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 * *
나는 그 길로 공작저로 돌아왔다.
디에고에게 천의 감정을 부탁할 작정이었다.
“700년 전 물건이라고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역시 디에고는 마도구 외엔 관심이 없었다.
나는 디에고의 구미가 당길 법한 미끼를 은근슬쩍 던졌다.
“특수한 신력이 담긴 성물일지도 몰라요. 성물이라 이름 붙였지만 고대 마도구일지도 모르고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공작부인!”
내 예상대로 디에고가 커다란 돋보기를 가지고 덤벼들었다.
그는 특수한 도구로 천을 긁기도 하고, 촛불에 그슬려 봤다.
유리병에 담긴 시약을 몇 방울 떨어뜨리기도 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실험하던 디에고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천이 아닙니다.”
“네?”
“천처럼 보이긴 하지만 씨실과 날실로 직조된 물건이 아닙니다. 700년 동안 보존된 천이 이렇게 멀쩡할 수 없어요.”
“천이 아니면 뭐요?”
“미세한 비늘이 빽빽하게 돋은 가죽입니다.”
가죽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거칠기는 하지만 그냥 낡은 천 같았는데?
“껍질인지, 피막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성 조직입니다. 얼마나 질긴지 다이아몬드가 박힌 칼로도 흠집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럼 아까 디에고가 한 실험이…….”
“이 천을 훼손해 보려고 했습니다. 갖은 수를 써봤지만 소용없더군요. 찢어지지도 않고, 태워지지도 않고, 녹지도 않아요.”
성물일지도 모르는 물건을 상대로 그런 실험을 했다고?
만약 천이 상했다면 어쩌려고?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디에고를 믿은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자세한 건 실험을 더 해 봐야 합니다만… 외부 자극을 튕겨내는 성질을 가진 건 확실합니다.”
“전쟁터에서 그 천. 아니, 그 껍질을 두르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칼과 화살로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애초에 공격을 튕겨내 버리니까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대 성전 속에서만 등장하던 마신의 방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관들이 외면했던 냄새 나는 천이 무려 700년 동안 숨겨졌던 마신의 성물이라니!
“마신의 심장막이라는 것도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
디에고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심장막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쌍두 드래곤의 심장을 확인해보고 싶네요. 하지만 이 정도로 질긴 가죽이라면 가능성이 큽니다.”
심장은 마력이 쌓이는 저장고이자, 생명의 근원이었다.
마신에게 방패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심장을 지키는 데 써야 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디에고!”
디에고 손에서 천을 낚아챘다.
“공작부인! 좀 더 실험하게 해주십시오!”
“안 돼요!”
디에고를 뒤로하고 바바라와 함께 서고를 찾았다.
서고를 뒤진 결과 고대 마법어로 씐 성전 초판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바라도 마법어를 읽을 줄 몰라서 휴고를 다시 불러왔다.
“황실 신관들 눈은 잘 피해서 오셨죠?”
“물론입니다. 성물이라는 게 밝혀지면 황실에 압수당할 게 뻔하니까요.”
나와 휴고, 바바라 세 사람이 은밀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촛불은 하나만 남기고 모두 껐다.
바바라가 문틈에 담요를 덧대 희미한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성전 앞에 무릎을 꿇은 휴고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보십시오! 마신님은 700년 주기로 재탄생한다고 적혀있습니다. 성물이 출현하는 그날!”
“누가 새로운 바실리키가 될까요?”
“물과 불을 모두 가진 존재 아니겠습니까?”
물과 불은 원래 공존할 수 없었다.
물과 불을 동시에 가진 존재는 마신과 쌍 속성인 세드나 공작뿐이었다.
“마신은 초대 황제에게 쌍 속성 황태자를 바치라고 했어요. 그게 설마!”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바바라의 낯빛이 더럭 어두워졌다.
“마신은 계약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신 후보감을 찾은 거군요!”
“그 대가로 초대 황제는 제국을 건설했고요.”
그 뒤로 700년이 지났다.
황제가 건국 700주년 기념 파티를 호화롭게 준비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올해가 새로운 마신이 태어나는 해예요.”
심장이 발치로 툭 떨어졌다.
반투명한 회색 얼굴을 지닌 한 여인이 날 지켜보는 듯했다.
죽었음에도 소멸하지 못하는 전대 세드나 공작.
마신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날 회귀시킨 키산드라.
그녀의 소원은 승천이 아니었다.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것 ‘마신의 소멸법’이었다.
자신이 차기 마신으로 내정되었으므로.
* * *
“키산드라 님께서 새로 탄생해야 할 마신으로 선택당한 거죠? 그걸 거부하고 있는 거고요.”
내가 침착하게 물었다.
살로메디안도 숨을 죽이고 키산드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키산드라는 쉬 입을 열지 않았다.
마신의 성물을 움켜쥐고 키산드라를 응시했다.
“700년 만에 두 개의 성물이 등장했어요. 마신의 방패와 마신의 검. 이제 새로운 마신 탄생을 막을 수 없어요!”
내 목소리가 메마른 온천을 사이로 흩어졌다.
기나긴 침묵을 깨고 키산드라가 말했다.
-참으로 잔인하지 않느냐? 세드나 공작으로 170년을 살았는데, 마신까지 하라니…….
키산드라가 부서질 듯 위태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170년 동안, 죽고 나서 7년 동안. 머릿속엔 늘 한 가지 질문뿐이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키산드라의 얼굴에서 한 조각 미소마저 사라졌다.
남은 건 차마 견딜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
켜켜이 쌓인 고독을, 가슴 시린 고통을 품은 키산드라가 바람결에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 왜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내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을 텐데… 이젠 기억도 안 나는구나. 모두 날 떠났다. 그들은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이라는 말이 심장을 예리하게 찔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일 수 없었던 그녀.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키산드라.
마신이 가엾은 여인의 멱살을 붙잡고 원치 않는 신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아이시아. 나는 뭘 잘못한 걸까? 왜 만인 앞에서 평등하다는 죽음조차 날 피해 가는 걸까?
길 잃은 아이처럼 겁에 질린 키산드라가 물었다. 나는 입술을 깨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살로메디안…….”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후계자인 살로메디안에게 닿았을 때,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살롬이 나보다 훨씬 오래 살겠지? 내가 없으면 살롬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혼자 버틸 수 있을까? 폭주하면 어쩌지?’
꾸깃꾸깃 마음속에 처박아놨던 불안이 날 덮쳤다.
키산드라를 괴롭혔던 잔인한 운명이 살로메디안을 노리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삶의 의미를 내게서 찾았다.
그는 오직 나만이 중요하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내가 없는 살로메디안은 어떤 모습일까?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어떤 남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핏발 선 푸른 눈, 밀랍처럼 생기를 잃은 피부.
멋대로 자란 백금발을 휘날리며 전쟁터를 전전하는 살인귀.
눈앞이 노랗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고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내가 살롬을 지켜야 해!’
내가 할 수 있을까? 상대는 마신인데?
당연한 의문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마신에게 선택당한 사람이었다. 700년 만에 마신의 성물을 발견한 것도 나였다.
이 세상에 마신의 농간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여야 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키산드라 님은 마신이 되기 전에 소멸하고 싶으신 거죠?”
목 끝까지 치미는 조급함을 감추고 물었다.
흐릿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키산드라가 망가진 태엽 인형처럼 중얼거렸다.
-왜 나는 죽지 못하는 거지? 그리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저 보통 사람처럼 죽고 싶어…….
어떤 순간에도 자신만만한 미소와 농담을 잊지 않던 키산드라는 이 자리에 없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가녀린 소녀가 웅크린 채 울음을 참고 있을 뿐.
“키산드라 님!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내가 벌컥 호통쳤다. 그래도 키산드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키산드라 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운명을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
“키산드라 님껜 시간이 없어요! 제국도 마찬가지고요!”
제국은 마신의 계약자를 잃었다.
새로운 마신은 탄생을 거부하고 있었다.
마물의 급박한 증가. 마물들의 이상한 움직임. 사라지는 온천.
그 모든 이상 징후들은 살로메디안, 혹은 키산드라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저랑 살롬이 키산드라 님을 도울 거예요. 지혜를 모아서 소멸 방법을 알아봐야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키산드라가 비관적으로 물었다.
감당하기 힘든 우울함이 그녀를 잠식한 상태였다.
“찾아봐야죠! 키산드라 님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절 선택하신 거 아닌가요?”
-이미 늦었어.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키산드라 님!”
-난 인간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야. 절대 마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700년이 더 지나 새로운 마신이 태어나기 전까지!
키산드라가 비통하게 절규했다.
그녀 등 뒤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검은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모아 지옥 불에서 끓여낸 것처럼 사악한 기운이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어둠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번져갔다.
그때 마신의 숲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쾌엑! 꿰에엑!”
살로메디안이 다급히 내 손목을 틀어쥐었다.
“피해야 한다, 시아. 마물들이 날뛰고 있다!”
“네?”
“S급 마물의 울음이 다발적으로 들리고 있어! 이쪽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
살로메디안은 마물을 상대하는 것보다 날 피신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도망칠 수 없었다.
“안 돼요!”
살로메디안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시아!”
“마물들이 날뛰는 건 키산드라 님 때문일 거예요!”
손가락으로 키산드라에게서 흘러나온 어둠을 가리켰다.
하늘이 불길한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신의 숲에서 마물들이 쿵쿵 발을 굴렀다.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도마뱀 마물 떼가 공작저를 습격했던 것처럼요!”
“그러니 피해야 한다!”
“마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키산드라 님을 진정시켜야 해요!”
살로메디안이 키산드라를 휙 돌아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눈동자를 보고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키산드라는 가망이 없어!”
“포기하면 안 돼요. 키산드라 님이 무너지면 공작령도, 제국도 끝이에요!”
“아이시아!”
살로메디안을 뒤로 하고, 나는 키산드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키산드라의 땋은 머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정신 차려요! 무고한 백성들을 죽게 할 작정이에요?”
-…….
“진짜 마신이 될 생각이냐고요!”
두피가 당기도록 머리채를 당기는데도 키산드라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다시 700년… 70년도 아니고 170년도 아닌 700…….
내 바람과 달리 그녀는 현실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살롬! 키산드라 님을 자극할 만한 거 없어요?”
“자극이라니?”
“제가 의식을 잃었을 때, 살롬이 절 목욕시켰잖아요! 감각을 깨우려고요!”
지금 키산드라에게도 필요한 것은 삶을 향한 의지였다.
그러자면 자극이 필요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키산드라가 반응할 만한 것이 있다.”
살로메디안이 꾹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얼른 가져와요!”
“불가능하다.”
“그게 뭔데 그래요?”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층 더 파리해진 얼굴로 살로메디안이 대답했다.
“잘생긴 남자.”
“네?”
“키산드라는 잘생긴 남자. 그 남자의 가슴 근육에 반응할 거다.”
* * *
그 시간 아쿠아로드에서는 기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국왕께서 미쳤대요!”
“여자만 보면 아이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치마를 벗긴다던데?”
“국왕이 그러니 나라 꼴이 이따위지!”
아쿠아로드의 경기는 최악이었다.
귀족과 부자들이 값비싼 마도구로 사치를 부리는 동안, 백성들은 빵 한 조각 구하지 못해서 쩔쩔맸다.
거리엔 굶어 죽은 자들의 시체가 낙엽처럼 뒹굴었다.
테레사는 특별 세금이라며 가난한 백성들을 쥐어짰다.
민심은 들끓었고, 왕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신병, 성병, 치매… 국왕을 둘러싼 추문은 날이 갈수록 처참해졌다.
헬레나 왕비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성군으로 추앙받던 남자의 말로였다.
“전하!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왕궁에서는 고성이 끊이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왕의 침전에 함부로 들다니!”
“소인은 평생 폐하를 모셔온 시종장이옵니다!”
“거짓말 마라! 나는 네놈을 모른다!”
시종장이 들고 왔던 약병을 국왕이 내던졌다.
침대 옆을 장식했던 화병도, 컵도 모조리 때려 부쉈다.
쨍그랑!
흐뭇한 소란을 들으며 테레사가 걸음을 돌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국왕 집무실을 차지한 테레사가 사랑스럽다는 손길로 기억 제거 마도구를 매만졌다.
국왕이 테레사의 정체를 눈치챈 그때. 본능적으로 마도구를 꺼냈다.
국왕의 머리 깊숙이 내리꽂았다.
그 결과 국왕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대가리가 엉망이 됐어. 매춘부의 편지랑 내 정체만 지우려고 했는데. 큭큭.”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수 있을까?
테레사는 국왕을 적당히 죽이기 위해 꽤 오랫동안 독약을 사용했다.
의심 많은 국왕의 눈을 피해 사용인을 매수하고, 적당량의 독약을 타는 건 무척 까다로웠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도구 후유증 덕분에 국왕은 금방 죽을 테니까.
좋은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세녀 전하. 생니콜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테레사가 직접 교육시킨 집사가 집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테레사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폴을, 그의 훤칠한 팔다리와 옆으로 길게 째진 뱀눈을 훑어봤다.
왕실 집사 가문의 후계자였지만, 아비의 반역 때문에 부두 하역장에서 일하던 남자.
그는 귀족 지위를 되찾은 것보다 다시 왕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덕분에 테레사는 충성스러운 개를 얻었다.
개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독약을 만들거나 뒷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수법 등 말이다.
“역시 생니콜이 제일 빠르네. 치료 신관이 썩 마음에 들었나 보지?”
“전하의 혜안에 감탄할 뿐입니다. 어떻게 치료 신관을 파견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국인들은 치료사라면 침을 질질 흘리거든. 은혜를 베풀면 나중에 득을 보게 돼 있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네가 고른 신관도 꽤 똘똘하더구나. 수고했어, 폴. 네가 온 뒤부터 일이 잘 풀리네.”
“전하를 섬길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테레사는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폴의 아첨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야망을 숨길 줄 아는 것도,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점도 좋았다.
쓸 만한 인간을 찾는 건 퍽 귀찮은 일이었기에 테레사는 폴이 실수하지 않길 바랐다.
실수하면 또 죽여야 하니까.
“생니콜 자작은 세드나 공작에게 단단히 화가 난 상태입니다. 마물 토벌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기사도 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아이시아를 구하러 가느라 생니콜 자작령은 지나쳤다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노리는 건 따로 있겠지요.”
폴이 가느다란 눈이 차갑게 빛났다.
“값비싼 약초들이 나오는 마신의 숲을 차지하고 싶을 겁니다.”
“배가 아프겠지. 제 영지에선 마물만 나오는데, 바로 옆 영지에선 황금이 같이 나오니까.”
“생니콜 자작이 반 공작파 귀족들을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어쩜 나는 이렇게 운이 좋을까?”
“여신님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테레사가 명령했다.
“선물을 가져와. 그것만 있으면 제국을 발칵 뒤집어놓을 수 있으니까.”
그 대단한 선물이 무엇인지 폴은 묻지 않았다.
그저 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들고 테레사의 뒤를 따랐을 뿐이었다.
“생니콜의 전령을 만나시겠습니까?”
“그래.”
“알현실을 준비해놨습니다.”
“국빈 알현실에서 만날래.”
“일개 전령일 뿐인데 전하께서 극진히 대접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폴이 의문을 품는 게 당연할 만큼 생니콜 자작은 변방 시골 영주였다.
제국 귀족이라지만 고작 자작.
아무리 소국이라지만 왕세녀인 테레사와 급이 맞지 않았다.
자작도 아니고 자작의 전령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찮은 것들일수록 자격지심이 심해. 전령을 국빈으로 대우해주면 기세등등해질 거야. 지가 나랑 동급이란 착각에 빠져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찮은 자작 따위가…….”
“괜찮아. 생니콜 자작의 흥분과 오만함을 이용할 거니까. 자작이 날뛰어주면 고맙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전하.”
“하루빨리 생니콜 자작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아이시아에게 선물한 신전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대단한 아이니까.”
테레사가 동화 속 공주님처럼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전하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물론 그래야지.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테레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잿더미가 된 집 앞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이 벌써 보이는 듯했다.
아이시아를 납치하는 데 전쟁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그게 아이시아 때문에 벌어진 내란이라면 더더욱.
“기다려, 아이시아 언니. 내가 곧 갈게.”
* * *
“남… 남자라고요?”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륙을 호령하던 무패의 여기사이자, 역사상 최장기간 세드나 공작이었던 키산드라의 관심이 오직 남자라니?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괴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이런 이야기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키산드라는 남자에 미친 여자다. 색정마랄까.”
“색, 색정마요?”
“잘생긴 남자면 침대로 끌고 가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럭저럭 생긴 남자면 어떻게든 한번 만져보려 하고.”
“못생긴 남자는요?”
“…색다르다며 귀여워했다. 가슴 근육이 발달해 있으면 특별히 총애했고.”
두통이 치미는지 살로메디안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키산드라의 ‘아주 특별한 총애’가 뭔지 궁금했다.
왠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묻지는 못했지만.
“그대에게 왜 키산드라 초상화를 안 보여줬는지 아는가?”
“살롬이 다 태웠다면서요? 왜 그랬는데요?”
“초상화마다 다른 남자를 끼고 있었거든.”
“네엣?”
“키산드라의 초상을 그리려면 항상 그녀의 애첩을 함께 그려야 했다. 무슨 재미로 혼자 앉아있느냐며 발광했으니까.”
“키산드라 님은 결혼하셨나요?”
“남편이 있었으면 다행이지. 공식적으로 키산드라는 남편이 없다. 대신 애첩은 하늘의 별만큼, 아니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았다.”
지저분한 설명까지 하게 만든 원흉을 그가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과장이 너무 심한 것 아닐까?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를 싫어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드나 공작이셨잖아요? 보는 눈 때문에라도 남자를 자주 갈아치우지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요.”
“키산드라에게 상식이 통할 것 같은가?”
“황제들이 뭐라고 안 했어요?”
“170년 동안 죽지도 않고, 패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여자한테 무슨 말이 소용 있겠느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눈을 감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키산드라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살롬이 키산드라라면 이를 갈았던 것도 남성 편력 때문이었을까? 키산드라가 어린 살롬한테 마수를 뻗었던 거 아냐?!’
살로메디안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년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떠나 오로지 키산드라 손에 맡겨진 한 떨기 미소년.
키산드라가 어린 살로메디안을 내버려 뒀을까?
끔찍한 상상이 뒤통수를 내려쳤다.
“꾸에에엑!”
마물들의 울음이 고막을 때렸다.
부쩍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신경은 푸른 눈을 가진 미소년이 ‘당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일’에 쏠려 있었다.
“혹시 키산드라 님께서 어린… 남자를 좋아하셨나요?”
“170살 먹은 여자가 연상을 만날 수는 없지.”
“그, 그래도 소년은 건들지 않으셨겠죠?”
“시아. 더러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속이 메슥거린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이 내 불안을 부채질했음은 물론이었다.
뭘 숨기는 거지? 키산드라 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키산드라가 사망했을 때 살로메디안은 20살 청년이었다.
외모만 놓고 보면 키산드라는 20대 중후반의 미녀였다.
같은 황족이라지만 150세나 연상인 키산드라는 살로메디안과 혈연관계라 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눈물을 머금은 십 대 살로메디안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색정마 키산드라가 겹쳐 보였다!
「그대가 학대라면 학대인가 보지.」
어린 날을 회상하던 살로메디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키산드라의 정신을 되돌리는 게 먼저였다.
“잘생긴 남자가 필요해요.”
“공작저까지 다녀올 시간은 없다.”
“공작저에 갈 필요 없어요. 살롬이 있으니까요.”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을 위태롭게 꿈틀거렸다.
“나보고 키산드라를 상대하란 말이냐?”
“아뇨. 그냥 가슴 근육만 허락해주세요.”
“시아!”
살로메디안이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은 노여움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열기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물을 진정시켜야 해요! 영지를 위해 그 정도 희생은 해주실 수 있잖아요?”
“내 몸은 키산드라의 장난감이 아니다.”
“저도 살롬을 키산드라 님께 바치고 싶지 않아요.”
“지금 그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는가?”
“영주로서 영민들을 보호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거예요!”
“아니, 지저분한 여자에게 몸을 대주라고 하는 거다!”
나와 살로메디안의 대화는 점점 기이하게 흘러갔다.
사용되는 단어도, 감정도 터질 듯 격앙되었다.
그사이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빼애액!”
“키키키킥!”
숲 저편에서 초대형 곰 마물과 초대형 럼블크 떼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살로메디안의 옷을 벗겼다.
“살롬! 시간이 없어요!”
“시아! 이러지 마……!”
우드득, 허망한 소리와 함께 살로메디안의 셔츠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장인이 구워낸 도자기처럼 뽀얗고 매끄럽지만, 그 어떤 조각보다 훌륭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아.”
뭔가 놓아버린 사람처럼 살로메디안이 짧게 탄식했다.
나도 마음껏 만져보지 못한 살로메디안의 가슴.
함부로 훔쳐보지도 못했던 이 근육을 키산드라에게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래도 정신 안 차리면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키산드라의 손을 살로메디안의 가슴팍 위에 철퍽 얹었다.
“큽.”
살로메디안이 이를 악물었다.
순정을 짓밟힌 소녀처럼 파르르 떨리는 백금색 속눈썹이 죄책감을 자극했다.
몇 초의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던 키산드라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돌아왔다.
-으응……?
작은 목소리로 키산드라가 반응했다.
만져지는 것이 무언지 탐색하며 꾸물꾸물 움직이는 손가락.
그것도 잠시, 키산드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잊고 있었던 남자 가슴 근육의 감촉을 드디어 눈치챈 거였다.
-호오라!
키산드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살로메디안의 근육 위에서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의 춤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아니, 첫사랑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청년의 발걸음처럼 숨 가쁘게 움직이는 손가락!
-오오오오!
“으윽!”
키산드라의 환호성과, 치욕을 참는 살로메디안의 신음.
기묘한 이중주 앞에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만 만져, 이 미친 여자야!”
살로메디안의 노성이 마신의 숲을 울릴 때까지.
* * *
키산드라의 정신이 돌아오면서 마물도 진정됐다.
살로메디안이 셔츠 깃을 여밀 때, 키산드라는 아쉬움이 듬뿍 담긴 눈으로 장성한 후계자를 훑어봤다.
내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제 남편 그만 보세요!”
-쩨쩨하게 굴지 마. 아이시아. 닳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안 돼요. 다른 남자는 다 돼도, 살롬은 안 된다고요!”
-탐스럽게 잘 컸던데…….
입맛을 다시는 키산드라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성희롱하지 마시고요!”
-좋아! 내게 훌륭한 선물을 줬으니, 나도 선물을 주마.
졸지에 선물 취급을 받은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네가 가져온 마신의 성물. 어떤 기능이 있는 줄 아느냐?
“마신의 방패잖아요. 모든 공격을 튕겨낸다고 하던데요.”
-천금을 주고 살 수 없는 훌륭한 갑옷이지. 하지만 진짜 기능은 따로 있어.
“그게 뭔데요?”
-그냥 가르쳐주면 재미없잖아. 네가 알아봐.
다시 여유를 찾은 키산드라가 이죽거렸다.
“장난치실 때예요? 언제 마신이 될지도 이 시점에서요?”
-나한테도 사정이 있단다.
“뭐라고요?”
-너 목욕할 때 기다란 헝겊으로 몸을 가리지?
키산드라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요?”
-헝겊 대신 마신의 성물을 써봐.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이 냄새나고 까슬거리는 걸 알몸에 걸치라고요?”
-그건 마신의 심장을 둘러싼 피막이다. 불과 물의 심장을 보호하던.
그렇다고 악취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촉감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키산드라가 한쪽 눈을 찡끗했다.
-아주 큰 선물이 될 거야. 내가 장담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소멸할 궁리나 해라. 키산드라. 700년을 더 살고 싶지 않으면.”
살로메디안이 음산한 어조로 경고했다.
-너희나 잘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신 소멸법을 알아내라고.
“죽어서도 뻔뻔한 건 여전하군.”
-너는 꽤 바뀌었더라, 꼬맹아. 아, 꼬맹이라고 하면 안 되겠구나. 아주 그럴싸한 남자가 됐으니.
“닥쳐!”
살로메디안도 가슴을 내주고 남자로 인정받는 건 싫은 기색이었다.
“살롬이랑 아쿠아로드로 가볼 생각이에요.”
-좋은 생각이다. 바실리키의 기록은 그 나라에 더 많을 테니까.
“테레사가 동굴 신전을 먼저 찾았다는 것이 꺼림칙해요.”
-그 애는 널 노리고 있어. 더 큰 문제를 일으키려 해.
“뭘 꾸미고 있는데요?”
테레사가 즐겁고 유익한 계획을 짤 리 없었다.
미리 심어둔 첩자들이 실패했으니 더 대담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키산드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널 회귀시키느라 마신의 힘을 너무 많이 썼다. 예지력까지 쓰면 더 빨리 마신이 돼버려.
“아…….”
-온천에 처박혀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하니까.
“유령으로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나요? 인간 형상을 유지하는 데도 힘을 쓰실 거 아니에요?”
우물쭈물 대답을 피하던 키산드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사실 너희에게 거짓말을 한 게 있다. 그게 뭐냐면…….
* * *
키산드라의 조언을 들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마신의 성물을 목욕용 천으로 써보려고 몇 번 용기를 냈다.
하지만 속을 뒤집는 역한 냄새 때문에 다시 내려놓기 일쑤였다.
욕실은 마음의 고향이자, 휴식처였다.
성스러운 욕실을 악취로 물들이고, 달콤한 휴식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가느다란 쇠못으로 피부를 긁는 듯한 까칠한 촉감도 문제였다.
고민 끝에 마신의 성물을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다.
디에고 특제 ‘냄새 차단 마도구’가 없었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디에고가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속옷 서랍에 숨겨둔 만년필 모양 마도구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펜촉보다 조금 긴 쇠붙이가 섬뜩하게 반짝거렸다.
* * *
「부작용은 심하지 않을 겁니다. 경험해본 제가 장담합니다!」
기억 재생 마도구를 내 손에 쥐여 주며 디에고가 말했다.
「기억 제거 마도구에 당한 공작부인이야말로, 이 아이의 성능을 확인시켜줄 최적의 대상입니다.」
「절 실험체로 쓰고 싶다는 뜻이죠?」
「서운한 말씀 마십시오! 공작부인 덕분에 머릿속에만 있던 수많은 마도구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공작부인은 제 은인이십니다!」
「디에고는 은인보다 마도구가 먼저잖아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공작부인은 제가 꿈에 그리던 실험체입니다! 제발 이 아이를 사용해 주십시오!」
디에고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살롬이 반대하고 있긴 하지만… 생각해볼게요.」
「정말이십니까?!」
「디에고는 제가 부탁한 일에 힘 써주세요.」
「결심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네. 공작령을 아쿠아로드 이상 가는 마도구 생산지로 만들 거예요. 영지가 발전하려면 독자 기술이 필요해요.」
「황실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요? 뛰어난 마도구는 제왕들의 질투를 사게 마련입니다.」
「뒷일은 제가 책임질게요. 디에고는 하던 대로 실험, 개발에만 몰두하세요.」
디에고의 두 눈이 감격으로 일렁거렸다.
「아쿠아로드에서 도망친 뒤론 동네 대장장이밖에 못 될 줄 알았습니다. 비싼 재료도 마음껏 쓰게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제가 더 고마워요. 디에고가 없었더라면 마도구 제작은 꿈도 못 꿨을 거예요.」
「대륙을 재패할 만한 아이들을 만들어내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가져온 제작 기법이 도움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건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쿠아로드에서 개발된 마도구 설계도가 전부 제 머릿속에 있거든요!」
그 많은 설계도를 몽땅 기억하고 있다고?
마도사들도 겨우 알아볼 만큼 복잡한 문서인데?
디에고는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천재였다.
테레사가 디에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도왔다면, 살로메디안과 흑룡기사단에 대적할 만한 마도구를 만들어냈을지도 몰랐다.
디에고가 있는 이상 세드나 공작령은 아쿠아로드 마도구 제작 기법의 100%를 소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 *
“부작용은 어쩌지…….”
기억 재생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디에고가 끝내 제거할 수 없었던 부작용이 마음에 걸렸다.
날 염려하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떠올랐다.
“디에고한테는 미안하지만 쓰지 말자. 살롬을 위해서.”
잃어버린 기억보다 살로메디안이 중요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음험한 운명을 지우려면 마신 죽이는 법을 알아내야 했다.
키산드라가 소멸하면 온천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신과 함께 영영 사라지려나?
물밀 듯 밀려오는 아쉬움을 삼켰다.
온천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살로메디안과 바꿀 수는 없었으니까.
이 시간에도 테레사는 악독한 계략을 꾸미고 있을 터였다.
언제까지 방어만 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직접 테레사의 땅에 가서 테레사를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공격이 가장 확실한 방어라 하지 않았던가.
기억 재생 마도구를 서랍에 넣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행 가방에 넣었다.
쓰게 될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 * *
바바라는 화가 났다.
황실에서 파견한 신관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작령에 주저앉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의료 교육원 신입생 모집에 정원의 100배가 넘는 인파가 몰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바라의 분노를 일으키는 건 오직 바넷사.
아니, 그녀가 모시는 황제라는 놈이었다.
“건국 700주년 파티가 의무라고? 파티에 안 가면 처형하는 법이라도 생겼나 보지?”
바바라가 있는 힘껏 빈정거렸다.
반짝거리는 안경을 닦으며 바넷사가 대답했다.
“황족에겐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각하께서도 이해해주실 거야. 공작부인은 물론이고.”
“책임이랑 파티가 무슨 상관인데.”
“두 분이 자리를 빛내주시면 황실과 세드나 공작령의 불화설을 퍼뜨리는 인간들도 정신 차리겠지.”
“남의 아내나 넘보는 천하의 멍멍이가 공작부인을 황궁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아니고?”
바넷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나 몰래 뭔가 꾸미시는 것 같아.”
“망할 새끼!”
“나도 너처럼 욕이라도 시원히 해봤으면 좋겠다.”
“요즘 고생이 심한가 봐. 언니 많이 늙었어.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게 이십 대 같지 않다고.”
“주름도 훈장이야.”
“어휴, 답답해! 정말 결혼할 마음 없는 거야?”
바바라가 조막만 한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바넷사의 입가가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것으로 일그러졌다.
“일하느라 바쁜 건 마찬가지 아니니? 너도 결혼할 생각 없잖아?”
“언니가 결혼을 해야, 아버지가 날 들볶지 않을 거 아니야! 망할 후계자 놈은 기사놀이에 흠뻑 빠졌는데!”
윗스 백작은 일주일에 한 번씩 둘째 딸에게 맞선남의 초상화를 보내고 있었다.
폐하의 최측근 집사로 활약하는 장녀나, 부모 뜻을 어기고 기사가 된 막내아들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험지에서 고생하는 둘째 딸이라도 구슬려 손자를 보겠다는 뻔한 술책이랄까.
“우리 영지가 옛날의 공작령이 아닌데! 조만간 제국 최고의 도시로 발전할 거라고!”
“의료 교육원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지?”
“호호호! 전 제국 백성들이 우리 시아의 자애로움을 찬양하며 달려오고 있지!”
산처럼 쌓인 지원 서류 때문에 토할 것 같았지만 바바라는 잘난 척을 잊지 않았다.
언니이기 전에 바넷사는 사랑스러운 아이시아를 노리는 개자식의 오른팔 아닌가?
“동굴 신전에서 정말 아무것도 안 나왔고?”
의료 교육원에 관심 없다는 듯 바넷사가 화제를 돌렸다.
누구보다 세드나 공작령을 견제하고 있으면서.
“신전에서 뭔가 나왔을까 봐 걱정돼?”
의기양양해진 바바라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만에 하나 신물이 공작령에서 나오면… 폐하께서 걱정되시겠다. 후계자도 없고, 황후도 없는데 각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잖아?”
네이선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끄는 젊은 군주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병역의무를 강화하고, 토지세를 물리고, 암시장을 폐쇄한 탓이었다.
게다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결혼 못 한 황제’는 ‘남자 구실도 못 하는 남자’로 오해받기 쉬웠다.
반대로 살로메디안은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악명을 끌고 다니던 그가 제국 제일의 애처가로 변신하면서 백성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마신의 힘을 가진 세드나 공작은 두렵지만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런 공작이 소국의 폐왕녀를 사랑한다?
음유시인의 노래에서나 나올 법한 러브스토리에 백성들은 열광했다.
“각하께서는 황제감이 아니야.”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민심이 문제라는 거야. 나는 황실을 걱정하는 거라고.”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바바라.”
“황실엔 언니처럼 마력도 강하고, 실력도 출중한 집사가 있으니 괜찮으려나? 그래도 홀아비 황제는 좀 아니지 않아?”
바바라가 바넷사의 신경을 긁기 딱 좋은 말을 내뱉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넷사가 안경을 벗었다.
고작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 지적인 고급 관료가 아니라, 동네 술집을 주름잡는 여자 깡패 같았다.
“입 닥쳐, 바바라. 맞아 죽기 싫으면.”
바넷사의 몸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풍겨 나왔다.
살로메디안처럼 물을 형상화 시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바넷사의 마력은 최고위급 기사 못지않았다.
‘하여간 마력은 더럽게 세요! 저러니까 결혼을 못 하지!’
바넷사가 결혼을 하지 않는 건 바쁜 업무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강한 물의 마력의 소유자였다.
또래 중엔 비슷한 수준의 신랑감이 없었다.
네이선과 비슷한 처지라 동질감을 느끼는 걸까?
일중독자인 바바라 눈에도 바넷사의 충성심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난 폐하의 초대장을 전달했어. 못 받았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으니까 늦지 않게 황도로 모시도록 해.”
바넷사가 다시 안경을 쓰고 나서야 바바라는 한숨 돌렸다.
“공작부인께서 편찮으셔서 파티에 가실 수 있을까 모르겠네.”
“장거리 여행을 가실 정도로 건강하시던데?”
“요양 여행이야. 조용한 곳에서 쉬려던 걸 어떤 멍멍이가 방해해서 말이야~”
“멍멍이?”
바넷사가 살벌한 눈으로 동생을 흘겨봤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바바라. 폐하를 모욕하면 너라도 용서할 수 없어.”
“정말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 누구지? 나야, 아니면 유부녀. 그것도 숙부의 아내를 노리는 개만도 못한 인간이야?”
“…….”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어떨까? 가뜩이나 인기 없는 폐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텐데.”
마력은 처질지 몰라도 배짱만은 뒤지지 않는 바바라였다.
특히 아이시아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바넷사에게 마력이 있다면 바바라에겐 잔머리가 있었다.
“여론전을 하겠다는 거니?”
“잘 지내보자는 뜻이야. 언니가 황제 간수를 잘해줬으면 하고.”
“진짜 황실이랑 잘 지내고 싶니?”
“속고만 살았나~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황실이랑 맞짱 뜨겠어? 있는 거라곤 살인 기계랑, 대륙 최강의 기사단뿐인데.”
“최고급 약초가 넘쳐나는 숲과 백성들의 인기도 있지. 치료사들도 다수 확보할 테고.”
바바라가 바넷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바넷사도 동생이자, 경쟁자인 바바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황실과 잘 지내고 싶으면 먼저 성의를 보여. 바바라.”
“전국에 있는 마물을 죽여줬는데 그걸로 모자라?”
“그건 세드나 공작의 책무고.”
“하! 편해서 좋겠네! 황실이 원하는 성의가 뭔데?”
바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넷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마신의 성물을 내놔. 동굴 신전에서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