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50)

34

* * *

-꼬맹이가 드디어 소원을 풀었군.

온천 바위에서 턱을 괴고 있던 키산드라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이시아가 성물에 마력을 주입했고, 덕분에 물의 마력을 얻었다는 걸.

그 뒤에 벌어진 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직접 봤더라면 더 즐거웠겠지만 말이다.

-엉덩이가 새파란 꼬마인 줄만 알았는데 다 컸단 말이야. 큭큭.

결벽증 환자처럼 여자를 멀리하더니.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애처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선물이 마음에 드느냐, 아이시아?

아이시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산드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바실리키의 심장막에는 두 가지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첫째. 모든 공격을 반사시키는 방어력.

둘째. 반대 속성의 마력을 만드는 창조력.

성물을 두르고 마력을 주입하면 누구나 쌍 속성이 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헬레나는 자수정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성물이 등장하면 새로운 마신이 탄생한다는 게 사실이었어요! 누구든 쌍 속성으로 만들어주니까요!」

150살이란 나이를 잊을 정도로 헬레나와 키산드라는 죽이 잘 맞았다.

바실리키의 탄생을 연구하던 스무 살짜리 유학생.

신학에 대한 성취보다 헬레나의 밝은 성격이 키산드라를 사로잡았다.

헬레나는 다른 약소국 귀족들과 달리 자신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저것 호기심을 내보이며 키산드라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성물이 세드나 공작령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마신의 칼이 세드나 공이라면, 마신의 방패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성전에 성물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바실리키 고대 성전이 아쿠아로드에만 남아 있는 이유는요?」

헬레나를 처음 만났을 때, 키산드라는 신학자들을 초청한 걸 후회했다.

신학자 중에 귀족 영애가 섞여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아이가 사랑스럽고 해맑은 미소의 소유자란 것 또한 예상 밖이었다.

「신학자들을 초청한 건 마신을 죽이고 싶기 때문인가요? 키산드라 님을 대신할 계약자를 찾기 위해서인가요?」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물었다면 키산드라는 검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것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무슨 짓을 해도 분노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헬레나가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산드라 님도 환상을 보시나요? 너무 생생해서 현실 같은 환상이요.」

「무슨 개똥 같은 소리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20대로 보이는 150살 할머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쳇.」

「저는 가끔 환상을 봐요. 놀라운 건 그 환상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헬레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농담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면서 주먹을 움켜쥐는 아이도 아니었다.

「예지력이 있으면 좋은 거 아냐? 너희 나라 초대 국왕도 예언자였다며?」

「즐거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비밀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설마 나쁜 미래만 보는 거냐?」

「홍수, 고문, 암살, 전쟁… 고통과 죽음만 가득한 예지력이죠.」

「헬레나…….」

키산드라는 아주 오랜만에 침대가 아닌 장소에서 남자가 아닌 인간을 껴안았다.

남자를 울리는 건 아주 좋아하지만, 여자아이가 우는 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냐?」

「…….」

「나에 대해 안 좋은 환상을 봤느냐?」

헬레나는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북북 문지르며 쾌활하게 대꾸했다.

「아뇨! 키산드라 님은 행복해지실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거짓말할 줄 모르면서 애쓰지 마라.」

「키산드라 님.」

「네가 불길한 미래를 보는 예언자라도 널 미워하지 않는다. 넌 그냥 시끄러운 헬레나일 뿐이야.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 다오.」

「키산드라 님이 돌아가시는 환상을 봤어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꿈이잖아!」

「그런데 돌아가시지 못했어요.」

「뭔 개소리냐? 죽었는데 죽지 못하다니?」

「저도 무슨 의미인 줄은 모르겠어요. 그냥 키산드라 님이 너무 외로워 보였어요…….」

헬레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때 키산드라는 어렴풋 느꼈다.

마신이란 놈이 절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것을.

헬레나가 자신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아쿠아로드로 꺼져.」

「…….」

「예지력은 숨기는 게 좋겠다. 욕먹고 따돌림당하기 딱 좋은 능력이니까.」

「이대로 키산드라 님과 살면 안 될까요?」

눈물 젖은 얼굴로 헬레나가 물었다.

「어휴, 징그러워! 내 취향은 가슴 근육이 발달한 남자거든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두근거렸다.

헬레나는 키산드라가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들여놓은 친구였으므로.

괜스레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키산드라가 입을 삐죽였다.

「왕세자의 약혼자를 가로챌 마음 없어. 널 내 영지에서 유학시킨 것부터가 비밀이잖아?」

「하지만…….」

「혹시 너에 대한 불길한 미래를 본 거냐?」

「제 미래는 보지 못해요.」

「그런데 왜 죽상이야?」

「하지만 제 딸에 대한 미래는 봤어요.」

「?!」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불행한 미래를 봤다는 소리에 키산드라는 숨을 집어삼켰다.

한참 흐느끼던 헬레나가 키산드라의 손을 잡았다.

헬레나의 손은 뜨겁고 축축했다.

「제 딸은 결혼식에서 죽게 돼요. 제 딸을 되살릴 방법은 키산드라 님뿐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나는 그냥 안 죽고 안 늙은 평범한 여자일 뿐이야!」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하지만 키산드라 님께서 제 딸을 살려주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헬레나!」

「슬픈 운명을 지닌 특별한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세드나 영지에 온 후로 그 아이에 대한 환상을 자주 봐요.」

「네 딸이 이 땅과 관련 있다는 뜻인가?」

「제 아이가 어떤 삶을 살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시겠죠.」

헬레나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제 몫의 운명을 견뎌낼 작정이었다.

환상 속에서 만난 딸을 포기할 수 없는지도 몰랐다.

귀국하기 전까지 헬레나는 딸이 겪게 될 불행을 자주 봤다.

그때마다 오래 울었지만 헬레나는 언제나처럼 다시 일어섰다.

「아이에게 불길한 미래는 알려주지 않을래요. 대신 살아갈 수 있게 용기를 줄래요!」

「너라면 당당하고 용맹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 거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키산드라는 헬레나와 머리를 맞대고 미래의 딸을 돕기 위한 계획을 짰다.

「네 딸이 세드나 공작령에 올지도 모르니까, 기록을 남겨두자.」

「저와 키산드라 님에 대해서요?」

「그래. 네 딸이라면 집요하고 호기심 많은 애일 테니까.」

「예지력에 대해서도 밝혀야 할까요?」

헬레나가 머뭇거렸다.

키산드라가 샐쭉, 눈을 흘겼다.

「미래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원망할까 봐?」

「…….」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널 닮았다면 원망하는 대신 감사할 거야.」

키산드라의 말에 헬레나는 용기를 냈다.

그래서 기록을 대신한 편지를 남기기로 했다.

키산드라가 진짜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네 딸은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졌다고 했지?」

「네.」

「그럼 불의 마력을 타고 난 아이일 확률이 높다.」

「물의 나라에서 태어난 불의 아이라고요……?!」

「아이가 불의 마력을 가졌다면 숨기는 게 좋아. 그 나라에선 마력이 없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

「어떻게 숨기죠? 서너 살이면 마력이 드러날 텐데요?」

「찬물로 목욕을 시켜.」

「네?」

「불의 마력이 숨어있을 수 있도록, 항상 물을 가까이하도록 해.」

심장에 무리가 가는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떤 기회를 통해 마력을 깨우치게 된다면 가공할 만한 마력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키산드라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아이시아는 목욕을 제일 좋아하는 소녀로 성장했다.

황홀하리만치 강한 불의 마력을 가진 소유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헬레나의 환상 역시 모두 현실이 됐다.

아이시아는 헬레나가 막고 싶었으나 막을 수 없었던 고통을 모두 겪었다.

결혼식에서 죽는 것도 피하지 못했다.

헬레나의 부탁에 따라 키산드라는 죽은 아이시아를 되살렸다.

덕분에 마신화가 빨리 진행됐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희망일지라도 좋았다.

그 아이라면 자신을 구해줄 것만 같았으니까.

헬레나의 딸. 불과 물 모두를 가진 아이.

내 후계자의 심장을 훔친 세드나 공작부인이라면 말이다.

-헬레나,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느냐? 날 기다리느라 목 빠진 건 아니겠지? 얼른 네 곁으로 가고 싶구나…….

헬레나를 그리워하며 키산드라가 중얼거렸다.

헬레나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끔찍한 환상은 부디 어긋나길 바라며.

* * *

살로메디안이 매의 다리에 묶여있는 쪽지를 풀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키산드라의 유품에서 편지를 발견했다고 하는구나.”

“편지요? 일기나 문서가 아니라요?”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푸른 눈과 표정이 제거된 굳은 얼굴.

겁이 더럭 날 만큼 위압적인 긴장감이 나와 살로메디안을 짓눌렀다.

“무슨 편지인데 그러세요?”

“헬레나 전하께서 그대에게 남긴 편지다.”

“!”

“바바라가 봉인을 뜯지 않았다고 한다. 그대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높은 이명이 귓가에 울렸다.

너무 놀라 입술도,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편지가 왜 세드나 공작령에 있지?

편지는 언제 쓰신 거지?

의당 해야 할 의문도 내뱉을 수 없었다.

“바바라의 전언에 따르면 아주 오래된 편지라고 한다.”

“어머니가 유학한 곳이 세드나 공작령이었군요… 키산드라 님과도 안면이 있으셨고요.”

“키산드라가 편지를 소중히 간직했다면 각별한 사이였을 것이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겠죠?”

“…….”

살로메디안은 대답을 아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편지를 남겼다면, 어머니는 예지력을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우지끈한 통증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왜 저한테는 아무 말씀도 안 해주신 걸까요?”

차가워진 손끝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짚었다.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살로메디안이 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익숙한 체취와 온기 덕에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그런 선택을 하셨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살롬…….”

“나는 뵙지 못했지만, 그대에게 전해 들은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딸을 사랑하셨다. 안 그런가?”

찰랑거리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분이셨다.

하나뿐인 딸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셨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살롬 말이 맞아요.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절 믿고 사랑하셨어요.”

“편지를 읽기 전까지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

“당장 공작령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이신가요?”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가자고 하면 갈 텐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복수를 결심하고 아쿠아로드에 돌아온 이상, 테레사의 몰락을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공작령을 오래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울 약초 채집을 마무리해야 했고, 의료 교육원 수업도 시작해야 했다.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을 놀고먹는 놈팡이 취급했지만, 그는 마물 토벌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살로메디안과 흑룡기사단의 최정예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밖으로 알려지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마물의 움직임은 어떻대요?”

“다행히 조용하다더군. 키산드라가 명상이라도 하는 모양이야.”

“폐하께서는 잠잠하시고요?”

“파티 준비에 미쳐있는 것 같다. 뭘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뿐인데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 떨려왔다.

막연한 불안이면 좋겠는데, 불안이 악몽 같은 현실이 되어 찾아올까 봐 두려웠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살로메디안은 내 걱정을 느끼고 있었다.

“마물이 날뛰든 황제가 날뛰든 상관없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건 그대를 푹 쉬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살롬…….”

“최근 제대로 쉰 적이 없지 않나?”

아쿠아로드의 모든 시간은 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살로메디안과 숙소에 틀어박혔던 이틀도 행복했지만, 육체적으로 힘겨웠다.

잠자리에 누워도 이런저런 고민들이 꼬리를 물었다.

깊이 잠들지 못한 탓에 입 안이 헐고 열이 자주 올랐다.

내 딴에는 숨긴다고 숨겼는데 소용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를 둘러업고 국경을 넘고 싶다.”

살로메디안이 내 허리를 감싸 쥐며 어깨에 들쳐 메는 흉내를 냈다.

그의 손이 허리에 닿자 고통에 가까운 간지러움이 치밀었다.

“흐읏.”

흐느끼는 듯 야릇한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요염하게 빛났다.

“그런 소리를 내면… 국경이 아니라, 침대로 가고 싶어지는데?”

“살롬!”

“왜 소리치는 거지? 신음으로 날 도발한 건 그대잖아?”

뺨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의 근육질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꾸 짓궂은 소리 할 거예요?”

“아프다, 아파.”

“거짓말하지 마세요! 하나도 안 아프면서!”

“진짜 아프다. 아파 죽겠으니 그만해라. 그대 손이 다친다.”

살로메디안이 내 주먹을 감싸 쥐었다.

절 때리는 내 손이 다칠까 봐 엄살을 부리는 남자.

화내고 싶어도 도저히 화낼 수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어쨌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곳 인간들은 그대를 죽은 사람 취급하니까.”

“…….”

“하지만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면 사랑스러운 아내가 웃어주지 않겠지?”

“그럼 좀 더 머물러도 돼요?”

나는 붉은 눈을 반짝 치켜떴다.

날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대에겐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이렇게 귀여워서야…….”

귀엽다는 건지 씁쓸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로메디안은 이번에도 내 뜻에 따라줄 모양이었다.

“그대가 원할 때까지 있도록 하자. 위급한 일만 터지지 않는다면.”

“고마워요! 살롬!”

이번엔 내가 뒤에서 살로메디안의 허리를 답삭 껴안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달리 잘록한 허리.

옷을 입고 있음에도 양팔에 탄력이 느껴졌다.

언제 봐도 강인하고 아름다운 몸이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체향마저 살로메디안다웠다.

싱그럽고 따스하며 맑은 향.

살로메디안의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 잔뜩 날 서 있었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얼마나 코를 박고 킁킁거렸을까.

살로메디안이 짓눌린 목소리를 겨우 뱉었다.

“시아, 그러면 위험하다.”

“위험하다니요?”

“책임져줄 거 아니면 떨어지는 게 좋아.”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억울한 마음에 눈썹 사이를 모았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살로메디안은 어색한 자세로 하체를 뒤로 빼고 있었다.

내게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어디 불편하세요?”

“아주 많이 불편하다.”

“자세가 이상하니까 그러죠. 편하게 계세요.”

“…그럼 더 불편해진다.”

살로메디안의 귓바퀴가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부끄러워하다니!

그 모습이 낯설어서 호기심이 샘솟았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을 해주시면 제가…….”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 시선이 그의 하체에 닿았고, 그제야 그가 아주 많이 불편해진 까닭을 이해했다.

“으왓!”

화들짝 놀란 내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뒤에서 껴안아서 그런 걸까? 내가 살롬의 체취를 킁킁거려서?

그것만으로 사람의 신체 일부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야?

마른침과 함께 튀어 오르는 물음을 삼켰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어설프게 변명했다.

“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험험.”

살로메디안이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고, 나는 괜스레 벽지 무늬를 세는 척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휘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불현듯 바바라의 말이 떠올랐다.

「어색할 때는 괜히 날씨 운운하지 말고 상대방을 칭찬하는 게 좋아요. 서로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분위기도 매끄러워지고.」

여전히 사람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내게 바바라가 했던 조언이었다.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뭔가 인상적이었던 걸 칭찬해주면 더 좋고요.」

지금은 살로메디안의 변화를 책임져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어색함을 견디기도 어려웠다.

좋아, 칭찬을 하자! 분위기를 바꾸는 거야!

결심 끝에 말을 꺼냈다.

“건강하셔서 보기 좋아요.”

“!”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제법 나쁘지 않은 칭찬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붉은색을 넘어 자주색을 띠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경직된 그를 마주하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살롬?”

“…노력하마.”

“네?”

“아무튼 그대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살로메디안이 문밖으로 몸을 돌렸다.

“잠깐 볼일이 좀 있어서.”

“어디 가시는데요?”

“기다리지 말고 쉬도록.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살로메디안이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칭찬을 좀 더 할 걸 그랬나?”

* * *

대륙 각지의 신학자들이 세드나 영지에 모였다는 기록을 바바라가 발견했다.

20년 전 일이라고 하니, 어머니가 유학하셨다는 시점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키산드라 님께서 뭔가 연구하신 모양이네요.”

겨우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살로메디안이 대답했다.

“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던 모양이다.”

“다른 기록은 없었나요?”

“아쿠아로드에서 신학자가 몇 명 건너갔는데, 그들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귀국했다더군.”

“그 신학자들의 명단은요?”

살로메디안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된 기록인 데다가, 극비 사항이라 외부로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좌절도 잠시, 너무 가까운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단이었다.

“20년 전 크로티무스 제국에서 유학했던 신학자라고요? 저도 아는 사람입니다!”

“에단 씨가 어떻게요?”

“강한 치료 마력을 가진 신관은 교단 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유력 인사들도 여럿 만나게 되지요.”

민망하다는 듯 에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촉망받던 신관이 왜 창녀촌을 전전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사생활을 캐묻지 않았다.

“그 신학자가 누구죠?”

“이름이 조르주였을 겁니다. 흰 턱수염을 길게 길렀고요. 늘 챙 넓은 모자를 즐겨 쓰던 분이었습니다.”

“아쿠엘 교단에서 마신 연구를 했다는 거죠?”

“그분은 물의 신관이 아니었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분은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용납됐던 거 아닐까요?”

“그분이 어디에서 연구하셨는지도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대신관님의 심부름 때문에 그분이 계신 아발론 도서관에 다녀온 적도 있는걸요.”

아발론 도서관이란 말에 숨을 집어삼켰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두통과 함께 한 인물이 떠올랐다.

「르윈이 절 보냈습니다! 전하께 이 문서를 전하라고요!」

르윈의 부탁을 받고 몰래 날 찾았던 노인.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던 그는 아발론 도서관에 적을 둔 역사학자였다!

“도서관에 가서 역사학자 조르주를 만나봐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로메디안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현재로서는 보안 마도구를 뚫을 방법이 없다.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상.”

“만나기만 하는 것도 어려울까요?”

“아발론 도서관의 역사학자들은 테레사의 특별 감시 아래 놓여 있다. 외부인을 만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살로메디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같이 들었던 보고를 잊을 만큼 나는 흥분한 상태였다.

“조급한 건 알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자.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이 골목만 지나면 탈출구가 생길 것 같은데.

꼭 그런 순간에 장애물이 나타났다.

나와 살로메디안을 번갈아 보던 에단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왜 예언서를 보시려는 겁니까?”

“테레사의 죄를 입증하려면 예언서가 필요해요. 공범 관계인 역사학자들의 신병도 확보해야 하고요.”

결심했다는 듯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에단 씨가 보안 마도구를 뚫을 수 있다고요?”

“아니요. 하지만 도서관 안에 잠입할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선뜻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발론 도서관은 최정예 기사들도 쉬 접근할 수 없는 요새였다.

떠돌이 신관에 불과한 에단이 어떻게 잠입한다는 걸까?

내 심정을 이해했는지 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는 오랫동안 테레사의 죄를 밝히기 위해 애썼습니다. 제 딸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까요…….”

에단은 어린 테레사의 사악한 지능과 흉계를 모두 알고 있었다.

테레사에게 독의 사용법을 가르친 것도 에단이었다.

예언서가 등장했을 때 에단은 그것이 추악한 음모라는 걸 확신했다.

테레사가 왕의 서녀로 만족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테레사 대신 속죄하고 싶으셨나요?”

“속죄는 핑계입니다. 진짜 예언서를 찾으면 테레사가 절 해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가족들이 살해당한 후로는 오로지 복수 때문이었습니다. 예언서를 찾아 죽은 아이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어요.”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평생 마르지 않을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였다.

“예전 인맥을 총동원해서 예언서에 접근했습니다. 진실을 말해주는 아무도 사람은 없었지만요.”

“예언서를 직접 보셨다는 건가요?”

내가 다급히 물었다.

날 바라보던 에단이 깊은숨을 내뱉었다.

“예언서가 든 금고 앞까지 가봤습니다. 도서관장과 학회장, 두 사람이 가진 열쇠가 있어야 금고가 열린다고 합니다.”

“열쇠라고요?”

“조르주 씨가 학회장이십니다. 도서관장은 테레사의 심복이고요.”

“그는 어디에 있죠?”

“며칠 전 암살당했습니다. 폐왕녀의 유령이라 불리는 암살자에게…….”

폐왕녀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 죄스럽다는 듯 에단이 말꼬리를 흐렸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델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테레사의 측근들이 숨겨왔던 문서를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열쇠 같은 것들도 챙겼고요.」

정황상 델마가 도서관장을 암살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금고 열쇠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손바닥에 식은땀이 촉촉하게 배었다.

예언서만 손에 넣으면 테레사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나와 어머니를 몰락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악녀를 처단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예언서가 등장하면 아쿠아로드가 발칵 뒤집어질 거예요. 역사학자들도 살아남지 못할 거고요.”

“…….”

“테레사는 죗값을 치르게 되겠죠. 꼭 그렇게 만들 겁니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에단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 전에 국왕이 사망하면요?”

“!”

“전하께서 진실을 밝히기 전, 테레사가 국왕이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국왕이 죽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국왕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도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국왕이 죽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내게 국왕은… 아니,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존재. 죽어야 하지만 죽지 않는 존재.

하지만 그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하루하루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대륙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한다 해도, 테레사에게 반기를 들 아쿠아로드인은 없을 겁니다.”

에단의 말이 맞았다.

테레사가 새 왕좌를 차지한다면 그녀를 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도 자격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아쿠아로드인도, 왕족도 아니었으므로.

내가 테레사를 응징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흑룡기사단을 이끌고 아쿠아로드를 정복한 후, 새 국왕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럼 아쿠아로드는 제국의 식민지가 돼버려. 공작령에 복속시킨다고 해도 황제 손에 좌지우지될 거야.

네이선의 붉은 머리칼과 잘생긴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집요하게 날 좇던 눈동자도, 살로메디안 앞에서 적의를 불태우던 모습도 잊히지 않았다.

뛰어난 황제일지 몰라도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남자였다.

숙부의 아내를 탐할 정도로 제 욕망에 솔직한 남자.

그의 손에 아쿠아로드가 떨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분명 내가 원하는 평화는 사라질 거였다.

“왕좌를 차지하기 전에 테레사가 역사학자들을 제거할지도 모릅니다. 전하와 각하께서 역사학자들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요.”

테레사가 절 위협할지도 모르는 인간을 살려둘 리 없었다.

역사학자들이 살해당한다면 예언서의 진실은 영영 역사 속에 묻히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테레사는 왜 나를 살려둔 걸까?

날 학대하는 즐거움 때문에 살려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봤었다던 예언서가 궁금해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기억 재생 마도구를 쓴다면 당장이라도 예언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압수해 간 마도구를 떠올리며 마른 입술을 씹었다.

마도구는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미련 갖지 말자. 델마에게 열쇠가 있을 테니까 희망이 있어.

대신 서둘러야 했다.

테레사가 나와 살로메디안의 계획을 눈치채기 전에.

“에단, 오늘 밤 도서관에 잠입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변장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아쿠아로드에서는 내내 변장을 했어요.”

나는 남장을 했고, 살로메디안은 여행자용 후드로 눈부신 미모를 감췄다.

에단이 곤란한 얼굴로 뜸을 들였다.

“그것만으론 절대 도서관 경비대를 뚫을 수 없습니다.”

“에단의 계획은 뭔데요?”

내 물음에 에단이 살로메디안을 흘끔거렸다.

그 시선에 불길함을 느꼈는지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 * *

“도서관장까지 죽었다고?!”

소식을 전한 테레사가 찻잔을 집어 던졌다.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폴의 머리에 찻잔이 깨졌다.

흘러내린 붉은 피를 폴이 무표정한 얼굴로 쓱 닦아냈다.

“송구스럽습니다, 왕세녀 전하.”

“열쇠는?”

“사라졌습니다.”

“으아아악!”

금속성 비명을 내지르며 테레사가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제국 귀족들에게 굽신거리고 왔더니, 예언서 금고 열쇠가 사라지다니!

이보다 끔찍한 소식이 어디 있을까?

“예언서를 내가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역사학자들이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지요. 예언서를 인질로 잡고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들이니까요.”

“몽땅 불태워 버릴 테다! 예언서와 함께!”

테레사가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했다.

하지만 국왕이 죽기 전까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늙은이가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역사학자들도 처리해야 해.”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일단 늙은이에게 쓰는 독을 늘리도록.”

“독살 흔적이 드러나면 위험해지십니다.”

“일이 더럽게 꼬이고 있잖아? 거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서둘러야 할 때란 말씀이시군요.”

“국왕이 죽는 즉시 어의들을 처형하자고. 내가 즉위하면 모든 게 해결되니까.”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폴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테레사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제국 귀족 놈들도 문제야. 너무 많은 마도구랑 치료 신관을 요구하고 있어.”

“전하의 고귀함을 모르는 무지한 작자들이더군요.”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멍청이들이 상전인 양 굴더라니까! 건방진 놈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래도 당분간은 먹이를 던져줘야 하겠지요?”

“그놈들도 살려두지 않을 거야.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들개 먹이로 던져줘야지.”

제국 귀족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테레사는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 했다.

마도구를 만드는 데도, 치료 신관을 파견하는 데도, 엄청난 돈이 들었다.

마도구 개발에는 진척이 없었다.

고작 디에고 한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말이다.

테레사의 명으로 파견된 치료 신관들이 돌아오지 못하면서 신전에서는 더 많은 기부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국왕과 대신들 몰래 사용하던 국고는 떨어진 지 오래였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지만, 돈이 떨어지는 속도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쓸모없는 어미의 사치도 한몫했다.

테레사는 핏줄에 얽매여 인정을 베푼 것을 후회했다.

“하찮은 신관 나부랭이가 돈을 뜯어 가질 않나. 내 덕에 왕비가 된 여자가 내 돈을 탕진하지 않나!”

“대관식까지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부족한 예산은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면 되니까요.”

“당연하지.”

“전하의 목표는 약소국 아쿠아로드 국왕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따위 나라에 만족할 리가.”

“여신의 총애를 받는 전하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폴의 말대로 푼돈 따위에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테레사는 엄청난 부를 손에 넣게 될 테니까.

“생니콜 자작이 내 선물을 잘 사용했겠지?”

“마신의 성물이 언급된 고대 성전 아닙니까? 골수 바실리키교도인 자작의 눈이 뒤집혔겠지요.”

“황제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폐왕녀가 마신의 성물을 찾았을까요?”

“그 계집은 운이 더럽게 좋아. 운빨 하나로 살아온 계집이나 마찬가지야.”

아이시아의 붉은 눈과 윤기 흐르는 흑발을 떠올리며 테레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테레사가 아등바등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아이시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고 있었다.

마력도 없는 주제에, 하늘색 머리칼도 아닌 주제에.

잘난 핏줄과 타고난 행운만 믿고 도도하게 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짓밟아주고 싶었다.

세상의 더러움 따위는 모르는 아이시아에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겪었던 인생의 쓴맛을 경험시키고 싶었다.

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하지만 아이시아의 행운은 폐왕녀가 된 후에도 이어졌다.

아이시아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국 황족이 되었을 때, 테레사는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

분하게도 행운의 여신은 늘 아이시아 편이었다.

신전 위치를 넌지시 알려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이시아라면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찾지 못할 성물을 찾아낼 테니까.

‘직접 손쓸 필요 없어. 아이시아가 가진 걸 뺏는 편이 더 쉽잖아?’

이용할 구석이 많다 해도 아이시아를 죽이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스러웠다.

‘예언서만 아니면 죽여 버리는 건데! 그깟 예언서가 뭐라고!’

때려죽이지 않으려고, 굶겨 죽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이시아처럼 배은망덕한 계집은 평생 모를 것이다.

“제국에서 내란이 벌어지면 아이시아를 생포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해. 그 애가 가진 성물도 챙겨야 하고.”

“전하 뜻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대량 살상 마도구는 아직인가? 오늘까지 꼭 만들어놓으라고 했잖아?”

“마도사들이 밤낮으로 애쓰고 있습니다만…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쓸모없는 것들! 마도사 50명이 디에고 한 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돼?”

“다시 한번 전갈을 넣겠습니다.”

“나는 좀 쉬어야겠어. 내 방으로 장난감 가져다줘.”

제 방으로 돌아온 테레사는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착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이 준비한 장난감이 주춤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왕, 왕세녀 전하를 뵙, 뵙습니다!”

긴 검은 머리칼을 풀어 내린 10대 소녀가 테레사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흐리멍덩한 갈색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염처럼 붉은 눈동자였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이나 창백한 흰 피부는 꽤 그럴듯했다.

‘아이시아가 오기 전까진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테레사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소녀의 흑발을 거칠게 휘어 감았다.

“놓아주세요, 전하! 아파요!”

새로운 장난감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벌써부터 울면 시시하잖아? 이제 시작인데.”

머리채를 쥔 채로 테레사가 소녀를 끌고 갔다.

목적지는 각종 고문 도구로 가득 채워진 방이었다.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도착할 때까지 다양한 실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이번 장난감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가지고 놀 수 있길 바라며 테레사가 미소 지었다.

* * *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아발론 도서관도 경비가 허술해지는 때가 있었다.

1년에 딱 한 번, 디오스 축제가 벌어지는 요즘이었다.

나와 살로메디안, 델마는 에단의 지휘 아래 변장을 시작했다.

델마는 곧 체념했으나 살로메디안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는 우리 일행 중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절대 변장하지 않겠다는 그를 겨우 어르고 달랬다.

「일주일 동안 살롬이 하자는 것만 할게요! 방 안에 틀어박혀서요!」

그 약속이 없었다면 살로메디안의 하락을 얻지 못했을 거였다.

“내부인들도 치를 떨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 곳입니다. 덕분에 축제 시기에는 즐기자는 분위기지요.”

도서관 인근 으슥한 풀숲에서 에단이 목소리를 낮췄다.

“외부인 출입도 허용된다는 건가요?”

“미리 허가받은 사람에 한해서요.”

에단의 말에 살로메디안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들키면 어쩌려고?”

“들키면 안 됩니다. 내부는 말 그대로 철옹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차림은…….”

불쾌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살롬, 여기까지 왔는데 불평하지 마세요. 얼른 끝내고 나오면 되잖아요?”

내가 뭐라 하든 살로메디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단단히 토라진 살로메디안을 포기하고 델마에게 감사를 건넸다.

“고마워, 델마. 네가 열쇠를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작전은 시도조차 못 했을 거야.”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델마가 반듯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연두색 허리띠에 매달린 5개의 단도가 짤그랑 소리를 냈다.

델마는 즐겨 사용하던 단도를 변장 소품으로 이용했다고 했다.

살로메디안의 변장은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여행자용 로브와 후드로 꽁꽁 감싼 덕분에 얼굴은커녕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후드 좀 벗어보세요, 살롬.”

“싫다.”

“어차피 검문할 때 벗어야 하잖아요.”

“그건 그거고.”

“변장이 잘됐는지 확인하려는 거예요.”

“안 돼.”

그가 매정하리만치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러려고 아쿠아로드에 온 것이 아닌데…….”

자괴감과 우울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으드득, 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어금니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내 의견 덕분에 살로메디안의 변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탄탄하고 훤칠한 몸매. 별빛보다 반짝이는 백금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는 어떤 보석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대륙 제일의 미남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살로메디안에게 평범한 옷을 입힌다?

그런다고 감춰지는 미모가 아니었다.

“경비대장이 다가옵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긴 창을 든 경비대장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 * *

“거기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경비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뒤로 모닥불을 대낮처럼 밝힌 경비 초소가 보였다.

에단이 호쾌하게 후드를 벗어던졌다.

“막 대륙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로즈 곡마단이랍니다! 저는 곡마단을 이끄는 마담 로즈입지요!”

간드러진 눈웃음과 함께 에단이 윙크를 날렸다.

턱수염을 자르고, 짙은 화장을 한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은 닳고 닳은 중년 여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도망 다니느라 변장의 대가가 되었다더니. 진짜 여자 같네!

축제 기간에도 도서관 사서와 학자들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했다.

남들처럼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대신, 재주꾼들을 도서관 안으로 불러 그들만의 축제를 벌인다고도 했다.

작년에 에단은 곡마단 틈에 섞여 도서관 잠입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직접 마담 로즈가 되어 특별한 곡마단을 꾸렸다.

세드나 공작과 폐왕녀 출신 공작부인, 전 호위기사 현 암살자인 델마로 꾸려진 곡마단.

의심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공연도 직접 소화할 예정이었다.

“로즈 곡마단 4명이군. 사전에 전달받았다. 겉옷을 벗고 증명서를 제출하라.”

경비대장이 깐깐하게 명령했다.

에단이 증명서를 내밀며 델마를 소개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나리. 이쪽은 칼 던지기 곡예사 로키입니다.”

델마가 후드를 벗자, 짧게 자른 갈색 머리가 보였다.

서늘한 눈동자와 다부진 체격 덕분에 남장이 그림같이 어울렸다.

“칼을 찼군. 위험하지 않나?”

경비대장의 질문에 델마가 단도를 내밀었다.

“날이 뭉툭한 공연용 칼입니다.”

“이거로는 사과 하나도 썰지 못하겠군.”

허락의 뜻으로 경비대장이 고개를 까딱였다.

델마의 솜씨를 안다면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무딘 칼에 테레사의 심복들 목이 떨어졌으니까.

“이쪽은 누구지?”

경비대장의 시선이 날 향했다.

에단이 발 빠르게 나섰다.

“우리 곡마단의 자랑, 서역에서 온 불 마법사 시지푸람을 소개합니다!”

이상한 가명을 들으며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몸에 착 달라붙은 진홍빛 드레스와 붉은 벨벳 망토 덕분에 붉은 눈동자도 장식의 일부 같았다.

“어떤 마법을 보여주는 거지? 작년에 왔었던 마법사도 솜씨가 대단했는데.”

경비대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훑어봤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내 얼굴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일개 곡예사가 제 명을 따르지 않자 경비대장이 인상을 구겼다.

에단이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와 경비대장 사이에 끼어들었다.

“호호호! 나리께서 우리 마법사한테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취향도 고급지시지!”

“…….”

“시지푸람. 빼지 말고 솜씨 좀 보여 드려라! 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니?”

에단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경비대장을 달래줄 생각이었다.

우리 쪽 마신이 경비대장을 죽이려 들기 전에.

“원하신다면 보여드리지요.”

검지와 엄지를 튕겼다.

손가락 끝에서 푸른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손에서 불꽃이 나오잖아? 진짜 마법 같군!”

화들짝 놀란 경비대장이 주춤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

“영업 비밀입니다.”

불꽃을 갈무리하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영업 비밀을 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경비대장도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살로메디안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얘, 뭐 하니? 얼른 인사 올리지 않고.”

에단이 눈치를 줬는데도 살로메디안은 후드를 벗지 않았다.

위태로운 정적이 밤하늘을 메웠다.

재미난 구경을 기대했던 경비대장이 눈썹을 찡그렸다.

“넌 뭔데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

“…….”

“천한 곡마 단원 따위가 내 말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경비대장이 창끝을 살로메디안에게 겨누었다.

당황한 에단이 애교를 떨며 경비대장의 팔짱을 꼈다.

“애가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요. 한 번만 봐주세요. 호호호!”

“의심스러운 자는 입장하지 못한다!”

“아이고, 대장님!”

“후드를 벗기 싫으면 썩 꺼져!”

경비대장이 호기롭게 외쳤다.

도서관 입구에서 쫓겨나게 될까 봐 내가 살로메디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살로메디안.

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서 쫓겨나면 두고두고 원망할 거예요. 일주일 동안 살롬 뜻대로 하겠다는 약속도 끝이에요.”

“하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살로메디안이 긴 한숨과 함께 후드를 걷어 올렸다.

에단이 달뜬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을 소개했다.

“이쪽은 달에서 온 요정, 검무 추는 무희 에스메랄다입니다!”

“!”

“미녀 중의 미녀, 무희 중의 무희! 별빛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에단의 찬사가 무색하리만치 놀라운 미모가 드러났다.

화장을 진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왜 여자처럼 보이는 거지?!

경비대장은 물론 나와 델마까지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굽실거리는 금발 가발은 그의 흰 피부와 환상적으로 잘 어울렸다.

싸구려 구슬 목걸이도 살로메디안의 목 위에선 어떤 보물보다도 귀해 보였다.

꽃잎처럼 붉은 입술. 냉혹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

월등하게 큰 키도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미녀였다.

아름다움 때문에 눈이 먼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이제 됐지?”

살로메디안이 짜증스러워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후드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경비대장은 살로메디안이 보여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리. 이제 들어가서 공연 준비를 해도 될까요?”

에단이 건드리자 경비대장이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내 질문에 대답한다면 들여보내 주지.”

뭔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걸까?

허접한 곡마단에 대륙 제일의 미녀가 있다는 게 이상하잖아?

일행 모두가 긴장한 순간 경비대장이 물었다.

“검무 공연은 언제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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