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50)

26

* * *

네이선은 오늘도 오전 6시에 일어나 검을 들었다.

체력단련을 위해 제작한 강철 검은 보통 검보다 10배 이상 무거웠다.

찌르기와 베기를 반복하는 단순 연습이었지만 찬바람 속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네이선 뒤로 두툼한 로브를 껴입은 바넷사가 물병과 수건을 들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아직 안 끝났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결재하실 서류가 태산같이 쌓여있습니다.”

“서류보다 단련이 중요하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와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잔소리를 퍼부을 줄 알았던 바넷사가 무심한 얼굴로 응수했다.

“열심히 하십시오. 보통 단련으로는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자네도 알지 않나? 숙부가 쌍 속성을 잃었다는 걸.”

“승산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폐하.”

“고맙다. 하압!”

네이선이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한 네이선이 검을 내렸다.

“역시 어리석구나, 네이선. 눈대중으로 뻔히 보이는 걸 굳이 대보려고 하다니.”

팔짱을 낀 살로메디안이 다가왔다.

원래도 상큼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그를 둘러싼 살기가 흉흉했다.

어린아이라면 울음을 터뜨렸을 테고,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렸을 정도로 음산했다.

‘숙부께서도 내가 아이시아 님을 넘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까?’

자기도 모르게 뜨끔한 후, 네이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더 이상 숙부의 말이라면 울음부터 터뜨리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이자 계약의 주인이었다.

자신감 부족으로 살로메디안 앞에서 위축되는 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아이시아를 황후로 삼기로 결심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에게 묵례했다.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숙부님.”

“아주 불쾌한 소식을 들었거든.”

살로메디안이 싸늘하게 답했다.

네이선에 고정된 눈동자엔 증오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꽃이 번뜩였다.

“무슨 일인데 이리 노여워하십니까?”

“네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

“서운합니다. 그래도 하나뿐인 조카 아닙니까?”

네이선이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수록 살로메디안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굳어갔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상처 입은 채 사냥꾼에게 쫓기는 맹수가 있다면 이런 얼굴일까?

‘숙부도 날 견제하는군. 그에겐 내가 가장 두려운 존재일 테니까.’

계약에 묶인 살로메디안은 네이선을 공격할 수 없었다.

신의 사랑을 받은 무위도 네이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권력이나, 재력에 있어서 살로메디안은 네이선의 상대가 아니었다.

흑룡기사단이 강하다고 한들 제국군을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결국 승리하는 건 나야.’

네이선은 점차 여유를 찾아갔다.

“기분 상할 땐 한바탕 땀을 흘리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숙부님. 오랜만에 상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에게 비무를 신청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거절할 살로메디안이 아니었다.

“건방져졌구나, 네이선.”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용맹해졌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어린 시절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너도 어렸을 땐 봐줄 만했는데. 걸핏하면 질질 짜서 귀찮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시지요.”

네이선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네이선이 든 강철 검으로 향했다.

“그거로 나와 겨루겠다는 건가?”

“어차피 진짜 싸움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네놈은 불 속성을 잃은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본심을 들켰는데도 네이선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설픈 거짓말로 살로메디안을 속일 수 없다는 건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숙부께서도 발검하시지요.”

“좋아. 오랜만에 놀아주마.”

살로메디안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보석으로 세공된 장식용 검을 본 순간 네이선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단검으로 저를 상대하시겠다고요?”

“왜. 무서운가?”

“…절 우롱하시는 겁니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네이선의 몸에서 선홍색 불꽃이 튀어 올랐다.

아이시아의 푸른 불꽃과 전혀 다른 질감의 불꽃이 살로메디안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단검으로 네이선을 겨누었다.

“우롱은 네놈이 하고 있지. 감히 내 아내를 탐내고 있으니까.”

네이선이 침묵했다.

살로메디안은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시답잖은 변명도 안 하겠다? 버르장머리가 없어졌구나. 네이선.”

어린아이를 꾸짖는 듯한 태도였다.

네이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입을 조심하십시오, 숙부님. 저는 크로티무스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입니다.”

“나보고 네 비위를 맞추며 설설 기라는 뜻이냐?”

“세드나 공작도 황제의 신하일 뿐입니다!”

네이선이 목소리를 높였다.

살로메디안은 예리한 눈으로 조카를 내려다봤다.

“닥치고 검이나 제대로 잡아라. 잘나 빠진 황제 나리.”

“하아압!”

우렁찬 기합과 함께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이선을 둘러싼 마력 불꽃이 더욱 강력해졌다.

마력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대련 수칙이었지만 네이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곡예를 부리는 광대처럼 단도를 가지고 손장난을 쳤다.

자신과 유일하게 검을 겨눌 수 있는 상대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것이 네이선의 속을 뒤집어놨음은 물론이었다.

‘날 도발하는 거야. 넘어가면 안 돼……!’

네이선은 분노로 뒤집힌 심장을 진정시키고, 살로메디안의 빈틈을 노렸다.

쐐액.

강철 검이 공기를 가르며 스산한 소리를 내질렀다.

“무디구나.”

살로메디안이 네이선의 공격을 간단히 피했다.

살로메디안의 목덜미가 아무런 방비 없이 노출되어있었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벨 수 있다고 네이선은 확신했다.

“시끄럽습니다!”

네이선이 다시 한번 검을 크게 휘둘렀다.

분명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살로메디안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게다가 느리고.”

반대편에서 나타난 살로메디안이 네이선을 조롱했다.

그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듯 단도를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네이선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쥐새끼처럼 피해만 다니실 겁니까?”

“너는 언제까지 팔운동만 할 건가?”

“숙부님이야말로 언제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아내를 노리는 도둑놈의 재롱이 지겨워질 때쯤?”

살로메디안이 네이선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이죽거렸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유려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담긴 움직임이었다.

‘쌍 속성을 잃었음에도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또다시 패배감을 곱씹으며 네이선이 오기를 부렸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시는군요!”

“그놈 참, 말버릇하곤.”

“하압!”

강철 검 끝에서 마력 불꽃이 튀어나왔다. 마력과 합쳐진 검기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네이선의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한 걸음 물러서 있던 바넷사도 네이선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여전히 살로메디안의 몸은 빈틈투성이였다.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까? 네이선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함정 또한 부숴 버리겠다!’

강철 검이 정확히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노렸다.

이것이 대련이라는 것도, 살로메디안이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혈육이라는 것도 잊었다.

단지 제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남자를, 아이시아의 남편을 죽이고 싶을 뿐이었다.

“폐하!”

바넷사의 비명을 뒤로하고 검을 날렸다.

마력 불꽃이 폭죽처럼 터졌다.

검 끝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렸을 때 네이선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베었다!’

검을 살로메디안의 심장 깊이 찔러 넣으려는 순간, 차디찬 단검이 네이선의 목덜미에 닿았다.

분명 찔렸을 텐데? 어떻게 마력 불꽃을 피한 거지?

확실한 것은 딱 하나였다.

살로메디안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네이선은 죽었으리란 것.

“하아… 하아…….”

네이선이 가쁜 숨을 토했다.

살로메디안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의 완벽한 승리였다.

“너는 여전히 무디고, 느리고, 성급하구나.”

단도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살로메디안이 읊조렸다.

네이선이 그 자리에서 털썩 무너졌다.

발가벗겨진 채 채찍질 당해도 이보다 치욕스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었던 상대임에도 충격은 치가 떨릴 만큼 지독했다.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다. 너 따위가 황제라고? 가소롭구나! 진짜 황제가 되어야 했을 사람은 나다!’

살로메디안의 무심한 푸른 눈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패배감 이상의 절망이 네이선의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수치, 분노, 좌절, 질투, 막막함과 억울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때 등 뒤로 꿈결처럼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롬. 아침부터 폐하께 무례하시네요.”

* * *

살로메디안은 날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사랑한다고 고백하자마자 이혼하자고 했으니까.’

어젯밤 있었던 일이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살로메디안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남편이 아닌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옥체 보중하십시오.”

“아이시아 님…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방금 나왔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챈 네이선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상심하지 마십시오, 폐하. 상대는 세드나 공작입니다.”

“…….”

네이선에게 어떤 위로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살로메디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네이선에게 바짝 다가섰다.

“인간은 인간과 겨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네이선이 눈을 크게 떴다.

“시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인가?”

살벌한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그의 미간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살로메디안과 시선을 맞췄다.

“살롬이 순수한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말이 지나치다.”

“살롬이야말로 신하의 예를 잊지 마세요.”

“세드나 공작은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는 직책이 아니다.”

“논지를 벗어나지 마세요. 저는 공작의 상식과 예의를 지적하는 겁니다.”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쾌함을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롬이 생각보다 잘 참네. 어젯밤에 했던 대화 덕분일까?’

살로메디안의 표정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네이선을 돌아봤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네이선이 구조대를 만난 조난자처럼 기쁨에 차 있었다.

“아이시아 님이 절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여러 번 조언을 드렸지만 소용이 없네요.”

“숙부께서 원래 고집스러운 분이십니다.”

“폐하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내가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네이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시아 님께서 제 아내였다면 시키는 대로 했을 겁니다.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남편이 제일 좋은 남편 아니겠습니까?”

살로메디안이 품 안의 단도를 반쯤 꺼냈다.

끝내지 못한 칼질을 마저 하겠다는 듯 네이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검 도로 넣어요! 황제 시해죄로 잡혀가고 싶어요?!’

내 신호를 받은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은 토라진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 할 때였다.

“살롬이 폐하의 반만 닮았어도 참 좋았을 겁니다.”

“숙부님은 포기하십시오. 죽었다가 깨도 그렇게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럴까요?”

“황제도 무시하는 분이 어떻게 아내를 존중하겠습니까?”

치욕스러운 패배를 보상받고 싶다는 듯 네이선이 들뜬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의 흉을 봤다.

바넷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살로메디안과 네이선을 번갈아 보던 내가 속삭였다.

“폐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 * *

달도 뜨지 않은 그 밤.

바넷사는 내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폐하는 동화에 사로잡혀 계십니다. 살로메디안 님은 악마고, 아이시아 님은 악마에게 사로잡힌 공주님이죠.”

“폐하는요?”

“아무래도 공주님을 구하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하아…….”

“암담하군요.”

“두 분 사이가 좋다는 것도, 살로메디안 님이 아이시아 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믿지 않으십니다. 동화 속 악마가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으니까요.”

그 환상이 깨지면 네이선이 날 포기하게 된다는 뜻일까?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께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쿠아로드를 떠나지 직전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연기를 부탁했다.

국왕과 테레사 앞에서 다정한 남편 역할을 해 달라고.

「침대에서처럼 이름을 불러주시오. 나의 장미.」

내 허리를 휘어 감고, 살로메디안은 속삭였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도, 정열적인 손놀림.

연기라는 걸 알고서도 심장이 터질 뻔했다.

네이선을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살로메디안은 역사에 남을 만한 연기력을 선보일 게 뻔했다.

그 앞에서 내 이성이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뇨. 그런 건 폐하의 질투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바넷사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는 살로메디안 님께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황제들이 그랬죠. 가장 강한 황족이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요.”

“…….”

“세드나 공작으로 선택받지 않았더라면 살로메디안 님이 황제가 되었을 겁니다.”

바넷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황좌에 앉은 살로메디안이라고?

나도 모르게 황금관을 쓰고 붉은 비로드 망토를 늘어뜨린 그를 상상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황홀한 미모와 좌중을 압도하는 위엄이 황좌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내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바넷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는 살로메디안 님을 견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에 꼭 필요한 존재라 추방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전쟁터로, 마물 출몰지로 내돌리는 겁니까? 척박한 땅을 영지랍시고 내주고요?”

내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바넷사가 침착하게 답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

“우리의 공동 목표는 폐하께서 아이시아 님을 포기하게 만드는 겁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바넷사 님의 아이디어는 무엇입니까?”

“폐하의 이성에 호소하는 겁니다.”

황당할 정도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게 폐하께 통할 것 같습니까?”

이성과 논리가 통할 사람이었으면 별장까지 오지 않았을 거였다.

애초에 숙부의 아내를 황후로 삼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바넷사는 여유만만이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폐하는 동화 속에서 허우적거리신다고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주름졌다.

바넷사가 예의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시아 님께서 폐하의 동화를 완성시켜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폐하가 원하시는 대로 공주 역할을 해주세요. 따로 부탁드리지 않아도 살로메디안 님은 악마 역할을 잘하실 테고요.”

“동화는 정의로운 기사가 악마를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거로 끝나지 않나요?”

내 물음에 바넷사가 코웃음 쳤다.

“진짜 동화에선 그렇지요. 하지만 인생은 원래 잔혹 동화에 가깝습니다. 폐하도 그걸 깨달으셔야 하고요.”

그래서 나는 바넷사의 계획대로 동화 속 공주님이 되기로 했다.

몹시 성가신 일이 되겠지만, 황제는 무시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살롬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네이선과 살로메디안이 대련을 할 때 느꼈다.

살로메디안이 진심으로 네이선을 베고 싶어 한다는 걸.

그의 단검이 네이선의 목에 닿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 그가 멈춘 까닭은 계약 마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부탁 때문이었을까.

지난밤 살로메디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바넷사의 조언대로 해보려고요. 살롬의 도움이 필요해요.」

「죽여버리는 것이 빠르지 않나?」

「제가 말했죠? 살인도, 전쟁도, 반역도 안 된다고요.」

살로메디안이 불퉁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황가와 세드나 공작가에 걸린 계약을 상기시켜 주려다가 말았다.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 것을 노린 놈을 살려두라고?」

살로메디안이 노여움을 담아 물었다.

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는 물건이 아니에요.」

바로 말을 바꿀 줄 알았는데 그가 오히려 힘주어 대답했다.

「물건은 아니지만 그대는 내 것이다. 나도 그대 것이고.」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들쑤셨다.

분홍빛, 어쩌면 선홍빛 뭉게구름이 배 속을 가득 채우고 혈관을 간질이는 듯했다.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을 들쑤시는 남자 앞에서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제가 부탁한 대로만 해주세요.」

「대련으로 네이선을 짓뭉개는 건 너무 쉽다.」

「살롬도 폐하도 다치면 안 돼요. 압도적인 실력 차이만 보여주세요.」

불의 심장을 잃은 살로메디안과 역대 황제 중 가장 강하다는 네이선.

네이선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건 무리한 부탁이었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그대를 도우면 이혼 안 해도 되나?」

그가 아련한 푸른 눈동자로 내 눈치를 살폈다.

버림당한다는 걸 알게 된 강아지가 주인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쓰라린 통증을 견디며 내가 선을 그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요.」

「시아!」

「우린 너무 빨리 부부가 됐어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도 없이요.」

「운명이었을 뿐이다.」

「포장하지 마세요. 우리의 시작은 계약이었어요. 그래서 생기는 문제를 살롬도 잘 알잖아요?」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너른 등을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계약 모조리 파기하고, 연인부터 다시 시작해요.」

연인이라는 말에 살로메디안의 몸이 파득 떨렸다.

조금은 혹한 걸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조심스레 건넸다.

「살롬과 진짜 부부가 되고 싶어요. 계약 따위 말고 사랑해서 결혼한 진짜 부부요.」

살로메디안이 받아들이기 쉬운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불가능하다.」

「우리가 연인이 되는 거요? 아니면 다시 결혼하는 거요?」

「이혼부터가 불가능해.」

「계약 마법을 파기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살로메디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동의하면 파기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 불안하게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는 주먹.

그가 뭔가 숨기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큰 비밀을.

나는 계약 마법을 어긴 피오넬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봤다.

계약 마법의 무게와 공포를 실감하기도 했다.

그 뒤로 계약 마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공부했다.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거나 파기되는지도.

「까다롭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대도 마법진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배우면 되죠.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렇게까지 해서 계약을 파기하고 싶은가?」

「살롬이야말로 계약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예요?」

「…….」

「혹시 저한테 숨기는 것 있어요?」

결혼 계약을 맺을 때 나는 마법진에 대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계약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 어겼을 시 어떤 응징이 따르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모든 걸 살로메디안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살롬의 심장을 훔쳤으니까. 어떡하든 내 의지를 증명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롬 곁에 남고 싶었어.’

그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았다.

「어쨌든 이혼은 안 된다.」

살로메디안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우리의 계약은 ‘심장을 돌려주기 전까지 들키지 않고 계약 부부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라면 계약을 파기하는 게 무슨 문제일까.

나는 그에게 심장을 돌려줄 테고, 영원히 그의 아내가 될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불안만을 남긴 채 날이 밝았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바넷사에게 들은 대로 네이선은 새벽 검술 연습을 시작했다.

강철 검을 휘두르는 네이선과 그에게 다가가는 살로메디안을 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단 황제라는 이름의 골칫덩이부터 처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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