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 * *
눈앞을 가리던 눈물이 메말랐다.
델마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잊혔다.
“내가 가짜 예언서라는 걸 알려줬다고?”
쇳소리가 목구멍에서 넘어왔다.
델마가 죄인처럼 머리를 푹 숙였다.
“진짜 예언서의 필사본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기억은 전혀 없……!”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 제거 마도구!
심장 박동이 기이할 정도로 빨라졌다.
이제야 테레사가 내 기억을 지운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예언서가 조작됐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테레사는 날 마신의 숲에 버린 거고!’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테레사는 왜 날 죽이지 않았을까?
마신의 숲에 버리거나,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했을 텐데?
“아이시아 님을 몰래 돕던 르윈이란 치료사를 기억하십니까?”
델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른손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꾹 누르며 답했다.
“내 은인이야. 내게 의술서를 가져다주다가 좌천됐다고 들었어.”
“르윈이 마지막까지 머물던 곳이 아발론 도서관이었습니다.”
“마지막이라면… 설마 르윈은…….”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델마가 들려줬다.
“아발론 도서관에서 사망했습니다.”
“!”
“르윈에게 은혜를 입은 역사학자가 은밀히 아이시아 님을 찾아 왔었고요.”
델마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어떤 장면이 기억 속에서 튀어 올랐다.
머리를 반으로 가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으윽.”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보였다.
주름진 눈가를 적신 눈물과 양피지 두루마리도 보였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전하!」
「당신은 누구죠?」
「르윈이 절 보냈습니다! 전하께 이 문서를 전하라고요!」
노인이 양피지를 내밀었다.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읽고 싶었지만, 뿌옇기만 했다.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아니, 벌써 쪼개진 것 같았다.
“시아!”
“아이시아 님!”
살로메디안과 델마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사라진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다.
일그러진 과거 속에서 내가 손끝을 덜덜 떨었다.
「예언서가 가짜였다고요? 역사학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하지… 그렇게 된… 저희도…….」
「어떻게 숨길 수가 있어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테레사의 죄를… 장담할 수…….」
내 목소리는 비교적 또렷했지만, 노인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되살아나지 않는 기억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지워진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썼다.
천 개의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날 덮칠 때까지.
“아악!”
비명과 함께 나는 과거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날 부축했다.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물론 분노와 낭패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이 나질 않아요. 꼭 떠올려야 하는데 할 수가 없어요!”
“시아. 진정해라!”
“살롬! 디에고의 마도구를 찾아주세요. 제가 잃은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요!”
간절함을 담아 살로메디안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마도구 후유증으로 이 고생을 하면서 또 다른 마도구를 사용하겠다고?”
“어쩔 수 없어요.”
“기억 따위 없어도 테레사의 죄를 밝힐 수 있다!”
“테레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영악해요! 제가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고요!”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살로메디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어떤 명분이 있다 해도 마도구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조바심 때문에 가슴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살롬!”
“그대가 기억 재생 마도구를 사용한다면, 나보다 테레사를 중요시한다고 생각하겠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대의 고집을 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한 억지도 부릴 수 있다.”
살로메디안이 씹어뱉듯 말했다.
날 보호하려는 그의 진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나와 살로메디안 사이에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긴 침묵을 깨고 델마가 끼어들었다.
“테레사의 측근들이 숨겨왔던 문서는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열쇠 같은 것들도 챙겼고요.”
“정말?”
“고대 마법어로 적혀있어서 읽을 순 없었지만… 쓸모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문서에 정보가 담겨있지 않을까요?”
테레사는 고대 마법어에 능통했다.
테레사의 측근들이 가진 마법어 문서라면 중요한 무언가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컸다.
델마가 두건과 복면을 챙겼다. 축 늘어진 검은 가발도.
“저는 아이시아 님께서 도난당한 물건을 되찾아오겠습니다.”
“가능하겠어? 지배인도 도망갔는데.”
“이래 봬도 암흑가에서 알아주는 암살자랍니다.”
델마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두 번째 삶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델마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와 보장된 미래를 내던지고 오직 내 복수를 위해.
“고마워, 델마.”
그런 델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델마는 그 말 한마디로 충분한 것 같았다.
“절 믿어주시는 겁니까?”
“내가 델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시아 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날 위한다면 목숨 같은 거 바치지 마. 살아서 내 곁에 있어 줘.”
“아이시아 님…….”
델마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물들었다.
델마와 비슷한 눈매를 가진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옥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도구를 만들고 있을 디에고였다.
“델마 오빠가 우리 저택에 있어!”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델마는 제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오빠는 실종됐습니다. 가족들은 테레사 손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아쿠아로드를 탈출한 거야! 지금은 공작령 전속 마도사로 활약하고 있어!”
얼떨떨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던 델마가 마른세수를 했다.
“오빠가 살아있다니… 그것도 아이시아 님과 함께……?”
“델마. 나랑 같이 세드나 공작령으로 가자.”
델마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희망이 번졌던 얼굴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아이시아 님처럼 고귀한 분 곁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기사가 아니면 용병이든 뭐든 아무거나 돼줘.”
“네?”
“살롬이 델마를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했어. 흑룡의 용병이 되어 날 지켜줘.”
“아이시아 님!”
“전속 호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팠거든.”
동의를 구하며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살로메디안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휴고도 고집을 부리지 못하겠지.”
“세드나 공. 어찌 저를 믿으십니까? 테레사의 첩자일 수도 있는데!”
“내가 그리 아둔하게 보이는가?”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물었다.
“저, 저 같은 죄인이… 아이시아 님 곁에 있을 수 있다고요?”
“정녕 그대가 주군을 배반했던 지난날을 속죄한다면, 대신하여 복수를 자청하는 충심이 남았다면 가서 증명하라. 여기서 이렇게 징징대지 말고.”
“!”
“용병이든 뭐든 아무거나든 함께 가서 나의 아내를 지켜라. 더는 그대에게 명령하지 않겠다.”
“…….”
“내 제안이 통 마음에 들지 않는가?”
델마가 더듬더듬 물었다.
나는 어릴 적 친구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거친 손이 눈물샘을 자극했지만 겨우 밝은 목소리를 냈다.
“당연하지! 우린 가족이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울 것 같지 않던 여기사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 * *
그다음 날 델마가 도난당했던 여행 가방을 가지고 찾아왔다.
내용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있었다. 마신의 성물도, 기억 재생 마도구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게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속옷도 그대로인가?”
“살롬은 그게 제일 중요해요?”
“그렇다고 몇 번이나 더 말해야 하지?”
살로메디안은 제 눈으로 속옷의 안위를 확인해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나는 그가 볼 수 없도록 몸을 돌리고 조심스레 주머니 속 내용물을 확인했다.
살로메디안이 아내 속옷에 집착하는 남자가 되지 않길 바라며.
“전부 되찾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속옷 주머니를 가방 안에 집어넣고, 냄새 차단 마도구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여전히 더럽고, 심한 악취를 풍기는 마신의 성물이 들어있었다.
“이 냄새가 반가울 줄은 몰랐네요.”
“키산드라가 그걸 목욕용으로 써보라고 했지?”
“무슨 뜻이었을까요? 선물이라고 하셨는데.”
“그냥 지껄인 말일 거다. 남 놀리는 걸 좋아하는 여자거든.”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를 향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흰소리였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이 천으로 목욕해볼 작정이었다.
“그대의 피부가 상할까 걱정이다.”
“참아봐야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까 목욕 한 번 못 해본 것이 제일 아쉽더라고요.”
“키산드라 말은 신경 쓸 것 없다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그대 뜻대로 해라. 대신 마도구는 이리 내.”
살로메디안이 빚 독촉하는 대부업자처럼 손을 흔들었다.
내가 몰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직접 간수할 작정 같았다.
“꼭 그래야 해요?”
볼멘소리를 내자마자 살로메디안이 대꾸했다.
“그대에게 남편을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정말 누가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네요.”
입술을 삐죽거리며 살로메디안에게 마도구를 넘겼다.
아쉬움이 컸지만 후련함도 없지 않았다.
정신 조작계 마도구는 너무 위험해. 디에고 같은 천재도 부작용을 막지 못했다니까.
살로메디안 말대로 예언서의 진실을 밝히는 방법은 따로 찾는 게 좋을 듯도 했다.
나는 성물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이른 아침 배달된 뜨거운 목욕물이 가득 차 있었다.
욕실 문을 닫으려는데 등 뒤에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같이 목욕할까, 시아?”
벌건 대낮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됐어요.”
내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살로메디안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필요하면 불러라.”
“그럴 일 없어요.”
정말 없을 줄 알았다.
코를 틀어막고 마신의 성물을 둘렀을 때만 해도 말이다.
* * *
벗은 몸에 마신의 성물을 감았다.
쓰라릴 정도로 피부가 따끔거렸다.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악취는 견딜 만했다. 후각은 마비되어버린 후였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의 즐거움을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목욕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욕조 안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물에 닿은 성물이 살갗을 휘감았다.
수천수만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선물이 아니라 고문이잖아요? 키산드라 님! 절 괴롭히려고 이런 거예요?
식은땀을 흘리며 버텨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최고의 갑옷일지는 몰라도 내게 성물은 여전히 더럽고 까칠한 천일뿐이었다.
살로메디안의 말대로 키산드라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진짜 못된 사람이야!”
더 거친 말을 내뱉으려는데 양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나왔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당황한 내가 손을 털었다.
불꽃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짜증이 나긴 했지만, 마력 폭주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휴고에게 마력 컨트롤법을 배운 후부터는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
“사라져. 사라져라!”
푸른 불꽃은 내 뜻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들끓는 마력을 잠재워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불꽃은 춤추는 무희처럼 너울거리며 점점 더 크게 번져갔다.
나 혼자서는 안 되겠어!
살로메디안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순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성물이 변하기 시작됐다.
투, 투명해지고 있어!!!
거무튀튀하고 여기저기에 얼룩졌던 천이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 알몸도 그대로 비쳐졌다!
“시아, 무슨 일이지?”
욕실 문밖에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나는 두 팔을 가슴 위에 모으고 빽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세요!”
“그대 마력이 요동치고 있는데?”
“저,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목욕물에 잠겨있었지만, 몸의 굴곡도 은밀한 부위도 한눈에 보였다.
푸른 불꽃을 양손에 쥔 나체 여자라니!
내 머릿속은 살로메디안에게 괴이쩍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성물에서 풍기던 악취가 사라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
피부를 찌르던 감촉이 비단처럼 매끄럽게 변했다는 것도 몰랐다.
일단 나가야 해!
욕조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목욕물이 부글거렸다.
용암처럼 들끓는 목욕물은 방울방울 하늘 위로 치솟기까지 했다.
그에 응답하듯 푸른 불꽃이 용솟음쳤다.
물과 불이 만들어내는 격정의 하모니!
부끄러움이고 뭐고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살로메디안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롬!”
“시아!”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욕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욕조 안에 몸을 웅크린 날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이상해요!”
내가 울먹이다시피 외쳤다.
“무슨 일을 한 거지?”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마력이 조금 흘러나간 것 같은데…….”
“성물에 마력을 주입했다는 건가?”
“이 물 좀 어떻게 해주세요!”
물방울로 변한 목욕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내버려 뒀다간 투명한 천으로 감싼 알몸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해쓱한 얼굴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이건 물의 마력이다.”
“네?”
“시아. 그대가 지금 물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물과 불을 동시에 가진 건 쌍 속성뿐이잖아?!
도리질 쳐봤지만, 날 휘감고 있는 건 분명 물의 마력과 불의 마력이었다.
성물이 마력의 성질을 바꾼 걸까? 아니면 다른 마력을 만들어낸 건가?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넘어왔다.
「헬레나의 딸. 물과 불 모두를 가진 아이.」
「이것은 불과 물의 심장을 보호하던 마신의 피막이다. 네게 아주 큰 선물이 될 거야.」
이게 무슨 선물이야? 재앙이지!
이를 악물고 키산드라를 저주했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시아, 성물을 벗어라!”
“벗으라고요?!”
“그대 마력은 이미 날 뛰어넘었다. 물의 마력을 잠재우려면 성물을 벗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그대 심장은 불의 마력으로 가득해. 갑자기 생긴 물의 마력과 충돌하면 위험하다!”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무섭도록 진지했다.
마력 탓에 심장 발작에 시달렸던 나였다.
키산드라의 함정에 걸려 또다시 심장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벗으려 해도 젖은 몸에 들러붙은 성물이 벗겨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안 벗겨져요!”
“뭐라고?”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물방울과 푸른 불꽃에 휘감긴 탓에 훤히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혹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울먹이는 날 보던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내가 벗어둔 옷을 길게 찢기 시작했다.
“살롬. 뭐 하는 거예요?”
살로메디안이 찢은 옷으로 제 눈을 가렸다.
“안 볼 테니 걱정하지 마.”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을 가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 빠른 속도였다.
물의 마력을 끌어 올린 그가 성물을 잡아챘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저항하는 대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참아라, 시아.”
살로메디안의 손에서 마신의 피막이 벗겨졌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물방울들이 힘없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핏줄을 타고 흐르던 낯선 마력도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푸른 불꽃이 기름이라도 부은 듯 거세게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했다.
“이번엔 진짜 마력 폭주예요!”
* * *
떠돌이 신관을 찾기 위해 델마는 암흑가 정보시장을 찾았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배타적인 곳이라고 들었으므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암흑가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인맥을 쌓은 적도, 무리를 지은 적도 없었던 델마였다.
뜨거운 환대를 받았을 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흑발 암살자라면서? 진짜 대단하던데!”
“당신 때문에 테레사 똘마니들이 오줌을 질질 싼다더군! 아주 후련해! 아주 잘했어!”
“나도 암살을 의뢰할 수 있을까? 꼭 죽여야 하는 놈이 있거든.”
“큰일 하는 사람 괴롭히지 마! 이분은 보통 암살자가 아니라 정의의 사도라고!”
정의의 사도라는 말에 델마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정보시장에 모인 불량배, 도둑, 첩보원, 암살자 등등은 한목소리로 델마를 사도라 불렀다.
“정의의 사도 이상이지! 악녀 테레사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걸?”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테레사 똘마니를 죽일 정보가 필요해?”
“당신한테는 공짜로 주지! 말만 해!”
대놓고 테레사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지만 아쿠아로드인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질 듯한 분노가 쌓여있었다.
고작 암살자를 정의의 사도로 칭송할 만큼.
무조건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백성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테레사는 권력으로 찍어 눌렀다.
애정과 존중 없이 백성들을 제 뜻대로 휘두르며 그 위에 군림하려 했다.
테레사를 향한 백성들의 조용한 분노가 시작되고 있었다.
“에단이라는 떠돌이 신관을 찾고 있다. 치료 마력을 사용할 줄 알고 매춘부들과 친밀하다. 짙은 남색 머리칼을 가졌고.”
“그 남자를 왜 찾는데?”
“테레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암흑가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무거운 정적이 공간을 짓눌렀다.
일인용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보 길드장이 천천히 일어섰다.
“길드장의 이름으로 총동원 명령을 내린다. 3일 이내로 에단이란 놈을 끌고 와.”
“와아아아!”
길드장의 명령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들을 들뜨게 한 것은 분명 희망이었다.
악녀를 물리치고 새 하늘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델마는 이 광경을 아이시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전에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진짜 왕세녀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어떤 왕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분이 돌아오셨다!’
델마는 피가 배어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아이시아는 아쿠아로드의 왕세녀가 아니라, 세드나 공작부인이었다.
그렇게 만든 건 테레사를 포함한 아쿠아로드인들이었다.
테레사에게 속아 아이시아에게 오명을 덧씌웠다.
저주의 씨앗이라 부르며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그녀가 살아있음에도 죽은 사람 취급하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아이시아는 아쿠아로드를 버리지 않았다.
힘으로 테레사를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정당한 절차에 따라 테레사를 끌어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쿠아로드의 백성들이 고통받을까 봐.
처절하게 버림받았음에도 외면하지 못하는 아이시아의 외사랑에 델마는 몸을 떨었다.
‘아이시아 님. 당신은 평생 공작부인이시겠지요? 아쿠아로드인들은 당신처럼 현명한 국왕을 모실 수 없겠지요?’
만약 테레사의 악행이 밝혀지고, 예언서가 조작된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시아가 저주와는 무관한 타고난 성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델마의 가슴에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열기가 들끓었다.
아이시아가 있어야 할 곳은 세드나 공작령이 아니라 아쿠아로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공작부인이 아닌 아쿠아로드의 국왕이 되어야 했다.
‘세드나 공에겐 미안하지만, 아이시아 님을 내 손으로 왕좌로 모셔다드리겠다.’
델마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보 길드장이 예리한 눈으로 델마를 관찰하고 있었다.
* * *
마력이 폭주했을 때 살로메디안이 날 진정시켰던 방법은 항상 물이었다.
욕조나 웅덩이로 데려가 내 몸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잠재웠다.
하지만 욕조엔 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찢은 옷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진정해, 아이시아! 건물 전체를 태울 셈이야?!’
불안과 조바심 탓인지 불꽃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았지만, 막지 못한다면 큰 화재를 피할 수 없었다.
“시아! 내게 집중해!”
살로메디안이 외쳤다. 그 주위로 물의 마력이 안개비처럼 솟아올랐다.
촉촉하고 뿌연 안개가 날 감쌌다.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강바람처럼 시원했다.
금방 터질 것처럼 내달리던 심장도 속도를 늦췄다.
“불꽃이 줄어들고 있어요!”
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살롬의 안개비는 효과가 있었다.
푸른 불꽃이 주춤거리며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밖으로 방출되었던 불의 마력이 몸 안에 응축되었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잠시 잠잠해진 심장이 다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혈관이 뜨겁고,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눈앞이 노래지면서 갈증이 치밀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날 불렀다. 그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날 채운 열기가 채찍질당한 말처럼 날뛰었다.
불꽃이 사라졌는데 왜 이러는 거지? 이 열기를 잠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껏 경험했던 마력 폭주와는 분명 다른 질감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만든 안개도 내 몸을 점령한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살로메디안이 붙들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시원한 촉감에 조금이나마 구원받는 듯했다.
그와 닿아있고 싶었고, 그것만이 이 지독한 열기로부터 도망칠 방법인 것 같았다.
“시아, 잘 들어.”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게 남은 이성은 금방이라도 끊어져버릴 듯 위태로웠다.
이성이 끊어진 뒤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엄습했다.
어쩐지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했었던 것 같았다!
경험했다고? 도대체 언제?
기억 속에서 흐릿한 장면이 어른거렸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과 원시림이 뿜어내는 상쾌하고도 습한 공기.
심장 옥죄던 고통, 죽은 마물 새, 내 앞에 나타난 백금발의 남자.
심장이 쿵쿵 가슴을 때렸다. 얼마나 세차게 치는지 가슴팍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혈관을 휘도는 뜨거운 피. 하얗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정신.
이것은 열기가 아니라 끓어 넘치는 욕망이었다!
“시아. 두려워하지 마라.”
살로메디안은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날 도와줄 방법도 이미 아는 듯했다.
그가 망설인 것은 오직 하나,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닿기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살롬……!”
내가 두 팔로 살로메디안의 목을 감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물의 마력이, 그 안에도 가득 채워져 있을 힘이 날 끌어당기는 듯했다.
살로메디안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안은 채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안아주세요.”
“!”
“안아주세요, 마신의 숲에서처럼.”
“!”
화살에 맞은 맹수처럼 살로메디안이 움찔했다.
나는 살로메디안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탄성과 충격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에 응답하듯 내 심장이 빠르게 내달렸다.
“기억난 건가?”
“…….”
“우리가 그날 사랑을 나눴다는걸?”
약간 쉰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 뒤늦게 날 찾아왔다.
살로메디안이 내 심장을 뜯기 전 그와 나눴던 대화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저는 각하를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쉰 적 없었다.」
「그날이라니요?」
「그대가 내 것을 훔쳐 간 날. 계속 시치미를 뗄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잊은 척도, 잊은 것도 용서하지 못한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때는 그가 노여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어떨 때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거나 수줍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훔친 건 심장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순결, 그걸 가져갔던 거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래서 나를 도둑이라 부른 건가?
그는 마도구 때문에 내 기억이 지워졌다는 걸 몰랐다.
내가 자신을 모르는 척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내 심장을 뜯어간 거였다.
살로메디안은 줄곧 내가 기억을 떠올리기를 바랐다.
아마도 심장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었던 첫날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첫날밤이 아니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운명이 만들어낸 충돌이었을 뿐이다.”
“살롬.”
“그대와 내가 사랑을 확인한 지금이 우리의 첫날밤이다.”
살로메디안이 선언하듯 말했다.
한 손으로 내 턱을 위로 올린 후 그가 입술을 내렸다.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시원함이 느껴지는 촉감은 나만이 아는 살로메디안의 비밀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음미했다.
매끈하고도 부드러운 입술에서 다디단 호흡이 쏟아져 내렸다.
갈증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더욱 목이 말랐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건 살로메디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훤히 드러난 내 목덜미로 향했다.
얕은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나갔다.
“으음…….”
입술을 질끈 깨물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내 허리를 옭아매던 그의 손이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뜨거운 숨을 머금은 입술이 목덜미의 여린 살갗을 빨아 당겼다.
간질이는 촉감이 열기가 되어 온몸을 다시 달구었다.
벗어나고 싶기도, 더 느끼고 싶기도 한 이중적인 본능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둥글게 말린 발끝이 덜덜 떨렸다.
그가 날 껴안고 욕실 밖으로 나섰다. 달라진 공기 탓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럴수록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매달렸고 그는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가 나를 안은 채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출렁이는 침대의 움직임 탓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진정시킬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온 신경이 날 내려다보는 그림 같은 미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시아.”
“살롬.”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수줍기만 했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그러다 갈구하듯 치뜬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과 평소보다 몇 배는 뜨거운 체온.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고통스러우리만치 달콤한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허리가 덜덜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러다 또다시 불기둥을 뿜어낼까 봐 걱정이 앞섰다.
“또 날 태우려고?”
살로메디안의 장난스러운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은밀한 파동이 온몸을 점령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살로메디안을 응시했다.
“살롬이 식혀주고 있잖아요?”
“아직도 모르겠어?”
“뭘요?”
“내가 그대 불꽃에 부채질하고 있다는 걸.”
그 말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니, 말로 하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지난 몇 달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살로메디안과 나는 서로에게 매달렸다.
누가 더랄 것도 없이 우리는 집요했다.
나는 그 덕분에 활활 타올랐고, 그는 나 때문에 흠뻑 젖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듯 하나가 되었다.
물도 불도 영원히 우리를 가르지 못할 것 같았다.
물과 불이 서로 만나 별이 되고 안개가 되었다.
* * *
델마가 에단을 찾는 동안 살로메디안과 나는 선발대로 떠났던 흑룡기사단과 접촉했다.
기사단이 관찰한 결과 아발론 도서관의 경비는 왕궁보다 삼엄했다.
예언서가 보관된 금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도 국왕의 허락을 받은 극소수의 역사학자뿐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조각조각 떠오른 기억과 정보를 짜 맞춰봤다.
“역사학자들은 예언서가 조작된 것을 알고 있었어요. 테레사와 공범이 돼서 입을 다물었던 것뿐이죠.”
기다란 소파에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던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모았다.
“헬레나 왕비 전하께서 건재하셨을 때가 아닌가? 그들은 왜 서녀에 불과한 테레사에게 붙었을까?”
“예언서를 확인해야 비밀이 풀릴 것 같아요.”
“도서관 금고를 털어야 한다는 거군.”
“이번엔 우리가 진짜 도둑이 되어야 해요.”
테레사가 암살을 시도했을 때, 도둑의 습격을 꾸몄다.
살로메디안은 테레사의 계책을 비틀어 도둑인 양 마도구 제작 기법을 빼앗았다.
그때는 시늉만 해도 괜찮았지만 이번에는 진짜 도둑이 되어야 했다.
문제는 보안 마도구로 겹겹이 쌓인 금고를 어떻게 터느냐였다.
“살롬. 전문가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떤가요?”
“암흑가 쪽으로 가보자는 건가?”
“정보 길드장이 총동원 명령을 내렸다잖아요. 떠돌이 신관을 찾기 위해서. 도둑 길드 쪽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불가능하다.”
“왜요?”
“내가 도둑 길드 쪽을 박살 내놨거든.”
살로메디안의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요?”
“델마가 여행 가방을 찾아온 직후에.”
“거긴 뭐 하러 가셨는데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궁색하게 말을 돌렸다.
내리깐 시선, 자신감이 없는 작은 목소리.
거기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정말 도둑들 손목을 자른 거예요? 제 속옷을 훔쳤다고요?”
“…부러뜨리기만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최대한 조용하게 있어도 들킬 판인데! 세드나 공작이 왔다고 광고라도 하시죠?”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잔소리에 살로메디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남편의 나쁜 버릇을 고칠 좋은 기회였다.
“미안하지 않으세요? 델마랑 기사들이 애쓰는데, 우리는 이틀 동안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숙소 방에 틀어박혀서 열중했던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후끈한 열기와 미끈거리는 땀.
피부와 피부가 겹쳐지고, 숨결과 숨결이 맞닿던 시간들.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날 보고 살로메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아, 아발론 도서관 출입증이나… 마신의 성전 초판본 같은 거요.”
이번엔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살로메디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비누 냄새가 섞인 따스한 체향.
후각이 평소보다 민감하게 그의 체취를 감지했다.
“솔직해져야지, 시아.”
살로메디안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목소리를 깔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시치미를 뗐다.
“솔직하게 말씀드린 거예요. 제 머릿속엔 복수뿐이라고요.”
“그게 전부라고?”
“당연하죠!”
살로메디안이 흐응, 하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은 무슨 뜻이에요?”
“뭐 잘못됐나? 솔직한 아내를 보려면 침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
“어젯밤 그대는 무척 솔직했거든. 그대가 어리광 피우는 걸 처음 봤을 정도니까.”
“어, 어리광이라고요?!”
“아기 고양이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지 않았나?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으로 내 콧날을 톡 건드렸다.
순간 찌릿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이 눈앞에 튀어 올랐다.
그의 가슴 위에서 꼬물거리는 나, 그런 내 손목을 잡고 다시 침대로 넘어뜨리는 살로메디안.
그 뒤에 이어진 열락과 흥분 같은 것들 말이다.
“살롬!”
눈을 감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런 대화만 하다간 복수는커녕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하하.”
살로메디안의 웃음소리가 시원스레 울렸다.
놀리지 말라고 진지하게 경고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 내어 웃는 살로메디안은 태양의 소년처럼 환하게 빛났다.
곱게 접힌 눈매와 단단한 콧날.
부쩍 예리해진 턱선과 유난히 혈기가 도는 피부.
날 바라보는 눈빛엔 의심할 수 없는 한결같은 사랑이 담겨있었다.
내가 이 남자의 아내란 사실이, 그의 모든 걸 가졌다는 게 꿈만 같았다.
살로메디안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려고 했는데.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진짜 공작부인은 바로 나였다.
계약과 의무로 묶여있었던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된 것이다.
키산드라가 준 두 번째 기회를 포기했더라면 어땠을까?
가슴 뻐근하도록 벅차오르는 행복도, 오직 그만이 채워줄 수 있는 갈증도 몰랐을 거였다.
회귀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키산드라를 향한 고마움이 다시금 밀려왔다.
심장을 통해 살로메디안도 내 감정을 읽고 있었다.
“나도 고맙고, 행복하다.”
그가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균형을 잃고 소파 위로 풀썩 쓰러졌다.
“흣.”
검은 머릿결이 출렁거리고,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이 바닥에 떨어졌다.
살로메디안은 어느새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목을 찍어 눌렀다. 욕심 많은 정복자이자, 사랑스러운 포식자.
살로메디안과 맞닿은 손목이 얼얼했다.
이제 익숙해질 법한 열기가 낯설게도 아랫배를 간질였다.
“시아.”
그의 목소리가 농밀해졌다.
날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욕망이 번졌다.
나 역시 끓어오르는 불꽃을 감출 길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주는 쾌락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틀 동안 새롭게 도전하고, 거듭 복습했기 때문이리라.
그가 내 입술을 훔치기 위해 다가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살로메디안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잠, 잠깐만요.”
그를 밀어내려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안에 계십니까?”
델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 한번 버둥거렸다.
“살롬, 비켜요.”
원망을 담아 바라봐도 살로메디안은 손아귀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뭉근한 열기가 번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턱이 아프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야릇한 신음이 잇새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이시아 님?”
델마가 다시 한번 노크했다.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깊고 집요하게 날 탐하고 있었다.
델마가 용건을 바로 말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떠돌이 신관 에단을 잡아 왔습니다!”
* * *
한 남자가 델마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상상했던 ‘에단’과는 너무 달랐다.
“이 사람이 그 떠돌이 신관이라고?”
나는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온몸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가리켰다.
흐리멍덩한 두 눈과 기름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턱수염.
새치가 섞인 짙은 남색 머리칼도 빨지 않은 걸레처럼 보였다.
델마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매춘부들에게 확인했습니다. 피에타의 아비인 에단이 틀림없습니다.”
“그 아이는 무척 예쁘고 영리한 아이인데…….”
피오넬의 총명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떠돌이 신관 에단은 매춘부들을 홀릴 정도로 뛰어난 미남자라고 했다.
치료 마력도 고위급 신관에 버금간다고 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술에 찌든 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신이 정말 에단입니까? 아쿠엘 교에 몸담았던 치료 신관?”
“그렇다면 어쩔 건데?”
“사실대로 말해주십시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웃기는군. 내가 에단이 아니라면 왜 끌고 왔지?”
그의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걸걸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도 경계심이 가득했다.
“당신들 목적이 뭐야? 잘 차려입은 귀부인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고?!”
“진정하십시오.”
“혹시 날 왕세녀에게 바치려는 건가?”
“테레사를 아십니까?”
“아쿠아로드에서 그 고귀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오오, 테레사! 아쿠엘 여신의 총애를 받는 미래의 국왕!”
실핏줄 터진 눈동자를 굴리던 에단이 연극 투로 말했다.
더럽고 시끄러운 남자였다.
살로메디안이 공들여 조성했던 핑크빛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살로메디안은 무표정했지만 살기로 똘똘 뭉쳐있었다.
“당신이 테레사의 친부입니까?”
“난 빌어먹는 거지일 뿐이다.”
“발뺌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에단은 겁에 질린 것 같기도, 분노에 휩싸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남자는 대체 뭘까.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과 브리니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테레사 맞습니까?”
“…….”
“테레사가 브리니티와 왕궁으로 들어간 후, 피오넬……. 아니, 피에타의 어머니인 수잔과 결혼했죠?”
나는 그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날 바라보는 에단의 눈동자에 분노가 담겼다.
“그렇다면 어쩔 것이냐?!”
“…….”
“오냐! 나도 죽여라! 수잔이랑 내 자식들 모조리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라고!”
에단이 몸을 뒤틀며 악을 썼다.
벌겋게 핏발 선 눈동자와 사방으로 튀는 침이 미친개를 연상시켰다.
에단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살로메디안이 물로 만든 수갑으로 그의 양팔을 결박했다.
물방울로 에단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흡! 크읍!!”
차가운 눈으로 에단을 훑어본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제대로 찾은 것 같긴 한데 상태가 좋지 않군.”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쳐버린 건가?”
“정신이 이상해질 만한 일을 당하기는 했죠.”
결박당한 에단이 찢어질 듯 커다래진 눈으로 나와 살로메디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읍읍! 으으읍!”
할 말이 있는지 그가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살로메디안은 에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신 이상자는 법정에 세울 수 없다. 테레사를 실각시키는 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게 기적이긴 해요.”
“쓸모가 있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겠어.”
“흐음… 난감하네요.”
재갈을 풀어주지 않자, 에단이 머리로 바닥을 쿵쿵 내려 찧었다.
“으흐흡! 흡흡!”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살로메디안에게 재갈을 풀어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물방울이 제거되자마자 에단이 외쳤다.
“호, 혹시 아이시아 전하십니까?”
아까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나와 살로메디안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테레사를, 그 애를 처벌하기 위해 오신 겁니까?”
에단이 다시 한번 물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간절한 눈빛이었다.
에단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아이시아입니다.”
“아아, 이럴 수가……!”
에단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행색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걸인이 아니라, 곤란에 처한 신사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빨리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부들부들 떨던 에단이 무릎걸음으로 내 발밑까지 다가왔다.
“왕세녀 전하를 뵙습니다.”
에단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죄는 제게 있습니다. 모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테레사를 전하께 데려가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참혹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에단이 굵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테레사를 제게 데려오셨다니요? 에단 씨와 저는 초면입니다만.”
“전하께서는 모르실 수밖에요. 12년 전, 디오스 축제에서 있었던 일이니까요.”
“축제라고요?”
“국왕 내외분과 왕세녀 전하께서 행차하셨던 그 자리에 테레사와 브리니티를 데리고 갔습니다.”
“!”
“거기서 테레사는 전하께 도움을 받았고요! 남자애들한테 걷어차이던 꼬마, 기억나십니까?”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12년 전 디오스 축제.
모의 전투를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을 보며 눈썹을 응그리던 8살의 나.
「네가 축제를 바꿔보도록 하려무나. 나쁜 전통은 사라져야 마땅하단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너는 왕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인이 될 테니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후 왕실 특별석에서 내려왔다.
시녀와 호위기사들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사내애들에게 둘러싸여 얻어맞고 있었던 아주 작은 소녀.
그 애가 테레사였다고?!
“믿겨지지 않으시겠지요. 테레사는 작고 볼품없는 아이였으니까요. 머리칼도 하늘색이 아니었고요.”
에단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희뿌연 과거 속에서 몇 개의 장면이 튀어 올랐다.
“기사를 시켜서 소년들을 쫓으라고 했어요. 아이의 상처도 치료해줬고요.”
빼빼 마른 팔다리에 흉터가 가득했다.
머리칼도 푸른색이라기보다 진흙색에 가까웠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가엾어서 동전을 쥐여 줬다.
그 동전이 얼마나 큰돈인지는 몰랐다.
나는 그저 아이가 배불리 먹길, 빼빼 마른 손이 조금은 통통해지길 바랐을 뿐이다.
“제가 왕궁에서 만난 테레사는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어요. 축제장에서 만난 아이와는 딴판이었는데…….”
“축제 1년 후 테레사는 국왕 폐하의 서녀로 인정받았지요.”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전하. 테레사에게 금화를 주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에단의 물음에 내가 눈썹을 모았다.
“동전을 준 건 기억나요.”
“동전이 아니라, 대금화 10개 가치의 로열 금화였습니다. 그 금화가 테레사의 인생을 바꿔놨고요.”
“네?”
“아니, 테레사의 사악함이 금화를 만나 빛을 발했다고 해야겠지요.”
에단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의 회상은 나와 살로메디안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 * *
테레사가 금화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에단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귀한 왕세녀 전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딸이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테레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쁜 년! 건방진 년! 다시 만나면 짓이겨 버릴 거야!”
“엄청나게 큰돈을 주신 분께 무슨 소리냐! 이건 우리 가족 10년 치 생활비라고!”
테레사가 7살 난 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로 물었다.
“그렇게 큰돈을 왜 남한테 줘?”
“…뭐라고?”
“돈이 얼마나 많으면 금화를 막 주냐고? 걔는 대체 뭔데?!”
“말조심해라, 테레사. 그분은 미래의 국왕이 되실 왕세녀 전하라고!”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했어.”
“나이는 상관없다. 그분은 국왕 폐하의 하나뿐인 따님이시니까.”
“그러니까 왜 걔는 공주고! 나는 창녀의 딸이냐고!”
“고집부리지 마. 신분 차이를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잖아?”
“걔는 비단옷 입고, 왕관까지 썼다고! 어른들도 막 부리고! 날 괴롭히던 마크 패거리도 쫓아냈어!”
“…….”
“날 거지 취급하고! 금화를 주면서 얼마나 잘난 척했는데! 기사들만 없었으면 죽여 버렸을 거야!”
테레사의 말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갈까 봐 에단이 얼른 딸의 입을 막았다.
에단의 손을 비집고 테레사가 독기 오른 작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걔는 모든 걸 가졌는데, 나는 창녀의 딸이잖아! 나도 엄마처럼 창녀가 될 거래!”
테레사가 악을 질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섬뜩해서 에단은 당황했다.
딸을 향한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에단이 애써 자상하게 물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소릴 했니?”
“난 절대 창녀가 되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네겐 마력이라는 놀라운 힘이 있단다. 너도 아빠처럼 신관이 될 수 있어.”
“싫어. 나는 그 애처럼 공주님이 될 거야!”
“테레사!”
“아빠는 돈도 안 받고 사람들을 치료해주잖아! 깡패들한테나 맨날 얻어맞고. 가난뱅이 신관이니까!”
딸의 신랄한 말에 에단은 할 말을 잃었다.
어린 딸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은 주먹을 말아 쥔 테레사가 당돌하게 외쳤다.
“마크가 그랬어. 공주는 원래 하늘색 머리칼이래. 근데 지금 공주는 검은색 머리라서 가짜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말을 하다간 목이 잘릴 수도 있어!”
테레사는 찔끔하기는커녕 겁에 질린 에단을 비웃었다.
“아빠는 죽는 게 무서워? 창녀촌에 사느니 죽는 게 나은데.”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나는 아빠나 엄마처럼 살기 싫어. 왕궁에서 공주처럼 살 거라고!”
테레사가 에단 손에서 금화를 낚아채 뛰쳐나갔다.
그때만 해도 에단은 어린애의 투정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면 테레사도 잊어버릴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브리니티의 한마디가 테레사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국왕도 별거 아니야. 난 국왕이랑 잔 적이 있다고!”
“엄마가 어떻게 국왕이랑 자? 어제처럼 생선 장수랑 잤겠지!”
아직도 비린내가 난다는 듯 테레사가 코를 감싸 쥐었다.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킁킁거리던 브리니티가 테레사의 뺨을 갈겼다.
“아얏!”
“못 믿겠으면 수잔한테 물어봐. 네가 태어나기 전, 그 남자가 검은 돌다리에 온 적이 있다고!”
“국왕이 창녀촌엘 왔다고?”
“그땐 국왕인 줄 몰랐지. 그 짓거리 할 때, 모자를 안 벗어서 미친놈인 줄 알았거든.”
“왜 모자를 안 벗었는데?”
“바보야. 하늘색 머리칼을 보이면 국왕이라는 게 들통나잖아!”
“!”
“미약으로 슬쩍 보내버린 다음 모자를 벗겨봤지. 그땐 특이한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축제에서 본 그 남자더라니까!”
“진짜 엄마가 국왕이랑 잤어?”
“이년이 어미 말을 못 믿네! 알았으면 돈을 잔뜩 뜯어내는 건데! 아이고, 내 팔자야!”
아까워서 미치겠다는 듯 브리니티가 발을 동동 굴렀다.
테레사가 에단을 흘낏 바라보다가, 속옷 속에 숨겨둔 로열 금화를 꺼냈다.
“엄마. 이 돈이면 내 머리칼을 하늘색으로 만들 수 있어?”
“너 그 돈 어디서 났어?! 훔쳤냐?”
브리니티의 손이 금화로 향했다.
테레사가 재빨리 금화를 뒤로 감췄다.
“대답이나 해! 엄마 손님 중에 마도사도 있다며?!”
“부탁해 볼 수는 있겠지. 염색은 왜 하겠다는 거야? 그런다고 네가 공주님이 될 거 같아?”
“될 거야.”
“뭐라고?!”
“엄마는 국왕이랑 잔 적이 있잖아! 날 데려가서 국왕의 딸을 낳았다고 하면 돼!”
에단도 브리니티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7살 난 아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계획이었으므로.
“테레사!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해준 거니?”
“마크 아빠가 그랬어. 금화를 쓰면 사라지지만, 투자하면 더 많은 금화를 가질 수 있다고.”
“마크 아빠가 너한테 공주님 흉내를 내라고 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 아저씨는 머리통에 똥만 찬 멍청이라고!”
“그럼 누가 너한테…….”
“당연히 내가 생각한 거지! 엄마가 국왕이랑 잤다며! 자면 아기가 생기는 거잖아?”
“!”
“내겐 마력이 있어! 머리칼도 푸른빛이야. 아빠가 입 다물고, 엄마가 장단만 잘 맞추면 왕궁에서 살 수 있다고!”
테레사의 흰자위가 번뜩였다.
이기적이고 냉정한 구석이 있지만 고대 마법어와 독초 사용법을 익힐 정도로 영민한 아이였다.
에단은 자신이 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단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테레사의 몸 안엔 타고난 악랄함이 들끓고 있었다.
미움, 자격지심, 질투, 욕심…….
거기에 뛰어난 지능이 더해져 악한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신전에서 쫓겨난 뒤 처음으로 에단은 여신에게 물었다.
여신은 자신을 저버린 신관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잘만 하면 팔자 고치는 거지!”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브리니티는 테레사의 꾐에 넘어갔다.
“절대 그러면 안 된다, 테레사!”
“아빠! 이건 기회야!”
“국왕 폐하를 속이다니! 곧 들통날 거고, 우리 가족은 처형당할 거야!”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레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아빠는 빠져.”
“뭐라고?!”
“완전히 사라지라고. 엄마랑 나는 새 인생을 살 테니까. 어차피 아빠는 도움도 안 됐잖아?”
그때 테레사의 표정은 아직도 에단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테레사 말이 맞아. 방해하지 말고 꺼져, 에단. 자선 사업은 딴 년한테 빌붙어서 해!”
브리니티도 한마디 거들었다.
“치료 마력도 쓸 줄 안다길래 같이 도망친 건데 쓸데가 없어! 넌 치료비도 안 받아오잖아?”
금화가 생긴 후로 그들 가족을 잇고 있던 가느다란 끈이 끊어졌다.
테레사와 브리니티는 에단을 남기고 창녀촌을 떠났다.
거지꼴로 방황하던 에단을 거둬준 건 브리니티의 친구였던 매춘부 수잔이었다.
수잔과 살림을 합친 뒤에도 에단은 테레사가 걱정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애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다.
에단은 수잔 몰래 테레사와 브리니티의 동태를 살폈다.
브리니티의 단골손님이었던 마도사의 뒤를 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딴 오두막에 숨은 테레사는 왕의 서녀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살을 찌우고, 고급 예법을 익히는 데 금화를 썼다.
테레사가 결국 하늘색 머리칼이 되었을 때,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테레사를 위해 염색약을 만들어줬던 그 마도사의 시신이었다.
* * *
“그 뒤엔 어떻게 됐나요?”
내 물음에 에단이 아랫입술을 떨었다.
“수잔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저를 테레사가 살려둘 리 없으니까요.”
“…….”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레사가 왕의 서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려웠겠군요.”
“피에타의 막냇동생이 태어난 즈음 왕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애들한테 피해가 될까 봐 저만 사라졌습니다.”
딸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기구한 남자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테레사를 디오스 축제에 데려가지만 않았더라면… 모두가 살아있었을 겁니다.”
“만약 제가 테레사에게 금화를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에단이 눈물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왕실 특별석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축제장에 가지 않았더라면요?”
“전하!”
“그런 식의 후회는 끝이 없습니다. 그냥 제 살을 파먹고 정신을 무너뜨릴 뿐이에요.”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에단을 응시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현재뿐이에요.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만 할 건지, 아니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건지.”
“…….”
“에단, 당신은 무슨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에단이 피가 배어나도록 세게 입술을 물었다.
“테레사를 막을 겁니다. 죽은 수잔과 아이들의 복수를 할 겁니다!”
“수잔에겐 아이가 몇 명 있었죠?”
“첫째 피에타, 둘째 마리아, 막내 피에르… 이렇게 셋입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는 에단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수잔과 마리아, 피에르의 복수만 하세요.”
“네?”
“피에타는 살아있어요. 피오넬이란 새 이름으로 공작저에서 아주 잘 적응하고 있어요.”
“피, 피에타가 살아있다고요?”
“제 마법어 과외 선생이에요. 치료술과 마법어를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아버지에게 배웠군요.”
“!”
에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갈 때 나는 살로메디안을 돌아봤다.
살로메디안이 자랑스럽다는 듯 날 내려다봤다.
“에단이 큰 빚을 졌군. 이제 에단은 그대 말이라면 기름통을 지고 불에 뛰어들 거다.”
에단은 살아있는 딸의 소식을 들으며 오열했다.
나도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빠를 만나게 될 피오넬.
오빠를 만나게 될 델마.
나에겐 다시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없었지만 그들의 재회가 내게도 큰 기쁨이 될 거였다.
‘어머니. 저도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 세드나 공작령에서 검은 매가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