라고. 불길한 상상보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게 좋다고.
조르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날 찾아온 경험이 있었다.
키산드라와의 인연까지 더해졌으니 나와 살로메디안을 외면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린 불길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몇 조각 남은 기억 속 조르주의 표정도 찜찜했다.
일그러진 주름살과 하염없이 쏟아지던 눈물. 넓은 챙 모자 아래로 드러난 차가운 눈빛.
나는 왜 예언서 필사본을 들고 온 조르주에게 화를 냈던 것일까?
학자들은 왜 테레사 편을 든 거고?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까마득한 두통이 찾아왔다.
나머지는 조르주를 만나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옷과 가발 때문에 몇 번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무사히 조르주의 연구실을 찾았다.
하지만 연구실 안엔 아무도 없었다.
침묵과 쓰레기로 가득 찬 연구실을 둘러봤다.
조르주는 청소와 거리가 먼 사람 같았다.
“어디에 간 걸까요?”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같지 않다. 펜에 묻은 잉크가 아직 안 말랐어.”
“축제에 관심이 생긴 걸까요?”
“연구실을 수색해보자. 열쇠를 숨겨뒀을 수도 있으니.”
곡마단 차림새로 도서관 안을 휘젓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나는 살로메디안과 함께 주인 없는 연구실을 뒤져보기로 했다.
분류되지 않은 신학 서적과 역사서가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유물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잡동사니도 산을 이루었다.
그 위에 빈 술병과 음식물 찌꺼기가 말라붙은 그릇이 얹어져 있었다.
연구실은 거대한 쓰레기통이었고, 그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지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시아. 귀중품이 있을 만한 곳부터 찾아봐라.”
“그런 곳 자체가 없는데요?”
서랍 안의 묵은 먼지를 쓸어보다가 답했다.
“흐음, 이대로는 끝이 나질 않겠다. 조르주가 열쇠를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그건 아닐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조르주는 도서관장이 암살당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 거예요.”
“하나 남은 열쇠를 숨겨뒀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학자들은 도서관 경내 사택에서 살면서 테레사의 감시를 받는다고 들었다.
가끔 외출하긴 하지만 그 또한 테레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열쇠는 도서관 안에 있을 거예요. 길거리나 사택보다 훨씬 안전하니까요.”
“축제 기간만 빼면.”
살로메디안이 덧붙였다. 나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 치켜떴다.
“그래서 자리를 비운 거 아닐까요?”
“무슨 뜻이지?”
“오늘은 공연이 있는 날이잖아요. 경비가 허술해지는 걸 아니까 미리 피한 거죠.”
살로메디안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도서관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 예언서가 있는 금고일 거예요!”
“그대 말이 맞을 것 같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에 감탄이 서렸다.
그가 싸구려 반지를 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내 아내는 정말 똑똑하군.”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까요.”
괜히 부끄러워진 탓에 어물쩍 말을 돌렸다.
“얼른 금고 쪽으로 가 봐요.”
“그대는 어떤 순간이든 해답을 찾는다. 거침없이 해답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고.”
“살롬…….”
“가끔 그대가 존경스럽다. 대체로 귀엽지만.”
흘러내린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살로메디안이 황홀한 미소를 머금었다.
옅은 화장과 긴 머리칼 때문에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요염해 보였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섹시하면 어쩌자는 거지? 우아하기까지 해!
약간의 패배감을 느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때 조르주의 책 더미에서 익숙한 책등을 발견했다.
“나도 읽었던 책인데?”
조르주의 장서 중에는 물의 여신보다 마신에 관한 책이 많았다.
아쿠아로드 역사서와 크로티무스 제국 역사서도 여러 권이었다.
이상한 것은 신학과 역사학 책 사이에 의술서 한 권이 끼워져 있다는 거였다.
“무슨 책인가?”
“르윈이 제게 처음 건네줬던 의술서예요.”
“…….”
“이 책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약초를 잘못 써서 몇 번 죽을 뻔했지만요.”
나는 웃었지만 살로메디안은 따라 웃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그리 웃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 아직도 생생한 까닭이었다.
절대 추억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의술서를 가져다준 르윈만은 소중했다.
어머니의 주치의였던 남자.
폐왕녀가 된 날 도와준 유일한 사람.
르윈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기억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르윈이 절 보냈습니다! 전하께 이 문서를 전하라고요!」
높은 이명과 함께 도끼로 머리뼈를 내려찍는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조르주는 르윈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
조르주 연구실에 의술서가 있다면, 그것이 내가 받은 의술서와 같다면 르윈의 유품일 확률이 컸다.
의술서를 꺼내서 책장을 넘겼다.
책장 사이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금고 열쇠일까?
희망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금방 가라앉았다.
의술서 사이에서 떨어진 건 금고 열쇠가 아니라 낡은 봉투였다.
기대심이 안타까움으로 바뀔 때쯤, 익숙한 글씨체가 눈을 찔렀다.
“르윈의 필체예요!”
르윈의 편지가 의술서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보다, 편지의 수신인이 나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를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편지 겉봉에 ‘아이시아 왕녀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내게는 아직 읽지 않은 두 통의 편지가 있었다.
하나는 공작저에, 남은 하나는 조르주의 연구실에.
편지를 쓴 사람은 각기 달랐으나 두 사람 모두 날 사랑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르윈이 헬레나 전하의 주치의라고 했지?”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후드득 어깨를 떨었다.
아랫입술에 힘을 주고 겨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미래를 보셨다면… 르윈에게 전언을 남기셨을지도 몰라요.”
“편지를 읽어보자.”
두근거림 때문에 내장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편지엔 뭐라고 적혀있을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30분 정도였다.
“조르주를 찾는 게 먼저 아닐까요?”
“그 편지 안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네?”
“조르주는 역사학자 회장이다. 역사학자들이 테레사와 짜고 거짓말했다면 그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조르주는 제게 예언서 필사본을 가지고 왔어요.”
“진심으로 그대를 돕고 싶었다면 5년 동안이나 잠자코 있지 않았을 거다. 르윈이 시키기 전에 그대를 찾았을 테고.”
화를 삭이는 듯 살로메디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르주도 제 입으로 말했다.
르윈 때문에 찾아왔다고.
달리 말하면 르윈이 아니었다면 평생 날 찾을 리 없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르윈은 달랐다.
날 위해 목숨을 걸었고, 나 때문에 좌천당했다.
그가 내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면 분명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였다.
“읽어볼게요.”
봉인된 편지를 뜯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왕녀님. 지금은 건강하십니까?]
익숙한 필체로 적힌 인사말을 읽는 순간 와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 * *
[부디 건강하시길 빕니다.
왕녀님께서 편찮으신 모습은 너무 많이 봤으니까요.
왕녀님을 구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제 무능이 원망스러워 바닥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못난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왕녀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헬레나 님 곁에 있겠군요?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좀 더 서두르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져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래도 헬레나 님께서는 이해해주실 겁니다.
제가 당신을 빨리 찾아뵙기보다 왕녀님을 더 많이 돕길 바라셨을 테니까요.
헬레나 님께서 처음 비밀을 고백하셨을 때, 불충하게도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저는 치료사이기 전에 의학자입니다.
기적이나 신비보다는 실험과 증명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헬레나 님의 예언대로 두 분 전하께서 폐위되셨지요.
신의 저주라 칭하고 싶은 기적 앞에서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금쯤이면 왕녀님도 헬레나 님의 놀라운 권능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거대한 비밀을 홀로 감당하셨을 헬레나 님을 떠올리면 죽음을 앞둔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충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저는 오랫동안 아쿠아로드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고작 주치의 따위가 이 나라의 왕비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왕녀님께 의술서를 건넨 것도 순수한 충성심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평생 아내도, 딸도 가져본 적 없지만…….
마음속으로 왕녀님을 딸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의술서를 가져다드렸습니다.
제가 가진 보잘것없는 지식도 전해드렸고요.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말입니다.
이 정도 불경이면 죽어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헬레나 님이 돌아가시고 무려 5년.
왜 간지럼 치료제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테레사는 제가 만든 약을 원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치료사가 저보다 뛰어난 간지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면 테레사는 기쁘게 절 죽일 겁니다.
생전에 전해주셨던 헬레나 님의 예언에 따르면 이틀 뒤라고 하더군요.
왕녀님. 저는 이틀 뒤 독살당합니다.
제 죽음을 너무 애달파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고, 그만 헬레나 님을 뵈러 가고 싶습니다.
시간을 번 덕에 진짜 예언서를 추적할 수 있었고요.
진짜 예언서만이 두 분 전하의 억울함을 풀어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왕녀님.
헬레나 님은 왕녀님께서 견디셔야 할 운명의 무게를 알고 계셨습니다.
왕녀님께서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요.
안타깝게도 헬레나 님의 권능은 불길하고 저주받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헬레나 님은 오직 불행한 미래만 예언하셨던 겁니다.
헬레나 님께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자주, 더 정확한 미래를 보셨고요.
왕녀님을 잉태하셨을 때 헬레나 님은 두려움을 못 이기고 음독자살을 시도하셨습니다.
쓰러진 헬레나 님을 발견한 사람도 저였습니다.
저는 헬레나 님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에메랄드 린삼 2촉 중 1촉을 사용했습니다.
헬레나 님께서는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허망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낱 치료사인 절 위해서 그런 말씀을 입에 담지 않으셨습니다.]
「르윈.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헬레나 님. 굳건하셔야 합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고통으로 점철된 미래를 떠넘길 수가 없어요.」
「…….」
「아이가 절 원망하겠죠?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예요!」
[주치의인 저는 헬레나 님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한 남자로서 헬레나 님께서 살아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건방진 말씀을 올렸지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용감한 아이로 키우시면 됩니다. 헬레나 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르윈…….」
「소인도 신명을 바쳐 아기님을 도울 겁니다.」
「르윈이랑 똑같은 말을 해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십니까?」
「아주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분이에요. 저보다 슬픈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분이지요.」
[헬레나 님께서는 친구분이 누구신지는 이름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제 치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곧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기님을 낳으셨고요.
자신의 미래는 볼 수 없었기에 헬레나 님은 당신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몰랐습니다.
죽음의 순간, 참혹하고 괴로우셨겠지만 아이시아 님 덕에 조금은 행복하셨을 겁니다.
아이시아 님께서 헬레나 님의 바람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용맹한 소녀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사랑하는 왕녀님.
저는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는 에메랄드 린삼 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 목숨을 살리는 데 쓰지 않을 겁니다.
역사학회장인 조르주가 그 약초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헬레나 님을 살렸던 그 약초를 조르주에게 줄 겁니다.
왕녀님께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헬레나 님께서 제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예언서는 조작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테레사의 공범입니다.
힘이 없어서 테레사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테레사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그 이유는 알고 계시겠지요?
조르주가 진짜 예언서 필사본을 왕녀님께 전달했을 테니까요.]
* * *
거기까지 읽다 말고 차가워진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예언서에 역사학자들이 배반한 이유가 써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뿌연 안개가 두통과 함께 눈앞을 가렸다.
테레사에게 삭제당한 기억이 또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날 뒤흔든 건 어머니의 예지력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불행한 미래만 보는 예지력이라니.
이보다 슬픈 능력이 어디 있을까.
“시아. 괜찮은가?”
살로메디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내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대요. 제가 무슨 일을 당할지.”
“…….”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저라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통증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내게 가해지는 고통이라면 견딜 수 있었다.
매도 맞을 수 있고, 욕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고통을 견뎌야 한다면.
내 소중한 이가 채찍에 얻어맞고, 남이 버린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상상만으로 내장이 끊어질 것 같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시아.”
“하지만 어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테레사가 무슨 짓을 할지. 제가 얼마나 비참할지.”
“그대에게 능력을 숨기신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다.”
“다 알면서, 저에게는 늘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상상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눈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어떤 분인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미소 띤 얼굴과 긍정적인 말 뒤에 어떤 아픔이 사무쳐 있는지.
살로메디안이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키산드라가 헬레나 님의 편지를 간직했던 이유를 알 것 같군.”
“르윈에게 이야기했다는 친구는 키산드라 님이겠죠.”
“그렇겠지.”
키산드라와 어머니를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알고 계셨다.
그래서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친구에게 부탁한 것이다.
내 딸을 살려달라고.
내가 회귀한 건 우연이 아니었어. 내게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야.
오직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내가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도, 살로메디안과 소중한 이들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불행한 예지력 때문에 나는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 거였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가로질렀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어머니의 품에서 울고 싶었다.
그래야만 터질 것 같은 슬픔이 가라앉을 듯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래서 이 슬픔은 영원히 날 떠나지 않을 터였다.
“키산드라는 헬레나 님께 동질감을 느꼈을 거다. 기적과도 같은 능력이자 저주받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두 분 다 원해서 얻은 힘이 아니었어요.”
“헬레나 님도, 키산드라도 죽을 때까지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지.”
어머니는 천국에 계시겠지만, 키산드라는 아직도 고통받고 있었다.
어쩌면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더 괴로워할지 모른다.
날 살려준 은인을, 어머니의 친구를 도울 수 있을까.
테레사도 처리하지 못하는 내가 마신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키산드라 님에 대한 불행한 미래도 보셨을 거야. 그 미래는 뭐였을까?
어머니는 키산드라의 죽음도, 그 이후의 운명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예지력은 거기서 끝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미래도 보신 걸까?
먹먹한 불안감이 목 끝까지 치받았다.
다시 편지로 시선을 옮기려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전하! 공연 시간이 당겨졌다고 합니다. 지금 내려가셔야 합니다!”
* * *
“와아! 칼 던지는 솜씨가 정말 귀신같군!”
“단도가 사과에 꽂히는 거 봤어? 내가 입김만 불었어도 저 여자 이마가 꿰뚫렸을걸!”
델마의 공연 덕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중앙 회랑에 모인 사서와 학자들이 입을 모아 델마의 칼 던지기 기술을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도 델마의 솜씨는 곡예사 그 이상이었다.
과녁으로 사용한 사과에는 단도 3개가 일렬로 꽂혀 있었다.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델마가 네 번째 칼을 꺼냈다.
사과를 머리에 올리고 인간 과녁 역할 중인 에단만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칼만 던지는 건 재미없잖아? 다른 것도 던져보라고!”
누군가 델마에게 포크를 건네줬다.
과녁을 확인하지도 않고 델마가 팔을 휘둘렀다.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포크가 에단의 양쪽 귀걸이를 찍었다.
“아아악!”
에단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관객석을 찾아봤지만 챙 넓은 모자를 쓴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조르주는 역시 금고에 있는 걸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금고로 향하는 통로를 바라봤다.
다행히 통로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몇몇 경비대원이 눈에 띄었지만, 스푼을 던지기 시작한 델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틈을 타 금고에 가볼까?
조르주가 지금도 에메랄드 린삼을 원한다면 훨씬 더 유리했다.
우리 영지에서 가장 흔한 것이 그 약초였다.
여행 전 바바라는 최고급 에메랄드 린삼을 20촉이나 챙겨줬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면서.
“저는 금고로 가볼게요. 살롬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세요.”
살로메디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 공연을 준비하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기다려, 시아.”
그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뜨거운 손에 잡힌 건 손목이 아니라 심장 같았다.
“가야 해요.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애원하는데도 살로메디안은 날 놓아주지 않았다.
날 혼자 보낼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비대가 금고 앞길을 지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살로메디안이 느긋하게 공연을 관람 중인 경비대원들을 가리켰다.
그중에는 우릴 검문했던 경비대장도 있었다.
“금고 앞 통로를 24시간 교대로 지킨다고 하지 않았나?”
“축제 때문에 해이해진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경비대의 표정이 너무 여유롭다. 상관의 눈치도 보지 않고.”
“…….”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마음을 푹 놓고 있다.”
살로메디안의 눈이 예리해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통로에도 보안 마도구를 설치한 걸까요?”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겠지.”
살로메디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 마도구가 추가로 설치됐다면 금고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르주를 도서관 밖으로 유인하도록 하자.”
“그가 주동자라면 순순히 우리 뜻에 따르지 않을 거예요.”
“오늘 금고에 접근하는 건 무리다.”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고작 눈썹을 찡그렸을 뿐인데 절로 탄식이 새어 나올 만큼 안타까웠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지워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유인하지 못한다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죠.”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가 두렵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시아.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쥐를 잡으려면 굴에 연기를 피울 수밖에 없잖아요?”
“설마 불을 내겠다는 건가?”
“안 될 거 없잖아요?”
내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마른침을 삼키는지 살로메디안의 목울대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황당한 얼굴로 그가 도서관을 둘러봤다.
“이 도서관은 아쿠아로드의 역사와 함께하는 지식의 보고라던데.”
“초대 국왕의 예언서 말고도 국보급 유물과 서적이 가득하죠.”
“그걸 알면서도 불을 내겠다고?”
살로메디안은 내 계획이 너무 파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평소의 나답지 않거나.
“방대한 지식이 쌓여있으면 뭐 하나요. 굶주린 백성들을 돕지도 못하고,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지도 못하는데요.”
“…….”
“지식은 절대선이 아니에요. 극소수 학자들이 독점한 채 권력자에게 이용당하거나 권력에 기대 공생한다면 더더욱요.”
“악녀의 칼이라면 아깝더라도 태워버리는 것이 낫겠지.”
이해했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그가 다른 이의를 제기했다.
“경비대장이 그대의 푸른 불꽃을 봤다. 불길이 번지면 그대가 의심받을 거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추적당하기 전에 예언서를 챙겨 도망치겠다는 뜻인가?”
“아뇨. 안전하게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요.”
“불을 내고, 요새나 마찬가지인 도서관을 탈출하겠다고? 어떻게?”
살로메디안의 결 고운 눈썹이 크게 휘어 올라갔다.
전쟁과 전략의 대가인 그도 내 계획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게 뭐냐면…….”
그의 귓가에 안전한 탈출법을 속삭였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에 경탄과 근심, 난감함이 동시에 얼룩졌다.
“시아. 하지만 그건…….”
“살롬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따를게요. 없으면 제 뜻에 따라주세요.”
살로메디안은 침묵으로 내 뜻에 동의했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달콤한 미소를 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살로메디안의 눈동자를 닮은 새파란 불꽃이 손가락 끝에서 춤추듯 일렁거렸다.
* * *
“불이야!”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중앙 회랑을 울렸다.
금고로 향하는 길은 날름거리는 푸른 불꽃에 이미 점령당해 있었다.
“불이라고?!”
“아발론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말도 안 돼!”
아발론 도서관은 단 한 번도 화재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전쟁의 포화가 쏟아진 적도, 괴인들의 침략을 받은 적도 없었다.
도서관은 요새나 다름없었고, 불순한 마음을 품은 외부인도 침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부인들 또한 철저하게 감시받았다.
도서관에 자그마한 손해라도 끼치면 왕명으로 처형당했다.
다시 구할 수 없는 고서로 가득한 도서관의 화재는 재앙이었다.
내부자 누구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물을 길어 와라!”
“방화범이 도망치지 못하게 문을 막아라!”
“문을 막으면 위험합니다! 연기에 질식할 수 있어요!”
“범인을 놓치면 다 죽는다!”
불을 끄려는 학자들과 불을 낸 사람을 잡으려는 경비대가 삽시간에 뒤엉켰다.
경비대장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악을 질렀다.
“외부인들을 포박해! 무조건 잡아들이라고!”
도서관의 안전을 책임지는 그가 살아남는 길은 방화범을 체포하는 것밖에 없었다.
도서관 전체가 불탈까 봐, 범인을 잡지 못할까 봐 두려운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이 테레사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 모두 죽는다!’
불을 끄기 위해, 방화범을 잡기 위해 모두가 필사적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차분히 감상했다.
숨어있던 쥐가 굴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
나왔다!
불꽃이 일렁이는 중앙 회랑에 챙 넓은 모자를 쓴 노인이 나타났다.
불안하게 굴리는 눈동자와 긴 턱수염을 본 순간 심장이 굳었다.
기억 속 역사학자 조르주였다.
그는 푸른색 상자를 어린 아기처럼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델마에게 신호를 보냈다.
델마가 끝이 뭉툭한 단도를 조르주에게 던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도가 조르주의 모자를 관통했다.
노인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와중에도 푸른 상자를 품에서 놓치지 않았다.
쓰러진 조르주의 입을 틀어막고 델마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찰나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해라!”
“책을 지켜라!”
“방화범은 어디 있느냐?!”
화재 때문에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가장 귀한 물건이 함께 사라졌다는 것 역시.
슬슬 소란을 진정시켜 볼까?
나는 손가락을 모아 휘파람 소리를 크게 냈다.
신호에 맞춰 에단이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난리 통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부라렸다.
“어떤 미친놈이 하프를 타는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때 누군가 활활 타오르고 있던 푸른 불꽃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불꽃이 사라지고 있어요!”
도서관 전체를 태울 듯 날뛰던 불꽃이 주춤주춤 기세를 줄였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이었다.
“비… 비가 온다!”
“도서관 천장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
“여신님의 기적이다!”
경악에 찬 목소리가 빗발쳤다.
살로메디안이 내리는 마력의 비를 맞은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비비는 사람도 있었고, 물방울의 맛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무릎을 꿇고 여신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았지만 말이다.
하프를 연주하던 에단이 목청을 높였다.
“기적이 아니라, 마법입니다! 불의 마법사와 물의 천사가 만든 천상의 하모니! 로즈 곡마단의 무대를 감상해 주십시오!”
마법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또 다른 혼란에 빠졌다.
“마법이라니, 무슨 소리야?”
“이게 전부 속임수라는 거야?”
“그럴 리가 없어요! 불꽃은 진짜였다고요! 비도 진짜예요!”
“곡예사들을 잡아라! 저들이 범인이다!”
경비대장이 에단을 지목했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몸을 가리고 있던 긴 로브를 벗었다.
광기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살로메디안에게 쏠렸다.
그림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영롱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
선율에 맞춰 검무를 추는 자태는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오오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하다니!”
에단의 하프 연주와 물안개 덕분에 살로메디안의 미모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랜 몸놀림과 불빛을 튕겨내는 검의 조화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살로메디안의 미모에 익숙한 내게도 신비로운데 보통 사람들 눈에는 오죽할까?
천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살로메디안 덕분에 중앙 회랑은 경건한 감동으로 가득 찼다.
“물의 천사님이시다!”
“여신님께서 강림하셨다!”
“오오, 여신님!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곡예사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살았다는 안도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기적에 초미녀까지 등장했으니 정신이 멀쩡할 리 없었다.
화재와 방화범의 존재는 이미 그들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경비대장마저 눈물을 흘리며 살로메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흐뭇한 마음으로 살로메디안의 무대를 즐겼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이 빚은 꼭 갚아야 한다.’는 눈빛을 던지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