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 *
그윽한 차향이 별장 응접실 안에 퍼졌다.
나와 단둘이 마주 앉을 수 있어서 네이선은 무척 기쁜 기색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아이시아 님?”
“폐하께서 잘 아시겠지만 살롬은 제가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혹시 숙부님께 괴롭힘을 당하셨습니까?”
묻고 있지만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내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부부 사이에 괴롭히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시아 님!”
“저는 결혼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눈으로 다 봤는걸요?”
네이선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뭘 봤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본 것만은 분명했다.
“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듣기에 따라 살로메디안이 몹쓸 짓을 했다는 뉘앙스로 들리는 말이었다.
살로메디안에게 미안했지만 죄책감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습니다. 아이시아 님의 말을 무시하는 숙부님을 보니, 평소 어떻게 행동하셨을지 뻔히 알겠더군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네이선의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채근했다.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황제의 권한으로 아이시아 님을 자유롭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자유롭고요, 당신만 아니면 훨씬 더 자유로울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내 얼굴엔 제2의 피부라고 할 수 있는 무표정 가면이 걸려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달라질까요?”
“제가 아이시아 님을 숙부님의 손아귀에서 구해드리겠습니다!”
바넷사의 말대로 네이선은 자신만의 착각에 푹 빠져있었다.
진실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충신의 조언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당사자인 내 말에도 귀를 닫았다.
그런 황제에게 잔혹 동화의 참맛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폐하께서는 살롬을 처형하실 수 있습니까?”
찻잔을 내려놓고 네이선에게 물었다.
네이선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를 가두고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냐고요?”
쓰디쓴 패배의 충격을 곱씹는 듯 네이선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가 아픈 상처에 소금을 넉넉히 뿌렸다.
“폐하께서 경험하셨다시피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무패의 기사단도 거느리고 있습니다.”
“흑룡기사단이라도 제국군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폐하?”
“필요하다면요.”
네이선이 고집스레 말했다.
나 때문에 정말 전쟁을 한다고? 완전 미쳤네!
눈치 없고, 주둥이를 제멋대로 놀리긴 하지만 나는 네이선이 썩 훌륭한 황제라고 믿어왔다.
그는 적어도 황제의 권위를 앞세워 상대를 짓뭉개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개무시하는 살로메디안을 숙부로 대접했고, 처음 만난 폐왕녀에게도 예의를 갖췄다.
네이선이 전쟁을 입에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실망감이 밀려왔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네이선을 응시했다.
“제국군이 움직이면 바로 전쟁입니다. 친황파의 맏형격인 세드나 공작가가 황가와 충돌하면 국내 정세가 요동칠 겁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네이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가와 공작가의 사이가 틀어지길 기다리던 반황파 귀족들이 똘똘 뭉칠 겁니다. 전쟁은 전국으로 확산되겠지요.”
“통제할 수 있습니다. 아이시아 님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어린 나이에 황권을 강화한 군주답게 네이선이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엔 여자에 정신 팔린 폭군으로 보일 뿐이었다.
“황가와 공작가의 틈을 노리는 세력이 국내에만 있을까요? 국경은 어찌 단속하실 겁니까?”
“그, 그건…….”
“저 한 사람 때문에 제국을 불구덩이로 처넣으시겠습니까. 폐하?”
“!”
“온 백성을 고통에 신음하게 하실 겁니까? 절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살롬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백성 이야기를 꺼내자 네이선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는 것 같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는 폐하께서 진정한 군주로 영원히 칭송받길 바랍니다. 제국이 지금처럼 평화롭길 바라요.”
“제국을 위해 희생을 택하시는 겁니까, 아이시아 님?”
떨리는 목소리로 네이선이 물었다.
희생은 무슨 희생?
나도 내 행복을 위해서 이런 짓까지 하는 거거든?
그림 같은 무표정 뒤에 진심을 감추고 답했다.
“제 희생이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낯이 뜨거웠지만, 제국의 평화를 바라는 건 사실이었다.
내 뒤에 후광이라도 비치는지 네이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시아 님의 인품은 정말 놀랍도록 훌륭하십니다…….”
“절 못 본 척하세요. 폐하.”
“아이시아 님!”
“제가 무슨 일을 겪든, 어떤 삶을 살든 모른 척하세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선 오직 밝고 곧은길만을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폐하와 백성과 제국 모두가 삽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 대사는 바넷사가 적어준 거였다.
‘반복해서 외우길 잘했네. 안 그랬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크으음.”
신음을 흘리며 네이선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공작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네이선을 향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세드나 공작부인으로서.
[아름다운 공주님은 스스로 악마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기사님은 공주님이 아닌, 백성과 나라의 평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 The end.]
별로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지겨운 동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네이선을 다시 보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 앞에 냉기를 풀풀 풍기는 살로메디안이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황제를 처리할 때까지 가만히 계시라고 했잖아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다행히 슬픔에 잠긴 네이선은 살로메디안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살로메디안의 팔을 끌었다.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도 네이선에게 할 말이 있다.”
살로메디안이 입을 열었다.
겨우 엔딩을 찍었는데, 우리 쪽 악마가 대본을 벗어나 탈주를 시작한 것이었다!
“살롬. 죄송하지만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내가 필사적으로 살로메디안의 옷깃을 흔들었다.
동화 속 기사는 공주님 대신 백성을 택해야만 했다.
사랑과 책임감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고,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닫고 좌절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공주를 차지한 악마가 나타나 비위를 긁는다면?
살로메디안이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했다.
“폐하께는 휴식이 필요해요.”
“내 말이 끝난 후 쉬어도 된다.”
“살롬!”
내가 애원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네이선이 손짓했다.
“들어오십시오, 숙부님. 저도 숙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네이선에게서 감출 수 없는 조바심이 전해졌다.
살로메디안을 향한 눈빛에는 증오로밖에 볼 수 없는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살로메디안이 네이선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두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숙부님부터 말씀하시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시아와 단둘이 대화하지 마라.”
“대화를 청한 것은 아이시아 님이셨습니다.”
“누가 청했건 상관하지 않는다.”
“또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경고하겠다. 네가 또다시 시아와 단둘이 마주한다면…….”
살로메디안이 말끝을 흐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너를 살려두지 않겠다.”
살로메디안이 황제의 목숨을 운운하며 으르렁거렸다.
그저 위협으로 던진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손으로 조카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내가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늦은 시간도 아니고, 침실도 아니고, 미리 양해도 구했는데?
살로메디안의 집착과 질투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이 남자,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와 시아를 방해하는 것도 용서하지 않겠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 내 땅에 발을 들이지 마라.”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덧붙였다.
우리를 방해하지 말고 함부로 찾아오지 말 것.
언뜻 타당한 요구 같지만 상대가 네이선이라면 말이 달랐다.
네이선이 차갑게 읊조렸다.
“저는 언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존댓말이었지만 살로메디안을 향한 일말의 애정도 모두 거둔 냉랭한 목소리였다.
네이선의 물음에 살로메디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하하! 황제의 거취를 놓고 이래라저래라하다니!”
네이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공허한 웃음이 끊기고 네이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들끓는 노여움을 자제하느라 눈썹이 기묘하게 뒤틀렸고, 뺨 근육이 경련했다.
“이래서 황제 위에 세드나 공작이라는 말이 도는군요.”
네이선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들거렸다.
네이선의 변화에 가슴이 조여왔다.
내가 원하는 건 아름답지만 슬픈 동화였다.
상처받은 영웅이 악당으로 변신하는 모험물이 아니라!
“나는 네 위에 선 적 없다. 그 자리에 서고 싶은 마음도 없다, 네이선.”
“황제를 협박하고 그 권위를 깔아뭉개면서요?”
“네 맘대로 생각해.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살로메디안이 감정을 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네이선은 반항심으로 가득한 십 대 소년처럼 입꼬리를 비틀었다.
“싫다면요?”
네이선을 빤히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담담하게 답했다.
“세드나 공작으로서 모든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겠다.”
“!”
“권리와 혜택도 마찬가지다.”
네이선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내 입도 소리 없이 벌어졌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세드나 공작을 그만두겠다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침묵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폭탄을 터뜨려놓고 살로메디안은 표정 한 점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오른 자리가 아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내려놓을 수도 있다.”
“숙부님!”
“시아와 제국을 떠나는 것도 좋겠지.”
살로메디안이 세드나 공작이 아니게 된다고? 마신의 숲을 떠난다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에 숨이 막혔다.
새까만 현기증이 장막처럼 머리 위에 쏟아졌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에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루 이틀 고민한 생각이 아닌 것도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네이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책임하시군요! 영지를 버리겠다고요?”
“그래.”
“숙부님을 신처럼 받드는 흑룡기사단과 영민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시겠다는 겁니까? 이 정도로 저질입니까?”
네이선이 핏대를 세웠다.
나조차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손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뭐가 문제지? 네가 새로운 세드나 공작을 임명하면 될 것 아닌가?”
“당신은 마신의 계약자잖아!”
네이선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찻잔과 유리창이 가늘게 떨렸다.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네이선은 분노했다.
“칠백 년간 이어온 마신과의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 신의 축복을 받은 쌍 속성이면서!”
“나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다.”
“뭐라고?”
“초대 황제가 권력을 쥐기 위해 한 계약이었다. 그 책임을 왜 내가 짊어져야 하지?”
살로메디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네이선이 멈칫 물러설 만큼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평생 전쟁터를 전전하며 피를 핥는 게 축복인가? 내 경험에 따르면 저주던데?”
“숙부님!”
“정말 축복이라고 해도 내가 불행하면 무슨 소용이지? 내가 원해서 받은 것도 아닌 것을.”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에서 폭발할 듯 분노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네이선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당신 운명이잖아.”
잔인하고도 냉소적인 어조로 네이선이 말했다.
“탓할 거면 쌍 속성으로 태어난 운명을 탓해.”
“…….”
“신에 범접하는 힘을 가졌으면, 눈이 멀 것 같은 미모도 가졌으면 받아들여. 징징대지 말고!”
그 말이 내 가슴속의 얇은 유리막을 깨뜨린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절규로 들리는 살로메디안의 말을 징징거림으로 받아들이는 네이선에게 화가 치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지금 제국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관심 없다.”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마물 떼가 출몰하고 있어! 전국에서 온천이 마르고 신전이 무너지고 있다고! 모두 서신에 적었을 텐데?”
공작령 온천만 마른 것이 아니었단 말이야?
신전이 무너지는 건 또 뭐지?
강렬한 충격이 목구멍을 막았다.
“이게 전부 당신이 불의 심장을 잃은 탓이야!”
네이선이 외쳤다.
늦은 밤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더라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 같았다.
불현듯 황실에서 온 서신은 전부 살로메디안이 가져갔다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편지는 건드리지도 않고.
‘네이선이 보내는 초대장 때문이 아니었어? 이상한 조짐을 숨기려고 그랬던 거야?’
살로메디안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사정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괴로워할까 봐 진실을 숨긴 거야!’
나만 아니었다면, 제국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다.
내가 없었다면, 살로메디안이 네이선과 각을 세우는 일도 없었다.
모두 나 한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간다면?
나는 온 백성의 분노를 사게 될 거였다.
네이선도 더 이상 날 아리따운 공주님으로 보지 않으리라.
「저주의 씨앗! 너 때문에 나라가 망할 거다!」
「마녀를 몰아내라! 저주받은 여자를 죽여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던 목소리가 다시금 심장을 두들겼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거짓이었고, 지금은 진실이라는 거였다.
살로메디안은 거기까지 생각한 것 아닐까?
진실이 밝혀지면 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미리 도망치려했던 건 아닐까.
영지와 의무를 저버린 쓰레기라 손가락질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으읏.”
짧은 신음을 토하며 배를 감싸 쥐었다. 속이 뒤집히면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로메디안과 부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은 살로메디안도 네이선도 아닌, 바로 나였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날 부축했다.
그의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이 방에서 처음 보인 감정이었다.
“아이시아 님! 괜찮으십니까?”
진실을 알 리 없는 네이선이 다가왔다. 하지만 내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물의 장벽으로 네이선을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나와 시아 사이에 끼어들지 마라.”
네이선의 불꽃을 막아내야 하는데 전투 중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방어막이었다.
황제 앞에서 마력을 발동했다는 것만으로 반역죄로 몰릴 수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개의치 않았다.
나를 위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작정인 듯 했다.
이 얼마나 바보 같고 맹목적인 사랑인가.
뜨거운 불덩이가 울컥 솟아올랐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따가웠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
살로메디안의 가슴에 붉은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꽃잎이 서서히 주위를 선홍빛으로 물들였다.
꽃잎이 아니라 피라는 것은,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알았다.
심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살롬!”
놀란 내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날 감쌌다.
상처를 감추려는 듯 그가 몸을 돌리며 네이선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경고를 무시하면 제국은 세드나 공작을 잃을 것이다.”
“!”
“이미 잃었는지도 모르겠지만.”
* * *
바바라는 화가 났다.
아이시아가 떠난 나흘 동안 골치 아픈 일들이 끊임없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친 마도사가 밤낮없이 마도구를 만들어내는 통에 예산이 뭉텅 증발했기 때문도 아니다.
추워진 날씨 때문에 비를 맞았던 린삼이 채 마르지 못하고 얼어 죽은 탓도, 돈줄이 마르면서 영지 사업에 차질이 생긴 탓도 아니었다.
“시아, 얼굴이 왜 그래요?”
바바라가 회색빛으로 덧칠된 듯 안색이 창백한 아이시아를 보고 외쳤다.
눈 밑엔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입술은 까칠하게 부르터 있었다.
온천이 있는 별장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막 출소한 사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바바라의 물음에도 아이시아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 같은 무표정이 바바라의 가슴을 쥐어짰다.
“각하께서 또 무슨 짓을 하신 거죠?”
“…….”
“우리 시아를 힘들게 하다니! 제가 혼내줄게요! 아니, 반쯤 죽여 놓을게요!”
빛을 잃은 아이시아의 미모를 보며 바바라가 주먹을 휘둘렀다.
평소라면 그런 바바라를 자제시키는 건 아이시아의 몫이었다.
생기를 잃은 식물처럼 서 있던 아이시아가 한마디 내뱉었다.
바바라를 지옥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살롬과 이혼해야겠어요.”
“뭐뭐뭐무어…. 뭐라고요?!”
바바라의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튀어 나갔다.
“내가 아는 그 이혼이요? 각방도 아니고, 별거도 아니고 이혼?”
“…….”
“우리 각하를 버리시겠다는 거예요?!”
아이시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을 뿐 답하지 않았다.
“시아! 말씀 좀 해보세요!”
연두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바바라가 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아이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자꾸만 생겨요.”
“그게 무슨 강아지 똥꾸멍 같은 소리예요? 시아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기다뇨?”
“사실 별장에 폐하께서 오셨어요.”
아이시아가 마신의 이빨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바바라는 혈관을 타고 흐른 분노를 참지 못해 악을 썼다.
“천하의 개썅 미친놈이! 감히 우리 천사를 노렸다고요?!”
“바비. 상대는 폐하세요.”
“황제건 황제 할아비건 무슨 상관이에요?! 시아를 노리는 새끼는 천하의 개호로쌍놈일 뿐이라고요!”
“…….”
“바넷사 언니도 미친년이에요! 덜떨어진 황제 새끼가 불륜, 납치를 꿈꾸면 대가리를 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동화가 뭐 어쩌고저째?”
화를 참지 못하고 바바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을 집어 들었다.
바넷사와 네이선의 머리통을 화병으로 갈겨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병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비. 흥분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각하는 칼 뒀다가 뭐 했대요? 그 자리에 18조각으로 썰어버릴 것이지!”
“살인, 반역, 전쟁은 안 된다고 했어요. 바비도 꼭 기억해주세요.”
아이시아가 침착하게 바바라의 손에서 화병을 가져갔다.
정신착란에 빠진 멍청한 황제에게 시달렸음에도 아이시아는 공작령 걱정뿐이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이란 말인가. 이런 공작부인을 모실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집사인가.’
다시 한번 감격하며 바바라가 눈물을 소매로 찍었다.
“여신님이라고 해도 시아만큼 자비로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황실과 대립해봤자 우리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어요. 살롬도 위험해지고요.”
“온천이 무너지고, 남의 아내 넘보는 개쌍놈이 등장한 것 말고 다른 일도 있었어요?”
바바라가 물었다.
멈칫했던 아이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요. 그게 전부예요.”
반 박자 늦은 아이시아의 대답은 바바라의 석연찮음을 조금도 해소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불안을 부채질했다.
‘시아는 폐하 때문에 이혼을 결심할 사람이 아니야… 내게 말 못 할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베프인 자신에게도 말 못 할 문제는 뭐란 말인가!
바바라가 얼굴만 번드르르할 뿐 별 쓸모없는 아이시아의 남편을 떠올렸다.
‘각하를 족쳐 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후에 아이시아를 바라봤다.
일단 이혼하겠다는 아이시아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공작령엔 시아가 꼭 필요해요! 제발 이혼하지 마세요!”
“바비.”
“시아가 있어야 공작령이 살고, 각하도 사람 구실을 한다고요!”
“살롬은 좋은 영주가 될 거예요.”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은 없어요! 시아가 오기 전에 각하는 그냥 칼을 든 밥버러지였다고요!”
“저 때문에 모두가 위험해지면요?”
아이시아가 물었다.
표정이 많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바바라는 아이시아의 숨겨진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을 누르고 바바라가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위험해지긴요! 보세요. 시아가 온 뒤 모든 것이 놀랍도록 좋아졌어요! 깨끗한 정원도, 북적거리는 사람들도 전부 시아 덕분이라고요!”
동물 사체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뒹굴던 정원이 황도 대저택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깔끔해졌다.
의료 교육원을 짓는 인부들과 거대한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들.
물 샐 틈 없이 공작저를 지키는 흑룡기사단까지.
모든 이들의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그 모든 것이 아이시아 덕분이라는 것을 바바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아가 없을 땐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굶어 죽어가는 빈민들을 돕지도 못했고요. 지금은 어떤가요?”
“…….”
“시아 덕분에 약초를 발견했고, 약초 덕분에 돈과 사람을 모았어요. 마도구 생산도 진행 중이고요!”
“저는 한 게 없어요.”
“아뇨. 시아가 없었더라면 공작령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허덕였을 거예요!”
바바라가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이 아이시아에게 약간의 용기를 준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아이시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바비.”
살로메디안과 함께 있을 때만큼 눈부시지는 않았지만, 바바라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도 남을 미소였다.
이 아리따운 미소를 가진 공작부인을 바바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혼 이야기는 다신 꺼내지 말아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
“이혼만 아니면, 뭐든 시아 맘대로 해요! 테레사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고 했죠? 아쿠아로드 여행도 제가 팍팍 밀어줄게요!”
“제가 자리를 비우면 바비가 너무 바쁠 텐데요.”
“며칠은 괜찮아요! 어차피 각하는 있으나 마나고요. 크하하!”
바바라가 쓰린 속을 감추기 위해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시아가 없는 공작저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공작부인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깟 여행으로 며칠 비우는 게 뭐 대수겠는가.
시아가 공작령에 돌아와 준다는데!
문제는 아이시아가 이혼까지 생각했던 진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문제는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어. 시아가 공작령을 떠나는 일만은 무조건 막아야 해!’
그늘진 아이시아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면서 바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혼은 절대 절대 절대 안 되지만… 시아가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요?”
“시아가 공작령의 영주가 되는 거예요. 그럼 각하 따위 내다 버려도 돼요.”
“세드나 공작령에서 세드나 공작을 쫓아내라고요?”
황당해하는 아이시아에게 바바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모두를 위한 최선이에요.”
“바비도 참.”
“각하를 쫓아내기 싫으시면 이혼 안 하시면 돼요. 아시겠죠?”
바바라가 두 손을 모으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대답해죠요, 시아. 네에? 네에?”
애교를 듬뿍 섞어서 애원하자 아이시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혼 안 할게요.”
“다행이다! 사랑해요, 시아!”
바바라가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환호했다.
그런 바바라가 귀엽다는 듯 아이시아가 눈매를 곱게 접었다.
“바비한테는 못 당하겠어요.”
“헤헤헤.”
배시시 웃던 바바라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귀여운 척을 했느냐는 듯 냉철한 집사의 얼굴로 돌아온 후였다.
‘나의 천사를 지켜야 해. 천사를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악독한 술수를 다 쓸 테다!’
* * *
똑똑.
두 번째 노크에도 살로메디안은 반응이 없었다.
침실에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침실 문고리를 돌렸다.
“살롬. 안에 있어요?”
청결하게 정리된 침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어설픈 도둑처럼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남편의 침실에 혼자 있다는 것이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됐다.
“살롬. 저 왔어요?”
다시 한번 불러봤지만,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살로메디안이라면 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연무장에 틀어박혔을 거였다.
나는 그에게 특별 명령을 내렸다.
네이선에게 당한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침실에서 휴식하라고.
“이 남자가 어디로 간 거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릴 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겠나. 아내의 명령에 얌전히 순종하고 있었지.”
“살롬!”
놀란 내가 어깨를 튕겼다.
그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랫도리에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친 살로메디안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다 벗고 뭐 하는 거지?
설마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준비한 건가? 무슨 준비?!’
달음박질을 시작한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감정을 읽은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요염하게 휘어 올라갔다.
“시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더워서 씻은 것뿐인데.”
그의 백금발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막 씻고 나온 살로메디안의 뽀얀 살결에서 비누향기가 흘러나왔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과 상반되는 넓은 가슴. 지방 한 점 없는 근육질 몸매.
빤히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그의 몸매를 감상하고 말았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칼로 조각하지 않은 인간의 몸이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내 시선은 그의 왼쪽 가슴에 닿았다.
“아직 없어지지 않았네요…….”
그의 왼쪽 가슴에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붉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거의 아물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불안이 불쑥 치솟았다.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 살로메디안에게 흉터가 생겼다.
완벽하던 그의 몸이 변한 것이다.
내가 차지한 반쪽의 심장 탓에 생긴 변화라는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깟 흠집 따위 신경 쓰지 마라.”
살로메디안이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그를 저지하며 손으로 흉터를 매만졌다.
그의 가슴에서 배어 나오던 피를 생각하면 끝없는 구덩이 밑으로 추락하는 듯 아찔했다.
“왜 안 낫는 거죠? 이것보다 심한 상처도 금방 나았잖아요?”
“빌빌거리는 것 같지만 네이선은 강한 놈이다. 일격을 맞았는데 멀쩡할 수는 없지.”
“제가 살롬의 심장을 훔치지만 않았으면…….”
“내가 바쳤다고 하지 않나. 그 말은 다시 꺼내지 마.”
“하지만 저 때문이잖아요. 폐하와 대련한 것도 제 부탁 때문이고요.”
살로메디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자책하지 마. 아내를 자책하게 하는 무능한 남편이 되고 싶지 않다.”
“살롬.”
“내가 방심한 탓에 다친 거다. 그대 잘못은 없어.”
살로메디안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살롬이 안 다쳤으면 좋겠어요.”
“다치지 않을게.”
“많이 아팠죠?”
“모기가 피 빠는 줄 알았다.”
살로메디안이 뻔뻔하게 잡아뗐다.
팔짱 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피를 철철 흘려 놓고서…….”
“진짜 몰랐다. 앞으론 좀 조심하겠다. 그대가 놀라지 않도록.”
다시 생각해도 짜증스럽다는 듯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이 네이선을 향한 분노인지, 어리숙하게 상처를 들킨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살로메디안은 항상 나보다 멀리 보고, 안 보이는 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염려할까 봐. 내가 괴로워할까 봐.
날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살로메디안이라는 남자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행복해서 믿기지 않는 환상.
가끔은 이것이 현실임을 실감하기 위해 질문이 필요했다.
“살롬은 제가 그렇게 중요해요?”
머뭇거리며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가 즉답했다.
“아니.”
태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라면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뭘 놀라고 그래? 나보다 중요한 건 얼마든지 있겠지! 좀 잘해준다고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니야?’
이리저리 흔들렸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황홀한 미소를 머금은 살로메디안이 회색으로 찌든 내게 속삭였다.
“오직. 오직 그대만 중요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 상관없다. 내게 의미 있는 것,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숨이 콱 막히면서 배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었다.
그 담담한 말이 어떤 사탕발림보다 달콤해서 가슴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살로메디안을 만나게 해준 운명과 운명을 허락한 신에게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내게 자격이 있을까?
나 때문에 전 제국이 마물로 들끓고, 완벽에 가깝던 살로메디안의 몸은 치유력을 상실했는데?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
그에게 오직 나만 중요한 것처럼, 내게도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만이 소중했다.
“진짜 공작령을 떠나서 도망자가 돼도 괜찮겠어요?”
몇 번이나 다짐받아야 마음 놓는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이것이 어리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불그스름하게 뺨이 달아올랐다.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무슨 상관이지? 그대가 내 곁에 있을 텐데.”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는 믿음으로 나를 완벽히 장악했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에게 오래 머물렀다.
내게는 감정을 읽는 재주가 없었지만, 살로메디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알 수 있었다.
‘이 어여쁜 여인이 내 아내라니. 나는 정말이지 운 좋은 남자다.’
눈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살로메디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나는 이 남자 없이는 못 살겠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살로메디안과 함께여야겠구나.’
확신인지 다짐인지 모를 것이 내 안을 꽉 채웠다.
열정이거나 욕망일 수도 있었다.
“시아?”
살로메디안의 품 안을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그가 하체를 살짝 뒤로 빼는 느낌이었다.
내게서 물러서려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과 달리 여린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 주세요.”
“나 지금 벗고 있는데.”
“?”
“이러다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살로메디안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누가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건가?
한낮에 스킨십 하는 건 제국 예의에 어긋나는 걸까?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뺨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그의 살결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새초롬하게 물었다.
“부부 사이에 뭐 어때요?”
“…….”
“하면 안 될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뻣뻣하게 굳어있던 살로메디안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보면 그대가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르겠다.”
“?”
“날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 걸 보면 악마가 분명한데, 생김새는 영락없이 천사란 말이지.”
체념이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배시시 웃었다.
바바라나 휴고가 천사 같다고 할 때는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었는데.
살로메디안이 말하는 천사는 싫지 않았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하고 뺨이 후끈 달아오르긴 했지만.
“시아. 나도 부부 사이에 해도 될 만한 일을 해도 될까?”
문득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뭘 하시게요?”
벌건 대낮에, 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결이 얽혔다. 온기가 닿았고, 열기가 번졌다.
맹렬한 키스가 머릿속을 새하얗게 비웠다.
내 안으로 밀려드는 살로메디안의 혀는 부드럽고 뜨거웠다.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여유롭게 움직이며 천천히 호흡을 빨아들였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 때마다 나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 밀착됐다.
닿아 있음에도 더 깊숙이 닿고 싶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열기를 마음껏 쏟아내고 싶었다.
“으으응.”
내가 들어도 야릇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갔다.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더욱 격정적으로 입술을 맞붙여왔다.
나도 호응하듯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겼다.
「그대는 내 것이고, 나도 그대 것이다.」
살로메디안의 말이 서서히 나를 잠식해 왔다.
이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어떤 확신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게 된다는 사실을.
때론 다짐보다 다급한 운명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걸 말이다.
* * *
마신의 이빨에서 돌아온 지 2주가 지났지만, 네이선은 내내 우울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계속 떠오르시나 봅니다.”
바넷사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감자와 조개를 넣은 크림 수프와 유자 샐러드.
입맛이 없을 때 네이선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저녁은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점심도 거르셨습니다.”
“자네도 내 뜻을 무시하는 건가?”
“억지로 드시라는 건 아닙니다. 대신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
“폐하께서 한 끼를 거르시면 요리장이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두 끼를 거르시면 폐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돕니다. 후사도 없는 폐하께 그보다 위험한 소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이선은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말을 듣고 식사를 물릴 수 있는 군주는 없을 터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한 입 떠먹으며 네이선이 말했다.
“자네는 참으로 유능한 집사다. 바넷사.”
칭찬이라기보다 비아냥에 가까운 말이었다.
바넷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송구합니다.”
네이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잘 안다는 투였다.
아이시아. 그리고 살로메디안.
침대에 누워도 두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네이선의 숨겨진 욕망을 부채질한다는 부분에서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한 사람은 연심을, 다른 한 사람은 살육을 충동질하긴 하지만.
그때마다 네이선은 아이시아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제국을 불구덩이로 처넣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선 오직 밝고 곧은길만을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폐하와 백성과 제국 모두가 삽니다.」
스스로 희생하면서까지 아이시아는 네이선이 성군의 길을 걷길 바랐다.
그녀의 애틋한 마음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뼈저린 외로움을 알기에 고통스러웠다.
황후가 되어야 할 그녀 곁에 온 힘을 쏟아부어도 머리카락 한 올 베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으므로.
“마물의 움직임은 어떤가?”
“살로메디안 님의 토벌 이후에 잠잠해진 기색입니다.”
“다행이군.”
“하지만 온천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바라가 서류철을 넘기며 보고를 이어갔다.
“공작저 온천처럼 이유 없이 온천수가 마르는 경우가 3곳, 마신의 이빨 온천처럼 불의 사고로 매몰된 경우가 3곳입니다.”
“그럼 남은 온천은 3곳뿐이로군.”
네이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온천은 전 대륙에서 제국에만 있는 특이 지형이었다.
백성들은 온천이 물과 불이 합쳐진 장소라 믿었다.
마신의 입김이 닿았다는 상징으로 떠받들기도 했다.
“온천 문제로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마신의 가호가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기도 합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나?”
“신관, 신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만 별 성과가 없습니다.”
“온천 때문에 폭동이 날 수도 있겠군.”
“세드나 공작령에서도 온천 살리기에 관심이 큰 듯합니다. 역으로 올라오는 정보가 꽤 됩니다.”
“그거야 아이시아 님께서 온천욕을 좋아하시니까.”
아이시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네이선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바넷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아이시아 님보다 우리가 먼저 온천을 살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시아 님의 능력이 더 주목받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이시아 님께서 황후가 아닌 세드나 공작부인이니까?”
바넷사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평민들을 위한 세드나 의료 교육원이 신입생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세드나 공작령의 눈부신 발전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거기에 온천까지 되살린다면 아이시아 님은…….”
“공작령의 구세주가 아니라 제국의 여신으로 추앙받겠지.”
“살로메디안 님과 아이시아 님 사이에 아이라도 태어나면, 황후와 후계자가 없는 폐하께 큰 위협이 될 겁니다.”
네이선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갔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낳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내버려 둬서는 안 될 범죄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시아 님을 구해드려야 하는데…….’
무기력과 죄책감에 얼룩진 네이선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백성과 제국을 위한다는 명분도 소용없었다.
아이시아 앞에서 자신은 비겁한 남자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아니, 언제까지 그래야만 할까?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를 위해 공작 작위도, 영지도, 700년의 약속도 내던지겠다고 하는데.
네이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로메디안 님이 애처가란 소문이 돌면서 민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 역시 아이시아 님 때문이지.”
“아이시아 님을 향한 귀족들의 호기심도 극에 달했습니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더욱 신비로운 모양입니다.”
“곧 겨울 사교 시즌이 시작되겠군.”
“한 달 뒤 시작이지요. 올해가 제국 건국 700주년이라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건국 700주년 기념 파티와 아직 제국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아이시아.
어떤 결심이 네이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 속옷 개수까지 아는 바넷사에게도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결심이었다.
네이선이 자리를 박차며 말했다.
“역대 건국기념 파티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황실 파티를 열겠다.”
“네?”
“전 대륙 왕실에 초대장을 보내도록. 무조건 화려하고 웅장해야 한다. 부족한 예산은 황제의 사재로 충당하도록.”
“폐하. 무슨 꿍꿍이십니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바넷사가 물었다.
네이선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마신이 날뛰고 있지 않나? 호화로운 파티를 차려주면 마신도 정신을 차릴지 모르지.”
네이선의 동화도 아직 끝을 맺지 않은 이야기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