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3권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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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이 입을 열었대요?”
아이시아가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바라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아기 토끼처럼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귀여운데, 유능하고 선량하기까지 한 공작부인이라니!
아이시아를 모시는 최측근 집사라는 자부심이 바바라를 가득 채웠다.
황제의 집사 자리를 언니 바넷사에게 양보하고 세드나 공작령으로 온 보람이 이제야 생긴 거였다.
“근성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시아가 태워버린 다리를 1cm씩 도려내니까 입을 열더래요. 큭큭.”
재미난 이야기를 해줬는데도 아이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좀 유치한가?
자고로 고문썰은 잔혹하고 상세해야 듣는 맛이 있는 건데.
아이시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바바라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살살했대요. 손톱이랑 이빨 뽑고, 잇몸에 구멍 내고… 그런 간단한 손장난? 한솥밥 먹던 사이라 좀 망설였나 보더라고요.”
“아, 예…….”
“시아를 납치하려던 놈한테 자비를 베푼 거죠! 서운하겠지만, 이해해주세요. 다음부터는 제대로 한 모양이니까요.”
바바라는 본을 고문한 기사들의 성실함을 하나씩 나열했다.
‘두피를 벗겨 상처에 소금 뿌리기’와 ‘관절에 못 박고 비틀기’ 등을 묘사하자 아이시아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바비.”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충분히 들었어요.”
쳇.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한쪽 눈알에 지진 송곳을 꽂는 내용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바바라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본은 아쿠아로드 왕세녀 테레사의 명령에 따라 시아를 납치하려던 범행 일체를 자백했어요.”
“언제부터 내통한 건가요? 본은 부기사단장 후보가 될 만큼 유능했다면서요.”
“그 여자가 시켜서 흑룡에 입단한 거래요! 천하의 흑룡이 첩자랑 친구 먹은 거죠. 돈만 축내는 똥멍청이들.”
“…….”
“본이 암살자였다는 건 시아도 아시죠?”
“네.”
“5년 전 테레사의 의뢰로 엄청난 인물을 암살했대요. 그래서 아쿠아로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대요.”
“유력인 암살이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가짜 예언서가 등장하던 즈음이긴 했지만요.”
기억을 더듬는 듯 아이시아가 미간을 모았다.
사랑스러운 공작부인이 괴로운 시절을 떠올릴까 봐 바바라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인물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했어요. 계약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더라고요.”
“피오넬이 당했던 것과 같은 종류인가요?”
“맞아요.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기는 계약 마법이래요.”
아이시아의 고운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피오넬이란 꼬마 악녀를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꼬마 첩자를 살리기 위해 애쓴 아이시아를 생각하니 바바라는 가슴이 먹먹했다.
“치료 신관이 다녀갔으니까, 곧 회복할 거예요. 에메랄드 린삼도 듬뿍 먹였고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망할 신관이 시아도 치료해주면 좋을 텐데! 건방진 신관 나부랭이가 감히 황족 치료를 안 하겠다고 지랄을……!”
바바라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아이시아는 피오넬을 치료하기 위해 이웃 영지에서 치료 신관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생니콜에서 아쿠아로드 출신 치료 신관을 찾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신관이 도착한 후였다.
피오넬의 치료가 끝난 후에 아이시아의 상처도 보라고 했다.
그런데 신관 나부랭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아이시아에게 신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저주받은 폐왕녀를 치료했다간 신에게 버림당할 거라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었다.
‘거지 같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시아에 대한 가짜 예언이 떠도는구나! 그러니 테레사 따위에게 지배당하지!’
바바라가 떠올린 방법은 딱 하나였다.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아쿠아로드를 정벌해야 해요!”
“진정하세요, 바비.”
“절대 진정 못 해요. 시아를 납치하려 한 데다가 첩자까지 심고! 시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계속 부풀려지고 있잖아요!”
“가짜 예언서라는 증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죠. 한 번 심어진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아이시아가 시선을 내리깔고 읊조렸다.
그것도 잠시, 바바라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 찰과상은 밥만 잘 먹어도 나아요. 제가 잘 아니까 신관을 탓하지 말아요.”
상처에 익숙하다고 말하는 아이시아가 애처로워서 바바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 동요 없이 말간 그녀의 얼굴도 바바라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시아는 짜증 나지 않으세요?”
“짜증 나죠.”
“복수하고 싶진 않으세요?”
“하고 싶어요. 꼭 할 거고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이시아가 답했다.
바바라가 움찔할 정도의 강한 기세가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는 바비가 생각한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절 매도하고 어머니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자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시아.”
“하지만 성급하게 움직일 순 없어요.”
“흑룡기사단이 출정하면 하루 만에 테레사 일당을 무찌를 수 있어요.”
바바라가 아이시아를 설득했다.
공작령의 구세주인 공작부인이 명령하면 흑룡기사단은 목숨을 걸고 아쿠아로드 왕궁을 짓밟을 것이었다.
마도구로 무장한 왕국이니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드나 공작부인 납치 미수’는 나라를 멸망시켜 마땅할 중죄였다.
아이시아가 힘없이 고개 저었다.
“테레사는 아쿠아로드 백성들을 인질로 삼고 도망칠 거예요.”
“아쿠아로드인들이 그렇게 소중해요? 그들은 시아를…….”
모욕하고 버렸잖아요.
차마 뒷말을 이을 수 없어서 바바라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시아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를 저주의 씨앗이라 믿고 있죠. 국운이 기우는 것도, 가뭄이 드는 것도, 돌림병이 도는 것도 다 저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고요.”
“…….”
“그들의 무지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어요.”
바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시아의 뒤로 찬란한 후광이 드리워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밤하늘로 짠 비단처럼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과 붉은 별을 박아 넣은 듯 빛나는 눈동자.
몸짓 하나하나에 신의 작품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촘촘히 배어 있었다.
“시아는 천사예요. 신이 내려보낸 성녀가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고요!”
“그냥 겁쟁이죠. 저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자신이 없는.”
아이시아가 멋쩍다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그 모습조차 성화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고결하고 우아했다.
‘폐하께서 황후감으로 탐내실 만해. 시아처럼 아름답고 아량 넓은 분이 어디 있겠어? 물론 절대 폐하께 빼앗기지 않겠지만.’
그런 면에서 살로메디안은 꽤 쓸 만한 아군이었다.
오랜만에 주군의 쓸모를 확인하면서 바바라는 아이시아에게 평생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저도 복수를 도울게요! 부디 함께하게 해주세요!”
“고마워요, 바비.”
“하지만 테레사를 대륙 재판소에 제소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바바라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아이시아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전쟁 없이 테레사의 죄를 물으려면 대륙 재판소를 통해야 했다.
전 세계 대표 법관들이 모인 대륙 재판소는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정했다.
하지만 재판관들이 대륙법에 따라 늘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었다.
“대륙 재판소는 크로티무스 제국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죠?”
“확실한 증거 없이 고소하면 역풍을 맞을 거예요.”
“본의 자백이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뭐죠? 혹시 마약인가요?”
아이시아의 물음에 바바라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시아의 현명함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본이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본을 고문하고, 조사한 휴고도 조금 전 알아낸 사실이었으므로.
“우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간단해요. 테레사가 본을 믿을 리 없으니까요.”
“그래도 마약이라고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본은 절 납치하기 위해 독을 뿌렸어요. 자기는 해독약을 먹었고요. 그 약은 테레사가 줬겠죠.”
“그런데요?”
“테레사는 본과 피오넬이 실패할 때를 대비했을 거예요. 그래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은 거죠.”
“마약에 중독된 인간의 증언은 채택되지 않을 테니까요?”
“납치에 성공했을 때도 쓸모가 있었겠죠. 마약 중독자에게 상을 줄 필요는 없잖아요?”
테레사의 악행과 그걸 예상한 아이시아의 지혜에 바바라는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아는 정말 천재네요!”
“만약 본이 피오넬에게 해독약을 나눠줬다면… 그 애는 영원히 중독자로 살아야 했을 거예요.”
“본의 배신이 피오넬을 살린 거네요.”
이런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바바라는 우연과 운명 사이의 틈바구니에 낀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운명을 지배할 실력을 갖춘 여인이 눈앞에 있다는 것.
바바라가 오래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시아는 어떻게 중독되지 않은 거예요?”
* * *
목욕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더 솔직해지자면 살로메디안을 그리워하다가 불현듯 생각났다.
“살롬은 날 치료해주는데. 나는 살롬을 치료해줄 수 없잖아.”
3주 동안 휴고와 특훈한 덕에 마력 불꽃 공격에 능숙해졌다.
휴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1:1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각하나 폐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휴고가 과장한 거겠지만, 마력 불꽃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와 바위를 태우고, 마물을 녹여버리는 건 너무 쉬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피오넬이 가진 치료 마력이 무엇보다 부러웠다.
살로메디안이 강하다는 것, 그가 엄청난 치유력을 가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가 스스로를 낫게 할 수 없을 때가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생각했다. 정말 불의 마력은 공격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하고.
“마물 시체를 태울 때 독성이 날아가잖아? 시체를 태우지 않고 독만 태울 수 있지 않을까?”
그날부터 휴고와의 훈련이 끝나고 홀로 연습했다.
몸은 피로했지만 길고 지루한 밤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훈련은 욕조 안에서만 했다.
물이 마력 폭주를 자제시켜 줬기 때문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독에 당했다는 걸 인지했을 땐 정말 해독시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고작 독 때문에 세드나 공작령을, 살로메디안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말을 되새기며 나는 몸 안의 독기를 태웠다.
「돌아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기다려줘. 그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건강한 모습으로 마중 나가고 싶었는데. 화장으로 가릴 수 있을까?”
침대에 누운 채 손거울을 비춰봤다. 얼굴에 난 생채기가 못마땅했다.
이 작고 사소한 상처를 보고 펄펄 뛸 살로메디안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의 미모가 뿌연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릿했다.
왜 보고 싶은 얼굴은 유독 기억나지 않는 걸까.
어머니 얼굴도, 살로메디안의 얼굴도.
그리움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아직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약해지면 안 돼, 아이시아. 너는 세드나 공작의 아내잖아. 지금은 네가 영지의 주인이야.”
두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뺨을 두드렸다.
세드나 공작령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영지가 위험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터지는 법이었다.
“공작부인, 큰일 났습니다!”
시종의 다급한 음성이 날 상념에서 깨웠다.
“무슨 일인가요?”
“마, 마물이! 아니, 마물 떼가 저택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공작저는 마신의 숲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지만, 마물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마물을 쫓거나 잡기 위한 덫과 마도구가 사방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마물들도 이곳까지 오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시종에게 물었다.
“어떤 종류의 마물인가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라고 기사단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사단장님은 어디 계시죠?”
“기사들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나도 곧 가겠어요!”
얇은 잠옷만 걸친 상태였지만 겉옷을 챙길 틈이 없었다.
“꺄아아악!”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울음과 함께.
* * *
해가 저물어 어둑해지고 있었다. 어둠의 지배를 받는 마물의 힘이 강해지는 시각이기도 했다.
“우끼이이!”
높은 금속성의 울음이 노을로 드리워진 하늘을 찢었다.
마물은 도마뱀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크기는 황소만큼 거대했고, 두 발로 서 있었다. 앞발에는 톱니 같은 길쭉한 손톱이 박혀있었다.
게다가 그 수는 얼핏 보기에도 수백이 넘었다.
새까맣게 밀려오는 도마뱀 마물을 보며 나는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온몸의 솜털이 거꾸로 서는 듯했다.
마신의 숲에 버려졌을 때의 공포가 내 발목을 붙잡고 진흙탕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노약자와 여성을 지하실로 대피시켜라!”
휴고의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몇 명 남지 않은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마물들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단장님, 마물이 너무 많습니다!”
“막아라! 공작부인께서 안에 계시다!”
목에 핏대를 세운 휴고가 기사들을 독려했다.
“너희는 대륙 최강 흑룡의 기사다! 목숨 바쳐 공작부인과 공작저를 지킨다!”
“우아아아!”
전열을 가다듬은 기사들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공작부인께 흉한 꼴을 보여드릴 수는 없지! 지옥 구경이나 해라, 이놈들!”
휴고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마물의 목이 떨어졌다.
도마뱀 마물의 초록색 피가 바닥을 적혔다. 무리들이 죽어가는데도 도마뱀들은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한 마리가 죽으면, 두 마리가 함께 공격했다.
그것도 소용없자 세 마리, 네 마리가 동시에 휴고에게 뛰어들었다.
그중 한 마리가 휴고의 두꺼운 어깨를 깨물었다.
“큽!”
휴고의 신음과 동시에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소중한 이가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본 까닭이었다.
반사적으로 표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내 얼굴에서 사라졌다.
나는 바늘로 찔러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을 뒤집어쓰고 싸늘하게 읊조렸다.
“휴고 님.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내 손에는 푸른 불꽃이 춤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날 발견한 휴고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공작부인?! 언제 나오신 겁니까?”
“방금요.”
“위험합니다! 어서 안으로 피하십시오!”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 이럴까. 휴고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내 걱정뿐이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 혼자 안전한 곳에 숨을 수 없었다.
나는 마신의 아내이자 세드나 공작부인이 아닌가.
“저도 함께 싸울 겁니다.”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죽더라도 공작부인만은 무사하셔야 합니다.”
“숨어서 내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요?”
“그게 공작부인께서 할 일이십니다!”
“아뇨. 제가 할 일은 이겁니다.”
나는 푸른 불꽃을 도마뱀들을 향해 쏘았다.
화염은 도마뱀의 비늘을 뚫고 들어가 내장을 태웠다. 도마뱀들은 기묘한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우끼익! 끼익!”
내 손에 고꾸라진 도마뱀을 밟고 휴고가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에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러려고 특훈하신 겁니까? 호신용으로만 사용하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휴고 님과 기사님들은 제 수족입니다. 수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니 호신용이지요.”
“공작부인!”
첫사랑에게 배신당한 사내처럼 휴고가 울상을 지었다. 그는 날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위험합니다! 제발 옥체 보중하십시오!”
보라색 넝쿨 계곡에 갔을 때보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런 말 할 시간에 도마뱀이나 해치우세요.”
“공작부인!”
“우리끼리 실랑이할 시간 없다고요!”
나는 앞장서서 끊임없이 불꽃을 만들어 도마뱀들의 심장에 겨누었다.
결과는 백발백중이었다.
“끼이익! 끼긱!”
매캐한 탄내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문제는 타죽는 도마뱀보다 숲에서 밀려오는 도마뱀이 더 많다는 거였다.
“나중에 각하께 고하겠습니다! 혼나셔도 책임 못 집니다!”
휴고는 나를 안전한 곳에 가둘 수 없어서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어린 딸을 사지로 내몬 아버지처럼 일그러져있었다.
휴고 님 죄송해요. 나중에 꼭 사과드릴게요.
또다시 속말을 삼키고 기사들을 향해 유쾌한 어조로 외쳤다.
“오히려 고마워할걸요? 제가 있는 한 도마뱀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요!”
“와아아아!”
사기를 올리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눈치챈 기사들이 응답하듯 환호했다.
그러나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도마뱀의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죽일수록 더 많아지는 듯했다.
얼마나 더 나올 거지? 이 많은 것들을 전부 해치울 수 있을까?
불길한 막막함이 심장을 거칠게 때렸다.
하지만 우리가 무너지면 공작저 사용인들 전부가 위험했다.
「검이나 도끼를 쓰는 것보다 불꽃을 쏘는 것이 빠르고 간단합니다. 하지만 실체화된 마력을 방출하는 건 신체에 큰 무리를 줍니다.」
휴고의 설명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러 번 들었지만 한 번도 실감한 적 없었다.
훈련 정도로 내 마력을 소진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넘쳐나는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해서 폭주하곤 했었다. 바닥날 때까지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끼이이익!”
도마뱀 한 마리가 불꽃을 피해 내 발목 쪽으로 접근했다.
마력과 체력이 떨어지면서 명중률도 떨어진 탓이었다.
“공작부인!”
휴고가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도마뱀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며 하늘로 솟구쳤다.
마력 불꽃을 쏠 때마다 깨진 독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몸 안의 기운이 빠져 나갔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휴고와 기사들도 점점 지쳐 갔다.
“크아악!”
기사 한 명이 종아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도마뱀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날아드는 까마귀 떼보다 그악스러웠다.
“안 돼!”
내 손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푸른 불덩어리는 주변을 녹일 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도마뱀 무리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기사는 구할 수 있었지만, 몸 안에 남은 한 방울의 마력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무릎에 힘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시아!
어디선가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또 죽을 때가 된 건가.
-아이시아! 얼른 와줘!
키산드라는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도 해도 키산드라를 도우러 갈 형편이 아니었다.
일어서기는커녕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없었으니까.
내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도마뱀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도마뱀이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끼기끽!”
“끼이이익!”
도마뱀들의 기름진 노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긴 주둥이에서 끝이 둘로 갈라진 혀가 날름 튀어나왔다.
잡아먹힐지도 몰라…….
죽음의 공포가 목 끝까지 엄습했다.
도마뱀들이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공작부인!”
휴고의 비명이 멀어졌다. 높은 이명과 함께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기다려줘. 그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시아.」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요. 살롬. 당신의 소원을 못 들어줄 것 같아요.”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그리운 이의 진짜 목소리와 함께.
“내 소원을 이렇게 무시할 작정인가. 시아?”
* * *
빗물이 눈에 들어간 것일까. 나는 뿌옇게 흐려진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살롬……?”
불신과 불안으로 살이 떨렸다. 살로메디안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현실일 리 없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는 공작저를 떠나기 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백금색의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었고, 턱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예의 고귀한 빛을 잃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꿈이라면 이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나도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꼭 끌어안지 않으면 그가 돌아왔다는 걸 실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롬!”
그를 부르자, 살로메디안이 더욱더 강한 힘으로 날 옥죄었다.
죽음의 공포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는 믿음이 날 가득 채웠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떤 방공호도 살로메디안만큼 안전하게 지켜주지는 못할 테니까.
“끼이익!”
“끼긱! 끼이이약!”
새까맣게 몰려든 마물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채우고 땅을 메웠다.
원정 때문에 지쳤을 법도 한데 흑룡기사단은 무서운 기세로 도마뱀들을 살육해 나갔다.
살로메디안의 마력 비를 맞은 도마뱀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했다.
“감히 우리 공작부인께 덤비다니!”
“우리 천사님 손에 더러운 피가 묻었잖아!”
“원정에서 죽인 것보다 더 많이 죽여주마, 마물놈들!”
공작저 안으로 들어온 도마뱀들은 거의 다 쓰러졌고, 남은 몇 놈들이 숲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도 기사들의 끈질긴 추격에 맥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것도 다른 세계의 일인 것처럼, 나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그 안에 찰랑찰랑 차오른 애틋함과 죄책감을 읽어 내며.
“예정보다 빨리 왔네요?”
“계획보다 일주일이나 늦어졌다.”
“한 달로도 부족한 원정을 2주 만에 끝내려고 했다고요?”
입술을 악다문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예년보다 더 많은 지역을 돌아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적선은 거지가 만족할 만큼 해줬다.”
살로메디안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달콤했다.
그래서 황제를 거지라고 칭하는 무례를 탓하지 못했다.
“빨리 와줘서 고마워요.”
“더 빨랐다면 그대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살롬 덕분에 살았어요.”
“그대를 구해주고 싶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해주기 싫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구해주려면 그대가 위험 속에 있어야 하니까.”
“네?”
내가 멍하니 되물었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던 살로메디안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답했다.
“나는 내 아내가 언제나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 있길 바라. 그대에게 마물 시체 따위가 나뒹구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제라도 못 보게 하겠다는 듯,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흡. 짧게 호흡을 삼키며 어깨를 튕겼다.
그의 손이 평소보다 차갑고 거칠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익숙한 체향 대신 흙먼지 냄새와 피비린내가 흘러나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여전히 낯선 열기가 피어올랐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가슴을 세게 조였다.
살로메디안은 다른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매만지듯 조심스러웠지만, 그 손길은 집요하게 나를 끌어당기며 그의 몸쪽으로 밀착시켰다.
마물 시체가 난무하는 전쟁터가 아닌 침대 위에서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뭐, 뭘 하려는 거예요?”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산뜻하게 답했다.
“지난 3주 동안 하지 못했던 것.”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3주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이 뭘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살로메디안이 되물었다.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제가요?”
“시치미 뗄 건가? 매일 밤 중얼거렸으면서.”
살로메디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정에서 돌아온 불패의 기사가 아니라 옆집 소녀를 놀리는 개구쟁이 같았다.
“설마!”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둔중한 통증이 엄습했다.
정신없이 바쁜 일정과 매일 짙어지는 그리움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내 혼잣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먼 곳에서도 제 혼잣말을 들었다고요?”
살로메디안의 옷깃을 붙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투로 답했다.
“그대가 아쿠아로드에 있을 때도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어. 심장으로 듣는 거니까.”
“!”
“내가 서두른 이유를 이제 좀 알겠나?”
아뇨.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대꾸도 못 하고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는 내게 살로메디안이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같이 목욕하고 싶다고 매일 밤 중얼거리는데. 당연히 서둘러야지.”
얼굴이 또 화끈 달아올랐다.
거울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귓바퀴는 물론 목덜미와 가슴팍까지 장미꽃잎 빛깔로 물들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욕망에 눈이 멀었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어쩌자고 혼잣말을 했지! 속으로 생각만 해도 충분하잖아!
과거의 나를 원망하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또 무슨 말을 했더라? 도대체 살롬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살로메디안을 사랑하는 것과 그에게 속내를 탈탈 털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농담으로 해본 말이라고 할까? 진짜 부부처럼 행동해야 하니까 일부러 해본 소리라고?
바짝 마른 입술을 뻐끔거리며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내게 도망칠 구석을 남겨두지 않았다.
“아 참, 한 침대를 쓰지 않길 다행이라고도 했지. 그랬더라면 혼자 견뎌야 하는 밤이 너무 외로웠…….”
“제발 그만 하세요!”
나도 모르게 고함쳤다.
마물 시체를 정리하던 기사들이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기사들에게 혼잣말한 걸 들키면 불타는 고구마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빵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목소리 낮추세요. 아예 입을 다무시면 더 좋고요. 아시겠어요?”
어금니를 깨물고 음산하게 읊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왜?”
“몰라서 물어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얼핏 억울함이 스쳤다.
장난치지 말라고 발끈하기엔 너무 진지한 얼굴이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이 남자는 여자의 속마음을 엿듣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나 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이해시킬 수나 있을까?
살로메디안이 연애도 처음, 결혼도 처음이라는 바바라의 말이 이제야 실감 났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끄럽잖아요…….”
“…….”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세요. 살롬은 안 부끄럽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살로메디안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이 남자가 정말!
발끈하려는데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휙 돌렸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군. 그대의 혼잣말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다시 말하지 않을 테니 새겨들으라는 듯,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
“심장 반쪽을 바친 덕분에 이런 행운을 누리게 됐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뺨도 은은히 달아오른 것 같았다.
나는 살로메디안의 수줍음이 아니라 달라진 표현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심장을 바쳤다고 한 거야? 도둑맞은 게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날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언제나 심장을 훔친 자였다.
패한 적도, 빼앗긴 적도 없는 남자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한 여자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그가 심장을 바쳤다고 했다. 그것이 행운이라고도 했다.
심장 반쪽을 내게 바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듯이.
해석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도둑이라는 쇠사슬에 묶여있던 심장이 이제야 자유롭게 박동하는 것만 같았다.
살로메디안과 내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걸까? 이혼 말고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을까?
뜨거운 희망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지저분하고 수상쩍은 남자가 다가오기 전까지.
* * *
이 남자는 뭐지?
나는 살로메디안과 다정한 시간을 방해한 남자의 남루한 행색을 살폈다.
키가 컸지만 어깨는 구부정했고, 구불거리는 갈색 곱슬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남자였다.
낡은 옷은 갈아입은 것이 언제였는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창백한 피부와 가느다란 팔다리로 보아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낯익었다.
“각하. 소인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당장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는데…….”
소심한 말투이긴 했지만 살로메디안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바쁜 거 안 보이나?”
불쾌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기운이 살로메디안의 온몸에서 물씬 풍겼다.
남자가 움찔 어깨를 튕기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 그래도 약속을 어기시면 곤란합니다. 도착하는 즉시 실험실을 마련해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제야 대충 묶은 곱슬머리와 우물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저 남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혹시 디에고예요?”
내 물음에 남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절 기억하십니까, 공작부인?”
그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서 놀란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델마의 하나뿐인 오빠를 어떻게 잊겠어요?”
“저희 남매를 잊으신 줄 알았는데.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디에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답했다.
“델마라면 그대의 호위기사였던 여기사 말인가?”
황당하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디에고의 정체를 모르고 데려온 모양이었다.
“맞아요. 디에고랑 무슨 약속을 하신 거예요?”
“쓸 만한 마도구 제작자라고 해서 초빙했다. 실험실을 만들어주겠다는 조건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고가 꿍얼거렸다.
“초빙은…? 거의 납치였는데… 실험실 만들어준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은 것뿐이고…….”
“출신도 확인하지 않고 반강제로 데려왔다고요?”
내가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투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저자의 과거가 아니라 실력이었으니까.”
쓸모 있으면 사소한 부분은 무시하는 면이 과연 살로메디안다웠다.
그저 알아보는 게 귀찮았던 것뿐일 수도 있지만.
마물들을 토벌하느라 바빴을 텐데 마도구 제작자를 찾아줬구나.
살롬이 영지에 도움이 됐다는 걸 알면 바비가 깜짝 놀랄 거야.
황제 호위기사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디에고는 검이나 전투에는 무지했다.
마력도 체력도 꽝이었다. 대신 아쿠아로드 역사상 최고의 천재 마도사라 불렸다.
그는 보통 마도사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마도구를 개발해 냈다.
디에고의 작품은 엄청난 값에 팔렸다.
최연소 마도사 총장이 될 뻔했으나 실험할 시간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거절한 특이한 인물이기도 했다.
디에고가 있으면 테레사에게서 빼앗아온 마도구 제작 기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던 돈방석을 드디어 손에 넣는 것이다.
바바라가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디에고에게 환영의 말을 건네려는데 등 뒤에서 서늘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릉.
이어진 목소리에는 살기가 듬뿍 담겨있었다.
“네놈이 기억을 지우는 마도구를 만든 그 놈이냐?”
살로메디안의 손에는 새파란 날이 선 검이 들려있었다.
그 검은 망설임 없이 디에고의 목을 겨눴다.
디에고가 어렵게 찾은 마도사라는 것도, 그가 없으면 마도구를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각하께서도 그 아이를 아십니까? 성공작은 아니지만, 꽤 공들여 만든 녀석인데.”
마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제 목을 겨누고 있는데 디에고는 해맑기만 했다.
오히려 제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서 기쁜 기색이었다.
“네놈이 만든 마도구 때문에 시아가 기억을 잃었거든.”
“공, 공작부인께서요?”
“그래.”
“그건 완성품이 아니라, 실험작입니다! 정신계 부작용이 심해서 함부로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닥쳐라.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디에고의 목에서 한 줄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에고가 애원했다.
“소인이 공작부인을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네놈을 어찌 믿고?”
“마, 마도구 제작에 관한 전권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속은 파기다. 네놈은 아쿠아로드로 추방한다. 아니, 지금 내 손에 죽어라.”
“히익!”
디에고가 신음을 집어삼켰다.
칼이 목에 들어왔을 때도 무관심하던 그가 처음으로 내보인 공포였다.
본이나 피오넬처럼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건가?
하지만 디에고는 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아쿠아로드로 가면 제가 만들고 싶은 마도구는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고요!”
“…….”
“테레사가 주문하는 악독한 장난감들만 만들어야 합니다! 그걸 견딜 수 없어서 목숨 걸고 도망친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추방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디에고가 납작 엎드린 채 빌었다.
“실험실 제공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발 추방만은……!”
“마도사는 왕실 허락 없이 여행도 못 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도망쳤지?”
“환영 마도구 덕분이죠. 보안 용도로 많이 사용하지만, 외모를 바꿀 수도 있거든요.”
마도구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는 듯 디에고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방금까지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 사람 같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마도구에 미친 인간이에요. 아니, 인간이라 보기도 힘들어요.」
델마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나는 보호하듯 디에고 앞을 가로막으며 살로메디안에게 말했다.
“우리에겐 디에고가 필요해요. 추방도 처형도 하지 마세요.”
“시아. 이놈은 테레사의 하수인이다.”
“아쿠아로드에서 살아남으려면 테레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죠.”
“용서하겠다는 건가?”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디에고는 제작자일 뿐이에요. 마도구를 악용한 테레사가 나쁜 거고요.”
디에고가 두 손을 맞잡고 환호성을 올렸다.
“역시 인자하십니다! 공작부인께서는 왕세녀 시절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군요!”
살로메디안이 싸늘한 눈으로 디에고를 노려봤다.
“시끄럽다. 난 네놈을 용서하지 않았어.”
“죄, 죄송합니다. 훌륭한 마도구를 만들어 공작부인께 지은 죄를 갚겠습니다.”
살로메디안의 눈치를 보며 디에고가 다시 한번 빌었다.
목이 잘리더라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테레사가 디에고를 곱게 봤을 리 없지. 델마의 오빠이기도 하고.
아쿠아로드를 떠나는 날 사라졌던 델마를 그리워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마도구에 푹 빠져있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영지에도 큰 도움이 될 테고요.”
살로메디안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그의 옷깃을 가만히 흔들었다.
“델마는 제 소꿉친구나 마찬가지예요. 디에고가 여기 있으면 델마가 찾아올지도 몰라요.”
“피오넬이나 본처럼 첩자일 수 있다.”
“거기까지 알고 계셨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몸이 떨어졌다고, 마음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대략 알아.”
그의 손길에서 시작된 전류가 온몸을 감쌌다.
한층 더 달콤해진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것도 부끄러운가?”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농밀해졌다. 더 부끄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며 말하고 싶은 듯했다.
가쁜 호흡을 집어삼키며 디에고를 가리켰다.
밀린 부부 생활보다 마도사의 확보가 중요한 순간이었다.
“디에고는 쫓아내지 않으실 거죠?”
항복의 뜻으로 살로메디안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나 따위가 위대한 세드나 공작부인을 어찌 이기겠는가.”
“고마워요, 살롬!”
“하아… 대신 마도구 실험실은 첨탑 감옥에 만들겠다. 허튼짓은 절대 하지 못하도록.”
“실험실을 감옥에요?”
“싫으면 당장 아쿠아로드로 꺼져라.”
냉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살로메디안이 디에고를 노려봤다.
무릎걸음으로 기어 온 디에고가 살로메디안의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각하!”
“…뭐라?”
“제 평생소원이 방해받지 않는 곳에 틀어박혀서 실험하는 거였습니다! 첨탑 감옥의 실험실이라니! 저는 너무 감격해서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디에고가 파르르 떨었다.
감옥을 평생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델마. 네 오빠는 완전 미친놈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살로메디안이 두 팔로 나를 안아 올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흘렸다.
“꺅!”
“마물은 대충 정리된 거 같으니,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그게 뭐냐고 물을 짬도 주지 않고, 살로메디안이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 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살로메디안을 보며 기사들이 투덜거렸다.
“부하들은 마물 피에 절어 있는데, 저러고 싶을까?”
“한 달 원정을 2주 만에 끝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던 분 아닌가? 사랑에 미치면 약도 소용없지.”
“신혼인데 이해해드리게! 공작부인 같은 아내가 있으면 나 같아도 못 참겠네.”
“그만들 하십시오! 공작부인께서 들으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빈센트의 외침이었다.
살로메디안의 품에 달랑달랑 안겨있던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빈센트 님과 인사도 못 나눴네요.”
잠시 내려달라는 뜻이었는데 살로메디안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인사할 필요 없다.”
“휴고 님 대신 수고가 많으셨을 거 아니에요? 부기사단장으로 취임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사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험악하고 지저분한 것들이다. 특히 빈센트는 더더욱.”
“빈센트 님이요?”
외모로만 보면 빈센트는 전장을 누비는 기사가 아닌 학자에 더 어울렸다.
머리카락은 늘 빈틈없이 빗어 넘겼고, 기사단 정복이나 평상복 모두 칼같이 다림질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빈센트는 신사 중의 신사였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숨겨진 비밀이 많은 법이지. 내 부하지만 참 잔인하고, 괴팍한 놈이야.”
살로메디안이 내게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빈센트 님께 그런 면모가 있었군요… 전혀 몰랐어요.”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특히 잘생긴 남자는 남을 속이기 쉬우니까 주의해야 한다.”
살로메디안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어린 딸이 과자 사준다는 범죄자를 따라갈까 봐 걱정하는 아버지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그럼 살로메디안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하네요.”
“?”
“대륙에서 제일 잘생겼으니까요.”
살로메디안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눈빛과 함께.
“왜 그렇게 보세요?”
“그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날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지금 행복하세요?”
“행복하다. 그대 웃음 덕분에.”
천천히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림으로 그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만큼 황홀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불타오르는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샛별처럼 빛나는 그 감각 역시 행복이었다.
터질 듯 충만한 행복을 살로메디안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회귀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행복도 없었겠지?
그동안 키산드라를 찾아가지 못한 것이 더럭 미안해질 만큼 두 번째 생이 소중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살로메디안은 2층에 있는 내 방이 아닌 지하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귓가에 그가 속삭였다.
“같이 목욕하자, 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