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 *
“기분 나쁘더라도 예의상 인사를 하셨어야죠. 저처럼요!”
2층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발끈했다.
살로메디안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예의상으로 하는 인사가 더 기분 나쁜 법이다. 그대가 고까워한다는 걸 네이선도 알았을걸?”
“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나요?”
“황제를 바퀴벌레처럼 쳐다보던데?”
“바퀴벌레까지는 아니에요. 폐하가 귀찮고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요.”
“네이선처럼 떠받들려 자란 인간은 사소한 경멸도 금방 눈치채는 법이지.”
“그럴까요? 황실과 껄끄러워지는 건 피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얼굴 근육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살로메디안이 위로인 듯 위로 아닌 말을 건넸다.
“괜찮아. 나랑 네이선은 항상 껄끄러웠다. 20년 전부터.”
“대단한 자랑이시네요.”
“어쨌든 걱정하지 마라.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무표정해지는 그대가 좋다.”
“왜요?”
“황실 놈들도 그대의 무서움을 알아야지. 분명 오줌 지린 놈도 있었을걸?”
“놀리지 마세요!”
내가 주먹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팍을 쳤다.
살로메디안이 과장되게 아파하며 비틀거렸다.
“내 평생 이렇게 강한 주먹은 처음이다.”
침대 위에 쓰러지는 연기를 펼치며 그가 신음했다. 그다지 성의 있는 연기는 아니었지만.
“아아. 정말 아파서 죽겠다.”
“죽진 않을 거예요. 손속에 사정을 뒀거든요.”
“배려해줘서 고맙다. 그대가 온 힘을 다했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야.”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내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들여다보던 그가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좀 웃는군.”
“웃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한 연기였어요.”
“온종일 피곤했지 않았나. 속상한 일도 많았고.”
“…….”
“남편이 이 정도는 해야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그가 씩 웃었다.
날 위해서 광대 노릇도 망설이지 않는 그 덕분에 차곡차곡 쌓인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눈꺼풀은 여전히 천근만근이었고, 어깨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뭉쳤다.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서 서 있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다.
“하암…….”
긴 하품을 내뱉으며 굳은 승모근을 주물렀다.
“이만 자야 할 것 같아요.”
“피곤해 보인다. 어서 자도록.”
그렇게 말하면서도 살로메디안은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오늘따라 꾸물거리는 그를 보며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롬이 가야 쉬죠. 어서 방으로 돌아가세요.”
살로메디안이 눈부시게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도 여기서 잔다.”
“네엣?”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고양이처럼 요염한 자세로 누워있던 살로메디안은 왜 놀라느냐는 반응이었다.
“준비된 귀빈실은 두 개뿐이다. 그중 하나는 네이선이 쓸 테고.”
“그렇다면 오늘 밤은…….”
차마 뒷말을 잊지 못했다.
대신 말하게 되어서 기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덧붙였다.
“그대와 내가 한 침대를 써야 한다는 소리다.”
온몸 곳곳에 스며들었던 졸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등골이 쭈뼛 서면서 심장 박동이 두 배 이상 빨라졌다.
“살롬이랑 제가요?”
“부부가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이상한가?”
이상하지는 않은데, 처음이잖아요!
살로메디안과 동침이라니.
갑작스럽게 발생한 특급 이벤트에 정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등 뒤에서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 내가 불편한가?”
“그게 아니라…….”
“초야도 치르지 않은 부부는 이상하지 않나.”
“초야라고요?!”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넘어왔다.
한 침대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초야라니?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몸의 준비도 안 됐어요!’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의 준비가 뭔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아이시아?
물론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키스만으로 이성을 잃으니까.
키스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하다가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매일 밤 몰래 그려왔던 광경이 더 높은 온도, 더 선정적인 색채로 머릿속을 점령했다.
온천에서 봤던 살로메디안의 조각 같은 몸이 상상을 부채질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봐 심호흡했다.
이 순간에도 살로메디안은 내 감정을 읽고 있을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마가 뜨끈뜨끈해지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한편으로 안심되기도 했다.
낯 뜨거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내 진심을 알아줄 테니까.
“초야도 동침도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내 예상을 깨고 살로메디안이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언제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 괜한 말을 꺼내서 그대를 불편하게 했군. 난 벽난로 앞에서 잘 테니까 편히 쉬도록.”
벽난로 앞이라면 그가 마력 비를 뿌린 곳이었다.
물에 젖은 기사들이 돌아다닌 탓에 먼지 한 점 없던 대리석 바닥은 시궁창처럼 더러워졌다.
담요를 주섬주섬 주워드는 그의 팔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가신다고요?”
“그대가 불편해하니까 나가야지.”
“불편한 게 아니라…….”
미친 듯 내달리는 심장 때문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말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저도 살롬을 원해요. 한 침대에서 눈을 감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요. 평생 그럴 수만 있다면 영혼도 바칠 수 있다고요!’
살로메디안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내 진심을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면서 날 도발하는 걸까.
“그럼 이만 가겠다.”
그의 팔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준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축이고 물었다.
“살롬은 제 감정을 읽으시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오늘은 왜…….”
모르는 척하세요?
평소엔 숨기고 싶은 감정도 턱턱 읽어 내시면서.
야속함을 삼키고 애꿎은 그의 옷자락만 구깃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눅진한 한숨을 토했다.
“전에도 말했듯 난 독심 술사가 아니다. 그대의 감정을 느끼긴 하지만 낱낱이 읽을 순 없어.”
“…….”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복잡하다고요?”
깜짝 놀란 내가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반복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흘러내린 백금발을 뒤로 넘겼다.
“그게…….”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던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무는 살로메디안의 행동에서 조바심이 읽혔다.
무슨 말을 이렇게 망설이는 걸까?
“사실은 말이다…….”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말씀 안 하시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잖아요.”
내가 그의 옷깃을 흔들며 재촉했다.
“바로 그거다.”
“네?”
“내가 딱 그 심정이라고.”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내 감정과 그대 감정이 뒤엉키면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감정이라는 걸 신경 써본 적이 없어서 머릿속이 터질 것 같기도 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였다.
살로메디안이 쫓기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더해지면 그대의 감정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더 어지러워지고.”
자리를 잡지 못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팔짱을 꼈다 풀길 반복했다.
감정, 모호함, 불확실성.
그 모든 것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때문에 그는 괴로워 보였다.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낫겠지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두루뭉술한 감정 덩어리는 정말이지…….”
내 감정을 읽는 게 그렇게 불편한 걸까.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황제보다 오만한 남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루 이틀 쌓인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내 가슴에도 불안이 움텄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데요?”
“그대가 날 불편해할까 봐. 그대에게 거절당할까 봐.”
그렇게 말해 놓고 살로메디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제가 살롬을 거절한다고요? 살롬이 절 거절하는 게 아니라요?”
내 눈썹이 가파른 각도로 휘어 올라갔다.
살로메디안이 혼란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그대를 거절하겠느냐?”
“저야말로 왜 살롬을 거절하겠어요?”
“그거야…….”
“제가 살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신다는 거예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랑이 일었다.
“시아, 나는…….”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내 마음을 의심하고 있어! 심장 반쪽을 나눠 가졌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혹스러울 정도로 아득한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살로메디안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지옥이나 다름없던 아쿠아로드에서 탈출시켜 주고, 공작부인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처음 사랑하게 된 남자이자, 내 모든 걸 허락한 남자였다.
스무 해를 살아오면서 살로메디안 앞에서만큼 솔직해져 본 적 없었다.
어머니도 모르는 내 모습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
나도 모르던 날 발견해준 사람.
마주 잡은 손의 온기를, 포옹의 안락함을, 숨결에서 전해지는 짜릿함을 처음 나눈 사람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오랫동안 내 본심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눈물이 날 만큼 서러웠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치미는 서운함과 배신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내 표현이 부족했던 걸까? 아냐. 우린 키스까지 했잖아? 불편한 사람이랑 키스를 어떻게 해? 거절할 거였으면 키스부터 거절했겠지!
그는 스킨십을 뭐라 생각하는 걸까?
내가 불편한 남자와 목욕할 만큼 가벼운 여자라고 본 건가?
낯선 불길이 뱃속을 헤집고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제가 거절하면 포기하실 생각이셨나요?”
말하자마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가 포기하겠노라고 대답하면 감당할 수 없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릴 포근하게 감싸던 공기가 한겨울 북풍처럼 매서워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음에도 그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어왔기에, 상대를 해석할 수 없는 이 시간이 유독 견디기 어려웠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 * *
그 시간 네이선은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와인잔을 흔들고 있었다.
와인을 한 병 다 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술기운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은 맑아졌고,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만이 낙인처럼 남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이선이 답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여행용 로브를 걸친 20대 여인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폐하. 침수 드셔야 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과음하셨고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용건만 말하는 여인을 보면서 네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넷사. 여기까지 어떻게 쫓아온 건가?”
“제가 폐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넷사라 불린 여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늦은 시각, 먼 길을 달려왔을 텐데도 하나로 묶은 연두색 머리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늘 완벽하고 똑 부러진 황제의 집사.
윗스 백작가문의 장녀 바넷사는 네이선의 오른팔이었다.
황궁에서는 총리대신 위에 바넷사가 있다는 말이 파다했다.
총리대신보다 유모 같을 때가 많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고 네이선은 생각했다.
“몰래 황궁을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모른 척해준 것이었나?”
“한동안 쉴 틈 없이 바쁘셨잖습니까. 휴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휴가가 아니지만요.”
그늘이 내려앉은 네이선의 눈 밑과 빈 와인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바넷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질타가 섞인 시선에 네이선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자네가 없으니 절제가 잘 안 되더군.”
“살로메디안 님을 만나서가 아니고요?”
“아니다.”
“그럼 공작부인을 만난 탓이겠군요.”
바넷사의 초록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정곡을 찔린 네이선이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었다.
“이 세상에서 자네를 당해낼 인간은 없을 거다.”
“아이시아 님이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살로메디안 님과 적이 되어도 좋을 만큼?”
“자네도 알지 않나. 아이시아 님처럼 완벽한 황후감은 없다는 걸.”
“아이시아 님이 오시고 세드나 공작령이 눈부시게 발전한 건 사실입니다.”
“자네 동생인 바바라의 도움도 컸겠지.”
“바바라가 살로메디안 님을 모신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분명 아이시아 님이 일으킨 겁니다.”
공작저 재정비, 의료 교육원 설립, 에메랄드 린삼 발견, 마물 사체의 식재료화 등등.
버려진 땅 취급받던 세드나 공작령의 변화는 대륙의 귀족들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울 만큼 대단한 성과였다.
단순히 돈만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복지 정책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미모와 지혜, 백성들을 살피는 덕망까지. 아이시아 님은 신비할 정도로 완벽한 분이다. 마물과 싸울 만큼 용기 있고, 강하기까지 하지.”
네이선이 잔에 든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아이시아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내던 살로메디안이 떠올랐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사랑스러운 여인도.
“폐하. 아이시아 님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바넷사의 조언에 네이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눈에 밟힌다. 그분이 숙부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생각하면…….”
“아이시아 님이 살로메디안 님께요?”
“아이시아 님은 포로나 다름없어. 나는 그분을 구해드리고 싶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바넷사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폐하.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처형당해도 마땅한 독설을 뱉고도 바넷사는 덤덤했다.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데… 입이 험하단 말이야.’
지옥에서 올라온 개처럼 짖어대는 바바라에 비하면 바넷사의 독설은 사실 우아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네이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바넷사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총리대신이 극찬할 만큼 뛰어난 업무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이선에게 바넷사는 가장 유능한 심복이자, 황제의 약점까지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도 개소리는 좀 심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남의 아내를 탐하시는 분이 정의로운 척하셔서 배알이 뒤틀렸습니다.”
“바넷사. 제발…….”
네이선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넷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살로메디안 님이 애처가가 되었다는 건 전 제국이 아는 사실입니다. 저도 동생들을 통해 들었고요.”
“터무니없는 낭설일 거다. 아이시아 님은 숙부에게 이용당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소문과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
“글쎄요. 제 눈에는 소문과 현실이 다르길 바라시는 폐하만 보이는군요.”
주군의 뼈를 때려놓고 바넷사가 주섬주섬 빈 와인병을 치웠다.
네이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진실이든 뭐든 그분은 공작부인이십니다. 시골 소귀족의 아내라면 모르겠지만, 세드나 공작부인을 훔칠 순 없습니다.”
“나는 황제다.”
“…….”
“세드나 공작은 내 신하고. 그는 내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네이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바넷사가 순순히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폐하.”
“제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아이시아 님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
“폐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따르겠습니다.”
“자네는 뭐가 불만이지? 세드나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 건가?”
네이선이 격양된 어조로 물었다.
바넷사가 되물었다.
“제 의견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해다오.”
“첫째. 세드나 공작과 사이가 나빠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황실과 제국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둘째.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결과 공작부인은 세드나 공작과의 결혼생활에 매우 만족 중입니다.”
“그건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본 아이시아 님은…….”
“폐하의 시선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아이시아 님께서 직접 행복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시겠지요.”
움찔한 네이선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거야 협박당해서 솔직하실 수 없을 테니까…….”
“셋째. 폐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 현실을 부정하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여자에 미친 황제치고 멀쩡한 황제가 없지요.”
“바넷사!”
“듣기 불편하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더 있는데 계속할까요?”
“됐다. 그만해라.”
어깨를 축 늘어뜨린 네이선이 힘없이 손을 휘저었다.
이성은 바넷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네이선을 지배하는 건 본능과 정열이었다.
한 여자를 향한 열망이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번져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만하라니까.”
“지금은 사랑놀음보다 마신의 계약자를 되찾는 게 시급합니다. 사안이 엄중한 만큼 개인적인 욕망은 자제하시지요.”
“그거 아는가? 자네는 가끔 징글징글해.”
네이선이 치를 떨었고, 바넷사는 시치미를 뗐다.
“유능하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폐하.”
“내일은 숙부를 추궁해볼 거다. 숙부라고 해도 의무를 저버리는 신하를 용서할 수는 없다.”
“그냥 화풀이하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바넷사, 그만!”
네이선이 짜증을 섞어 외쳤다.
“편히 쉬십시오, 폐하.”
바넷사가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황제의 호통에 겁을 먹었다기보다, 잔소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 * *
“시아! 어딜 가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뿌옇게 흐려진 눈가를 문지르며 방문을 열었다.
“쫓아오지 마세요!”
“시아!”
“쫓아오면 진짜 도망갈 거예요!”
도망칠 곳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살로메디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별장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찬바람이 살갗을 찔렀다.
춥고 외로웠다.
당연하게도 외로움이 추위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밀려왔다.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은 얼음 조각보다 차가웠다.
“뭘 흥분하고 그래. 살롬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창백한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살로메디안의 마지막 말이 반복해서 귓전을 울렸다.
「포기할 수밖에. 그대와 나는 계약 부부니까. 계약 부부니까…….」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렇게 콕 집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계약 부부란 것.
언젠가 계약은 끝나고 말리라는 것.
‘내 아내’라는 말에 취해서 잊은 척했을 뿐이다.
‘세드나 공작부인’이란 자리는 너무 따뜻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이불 속 같았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마법처럼 친절했고, 아무도 나와 살로메디안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스킨십을 나누건, 같이 목욕을 하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우리가 계약 부부란 사실을 말이다.
“이럴 거면 잘해주지 말지. 심장을 바쳤다는 말도 하지 말고, 디에고도 데려오지 말고, 온천도 찾아주지 말지.”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살로메디안이 미웠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미웠다.
그리움도 미움이 되고, 연모의 마음도 미움이 됐다.
마신이 아닌 애처가.
타국에서 온 아내에게 푹 빠진 세드나 공작.
타인들조차 그렇게 믿을 만큼 그는 완벽한 남편이었다.
날 향한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환상에 사로잡혔다.
계약 이후의 인생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가슴 속에는 불안의 불씨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 날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우리의 시작이 계약이었기 때문이었다.
피 묻은 지장이 찍힌 계약서와 어길 수 없는 계약 마법.
아이러니했다. 우리를 이어준 계약이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 것이다.
‘이 얼마나 얄팍한 관계인지.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살롬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지, 부부인 척 연기하는 것인지 분간도 못 했을 텐데.
게다가 그는 나조차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 뭉치를 떠맡아야 했다.
그런 주제에 그가 진심만은 알아줄 거라고 멋대로 낙관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아이시아.
잘못은 나한테 있는데 왜 이렇게 살롬이 원망스러운 걸까?
다시 미움이 원망이 되고, 그것이 또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들끓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아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만 없었더라면 살롬은 지체 높은 귀족의 영애와 결혼했을 텐데. 내가 나타나서 살롬의 인생도 꼬여버렸어.”
주먹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시아 님이 안 계셨더라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눈물을 훔치고 안경 낀 여인을 바라봤다.
늘씬하게 큰 키와 다소 차갑지만 단정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새싹처럼 싱그러운 연두색 머리칼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를 모시는 바넷사 윗스입니다.”
“아! 바비의 언니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황제의 집사가 황제를 쫓아온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혼자 산책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바넷사 님.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별장의 보안 시설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공작부인.”
“이 늦은 시간에요?”
“황제 폐하를 보필하는 데 밤낮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위태로운 시기라면 더더욱요.”
바넷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별장 주변을 경계했다.
황실 근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음에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바바라는 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도 일에 푹 빠지는 부류지만, 언니는 정도가 심해요. 자기 직업도 헛갈릴 정도로 일에 미쳤다고요! 국무회의에 참여하질 않나, 폐하의 밤 상대를 챙기질 않나! 폐하가 없으면 언니는 심심해서 죽을걸요?」
바넷사는 살로메디안과 동갑으로 네이선보다는 2살 위라고 했다.
24시간 황제를 보살피느라 결혼은 뒷전이라며 바바라가 짜증을 냈다.
본인도 결혼보다 일을 선택했으면서 말이다.
“바넷사 님의 충성심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뿐입니다.”
“바넷사 님은 바비보다는 빈센트 님과 더 닮으셨네요.”
친근한 이들을 떠올려서일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바넷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날 빤히 바라봤다.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실험체를 관찰하는 학자의 눈 같기도 하다가, 흡사 며느릿감을 살피는 시어머니 같기도 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송구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습니다.”
바넷사는 바바라보다 입에 발린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황실의 안살림을 총괄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인 걸까.
바넷사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폐하와 각하, 두 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실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공작부인.”
그 말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제가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요?”
“몹시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럼 정말 저를 보려고 외진 별장까지 오셨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아이시아 님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아이시아 님께서 초청을 모두 거절해서 크게 상심하셨고요.”
“그건…….”
“폐하의 심기만 생각하면 제 손으로 아이시아 님을 납치해 폐하께 바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바넷사가 피로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 앞에서 쓴웃음을 삼켰다.
‘지나치게 솔직한 건 윗스 가문의 내력이었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바넷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이시아 님. 황후가 되실 생각 없으십니까?”
아침 메뉴로 오믈렛을 먹겠냐는 질문처럼 예사로운 말투였다.
지금 유부녀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한테 그런 걸 왜 물어?
황후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개뼈다귀도 아니고!
내 눈빛에 담긴 황당함을 읽었는지 바넷사가 설명했다.
“각하와의 부부 생활이 제가 들었던 것만큼 순탄하지 않은 듯하여 여쭤봤습니다.”
“제 혼잣말을 들으신 건가요?”
“송구합니다.”
바넷사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울며불며 떠드는 소리를 들키다니…….
반쯤 미친 여자 같았을 텐데.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못 들은 거로 하세요. 저와 각하 사이엔 아무 문제 없으니까요.”
얼음 조각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마력이 흘러나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바넷사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가 없었다.
살로메디안과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을 믿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넷사의 얇은 입술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비웃는 건가?
나도 모르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마력이 흘러나갔다.
황실 기사들이 신음할 만큼 강한 마력 앞에서 바넷사는 여전히 무심했다.
꼿꼿한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몰래 식은땀을 닦지도 않았다.
‘보기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구나. 기사가 되었어도 대성했을 거야.’
바바라가 가진 마력은 귀족 평균에 못 미쳤다.
반면에 빈센트는 최고위 기사가 되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마력의 소유자였다.
아무래도 바넷사는 여동생보다는 남동생과 비슷한 점이 많은 듯했다.
잠자코 내가 내뿜는 마력을 견디던 바넷사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저는 아이시아 님이 황후가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솔직하시네요.”
“황후 감으로 손색없는 분이시라는 걸 압니다만 제국엔 황후보다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 평화를 위협하는 게 우리 폐하지만요.”
“폐하께서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든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세드나 공작부인일 겁니다.”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뒷말을 밀어 넣은 채 바넷사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후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으신 까닭은 뭡니까? 평화를 바라시는 분이.”
“폐하께서 아이시아 님을 쉬이 포기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
“폐하에 대해서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아이시아 님은 폐하의 이상형, 그 이상이십니다.”
바넷사는 황후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인 이유를 설명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폐하와 비슷한 마력을 가진 여성이 없다는 겁니다.”
“역대 황제 중에서도 드물게 강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결혼 적령기 귀공녀들 중에 불의 마력을 가진 분은 유독 적습니다. 전 대륙을 뒤져봤지만요.”
“그렇군요.”
“황권을 다지려면 후계자가 필수입니다. 황녀나 황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네이선은 강한 황권을 다진 황제라 칭송받았다.
그러나 제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나도록 후계는커녕 황후조차 맞이하지 못했다.
친황제파도, 반황제파도 아우성칠 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유부녀를 노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것도 숙부의 아내를?
“폐하는 즉위 직후부터 황후 문제로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셨습니다. 그 앞에 미모, 마력, 지혜 모든 걸 가진 아이시아 님이 나타나셨고요.”
“제 잘못은 아닙니다.”
“아이시아 님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려울 뿐이지요.”
“폐하께서 저와 살롬을 갈라놓으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만… 폐하는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참으로 답답한 분이시로군요.”
“폐하께서 아이시아 님을 빼앗기로 결정하신다면 제국은 둘로 쪼개질 겁니다.”
바넷사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차가워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숙부의 아내를 탐하는 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폐하를 이해하겠습니까?”
“…….”
“바바라가 그러더군요. 각하께서 아이시아 님께 미쳐 계시다고요. 매일매일 각하의 애정행각을 보느라 힘들다고 하던데요?”
나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바넷사가 진심을 믿어달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저는 제국의 평화를 바랍니다. 동시에 각하와 아이시아 님의 행복을 빌고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바넷사 님. 하지만 결정권은 폐하께서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이선이 대놓고 날 탐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만약 나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민들이 고통받는다면?
나는 계속 공작령에 머물 수 있을까.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살로메디안이 곁에 있다면 분명 힘이 됐겠지만, 나는 혼자였고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아이시아 님. 제게 아이디어가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문득 바넷사가 물었다.
“평화와 행복을 위한 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바바라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바넷사의 녹색 눈이 번뜩였다.
「바넷사 언니는 타의 추종 불허하는 모략가예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죠. 황실 암투에 딱 맞는 인재랄까요?」
바바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드리우고 바넷사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먼저 아이시아 님께서 폐하에게…….”
바넷사가 은밀히 작전을 전달했다.
붉은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작전이었다.
“바넷사 님. 진심이십니까?!”
“아이디어일 뿐입니다. 결정은 아이시아 님께서 하십시오.”
바넷사가 공을 내게 돌렸다. 그리고 은근히 도발했다.
“폐하의 손에 이리저리 흔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이시아 님 스스로 운명을 쟁취하시겠습니까?”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살로메디안이 어둠 속에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시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시아가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로메디안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이시아의 상처 입은 얼굴과 마지막 말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쫓아오면 진짜 도망갈 거예요!」
그 말이 현실이 될까 봐 쫓아가지 못했다.
아니, 듣는 순간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이시아가 사라진다면…….
가정만으로도 생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찢긴 상처에 유리가루를 뿌리고, 구둣발로 짓이긴다 해도 이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시아를 위해 살아가기로 했다.
그녀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삶이 어찌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아이시아가 제 품을 박차고 영영 사라져버린다면 남는 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뚱이뿐일 거였다.
키산드라처럼 170년,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을 아이시아 없이 살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살인 속에서.
둔탁한 충격을 견디며 살로메디안이 두 손을 머리카락 속에 찔러 넣었다.
「이럴 거면 잘해주지 말지. 심장을 바쳤다는 말도 하지 말고, 디에고도 데려오지 말고, 온천도 찾아주지 말지.」
아이시아의 혼잣말이 살로메디안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오로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나만 없었더라면 살롬은 지체 높은 귀족의 영애와 결혼했을 텐데. 내가 나타나서 살롬의 인생도 꼬여버렸어.」
아이시아의 자책은 달군 쇠처럼 살로메디안의 고막을 지져댔다.
늘 두려워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가 결혼을 후회하고 있었다.
“놓아줄 수 없다. 시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포기할 수 있는 건 스킨십뿐이었다.
아이시아를 품에 안고 싶어서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지만 참을 수 있었다.
밤을 하얗게 새우고도 사라지지 않는 욕망을 지울 수 있었다.
살점을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시아가 제 곁에 남아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의 현재와 미래는 오직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만 의미를 지녔다.
처음 맛본 행복을, 그 안에 촘촘히 박힌 환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여인.
그래서 계약 마법을 걸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이시아를 지킬 수 있도록.
“하지만 그대가 진심으로 떠나길 바란다면… 나는 그대를 잡을 수 있을까.”
고작 말 한마디에 발이 땅에 붙고 마는데.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피 한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릿한 혈향이 입 안에 번졌다.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팔다리를 잘라내도 모자랄 판에 사소한 흠집이나 내고 있다니.
살로메디안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7살 적 황궁을 떠날 때부터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검이었다.
검 자루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박혀있었고, 그 주위를 사파이어가 둘러싸고 있었다.
금으로 세공된 회오리 장식이 더해져 관상용 장식 검으로 보였다.
하지만 검날은 악마의 가죽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했다.
사망하기 직전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었다.
‘이 정도면 동맥쯤은 끊을 수 있겠지.’
달빛에 비춰보던 칼날을 제 손목 위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죽지도 못할 것, 과격한 행동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살로메디안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뿐이었다.
유치하고 저열한 노림수도 있었다.
다치면 아이시아가 절 돌아봐 줄지도 몰랐다.
아이시아는 괴물 같은 치유력과 불로불사의 몸을 가진 그를 걱정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애정이 아니라, 동정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살로메디안은 간절했다.
자해라는 형편없는 방법을 서슴없이 택할 만큼 절박하기도 했다.
망설인 까닭은 이 행위가 아이시아를 아프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제 관심을 끌기 위해 자해를 시도했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시아는 상처받을 거였다.
들키기 전에 포기하자.
그가 검을 내려놓을 때 꿈결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롬. 어디 다쳤어요?”
* * *
살로메디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번진 핏방울이 5월의 장미처럼 붉었다.
그가 들고 있는 단검을 보고 내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뭐 하는 거예요?”
공포에 질린 입술이 떨렸다.
설마 자해를 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얗게 드러난 살로메디안의 손목과 선명한 힘줄이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건…….”
살로메디안이 단검을 등 뒤로 숨기며 말끝을 흐렸다.
죄책감으로 얼룩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해요! 지금 뭐 하려고 했어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티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그대가 시장할 것 같아서. 과일을 잘라주려고 했다.”
살로메디안이 내 쪽으로 빨갛게 익은 사과를 내밀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손목 위에 올려놓는 걸 봤단 말이에요!”
“진정해, 시아.”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볼도 귀도 얼어붙었어. 어서 몸을 녹이지 않으면 감기 걸린다.”
“말 돌리지 마세요!”
살로메디안이 허둥지둥 호랑이 모피를 꺼내 내 어깨에 감았다.
그리곤 엄청난 속도로 사과를 다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앙증맞은 토끼 사과가 접시에 놓여졌다.
살로메디안과 토끼 사과라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던 그가 물었다.
“토끼가 싫으면 하트나 백조 모양으로 잘라줄까……?”
명령만 내리란 식으로 그가 날 올려다봤다.
축 늘어진 눈썹이, 울멍울멍 순수한 푸른 눈이,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귀여움과 미모를 앞세워서 화를 풀게 할 셈인가?
그의 속셈을 알면서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정말 살롬은 약았어요.”
토끼 한 마리를 와삭, 베어 물며 살로메디안을 노려봤다.
내가 사과 한 알 분량의 토끼들을 해치울 동안 그는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벌 받는 소년 같아서 한숨만 피어나왔다.
“자해하려던 건 아니었죠?”
“물론이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이제 살롬이 무슨 말을 해도 충격받지 않을 테니까요.”
살로메디안이 멈칫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부서질 듯 위태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사랑한다, 시아. 내 목숨보다도.”
살로메디안이 불쑥 고백했다.
그 말은 귀보다 심장에 먼저 닿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가슴을 박차고 뛰어나갈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뻐근하게 아파 오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심호흡을 해봤지만 별 소용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기로 했는데, 결심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하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은 하얗게 지워지고 살로메디안 한 사람만 남았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오직 그뿐이었다.
“그대가 믿지 않아도 좋다. 날 의심하고 원망하고 계속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진심이다.”
듣기 좋은 중저음은 감기에 걸린 것처럼 갈라졌다.
살로메디안이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단어를 골랐다.
날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가에 반짝이는 것이 눈물일까.
아니면 푸른 호수에 비친 달빛일까.
“그대를 괴롭히는 쓸모없는 사내일 뿐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걸 바쳐도 좋을 만큼 그대를 사랑한다.”
내 뺨을 뜨겁게 적시는 건 분명 눈물이었다.
그걸 의식하는 순간 흑, 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웃어야 할 순간에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흑흑.”
“시아……!”
살로메디안이 다급히 날 끌어안았다.
함부로 안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손을 뗐다가, 날 내버려둘 수 없다는 듯 힘주어 끌어안았다.
살로메디안은 한쪽 팔로 내 어깨를 완전히 휘감고, 다른 팔로 허리를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추위와 외로움으로 얼어붙었던 날 녹이기 충분한 다디단 향이었다.
광야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방랑자처럼 나는 안락하고 넓은 살로메디안의 품속에서 무너졌다.
“흑흑…….”
왜 자꾸 눈물이 흐르는 걸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테레사에게 학대당할 때도 절대 울지 않았는데.
특기인 무표정도 살로메디안 앞에서는 발휘되지 않았다.
마음도 마음먹은 대로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도, 기쁨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날마다 깊어지고 짙어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살로메디안이 있었다.
“시아.”
내 눈물을 보는 것이 괴롭다는 듯 그가 짓눌린 목소리를 토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날 아끼고 사랑해주는 남자.
나는 그의 고백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사랑을 의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을 꽉 채웠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진심이 혀 밑까지 차올랐다.
입 밖으로 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
“저도 살롬을 누구보다 사랑해요.”
“!”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찢어질 듯 휘둥그레졌다.
저렇게 놀랄 일인가 싶다가도, 그동안 솔직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봤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오해가 싹트고 불안에 점령당하면서.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어금니 사이에 물고 있었을까.
나는 눈물을 닦고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힘겹더라도 그의 불안과 마주하고 싶었다.
살로메디안이 날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그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내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길 마음은 없었다.
그것이 황제나 세 번째 남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 * *
“진심인가?”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으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거짓말할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날 사랑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랑 키스하지 않아요. 목욕도 마찬가지고요.”
살로메디안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내 말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걸까.
“제가 살롬을 사랑하는 게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요?”
“그대가 이런 고백을 하는 꿈을 자주 꿨다.”
“꿈이라고요?”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
살로메디안의 귓바퀴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다.
목은 물론 뒷덜미까지 홧홧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꿈이라면서 뭘 부끄러워하는 건지.
용기 내어 그의 뺨을 꼬집었다.
“아직도 꿈같아요?”
꽤 힘을 줬는데도 살로메디안은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았다.
“그대가 볼을 꼬집는 꿈도 꿨다. 잠에서 깨면 그대는 사라져있었고.”
그가 고집스레 답했다.
고백하는 것까지 생각했지, 고백을 해도 안 믿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거다. 난 그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니까.”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심통이 불끈 치솟았다.
겁에 질린 채 자학하는 남자는 내가 사랑하는 살로메디안이 아니었다.
양손으로 그의 뺨을 쥐었다.
“이래도요?”
그리고 고무줄처럼 여린 피부를 옆으로 쭉 늘였다.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그제야 꿈틀거렸다.
“얼른 인정하세요. 살롬이 믿을 때까지 잡아당길 거예요.”
“스아?”
볼을 잡힌 탓에 그의 발음이 잇새로 흩어졌다.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쁘지만, 또 실망하게 될까 봐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솔직해지자면 조금 기쁘기도 했다.
두려울 정도로 날 사랑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기껏 고백했는데 안 믿어주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결례 아닌가요?”
사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샐쭉하게 물었다.
살로메디안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고백한 사람 무안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살로메디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그의 뺨을 잡은 내 손도 같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좋아요.”
그의 뺨을 놓아줬다.
은은하게 달아오른 양쪽 뺨 때문에 살로메디안은 수줍어하는 십 대 소녀 같았다.
“그대도 나를 사랑한다…….”
살로메디안이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렇게 해야 안심된다는 듯이.
그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내가 말했다.
“살롬도 절 사랑하고요.”
“그렇다.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살로메디안의 대답은 사뭇 비장했다.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다.”
“정말이죠?”
“그대가 대륙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고 싶다면 대륙을 정벌할 것이다. 그대가 세상의 모든 황금을 가지고 싶다면 모조리 훔쳐다 줄 거고.”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은 어디서 왜 나오는 거예요?”
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아. 부디 내가 뭘 해야 할지 알려다오.”
“뭐든지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다. 나는 믿지 않지만 혹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들 앞에서 맹세하겠다.”
“그럼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