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 *
2주 동안 나는 마신의 숲과 약초 더미를 오가며 살았다.
냉해와 마물 습격 탓에 린삼을 출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흑룡기사단과 마신의 숲을 이 잡듯 뒤진 결과 다행히 겨울에도 자라는 약초를 찾았다.
선명한 노란색을 띤 ‘카에’는 언뜻 생강처럼 보이지만, 노화 방지와 원기회복에 특효인 최고급 약초였다.
본격적으로 린삼을 수확할 수 있는 봄까지 카에는 공작령의 주요 자원이 되어줄 거였다.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작저로 돌아가다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검은 그림자가 묵묵히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엄지손톱을 물어뜯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미루고 미뤘던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공작부인. 왜 그러십니까?”
휴고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어둡고, 진지하며, 무표정한 휴고가 낯설었다.
휴고는 항상 나와 대화할 기회를 노리며 퉁방울눈을 반짝이던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닌 그를 나는 삼촌처럼 따랐다.
3주간의 특훈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돈독해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휴고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내 곁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대놓고 거리를 두는 그를 볼 때마다 다정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속이 쓰렸다.
도마뱀 마물 때문이야. 그놈들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마물 핑계를 대봤지만 사실 나 때문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원정을 떠났을 때, 휴고의 사명은 나를 지키는 거였다.
나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휴고의 경고를 무시하고 도마뱀들과 싸웠다.
공작저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됐겠지만, 휴고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날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전투술을 호신용으로만 쓰겠다던 나의 노골적인 배신.
그 결과 휴고는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내게서 멀어졌다.
살로메디안이 빈센트를 콕 집어서 잔류시키지 않았더라면 마신의 숲 호위도 피했을 거였다.
‘어떻게 하면 휴고 님과 화해할 수 있을까. 사과하면 받아주기나 할까?’
초조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감정 표현은 아직도 어려웠다.
왕세녀 시절 나는 기사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랫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왕세녀의 위엄을 훼손한다고 교육받은 탓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내게 단순한 수하가 아니었다. 내게 몇 안 되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오늘은 꼭 사과하자. 이대로 휴고 님을 잃을 수 없어.
다짐을 굳힐수록 내 얼굴은 서리가 앉은 듯 차갑게 굳어갔다.
카에를 캐던 약초꾼들과 다른 흑룡기사단원들도 술렁거릴 만큼.
“휴고 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꼭 지금 하셔야 하는 말씀입니까?”
파리한 낯빛으로 휴고가 되물었다.
대화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말입니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린 휴고가 눈을 감았다.
“…말씀하십시오. 마음의 준비는 진작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처형대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죄수처럼 처연한 얼굴이었다.
휴고가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해하는 내게 휴고가 힘주어 말했다.
“공작부인께서 절 추방하시더라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
“추방이 아니라 처형이라도 좋습니다.”
“네에?!”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휴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난데, 왜 휴고는 추방이니 처형이니 하는 거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기사단장 노릇을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말씀을 꺼내신 김에 부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무슨 결단이요?”
“공작부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벌을 내리실 때가 된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휴고 님께 사과하고 싶었던 것뿐인데요.”
내 말에 휴고의 거대한 덩치가 휘청거렸다.
아래턱을 떨던 휴고가 더듬더듬 물었다.
“공작부인께서… 뭘 사, 사과를 하시죠?”
“휴고 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마물과 싸웠잖아요. 전투술을 호신용으로만 쓰겠다던 약속도 어겼고요.”
“…그러니까, 저를 벌하지 않으신다고요?”
“휴고 님은 공작령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세요! 진짜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해도 제가 휴고 님을 변호할 겁니다.”
휴고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제자리에 쿵, 무릎을 꿇었다.
“공작부인께서 절 원망하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마력도 전부 소진하시고, 하마터면 마물에게 다치실 뻔하셨으니까요!”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휴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약초꾼과 기사들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휴고는 솔직하고 순박한 사람이었지만 우는 모습을 수하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오해하게 해서 죄송해요. 얼른 용서를 빌었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용서를 빌다니요! 공작부인껜 잘못이 없습니다! 다 무능한 제 잘못입니다!”
휴고가 눈물을 흩뿌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과를 미루고 있을 때 휴고 혼자 마음 졸였을 걸 생각하니 미안함이 더 크게 북받쳤다.
눈물을 훔친 휴고가 물었다.
“앞으로도 제가 공작부인의 호위를 맡아도 괜찮은 겁니까?”
“휴고 님이 아니면 누구한테 맡기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이제야 마음 놓인다는 듯 휴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둠을 지운 해맑은 웃음이 마신의 숲을 울렸다.
덕분에 나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기사님들도 바쁘실 텐데. 약초채집에나 동행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서운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공작부인 호위가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하니까요!”
휴고가 정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각하께서도 공작부인을 돕는 걸 최우선으로 하라 명하셨습니다.”
여전히 살로메디안은 수하들을 개인적인 용도로 부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약초채집은 공작령 전체의 문제이긴 했지만.
“약초는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라고 기사님들께 전해주세요. 휴고 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공작부인께서 정화해주시는 럼블크 고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럼블크 고기는 기사단 내 최고 인기 식재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됐다.
흑룡기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고기라지만, 고기만으로 고마움을 전부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제가 보내드린 카에는 드셔보셨나요?”
“가물치, 물뱀, 악어 꼬리…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어 봤지만 원기 회복에 최고더군요!”
“럼블크 고기를 구울 때도 카에를 넣으면 맛도, 영양도 배가 됩니다.”
“고기가 더 맛있어진다고요?”
고기에 살고, 고기에 죽는 흑룡기사단장 아니랄까 봐 휴고의 눈빛이 달라졌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어져요. 열심히 채집할 테니까 기사님들도 많이 들게끔 해주세요.”
“공작부인은 천사십니다! 공작부인께서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입가에 흐른 침을 닦고 휴고가 두 손을 모았다.
말리지 않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올릴 기세였다.
“얼른 돌아가요.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의료 교육원 신입생 모집이 코앞이었다.
바바라가 신입생을 선발하는 동안, 나는 살로메디안과 함께 테레사의 뒤를 파볼 계획이었다.
정보 수집에 능한 최정예 기사들이 한발 먼저 아쿠아로드로 떠난 상태였다.
나는 틈틈이 마법진에 사용되는 고대 마법어를 익혔다.
밤잠을 줄여가며 꼬부랑글씨를 들여다본 덕분에 한 단어씩 아는 글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살로메디안이 가르쳐주면 좋으련만.
그는 내가 고대 마법어를 배우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공작부인!”
하나로 묶은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디에고가 달려왔다.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는 사람이 헉헉거리며 뛰어온 까닭이 뭘까?
“디에고. 무슨 일이에요?”
원래도 마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뺨이 움푹 팰 정도로 야위어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허공에서 덜덜 떨며 디에고가 외쳤다.
“공작부인, 완성했습니다!”
“뭘 완성했다는 거죠?”
“기억 재생 마도구를 완성했습니다! 드디어 해냈다고요!”
* * *
살로메디안이 팔짱 낀 채로 디에고를 노려봤다.
디에고 앞에 두툼한 펜 모양의 마도구가 놓여 있었다.
“믿을 만한 것이냐?”
아직도 기억 제거 마도구를 만든 디에고가 용서되지 않는 모양이다.
야윈 몸에 모포를 두른 디에고가 항변했다.
“밤낮을 기울여 만든 특별한 놈입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이죠! 전 얼마든지 모욕하셔도 되지만, 요 녀석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디에고가 천하의 세드나 공작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더니…….
마도구를 향한 열정이 생존의 본능까지 뛰어넘은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유아 시절 기억까지 되살려준다고요!”
“그럴 리가 있느냐?”
“가능합니다! 제 몸으로 실험해 봤습니다!”
“스스로 실험체가 됐다고?”
살로메디안의 한쪽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디에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상실험은 기본 아닙니까?”
살로메디안은 할 말을 잃었다.
디에고를 어렸을 때부터 봐온 나로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제가 사용할 수 없는 마도구를 어떻게 남에게 사용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헤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홀짝거리며 디에고가 웃었다.
마도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웃으며 내놓을 사람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도구에 미친 인간이로군.”
“열정이에요. 디에고는 옛날부터 이랬어요.”
“누이가 걱정이 많았겠다.”
“집안의 골칫거리였죠. 그래도 생명력은 최고예요. 테레사의 마수에서 살아남은 건 디에고밖에 없을걸요?”
내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내게 옮겨왔다.
“그대도 있지 않나?”
“?”
“테레사의 집요한 학대에도 그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 곁으로 왔지. 그대 역시 위대한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한 무능력자. 테레사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모욕당한 바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책했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면 테레사의 노리개로 사는 일도 없었을 텐데.
공작부인이 된 지금까지도 후회는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잊은 척했지만 사라지지 않는 회한을 살로메디안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대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다.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돼.”
살로메디안의 중저음이 날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도 위로가 담겨 있었다.
친밀함 이상의 따스함이 폐왕녀 시절의 기억까지 어루만지는 듯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달달한 침묵이 살로메디안과 날 감쌌다.
세상의 전부 같던 우리 둘 사이에 디에고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공작부인께서는 기억 재생 마도구를 언제 사용하실 겁니까?”
“만들라고 했지, 사용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부인만큼 훌륭한 실험체가 없는데!”
“…뭐라?”
순간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도구 실험 생각에 들뜬 디에고가 눈치 없이 떠들었다.
“기억 제거 마도구에 당한 공작부인이야말로 기억 재생 마도구에 최적화된 실험체라고요!”
“감히 내 아내를 실험체라고 한 것이냐?”
살로메디안의 몸에서 흉흉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디에고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르릉.
하지만 이미 살로메디안은 검을 꺼낸 뒤였다.
“으아아악!”
화들짝 놀란 디에고가 내 뒤로 숨었다.
그가 내 드레스 허리춤을 잡은 탓에 살로메디안의 분노는 더욱 극에 달했다.
살로메디안의 입술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아내에게 백허그를 시도해?”
백허그라뇨? 뒤에서 옷을 잡았을 뿐인데요?
대신 변명해주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지 못했다.
디에고에게 드레스를 붙잡힌 것만으로 끔찍한 메스꺼움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침묵하는 사이 디에고가 죽기 살기로 외쳤다.
“제가 없으면 마도구를 작동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마도사를 데려오겠다.”
“다른 마도사는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요!”
“네놈이 만든 마도구에 부작용이 있단 말이냐?”
살로메디안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누구도 분노에 사로잡힌 그를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검날이 디에고의 목을 자르기 직전, 아이시아가 외쳤다.
“살롬, 그러지 마세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살로메디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검을 거두지는 않았다. 검은 바람을 가르며 더 예리하게 움직였다.
쐐액!
살로메디안이 디에고의 머리를 잘랐다.
정확히는 지저분하게 뒤엉킨 그의 곱슬머리를.
“으아아악!”
엉덩방아를 찧으며 디에고가 비명을 내질렀다.
살로메디안은 칼질 한 번으로 하나로 묶은 머리 뭉치는 물론 덥수룩한 앞머리까지 잘라냈다.
제 목이 아직 몸통에 붙어있다는 걸 확인한 디에고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졸도했다.
“끄으으윽.”
바닥에 흩뿌려진 머리칼을 보면서 아이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디에고는 소중한 마도사예요.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마세요.”
“부작용 있는 마도구를 그대에게 사용하려 했다.”
“다른 마도사는 부작용을 못 없앤다고 했어요. 달리 보면 디에고는 고칠 수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
“정신 조작계 마도구는 크든 작든 부작용이 있어요, 하아.”
자조적인 목소리로 아이시아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도구 부작용 때문에 아이시아는 잃은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고통에 신음하는 아이시아를 떠올리며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발치로 떨어뜨렸다.
“그대에게 기억을 떠올리라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억지를 쓰지만 않았더라면.
기억을 떠올려줬으면 하는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자책하는 살로메디안을 아이시아가 위로했다.
“살롬이 아니었더라도 기억을 되찾고 싶었을 거예요.”
“그날 일은 잊어버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살롬은 제가 뭔가 기억하길 바랐어요. 직접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고요. 그 이유가 뭐죠?”
아이시아는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삭제된 기억을 건져 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전해졌다.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가 그저 괘씸했다.
제 인생을 뒤흔들어놓은 사건을 벌여놓고 까맣게 잊어버렸으니까.
그래서 기억을 내놓으라고 닦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목숨보다 소중한 여인은 휘청거릴 게 분명했다.
좋은 쪽으로든, 좋지 않은 쪽으로든.
‘괜한 모험은 필요 없어. 그날은 묻어두는 편이 나아.’
아이시아에 한해 살로메디안은 지나칠 만큼 신중했다.
때론 스스로 한심해질 만큼 겁에 질리기도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이시아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천재 마도사가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든 마도구예요. 예산도 많이 투입됐고요. 기껏 완성했는데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아이시아가 항변했다.
살로메디안이 차가운 눈으로 펜 모양의 마도구를 쏘아봤다.
“부작용을 감수할 수는 없다.”
“저는 꼭 사용해보고 싶어요.”
“불허한다.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내줄 수는 없어.”
“살롬.”
아이시아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사랑스러운 붉은 눈동자에 강인한 열기가 더해졌다.
아이시아가 이럴 땐 꼭 불리한 일이 생기던데.
씁쓸한 예감에 사로잡힌 살로메디안에게 아이시아가 말했다.
“제 기억을 지운 건 테레사예요. 사라진 기억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요.”
“비밀?”
“전 살롬과의 일만 잊은 것이 아니에요. 마신의 숲에 버려지기 직전과 직후의 기억을 전부 잃었어요.”
“그대의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는 건가?”
아이시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가 절 제물로 썼다는 것도 너무 이상해요. 테레사는 이상하리만치 제게 집착했거든요.”
“공작부인이 된 그대를 납치하려 했을 정도니까.”
“테레사는 모종의 이유로 절 마신의 숲에 버렸어요. 제가 되돌아오자마자 기억을 지웠고요.”
살로메디안과 결혼하기 전, 아이시아에겐 저항할 힘이 없었고 그녀를 비호해 줄 세력도 없었다.
테레사는 왜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아이시아의 기억을 지웠을까.
그냥 죽이면 간단했을 일을.
테레사가 편한 길 대신 복잡하고 불안한 길을 택한 이유는 뭐였을까?
살로메디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테레사에겐 그대를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나 보군.”
“예전엔 절 괴롭히기 위해서 살려두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테레사는 절 죽이지 않으려고 꽤 공을 들였어요.”
“학대 후 치료해준 것을 말하는 건가?”
“테레사는 항상 최고위 신관을 불렀어요. 적당히 치료해도 가지고 놀기엔 문제없었을 텐데.”
그 덕에 아이시아의 몸엔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흉터가 없다고 혹독한 학대의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살로메디안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이시아가 흉터를 보며 지옥 같은 시간을 되새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폐왕녀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했던 걸까.”
“절 이용해서 어머니 가문과 반왕파 귀족들을 제압하긴 했죠.”
“하지만 5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맞아요. 테레사가 국정을 다스리면서 반왕파는 힘을 상실했어요. 저는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패였어요.”
아이시아를 살려둬 봤자 테레사에게 득 될 것은 별로 없었다.
테레사가 국왕의 친딸이 아니라 떠돌이 신관과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정통 후계자인 아이시아가 살아있다면?
아이시아를 옹립하기 위해 귀족들과 백성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아. 그대가 폐위된 건 예언서 때문이라고 했지?”
“그래요.”
“전체가 엉터리인 건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위조된 건가?”
“예언서는 진짜예요. 키산드라 님 말에 따르면 몇몇 단어만 바꿔서 내용 전체를 틀어버렸다더군요.”
“진짜 예언서에는 뭐라고 적혀있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혼란스럽다는 듯 아이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예언서는 저와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라…….”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니다.”
“테레사가 절 죽이지 않은 이유도 예언서와 관련 있을까요?”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지.”
“그러네요.”
“하지만 테레사가 그대를 납치하려는 건, 단순히 복수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아이시아의 흰 피부가 더 하얗게 질렸다.
“저를 또 이용하려는 거군요…….”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로메디안이 파르르 떠는 아이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시아. 예언서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발론 왕립도서관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훔칠 수 있을까?”
아이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도난 방지 마도구가 겹겹이 싸여 있어요. 개미 한 마리만 숨어들어도 난리가 날 거예요.”
“그 마도구를 만든 건 누구지?”
“당연히 왕실 마도사들이죠. 살롬, 설마……!”
아이시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이 놀란 토끼 같아서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절한 디에고를 발끝으로 툭 치며 그가 덧붙였다.
“기껏 천재 마도사를 초빙했는데. 써먹지 않으면 보람이 없지.”
* * *
“디에고가 예산을 미친 듯이 쓰는 건 사실이에요.”
서류철을 넘기며 바바라가 투덜거렸다.
“마도구 만드는 데 희귀 금속이 엄청 많이 사용되더라고요!”
“금, 은은 기본이고 마법진을 새길 미스릴도 필요하죠.”
“미친 마도사가 공작령 예산의 삼분지 일을 혼자 낭비하고 있어요!”
“그만큼 훌륭한 마도구를 만들지 않을까요?”
“시제품을 달라고 해도 똥고집만 피워요! 아직 완벽하지 않다나요?”
“마도사들은 대개 완벽주의자죠.”
“그냥 정신병자예요! 데려가서 금고 따는 데 쓰시든지, 아니면 시궁창에 내다 버리고 오세요!”
바바라는 디에고를 도적질에 이용하자는 살로메디안의 아이디어에 적극 동의했다.
“도난 방지 마도구를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는데…….”
“시아. 어차피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게 되어있어요. 후훗.”
디에고의 목숨에 별 관심 없다는 듯 바바라가 잔혹한 미소를 흘렸다.
마도구를 팔아서 돈더미에 앉을 줄 알았는데 예산만 잡아먹으니… 바비도 스트레스가 쌓였겠지.
“살려둘 가치가 없는 놈은 제 손으로 처리해 버릴 거고요.”
바바라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상반되는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디에고도 아쿠아로드에 데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작저에 두고 갔다가는 바바라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바바라가 얇고 거무튀튀한 석판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가져왔다.
“피오넬인지 피에타인지 모를 꼬마가 찾은 신전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어요.”
“이게 뭔가요?”
“석판으로 만든 허접한 상자예요. 안에는 더 허저분한 게 들어있고요.”
“잠겨있지 않았나 보죠?”
“잠글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바바라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거무튀튀한 빛깔의 거적때기가 들어있었다.
“그냥 천이네요?”
“아뇨. 거칠고 냄새나는 싸구려 천이죠.”
바바라의 말대로 천에서는 퀴퀴한 곰팡내와 이끼 냄새, 썩은 분뇨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질감은 거칠다 못해 날카로웠다.
망토 모양이기는 했지만 피부가 쓸려서 몸에 걸치지 못할 듯했다.
이런 게 왜 바실리키 신전에 있었을까?
신관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고대 성화가 그려진 곳에.
“보여드릴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그 신전에서 나온 건 그것뿐이라 일단은 가져와 봤어요.”
“천이라니 이상하네요. 다른 건 없었나요?”
“신관들이 샅샅이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었대요.”
“휴고 님이 말씀하셨던 성물이 그 신전에 숨겨져 있을 줄 알았어요.”
“어휴, 그런 게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요! 시아는 너무 순진하다니까요.”
바바라가 사랑을 듬뿍 담아 핀잔을 던졌다.
“벽화는 약 700년 전, 제국이 생기기도 전에 그려진 거래요! 값나가는 물건은 진작 도난당했겠죠.”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물들이 무사했을 리가 없지.
오히려 검은 상자와 천이 남았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남은 건 이 천뿐이고요?”
“웅덩이 안에서 우연히 발견했나 보더라고요.”
“그 동굴 안에 웅덩이가 있었어요?”
“환영 마도구로 숨겨져 있었대요.”
그저 보잘것없는 천이라면, 왜 웅덩이 속에 숨겨둔 걸까?
해석할 수 없는 비밀이 더럽고 냄새나는 천에 감춰져 있는 듯했다.
그저 비밀이 감춰져 있길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천은 버릴까요?”
바바라가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쥐고 천을 쿡쿡 찔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보관할게요.”
“그냥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누가 숨겨둔 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바바라가 투덜거렸다.
“온천수를 터뜨릴 비법 같은 걸 기대했는데 너무 아쉬워요!”
“동감이에요.”
“하여간 마신은 제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바바라가 말하는 마신은 바실리키가 아닌 살로메디안 같아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온천에 가봐야겠어요.”
“온천수도 없는 온천에서 뭘 하시게요?”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키산드라를 떠올리며 뒷말을 삼켰다.
“바비는 바넷사 님을 만나주세요. 온천이 사라지는 현상을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바넷사 언니가 내려오는 중이에요.”
“바넷사 님이 왜요?”
“700년 된 신전을 조사하러 오는 거죠! 신관들을 보냈으면서! 하여간 의심은 드럽게 많다니까요.”
바바라가 구시렁거리며 바넷사 흉을 봤다.
동굴 신전이라면 황실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최측근인 바넷사가 직접 내려오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공작령에 신전이 많지만 이렇게 오래된 신전이 발견된 건 제국 역사상 처음이에요.”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겠네요. 대다수의 제국민들이 바실리키 교도니까요.”
“우리도 모르던 걸 테레사가 알았다는 거잖아요? 개빡쳐!”
바바라가 서류철을 물어뜯으며 연두색 눈을 희번덕거렸다.
“바실리키 관련 책은 제국보다 아쿠아로드에 훨씬 많을 거예요. 아쿠아로드인들은 모든 책을 여신의 축복으로 여기니까요.”
“이교도라고 배척하면서. 어휴, 재수 없는 이중성!”
“그러게요.”
“시아는 제외예요. 아시죠?”
“그럼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바실리키 논문을 많이 읽어둘 걸 그랬어요.”
내게도 자유롭게 도서관을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드래곤은 언제나 내 흥미를 자극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탐탁지 않아 하셨다.
‘왕비가 되기 전 제국에서 유학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머니는 마신을 참 싫어하셨지.’
독실한 아쿠엘 신자였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비밀을 숨긴 채 돌아가셨다는 걸 몰랐다.
제국 유학 중에 있었던 일도, 어머니가 마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몰랐다.
그저 어머니 묘소를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을 뿐.
“아쿠아로드에서 바실리키 교리서나 미발견 성서를 찾아볼 생각이에요.”
“바넷사 언니는 어떻게 할까요?”
“황실과 얼굴 붉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해요.”
“불륜 희망남만 아니면 아무 문제 없어요!”
“바넷사 님은 바비의 언니이기 전에 폐하의 충복이에요. 최대한 조사에 협조해주세요.”
“훔쳐 갈 거 없나 기웃거리러 온 걸 텐데요? 최대한 열심히 방해할래요!”
바바라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고 외쳤다.
15살로 보이는 동안 외모 때문에 으르렁거리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특이 체질을 고치면 바비를 꼭 안아주고 싶어. 연두색 머리칼도 쓰다듬어보고.’
행복한 상상을 하며 더러운 천이 든 검은 상자를 바라봤다.
“황도 신관들도 이 천을 살펴봤나요?”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더니 나중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귀한 거였으면 가로챘겠죠.”
혹시나 싶어 갈무리하긴 했지만, 그냥 낡고 더러운 천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바바라의 말대로 버려야 할까?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천을 검은 석판 상자에 담았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날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해가 지기 전에 온천에 다녀올게요.”
막 일어서려는데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갑작스레 집무실을 찾아온 이는 나도 바바라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 * *
잔뜩 주눅 든 소녀가 우물쭈물 다가왔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공작부인.”
15살이나 되었을까? 유독 작은 키와 앙증맞은 주근깨를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하녀들에게 지급되는 검은 제복을 입었다. 흰 앞치마에는 붉은 염료가 튀어있었다.
낯선 하녀를 보고 바바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나와 살로메디안을 측근에서 수발드는 시녀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얼굴이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중에서도 낮은 신분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녀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집무실까지 왔다는 것에 바바라는 몹시 화가 난 듯했다.
“말 안 할 거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고?”
하늘 같은 공작부인과 집사님 앞에 선 것이 긴장됐는지 하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송,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송구합니다, 집사님!”
가늘게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천천히 말해봐.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지?”
“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녀가 중얼거렸다.
팔짱 낀 바바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딴 건 하녀장에게 전달해도 되잖아? 공작부인께서 얼마나 바쁜 분인데 직접 찾아와?”
“죄, 죄송합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겁이 없어? 재수 없으면 첩자로 몰릴 수도 있다고!”
까칠했지만 어린 하녀를 향한 염려가 담긴 말이었다.
천한 신분의 하녀가 허락 없이 황족의 생활공간에 발을 디뎠다.
의도가 무엇이든, 황족에게 접근했다는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하지만 공작부인께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요!”
바들바들 떨면서도 하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위험을 감수한 걸까?
“꽤 급한 일인가 보네. 괜찮으니까 편히 말해봐.”
한참 망설이던 하녀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피오넬을 만나주세요. 공작부인!”
“피오넬이라면…….”
“공작부인께서 살려주신 아쿠아로드 여자애요!”
테레사를 닮은 어린 악녀의 얼굴이 불쑥 튀어 올랐다.
짙은 남색 머리칼과 날 노려보던 독기 어린 눈빛.
의식을 잃고 죽어가던 모습까지.
“피오넬이 의식이 돌아왔다고?”
내가 침착하게 물었다.
나와 바바라의 눈치를 번갈아 보면서 하녀가 대꾸했다.
“네. 아직 움직이지 못하지만요. 그 아이가 공작부인을 꼭 만나 뵈어야 한다고 꼭,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고 해서… 대신 왔어요.”
바바라가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살려줬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공작부인을 오라 가라야? 범죄자 주제에!”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아이는…….”
“그 애가 뭘 어쨌다는 거니?”
내 물음에 하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 *
피오넬은 하녀 숙소 중에서도 가장 허름한 방에 누워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되어있긴 했지만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고, 벌어진 창틀에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방 안을 데우는 건 숯이 든 작은 양동이뿐이었다.
모포에는 구멍이 뚫려있었고, 매트리스 커버 밖으로 지푸라기가 튀어나왔다.
날 발견하고도 피오넬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포를 끌어당겨 붉은 자국이 선명한 목을 가렸을 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눈에 띌 정도로 예쁜 아이였는데…….
이슬 맺힌 꽃봉오리처럼 어여쁘던 피오넬은 이곳에 없었다.
대신 누렇게 뜬 피부, 텅 빈 눈동자와 시커멓게 죽은 눈 밑을 가진 병자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오넬! 내가 공작부인을 모셔왔어!”
“…….”
“내가 장담했잖아. 공작부인께서 꼭 오실 거라고! 공작령의 천사라고 불리시는 분이니까!”
자신을 낸시라고 소개한 어린 하녀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피오넬을 보살피는 것이 익숙한 듯 베개를 고쳐주고, 바짝 마른 입술에 컵을 대주기도 했다.
“낸시가 계속 피오넬을 돌봐준 거야?”
“혼자 앓다가 죽을까 봐요.”
“다른 사람들은 피오넬을 싫어할 텐데?”
“그래도 먹을 것은 나눠줘요.”
낸시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납치미수 사건이 알려진 후 공작저 사람들은 피오넬을 철저히 무시했다.
때로는 노골적인 괴롭힘보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내가 당해봤기에 피오넬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눈에 훤했다.
낸시만이 피오넬의 곁을 지켜줬다. 위험을 감수하고 날 찾아오기도 했다.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낸시가 답했다.
“말 못 하는 남동생이 있었거든요…….”
낸시가 피오넬을 돌봐준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죽은 남동생과 신전에서 목소리를 잃은 피오넬.
낸시는 피오넬이 가져왔던 산딸기 파이를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이용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를 돌봐준 낸시를, 피오넬은 어떻게 생각할까.
“피오넬. 말을 할 수 없게 된 거니?”
움찔 어깨를 튕긴 피오넬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동자엔 계산적인 애교나 속임수가 담겨있지 않았다.
낸시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피오넬이 작은 석판과 분필을 꺼냈다.
“이거로 피오넬과 대화할 수 있어요. 피오넬은 글씨도 아주 잘 써요.”
낸시가 자랑스럽다는 투로 설명했다.
정말 말을 못 하게 된 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피오넬에게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다는 말이 뭐지?”
피오넬이 묵묵히 분필을 움직였다.
[제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있나요?]
“테레사 손에 죽었다고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예상하고 있었는지 가족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피오넬은 동요하지 않았다.
파리한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기는 했지만.
피오넬이 다시 분필을 끼적였다.
[왜 저를 살려주셨나요? 저는 공작부인이 주신 마지막 기회조차 걷어찼는데.]
나는 피오넬에게 진실을 고백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피오넬은 테레사를 선택했다.
어쩌면 인질로 잡힌 가족들을 걱정했을 수도 있었다.
[공작부인께서 치료 신관을 불러주셨다고 들었어요. 절 살리기 위해서요.]
“그랬지.”
왜냐고 묻는 대신 피오넬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날 향해 석판을 내민 피오넬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제가 가진 정보를 원하시는 거죠?]
“본이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니?”
[네.]
“내가 널 고문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래서 살려준 거라고?”
피오넬은 분필을 움켜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씁쓸한 바람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뭘 기대한 걸까.
피오넬이 날 생명의 은인이라 떠받들면서 모든 걸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테레사의 명을 받고 움직였던, 테레사를 닮은 아이.
어쩌면 테레사의 이복동생일 수도 있는 아이를 앞에 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야. 테레사를 위협할 수 있는 엄청난 정보일 수도 있겠지.”
테레사가 아쿠아로드 왕실의 피를 잇지 않았다거나.
실은 떠돌이 신관의 딸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지 피오넬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한테 묻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믿을 수 없다는 듯 피오넬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널 증언대에 세우는 일도 없을 거야. 공작저에서 쫓아낼 마음도 없어.”
피오넬이 석판에 큰 글자로 썼다.
[왜죠?]
나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다. 네가 한 짓을 용서한 건 아닌데… 테레사에게 이용당하다가 죽는 사람을 또 보는 건 싫은 걸까.”
[공작부인이 뭘 하셔도 저는 입을 열지 않을 거예요.]
피오넬이 고집을 부렸다.
그 모습이 피오넬다워서 픽 웃었다.
“나도 알아. 계약 마법 때문이잖아.”
석판의 글씨를 지우고 피오넬이 또박또박 다시 적었다.
[계약 마법은 해지됐어요. 비밀을 발설하면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조른다, 라는 조건이 발동됐으니까요.]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계약 마법이 해지됐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피오넬이 계약 조건을 자세히 알고 있을 줄도 몰랐고.
“설마 너 고대 마법어를 익혔니?”
[네.]
“테레사도 그걸 알아?”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피오넬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테레사에겐 당연히 숨겼죠. 저도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내게 비밀을 알려주는 이유는?”
내 물음에 피오넬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
피오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테레사는 굽실거리는 하늘색 머리칼 위에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올렸다.
국왕의 침전으로 향할 때마다 보라색 드레스에 박아 넣은 진주가 별처럼 빛났다.
왕세녀다운 기품, 동화 속에서 빠져나온 듯 사랑스러운 미모.
테레사가 지나갈 때마다 시종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국왕의 행차보다 극진한 대우였다.
침전 문이 열리자, 텁텁한 향냄새와 병자가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즉위식을 할 때까지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다.
“아바마마. 저를 찾으셨다고요?”
“테레사…….”
국왕이 회색빛 반점으로 뒤덮인 손을 까딱였다.
또 껴안고 지랄발광을 해대려는 걸까?
죽음을 앞둔 국왕은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국정을 돌보느라 바쁜 테레사를 자주 호출했다.
늙은이가 매번 하는 말은 비슷했다.
「하나뿐인 내 딸, 테레사! 너는 내 유일한 희망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내 딸!」
그때마다 테레사는 국왕의 입에 걸레를 쑤셔 넣고 싶었다.
국왕의 구취보다 걸레가 향기로울 테니까.
짜증을 숨기고 테레사가 국왕에게 다가갔다.
국왕이 다짜고짜 테레사의 하늘색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악!”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흘릴 만큼 매서운 손길이었다.
늙은이가 드디어 미친 걸까?
테레사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아바마마? 갑자기 왜 이러세요?”
“테레사!”
“정신이 드세요?”
“네가… 네가… 정말 내 딸 맞느냐?”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졌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안으로 말리고 혀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정녕 내 딸 맞느냐고 물었다!”
국왕의 핏발 선 눈에서 진득거리는 눈물이 배어 나왔다.
늙은이의 손에는 구겨진 편지가 들려있었다.
테레사가 치미는 욕지기를 삼켰다.
누군가 국왕에게 속살거린 모양이었다.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말을.
“당연하죠. 제가 아바마마 딸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테레사가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크게 떴다.
울면 딱 좋은 타이밍이었지만 분노가 치민 탓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말씀해주세요, 아바마마?”
테레사가 가녀린 소녀의 얼굴로 국왕에게 매달렸다.
테레사의 연기에 국왕도 흔들린 기색이었다.
“네가 떠돌이 신관의 딸이라고…….”
“그 말을 믿으세요? 이 하늘색 머리칼과 물의 마력을 보셨으면서요?”
테레사가 억지 눈물을 쥐어짜며 억울한 척했다.
“어떻게 절 의심하실 수가 있어요! 아바마마 대신 밤낮으로 나라를 보살피는 저를요!”
“테레사…….”
“그렇게 못 믿겠으면 절 폐위시키시면 되겠네요! 아이시아처럼요!”
테레사의 강경한 태도에 국왕이 주춤하며 그러잡은 머리칼을 놓았다. 그걸 놓칠 테레사가 아니었다.
“편지를 보여주세요. 누가 아바마마와 절 이간질했는지 확인해볼게요.”
“안 돼!”
늙은이가 뒤로 편지를 감췄다. 테레사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늙은이를 후려쳐서 편지를 빼앗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는 절 못 믿으시는군요. 하나뿐인 딸이자, 후계자인 저를요.”
국왕에겐 다른 자손이 없었다.
왕위계승서열에 이름을 올린 귀족들은 테레사에게 살해당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그것을 국왕이 모를 리 없었다.
“테레사…….”
편지를 든 국왕의 손이 덜덜 떨렸다.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국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검은 돌다리 매춘부를 죽였느냐?”
“!”
“수잔이라는, 네 어미의 친구와 그 가족을 말이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늙은이가 피에타의 가족을 처형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머니가 고한 걸까? 멍청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쓸모없는 여자는 아닌데? 호화로운 삶을 포기할 리도 없고!’
마른침을 삼키고 테레사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가엾은 분들을 깨끗한 집에 모시고, 따스한 음식을 나눠줬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편지인데 그러세요?!”
자기도 모르게 쇳소리를 질렀다.
국왕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깨달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긴 침묵 끝에 국왕이 주름진 입술을 뗐다.
“피에타 어미의 편지다. 자신이 사라지면 너 때문일 거라 적혀있다! 죽기 직전에 이 편지를 남겼고!”
테레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피에타의 어미가 뒤에서 수작을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왕이 매춘부와 편지를 주고받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데려온 시녀가 검은 돌다리 출신이라고 했지…! 그 여자가 비둘기 노릇을 한 거야!’
테레사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천하고 멍청한 어머니가 또 제 발목을 잡고 있었다.
“네가 내 딸이 아니라, 에단이라는 떠돌이 신관의 딸이라고 하더군.”
“!”
“네 머리칼도 하늘색으로 염색한 거고!”
커다란 도끼에 등을 찍힌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에단.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다.
테레사의 눈앞에 청람색 머리칼을 휘날리던 미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스러운 내 딸 테레사! 테레사 너는 내 보물이자, 생명이다!」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떠올려서도, 그리워해서도 안 되는 목소리였다.
“하나뿐인 후계자보다 매춘부의 말을 믿으신다는 건가요?”
테레사가 차갑게 읊조렸다.
테레사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빛은 그보다 더 차가웠다.
“매음굴에서 브리니티를 안은 건 딱 한 번이었다.”
“아바마마!”
“그것도 반쯤은 약에 취해 있었지. 네 어미란 년이 이상한 술을 줬거든.”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테레사가 귀를 막았다.
브리니티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솟아올랐다.
「네년만 아니었으면 진작 에단을 버렸을 거야! 무능한 신관 놈이랑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에단과 테레사를 원망하며 매일 남자들을 상대하러 갔던 브리니티.
왕비랍시고 잘난 척하는 여자의 과거를 테레사는 조금도 잊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테레사. 네가 정말 내 딸이냐?”
국왕이 준엄하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병마도 물리친 듯했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펴고 테레사가 뻔뻔하게 답했다.
“물론이죠.”
“그럼 네 머리카락을 뽑아다오.”
“뭐라고요?!”
“염색인지를 조사하라 명하겠다. 네가 정말 억울하다면 머리칼을 뽑아라.”
국왕이 손을 내밀었다.
“이러지 마세요. 아바마마!”
테레사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늘색으로 머리칼을 물들여왔다는 걸 들키면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떳떳하다면서?! 얼른 내놔!”
국왕이 침을 튀겼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억지로 테레사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기세였다.
처음 내 머리칼을 잡아챈 것도 그 때문이었나?
테레사가 눈동자를 굴렸다.
침대 시트 위에 하늘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떨어져 있었다.
머뭇거리는 테레사를 본 국왕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너는 가짜로구나!”
“!”
“감히 가짜가 왕녀 흉내를 내다니! 아이시아를 내쫓은 것도 네 계략이지?!”
“그, 그건……!”
“내 딸을 돌려줘! 진짜 내 딸 아이시아를 돌려달라고!”
테레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떤 순간에서도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거짓말을 하던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들통났어! 이제 어떡해야 하지?’
병든 늙은이를 죽이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테레사가 국왕의 침전에 드는 걸 모두가 봤다.
늙은이가 갑자기 죽는다면 테레사가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이 가짜를 체포해라! 내 딸 아이시아를 데려와!”
자기가 버린 주제에 아이시아를 데려오라고?
아쿠아로드가 누구 덕분에 굴러가는데!
순간 테레사의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실이 툭, 끊어졌다.
테레사가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국왕의 뒷덜미에 찔러 넣었다.
“끄악!”
목 졸린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국왕의 몸이 축 늘어졌다.
시종들이 뒤늦게 침전으로 몰려왔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테레사는 아이시아가 보고 싶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신음을 삼키던 아이시아를 보고 싶었다.
그러면 가슴을 활활 태우는 분노도 말끔히 사라질 것 같았다.
‘아이시아를 잡아 와야 해.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내 손으로 죽여 버려야지.’
법석을 떠는 시종들과 의식을 잃은 국왕을 뒤로하고 테레사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 * *
피오넬이 영리하다는 건 알았지만 고대 마법어까지 깨쳤을 줄은 몰랐다.
석판에 적힌 글자를 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누가 너한테 마법어를 가르쳐줬지? 마법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드물 텐데.”
잠시 머뭇거리던 피오넬이 분필을 움직였다.
[알고 지내던 신관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마법어를 가르쳐줬고요.]
“테레사가 네게 계약 마법을 걸 줄 알고 있었구나?”
[테레사는 늘 우리 가족을 감시했어요. 명령을 어기면 죽일 거라고 협박했고요]
신관 후보생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피오넬은 직감했다고 했다.
테레사가 자신을 이용하리란 것. 자신을 믿지 못해서 계약 마법을 걸리라는 것.
그리고 피오넬의 예감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마법어를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지?”
날 빤히 올려다보던 피오넬이 되물었다.
[공작부인도 마법어를 배우고 싶으신가요?]
역시 피오넬은 눈치가 빨랐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부정하지 않았다.
피오넬의 손이 석판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제가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뭐라고?”
[계약 마법에 사용되는 단어는 정해져 있어요. 중점적으로 외우면 몇 주 만에 대충 읽을 수 있어요.]
피오넬은 내가 마법어에 관심을 두는 것이 계약 마법 때문이라는 것까지 꿰뚫고 있었다.
지독히도 영리한 아이였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피오넬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
내 물음에 피오넬이 답했다.
[절 지켜주세요.]
피오넬의 글씨체가 조금 흐트러졌다.
피오넬의 얼굴에 희망이라 부를 법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테레사가 절 죽일 수 없게 공작부인께서 지켜주세요.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
“…….”
[절 믿지 못하시면 계약 마법을 거세요. 계약 마법 거는 것도 배웠어요.]
묘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나도 살로메디안에게 비슷한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테레사에게 쫓기고 있었다.
다시 죽게 될까 봐,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살로메디안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그 희망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피오넬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피오넬이 기댈 곳은 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무 닮았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아쿠아로드를 떠나고 싶었고, 이 아이는 아쿠아로드로 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넌 테레사를 꼭 닮았어. 그리고 나도 많이 닮았지.”
피오넬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건지, 거절한다는 건지 헛갈리는 모양이었다.
“네 제안을 받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이번에는 내가 조건을 제시할 차례였다.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