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50)

21

* * *

지하 대욕장. 우윳빛 대리석 욕조 안에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평소라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을 텐데, 오늘은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편치 않았다.

딱 알맞게 데워진 목욕물의 온기도, 뿌옇게 차오른 수증기의 감촉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목욕탕 안이라 살로메디안의 중저음이 크게 울렸다.

낮은 음성이 귀와 고막을 거치지 않고 심장으로 내리꽂히는 듯해서 어깨를 오그렸다.

살롬과 한 욕조 안에 있다니!

물론 같이 목욕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당돌하게도 내가 먼저 목욕을 청한 적도 있었다.

3주 동안 떨어져 있어서 낯설어진 걸까? 아니면 그가 심장을 바쳤다고 말해서?

입술을 앙다물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짝 굳어 있는 까닭은, 살로메디안이 바지 버클을 푸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다 벗은 거지? 태초의 순수한 모습 맞지?!

살로메디안의 알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미친 말처럼 날뛰었다.

리넨 천으로 가리고 있긴 하지만, 나 역시 알몸이었다.

그 사실이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비워냈다.

빈자리엔 이상야릇한 분위기의 남녀가 차지했다.

그 남녀는 어쩐지 나와 살로메디안을 닮아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불편할 것 같은데.”

물결이 찰랑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다가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보기 싫은가?”

살로메디안의 말에 힘차게 도리질 쳤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뜨지 못한 채였다.

“진짜 보기 싫은 것 같은데?”

“보고 싶어요.”

“그럼 눈을 떠야지.”

누가 그걸 몰라요? 당신 알몸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렇죠!

발끈하지 못하고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때 따스하고 말캉한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

쪽,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살롬!”

붉은 눈을 부릅뜨고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그가 만족스럽다는 소리 낮춰 웃었다.

“이제야 눈을 뜨는군.”

이마에 닿았다가 사라진 감촉이 꿈결 같았다.

이마를 손끝으로 더듬는 날 보고 그가 짓궂게 물었다.

“아쉬우면 더 해줄까?”

화르르 얼굴에 불이 붙었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과감해졌어? 3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적극적인 살로메디안의 행동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웠다.

그 앞에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내가 답답했다.

살롬이 돌아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했는데.

같이 목욕하는 순간도 즐기지 못하고, 이게 뭐야?

역시 연습과 실전은 다른 법이었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으면 뭐 하나. 남녀 문제에 있어서는 영 숙맥인걸.

하지만 단언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 경험 부족이 아니라, 심장에 무리를 줄 만큼 잘생기고 부쩍 야해진 이 남자였다.

이대로 피할 수만은 없어! 당당하게 보는 거야! 닳는 것도 아닌데 아낄 필요 없다고!

용기 내어 욕조 위로 드러난 살로메디안의 상반신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처럼 넓은 어깨도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도 아니었다.

“살롬! 이게 웬 상처예요?”

그의 상반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짐승의 발톱 자국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톱처럼 무딘 날로 벤 듯한 상처도 있었다.

거의 아물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의 놀라운 치유력을 익히 알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벌레에 물린 것뿐이다.”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화제인지 살로메디안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 재생이 안 된 거죠? 살점이 불탔을 때도 금방 나으셨잖아요?”

“피곤해서 그렇다.”

“피곤한 사람이 수백 마리의 마물한테 마력 비를 뿌려요?”

“…….”

“솔직히 말해보세요. 살롬의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내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로메디안이 난감하다는 듯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말해주고 싶지만 나도 잘 모른다. 처음 겪는 일이라서.”

“살롬은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몸이잖아요. 다음 대 세드나 공작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랬지.”

“그런데 이 정도 상처도 완전히 재생되지 않는다고요?”

“…….”

“뭔가 잘못된 거예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주먹을 움켜쥔 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때문이에요. 살롬의 치유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도, 이름 모를 마물이 날뛰는 것도요.”

“그 무슨…….”

“살롬도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모든 게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요.”

석류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 안에도 물결이 일었다.

“마신의 계약자가 사라져서 모든 것이 불안정해진 거예요. 제가 살롬의 심장을…….”

차마 훔쳤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을 바쳤다는 그의 말이 퇴색해 버릴까 봐.

훔쳤든 바쳤든 대륙에서 유일한 쌍 속성은 사라졌다. 700년간 이어진 마신의 계약이 깨진 것이다.

초대형 럼블크가 튀어나오고, 공작저가 마물 떼의 습격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야. 살롬이 치유력을 잃은 것도…….

살로메디안이 평범한 사람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심장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이미 그의 심장과 내 심장이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내 심장을 빼앗아봤자 아무 소용없다고도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려드리겠습니다.」

계약 마법을 걸 때 한 말이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작저를 떠날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아쿠아로드를 떠나면서 나는 가족을 버렸다.

새로운 친구, 가족, 동료, 모두가 이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살로메디안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심장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외면했다. 얼른 내놓으라고 추궁당할까 늘 불안했다.

심장을 돌려주면 우리의 계약 결혼도 끝이 나고 말 테니까.

정말 최악이구나, 아이시아. 살롬과 제국이 위험해졌는데도 모른 척한 거야. 이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살로메디안과 나누었던 계약을 기만했다.

그가 내게 심장을 바쳤다고 말했을 때, 하늘에서 구원의 빛이 내려오는 듯했다.

더는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영원히 세드나 공작부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튼 것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살로메디안과 공작령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울 테고, 천국은 지옥으로 뒤바뀔 거였다.

“그대 때문이 아니다, 시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이번에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고, 뻔한 거짓말에 위로받는 내가 부끄러웠다.

“지어낸 말이 아니다. 이 일은 전부 내가 자초한 거야.”

“제가 심장을 훔치지 않았다면…….”

“그대는 훔치지 않았다.”

“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아…….”

살로메디안이 눅진한 한숨을 토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담긴 후회는 무슨 의미일까.

“솔직하지 못하셨다니요?”

“내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한 거야. 그대가 내 심장을 훔쳤다고.”

살로메디안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거짓말이라고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되물었다.

그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과 믿을 수 없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살로메디안이 간단한 문제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마력 각성도 하지 못한 그대가 어찌 세드나 공작의 심장을 훔치겠는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장담하건대 저는 각하의 심장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훔칠 재주도 없고요.」

그가 심장을 통해 내 감정을 읽고, 혼잣말을 듣는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와 함께할수록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특별했다.

타인과 닿으면 구역질하는 내 몸도 오직 살로메디안만큼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불의 마력이 깨어났고, 넘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마력 폭주를 일으켰다.

모두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테레사가 사용한 마도구 때문에 그날의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망각의 늪 밑으로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어설프게나마 몇몇 조각을 떠올렸다. 그중엔 불에 덴 듯 뜨거운 장면도 있었다.

“살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똑똑히 기억하는 것도 있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겨우 말했다.

예상 밖의 이야기에 살로메디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작 말했어야 했다.

이성을 잃은 석류빛 눈동자와 날 떼어내려 했던 그의 손길을.

굶주린 짐승처럼 살로메디안에게 달라붙던 내 모습을 말이다.

“제가 이성을 잃고 살롬을 덮… 쳤잖아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호흡이 가쁘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다고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절 위해 거짓말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살롬의 심장을 잡아먹은 거예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살로메디안이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그 뒤엔?”

“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는가?”

멍하니 벌어진 눈동자를 도르륵 옆으로 굴렀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야? 그 뒤에 무슨 일이 또 있었다고?

살로메디안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 알지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 못 쓴다, 시아.”

“우리 둘 사이에 또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내가 기억하지 못한 ‘무언가’가 ‘또’ 있다고 생각하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내 기억을 지운 테레사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파르르 떨리는 내 속눈썹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씩 웃었다.

몇 번이나 날 푹 빠지게 만들고, 그래서 헤어날 수 없게 한 황홀한 미소였다.

오늘따라 등골이 오싹하긴 했지만.

“그대는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

“그게 뭔데요?”

살로메디안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물었다.

“말은 먼저 꺼내놓고 왜 안 알려주세요? 궁금해서 미치는 꼴 보고 싶으세요?”

“바바라 때문에 말버릇이 험해졌어. 그러게 녹색 소악마랑 어울리지 말라니까.”

“말 돌리지 마세요!”

“…뭐 별거 없었다. 그대가 내 심장을 빨아들이는 걸 허락해줬을 뿐.”

“허, 허락이라고요?”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절대 심장을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 잘못이 아니라고 한 거야.”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꾸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 같기도 했다.

살로메디안의 말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었지만, 뭔가 숨기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비밀이 담겨 있었다.

살롬은 테레사의 암살 미수 사건을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했어.

심장을 훔쳤다는 걸 인정하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혹시 다른 의미였나?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살로메디안은 정말 거짓말을 했던 걸까?

만약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쁘게 그의 말을 믿었을 거였다.

살로메디안의 손에 심장이 뜯겨 죽었던 그 경험이 없었다면 말이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했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려 할수록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 전체를 쪼아댔다.

“읏.”

“괜찮은가?”

“그냥 두통이에요.”

“또 후유증이로군.”

살로메디안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테레사를 향한 살의가 그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왔다.

“디에고가 후유증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덜떨어진 약골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뛰어난 마도사라고 데려온 건 살롬이잖아요.”

제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살로메디안은 방어적인 자세로 팔짱 꼈다.

나는 사라진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은 천재 마도사 디에고뿐이었다.

“디에고에게 절 살펴보라고 할게요.”

“절대 안 된다.”

“왜요?”

“그대 몸에 더러운 사내놈의 손이 닿게 할 수 없으니까.”

살로메디안이 힘주어 말했다.

관자놀이에 힘줄이 부푼 것으로 보아 어떤 장면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살롬이 날 살필 때도 몸을 만졌지. 나는 첫날밤을 치르자는 소리인 줄 알았고.

불과 몇 달 전인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살로메디안과 함께한 시간이 쌓였다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찰일 뿐이잖아요.”

“다른 사람과 닿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구역질할 텐데?”

“아쿠아로드에 있을 때는 매번 참았는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로메디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테레사는 꼭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다.”

“아직은 안 돼요.”

“또 아쿠아로드 백성들 때문인가?”

살로메디안의 인상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테레사를 살려두는 날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대는 아쿠아로드인도 아니고, 그 빌어먹을 나라의 왕세녀도 아니다. 내 아내지, 제국의 공작부인일 뿐. 내 말이 틀리나?”

“…….”

“아직도 아쿠아로드에 미련이 있다는 건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욕조에 담긴 머릿결이 흔들리며 동심원을 그렸다.

동심원 사이로 우울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아뇨. 제가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그래요.”

내 대답에 살로메디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대가 진짜 이기적이었으면 백성들을 외면하고 복수부터 했을 거다. 그럴 만한 신분과 권력이 있으니까.”

“살롬이랑 공작저 분들은 제가 얼른 복수하길 바라죠.”

“단 한시도 그대를 학대한 자들을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해야지.”

테레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투였다.

“그래서 제가 이기적이란 거예요. 소중한 사람들의 뜻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리니까요.”

“시아.”

“피바람을 일으켜 테레사를 숙청하면 후련하겠죠. 하지만 뒤는 누가 책임지죠?”

내가 곧은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응시했다.

그도 내 걱정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테레사는 저와 제 어머니를 숙청하고 병든 국왕 대신 권력을 틀어쥐었어요.”

“그 여자가 죽으면 숨죽이고 있던 귀족 나부랭이들이 날뛰겠지. 텅 빈 왕좌를 차지하려고.”

“아쿠아로드는 내전에 휩싸일 거예요. 제국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면 백성들이 수탈당할 테고요.”

“…….”

“아쿠아로드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살롬을 말리고 테레사의 악행을 방치하는 거예요. 참 이기적이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살로메디안이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물에 젖은 두 몸이 맞붙으면서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그대가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 해도 그 말엔 동의할 수 없어.”

“살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을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것도 할 수 없는데…….”

살로메디안이 안타까움을 담아 두 팔에 힘을 줬다.

날 아끼는 그의 진심이 촘촘히 박힌 말이었다.

덕분에 이번엔 좀 더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얼른 상처를 치료하세요. 그것도 살롬이 잘하는 일이잖아요.”

“그대 뜻대로 하지.”

그 말과 동시에 살로메디안의 손이 내 턱을 위로 올렸다.

파드득, 떨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나를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대욕장을 꽉 채웠다.

“시아. 이번 상처는 깊어서 치료가 필요하다.”

그가 내뱉는 목소리의 색채가 달라졌다.

우리를 둘러싼 달달하고 간질간질하던 공기의 질감도 끈적하고 미끈거리는 쪽으로 뒤바뀌었다.

만약 공기가 색을 지녔다면 대욕장은 온통 매혹적인 장밋빛으로 물들었을 거였다.

어색함을 감추려고 질문을 던졌다. 아무 소용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치료사 불러드릴까요? 생니콜 자작령에서 빌려올 수 있는데.”

“날 고칠 수 있는 치료사는 오직 그대뿐이다.”

그리고 왈칵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내 전부를 가져간 남자를, 모든 걸 내주더라도 소유하고 싶은 남자를 거부할 수 있을까.

“으음.”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며 날 점령해 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영혼을 빨아들일 것처럼 뜨거운 숨결이 밀려왔다.

내 허리는 활처럼 휘었고,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은 잘게 떨렸다.

빈틈없이 밀착된 입술 사이에서 이상야릇한 신음이 흘러나갔다.

“으으읏…….”

나는 살로메디안에게 매달려 가쁜 숨을 토했다.

더운 호흡이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내 숨결을 빨아들이고 음미했다. 나 역시 그의 숨결을 놓치지 않았다.

달고 부드러웠다. 동시에 뜨겁고 격정적이었다.

욕조 안에서 나누는 키스는 보통의 키스보다 농밀할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욕조 속은 풍랑이 일 듯 거세게 물결쳤다.

살로메디안은 날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나도 그와 아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됐다는 충만함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알몸을 가린 리넨 천이 흘러내리는 줄도 미처 알지 못했다.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 전까지.

* * *

부왕의 병세가 심해졌다.

생각보다 빨리 죽지 않아서 테레사의 애를 태웠지만, 늙은이가 시체처럼 누워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병든 아비를 대신해서 국가를 이끄는 왕세녀 이미지는 국제 사회에서 이름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왕국의 대소사는 모두 테레사가 결정했다. 귀족들도 테레사의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대관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테레사는 아쿠아로드의 국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쥐방울만 한 나라의 국왕으로 만족할 줄 알아?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쿠아로드는 시작일 뿐이야.”

서류에 옥새를 찍으면서 테레사가 중얼거렸다.

장밋빛 미래가 손에 잡힐 듯 어른거렸다.

이럴 때 아이시아를 가지고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문 도구로 가득 찬 비밀 방을 노려보다가 테레사가 입술을 씹었다.

도망친 개를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자존심을 긁어댔다.

본이 체포된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피에타가 실패한 건 좀 실망스러웠다.

‘날 닮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쁘장한 외모에 치유 마력을 가진 소녀.

눈치 빠르고 영특한 아이는 쓸모가 많았다.

장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피에타처럼 유용한 패가 많아야 했다.

하지만 피에타는 계약 마법을 어겼다. 감히 테레사를 배신한 것이다.

‘어차피 죽었겠지만, 용서할 수 없어. 시체라도 가져와서 개 먹이로 던져주기 전까지!’

테레사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옥새를 만지작거렸다.

순간 국왕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레사! 네가 그 애들을 죽였다면서?”

왕비는 오늘도 구역질이 치밀 만큼 천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치맛단에 꽃분홍색 리본이 주렁주렁 달리고 보석과 프릴로 소매를 부풀린 드레스라니.

갓 사교계에 데뷔한 졸부의 딸도 이따위 싸구려 드레스는 고르지 않을 거였다.

“어마마마. 제발 체통에 맞는 의복을 고르시죠?”

“내 옷차림에 간섭하지 말아라! 다른 건 다 네 뜻대로 해도, 옷은 내가 원하는 대로 입겠다고 했잖아?!”

왕비가 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번쩍이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건드리면 더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한숨을 내쉬며 테레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그저 충고였을 뿐이에요. 어머니라면 고상한 드레스도 잘 소화하실 테니까요.”

“정말이니?”

“물론이죠. 어머니의 특출난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해줄 거예요.”

입에 발린 말에 기분이 풀렸는지 왕비가 히죽거렸다.

“우리 딸의 충고를 고려해보마. 그런데 그 애들을 죽인 게 사실이니?”

“그 애들이라면요?”

“피에타의 어미와 동생들!”

다 알면서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했는지 왕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두껍게 바른 화장이 갈라지면서 자글자글한 주름이 드러났다.

‘비싼 드레스랑 보석을 처바르면 뭐 하나. 알맹이는 아직도 뒷골목 창녀일 뿐인데.’

테레사는 역겹다는 표정을 숨기고 절 낳아준 모친을 훑어보았다.

싸구려 잎담배 때문에 치아는 누리끼리했고, 입꼬리는 가슴만큼 축 처졌으며, 고래 뼈 코르셋으로도 뱃살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젊었을 적엔 국왕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딸의 원대한 계획을 도울 정도의 머리도 있었고.

하지만 왕비 자리에 앉혀 놨다고 없던 우아함이 절로 생길 리 없었다.

테레사가 국정을 완벽히 장악한 뒤부터 천박한 본색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왕비의 눈이 옆으로 찢어졌다.

테레사가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마마마야말로 제 앞에서 너무 나대시는 거 아니에요?”

“테레사!”

“어머니라고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내가 널 위해서 무슨 짓까지 했는데?”

왕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지긋지긋한 레퍼토리를 꺼냈다.

“너 혼자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착각하면 곤란해! 내 공을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다! 내가 없었다면 너는…….”

“그만.”

테레사가 한쪽 손을 올렸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두 눈에서는 찌를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가 옛날이야기 싫어한다는 거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테, 테레사?”

“탈출한 장난감 때문에 심기도 불편하고, 나랏일 때문에 정신도 사나운데. 어마마마까지 절 괴롭히시네요?”

“그럴 리가 있겠니… 난 그냥…….”

“제가 누굴 죽이든 어머니가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대답하지 못하고 왕비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제 딸이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걸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무, 물론이지. 내가 어떻게 우리 딸을 거스르겠니?”

“…….”

“하지만 피에타의 어미는 내 소꿉친구고… 피에타랑 그 동생들은 너의…….”

어머니의 말을 자르며 테레사가 도끼눈을 떴다.

“뒷골목이 그리우세요? 부두 일꾼들이 던져주는 동전에 몸 팔던 시절이?”

“테레사!”

창백하게 질린 왕비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공을 운운하며 콧대를 세우지 못했다.

테레사가 꽃잎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잊지 마세요.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낸 신사가 인생을 바꿀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 준 것도, 부둣가 창녀 따위를 왕비로 만들어준 것도 저라는 걸.”

“…….”

“뒷골목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잊으셔도 좋지만요.”

테레사가 왕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늘게 웃었다.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에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왕비가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제 딸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나까지 죽이려는 건 아니지? 응, 그렇지?”

“글쎄요.”

“넌 내가 낳은 아이야! 네가 마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남자를 잘 골라서……!”

“엄마, 닥쳐요!”

테레사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머니의 수다스러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더 떠들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출생에 관한 비밀이라면 더더욱.

“가서 보석 쇼핑이나 하세요. 용돈은 듬뿍 드릴 테니까.”

“하지만 테레사, 그 애들은…….”

“궁금해하시니 알려드릴게요. 피에타의 어미와 동생들은 처형했어요.”

“뭐라고?!”

“피에타가 계약 마법을 어겼어요. 비밀을 토설했다고요. 피에타가 죽었으니 그 가족이 대신 벌을 받는 게 당연하잖아요?”

테레사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왕비는 대답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왕비의 귓가에 테레사가 속삭였다.

“어머니도 입조심하세요. 제가 어머니 몰래 계약 마법을 걸어놨을지도 모르니까요?”

“꺄아아악!”

왕비가 날카롭게 비명을 내지르며 널브러졌다.

비명을 듣고 시종들이 몰려왔다.

“왕비마마!”

눈시울을 주무르며 테레사가 손짓했다.

“내 눈앞에서 치워.”

“네엣?”

“못 들었어? 어마마마를 침실로 모시라고!”

“알겠습니다, 왕세녀 전하!”

그제야 시종들이 빠릿빠릿 움직였다.

왕비를 부축해서 떠나는 시종들 뒤로 테레사가 경고했다.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방해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예!”

국왕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테레사가 왕궁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진 연구실로 향했다.

마력 훈련과 마도구 실험을 겸하는 연구실은 오직 테레사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이중, 삼중의 자물쇠와 비밀 보안 마도구가 걸려있는 연구실에는 빛 한 점 스며들지 못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테레사가 하늘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북북 긁었다.

“제기랄! 간지러워 죽겠네!”

오늘따라 간지러움이 극성이었다.

부작용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약을 더 자주 써야 했다. 들킬 염려는 없지만 퍽 성가신 일이었다.

테레사가 벽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유리병 속엔 푸른색 물약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두피에 치덕치덕 발랐다.

가려움이 잦아들면서 테레사의 머릿결이 더욱 아름다운 하늘색으로 반짝거렸다.

“효과는 좋은데 부작용이 거지 같단 말이야!”

빈 염색약 병을 바닥에 내던지며 테레사가 짜증 냈다.

그랬다. 아쿠아로드 왕족의 상징인 하늘색 머리칼은 염색약으로 만들어진 거였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제 테레사 자신과 왕비밖에 남지 않았다.

* * *

아이시아를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서 대욕장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침실로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아이시아는 살로메디안의 품에서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

수많은 마물을 죽이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력을 소진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 자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3주 만에 돌아온 남편 앞에서. 그리고 알몸으로.

살로메디안이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침대에 아이시아를 누이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깨지 않을까. 아이시아도 키스 그 이후의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을까.

살로메디안의 속도 모르고 아이시아는 쌕쌕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내뱉으며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쉽게 덮은 이불 위로 드러난 아이시아의 진주처럼 뽀얗고 매끈한 쇄골이 눈을 사로잡았다.

살로메디안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겨우 잠재운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 것만 같았다.

대욕장에서 봤던 광경이 어른거릴 때마다 살로메디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고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리도록.

머리에 피가 몰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시아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니.

스스로도 경탄할 만한 인내심이었다. 가끔은 철인과 같은 인내심이 원망스러웠다.

한번 발동 걸린 본능이 가라앉지 않을 때는 더더욱.

“부인께서 시키신 일이나 해야지. 하아…….”

아이시아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녀가 깨어나기 전까지 치료를 마치고 싶었다.

사실은 아이시아가 지적하기 전까지 상처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평소라면 순식간에 아물었을 상처였다.

이번엔 달랐다. 치유하려고 애써도 불그스름한 상처는 그대로였다.

살로메디안이 제 몸뚱이에 남은 사소한 흠집들을 골똘히 바라봤다.

아이시아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죽음마저 비껴갈만큼 완벽한 살로메디안의 몸이 균형을 잃은 것이다.

잃어버린 심장 반쪽 때문에.

아니, 사랑하는 이에게 바친 제물 때문에.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걸까?

균형을 되찾기 위해 아이시아의 심장을 꺼내오기라도 하란 말인가?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차가운 비소가 걸렸다.

불사의 힘 따위, 잃어도 상관없었다.

그는 아이시아를 위해 살기로 했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들은 아이시아가 거슬려 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세드나 공작의 의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만 그럭저럭 해나간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원정에서 그는 최단 시간 동안, 전례 없이 광범위한 지역을 돌며 마물들을 해치웠다.

살로메디안이 흑룡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하면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떠날 때면 손을 흔들고 지역 특산물을 바치며 환송식을 벌였다.

수많은 원정을 다녔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살로메디안은 기사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빠짐없이 들었다.

「주무시지도 않고, 드시지도 않고 마물들을 쓸어버리신다며? 고귀한 황족님께서 제일 앞에서!」

「지상 최강의 기사란 말이 정말이더라고요! 공작 각하가 없었다면 우리 애들은 마물 먹이가 됐을 거예요!」

「아내에게 쩔쩔매는 애처가란 소문도 돌던데. 그게 사실일까?」

「정말요? 어휴, 자상하기도 하셔라!」

그저 아이시아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인데 평판이 좋아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살로메디안의 원정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아쿠아로드 백성들 때문에 복수를 미루는 아이시아.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누구보다 먼저 배려하는 아이시아.

그녀와 함께하다 보니 말발굽으로 감자밭을 짓밟을 수 없게 됐다.

독성이 남은 마물 시체를 백성들에게 치우게 할 수도 없었다.

더 번거롭고 느리더라도 아이시아가 좋아할 행동을 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도 그리 기쁠 것은 없었다.

모두 아이시아 덕분이었으므로, 그 칭송은 아이시아가 받아야 마땅했다.

살로메디안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살로메디안이 무심하게 답했다.

“들어와라, 빈센트.”

정갈하게 몸을 씻고 새 단복으로 갈아입은 빈센트가 경례를 붙였다.

다소 야위기는 했지만, 흙먼지를 씻고 나니 빈센트의 단정한 외모가 한층 빛을 발했다.

다부진 표정에서 어엿한 지휘관의 위엄도 조금씩 엿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살로메디안의 신경을 긁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면 왜 와? 아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낼 시간 아닌가?”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물었다.

훤히 드러난 주군의 상반신을 보면서 빈센트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왜 혼자 계십니까, 각하.”

“시끄럽다. 네놈이 티 내지 않아도 바바라와 피를 나눈 남매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끔찍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용건을 말해라.”

“반역자가 죽기 직전입니다. 어찌할까요?”

빈센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말한 반역자는 본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시아를 납치하려 했던 개자식.

테레사와 내통한 첩자.

그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휴고에게서 낱낱이 보고받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악마의 도끼’라 불리는 휴고가 몇 날 며칠 매달렸으니 제발 죽여달라는 말을 수천 번도 더했을 게 뻔했다.

“마약에 중독되었다지?”

“예. 고문하지 않아도 마약 후유증으로 곧 죽을 겁니다.”

“그 여자답군. 하찮은 기사 때문에 대륙 재판소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피오넬이란 아이의 뒷조사도 끝났습니다.”

빈센트가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냈다.

“제 누이가 멀쩡한 루트로 알아볼 때는 드러나지 않던 정보입니다.”

“바바라가 또 악독한 수를 쓴 모양이군.”

만족스럽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빈센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지요.”

“이래서 바바라를 자를 수가 없다니까.”

“본명은 피에타. 천민이라 성은 없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검은 돌다리라는 빈민가입니다.”

빈센트의 보고를 들으며 살로메디안이 일인용 소파에 몸을 기댔다.

브랜디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입가로 옮기며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 후보생이 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동생 둘과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둣가 매춘부였고, 아버지는 떠돌이 신관이었던 모양인데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떠돌이 신관이 뭐지?”

“신전에서 내쫓긴 신관을 그리 부른답니다.”

“계율을 어긴 신관과 매춘부라. 특이점은 없나?”

“있습니다. 테레사의 친모인 브리니티 왕비 또한 검은 돌다리 출신 매춘부였다고 합니다. 피에타의 어미와 절친이었고요.”

“그 여자는 고급 창부였다고 들었는데?”

왕족과 귀족을 상대하는 고급 창부와 빈민가 매음굴을 전전하는 매춘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급 창부 중에는 몰락한 귀족 영애도 있었다.

평민이 더 많았지만, 최상급 고객을 상대할 만한 몸가짐은 갖춰야 했다.

살로메디안이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왕비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주한 사람 중 가장 천박한 여인이었으므로.

“검은 돌다리에서는 꽤 유명했답니다. 미모보다 방중술로요.”

“아쿠아로드 국왕이 참 고상한 취미를 가졌어.”

아이시아의 아비를 떠올리며 살로메디안이 구역질을 삼켰다.

그런 돼지 밑에서 아이시아처럼 고귀한 여인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보원에 따르면 방중술에 마력을 이용한 것 같다더군요. 천민 중에서도 가끔 마력을 가진 자가 있으니까요.”

“창의적인 매춘부로군.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국왕과 브리니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것이 테레사입니다.”

빈센트의 말에서 미묘한 틈새를 발견한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알려졌다? 테레사가 국왕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가?”

“테레사의 밝은 하늘색 머리칼과 물의 마력은 아쿠아로드 왕실의 상징이지요. 하지만 출생이 미심쩍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

“브리니티가 국왕의 정부로, 그녀의 딸이 혼외자식으로 인정받은 건 테레사가 8살 무렵입니다.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면 왜 바로 왕궁으로 안 갔을까요?”

“검은 돌다리에서 어린 테레사를 봤다는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브리니티는 자신의 천한 출신 때문에 아이가 살해당할까 봐 숨어 키웠다고 했다더군요.”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국왕의 비호 아래로 들어가는 편이 안전했을 테니까.

“그 시기에 묘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떠돌이 신관이 매춘부 하나를 훔쳐서 달아났다는 소문입니다.”

“!”

“그 신관의 머리칼이 특이하게도 짙푸른 색이었다고 합니다.”

살로메디안이 크리스털 잔에 남은 브랜디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푸른색 머리칼은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혼혈 중에 청람색이나 짙은 남색 머리칼을 지닌 이가 있긴 했지만, 그 또한 매우 드물었다.

푸른 머리칼의 신관과, 국왕과 하룻밤을 보낸 매춘부.

매춘부는 국왕의 정비가 되었고, 그녀의 딸인 테레사는 왕세녀가 되었다.

매춘부 절친의 딸이 짙은 남색 머리칼과 치유 마력을 가진 것이 과연 우연일까?

고작 11살짜리 계집애가 테레사의 명령을 받고 세드나 공작저에 숨어든 것도?

살로메디안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에타와 그 가족은 3년 전에 갑자기 살림이 넉넉해졌습니다.”

“테레사가 은혜를 베풀었군.”

“피에타는 테레사의 명령에 따라 신관 후보생이 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신전에 가는 걸 무척 싫어했다더군요.”

“계약 마법이 발동된 이유가 뭐라고 했지?”

“피에타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공작부인과 본만이 압니다.”

“당장 알아보도록 하지.”

살로메디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빈센트가 당황해서 물었다.

“공작부인을 깨우시려는 겁니까? 많이 피곤하실 텐데 내일 물으시는 편이…….”

“누가 내 아내를 깨운다고 했나?”

살로메디안의 입가가 기분 좋게 휘어 올라갔다.

빈센트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반역자는 죽기 직전입니다.”

“숨은 붙어있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됐다. 앞장서라, 빈센트.”

살로메디안이 실내용 로브를 어깨에 걸쳤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각하.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주둥이를 움직일 수 있게 치유할 거다. 그리고 다시 고문할 거야.”

오랫동안 기다린 여름 휴가 계획을 말하는 사람처럼 살로메디안이 미소 지었다.

아이시아를 해치려던 범인을 직접 단죄한다는 생각만으로 묵은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했다.

빈센트가 황급히 주군을 말렸다.

“황족의 치유를 받은 자는 함부로 처형할 수 없습니다!”

“쓸데없는 국법은 뭐 하러 신경 쓰나? 너와 나만 아는 사실이거늘.”

“하오나, 각하…….”

“황족의 은혜를 받은 놈이라도 반역죄를 저지르면 처형할 수 있다. 네 입으로 본을 뭐라고 불렀는지?”

“반역자입니다.”

짓눌린 목소리로 빈센트가 대답했다.

정답이라는 듯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반역자를 만나러 가자. 밤이 짧다.”

살로메디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감옥에서는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날이 밝자 빈센트가 피로 물든 자루를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자루는 소각장에 던져졌다. 그 안에는 본이라 불렸던 고깃덩어리가 몇 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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