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50)

24

* * *

“따뜻한 차를 마시면 도움이 될 거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에게 찻잔을 건넸다.

콧물을 훌쩍이던 아이시아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살롬.”

두꺼운 양털 담요와 호랑이 모피를 온몸에 둘러놨지만 아이시아의 입술은 아직도 파랗게 질려있었다.

“…미안하다.”

살로메디안은 물 화살을 쏜 것을 후회했다.

아니, 마신의 이빨에 아이시아를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온천을 찾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쯤 아무렇지 않았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아이시아를 실망시켰다.

그것만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살롬. 전 괜찮아요.”

“요양을 시켜주려고 데려왔는데, 그대를 괴롭힌 꼴이 됐다.”

파묻힌 온천을 떠올렸는지 아이시아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긍정적인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바위를 파내면 괜찮을 거예요. 아쉽기는 하지만 살롬 덕분에 잠시나마 온천욕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이시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덕분에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로메디안을 구원하는 건 아이시아 쪽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진짜예요.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이었어요.”

찻잔을 쥐고 아이시아가 손을 꼬물거렸다.

담요에 둘둘 감겨 얼굴만 빼꼼 내민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깜빡일 때마다 사락사락 예쁜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눈썹도 귀여웠다.

그녀는 속마음을 감추고 수줍어하다가도 불쑥 진심을 내밀어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뒤흔들어놓곤 했다.

“그대가 언제나 진심이라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살로메디안은 그녀의 혈색이 돌아오길 바라며 엄지로 아이시아의 입술을 훑었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해서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녀의 여린 살결을 더듬고 싶었다.

손이 아니라 혀와 입술로.

-우엑! 너희는 맨날 그러고 노냐? 비위 안 상해?

잠시의 평화는 키산드라가 또 산산조각냈다.

아이시아와 단둘이 고립될 작정으로 사용인들까지 모두 내보냈는데!

시체인지 유령인지 모를 여자가 나타나 살로메디안의 속을 긁어댔다.

“입 다물어. 키산드라.”

살로메디안이 영원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여자를 노려봤다.

보통 사람이라면 혼절했겠지만, 상대는 전대 세드나 공작이자 유령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저주받은 영혼이 살로메디안을 향해 분홍색 혀를 빠끔히 내밀었다.

-메롱이다, 꼬맹아. 내 입인데 내 맘대로 떠들지도 못하냐?

“남의 부부 사이에 낄 정도로 할 일이 없나?”

-너도 죽어 보면 알 거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는 걸.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줄 테니까 꺼져.”

맹세컨대 진심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세드나 공작의 의무를 몽땅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키산드라를 죽이는 데 전력을 다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키산드라는 여전히 의심이 많았다.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살인이라고 말했던 게 당신 아닌가.”

-그랬는데… 사상 최초로 심장을 빼앗긴 세드나 공작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후계자를 다시 놀릴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는 듯 키산드라가 깐족거렸다.

-또 물 화살 쏴 봐~ 별장이 무너지는 꼴도 좀 보자!

“닥쳐. 키산드라!”

-어르신을 공경해야지!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어른다운 짓부터 먼저 하시지?”

그렇게 말하다 말고 살로메디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망각 저편으로 사라졌다고 믿었던 장면이 조금도 빛바래지 않은 채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 * *

“꼬맹아. 훈련이다!”

키산드라가 살로메디안의 방문을 활짝 열며 외쳤다.

11살 살로메디안이 덜 깬 눈을 문지르며 달그림자를 확인했다.

“늦은 밤에 무슨 훈련이야?”

“시간이 무슨 상관이냐?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부터가 시작이지!”

“정해진 훈련 시간이 아니면 응하지 않겠어.”

“무슨 어린 애가 이렇게 딱딱해? 하여간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키산드라가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로메디안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고분고분한 어린애를 원하면 새로운 쌍 속성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아.”

“얼른 커서 대를 이을 생각을 해야지! 도대체 나보고 몇 살까지 살라는 거야?!”

“당신 나이 따위는 관심 없어.”

“내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거라고!”

“시끄러워. 어린애는 자야 할 시간이라는 거 몰라?”

살로메디안이 150살 연상이자 자신의 훈육자인 키산드라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했던 건 아니었다.

「잘생긴 오빠. 나랑 하룻밤 놀래? 하룻밤에 10년 치 급료를 줄 수도 있는데.」

키산드라가 어린 살로메디안의 호위기사를 돈으로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줬을 터였다.

기사의 바지춤에 금화를 찔러주지 않았더라면.

도망치는 그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주무르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더 고민했을 것이다.

「이 나이치고는 꽤 미인 아니니? 날 거절하면 살아서 황도로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아!」

결국 키산드라는 호위기사를 끌고 침대로 갔다.

살로메디안은 그때 키산드라에 대한 정의를 마쳤다.

‘입버릇이 고약하고, 모든 걸 힘과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박한 여자.’

기이할 정도로 어려 보이는 외모보다 훨씬 더 정신 연령이 낮은 여자에게 존댓말을 쓸 이유가 없었다.

“꼬맹아, 얼른 일어나! 이러다 훈련 시간 놓치겠다!”

“시작도 안 한 훈련을 놓치다니?”

“그런 게 있어! 얼른 일어나라고!”

키산드라가 누워 있는 살로메디안을 억지로 끌어냈다.

어린 살로메디안은 잠옷 바람으로 키산드라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울며 애원해도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절 낳아준 부모조차 그가 사라지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키산드라는 살로메디안을 필요로 해줬다.

물론 그녀는 저주받은 운명을 떠넘길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장을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여기가 오늘의 훈련지다!”

키산드라가 살로메디안을 데려간 곳은 이상야릇한 천 쪼가리가 가득한 옷 방이었다.

“낚시 그물로 만든 옷인가?”

반짝거리는 망사 드레스를 보며 어린 살로메디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바닥만 한 새빨간 미니 드레스가 그의 발치로 떨어졌다.

천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작 깃이나 조개껍데기를 덧댄 망측한 옷들이 살로메디안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이게 다 뭐지?”

“작업복이지!”

“무슨 작업을 하는데?”

“남자 후리는 작업!”

키산드라가 길거리 매춘부도 걸치지 못할 드레스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녀는 하나로 땋은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상태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생활에 절 끌어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키산드라는 확실히 멀쩡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일만 피해서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검으로 옷을 베면 되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귀찮다는 듯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화들짝 놀란 키산드라가 드레스들을 껴안았다.

“내 소중한 아이들 실오라기 하나 건들면 죽여버릴 거야!”

“죽여도 안 죽어.”

“그래도 죽일 거다!”

“옷을 베는 게 아니라면 여기에서 무슨 훈련을 하자는 거야?”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물었다.

키산드라는 제 허리 높이에 있는 살로메디안의 백금발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안목을 키우는 훈련을 할 거다.”

“?”

“쥐방울만 한 꼬맹이라지만 너도 남자잖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오늘 밤 공략 상대가 귀족집 도련님이거든. 어떤 드레스가 제일 먹힐 것 같냐?”

“…….”

“꼭 자빠뜨려야 하는 상대니까 잘 골라줘야 해. 이것도 중요한 훈련이야.”

사뭇 비장한 어조로 키산드라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잠자리 날개보다 투명한 실크 드레스가 들려있었다.

“그딴 걸 걸치고 남자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야?”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를 비웃을 기운도 없었다.

키산드라는 생명이 오가는 위험한 훈련을 할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물론이지. 섹시한 스타일보다 순진하고 청순한 스타일이 좋을까?”

이번에 꺼낸 것은 하얀색 타조 털로 장식된 여성 속옷이었다.

양말 한 짝보다 적은 천으로 만들어진 여성 속옷에는 모자만 한 레이스 리본이 달려있었다.

이 작은 거로 뭘 가린다는 거지? 정말 가릴 마음은 있는 건가?

어린 살로메디안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이 이상한 방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으면 이딴 옷은 버리는 게 좋아.”

살로메디안이 씹어뱉듯 말했다. 순간 키산드라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너도 농담할 줄 아는구나. 꼬맹아!”

“…….”

“설마 너, 사랑받고 싶은 거냐?”

키산드라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살로메디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을까 봐.

“착각하지 마, 살로메디안.”

“뭘?”

“세드나 공작은 인간이 아니다. 널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 넌 평생 혼자일 거고, 외로움 속에서 몸서리칠 것이다.”

고작 11살짜리한테 키산드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살로메디안을 놀릴 마음도 없었다.

키산드라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사랑 따위는 돈으로 사라고!”

그것이 160년을 살아온 세드나 공작의 결론이었다.

가족들에게 버림당하고, 친구와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 홀로 외로움을 견뎌온 키산드라.

그녀에겐 돈이 곧 사랑이고, 진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미모로 꼬시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단다.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인간은 없어. 돈 많은 미녀를 싫어하는 놈은 더더욱!”

키산드라가 금화가 가득 든 상자를 챙기며 말했다.

주머니에 흰 속옷을 찔러 넣은 채였다.

살로메디안은 겁이 났다.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봐.

지난 11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말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 봐 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닥쳐, 키산드라!”

“어르신을 공경해야지!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어른다운 짓부터 먼저 하시지!”

그 말을 끝으로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의 옷 방에서 뛰쳐나왔다.

키산드라가 죽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도 그 해괴한 드레스들을 태우는 거였다.

옷 태우는 연기와 함께 키산드라도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키산드라가 돌아왔다. 사랑하는 제 아내를 인질로 잡고.

-아이시아. 이 빌어먹을 놈하고 이혼해! 더 좋은 남편감을 찾아주마!

“귀신 주제에 단단히 돌았군.”

-귀신 손에 모가지 한번 부러져 볼래?

키산드라와 살로메디안의 대화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나는 핏줄이 두드러진 살로메디안의 주먹을 토닥거렸다.

키산드라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보다 그의 이성에 호소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살롬이 참아요. 키산드라 님은 보통 귀신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악귀니까.”

살로메디안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키산드라 눈치를 보며 내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분이세요. 공작령에 저주를 내릴 수도 있대요.”

-가뭄이나 홍수 따위는 일도 아니지! 마물들을 개미 떼처럼 만들어낼 수도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키산드라가 으스댔다.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지껄이는군.”

아주 잠깐이었지만 뻔뻔하리만치 자신만만하던 키산드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비밀을 감춘 사람 특유의 어색함을 지우며 키산드라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이래 봬도 150년 동안 세드나 공작이었던 여자야! 내가 보통 귀신일 리 없잖아?

평소와 다름없는 허풍이었으나 낌새가 이상했다.

호랑이 모피를 걷어내며 키산드라에게 물었다.

“키산드라 님, 정말 귀신 맞아요?”

키산드라가 움찔 어깨를 튕겼다.

“왜 대답을 못 하세요?”

-너, 너무 황당해서 그러지! 7년 전 죽은 내가 귀신이 아니면 뭐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귀신이 어떻게 육체를 가질 수가 있어요?”

-육체는 무슨!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해도 진짜 육체는 아니라고.

키산드라가 항변했다.

살로메디안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도 키산드라의 어색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가짜 육체를 만들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당신은 죽었고 심장도 없는데.”

-심장은 없어도 체면은 있지.

“마물 떼를 부릴 수 있다고도 했잖아?”

-…….

“그건 흡사 마신 같지 않은가?”

마신이라는 단어가 섬뜩하게 들렸다.

눅진한 침묵이 우리 세 사람을 둘러쌌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도 이유 모를 한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살아서도 인간이 아니더니. 죽어서도 귀신이 아니게 됐나. 키산드라?”

인간도 신도 아닌 몸으로 무려 170년을 살았던 키산드라.

죽어서도 영면에 들지 못했던 그녀가 뭔가 다른 존재가 된 걸까?

처음엔 날 회귀시켜준 신비한 목소리가 신이라고 믿었어. 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반투명한 영혼 상태일 때는 그나마 귀신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키산드라는 보통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유독 짙다는 것만 빼면.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것도 마신의 계약자가 사라진 여파일까?

아니면 키산드라의 말대로 마신의 농간일까.

“키산드라 님.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래야 도와드릴 수 있잖아요.”

내가 키산드라의 손을 잡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에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키산드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죽고 싶을 뿐이다.

“키산드라 님?”

-생각하지 않고, 감각하지 않고, 과거의 업보도 모두 잊은 채 소멸하고 싶다.

웃음기를 지운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허허롭게 번졌다.

그녀의 간절함이 심장에 닿을 듯 가까이 전해졌다.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는 마음이 어떨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평생 마신의 계약자로 살아온 키산드라가 마지막 소원조차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당신 소원은 옛날부터 잘 알고 있으니까, 정체가 뭔지나 밝혀.”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냉정했다.

키산드라가 코웃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발정 난 스토커 놈이나 처리해라, 꼬맹아.”

“말 돌리지 마. 키산드라.”

-내 소원은 아이시아가 해결해줄 테니까.

키산드라의 청록색 눈동자가 날 향했다.

뭐라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키산드라가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말 그대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스토커라니. 누굴 말하는 거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놈이 하나 있다.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 * *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시아 님!”

백금색 여우털 코트를 입은 네이선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도착했다.

그 뒤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과 황실 제복을 입은 시종 수십 명이 따랐다.

“폐하?”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나는 인사를 올리는 방법마저 잊어버렸다.

키산드라에 이어 황제까지 찾아오다니.

단둘이 고립되고 싶었던 별장이 파티 중인 황도 연회장만큼 북적거렸다.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덕분에 내 얼굴도 목각인형처럼 딱딱해졌다.

“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뒤늦게 담요를 벗고 예를 표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살로메디안 손에 저지당했다.

“침입자한테 무슨 인사인가?”

“우리 사이에 겉치레는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이시아 님.”

네이선도 날 만류했다.

한 번 스치듯 만난 것뿐인데 그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그것이 날 껄끄럽게 했음은 물론이었다.

“순순히 별장을 내놓는 게 이상하다 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살로메디안이 살벌한 눈으로 네이선을 노려봤다.

네이선이 수줍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시아 님께서 제 초청을 거듭 거절하시니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남의 아내를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냐?”

“남이라니요? 숙부님이야말로 언제까지 아이시아 님을 숨겨놓으시려는 겁니까?”

네이선이 해맑게 웃으며 되물었다.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숨기다니?”

“아이시아 님도 어엿한 크로티무스 황실의 일원이십니다. 사교계에 데뷔도 하시고, 귀족들의 인사도 받으셔야죠.”

사교계라고? 귀족들이랑 인사도 해야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지만, 잠시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웠다.

타인과 접촉할 수 없는 특이 체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회장을 빽빽이 채운 사람들 틈에서 공작부인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가짜 웃음을 짓는 건 내게 고문이었다.

사교 파티에 가느니, 마물과 싸우는 것이 백번 나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로메디안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라.”

“방금 도착한 사람을 추방하시겠다고요?”

네이선이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응수했다.

“이 별장이 내 것이라는 걸 증명한 건 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곳의 소유권을 주장할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그럼 나와 내 아내 앞에서 사라져.”

네이선 앞에서 살로메디안이 내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장난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어린아이처럼 날 놓지 않았다.

“살롬!”

원망을 담아 불러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 놓아주시지요. 아이시아 님께서 당황하시지 않습니까?”

“숙모님이라 불러라.”

“혈연관계도 아닌데 그런 호칭은 서로 불편할 뿐이죠. 나이도 제 쪽이 연상이고요.”

네이선이 붙임성 좋은 얼굴로 내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어색해질 게 뻔한 미소를 포기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도 숙모님이 편할 것 같습니다, 폐하.”

“아, 그러시군요…….”

네이선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처졌다.

반면에 살로메디안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네이선은 쉬 물러서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도 아이시아 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제게는 상대의 호칭을 결정할 권한이 있거든요.”

“꼴에 황제라 이건가?”

살로메디안이 말꼬리를 잡았다.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네이선이 방끗 웃었다.

“황제가 가끔 좋은 것도 있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 수 있는 권한도 포함해서요.”

그러니까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네?

키산드라가 떠나자마자 황제가 찾아오다니…….

피로와 두통이 동시에 몰려왔다.

오늘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중엔 살로메디안이 만들어 줄 예정이었던 특별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아이시아 님께 황실 특선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서 요리장을 데려왔습니다.”

네이선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기뻐해 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 나쁘게 구는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

하루 종일 내가 먹은 것은 비스킷뿐이었다.

몹시 시장했지만 네이선과 황실 요리장이 만든 만찬을 즐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만 저녁 생각이 없습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어조로 답했다.

네이선의 얼굴이 덜컥 어두워졌다.

“식사를 하지 않으시다니요?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냥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뱃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꾸르르르륵.

네이선과 살로메디안은 물론, 대열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기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네이선이 큰 소리로 웃었다.

“보기보다 솔직한 분이시군요. 하하하.”

죽고 싶었다. 아니 죽이고 싶었다.

살로메디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이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경고는 여기까지다.”

네이선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살로메디안이 선언했다.

그의 몸에서 폐부를 후벼 팔 살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키산드라에게 시달렸는데 네이선까지 찾아왔으니 그의 인내심도 폭발 직전일 거였다.

“큽…….”

“으읏…….”

시종들이 짓눌린 신음이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몇몇 기사들도 살로메디안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네이선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투였다.

“반역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네놈이 자초한다면.”

“그러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숙부님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이선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강심장인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계약 마법으로 보호받는다고 해도 살롬과 사이가 틀어지면 불리할 텐데. 왜 살롬을 도발하는 거지?

황제에게 세드나 공작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세드나 공작이 마신의 숲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제국 전역에서 마물들이 날뛸 게 뻔했다.

정치적으로도 세드나 공작가의 위상은 중요했다.

세드나 공작가가 중심을 잡아주고 있기에 친황제파의 이탈을 막을 수 있었다.

반대파 귀족들도 세드나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황실에 반발하지 못했다.

네이선이 황권을 강화하면서 세드나 공작가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민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세드나 공작은 황족 이상의 존재였다.

살아있는 마신이라 불리는 까닭도 두려움 속에 경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살로메디안이 황제를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것도, 그걸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 아슬아슬한 공생 관계를 네이선이 건드리고 있었다.

“제가 아이시아 님을 황후로 모셔갈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뿌리째 잡아 흔들고 있었다.

네이선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장 천장에서 소낙비가 내렸다.

쏴아아아!

나는 때맞춰 호랑이 모피를 뒤집어썼다. 덕분에 살로메디안이 뿌리는 마력의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이선과 그 일행은 시궁쥐처럼 쫄딱 젖고 말았다.

“감히 뭐라 지껄인 것이냐?”

살로메디안의 입술 사이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쩌렁쩌렁한 노성이 아니라 착 가라앉은 것이어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숙부님께서 반역을 저지르시면 아이시아 님께서 혼자 남게 되니까요.”

네이선이 이마로 흘러내린 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래서 내 아내를 훔치겠다고?”

“설마요. 어떤 인간이 세드나 공작의 소유물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

“황제라도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만요.”

네이선의 입꼬리가 묘하게 틀어졌다.

언뜻 듣기엔 세드나 공작의 눈치를 봐야 하는 황제의 자조 섞인 말 같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참지만은 않겠다는 진심이 깔려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인내를 시험하지 마라, 네이선.”

“숙부님이야말로 황제의 권위를 짓밟지 마십시오.”

“내 땅에서 내 아내를 넘보는 널 존중하라는 뜻이냐?”

재미없는 농담은 관두라는 듯 살로메디안이 네이선을 비웃었다.

“세드나 공작령도 크로티무스 제국에 속합니다. 아이시아 님또한 제 백성이고요.”

“그만 솔직해져라, 네이선. 자애로운 황제인 척하는 꼴은 역겨우니까.”

“숙부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네이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남의 표정 따위를 신경 쓸 살로메디안이 아니었다.

“거슬리면 결투를 청해. 아니면 반역죄로 몰아보든가.”

기다렸다는 듯이 살로메디안이 응수했다. 그의 손에서 물로 만들어진 단검이 솟아올랐다.

네이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검을 빼 들었다.

“폐하! 물러서십시오!”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검 날에 튕기며 무수한 빛 조각을 만들었다.

기사들의 검도, 살로메디안의 물 단검도 날카롭긴 마찬가지였다.

“나서지 마라.”

네이선이 싸늘한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사들의 분노는 쉬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드나 공작이라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망언입니다! 황제 폐하를 모욕한 죄를 엄히 물으셔야 합니다!”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

“하오나 폐하!”

기사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살로메디안은 언제든 준비되면 덤비란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희들이 덤벼 봤자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런 건방진!”

“황실 근위대를 농락하다니!”

기사들이 핏발 선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죽일 듯 쳐다봤다.

감히 검으로 겨룰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건 실력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폐하. 명을 내려 주십시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자를 처단하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자존심이나 충성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엔 고막이 너무 따가웠다. 배도 고팠다.

쉬러 온 건데! 왜 자꾸 방해하는 거야?!

배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럴수록 내 얼굴에는 천년 빙설도 울고 갈 냉기가 서렸다.

살기인지, 한기인지 모를 서늘함을 칭칭 감고 읊조렸다.

“그만. 모두 입 닥치십시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 * *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날 돌아봤다.

“공작부인?”

“모두 검을 내리세요. 폐하의 안전에서 이 무슨 경거망동입니까?”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기사단장이 충고랍시고 끼어들었다.

“공작부인. 여인의 몸으로 끼어들 사안이 아닙니다.”

여인의 몸이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인간이 지껄였다.

“여인이기 전에 나는 세드나 공작부인이며 폐하의 숙모입니다.”

“하, 하오나…….”

“제 말이 말처럼 안 들립니까? 당장 검을 내리라니까!”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아이들처럼 기사들이 찔끔 놀라 검을 거두었다.

공작령의 안주인답게 말하고 싶었는데 우아하기보다는 공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네이선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아이시아 님……?”

살로메디안은 재미있어지려는데 왜 훼방이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좌중을 둘러봤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떠나시거나, 여독을 푸시지요. 남는 방은 많으니까요.”

“…….”

“다른 방법도 있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피하고 싶군요.”

여기서 ‘다른 방법’이란 나랑 살로메디안이 떠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악귀와 마주한 사람들처럼 단체로 얼어붙지는 않았을 테니까.

“시아. 마력이 마구 흘러나오고 있다.”

살로메디안이 내 귓가에 기사들이 해쓱해진 이유를 속삭였다.

마력이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고?

마지막 한 톨까지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찼나 보네.

체력보다 빨리 돌아온 마력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온몸에 가득 찬 마력이 열기를 내뿜으며 붉게 요동치고 있었다.

네이선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시아 님, 마력을 거두시지요. 기사들은 몰라도 시종들이 버티질 못할 겁니다.”

얼핏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주는 것 같았지만, 네이선만 아니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나도 살롬이 만들어준 닭튀김을 먹었을 테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 대외용 가짜 미소에 익숙한 살로메디안도 움찔할 만큼 귀기 어린 표정이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불가능합니다.”

“네?”

“제가 아직 서툴러서요. 마력을 검처럼 편히 뽑았다, 넣었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붉은 눈으로 기사들을 훑어봤다.

“공, 공작부인. 노여워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각하께서 저지르신 패악은…….”

기사단장이 말을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내 시선이 기사단장에게 고정됐다.

흠칫, 뒷걸음질 치려던 그가 가까스로 제 자리를 지켰다.

부하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각하께서 다소 무례하셨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그대들의 무례도 묻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각하께서 왜 이 별장을 찾으신 건지 아십니까?”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기사단장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것도 잠시, 가슴을 편 그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황실 근위대가 세드나 공작의 휴식까지 파악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기사단장이 두려움을 감추고 비웃는 시늉을 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을 부리는 얄팍한 인간.

그런 인간들이 저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에 더 적극적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숨이 붙어 있으니까.”

내 입술 사이에서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두 손이 새파란 불꽃에 휩싸였다.

“내 남편인 세드나 공작이 전국을 떠돌며 마물을 죽여줘서, 그 덕분에 너희와 너희 가족들이 사는 거니까!”

마력 불꽃이 기사단장을 집어삼킬 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으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사단장이 주저앉았다.

황실 근위대의 자존심은 잊었는지 얻어맞은 개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밤낮없이 마물을 소탕하고 온 황제의 숙부가 좀 쉬겠다는데, 그걸 방해해? 제국을 위해 희생하는 내 남편이 패악을 저질렀다고?”

집채만 한 불꽃이 악마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으아아악!”

시종들은 뿔뿔이 도망쳤고, 기사들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마력 폭주는 아니었다.

분노는 타오르되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으니까.

그걸 아는 살로메디안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아이시아 님. 부디 진정하십시오.”

굳은 표정으로 네이선이 나섰다.

평소라면 예의상 물러섰겠지만, 지금은 예법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이 사달의 원흉을 노려봤다.

“제가 진정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폐하의 기사들이 사과하는 것이 먼저입니까?”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해보세요.”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

네이선이 날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세드나 공작이 보여준 희생은 온 백성이 알고 있습니다. 황제로서 감사를 전합니다. 휴식을 방해한 점에 대해서도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반드르르하고도 말끔한 사과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유감이라고요? 유감은 대륙 동쪽에 원숭이들이 사는 조그만 섬나라에서 즐겨 쓰는 말 아닙니까?”

“아이시아 님…….”

“그건 제가 아는 사과와 다릅니다.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 부디 용서해달라고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과 아닌가요?”

물음과 함께 푸른 불꽃이 갑절 이상 커다래졌다.

네이선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떠는 것 같기도 했다.

불현듯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황제를 상대로 뭐 하는 거지? 이거 반역 아니야?!

살롬을 진정시켜도 모자랄 판에 황제한테 사과를 강요하다니!

아직 식지 않은 분노와 당황이 더해지면서 내 표정은 점점 더 냉랭해졌다.

사람이 아니라 얼음 인형, 아니 공동묘지에서 기어 나온 얼음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미소와 여유 모두를 잃은 황제. 겁에 질린 기사들.

마력 불꽃을 꺼낸 것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거둬야 할지 몰랐다.

한순간의 실수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시아. 그러다 지치겠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부드러운 음성이 날 감쌌다.

단지 그것만으로, 날뛰던 불꽃이 가라앉고 있었다.

“아.”

짧게 탄식하며 살로메디안을 올려보았다.

날 진정시키고 치유하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마물 떼를 무찌르느라 기력을 소진했잖아? 무리하지 마.”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그대를 흥분하게 만든 저것들의 잘못이다.”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서…….”

“그대의 힘을 폐하께서 알게 되셨으니 기쁜 일이지.”

“네?”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대가 변종 마물을 몰살시킬 만큼 강하다는 걸.”

변종 마물이라는 말에 네이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마물 새를 부려서 날 감시하는 주제에.”

“숙부님.”

“듣지 못했나? 귀환 전 공작저가 변종 마물떼에게 습격받았다는 걸.”

“그 도마뱀 마물을 해치운 것이 아이시아 님이셨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네이선이 되물었다.

살로메디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시아는 나와 견줄 만한 마력을 가졌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팔불출이었나?

나는 당황했고, 살로메디안은 뻔뻔했으며, 네이선은 경악했다.

네이선과 살로메디안을 번갈아 보며 손사래 쳤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휴고 님과 흑룡기사님들이 안 계셨다면 위험했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시아는 겸손하기까지 하지.”

“살롬……!”

“내가 없는 말 했나? 그대의 영민함을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정도인데.”

진심이라는 거 알겠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줄래요?

“폐하 앞이잖아요. 칭찬도 적당히 하셔야죠.”

아이시아가 난처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지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의 단점은 너무 겸손하다는 거다. 지나치게 착한 것도 흠이고.”

“그런 말은 여기서 하지 않아도 돼요.”

“아쿠아로드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적당히 자랑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 자랑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알았으니까 그만두세요. 네?”

“뭘 그만두라는 거지? 그대 미모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것? 아니면 그대의 현명함에 늘 감탄한다는 것?”

“살롬!”

뺨이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아이시아가 소리를 높였다.

활짝 벌어진 눈동자는 그 어떤 루비보다 영롱하게 빛났다.

갸름한 얼굴과 장인이 빚어낸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촉촉한 피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매끄러운 흑발에서 윤기가 흘렀다.

“계속하시면 정말 화낼 거예요!”

네이선을 흘끔 바라본 후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을 향해 경고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뾰족하게 내민 붉은 입술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알겠다. 내가 잘못했다.”

살로메디안이 바로 항복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그녀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른침을 삼킨 네이선이 반쯤 넋이 빠진 상태로 아이시아를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철과 얼음으로 빚은 조각 같았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아이시아의 이중성이 네이선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사실 아이시아가 기사들을 꾸짖을 때부터 네이선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흐트러짐 없는 기품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소름이 끼칠 만큼 완벽한 미모는 네이선이 그토록 그려온 불의 천사 그 이상이었다.

아이시아의 마력에 짓눌린 기사들이 신음할 때도 네이선은 또 다른 이유로 전율했다.

이토록 정순하고 강력한 불의 마력을 가진 여인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네이선이 찾던 완벽한 황후감. 그게 바로 아이시아였다.

“네이선. 너 때문에 내 아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나?”

아이시아의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그 모습이 저잣거리 깡패와 다를 게 없어서 네이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살롬. 폐하께 말씀 좀 조심해서 올리세요.”

아이시아가 부끄러운 남편의 태도를 지적했다.

제멋대로인 살로메디안이 그녀의 깊은 뜻을 이해할 리가 없었지만.

“내가 뭘?”

“제가 말했죠? 더 이상의 소란은 원하지 않는다고요.”

“네이선이 시비만 걸지 않으면 그대가 원하는 평화가 찾아올 거다.”

살로메디안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아이시아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그리고 꽃의 향기를 빨아들이듯 아이시아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네이선을 비롯한 사내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살롬!”

아이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이시아처럼 고귀한 여인이라면 모욕감을 느끼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다.

아이시아가 수치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살로메디안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모습이 제 소유물을 과시하는 굶주린 맹수 같았다.

잔인하게 번들거리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네이선은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원해도 이 여자는 내 것이다. 절대 너의 것이 되지 않아.’

제국의 황제와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 앞에서 살로메디안은 정복자만큼 오만했다.

언제까지 이 수치를 참아야 할까.

네이선의 주먹에 힘줄이 불거졌다.

“숙부님은 정말 아이시아 님을 아끼시는군요.”

아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할 뿐이겠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남편의 도리지.”

“숙부님의 입으로 남편의 도리를 듣게 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내가 애처가라는 소문을 못 들었나? 온 제국이 다 아는데?”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이선은 믿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전전대 황제, 즉 네이선의 할아버지가 낳은 마지막 황자였다.

장남이었던 전 황제와 무려 25살 차이였고, 조카였던 네이선과는 불과 2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네이선은 아주 어릴 적부터 살로메디안과 함께 컸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아는 숙부는 부부 관계나 혈연관계에 무관심한 분이시지요.”

“지금도 혈연은 내게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부부는 다르지. 시아가 내 아내니까.”

살로메디안이 혀로 입술을 훑으며 아이시아를 바라봤다.

오로지 욕망만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애정이 아니라 독점욕으로 보이는데요?”

살로메디안이 한낱 여인 따위를 진심으로 아낄 리가 없다고 네이선은 확신했다.

그는 대륙 제일의 보물을 독점하고픈 욕심과 더러운 욕구의 분출구를 찾는 게 분명했다.

그 상대가 아이시아라는 것이 화가 났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아이시아 님을 발견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살아있는 마신에게 사로 집힌 아이시아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하마터면 살로메디안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그녀를 탈출시킬 뻔했다.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숙부께 이런 치욕을 당하시다니…….’

당장 아이시아를 구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네이선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황제란 화려한 칭호도 살로메디안에겐 아무 소용없었다.

만인이 네이선의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도 살로메디안 만큼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조소를 머금었다.

틈만 나면 황제를 모욕하고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했지만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세드나 공작이었으니까. 소중한 마신의 계약자니까.

네이선이 황금으로 만든 우리에 갇혀 밤낮없이 국사를 돌볼 때, 살로메디안은 새로운 모험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백성들은 살로메디안을 두려워하면서도 칭송했다.

전쟁터를 누비는 최강의 기사! 마물을 사냥하는 백성들의 영웅!

네이선이 예법이니, 명분이니 하는 문제로 대신들과 입씨름 하는 동안 살로메디안은 모두에게 추앙받았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저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세드나 공작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이선은 지금 이 순간만큼 살로메디안이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살로메디안의 품에 갇힌 아이시아가 네이선의 질투를 부채질했다.

아이시아에게 처음 느낀 감정은 소년의 풋내 나는 첫사랑과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이시아를 돕고 싶었고, 그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살로메디안은 영원히 아이시아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결혼 안 해본 너는 모르겠지만, 독점욕도 애정이다. 네이선.”

살로메디안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저도 그 독점욕이라는 걸 느껴보고 싶군요.”

“아직도 황후감을 찾지 못했나?”

“숙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시아 님처럼 강한 불의 마력을 지닌 여인은 없다는 걸.”

“그럼 아무나 만나서 대충 결혼해. 온 대륙을 이잡듯 뒤져도 시아 같은 여인을 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니 아이시아를 황후로 맞이해야 했다.

그것이 아이시아와 네이선은 물론, 제국을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문제는 황후가 되어 마땅할 여인이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위험한 남자의 아내란 사실이었다.

“시아. 피곤하지 않은가?”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를 거부할 수 없는 아이시아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만 쉬겠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끌어안고 돌아섰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아이시아의 가녀린 몸이 더욱 작아 보였다.

“숙부님. 저를 쫓아내는 건 포기하신 겁니까?”

“쫓아내봤자 파리처럼 다시 붕붕거릴 거 아닌가?”

이 땅이 제국 안에 있는 이상, 살로메디안도 네이선을 쫓아낼 수 없었다.

험한 말로 자존심을 부리고 있지만 네이선은 계약의 주인이었다.

거칠게 요악하면 살로메디안의 주인이라 할 수도 있었다.

“제가 황제란 걸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2층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납치당하듯 아이시아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멈칫하며 네이선을 돌아봤다.

“편히 쉬십시오. 폐하.”

흘러내린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가 네이선의 심장을 관통했다.

예의상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 구해달라는 울부짖음 같았다.

심장이 두 동강 나듯 고통스러웠다.

“아이시아 님…….”

네이선은 아이시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2층에서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에게 어떤 험한 꼴을 당하게 될까.

유리 조각으로 생살을 찢는 듯한 상상을 거두며 네이선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숙부님은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아이시아 님은 숙부님의 아내고. 안쓰럽더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

처절한 열패감으로 오늘 밤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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