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29화 (29/50)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4권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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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절 재판정에 세우려는 건가요?]

피오넬이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자신을 증언대로 끌고 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피오넬을 바라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물론 네 증언만 있으면 테레사의 정체를 밝힐 수 있겠지.”

[아뇨. 절 믿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매춘부의 딸이니까요…….]

재판정에 서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은지 피오넬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매춘부의 딸이란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차별과 멸시를 되새겼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널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 증인이 있으면 재판을 거부할 수 없어. 핵심은 테레사가 재판받는다는 거야.”

[무슨 뜻이에요?]

“왕족의 명예는 재판에 오르는 것만으로 끝나기도 해. 게다가 테레사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지.”

[브리니티 왕비의 출신 말인가요?]

“약점을 가진 권력자는 너무 쉽게 무너지기도 해.”

폐위당하던 때의 기억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나는 아쿠아로드 왕실 상징인 하늘색 머리칼을 가지지 못했다.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런다고 흑발이 하늘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크나큰 약점을 가졌고, 내가 가진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너무 많았다.

가짜 예언서는 그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지는 태양을 버리고, 새로 뜨는 태양 옆에서 햇볕을 쬐는 것.

권력이란, 대개 그런 식으로 교체되곤 했다.

“네가 증언을 한다면 테레사에게 반발하는 귀족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 거야.”

[그것만으로 테레사를 끌어내릴 수 있나요?]

“쉽진 않겠지. 하지만 테레사도 많은 걸 잃게 돼. 운이 좋으면 신관의 딸이라는 게 밝혀질 수 있고.”

피오넬이 분필을 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재판정에 서 있는 듯했다.

“무섭니?”

[공작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면 전 쫓겨나겠죠?]

나는 대답하지 않고 두려움에 휩싸인 피오넬을 관찰했다.

욕망으로 똘똘 뭉쳐있던 작은 악녀는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 잿더미처럼 위태로웠다.

고작 한 마디 말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아이였다. 고국의 가족도 몰살당했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테레사의 정체를 밝힌다?

내 보호 아래 있더라도 피오넬의 목숨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증언할게요. 저도 테레사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 걸 볼래요…….]

길고 긴 망설임 끝에 피오넬이 석판에 적었다.

“테레사가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죽을 목숨.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요.]

열한 살 여자애의 말이라는 게 애처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은 선한 마음을 앞세울 때가 아니라는 걸.

“그 결심이 재판 때까지 유지되리란 보장이 있을까?”

내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의심받은 것이 억울한지 피오넬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분필을 끼적였다.

[재판정에서 딴소리할까 봐 걱정되세요?]

재판 당일, 피오넬이 증언을 바꾸면 피오넬을 증언대에 세운 내가 역풍을 맞게 되어있었다.

피오넬은 이미 여러 번 날 속였다.

어리다고, 가엾다고, 동질감을 느낀다고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실수는 지금까지로 족했으니까.

“미뤄왔던 복수인 만큼 실패하고 싶지 않아. 불안 요소는 용납할 수 없어.”

천년 빙설처럼 차가운 얼굴로 피오넬을 바라봤다.

피오넬이 분통을 터뜨렸다.

[제가 불안 요소란 거예요?]

“당연해.”

[믿지 못하겠으면 계약 마법을 거시라니까요!]

“널 테레사로부터 지켜주기로 했는데, 계약 마법이라니… 내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니니?”

[그럼 전 쫓겨나겠군요. 그 뒤엔 살해당할 테고요!]

쌀쌀맞게 느낌표를 찍기는 했지만 피오넬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텅 빈 눈동자는 내가 아닌, 테레사가 보내올 암살자를 보는 듯했다.

순간 피오넬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피오넬!”

피오넬을 부축하며 낸시가 외쳤다.

내 눈치를 보는 낸시의 눈빛에 공포가 담겨있었다.

천사인 줄 알았던 공작부인이 목소리를 잃은 아이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피오넬, 포기하면 안 돼! 무슨 짓을 해서든 저택에 머물러야 해!”

낸시가 피오넬의 여윈 어깨를 흔들었다.

피오넬은 곧 정신을 차렸지만 삶의 의지를 되찾지는 못했다.

입을 굳게 다문 피오넬이 분필을 움직였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피오넬!”

[내 작전이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공작부인은 납치당하셨을 거야. 그리고 테레사 손에 고문을 당하셨겠지.]

“하, 하지만……!”

[원래 신전에서 죽을 목숨이었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야. 날 돌봐준 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모든 걸 체념한 피오넬이 눈을 감았다.

낸시가 내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사정했다.

“제발 자비를 내려주세요! 피오넬은 똑똑해요! 공작부인께 꼭 도움이 될 거예요! 알고 보면 착한 애라고요!”

피오넬을 대신해서 애원하는 소녀에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알고 봤는데 못된 인간은 별로 없단다, 낸시.”

“공작부인!”

“사람은 악한 구석도 있고, 선한 부분도 있는 법이야. 애정을 담아 보면 그 사람의 좋은 면만 보이지.”

“피오넬에게 악한 면이 더 많다는 건가요? 마지막 기회를 얻지 못할 만큼요?”

“너야말로 피오넬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니? 죽은 동생이랑 똑같이 말을 못 해서?”

“처음엔 그랬는데… 피오넬이 글자도 가르쳐 주고, 가끔 웃는 것도 귀엽고, 같이 이야기하면 즐겁고…….”

낸시가 두서없는 이야기를 떠들며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도 왜 피오넬을 보살펴주는지 확실한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내가 불쑥 물었다.

“너는 피오넬을 좋아하는구나?”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누굴 돕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그 사람이 좋다면 더더욱.”

“…….”

“낸시. 너는 피오넬의 진짜 이름을 아니?”

머뭇거리던 낸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에타라고 들었어요.”

적어도 피오넬은 자신을 돌봐주는 은인에겐 솔직했구나.

그것이 살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자신을 돌봐주는 낸시에 대한 고마움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시선이 피오넬에게 향했다.

“피오넬. 너는 착각한 것이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했지, 널 재판정에 세우겠다고 한 적은 없어.”

피오넬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말했잖니. 네가 가진 정보를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공작부인이 원하시는 조건은 뭔데요?]

“네가 본명을 버리는 것.”

피오넬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피에타라는 이름을 버리고 앞으로 피오넬로 살도록 해. 그게 내가 바라는 유일한 조건이야.”

피오넬과 낸시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다래졌다.

불공정하다며 계약 마법을 거절했으면서 옛 이름을 버리라는 게 조건이라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이익과 거래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던 피오넬에게는.

[그게 공작부인께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피오넬이 날 향해 석판을 들었다.

내가 교묘한 함정을 파고 있다고 생각한 듯 글자가 일그러져있었다.

“아무 도움도 안 돼. 난 언제든지 너보다 실력 좋은 마법어 선생을 구할 수 있고, 치료사도 구할 수 있으니까.”

[정식으로 제국인이 되라는 뜻인가요?]

“싫으니?”

[좋아요. 하지만 불공정해요.]

“그래. 나한테 너무 불공정하지.”

내가 간단히 대답했다.

피오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자신을 이용하면 테레사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데, 그걸 포기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제가 못 미더워서 재판정에 못 세우는 건가요?]

“너 없이도 나는 테레사를 무너뜨릴 수 있어. 너는 그냥 11살 피오넬로 살아. 해가 바뀌면 12살이 될 평범한 꼬마들처럼.”

한 번도 평범한 소녀로 살아본 적 없는 피오넬이 후드득 어깨를 떨었다.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피오넬도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자신을 신전에서 끌고 나온 나라면 기적 같은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걸.

피오넬이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소매로 북북 문질렀다.

그리고 석판 위에 또박또박 썼다.

[공작부인은 너무 착해서 손해만 보고 살 거예요.]

그 새초롬한 말이 피오넬다워서 웃음이 났다.

“내 생각에도 그래. 아직 큰 손해는 없으니까 괜찮지만.”

[저는 신세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에요.]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이상한 방식으로 하는구나?”

내 물음에 피오넬의 뺨이 은은히 달아올랐다.

낸시가 손뼉 치며 밝은 목소리를 토했다.

“정말 잘됐다, 피오넬! 내가 뭐랬어? 공작부인께서는 천사시라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낸시에게 물었다.

“글은 얼마나 배웠니?”

“쉬운 단어는 틀리지 않아요. 피오넬에겐 어려운 단어 위주로 배우고 있어요.”

글자를 다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낸시가 수줍어했다.

피오넬이 머물던 남루한 방을 둘러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너는 피오넬과 함께 본채로 옮기도록 해.”

“본채에는 시녀님들만 계시는데 제가 왜요?”

“어려운 단어도 배우는 아이니까 조리장에겐 배울 게 더 많을 거야.”

“절 부엌하녀로 쓰시겠다는 건가요?!”

낸시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요리 기술도 배울 수 있고, 밥도 넉넉히 먹는 부엌하녀는 낮은 계급 소녀들에게 선망 대상이었다.

“하녀 말고. 추천서를 써줄 테니까 조리 보조로 일해 보렴.”

공작저 조리 보조는 시녀는 물론 부유한 평민들도 노리는 자리였다.

황족 눈에 들면 대저택의 조리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예기치 못한 행운에 어리둥절해하던 낸시가 빽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조리 보조가 되겠어요?”

“네가 만든 흰 수염 산딸기 파이 정말 맛있더라. 노력하면 좋은 조리장이 될 거야.”

“제 파이를 공작부인께서 맛보셨다고요? 어떻게요?”

“네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피오넬에게 물어보려무나.”

낸시가 놀라 피오넬을 돌아봤다.

피오넬은 시치미를 뚝 떼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고마워, 피오넬! 뭔지 모르겠지만 전부 네 덕분이야!”

낸시가 피오넬의 손을 흔들었다.

피오넬도 낸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허공에서 팔랑팔랑 흔들리는 소녀들의 흰 손이 꽃잎처럼 고왔다.

피오넬을 받아들인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낸시의 미소에 만족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베푼 호의가 훗날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잠깐만요! 공작부인께 할 말이 더 남았어요.]

떠나려는 날 피오넬이 붙잡았다.

“테레사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테레사가 아니라 신전에 대해서 알려드리려고요.]

“네가 날 유인했던 그 신전?”

피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들여 석판에 글자를 적었다.

피오넬이 석판을 내밀었을 때, 나는 눈을 의심했다.

[테레사가 그 신전에 마신의 성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했어요.]

* * *

아이시아가 피오넬을 제국인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일주일 후.

아이시아와 단둘이 외딴 길을 걸으면서도 살로메디안은 표정이 안 좋았다.

아이시아의 고운 얼굴이 오늘따라 수척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눈 밑에 그늘이 졌지만 아이시아는 평소보다 에너지가 넘쳤다.

문제는 키산드라였다.

그 짜증스러운 얼굴을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불편했다.

“온천엔 저 혼자 가도 된다니까요.”

아이시아의 입술이 통통하게 튀어나왔다.

그 입술을 훔치고 싶다는 욕심을 잠재우며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호위기사가 그대를 따르는 건 당연하다.”

“살롬이 왜 제 호위기사예요?”

“흑룡기사단엔 기사단장이 필요하니까.”

요즘 휴고는 기사단장직을 내놓겠다며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기사단장 업무 때문에 아이시아의 호위를 24시간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마주칠 때마다, ‘사직을 허락해 주십시오. 각하!’라며 쫓아오는 통에 살로메디안은 하루도 성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빈센트가 기사단장직을 맡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벽창호의 대답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는 막 기사 서임을 받은 애송이일 뿐입니다. 부기사단장 위도 제겐 과분합니다.」

휴고는 아이시아의 호위기사로 임명될 때까지 무기한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성가신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흑룡 놈들도 아이시아의 호위가 되겠다고 너나 할 것 없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망할 놈들.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살로메디안은 차라리 기사단이 없는 먼 곳으로 아이시아와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흑룡기사단 기사들의 마음을 훔친 아이시아가 수줍게 웃었다.

“든든하네요. 살롬은 대륙 최강의 기사잖아요.”

그 미소를 본 살로메디안의 가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아이시아가 항상 웃어주길 바라는 마음과 아이시아의 미소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이 맹렬히 부딪혔다.

발그레해진 복숭앗빛 뺨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참아 보려 했는데 아이시아가 손가락질했다.

“키산드라 님께서 벌써 마중 나와 계시네요.”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와그작 구겨졌다.

메마른 온천 앞에 익숙한 형상이 보였다.

하나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과 죽은 사람 같지 않게 촉촉하고 탱탱한 피부.

삐뚜름한 조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키산드라가 살로메디안을 향해 콧방귀를 끼었다.

-흥! 결혼하더니 양봉업자가 됐냐? 눈에서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신경 꺼.”

-어젯밤에 속궁합이 엄청 잘 맞았나 보지?

“키산드라!”

살로메디안이 아랫배에서 불끈 치미는 화를 터뜨렸다.

귀를 감싸 쥔 키산드라가 엄살을 떨었다.

-고막 떨어지겠네!

“유령도 고막이 있나?”

-똥오줌 못 가리는 꼬맹이를 키워놨더니. 유령이라고 무시하냐?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난 7살이었다.”

-그래. 똥오줌 못 가리던 7살이었지!

빈정거리는 키산드라를 아이시아가 막아섰다.

“그만하세요. 키산드라 님!”

살로메디안 주위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살롬도 그만해요. 젖고 싶지 않다고요!”

아이시아를 뒤에서 껴안으며 키산드라가 지저분한 농지거리를 내뱉었다.

-왜? 젖는 게 얼마나 좋은데?

키산드라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아이시아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아이시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키산드라가 말했다.

-놀랄 것 없어. 나랑은 몸이 닿아도 구역질하지 않을 테니까.

“…정말 괜찮네요?”

-이건 진짜 육체가 아니라 육체처럼 보이는 그럴듯한 환영이니까.

키산드라가 검지로 제 뺨을 콕 찌르며 귀여운 척을 해댔다.

키산드라의 망할 손이 아이시아에게 닿았다는 것만으로 살로메디안은 참을 수 없었다.

“그 손 떼지 못해?”

-왜? 너도 맘대로 만지지 못하는 아내를 내가 만지니까 질투 나냐?

“더러운 말로 시아를 모욕하지 마라.”

-모욕은 무슨. 농염한 성인 여성의 매력과 환희를 알려주려는 것뿐인데.

키산드라가 느물거리며 아이시아의 목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움찔 어깨를 튕기는 아이시아. 그녀의 사랑스러운 붉은 눈동자가 6월의 장미처럼 만개했다.

“정말 구역질이 안 나요!”

-신기하니?

“네. 살롬 말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원하면 좀 더 만져줄까. 아이시아?

순진한 소녀를 꾀어내려는 납치범처럼 키산드라가 음흉하게 물었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에서 칼날 같은 살기가 빗발쳤다.

키산드라의 손가락을 12조각 내버리고 싶었지만, 상대는 구천을 떠도는 유령이었다.

썩어들어가는 살로메디안의 속도 모르고 아이시아는 마냥 신기해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만져주세요.”

살로메디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만, 만져달라고? 멀쩡한 남편을 두고, 남자 밝힘증 유령 따위에게 몸을 허락한다? 나한테는 한 번도 부탁한 적 없으면서……!’

충격을 이겨낸 살로메디안이 한발 늦게 말렸다.

“안 돼, 시아!”

하지만 이미 키산드라는 아이시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나한테 맡겨. 아이시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황홀경을 느끼게 해주마!

키산드라가 거침없이 아이시아의 편평한 배를 문지르고, 갈비뼈를 더듬었다.

내버려 두면 그 위로도, 또 아래로도 움직일 것 같았다.

“흣, 간지러워요……!”

아이시아가 짧은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뒤틀었다.

웃음을 참는지 목소리 끝이 묘하게 갈라졌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키산드라는 아이시아를 더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만지고 싶잖아.

“키산드라 님… 제발!”

-간지러움을 많이 타면 그만큼 민감하다는 소리인데?

“아흑.”

키산드라의 손에서 위태롭게 무너지는 아이시아.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과 파드득 떨리는 가녀린 어깨.

살로메디안의 이성은 하릴없이 우지끈 끊어지고 말았다.

쏴아아아.

하늘에서 장대비가 떨어졌다.

아니, 폭풍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센 마력 물방울이 쏟아졌다.

“살롬!”

쫄딱 젖은 아이시아가 원망을 담아 외쳤다.

비를 뿌린 살로메디안과 유령인 키산드라는 여전히 뽀송뽀송했다.

-아이시아 혼자 젖었네? 어휴, 야해라~

눈을 가늘게 뜬 키산드라가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살로메디안이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괜히 힘 빼지 마. 신혼이라, 침대에서 쓸 힘도 부족할 텐데! 캬핫핫핫!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산드라가 배를 잡고 웃었다.

살로메디안은 확신했다.

저 여자가 자신의 슬픈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 * *

부쩍 추워진 날씨에 마력 비까지 맞으니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살로메디안이 겉옷을 벗어주지 않았다면 감기에 걸렸을지도 몰랐다.

키산드라와 살로메디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내가 경고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예요?”

“전부 저 여자 때문이다.”

“키산드라 님의 도발에 넘어가는 살롬도 문제예요. 좀 참을 수는 없어요?”

“이 여자와 나는 본능적으로 안 맞는다.”

살로메디안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키산드라가 히죽 웃었다.

-네가 뭘 잘 모르는구나, 아이시아. 그 꼬맹이는 참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살롬이 잘 참는다고요?”

-당연하지. 오늘도 참고, 어제도 참고, 그제도 참았을걸?

“?”

-아니, 너희들 처음 만난 날부터 계속 참았을 거다! 크하하하!

키산드라가 인내심을 칭찬했는데도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쓸데없는 말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버려 두면 또 냉수 목욕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전 키산드라 님이랑 말장난하러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왔니?

“키산드라 님을 취조하려고요.”

내가 붉은 눈동자를 치켜떴다. 키산드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말씀 여쭙는 것도 아니고 취조를 한다고? 감히 나를?

“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키산드라의 표정이 매섭게 굳었다.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키산드라.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키산드라 님. 온천이 마른 이유 아시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내가 흙먼지와 돌멩이로 뒤덮인 온천을 가리켰다.

-모른다고 했을 텐데?

“아뇨. 키산드라 님은 알고 계세요. 숨기고 있을 뿐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분명 키산드라 님에겐 비밀이 있어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해도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뭘 말이냐?

“키산드라 님이 정직했던 순간이요.”

내 말에 키산드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딱 한 번 키산드라 님이 진실만 말씀하신 순간이 있거든요.”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그게 언제인가?”

“제가 죽었을 때요.”

“심장발작 했을 때 말인가?”

사실은 살로메디안 손에 살해당한 직후지만.

젖은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 거짓말쟁이로 몰고 싶은 거냐. 아이시아?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저 어조가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기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녀 뒤에 밤하늘보다 어둡고, 짐승보다 위험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나는 가까스로 두려움을 삼키고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상대가 키산드라가 아니라 마신이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시면서 키산드라 님은 왜 거짓말을 하시나요?”

-난 거짓말한 적 없다.

키산드라가 발뺌했다.

내 가설이 맞는다면, 키산드라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그걸 나와 살로메디안에게 고백하는 것도 쉬울 리 없었다.

키산드라의 사정을 봐줄 마음은 없었다.

내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온천도 살리고 싶었다. 그러자면 키산드라가 숨긴 정보가 꼭 필요했다.

“그때는 낯설어서 몰랐었는데, 곱씹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뭐가 말이냐?

“사망 5분 전으로 회귀시켜달라고 했을 때 키산드라 님께서 중얼거리셨죠. 서둘러주면 좋다고요.”

키산드라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게 뭐 잘못됐지? 하루라도 빨리 소멸하고 싶은 유령에게?

“중요한 건 그다음 말이에요.”

-그만해라.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 들으니 피곤하구나.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투로 키산드라가 손을 내저었다.

내 눈엔 도망치려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키산드라의 팔을 움켜쥐었다.

감촉은 분명 사람의 그것이었지만 은은한 한기가 물씬 밀려왔다.

“키산드라 님은 이렇게 말하셨어요. 널 기다리다가 바실리키가 돼버리면 끝이라고요!”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고 내가 물었다.

“키산드라 님. 마신이 되어가는 중인 거죠? 그걸 막으려고 절 찾으신 거고요!”

잠깐 커다래졌던 키산드라의 눈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살로메디안이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혼란과 불신으로 얼룩덜룩해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시아. 그게 정말인가?”

“키산드라 님께서 직접 하신 말이에요.”

-!

“그때는 바실리키가 뭔지 몰랐어요. 마신의 이름을 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요.”

“누구보다 마신을 증오하던 인간이 마신이 되어가고 있다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짓씹었다.

키산드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림 같은 자세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산드라 님께서는 신에 범접한 힘을 가졌어요. 하지만 온천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죠.”

그게 항상 궁금했다.

왜 키산드라는 온천을 떠날 수 없는 걸까? 죽은 사람도 살리고, 마물도 부릴 수 있으면서?

그때 동굴 신전에서 봤던 성화가 떠올랐다.

피오넬이 했던 말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동굴 신전에서 발견된 더러운 천을 꺼냈다.

그리고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진실을 알게 됐다.

-네가 그걸 어떻게 가졌느냐!

키산드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내 표정을 감추고 있었던 키산드라가 처음으로 내보인 동요였다.

“뭔지 알아보시겠어요?”

-…….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으시겠죠?”

나는 손으로 까칠하고 더러운 천을 어루만졌다.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키산드라의 눈동자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 변화를 살로메디안도 눈치챘다.

“시아. 그 천이 어쨌다는 거지? 신관들도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했다면서?”

“신관들은 몰랐어요. 이 물건이 뭔지, 동굴 신전 근처엔 왜 온천이 없는지.”

“온천?”

살로메디안의 한쪽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갑자기 온천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표정이었다.

“이 천은 동굴 속 웅덩이에서 발견됐어요. 하지만 그건 웅덩이가 아니라 온천이었어요. 지금은 말라버렸지만요.”

* * *

피오넬이 한 말을 휴고는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휴고는 동굴 신전에 함께 가달라는 내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피오넬의 말대로 성물이 있었다면 이미 진작에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그렇게 오래 숨겨져 있을 리 없어요.”

휴고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피오넬을 용서하고 제국인으로서 신분을 인정한 것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피오넬의 말에 따르면 테레사가 고대 문헌을 통해 동굴 신전의 존재를 알았다고 했어요.”

“그 계집은 재주도 좋군요. 제국인도 모르는 신전 위치도 알고.”

“신전이 진짜로 있었으니, 성물도 진짜 있을 수 있죠.”

“도난당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신전에서 뭔가 나왔다면 휴고 님 말씀처럼 소문이 퍼졌을 거예요.”

하지만 동굴 신전은 700년 동안 비밀 속에 묻혀 있었다.

“하오나, 공작부인. 그 천은 아무리 봐도 성물 같지 않습니다.”

바실리키교 신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지 휴고가 얼굴을 찡그렸다.

손이 베일 것처럼 까칠 거리고 기묘한 악취가 나는 천이 성물이라니?

신자가 아닌 사람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동감이에요. 그런데 왠지 포기가 잘 안 되네요.”

한숨을 섞어 대답하면서 천이 발견됐다던 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는 어쩌자고 여기 온 걸까. 피오넬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은 이내 지웠다.

성전 이야기를 전하던 피오넬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는 간절함. 새로운 삶을 선물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 모두를 담아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테레사가 피오넬을 속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작은 웅덩이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목욕은 할 수 있겠네. 물이 고여만 있다면…….”

그때 눈에 익은 붉은 조약돌이 보였다.

황동색으로 반짝이는 돌 표면에 반짝이는 은색 실금이 나 있었다.

그 돌을 어디서 봤는지 금방 떠올렸다.

나만의 천국이자, 환상 속 장소인 온천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돌이었다.

심장이 가슴을 거세게 때렸다.

“휴고 님. 이 웅덩이… 온천이었던 것 같아요!”

“네?”

“공작저 온천에서도, 마신의 이빨 온천에서도 이 조약돌을 봤어요!”

퉁방울눈을 가늘게 뜨고 휴고가 내가 내민 조약돌과 웅덩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렇게 작은 온천도 있습니까?”

“온천수가 솟으면 전부 온천이죠. 어쩐지 동굴 신전 근처에 온천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어요!”

작은 온천과 성물이 숨겨져 있다는 신전에서 나온 천.

온천과 마신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불현듯 벽화에 그려진 성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빌릴게요, 휴고 님!”

휴고가 들고 있던 횃불을 뺏어 들고 성화 앞으로 달려갔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드래곤이 푸른 용암 속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검은 날개를 활짝 편 드래곤은 붉은 화염을 뿜어내고 있었다.

드래곤의 위용에 비해 너무 작은 푸른 용암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용암이 아니라, 온천이었어!”

처음엔 용암이 푸른색으로 표현된 것이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주변 지형 그림을 보니 드래곤이 날갯짓하는 장소는 화산이 아니라 온천이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온천 속에 숨겨져 있어서 아무도 못 찾았던 거예요. 온천이 마르기 시작한 건 최근이니까요!”

“정말 그 천이 마신의 성물이라고요?”

“휴고 님! 성전에서 천에 대한 글귀를 본 적 있으세요?”

휴고는 독실하기로 소문난 바실리키교 신자였다.

휴고와 동행한 것도 호위 때문이라기보다, 성전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신께서 말씀하시길…….”

눈을 질끈 감은 휴고가 두 손을 관자놀이에 올려놓았다.

외웠던 성전 구절을 되새기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휴고가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있었습니다! 마신의 심장막, 영광의 피륙을 갑옷처럼 두르라! 그리하면 어떤 검도 널 꿰뚫지 못하리니,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광의 피륙이라는 게 휴고 님께서 말씀하셨던 마신의 방패 아닐까요?”

“마신의 검과 방패! 성물에 관한 내용도 성전에 있었습니다!”

벽돌색으로 붉어진 얼굴로 휴고가 숨을 쌕쌕거렸다.

성전에서 읽었던 구절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진정하고 말씀해주세요!”

“두 개의 성물이 세상에 등장하는 날,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바실리키가 재탄생하리니. 세상이여, 물과 불을 모두 가진 신을 찬양하라!”

그 말을 들은 내가 벼락을 맞은 듯 경련했다.

“재탄생이라니요? 신은 영생하는 거 아닌가요?”

“바실리키 님은 700년에 한 번 다시 태어나십니다. 새 심장, 새 머리를 가지고요!”

“저도 성전을 읽었어요. 하지만 그런 내용은 본 적 없어요!”

“제가 말씀드린 성전은 고대 마법어로 적힌 초판본입니다. 쉽게 읽히기 위해서 번역된 신판과는 다릅니다!”

아찔한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감춰져 있었던 비밀이 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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