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50)

31

* * *

“일단 잡아떼긴 했는데… 바넷사 언니가 눈치챈 것 같아요.”

우울한 얼굴로 바바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불안이 내게도 옮겨붙었다.

“떠보는 거 아니었을까요? 성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부쳤잖아요?”

“그냥 한 말 같지는 않았어요. 폐하의 강제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내놓는 게 좋을 거라고 했거든요.”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간 걸까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바바라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성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각하와 시아, 저, 휴고를 빼면 딱 한 명밖에 없어요.”

“그게 누구죠?”

“피오넬이죠. 정보를 유출할 사람도 피오넬뿐이고요.”

바바라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도 모르게 변명조로 대답했다.

“목소리를 잃고 피오넬은 많이 바뀌었어요. 새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최근 시아가 피오넬을 보살펴 준다는 거 알아요.”

“…….”

“피오넬이 고대 마법어도 가르쳐 준다고요?”

“훌륭한 가정 교사예요.”

“그 애를 너무 믿지 마세요, 시아.”

단 한 마디뿐이었지만, 바바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바바라를 갈랐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한 번 배신한 인간은 언제든 또 배신하는 법이에요.”

바바라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열심히 살아보려는 어린애를 의심하는 거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나도 바바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단지 아무리 애써도 평생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피오넬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진짜 피오넬이 잘못을 했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은 제일 먼저 피오넬을 의심할 테니까.

자세를 바르게 고친 내가 바바라를 응시했다.

“아니요. 피오넬 말고도 성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어요.”

바바라의 연두색 눈동자에 의구심이 번졌다.

“빈센트도 모르는데, 또 누가 아는 거죠?”

“테레사요.”

“!”

“피오넬에게 성물과 신전에 대해 알려 준 것도 테레사였어요.”

“테레사가 우리 황실과 접촉했다고요? 말도 안 돼요!”

바바라가 숨 가쁘게 부정했다.

그러나 테레사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 아무도 단정할 수 없었다.

“폐하는 시아에게 흠뻑 빠져있어요! 시아를 괴롭힌 테레사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리 없다고요!”

“폐하께 직접 접근하지 않았다면요? 제3자를 시켜서 은근슬쩍 정보만 흘렸을 수 있잖아요.”

“대체 누가 그런…….”

“최근에 생니콜 자작령에서 오던 항의 서한이 뚝 끊겼다고 했죠?”

내 물음에 바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생니콜 자작과 테레사가 손을 잡았다는 건가요?”

“가설에 불과하지만요.”

“그는 바실리키교 신학자이자, 각하의 추종자예요! 마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간이라고요!”

“바바라도 항의 서신 봤잖아요? 그는 살롬이 자길 일부러 외면했다고 믿고 있어요.”

공작저가 마물 떼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살로메디안은 생니콜 자작령의 마물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급히 귀환해야 했다.

그 때문에 생니콜 자작은 하루가 멀다고 항의 서신을 보내왔다.

최근 서신에는 살로메디안에 대한 개인적 원망과 사무적인 말투로 에두른 저주까지 담겨있기도 했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바바라가 무릎을 탁, 쳤다.

“바넷사 언니한테 들었어요! 온천 문제 때문에 생니콜 자작의 자문을 구했다고요!”

“자작이 움직였다면 그때였겠네요.”

“!”

“테레사에게 얻은 정보를 자신이 알아낸 연구처럼 꾸몄을 수도 있어요. 황실에 잘 보일 기회잖아요?”

“으아악! 망할 머저리가 뭘 노리는 걸까요? 우리랑 싸워봤자 지들 대가리만 터진다는 걸 뻔히 알 텐데!”

바바라가 연두색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테레사가 쓸데없이 자작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거예요. 살롬에게 반감을 가진 귀족을 모으는 걸 수도 있고요.”

“아주 할 일이 많겠네요. 제국 귀족 반 이상이 각하를 싫어하니까요!”

“살롬은 백성들한테 인기가 많지 않나요?”

“귀족들은 달라요. 토벌하는 시늉만 하고 떠났다는 둥, 자기 영지는 외면했다는 둥, 배가 불러서 똥을 싸는 놈들이죠.”

바바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 얼굴에서 한겨울 북풍보다 매서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우리 기사들이 피를 흘리고 내 남편이 고생하는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요.”

“시아?”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귀족들에겐 인생 참교육을 시켜주겠어요.”

움켜쥔 주먹을 보고 바바라가 땀을 뻘뻘 흘렸다.

거친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악당 노릇은 제가 할 테니까, 시아는 천사 역을 맡아주세요! 여신도 좋고요!”

“전 천사가 아니에요. 여신은 더더욱 아니고요.”

“시아!”

“저한테는 살롬과 바비를 포함한 공작령 사람들이 제일 소중해요. 소중한 이들을 괴롭히는 인간은 용서하지 않아요.”

바바라가 두 손을 모으고 날 올려다봤다.

내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아! 너무 멋져요! 무패의 여기사 키산드라 님을 보는 것 같아요!”

“바바라도 키산드라 님을 아세요?”

“소문으로만 들었죠. 170세란 나이와 달리 무척 미인이시고, 개방적인 분이셨다던데요?”

너무 개방적이어서 남자 가슴 근육만 보면 사족을 못 쓰시죠.

쓰디쓴 미소를 삼키고 바바라에게 사과했다.

“이런 시국에 아쿠아로드로 떠나게 되어서 미안해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빈손으로 돌아와도 괜찮으니까 부디 건강 조심하세요. 시아가 다치는 순간 공작령은 진짜 끝이에요!”

“조심할게요.”

“가능하면 테레사는 산 채로 끌고 와 주세요.”

“왜요?”

“제 손으로 그 여자 낯짝을 후려치고 싶거든요. 아니, 그냥 오려버릴래요.”

바바라의 손에서 호신용 단도가 번뜩이고 있었다.

* * *

살로메디안은 자신이 큰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시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대륙 최강의 기사가 아닌 것 같다.”

착잡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이시아가 말고삐를 채어 속도를 늦췄다.

하나로 높이 묶은 흑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드레스를 벗고 남장을 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조금도 감춰지지 않았다.

“살롬보다 강한 기사가 있다고요?”

“그래. 나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다.”

“그게 누군데요?”

“아이시아 세드나 공작부인.”

이름을 불린 아이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나 했네요.”

“그대는 지혜까지 겸비했으니 내가 패하는 것이 당연하지.”

“마차는 싫다고 해서 삐치신 거예요?”

삐쳤냐는 물음에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거리 여행을 위해 그는 최고급 두 마차를 구매한 것은 사실이었다.

평생 남이 대령해준 것만 사용하던 살로메디안이 생전 처음 시도한 쇼핑이었다.

무려 마차 내부까지 직접 챙겼다.

아이시아가 피곤할까 봐 거위 털 쿠션을 넣은 좌석을 주문했다.

벨벳 쿠션과 실내등, 벽걸이형 은촛대까지 꼼꼼하게 골랐다.

아이시아의 아름다운 흑발을 연상시키는 흑마도 8마리나 사들였다.

바바라가 예산을 내주지 않아서 아끼던 보검 한 자루를 팔아야 했다.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마차를 아이시아는 단번에 거절했다.

“너무 화려해요. 정체가 발각되면 끝장이라는 거 아시죠?”

“하지만…….”

“그래도 안 돼요. 마차보다 말이 훨씬 빠르기도 하고요.”

맞다. 마차보다는 말이 빠르다.

어려서 무슨 교육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시아는 기마병보다 승마 기술이 뛰어났다.

그러나 말을 탄 채로는 아이시아의 어여쁜 붉은 눈을 마주 볼 수 없지 않나?

그녀의 손을 제 뺨에 올려놓을 수도 없었다.

덜컹거리는 좌석이 아닌 제 무릎 위에 아이시아를 올려놓을 일도 시도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상의 상황도 꿈꿔보기는 했다.

약간은 위험하고, 그보다 더 아찔한 상황 말이다.

“아쿠아로드에 놀러 가는 거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 많다고요.”

아이시아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절로 부루퉁해졌다.

“테레사의 정체도 밝혀야 하고, 키산드라를 죽일 방법도 찾아야지.”

“그런데 왜 심통을 내세요?”

“내가? 설마.”

“출발할 때부터 계속 투덜거리셨잖아요.”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지. 감히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으니까.”

제 말투가 유치하다는 것쯤은 살로메디안도 알고 있었다.

이래봤자 아이시아의 마음을 끌기는커녕 비웃음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게 여행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신혼여행.’

살로메디안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귀족과 부유한 평민들은 결혼 직후 여행을 떠난다.

짧게는 3박 4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국내외 명소들을 둘러보며 부부의 시작을 기념하며 정을 다지는 것이다.

신혼여행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살로메디안의 가슴은 낯선 열기로 가득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신혼여행도 가지 않다니!

살로메디안은 그럴싸한 결혼 예물도, 프러포즈도 없이 납치하듯 아이시아를 데려왔다.

물론 아이시아 쪽에서 바란 일이었다.

그렇다고 빚진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공작부인이 된 후 아이시아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있었다.

‘온천이라도 멀쩡했다면 덜 미안했겠지만…….’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가 공작부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바바라에게 훌륭한 욕실을 갖춘 숙소를 예약하라 일렀다.

욕조엔 아이시아의 눈동자처럼 붉은 장미꽃잎을 뿌려두라고 지시했고.

하지만 그 숙소 역시 아이시아가 취소시켰다.

“고급 숙소는 소문이 빨리 퍼져요.”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에요. 살롬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더 위험하다고요!”

“그럼 어디에서 잘 생각이지?”

“당연히 노숙이죠.”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아이시아가 되물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살로메디안이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혼 첫날밤은 언제 보내는 거지?’라는 볼썽사나운 물음을 토했을 것이다.

“하아…….”

길고 긴 한숨을 내쉬는 살로메디안을 향해 아이시아가 물었다.

“살롬. 어디 불편하세요?”

티 없이 순수한 그 얼굴이 살로메디안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아주 많이 불편하다. 너무 오랫동안 지나치리만치 많은 것들을 참아왔거든.’

키산드라가 놀려댔던 것처럼 살로메디안은 아직까지도 아이시아와 한 침대를 쓰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발휘하고 싶은 건 인내심이 아니었다.

정열적이고 남성적인 힘이었지!

“시아. 그대는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가?”

살로메디안이 불쑥 물었다.

아이시아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잡혔다.

“어떻게 살롬처럼 멋진 남자가 남자로 보이지 않을 수가 있나요?”

꾸밈없이 솔직한 말에 약간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을 기다리는 건 장미 꽃잎이 뿌려진 침대가 아니라 차디찬 길바닥이었다.

“날 남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뭐가요?”

“노숙 말이다. 그대와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싶지 않아. 이번 여행 목적을 생각하면 노숙은 정말 말도 안 될…….”

살로메디안이 말을 맺기도 전에 아이시아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응?”

“고급 숙소로 다시 잡도록 할게요.”

“고… 급?”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깔끔한 곳에서 묵도록 해요.”

아이시아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꿨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가늘게 떨렸다.

‘이제야 진심이 전해진 걸까? 아니면 아이시아도 한 번 더 호텔에 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린 걸까?’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심장이 날뛰었다.

오늘 밤이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원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술이 말랐다.

무엇보다 아이시아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신혼여행이 아니면 어떤가.

아이시아와 한 침대를 쓰게 될 텐데!

오래 미뤄온 거사인 만큼 제대로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불태웠다.

그런 살로메디안을 보면서 아이시아가 활짝 웃었다.

“토벌 원정 때문에 노숙은 질리신 거죠?”

도자기처럼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보면서 살로메디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시아는 자신의 미모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었다.

남자의 욕망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괴롭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이시아의 미소는 티끌 한 점 없이 해맑았다.

* * *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덕분에 아쿠아로드 왕도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가 택한 곳은 평민과 귀족이 같이 사용하는 중급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맞닥뜨렸다.

“방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죄송합니다만, 디오스 축제 시즌이라서요.”

잘 차려입은 지배인이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사과했다.

예약도 없이 찾아온 우리를 탓하는 눈빛이었다.

두꺼운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디오스 축제가 뭐지?”

“디오스 축제를 모르십니까?”

“아는 것을 묻는 바보도 있나?”

면박을 당한 지배인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흠흠. 천재 마도사였던 디오스를 기리는 축제입니다. 전 대륙에서 관광객이 몰릴 정도로 유명하죠.”

“…….”

“손님들도 관광차 오신 건 아니셨습니까?”

지배인은 그제야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나와 살로메디안의 정체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아쿠아로드를 떠난 지 1년도 안 됐는데, 축제 시즌을 잊어버리다니.

스스로의 아둔함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방이 하나 남았다고 했죠? 주세요.”

“저희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밖에 남지 않았습니만?”

지배인은 평민 차림의 우리가 스위트룸 숙박료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발끈하기 전에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테이블 위에 대륙 은행에서 발행된 대금화 한 개를 올려놓았다.

아쿠아로드 금화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금화를 보자마자 지배인이 낯빛을 바꿨다.

“귀빈을 몰라뵀습니다! 바로 방으로 안내해드리지요.”

* * *

방은 스위트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제국 황족의 삶에 익숙해져버린 내게는 지나치게 휑한 내부와 구식 가구가 거슬렸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후드를 벗은 살로메디안이 다행이란 투로 말했다.

‘이런 방에 만족할 정도로 살롬은 노숙을 싫어하는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친 막사에서 생활하며 사투를 벌여온 살로메디안이었다.

나와 함께인 일상에서까지 노숙을 하고 싶을 리 없었다.

고급 마차를 준비한 것도 승마라면 지긋지긋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살로메디안의 괴로움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생각만 앞세운 것이 미안했다.

창밖을 흘낏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확실히 관광객이 많군. 디오스 축제가 그리 유명한 축제인가?”

“왕실 마도구 경연대회와 치료 마력 경진대회가 있어요.”

“마도사와 신관들이 구경거리가 되나?”

“마도구로 모의 전투를 하거든요.”

“아.”

“전투에서 다친 이들을 치료하면서도 실력을 겨루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피가 난무하는 잔인한 축제예요.”

“그렇게 피가 보고 싶으면 전쟁터로 갈 것이지.”

살로메디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아쿠아로드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나는 디오스 축제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왕세녀로서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을 때도 괴롭기만 했다.

쓸데없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축제였다.

왕도로 몰려든 신관들을 볼 때면, 우리가 축제를 벌일 때 그들이 돌보던 환자들이 죽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이런 축제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8살 무렵 왕실 특별석에 앉아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는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가리키셨다.

「바쁜 농번기가 끝났잖니? 긴 겨울로 접어들기 전에 사람들은 웃고, 마시고 싶은 거지.」

「사람들이 다치는 걸 보면서요?」

「디오스 축제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아이시아.」

「어마마마도 싫어하시잖아요? 미간이 찡그려져 있어요.」

「호호. 우리 딸은 관찰력도 뛰어나지.」

「이 축제는 잘못됐어요. 꼭 전투를 해야 하나요? 좀 더 안전하고 즐겁게 축제를 즐길 수 없을까요?」

「네가 축제를 바꿔보도록 하려무나.」

「왕국의 전통을 깨게 될 텐데요?」

「나쁜 전통은 사라져야 마땅하단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너는 왕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인이 될 테니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했다.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아쿠아로드로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테레사에게 학대당했던 5년이란 세월도 꿈만 같았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가 날 맞아주실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로메디안을 보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

‘약속을 못 지켜서 죄송해요. 어머니. 나쁜 전통을 바꾸기는커녕 왕국 역사상 가장 초라한 왕세녀가 되었어요.’

이제 내 땅은 아쿠아로드가 아닌 세드나 공작령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도 모두 제국인이었다.

디오스 축제는 여전히 피를 뿌리고 있었고, 그 피를 즐기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어머니는 지금의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시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쌌다.

심장 깊이 박힌 우울함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어머니는 제가 왕국 역사상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거라고 믿으셨어요.”

“훌륭한 분이시군. 통찰력도 뛰어나시고.”

살로메디안의 농담에 희미하게 웃었다.

“완전 틀리셨죠. 저는 세드나 공작령을 위해 살고 있으니까요.”

“공작부인이 된 걸 후회하는가?”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공작부인이 되지 못했다면 저는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

“말을 타면서 봤는데 나라가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테레사의 장난감으로 연명하던 5년 동안 나는 왕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탈출했다가 잡혀 온 적은 있지만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할 여유는 없었다.

“5년이면 많은 게 바뀔 세월이다.”

“하지만 아쿠아로드가 5년 전보다 더 더럽고, 가난해질 줄은 몰랐어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점 매대는 텅텅 비어있고, 시장에는 거지들만 가득해요. 이 호텔에 있는 사람들도 외국 관광객들뿐이에요.”

어느 나라든 백성들의 삶은 귀족보다 비참하고, 팍팍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쿠아로드는 뿌리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랑했고, 내가 지키고자 했던 백성들도 신음하고 있었다.

“성녀라 추앙받던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현명한 왕세녀를 축출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

“그대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간악한 악녀다.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면 오히려 이상하지.”

살로메디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위로해주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 속으로 던져지는 것 같았다.

“테레사를 무너뜨리면 달라질까요?”

“시아.”

“백성들은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제가 괜한 짓을 벌이는 게 아닐까요?”

살로메디안은 대답 대신, 강인한 팔로 날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쿠아로드는 그대를 버렸는데, 그대는 아쿠아로드를 버리지 못하는군.”

“제가 바보 같죠?”

“아니. 존경스럽고 어여쁘다. 그대의 어머니 말씀이 옳았어. 그대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여인이다.”

살로메디안의 곧은 눈빛이 흔들리는 날 붙들었다.

나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머니께 예지력이 있었나 봐요. 한 번도 제게 훌륭한 국왕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지?”

“역사상 고귀한 여인이나, 훌륭한 여인이 될 거라는 식으로만 말씀하셨어요.”

살로메디안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살롬. 왜 그래요?”

“시아. 어머니께서 아쿠엘교 신자라고 하셨지?”

“그런데요?”

“제국에서 유학도 하셨고?”

“맞아요. 그걸 왜 물으세요?”

“어머니께서 정말 미래를 알고 계셨던 거 아닐까?”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농담하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지혜와 치유를 관장하는 아쿠엘은 미래를 보는 여신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예지력이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황당한 가설이었다.

“에이, 설마요.”

“그대를 실각시킨 것도 예언서 아니었나? 왕실에서 예언자가 또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말도 안 돼요!”

괜한 말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테레사가 우릴 공격했을 때도 그토록 쉽게 무너졌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헬레나 전하는 예언서를 믿지 않으셨다고 했지. 언제가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도 하셨고. 내 기억이 틀린가?”

“막연한 희망 아니었을까요? 제가 누명을 벗기를 간절히 바라셨으니까요.”

“어머니께서 왜 유학을 간 건지 아는가?”

살로메디안이 질문을 바꿨다.

잠시 멍해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라면 몰라도 젊은 여성, 그것도 대귀족 영애가 타국에서 유학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략결혼 상대가 그쪽에 있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머니께서 유학을 다녀오셨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을 뿐.

그것이 어머니께 예지력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헬레나 왕비 전하의 유학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나?”

“어머니의 가문은 폐족 됐어요.”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텐데.”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사용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어요.”

테레사는 어머니의 가문을 잔혹하게 몰락시키는 것으로 귀족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테레사가 전하고 싶은 건 딱 하나였다.

『내 말을 거역하면 너희도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게 해야 귀족들이 정부의 딸인 자신에게 항의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후작가가 본보기가 된 덕분에 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문득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헬레나의 아이를 다치게 하겠니?』

헬레나를 아느냐는 물음에 키산드라는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한 번만이 아니었다.

내가 회귀 당하던 때에도 키산드라는 어머니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우연이었을까?

“키산드라 님이 뭔가를 알지도 몰라요!”

내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키산드라가 뭘?”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커다래졌다.

이 상황에서 키산드라가 튀어나온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키산드라 님이 저를, 헬레나의 딸이라고 불렀거든요.”

“언제 그랬지?”

“절 회귀시켜 주셨을 때요!”

“흐음. 키산드라가 가장 정직했던 순간이라고 했지.”

살로메디안이 턱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를 읊조렸다.

“우연은 아닐 것 같군.”

“키산드라 님께서 남기신 기록 없을까요? 개인적인 거든, 공식적인 것이든!”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하늘을 가르며 검은 매 한 마리가 다가왔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가진 매가 얌전히 창가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살로메디안이 공작령에 보내는 쪽지를 매의 발목에 묶었다.

“공작령까지 날아가는 건가요?”

“국경을 넘는 건 위험하다. 선발대가 쪽지를 받아서 바바라에게 전달할 거다.”

“뭔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초록색 악마의 능력을 믿어봐야지. 우리는 떠돌이 신관을 찾아보도록 하자.”

테레사와 피오넬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남자를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넌지시 물어봤을 때 피오넬은 차갑게 대답했다.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 테레사가 진작 죽였을 텐데.」

떠돌이 신관이 죽었다면 테레사의 정체를 밝히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복수는커녕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어머니께서 감춰왔던 비밀은 무엇일까?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살롬. 어머니께서 뭔가 숨기고 계셨던 걸까요?”

어머니는 왜 아무 말씀 없으셨을까. 그 정도로 내가 못 미더웠던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쌌다.

“시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은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살로메디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뾰족뾰족하게 날이 섰던 신경의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기분이었다.

벽난로의 온기보다 그와 나누는 눈빛이 더욱 따스했다.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시아.”

내게 고정된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도 불꽃이 옮겨붙었다.

밤이 늦었음에도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죽 소리.

창밖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우리 방은 농밀한 침묵에 잠겨있었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던 살로메디안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는가?”

이 밤에 뭘 할 수 있는데요?

되묻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못한 신혼부부가 호텔 스위트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흰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가 눈을 찔렀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심장을 때렸다.

가쁜 숨을 꾹꾹 눌러 담고 있을 때 살로메디안이 속삭였다.

“일단 목욕 먼저 할까?”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귓바퀴를 간질이는 숨결과 물씬 다가온 체취.

나는 번개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도,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내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그, 그래야죠. 자려면 씻, 씻어야 하니까요.”

왜 더듬고 난리야? 자려면은 또 뭐고?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후회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우연인지 욕실 문이 열려있었다.

그 안에 고양이 발이 달린 우윳빛 욕조가 보였다.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같이 목욕하자는 뜻이겠지? 제국식으로!

촉촉이 젖어 든 손바닥을 옷자락에 쓱쓱 문지르고 심호흡을 했다.

목욕 후에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살로메디안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에게 내 모든 것을 허락하고 싶었다.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기도 했다.

계약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짜 부부 아닌가?

수줍어하느라, 오래 간직했던 진심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살로메디안에게 끌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내가 바라는 첫날밤이 아니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온 거야. 기세 좋게 가자, 아이시아!’

태연한 척 가슴을 펴고 도발적인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돌아봤다.

“살롬. 같이 목욕해요.”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싶었는데, 긴장 탓에 목소리가 기묘하게 갈라졌다.

살로메디안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누구 명령인데 거역하겠습니까. 공작부인.”

손등으로 전해지는 입술의 감촉.

배 속에서 올라온 탄식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이를 악물지 않았더라면 본격적인 밤이 시작하기도 전에 야릇한 소리를 흘렸을 터였다.

살로메디안이 다음 질문을 덧붙였을 때는 신음을 참지 못했지만.

“옷을 벗겨드릴까요, 부인?”

* * *

굶어 죽은 시체처럼 빼빼 마른 생니콜 자작이 귀족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을 때, 테레사는 코웃음 쳤다.

시골 자작 따위가 모을 수 있는 귀족 수준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생니콜 자작령을 찾은 건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이시아 따위가 공작령의 구세주로 추앙받고 있다는 걸.’

비밀 회합은 테레사에게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택 지하에 모인 귀족들을 소개받았을 때, 테레사는 자신이 자작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했다.

지하에는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대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고귀한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쿠아로드의 왕세녀 테레사라고 합니다.”

테레사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이 돋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줍은 듯 내리깐 속눈썹과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

우아하지만 순종적인 자세.

타고난 미모가 염색약으로 만들어낸 신비로운 하늘색 머리칼과 어우러지면 어떤 사내라도 함락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제국 귀족들은 테레사의 미모 따위에 관심 없었다.

“그대에게 세드나 공작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다고?”

제국 최고의 곡창 지대를 소유한 발초프 후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천한 출신의 약소국 왕녀 주제에.’라는 눈길로 테레사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생니콜 자작이 발초프 후작에게 굽신거렸다.

“일단 들어보시지요. 바실리키 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세드나 공작을 두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생니콜 자작의 말에 여기저기서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신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지! 마신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이 당연해.”

“마물이 급증한 것도 세드나 공작 탓입니다. 그자부터 물리쳐야 해요!”

“대의를 위해서라도 세드나 공작은 없어져야 합니다!”

비밀 회합에 모인 귀족들은 마신에 미친 광신도처럼 보였다.

또 다른 공통점도 있었다.

살로메디안을 원수로 여긴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대의’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로메디안이 죽길 바라는 마음은 테레사와 똑같았다.

‘자작이 어떻게 대귀족들과 연이 닿았나 했더니… 종교 때문이었구나? 꽤 알아주는 신학자니까.’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테레사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신의 이름을 빌려 제 잇속을 챙기려는 인간들을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소녀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테레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귀족들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국사를 논하는데 외국인이 끼어서 좋을 일이 없지. 그대처럼 어린 여자라면 더더욱.”

“소녀는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대가 도움이 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아쿠아로드의 치료 신관들을 필요하신 만큼 제공하겠습니다.”

테레사의 말에 귀족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걸 놓칠 테레사가 아니었다.

“마도구도 드리겠습니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살상용 마도구가 있으면 대륙 최강이라는 기사단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살상용 마도구 개발은 대륙법으로 금지되어있을 텐데?”

“아쿠아로드처럼 작은 나라를 지키려면 여러 방도가 필요하지요. 귀공들께서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대신 마도구를 내놓지요.”

군침을 삼킨 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그분께서도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하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세드나 공작가만이 아니니까…….”

하지만 발초프 후작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쿠아로드가 우릴 도우려는 이유가 뭐지?”

“세드나 공작은 아쿠아로드 왕실을 모욕했습니다. 국혼이라는 미명 아래 소중한 언니를 납치했고요.”

“세드나 공작을 사로잡았다는 공작부인 말인가?”

“공작의 마수에서 언니를 구하고 싶습니다. 공작이 강탈해간 마도구 제작 기법도 돌려받고 싶고요.”

테레사가 애처롭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구라도 탐낼 만한 특제 기술을 살로메디안이 가졌다는 소식에 귀족들이 흥분했다.

“귀한 것을 손에 넣고도 지금까지 숨겨왔다니!”

“공작령이 부흥한 것도 전부 그 탓이겠군!”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세드나 공작령이 활기를 띠면서 주변 백성들이 공작령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세금을 내고, 농지를 경작할 백성들이 떠나면서 영주들의 손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세드나 공작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특제 마도구까지 생산하게 된다면?

살로메디안을 원수로 여기는 영주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일 거였다.

“그대의 계획은 뭐지?”

테레사를 제일 무시하던 발초프 후작이 물었다.

“세드나 공작의 약점을 공략하는 겁니다.”

“그는 약점이 없는 남자다. 심지어 죽지도 않지.”

“하지만 그에게는 아내라는 약점이 생겼지요.”

테레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테레사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이 이채가 떠올랐다.

발초프 후작이 질문을 바꿨다.

테레사를 시험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선공이 위험하다는 것도 아는가? 폐하께서 끼어들면 골치 아파진다.”

“공작 쪽에서 싸움을 걸어오게 만들어야지요.”

“어떻게?”

“제 언니를 이용하면 세드나 공작은 미쳐 날뛸 겁니다. 폭주하는 괴물을 토벌하는 것만큼 훌륭한 명분이 어디 있을까요?”

테레사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겠군.”

발초프 후작의 말에 하마터면 비웃음이 터질 뻔했다.

‘너희 수작을 모를 줄 아느냐? 날 받아주는 척하면서 이용해 먹을 계획이겠지. 하지만 이용당하는 건 너희가 될 거야.’

본심을 숨긴 테레사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순종적으로 고개 숙였다.

“그저 영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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