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50)

22

* * *

나도 모르게 베개를 끌어안았다.

일어나자마자 들었던 살로메디안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테레사가 아쿠아로드 국왕의 딸이 아니라고요?”

“정황상 분명하다. 증거를 더 찾아야겠지만.”

살로메디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떠돌이 신관과 매춘부. 그리고 테레사와 피에타.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테레사는 왕세녀인 나보다 강한 마력을 지녔다.

역대 왕족 중에서 그 누구보다 찬란한 하늘색 머리칼을 자랑했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이복동생.

내 모든 걸 빼앗고, 아쿠아로드 옥새를 휘두르는 테레사가 떠돌이 신관의 딸이라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할까.

차가워진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피오넬… 아니, 피에타에게 확인해봐야 해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신관이 상처를 치료했어요. 독은 제가 해독시켰고요.”

“질식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

“그대도 보지 않았나? 계약 마법이 발동하던 순간을.”

기억 속에서 피에타가 쓰러지던 장면이 느리게 재생됐다.

빨간 줄처럼 보이던 마법진 문자와 그 문자에 목을 졸리기 직전에 아이가 본에게 하던 말도.

「테레사 님이 네놈을 죽일 거야! 난 테레사 님의 가족이라고! 진, 진짜야! 테레사 님은 내……!」

내가 들었던 건 거기까지였다.

계약 마법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비밀.

테레사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던 피에타.

그 아이의 짙은 남색 머리카락.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살로메디안의 추정이 사실이라면 아쿠아로드는 비천한 악녀에게 놀아난 것이다.

나도, 내 어머니도 그 악녀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테레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어마마마, 제 여동생이 생겼대요! 아바마마랑 똑같은 하늘색 머리칼이 엄청 예뻤어요! 걔는 8살이래요!」

같이 놀 또래가 생겨서 들뜬 나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왕녀 대우는 해줄 수 없겠지만 네가 잘 돌봐주거라. 아이시아.」

「인형도 주고 케이크도 줄래요. 낡은 옷을 입고 있던데, 제 드레스를 물려줘도 될까요?」

「착하구나. 우리 딸. 그 애를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지켜줘야 한다. 어머니가 달라도 너희는 피를 나눈 자매니까. 알겠지?」

어머니는 테레사가 흑발과 붉은 눈을 가진 날 위협하리란 걸 알고 계셨다.

테레사를 낳은 여자가 매춘부라는 걸 알면서도 법이 허락하는 것 이상의 대우를 해줬다.

테레사가 왕의 딸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거야. 특별하고도 고귀한 내 딸 아이시아. 넌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인이 될 거란다.」

어머니의 유언이 투명한 눈물이 되어 내 뺨을 가로질렀다.

병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진실을 모르셨다.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하늘색 머리칼이, 물의 마력이 그토록 대단했던 걸까?

성녀라 불린 왕비를 벌레처럼 짓밟을 정도로?

현기증 탓에 침대 위에서조차 몸을 가누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감쌌다.

“시아. 마음을 단단히 해라.”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가 날 지탱해주었다.

“테레사는 그대와 단 한 방울도 피가 섞이지 않았다.”

“…….”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대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테레사는 처형당할 거다.”

“테레사는 제 손으로 처리할 거예요. 진실을 밝히는 것도, 처벌하는 것도요.”

“무리할 필요 없어.”

“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돌아가신 어머니를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담대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살로메디안이 말없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떨림이 가라앉고 새로운 각오가 움틀 때까지.

“목표는 테레사의 거짓을 밝히고 내란이나 식민 지배 없이 아쿠아로드 왕실을 바로 세우는 거예요.”

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

살로메디안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흠. 확실히 정복보다 훨씬 귀찮은 일이군.”

“테레사가 왕실의 피를 잇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왕족들이 똘똘 뭉칠 거예요.”

“테레사에게 권력을 빼앗긴 귀족들도 힘을 보태겠지.”

“떠돌이 신관을 찾아야 해요. 그가 가장 중요한 증인이에요.”

“벌써 죽였을 거야. 피에타의 가족들도 최근 몰살당했다고 한다.”

무거운 침묵이 나와 살로메디안을 감쌌다.

가족이 죽은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피에타가 가엾었다.

깨어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테레사의 친부라면 살해당했을 확률이 높죠. 하지만 신관과 그 가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피에타도 소중한 증인이다. 계약 마법 때문에 제약이 있겠지만 쓸모가 있을 거야.”

“피에타가 깨어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해요. 떠돌이 신관을 찾는 게 먼저예요.”

“아쿠아로드에 사람을 급파하겠다.”

더 미룰 것도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설렁줄을 잡아당기려 했다.

그 손을 내가 저지했다.

“아뇨. 제가 직접 가겠어요.”

“시아!”

살로메디안이 반대하리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내 안전을 걱정하는 그가 아닌가. 어처구니없는 십계명을 만들 정도로.

“허락해주세요.”

“불가능하다. 그대는 한동안 요양해야 한다.”

“충분히 쉬었어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그대는 어제 마물과 첫 전투를 치렀다. 장거리 여행은 말도 안 돼.”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알아,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들릴 듯 말 듯 낮은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대와 또 헤어질 수 없다.”

“…….”

“나 없는 그대를, 그대 없는 나를 견딜 수가 없어.”

낮은 음성이 심장을 건드렸다. 아릿한 통증이 번지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의 목소리가 외로움으로 얼룩졌다. 그보다 간절한 애원으로 똘똘 뭉쳐있었고.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그러니 내 곁에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살로메디안이 목을 뒤로 젖히며 커다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이 상처받은 걸 들키고 싶지 않은 십대 소년처럼 보였다.

나도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홀로 외로움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살롬.”

그의 옷깃을 가만히 흔들었다.

살로메디안은 고집스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가 그의 뺨에 한쪽 손을 올렸다.

“저 좀 봐주세요.”

볕에 그을린 흔적조차 없는 피부가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짙은 백금색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와 신이 빚은 듯 완벽한 콧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먼 곳을 응시하던 푸른 눈이 날 향했을 때,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혼자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뭐라?”

“같이 가 줘요. 우리 같이 가요.”

“!”

“저도 살롬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살롬과 함께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겠지만… 변장하면 되죠.”

살로메디안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함께 아쿠아로드에 간다는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혼자 간다고 고집부려봤자 보내줄 리가 있어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딱딱하게 굳었던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 끝에는 언제나 내 심장을 두드리는 미소가 있었다.

“시아!”

그가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힘 조절이 안 될 만큼 기뻤던 걸까? 순간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아파요!”

살려달라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팡팡 쳤다.

당황한 살로메디안이 두 팔을 황급히 풀었다.

“마… 많이 아픈가?”

걱정을 듬뿍 담아 그가 물었다.

짜르르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매만지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대륙 최강의 남자가 무턱대고 힘주는데 안 아프겠어요?”

“미안하다. 아프게 할 마음은 없었어. 나는 그냥…….”

살로메디안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설프게 변명하는 그 모습이 어쩔 수 없이 귀여워서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웃지?”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라고 들었는데 사과를 잘하셔서요.”

같이 웃어야 할지, 아니면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모았다.

“공작저에만 있다 보니 소문을 통 못 들었나 보군. 나는 살인귀가 아닌 애처가라 불린다.”

“애처가요?”

“대륙 제일의 사랑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가 누구보다 날 아껴주는 건 사실이었다.

애처가라 불려 마땅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마저도 모이기만 하면 살로메디안이 딴사람이 되었다고 떠들지 않나?

바바라는 내게 미친 살로메디안을 위해 애처가 기념문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과 사랑꾼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살로메디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변명할 차례였다.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너무 안 어울려서요.”

“애처가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뜻인가?”

“그게 무슨……?”

“소문이 무슨 소용이겠어. 당사자가 실감해야지. 내가 아내라면 죽고 못 사는 애처가라는 사실을.”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고혹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그와 나누었던 격정적인 욕조 키스가 머릿속에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눈동자에서 활활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을.

그 앞에서 한없이 달아오른 내 몸이 머릿속을 넘나들었다.

어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력을 소진한 탓에 더 이상의 폭주는 막을 수 있었지만,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리넨 천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뭘 하시려는 거예요?”

바짝 굳은 날 보며 살로메디안이 피식 웃었다.

“당장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옷 입어. 최대한 빨리.”

“지금 아쿠아로드로 떠나자고요?”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여행보다 요양이 먼저다. 아쿠아로드엔 그대가 충분히 건강해졌을 때 간다.”

“저택에서 쉬는 게 아니에요?”

“할 일이 실시간으로 쌓이는 곳에서 쉴 수 있겠어?”

뭐라 물을지 다 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한발 빨리 답했다.

“요양은 고립된 곳에서 한다. 우리 단둘이서.”

* * *

바바라는 화가 단단히 났다.

도마뱀 떼가 겨우 가꾼 정원을 짓뭉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흑룡기사들이 도마뱀 몇 마리 잡겠다고 완공 직전의 의료 교육원을 무너뜨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달 말에 출하해야 하는 린삼 더미가 살로메디안이 뿌린 마력의 비 때문에 썩어 가고 있다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아이시아와 함께라면 말이다!

“각하 새끼… 아니, 각하께서 시아를 납치해서 별장에 가뒀다고?!”

바바라의 날 선 물음에 빈센트가 한숨지었다.

“가두신 게 아니라 요양을 명하신 겁니다.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게 그거잖아! 내 소중한 시아를 내 허락도 없이 데려갔으니까!”

“왜 공작부인께서 누님의 소중한 시아입니까?”

“너는 몰라! 여자들의 우정을!”

바바라가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썼다. 바바라의 짧은 팔을 피하며 빈센트가 말했다.

“각하께서 잘 판단하신 겁니다. 누님께서는 공작부인을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이시니까요.”

“시아도 일 좋아해! 나랑 똑같은 워커홀릭 부류라고!”

“누님 같은 분이 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진짜라니까? 서류 검토하고 예산 배분하고,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다는 거야?”

“누님의 연애가 왜 늘 망하는지 알겠네요.”

빈센트의 말은 폭발 직전의 바바라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말 다 했냐? 주둥이를 가로세로로 찢어버릴까 보다!”

“계속 험한 말 늘어놓으시면 공작부인께서 부탁하신 것도 모른 척할 겁니다.”

“시아가 너에게 부탁을 했다고?”

“누님께 모든 일을 떠맡기고 떠나게 돼서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리를 비울 동안 누님을 잘 보좌해달라고 부탁하셨고요.”

바바라는 집안의 골칫덩어리인 막냇동생이 자비라도 베풀 듯 으스대는 꼴이 고까웠다.

하지만 이 대화의 포인트는 빈센트 나부랭이가 아니라, ‘아이시아의 절절한 사랑과 우정’이었다.

아이시아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빈센트를 회유했을지 안 봐도 본 듯했다.

딸기 사탕처럼 빨간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난처해했겠지! 그 모습은 얼마나 귀여웠을까!

냉정한 척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랑둥이인 공작부인을 떠올리며 바바라가 제자리에서 춤췄다.

“나의 천사 시아! 공작령의 천사 시아!”

터질 것처럼 부풀었던 분노도 씻은 듯 사라졌다. 함께 있지 않아도 아이시아의 기적이 바바라를 치유한 것이다.

“어서 돌아와 주세요, 천사님! 각하 따위가 독점하기에 당신은 너무 위대합니다!”

바바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빈센트는 ‘누나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디에고의 실험실은 어떻게 됐습니까?”

“벌써 마련했지. 지저분한 마도사는 어젯밤부터 첨탑 감옥에 처박혔어.”

“공작부인께서 이것을 디에고에게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빈센트가 반듯하게 접힌 쪽지를 꺼냈다.

동생의 고지식한 성격을 아는 바바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상한 우유라도 빨았냐? 가서 주면 될 걸 왜 나한테 보여줘?”

“누님께서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공작부인께서 뭔가 계획 중이신가 봅니다. 각하 몰래요.”

“정말? 당장 내놔 봐!”

바바라가 빈센트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챘다.

쪽지에는 유려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디에고. 미안하지만 급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마도구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디에고가 절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마도구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습니다.

상당한 돈이 필요하겠지만, 곧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공작령에는 고가의 약초가 많이 자라거든요.]

거기까지 읽다 말고 바바라가 눈시울을 붙잡았다.

“개망나니가 린삼을 개떡으로 만들어놨는데! 우리 천사는 그것도 모르고!”

“누님. 끝까지 읽으시지요.”

“오늘 상단에서 독촉장이 왔다고! 린삼을 내놓거나, 계약금을 반환하래!”

“그보다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빈센트가 지적했다.

바바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쪽지로 눈을 돌렸다.

[아쿠아로드를 떠날 때 테레사에게 마도구 제작 기법 7할을 양도받았습니다.

그동안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만, 디에고 덕분에 빛을 발할 수 있겠군요.

저는 공작령을 아쿠아로드 이상 가는 마도구 생산지로 만들 계획입니다.

테레사의 악행을 저지하려면 자금 통로를 막아야 합니다.

공작령에서 아쿠아로드보다 훌륭한 마도구를 생산한다면 아쿠아로드 경제도 휘청거릴 겁니다.

디에고가 나와 함께 그 일을 해주길 바랍니다. 각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디에고에게 창작의 자유를 허락하고, 어떤 마도구를 만들든 간섭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마도구에 대한 전권을 약속드리지요. 대량 살상 마도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생각을 정리해주세요.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아이시아 세드나.]

쪽지를 다 읽은 바바라의 소감은 이랬다.

“정말 시아가 직접 쓴 거 맞아? 내용이 시아답지 않잖아?”

“누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쪽지로 쓸 내용도 아니고, 봉인도 하지 않았어.”

“그 점이 이상합니다.”

“정체불명의 마도사한테 전권을 줄 순 없고. 그걸 시아가 모를 리가 없는데.”

“결례를 무릅쓰고 누님께 보여드린 까닭도 그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얼굴이 창백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빈센트는 아이시아의 명령을 어긴 거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바바라가 쪽지를 다시 접었다.

“디에고에게 쪽지를 전해줘.”

“공작부인의 계획에 동의하신다는 겁니까?”

“동의하고 말고가 어디 있냐? 주군께서 결정하면 신하는 따를 뿐이지.”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빈센트의 말에 바바라가 피식 웃었다.

“대륙 한 귀퉁이에 처박힌 광신도 집단일 뿐이야.”

“아쿠아로드가 말고, 공작령말입니다.”

“…….”

“우리 영지가 아쿠아로드 특제 마도구를 손에 넣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폐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 왜 숨겼느냐고 따질 테고, 당장 내놓으라고 강요할 거야.”

바바라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각하께서는 그 명에 순순히 따르실 분이 아니지요. 공작부인의 관심 사항이라면 더더욱이요.”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마도구를 생산하면 우리 영지는 돈방석에 앉을 겁니다. 황금이 불화를 키울 거고요.”

착잡한 표정으로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앉았네! 처먹고 죽지만 않으면, 돈은 많을수록 좋아! 역시 시아는 공작령의 구세주라니까? 오, 나의 천사님!”

바바라가 두 손을 모으고 호들갑을 떨었다.

태연하다 못해 장난스럽기만 한 바바라를 노려보며 빈센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각하께서 무력과 재력, 모두를 갖게 되면 다른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황실의 견제도 심해질 테고요!”

“그래서 마도구를 포기하자는 거야? 공작부인의 뜻을 거스르면서?”

“…신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각하를 눈엣가시로 보는 인간들이 많으니까요.”

“맞다! 친황제파 선두주자인 윗스 백작도 각하라면 자다가도 이를 박박 간다잖아? 하나뿐인 아들을 한낱 기사로 만들어 버렸다고!”

바바라가 빈센트의 약점을 꼬집었다.

빈센트는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지랄하지 말고. 디에고에게 시아의 쪽지를 전달해.”

“…….”

“이 쪽지를 봤다는 건 비밀이야. 디에고란 놈 입단속시키는 것도 까먹지 말고.”

“…알겠습니다.”

빈센트가 시선을 발치로 떨어뜨렸다.

주군과 공작부인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고지식함과 충성심을 잘 아는 바바라가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위로의 표현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떨떠름했지만.

“너는 공작령의 구세주를 좀 더 믿을 필요가 있어.”

“무슨 뜻입니까?”

“시아는 네 생각보다 훨씬 신중해. 검에 빠져 사는 너보다 공작령을 위해 오래 고민했고.”

“?”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르냐? 마물이랑 뒹굴다 보니 돌머리가 다됐네! 쯧쯧.”

“누님!”

빈센트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바바라가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질색했다.

“고막 터지겠다! 귀 안 먹었으니까, 얼른 꺼져!”

마지못해 빈센트가 집무실을 떠났다.

집무실에 남은 바바라가 책상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짧은 다리가 의자 위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바바라의 혼잣말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조금 전 대화와 달리 사뭇 다른 진지한 음성이었다.

“시아. 너무 큰 모험은 하지 마세요. 혼자서 멀리 가시면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 * *

다음 날이 되자, 나는 혼자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돌아왔다.

오랜만의 승마가 어색했지만, 살로메디안과 나란히 말을 달리는 시간이 꿈결처럼 행복했다.

어린 시절 몸에 익혔던 승마 감각도 점차 돌아왔다.

“말을 이렇게 잘 탈 줄 몰랐는데?”

살로메디안이 감탄하며 속도를 줄였다.

말고삐를 감아쥐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상쾌한 가을바람이 검은 머릿결을 날리며 땀을 식혀줬다.

“승마는 왕세녀의 기본 소양이죠. 조금만 연습하면 기마 훈련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기마 훈련은 공작부인의 소양이 아니다.”

기사가 되겠다는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는 듯 살로메디안이 냉정하게 못 박았다.

틈을 주지 않는 그를 보며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치사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대가 그런 표정으로 조르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지니까.”

“기사가 되는 것도요?”

“죽었다가 깨도 안 되는 일은 빼고.”

살로메디안이 웃으며 가죽 주머니에 있는 물로 목을 축였다.

그저 물을 마시고 있을 뿐인데, 늘씬한 긴 목과 깎아놓은 듯한 예리한 턱선이 어우러지며 한 폭 그림을 완성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신비롭기까지 한 남자를 넋 놓고 바라봤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얼굴이 깡패구나. 값싼 옷을 입었는데도 온몸에서 빛이 나.

그는 평민들이나 걸칠 법한 소박한 옷차림이었다.

투박한 재킷엔 자수나 보석 장식이 없었다.

무명 셔츠의 단추는 살로메디안의 가슴 근육을 감당하지 못하고 느슨하게 풀려있었다.

나도 승마용 드레스 대신 바지와 재킷으로 수수하게 입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일상복 같지만, 재킷 안쪽엔 찬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고급 솜을 두툼하게 넣었다.

장갑도, 부츠도 방한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고급품이었다.

겨울을 대비해 바바라가 맞춰준 물건들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별장이 나오나요?”

“반나절 정도. 점심은 비스킷으로 때우도록 하지.”

“점점 더 추워지는 것 같아요.”

“세드나 영지 북단에 위치한 곳이니까.”

살로메디안이 양피지 지도를 꺼내 목적지를 보여줬다.

세드나 영지 북쪽 끝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지역이 있었다.

“갈퀴 같은 모양 때문에 마신의 이빨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 데 별장을 지었다고요?”

“마신과 결탁한 인간들의 악취미를 어떻게 설명할까? 괜히 이해하려 하지 마.”

전대 세드나 공작들을 비아냥거리며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마신의 숲에 저택을 지은 인간들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

나는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왜 마신의 이빨까지 가는 거예요? 별장이라면 다른 곳에도 있잖아요?”

살림이 궁핍해졌다고는 하나, 세드나 공작령은 제국과 역사를 함께하는 명문가였다.

나와 살로메디안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쉴 수 있는 별장은 여럿 있었다.

부쩍 추워지는 날씨를 고려하면 남쪽 별장을 찾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꼭 그곳이어야 해.”

“왜요?”

“그런 게 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나는 그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살롬. 저한테 숨기는 것 있죠?”

“아니.”

“아뇨, 분명 뭔가 숨기고 있어요.”

확신에 찬 내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안에 든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나 없는 동안 독심술이라도 익힌 거야?”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물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은 관두고,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왜 마신의 이빨까지 가는 거죠?”

“비밀이다.”

“부부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서슴없이 부부 사이라고 말할 만큼 나는 뻔뻔해졌다.

살로메디안과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해졌다는 뜻이었다.

계약 부부란 사실마저 망각할 만큼.

“비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도착하면 알게 돼.”

신경질 부리는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스치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아서 항의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일상적인 손짓에 번번이 녹아내리는 내가 원망스러웠고, 날 쥐락펴락하는 살로메디안이 얄미웠다.

있는 줄도 몰랐던 심통이 불뚝 튀어나올 만큼.

“몰라요. 말해주기 전까지 안 갈 거예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팩 돌렸다. 어린 시절에도 해본 적 없는 토라짐이었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쪽으로 고개 숙였다. 나는 고집스레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말 시키지 마세요.”

“삐친 건가?”

“삐치긴 누가 삐쳤대요?”

내 입에서 어리광에 가까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살로메디안은 유치한 내 태도를 지적하거나, 공작부인의 체통을 지키라고 하는 대신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러면 곤란한데.”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화를 풀어주려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얼굴이었다.

“흠흠. 시아?”

“…….”

“크흠. 정말 대답도 안 해줄 건가?”

말 없는 나 때문에 살로메디안은 점점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헛기침하던 살로메디안이 선택한 것은 꿀벌처럼 내 주위를 빙빙 도는 거였다.

내 이름을 반복하면서.

“시아? 시아. 시아……?”

햇빛에 반짝이는 백금발이 오늘따라 벌꿀처럼 달콤해 보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벌 떼의 윙윙거림으로 들렸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꿀벌이라니!

살로메디안을 곁눈질로 살펴보면서 겨우 웃음을 삼켰다.

뭘 어찌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토라진 것도, 토라진 척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므로.

안 삐쳤는데 삐친 척해도 되는 거야? 언제까지 이래야 해?

나중에 화내면 어쩌지? 내가 너무 솔직했나? 이건 솔직한 게 아닌 건가?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질문을 잠재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감정은 살로메디안에게 고스란히 전달됐을 거였다.

“시아.”

그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어깨를 튕겼다.

살로메디안의 눈동자는 한겨울의 호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화난 건가?

심장의 두근거림이 핏줄을 타고 돌았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이 꺼낸 말은 의외였다.

“화 풀면… 요리해줄게.”

“네?”

“닭튀김 또 해주겠다고.”

살로메디안의 뺨이 은은한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랐다.

날 달래주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 겨우 요리라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게 살로메디안 특제 요리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맛이 끝내줬으니까!

“좋아요! 다른 것도 해주세요!”

언제 토라졌냐는 듯 내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살로메디안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약속이에요?”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기이한 생명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살로메디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정 못 믿겠으면 계약 마법을…….”

“계약은 무슨 계약! 새끼손가락만으로 충분한 약속도 있다고요.”

머뭇거리는 그의 약지를 낚아채서 손가락을 걸었다. 그와 얽힌 손가락이 단단히 묶였다.

그것도 모자라 엄지로 도장까지 꾹 찍었다.

“약속 어기시면 안 돼요?”

“물론이다.”

살로메디안이 아름다운 미소로 답했다.

약속은 핑계일 뿐이었다. 이렇게 그와 사소하게 닿고 싶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말고삐를 거머쥐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살로메디안이 준비한 진짜 선물은 따로 있었다.

* * *

마신의 이빨에 도착하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 땅에만 겨울이 발 빠르게 찾아온 것 같았다.

침엽수림 사이로 세드나 공작가의 흑룡 문장이 조각된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을 지나고 얼어붙은 땅을 한참 달린 후에야 검은 벽돌로 지어진 별장이 보였다.

별장보다는 대저택이라 불러야 마땅할 장엄한 건물을 보고도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히고, 살결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웠다.

오들오들 떠는 날 보고 살로메디안이 재킷을 벗어줬다.

“감기 걸리겠다.”

바바라가 챙겨준 코트가 있었지만 잠자코 그의 체취와 온기가 묻은 재킷을 여몄다.

햇볕 냄새가 밴 거위 털 이불을 덮는다고 해도 살로메디안의 재킷만큼 포근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푸스스 피어오르는 웃음을 갈무리하고 별장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마중 나오는 시종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의아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별장이네요.”

검은 벽돌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별장은 유물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고풍스러운 가구로 가득했다.

복도나 계단은 물론 샹들리에, 촛대도 먼지 한 점 없이 반짝반짝했다.

벽난로는 따스한 온기를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잘 마른 장작이 쌓여있었다.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양탄자와 황금으로 장식된 액자들을 보며 얼떨떨했다.

이 별장은 무슨 돈으로 관리하는 걸까? 비싼 가구는 바바라가 전부 팔아치웠다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황제가 주로 쓰는 별장이다. 우리 쪽에서 손을 뗀 지 꽤 됐어.”

어쩐지. 우리 영지 같지 않게 화려하더라니.

가구며 소품이 온통 검은색이라는 것이 특이하긴 하지만, 황제가 머물러도 부족함이 없는 저택이었다.

전용 별장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을 황제가 왜 춥고 외진 이곳까지 오는 걸까?

“여기 경치가 특출나게 빼어난가 보죠?”

“저택 뒤는 절벽이다. 빠져 죽기 딱 좋은 협곡이 있지.”

“천연 요새라서 안전하다거나…….”

“마신의 숲과 떨어져 있긴 하지만, 마물이 자주 출몰한다. 이 지역 마물들은 유난히 흉포해.”

“흠. 폐하도 할 일 되게 없으시네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가 어느 별장에 머물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에 이채가 번졌다.

“더 궁금한 것은 없고?”

“별로요. 공짜로 별장 관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이 정도 규모면 예산을 꽤 잡아먹을 텐데.”

“그게 전부인가?”

“다른 게 또 있어야 해요?”

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살로메디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네이선이 보고 싶지 않나?”

“보고 싶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잖아요.”

“네이선은 그대를 퍽 보고 싶어 하던데. 틈만 나면 애걸할 만큼.”

살로메디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네이선은 끈질기게 초대장을 보내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중간에 가로챈 것을 제외하고라도 너무 많았다.

거절 답장을 쓰는 것도 피로할 지경이었다.

네이선은 토벌 원정 일정을 조율하는 공문서에도 ‘아이시아 님을 다시 뵙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라고 적었다.

살로메디안이 갈기갈기 찢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시아. 황궁에 가보고 싶지 않은가?”

살로메디안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물었다.

“황궁 욕실은 훌륭한가요?”

“황제 전용 욕실을 본 적은 없지만, 귀빈용 욕실은 평범하다. 공작저 대욕장에 비하면 남루해.”

“그럼 관심 없어요.”

살로메디안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어쩐지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살롬. 왜 그러세요?”

“그대다워서. 그대는 정말 목욕 말고는 관심이 없군.”

아뇨. 당신에겐 관심 많아요. 목욕도, 온천도 전부 잊어버릴만큼.

대답을 삼키고 비밀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황궁보다 우리 집이 더 좋아요. 살롬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불의 천사니, 이상형이니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네이선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폐하의 초대를 계속 거절하는 건 결례겠죠?”

“아니.”

“공작부인의 의무가 아니라면 황궁엔 가고 싶지 않아요.”

“네이선 때문에?”

“네. 많이 이상한 분 같아요.”

“푸핫!”

살로메디안이 낯선 웃음을 터뜨렸다.

폭소를 터뜨리는 그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살롬?”

“하하하하! 이상한 놈이라니!”

놈이 아니라, 분이라고 했는데.

그가 목을 뒤로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폭포수 물줄기처럼 시원하고도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대의 안목은 백만 골드짜리다, 시아. 하하하!”

가까스로 웃음을 가라앉힌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그대의 생각에 동의해. 내 조카지만 정말 이상한 놈이지.”

“제가 그런 말 했다고, 전하지 말아 주세요. 황제 모욕죄로 처형당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내 아내를 처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살로메디안이 힘주어 말했다.

자신감 이상의 결연함이 그의 눈동자에 번뜩였다.

“황제 폐하라도요?”

“황제가 아니라 신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

잔혹한 말이 달콤하게 들릴 만큼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푹 빠져 있었다.

맹목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었다.

“폐하와 살롬은 계약 마법으로 묶인 관계라면서요.”

“계약 마법 따위로 날 막을 수 없다. 네이선이 그대를 건드리는 순간, 세드나 공작가와 황실의 계약은 끝이야.”

“저 때문에 700년간 이어진 계약을 끝내시겠다고요?”

“네이선이 허튼짓을 한다면 말이다. 전 영토가 피로 물들길 바라는 황제라면 죽어 마땅하잖아?”

네이선은 살로메디안과 유일하게 검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라고 했다.

그런데도 살로메디안은 자신만만했다.

대륙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최강의 사내.

그가 내 남편이라는 것이, 날 위해 황제도 무찔러 주겠다는 말이, 가슴 벅찰 만큼 든든했다.

너무 행복해서 무섭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였다.

“집사나 시종이 보이지 않네요? 마구간지기도 없었고.”

“모두 떠나라고 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왜요?”

“말했지 않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쉬게 해주겠다고.”

수발들어 줄 하녀도 없고, 요리해줄 주방장도 없는 곳에서?

요양이 필요한 사람에게 종일 승마를 시킨 것도 앞뒤가 안 맞잖아?

의문으로 가득 찬 별장에서 살로메디안이 질문을 바꿨다.

“시아. 배고픈가?”

“아까 먹은 비스킷이 소화가 안 됐어요.”

“그럼 가자.”

살로메디안이 가방을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급한 발걸음이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선물을 주려고.”

“무슨 선물이요?”

“내 소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상이다.”

원정 떠나기 전 살로메디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돌아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기다려줘. 그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날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생각만큼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은 내려야지.”

도대체 뭘 주려는 거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로메디안을 따랐다.

그가 별장 뒤편 협곡으로 이어진 오솔길로 향했을 땐 의아했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어둑어둑한 길을 걷자니 궁금증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괜한 질문으로 깜짝 선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도착했다.”

살로메디안이 멈춰 섰다. 그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 내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여긴… 온천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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