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 *
살로메디안의 정중한 부탁이 날 충격에 빠뜨렸다.
시녀 일을 남편이 해도 되는 건가? 이것도 제국 예절이야?
옷 벗겨주는 남편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심장 박동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살로메디안의 손이 셔츠의 첫 번째 단추에 닿았을 때,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말았다.
“잠시만요!”
“꾸물거리다간 목욕물이 다 식을 텐데?”
“그래도……!”
기세 좋게 가겠다느니, 당당하겠다느니 하는 결심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내 앞에서 은밀한 미소를 머금은 살로메디안 탓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찬물로 씻으면 감기 걸린다.”
아직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살로메디안이 단추를 풀었다.
투둑.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단추가 떨어져 나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단추는 살로메디안이 다음 단추를 노릴 때까지 멀쩡히 옷깃에 붙어있었다.
온몸의 피가 얼굴에 모였다. 맥박이 뺨에서 쿵쿵 뛰는 것만 같았다.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농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리라.
쿵쿵!
거친 노크 소리에 어깨를 파득 떨었다.
이내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계십니까? 수도 경비대에서 나왔습니다! 불심 검문이 있겠으니 문을 여십시오!”
셔츠의 두 번째 단추를 풀던 살로메디안이 멈칫했다.
저 멀리 현실 밖으로 날아가던 내 정신도 가까스로 돌아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낯선 방문자가 아니었다면 끓어오르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감히 우리를 방해해?”
그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쿵쿵!
경비대원은 문을 열기 전까지 돌아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검문을 피하시면 불순분자로 오해받습니다! 순순히 문 여시지요!”
살로메디안이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 하나 죽이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분노가 그의 몸에서 피어나오고 있었다.
그에게 후드를 건네며 내가 입을 벙끗거렸다.
‘머리칼 가리세요! 정체 들키시면 안 돼요!’
살로메디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낮췄다.
“마력도 방출하지 마시고요. 마력 비도 안 되고, 살인도 안 돼요!”
한마디씩 더할 때마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묵묵히 후드를 입기는 했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
키산드라에게서 흘러나온 어둠과 비슷한 파괴적이고 음험한 기운이 살로메디안을 감싸고 있었다.
망했네. 누가 봐도 살아있는 마신이야. 관광차 왔다고 둘러대면 통하려나?
낙담한 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이내 정중하지만 쾌활한 어조가 들려왔다.
“아이고. 늦은 시간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살로메디안의 낯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번 보고, 다시 봐도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건 내 남편 살로메디안이었다.
너무 열 받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목욕을 방해한 원흉에게 칼도 겨누지 않다니?!
살로메디안의 깜짝 변신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싸구려 갑옷을 입은 경비대원이 살로메디안의 미모에 흠칫 놀랐다.
“느,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신고가 들어와서요.”
나도 매일 놀라는데 경비대원은 오죽할까.
멍하니 살로메디안을 바라보던 경비대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경계 가득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아쿠아로드엔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디오스 축제 시즌인 줄도 모르셨다던데요?”
살로메디안이 난처하다는 듯 손으로 뺨을 감싸고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그 모습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
“저희는 신혼여행 중이었습니다.”
신혼여행이 뭔데요?
하마터면 불쑥 물을 뻔했다.
내 얼굴에 한겨울 북풍보다 매서운 무표정이 걸려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신혼여행이라… 부인께서 무척 미인이시네요?”
날 훑어보는 경비대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밝혀내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뜯어보는 시선이었다.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도 시퍼런 살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아쿠아로드로 급히 넘어오느라 축제 일정을 몰랐습니다. 그것만으로 신고당할 줄도 몰랐고요.”
“정말입니까?”
“신분증명서를 보여드리죠.”
바바라가 특별 제작한 신분증명서를 살로메디안이 내밀었다.
“디안 칼로하스 씨와 그 부인 시아 칼로하스 씨로군요. 칼로하스 은행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저희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은행을 아십니까?”
“칼로하스 은행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경비대원이 휘둥그런 눈으로 되물었다.
나는 그제야 살로메디안이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을 연기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경비대원이 경계를 풀 때쯤 살로메디안이 금화를 쥐여 줬다.
“저희 부부 때문에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몇 달 봉급을 웃도는 거액을 보고 경비대원이 당황했다.
그것도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금화를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이러려고 방문한 건 아닌데…….”
뜻밖의 횡재에 기뻐하는 것인지,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경비대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싱긋 웃었다.
“어려울 땐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정말 어렵긴 합니다. 봉급도 석 달이나 밀렸으니까요.”
“나라에서 봉록도 주지 않는다고요? 밤낮없이 고생하는 분들께요?”
이해를 받아서 기쁘다는 듯 경비대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한번 좌우를 살피던 경비대원이 입을 열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부인의 검은 머리칼 때문에 신고가 들어갔을 겁니다.”
“흑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요즘 아쿠아로드는 흑발 암살자 때문에 난리입니다. 하아.”
“암살자라니! 아쿠아로드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 나라 아닙니까?”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살로메디안이 되물었다.
겁에 질린 도련님 연기를 그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살롬은 연기를 했어도 대성했을 거야. 전쟁터가 아니라 극장으로 보냈어야 해.
살로메디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여성들 때문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을 테지만.
“귀족들을 죽이고 다니는 여자 암살자 때문에 나라 전체가 비상입니다. 그 여자가 흑발이거든요.”
* * *
경비대원이 다시 한번 날 바라봤다.
흑발을 가진 여자 암살자라니?
선발대에게도 듣지 못한 소식이었다.
예기치 않은 불심 검문과 금화 한 개 덕분에 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수도를 지키는 경비대가 극비 사항을 술술 털어놓다니…….’
우리 쪽에 큰 이득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죽은 폐왕녀의 유령이라는 소문도 있답니다.”
폐왕녀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살로메디안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죽은 폐왕녀라니요? 흑발과 적안을 가진 왕녀는 크로티무스 제국 황족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건 가짜 소문입니다.”
경비대원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했다.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건 나와 살로메디안 쪽이었다.
“폐왕녀를 추종하는 몇몇 정신병자들이 지어낸 말이죠. 저주의 씨앗 따위가 어떻게 황족이 되겠습니까?”
“…….”
“폐왕녀가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었다고 떠드는 모양인데. 전부 조작된 거랍니다.”
“아쿠아로드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당연하죠! 죽은 폐왕녀를 미화하려고 거짓 소문을 내는 인간들은 다 잡혀가는걸요?”
경비대원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민심이 흔들릴까 봐 날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거짓을 진실처럼 퍼뜨리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핍박하면서.
테레사는 꼼꼼하고 성실한 악녀였다.
절대 쉽게 상대할 적도 아니었다.
“폐왕녀는 죽었습니다. 아쿠아로드를 위해서 잘된 일입니다.”
경비대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아쿠아로드인들이 날 버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살로메디안이 화제를 바꿨다.
“암살자가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까?”
“숫자는 많지 않지만 전부 왕세녀 전하의 측근들입니다. 차기 내각 실세가 될 분들이었죠.”
“그 정도 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신기하군요.”
“왕세녀 전하께서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불쾌하지 않게요.”
“그 외국 관광객 중에 우리 부부는 포함되지 않는 겁니까?”
정중했지만 질책이 담긴 말이었다.
경비대원이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규칙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인증을 써드리겠습니다. 불심 검문을 또 받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살로메디안이 금화 하나를 더 꺼내자, 경비대원이 손을 내저었다.
“한 개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넣어두시지요.”
“아닙니다! 먹여야 할 입이 많아서 받기는 했지만… 저도 늘 이런 것은 아닙니다.”
경비대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뇌물을 받은 것에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봉급만 제대로 나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요.”
“요즘 같아서는 암살자가 왕궁으로 쳐들어갔으면 싶습니다.”
“…….”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십시오.”
아차, 싶었는지 경비대원이 쩔쩔맸다.
살로메디안이 사람 좋은 미소를 선보였다.
“물론이죠. 저희는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는걸요.”
“가, 감사합니다. 부인과 함께 내려오십시오. 확인증에 도장을 찍어드리겠습니다.”
경비대원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분의 확인증을 손에 넣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아쿠아로드를 떠나있었나 봐. 암살자는 뭐지?’
나 말고 테레사를 노리는 적이 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테레사의 측근들이 살해당한 것도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테레사가 경계를 강화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터였다.
새로운 적을 물리칠 악독한 방법을 연구 중일 테고.
무거운 마음으로 목욕물을 다시 주문했다.
뜨거운 목욕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폭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폐허가 된 방이었다.
* * *
아무리 찾아도 여행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가방 안에 든 모든 것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마신의 성물은 물론 속옷 주머니 속에 든 기억 재생 마도구 까지!
“도둑이 들었나 보군요.”
지배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축제 시즌엔 도둑이 기승을 부리지요. 재수가 없으셨네요. 쯧쯧.”
그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게 호텔에서 할 말이에요?”
“죄송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요?”
“귀중품은 금고에 보관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물건의 도난은 보상해드릴 수 없습니다.”
“불심 검문을 받았잖아요!”
“그건 부인의 사정이죠.”
지배인은 당당하고도 뻔뻔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 차원에서 내일 조식은 무료로 제공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도둑맞은 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그거야 부인과 도둑만 알지 않을까요?”
이쯤 되면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게 분명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짐과 동시에 내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히익!”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지배인이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지배인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네놈도 도둑들과 한패지?”
내 입술 사이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나갔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호텔에서 우리만 도둑을 당했는데 그게 우연일까?”
“지배인인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내가 대륙 금화를 가졌다는 건 너밖에 모르잖아?”
“고, 고작 그것 때문에…….”
“경비대에 신고한 것도 너지?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 방을 턴 거고!”
나와 살로메디안이 자리를 비운 건 10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순간에 도둑들은 여행 가방을 가지고 사라졌다.
마치 경비대가 올 줄 예상했다는 듯.
“내 머리칼을 제대로 본 것도 너뿐이야. 이 도둑놈아!”
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기름을 부은 듯 푸른 불꽃도 활활 타올랐다.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배인이 기절했다.
축 늘어진 지배인을 발로 툭툭 차면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조심하라 했으면서. 그대는 마음껏 활개 치는군.”
“기절할 줄 몰랐어요.”
“그대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
“도둑맞은 성물과 마도구는 어쩌죠?”
“잘 찾아보면 나오겠지.”
역사에 남을 만한 보물이 사라졌는데도 살로메디안은 태연했다.
“죄송해요. 오자마자 금고에 넣었어야 하는데.”
“정말 실망이군, 시아.”
꾸벅 사과하는 날 보고 살로메디안이 읊조렸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지 않았다면 크게 서운할 뻔했다.
“쓸데없는 자책은 이제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살롬.”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대는 내 아내니까.”
살로메디안에게 심장을 뜯긴 직후 들었던 말이었다.
환상이라고 믿었던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
우연이나 행운만은 아니었다.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거머쥐지 못했을 오늘이었다.
‘난 세드나 공작부인이야. 좀도둑 때문에 자책하는 건 마신의 아내에게 어울리지 않아.’
자세를 고친 내가 살로메디안을 돌아봤다.
“도둑들이 장물의 진가를 알아채기 전에 되찾아야 해요. 지배인을 취조하면 뭔가 나올 거예요.”
석류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살로메디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래야 내 아내답지.”
“이 기회에 암흑가도 돌아봐요. 바바라가 소개장을 써준 사람이 있어요.”
“정보는 그쪽이 빠를 거다.”
“남은 문제는… 갈아입을 속옷이 없다는 거죠.”
남의 속옷은 뭐 하러 가져가? 팔지도 못할걸!
아니, 팔려나?
우두두 돋은 소름을 문지르는데,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속옷이 없어졌다니?”
“여행 가방이 사라졌잖아요. 속옷도 거기 안에 있었죠.”
“…….”
“마도구를 속옷 주머니 안에 숨겨 놓았었거든요.”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바뀐 건 그때였다.
“좀도둑이 내 아내의 속옷을 훔쳐 갔단 말인가?!”
“그, 그렇게 되나요?”
“천하의 죽일 놈들!”
살로메디안의 입에서 노성이 튀어나왔다.
성물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도 담담하던 남자였는데?
말릴 겨를도 없이 그가 혼절한 지배인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끄아아악학학!”
길고 긴 비명이 호텔에 울려 퍼졌다.
눈물을 철철 쏟으며 바르작대는 지배인에게 살로메디안이 사자후를 토했다.
“당장 도둑들을 찾아와! 여성 속옷에 손댄 자들의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릴 테니까!”
* * *
발뺌하던 지배인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살로메디안이 중요 부위를 다시 걷어찬 덕분이었다.
도둑 일당을 조종하는 우두머리가 따로 있다는 것만 빼면 대부분 내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장물은 도둑 길드장에게 넘어갔을 겁니다. 사기꾼이었던 저를 호텔 지배인으로 만든 것도 그 사람입니다.”
살로메디안이 훌쩍이는 지배인에게 재갈을 채웠다.
그는 빈민굴 뒤편에 자리한 후미진 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요?”
썩은 생선 냄새와 시궁창 냄새,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을 돌아보며 물었다.
“거짓말은 아닐 거다. 나머지 하나를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게 뭔데요?”
“자식을 낳는 데 꼭 필요한 기관이 있다. 원래 두 개인데, 이놈한테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지배인의 아랫도리로 향했다.
지배인이 주먹을 물고 서럽게 흐느꼈다.
“딱 봐도 우범 지대네요.”
쓰러지기 직전의 판잣집과 낡은 천으로 얼기설기 엮은 천막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어깨를 수그린 채 쓰레기를 뒤졌다.
모닥불 주위엔 문신과 근육을 자랑하는 불량배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옆으로 술병이 뒹굴었고, 갈비뼈가 드러난 고양이들이 노란 눈을 치떴다.
후드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우리에게 이목이 쏠렸다.
뒷골목 사람들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우리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날 쫓고 있었다.
“우릴 미행하는 자가 있다.”
살로메디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둑 길드일까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최정예 기사다. 마력도 상당하군.”
“테레사의 수하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입국 사실이 벌써 테레사 귀에 들어갔다면… 서둘러 아쿠아로드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돌아가서 전략을 다시 짜는 것이 좋아.”
살로메디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미행을 생포해서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잡히는 즉시 자결할 거다. 내가 저지하기 전에.”
“그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란 말이에요?”
“나도 좀 놀랐다. 아쿠아로드에도 저런 인간이 있다니… 흑룡기사단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살로메디안의 후한 평가에 다시 한번 놀랐다.
흑룡은 출신 불문하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기로 유명한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이 테레사의 수하일지도 모르는 자를 스카우트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우우웅!”
지배인이 비교적 커다란 천막을 가리키며 몸을 꿈틀거렸다.
“네놈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이냐?”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지배인이 붕붕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살롬.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그대 속옷에 손댄 놈들의 목을 자르고 속옷을 되찾을 거다.”
“지금 속옷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겐 제일 중요한 문제다. 나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것을 도둑 따위가…….”
살로메디안이 분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그의 관심사는 사라진 성물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내 속옷에 손댄 도둑들을 처벌하는 거였다.
경비대원을 상대할 때 보였던 인내심과 연기력은 어디로 간 건가.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도둑들이 순순히 장물을 내놓을 리 없어요.”
“안 내놓으면 빼앗으면 된다.”
“숨기면요?”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살짝 도와주면 되지.”
살로메디안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 도움을 받고 중요 부위를 잃은 지배인이 울먹였다.
“문제를 어렵게 만들지 마세요.”
“다른 생각이 있는가?”
“돈으로 사는 건 어떨까요? 그들에겐 더러운 천과 만년필일 뿐이잖아요. 그것보다는 금화가 낫죠.”
“더러운 천과 만년필이 금화를 주고 살 만한 물건이라는 것만 발각될 거다.”
“그래도 괜찮아요. 도둑들은 거래를 시도하거나, 우리보다 비싼 값을 쳐줄 사람을 찾을 테니까요. 우린 그때 뒤를 치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았다.
“미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게 설명한 그가 날 안고 훌쩍 몸을 날렸다.
빈민가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을 만한 곳까지 미행을 유인할 계획으로 보였다.
살로메디안에게 안긴 채 뒤돌아봤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린 날렵한 그림자가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시아. 걱정하지 마라.”
“살롬이 있는데 제가 왜 걱정하겠어요?”
“바람직한 태도야.”
“별말씀을요.”
태연한 척했지만, 상대는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인정한 실력자였다.
테레사에게 꼬리를 밟혔다는 것도, 테레사가 강한 무인을 수하로 두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소란을 틈타 도망친 지배인도 불안을 부채질했다.
이러다 성물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살로메디안이 막다른 골목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우리 뒤를 쫓던 검은 인영도 속도를 줄였다.
“여기서 상대하시려고요?”
인적이 드물기는 했지만, 상대를 제압하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이 싸움을 벌이면 경비대가 출동할지도 몰랐다.
“이상하군.”
“뭐가요?”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네?”
“공격 의지도 없어. 방어도 하지 않고 있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방어도 하지 않고 살로메디안에게 접근할 수가 있지?
이 사람이 대륙 최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살로메디안이 인정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외모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정체를 알았을 거였다.
5미터 정도를 사이에 두고 우리와 검은 그림자가 마주 섰다.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몸.
복면과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
그러자 바람결에 탐스러운 흑발이 흩날렸다.
검은 비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칼을 보고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인가 봐요!”
“소문의 암살자일지도 모르겠다.”
“테레사의 수하들을 죽였다는 여자 암살자요?”
살로메디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의 수하가 아니라면 왜 우릴 미행한 걸까?
내 의문이 사라지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후드를 벗었다.
“살롬?”
살로메디안의 백금발이 달빛을 튕겨내며 눈부시게 빛났다.
어둠도, 더러운 골목도 그의 미모를 훼손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로메디안이 후드를 벗은 이유를 몰랐다.
“또 만나는군.”
흑발 여인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살롬도 아는 사람이에요?”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아는 사람이다.”
“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내 앞으로 흑발 여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여인이 복면을 내렸을 때. 나는 살로메디안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델마!!”
* * *
방울방울 떨어지는 아이시아의 눈물을 보면서 살로메디안은 생각했다.
‘우는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날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나?’
솔직해지자면 다른 생각을 먼저 했다.
‘나도 울려보고 싶다. 슬픔이 아니라 희열 때문에.’
제 가슴에 안겨 눈가가 빨개지도록 우는 아이시아를 상상했다.
그것만으로 배 속이 뜨거워졌다.
언제까지 상상만으로 달아올라야 할까?
앞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지금은 심장으로 전해지는 아이시아의 행복에 만족하기로 했다.
“델마!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죄인의 몸으로 차마 아이시아 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나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아이시아 님을 뒷골목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걸음걸이가 너무 낯익어서… 저도 모르게 뒤를 쫓았던 겁니다.”
“델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데?”
“제가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아무리 세드나 공과 동행 중이 시라지만 이곳은 아쿠아로드에서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내 질문에 답해. 델마는 왜 암흑가에 있던 거야?”
델마가 말없이 검은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동그란 두상과 남자보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가 드러났다.
델마가 쓰고 있던 가발을 움켜쥔 채 아이시아가 물었다.
“델마가 소문의 암살자였어?”
“…….”
“말해 봐. 정말 델마가 테레사의 측근들을 죽였냐고?!”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델마가 짓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리깐 속눈썹과 움켜쥔 주먹에 그녀가 견뎌왔던 치욕이 맺혀있었다.
아이시아의 어여쁜 붉은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굴러떨어졌다.
“살인을 탓하는 게 아니야. 델마는 누구보다 기사도를 중요시했잖아?”
“…….”
“내가 아는 델마는 암살을 치욕으로 여겼어. 암살을 하느니 자결을 택할 사람이라고!”
살로메디안이 과거 제 앞에 무릎 꿇었던 델마를 떠올렸다.
왕실 호위기사 가문의 후계자. 그에 걸맞은 실력과 기개를 가진 여기사.
그녀의 고결한 눈빛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록 암살자가 되었다 해도 말이다.
“아이시아 님.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델마!”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주군의 고통을 5년이나 외면한 인간은 이미 기사일 수 없습니다.”
“내 명령 때문이었잖아! 델마까지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이시아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델마에게 매달렸다.
타인 앞에서 이토록 솔직하게 감정을 토하는 아이시아는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라 이건가.
‘이 여자는 내가 모르는 아이시아를 알고 있겠지. 미소도, 눈물도, 추억도…….’
어린 아이시아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소녀였을까.
전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미래의 국왕으로 성장하던 아이시아.
테레사에게 짓밟히기 전의 아이시아를 그려 보면서 불쑥 튀어 오르는 질투심을 가라앉혔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 델마였다.
“제게 충성심이 있었다면 아이시아 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탈출을 했을 겁니다. 저는 가문의 안위 때문에 주군을 저버린 비겁자입니다.”
델마의 단정한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아이시아가 눈물을 흩뿌리며 도리질 쳤다.
“델마는 내 말을 따랐을 뿐이야. 탈출했다면 테레사가 우리 둘 다 죽였을 거고.”
“그랬다면 저는 기사로 죽을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암살자가 된 거야? 속죄하려고?”
“…….”
“바보야! 내가 그걸 바랄 것 같아?!”
아이시아가 작은 주먹으로 델마의 가슴을 때렸다.
아무런 힘도 담기지 않은 주먹이었지만 델마는 고통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저 따위 때문에 울지 마십시오. 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델마…!”
“남은 인생은 아이시아 님의 복수를 하는 데 바칠 겁니다.”
그래서 델마는 검은 가발을 쓰고 주군의 원수들을 죽였다.
사람들은 폐왕녀의 유령이 돌아왔다고 떠들어댔다.
그사이 그녀는 얼마나 무너졌고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살로메디안이 바보스럽도록 충성스러운 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은 자들은 단순히 테레사의 측근이 아닌가 보지?”
“가짜 예언서를 만드는 데 가담한 인물들입니다.”
델마의 말에 아이시아가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델마도 가짜 예언서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습니다.”
“설마 어마마마께서 알려주신 거야?”
“헬레나 전하께서요? 아닙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델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델마의 눈동자가 낯선 빛깔로 일렁였다.
살로메디안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솔직하게 고하라. 네가 진심으로 주군께 사죄하고 싶다면.”
델마의 시선이 아이시아를 향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델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게 진실을 알려주신 분은… 아이시아 님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