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 *
“정말 온천 맞아요? 이게 진짜 온천이라고요?”
한껏 들뜬 목소리가 산새의 지저귐처럼 살로메디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아이시아가 눈꺼풀을 빠르게 끔뻑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다가 제 볼을 힘껏 꼬집어보기도 했다.
“아야!”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아이시아의 뺨을 보면서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진짜 온천이니까 그만 의심해.”
“와아아!”
아이시아가 환호성을 지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수에 손을 담갔다.
사랑스러운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엄청 따뜻해요!”
“그렇겠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게 온천이니까.”
간단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살로메디안의 가슴도 아이시아 못지않게 벅차올랐다.
심장을 통해 그녀의 환희와 행복이 물씬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이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게 낯설고 놀라웠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알아볼 것을.’
온천수를 찰박거리며 즐거워하는 아이시아를 바라보며 살로메디안이 후회를 넘겼다.
아이시아는 제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표정을 감추는 것 말고는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던 소녀.
항상 나이보다 어른스럽던 아이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하는 모습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예리하게 찔렀다.
“영지 안에 다른 온천이 있다고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바라가 알려준 온천 지도에도 마신의 이빨은 없었는데요?”
“바바라도 몰랐을 거다. 오랫동안 황실에서 관리했었으니까.”
세드나 공작저에도 훌륭한 온천이 있었으므로 언제부턴가 마신의 이빨 온천은 황제 전용이 되었다.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와 달리 온천에 관심이 없었다.
온천이 말랐을 때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시아를 아내로 맞이한 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토벌 원정 중에 살로메디안은 제국 전역의 온천을 수소문했다.
온천을 발견하면 식사를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시찰했다.
온천이 말랐다고 했을 때 무너지던 아이시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이 별장을 발견했을 때 살로메디안의 기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바바라도, 빈센트도 못 한 일을 내가 해냈다…! 시아, 네 남편이 온천을 발견했다!’
살아생전 한 일 중에 가장 보람되고 뿌듯한 일이었다.
얼른 아이시아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애가 닳았다.
온천을 보고 행복해할 아이시아 생각에 토벌 일정을 더욱 앞당겼다.
자신이 흑룡기사들보다 더 많은 마물을 죽이면 가능한 일이었다.
예상 밖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마신의 이빨 소속 사용인들이 집단으로 반발한 거였다.
그중에서도 이끼처럼 칙칙한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50대 집사가 가장 난리였다.
「별장을 비우라고요? 불가능합니다! 세드나 영지에 속해 있지만, 이곳은 폐하 전용 온천입니다!」
「그래서?」
「폐하의 명 없이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내 땅에서 내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저는 황제 폐하 직속 집사입니다. 각하의 명을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
「너도 윗스 가문의 인간인가?」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불쾌한 초록색 머리칼이 낯익었다.
오래 쌓인 짜증이 밀려왔음은 물론이었다.
「너는 날 잘 모르는군. 두려워하지도 않고.」
「제가 두려워하는 분은 오직 대 크로티무스 제국의 황제 폐…….」
「날 아는 인간은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목숨이 9개쯤 있지 않은 이상.」
살로메디안은 귀찮은 말보다 훨씬 빠르고, 확실한 검을 꺼냈다.
별장 집사의 앞머리가 싹둑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보다는 목을 자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면 아이시아가 싫어할 테니까.
시끄럽고 건방진 집사가 기절한 것에 만족하며 살로메디안은 네이선에게 전언을 남겼다.
전언은 딱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내가 반역하는 꼴 보고 싶냐?]
그 즉시 황제의 전령이 도착했다.
별장의 주인은 세드나 공작이니 그의 명에 따르라는 문서를 들고.
* * *
“뒤돌아보시면 안 돼요.”
어깨너머로 살로메디안을 흘끔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밖에서 옷을 벗는 파격적인 결심을 할 만큼 온천욕을 서둘렀다.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추위가 몰려왔지만 괜찮았다. 곧 온천수의 따스한 품에 안길 수 있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온천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뒤돌아서 있던 살로메디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조바심이 났다. 회귀 직전에 경험했었던 환상처럼 온천이 사라져버릴까 봐.
“멀쩡히 있을 줄 알았던 온천이 말라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있거든요?”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친 채 입술을 삐죽거렸다.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불만투성이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거의 다 끝났어요.”
“인제 와서 안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옷 벗는 장면 이상의 무언가’를 봤다고 강조하는 말이었다.
내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이 사람, 내가 옷 벗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다른 것도 보고 싶은 거야?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시치미를 뗐다.
“부부 사이라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죠.”
“어차피 같이 목욕하게 될 텐데.”
“가릴 곳은 확실히 가릴 거예요.”
“목욕용 리넨 천도 가져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살로메디안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분신과도 같은 목욕용 리넨 천을 꺼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챙겼죠.”
살로메디안이 홱 고개를 돌렸다.
결 고운 눈썹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여기까지 챙겨왔다고?”
“돌아보지 마시라니까요!”
가슴 앞을 두 손으로 가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얼굴은 물론 가슴팍까지 열기가 번졌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살로메디안이 선언했다.
“더는 못 참겠다.”
“!”
“나는 예의보다 본능에 충실한 편이라.”
그 말을 끝으로 살로메디안이 제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옷 벗기 대회가 있으면 1등은 떼놓은 당상일 것 같았다.
순식간에 드러난 그의 상반신이 내 심장을 옥죄었다.
언제 봐도 탄식이 절로 나오는 조각 같은 몸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나도 온천욕하려고.”
“알몸으로요?”
그의 손이 바지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날 빤히 바라보며 살로메디안이 바지를 훌렁 벗어버렸다!
“원래 목욕은 알몸으로 하는 거다.”
꺄악!
내적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온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지 않았다면, 그래서 살로메디안의 사타구니가 가려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을지도 몰랐다.
“시아. 감기 걸리지 않게 서둘러라.”
온천 안으로 성큼 들어서면서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옷을 벗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였다.
이것도 제국식 문화인가?
콩콩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리넨 천으로 몸을 감쌌다.
발끝을 온천수에 살짝 담갔다. 수온이 제법 뜨거웠다. 짜르르한 감촉이 되어 온몸을 휘감았다.
용기 내어 다리를 담갔다.
내가 정말 온천욕을 하는 거야? 그것도 살롬이랑 단둘이?
직접 경험하고 있음에도 얼떨떨했다.
“조심해라. 돌이 미끄럽다.”
살로메디안의 말대로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은 기름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미끈거렸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겨우 자리를 잡고 편평한 돌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찰랑거리는 온천수가 턱밑까지 올라왔다.
“아흐흐흐…….”
나도 모르게 아저씨 같은 굵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욕실은 공작저의 대욕장이었다.
하지만 온천욕이 주는 행복은 욕실의 그것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풀잎의 싱그러움을 닮은 물 내음과 가슴이 뻥 뚫릴 듯한 쾌청한 공기.
매섭기만 하던 겨울바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식혀줬다.
뜨끈하다 못해 절절 끓는 온천수와 머리를 스치는 찬 공기의 대비는 온천욕을 더욱 즐겁게 했다.
“폐하께서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를 알겠네요.”
“그렇게 좋은가?”
“그럼요. 이런 온천욕은 제 오랜 소원이었어요.”
“선물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이보다 훌륭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성급하게 단언하지 마라. 앞으로 더 훌륭한 선물들을 받게 될 텐데.”
살로메디안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읊조렸다.
그 말에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귀한 선물이에요.
사랑하는 남자와 온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평화로움.
이 별장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앞으로 어떤 선물을 받게 되더라도 오늘의 행복이 빛바래지는 일은 없을 거였다.
살로메디안이 없는 동안 외로움과 긴장으로 딱딱하게 뭉쳐있었던 어깨가 흐물흐물해졌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달았다.
수증기가 걷히고,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은백색 달빛 아래서 살로메디안의 숨 막히는 미모가 드러났다.
물에 젖은 백금발과 촉촉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도톰한 입술 선도, 긴 목에서 탄탄한 가슴 근육으로 흐르는 라인도 내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살로메디안은 빨아들일 듯 열정적인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붉은 꽃이 피어났다.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고 싶기도 했다.
이중적인 욕망 사이에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민하는 중에도 살로메디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내 남자를 눈에 담지 않는 건 크나큰 손해였으니까.
“시아.”
익숙한 애칭이 오늘따라 은밀하게 들려왔다.
그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그와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살롬.”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희박해졌다. 온천수는 더욱 뜨거워졌다.
물에 젖은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을 때는 아찔한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그의 손길에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을 숨기려고 애써 말을 돌렸다.
“상처가 없어지셨네요. 치료하신 거예요?”
“아내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지.”
살로메디안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기분 좋게 올라갔다.
강철 같은 근육의 촉감이 허리를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심장 박동이 배 이상 빨라졌다.
그가 내 입술을 물어뜯을 듯 노려봤고 나는 달큰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숨결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한 치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파르르 검은 속눈썹이 떨렸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잘하는 짓이다! 생명의 은인은 무시하고 사랑놀음에 온천욕이라니!
* * *
“끄읍!”
비명이 터져 나가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키스하려던 살로메디안이 깜짝 놀라 물었다.
“시아? 왜 그러지?”
“키산드라 님이!”
나도 모르게 희뿌연 키산드라의 영혼을 손가락질했다.
반투명한 회색 몸과 하나로 땋은 긴 머리칼.
그녀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잔혹하다 못해 흉흉해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뾰족하게 돋았다.
키산드라의 영혼이 온천욕 중인 우리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었다.
“온천 지박령이라고 했잖아요?!”
내 말에 키산드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온천에 영영 묶인 몸은 아니다!
무시하지 말라는 듯 키산드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살로메디안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지박령은 뭐고, 키산드라는 뭔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진작 고백했어야 했는데……!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키산드라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게 분명했다.
좋게 사라질 거였으면 나와 살로메디안이 친밀한 시간을 가질 때를 노려서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녀가 날 괴롭힐 생각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살로메디안에게 진실을 털어놓아야 마땅했다.
공작령에 어떤 저주를 퍼부을지 몰랐으므로.
“사실 있잖아요…. 되게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는데, 살롬은 제 말을 믿어줄 거죠?”
횡설수설하는 내 앞에서 살로메디안이 참을성을 발휘했다.
“뭐든 믿어줄 테니 천천히만 말해.”
“그게, 저…….”
그런데도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우여곡절을 통해 ‘저주받은 폐왕녀’에서 ‘공작령의 구세주’로 전직했다.
다시금 ‘귀신 보는 공작부인’이 된다면 지금까지의 행복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살로메디안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는 걸 아는 것과는 별개의 불안이었다.
“시아. 무슨 일인데 이렇게 두려워하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바르르 떨고 있는 내 어깨를 감쌌다.
“사실은…….”
겨우 입술을 떼려는데 키산드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관둬! 내가 직접하고 만다!
순간 살로메디안의 낯빛이 달라졌다.
설마 그에게도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그가 날 품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준엄한 호통이 온천을 둘러싼 협곡에 메아리쳤다.
“살롬. 이 목소리가 들려요?”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다.”
살로메디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산드라가 비웃었다.
-널 키워준 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하냐. 꼬맹이?
“환청으로 날 현혹하려는 것이냐? 썩 나타나지 못할까?!”
살로메디안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동시에 그와 내 주변을 수천 개의 물 화살이 결계처럼 둘러쌌다.
사방으로 날을 세운 물 화살을 보면서 키산드라가 혀를 찼다.
-대책 없이 큰소리부터 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
-공격 전에 방어책부터 먼저 만들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면 더더욱.
키산드라의 시선이 날 향했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정말 키산드라인가……?”
그것도 잠시, 살로메디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라도 죽은 사람이 되돌아온다는 건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키산드라는 살로메디안 바로 뒤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제발 가만히 좀 있으세요. 키산드라님!
괜한 짓 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내가 입을 뻥끗거렸다.
하지만 키산드라는 멈추지 않았다.
불길하리만치 짙은 미소를 머금은 키산드라가 7년 만에 재회한 후계자에게 속삭였다.
-멍청아. 내가 진짜 키산드라다.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동시에 물 화살이 발사됐다.
수천 개의 화살은 키산드라의 반투명한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콰콰곽!
그러나 온천을 둘러싼 협곡은 살로메디안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물 화살이 나무를 쪼개고 바위를 부쉈다.
쿠르르릉!
지축을 울리는 불길한 소음과 함께 협곡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살로메디안은 나를 안고 온천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젖은 피부가 공기에 닿자마자 피부가 찢어질 듯 강한 추위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광경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온천이 파묻히고 있어요!”
방금까지 내가 몸 담그고 있었던 온천 위로 바위 더미가 쏟아졌다.
“시아, 위험하다!”
온천을 향해 팔을 뻗는 날 살로메디안이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 바위와 토사가 내 쪽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물의 방패를 만들었다.
나와 살로메디안에겐 모래 한 점 튀지 않았다. 하지만 온천은 무사하지 못했다.
“온천이……!”
살로메디안의 선물이었던 온천이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모락모락 피어나던 수증기도 따끈한 온천수도 마찬가지였다.
꿈에도 그리던 온천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 거였다.
차라리 환상이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무릎에 힘이 풀리고 새까만 현기증이 몰려왔다.
옆으로 기우는 날 살로메디안이 끌어안았다.
“시아? 괜찮은가?”
그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가 날 힘주어 안고 있음에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드디어 온천욕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공작저의 온천은 말라버렸고, 마신의 이빨 온천은 파묻혔다.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원흉이 나 같았다.
평범한 어린 시절도, 왕세녀의 지위도, 어머니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손에 쥘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고 내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너는 안 된다고,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누군가는 사소한 불행 따위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하겠지만, 그 사소한 것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움츠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가 곁에 있는데도 빙벽에 갇힌 것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키산드라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 비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하여간 무식한 짓만 골라서 하는 놈이라니까!
그 목소리를 들은 살로메디안이 눈을 부릅떴다.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죽이지 못한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나 역시 온천을 앗아간 원흉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게 전부 키산드라 님 때문이잖아요!?”
내가 외쳤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다.
“시아. 키산드라라니?”
“저기 키산드라 님이 앉아있어요!”
“죽은 키산드라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키산드라 님의 귀신이요! 승천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고 있다고요!”
키산드라가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살로메디안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내가 헛것을 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긴 아무도 없…….”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희끄무레하던 키산드라의 몸이 점점 불투명해지면서 색채를 띠기 시작했으므로!
-귀찮은 꼬맹이들이로구나!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나뭇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키산드라가 툴툴거렸다.
우리 앞에 선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피부는 새벽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했고, 맑고 투명한 청회색 눈동자는 신비롭게 빛났다.
나도 살로메디안도 경악에 휩싸여 7년 전, 170살의 나이로 사망한 키산드라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냐? 예쁜 여자 처음 봐?”
키산드라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살로메디안 대신 내가 입을 열었다.
“키산드라 님… 검은 머리칼이셨네요?”
-탐스럽고 부드러운 흑발이 내 자랑이지.
키산드라가 땋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우쭐댔다.
그녀가 나와 같은 빛깔의 머리칼을 가졌다는 것도, 진짜 사람보다 생기가 넘친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설마 살롬 눈에도 보이시는 거예요?!”
-나타나지 않으면 꼬맹이가 다 때려 부술 것 아니냐? 고약한 놈 같으니.
“원래 다른 사람한테도 보일 수 있으셨어요?”
-응.
키산드라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이어진 것은 깊고 깊은 짜증과 분노였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진작 모습을 드러내셨으면 제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너 지금 생명의 은인한테 성깔 부리는 거니?
“미친 사람 취급받을까 봐 살롬한테 말도 못 했단 말이에요!”
-귀신이라고 무시하냐? 너는 천년만년 살 줄 알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키산드라도 지지 않고 화를 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온천 지박령이라고 무시하고, 빙의하게 해 달랬더니 듣는 척도 안 하고!
“귀신이 제 몸을 차지하겠다는데 누가 허락하겠어요?”
-도마뱀 떼가 난리 칠 때도 내 목소리 못 들은 척했잖아? 그때 얼마나 급박했는 줄 아니?
“저도 정신없이 바빴어요.”
-핑계 대지 마! 네가 쓸모없는 줄 알았다면 회귀시키지도 않았을 거야!
키산드라가 그동안의 내 노력을 짓뭉갰다.
살로메디안한테 고백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마음 졸였던 것이 억울했다.
“정말 무시할 생각이었다면 마신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았겠죠!”
-알아봤다면서 왜 성과가 없어? 무능한 건 네 남편이랑 똑같구나?
“말씀 다 하셨어요?”
-다 했다면 어쩔 건데!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살로메디안이 나와 키산드라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키산드라의 영혼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당신이 진짜 키산드라란 말인가?”
-꼬맹아. 고작 7년 만에 이 아름다운 얼굴을 까먹었느냐?
“죽은 주제에 왜 나타난 거야?”
살로메디안이 금속성 눈으로 키산드라를 노려봤다.
재회의 기쁨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은 키산드라가 산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데도 놀라지 않았다.
키산드라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살로메디안과 마주한 키산드라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도 죽어서 소멸하길 바랐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마신의 농간이라는 것밖에는.
“…….”
-그래서 아이시아에게 부탁한 거다. 마신의 비밀을 풀어 날 소멸시켜 달라고.
키산드라의 시선이 내게 옮겨왔다.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아이시아지?”
-너는 알 필요 없다.
“대답해. 다시 죽여버리기 전에.”
-내 소원이 그거다. 다시 죽는 것. 그리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 하지만 넌 할 수 없어, 꼬맹아.
“…….”
-내가 얼마나 죽음을 바랐는지 너도 알잖아?
키산드라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대답 없이 그녀를 노려보던 살로메디안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신의 심장을 가진 인간이 필요했나 보군.”
키산드라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여유만만한 웃음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키산드라는 싱글거리던 그녀하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내가 살로메디안을 돌아봤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허술한 척하지만 용의주도한 여자다.”
“…….”
“제 염원을 풀어줄 상대를 함부로 골랐을 리가 없다.”
“키산드라 님께 마신의 심장이 필요한 이유는요?”
“마신이 존재하는 증거이자, 세드나 공작의 상징이니까.”
세드나 공작의 심장은 마신과 제국이 계약했단 증거였다.
세드나 공작이 죽지 않는 것도, 인간을 뛰어넘는 강력한 마력을 갖게 된 것도 그 심장 덕분이었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키산드라의 심장은 사라졌다.
그녀가 마신에게 볼일이 있다면 마신의 심장에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로메디안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내게 부탁해봤자 소용없으리란 걸 알았겠지. 그래서 그대를 이용한 거다.”
내가 묻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대답했다.
“키산드라 님. 일부러 절 회귀시켜 주신 건가요?”
키산드라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까부터 회귀란 말이 자꾸 나오는데. 회귀가 뭐지?”
그의 푸른 눈을 보며 더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말 못 할 비밀을 혼자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든 비밀을 밝히려면, 그가 내 생살을 찢고 심장을 뜯어갔다는 것부터 말해야 했다.
기억 못 하더라도 살롬은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제 손으로 날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다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은 마음과 살로메디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긴 침묵을 깨고 키산드라가 입을 열었다.
-네놈의 심장을 가지고 아쿠아로드로 돌아간 아이시아는 하옥됐다. 그때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고.
키산드라의 거짓말에 사라진 심장 발작이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죽은 아이시아를 내가 살렸다. 네 말처럼 오랜 염원을 풀기 위해.
키산드라는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입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키산드라의 거짓말은 자연스러웠다.
나만 잠자코 있으면 살로메디안은 기억하지 못하고, 벌어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죽은 시아를 살렸다고?”
살로메디안이 키산드라를 추궁했다.
-회귀란 게 원래 그런 거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건가? 당신은 고작 유령일 뿐이잖아?”
-고작 유령이 네놈 앞에 육체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겠느냐?
키산드라가 손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짚었다.
날카로운 창에 꿰뚫린 사람처럼 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살을 찌르는 긴장감 속에서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그냥 죽지 않는 여자로군.”
-내가 돌아올 걸 예상했다는 말 같네.
“당신 같은 여자가 순순히 죽을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
-칭찬이야? 아님 비꼬는 거야?
“당연히 비꼬는 거다.”
살로메디안의 대답에 키산드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래서 아이시아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었다니까.”
투덜거리는 키산드라에게 살로메디안이 매섭게 경고했다.
“다시는 시아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런다고 물러설 키산드라가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너는 내게 명령할 자격이 없다. 꼬맹아.
“내 아내를 포기하고 지옥으로 꺼져. 키산드라.”
-내가 아이시아를 회귀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넌 결혼도 못 했을 텐데?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시아에게 접근하는 걸 용서하지 않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쓸모없는 물 화살이나 쏘려고?
키산드라가 비웃었다.
무능함을 지적당한 살로메디안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두드러졌다.
“죽어서도 짜증 나는 여자로군.”
-죽어서도 재수 없는 네 얼굴을 봐야 하는 나는 어떻겠냐?
키산드라와 살로메디안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 것 같은 살벌함을 지켜보면서 내가 손을 들었다.
“안에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저 얼어 죽을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