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 *
휴고는 공작저를 지킬 최소한의 기사들만 남기고 모든 인원을 내 호위로 차출했다.
어색하게 창을 든 주방장과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마부, 시종, 심부름꾼 소년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중엔 의료 교육원을 짓던 인부들도 보였다.
“휴고 님. 정말 이분들을 데리고 가겠다고요?”
“공작부인을 지키는 영광을 얻게 되어 기쁠 겁니다! 안 그런가?”
휴고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억지로 끌려 나온 사용인들을 노려봤다.
졸지에 마신의 숲에 끌려가게 된 사용인들이 반강제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 물론입니다. 기사단장님.”
“더 큰 목소리로 말하지 못해?!”
“물론입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다들 돌아가세요. 숲엔 저와 기사님들만 갑니다.”
내 말에 사용인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들이었다. 물론 휴고는 반대했다.
“안 됩니다! 기사들만으로 공작부인을 호위할 수 없습니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남자라는 이유로 이분들을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자원한 거라니까요?”
휴고가 고집을 부렸다. 내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스스로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은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래도 쓸모가 있을 텐데… 마물 떼가 몰려들면 미끼로 쓸 수도 있고…….”
겨우 구한 인력을 마물 미끼로 쓸 생각이었단 말이야?
깜짝 놀란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휴고 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죄, 죄송합니다. 공작부인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십계명 때문에 이성을 잃은 모양입니다.”
멋쩍다는 듯 휴고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놈의 십계명!
살로메디안이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살롬. 다른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마세요! 십계명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하세요?』
그럼 살로메디안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뭐가 괴롭힌다는 건가? 꼭 필요한 일만 골라서 적은 건데.』
『마부나 주방장이 절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건 이상하잖아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세상에 그대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가 떠나기 전 비슷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게 3주 전 일이라는 게 믿겨 지지 않았다. 체감상 3달, 아니 3년은 지난 것 같았다.
살로메디안은 언제쯤 돌아올까.
한 달 예정이라고 하지만 토벌 원정은 매번 예상보다 길어진다고 했다.
보름에서 한 달 이상 늘어난 적도 빈번하다고 했다.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그 없이 마신의 숲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스산했다.
가끔은 불안이 밀려와 날 헤집었지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만은 우리가 계약 부부라는 사실을 잊었다.
사랑까지는 몰라도 살롬이 날 아끼는 것만은 확실해. 나를 원하는 것도…….
그와 나눴던 키스의 촉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갈증과,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다는 욕망.
세상의 이치와 이성을 내려놓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그 끝에 남게 될 나와 살로메디안의 모습까지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상상 속에서만 벌어질 뿐이었다.
살롬이 돌아오면 같이 목욕하자고 해야지. 진짜 부부처럼.
발그레 볼을 붉히며 걸음을 옮겼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등 뒤에서 날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 * *
“여기예요! 이 틈으로 들어가면 바실리키의 석상이 있어요!”
두 뼘도 안 될 것 같은 좁은 틈 앞에서 피오넬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아이나 체구가 작은 여성이 아니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틈이었다.
보라색 넝쿨 식물에 가려져 있어서 피오넬이 짚어주지 않았다면 그곳에 틈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게 분명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시끄럽다, 꼬마!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어떻게 공작부인을 모신단 말이냐?”
피오넬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 싶다는 듯 휴고가 인상을 구겼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안 들어가 볼 순 없죠. 기사님들은 밖에서 대기하세요.”
“안 될 말씀입니다, 공작부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도끼로 길을 넓히겠습니다!”
“계곡 전체가 무너질지도 몰라요.”
“제 도끼 실력을 공작부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섬세하게 부서뜨릴 수 있습니다!”
“계곡은 무사하더라도 오래된 신전은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공작부인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절대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불태우며 휴고가 바위틈을 가로막았다.
삼촌이라는 말로 구슬려도 소용없을 분위기였다.
어떡하지? 날 위해서 테레사가 준비한 무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휴고를 바라봤다. 살얼음이 낀 듯 냉랭한 표정도 장착했다.
감정 한 푼 담기지 않은 붉은 눈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내 변화를 눈치챈 휴고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공작부인?”
“물러서세요, 기사단장. 크로티무스 황족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하오나!”
“말대꾸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임무는 날 지키는 것이지, 내 앞길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목소리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흘러넘쳤다.
나는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태어났고, 미래의 국왕으로 자라 왔다.
비록 테레사에게 치욕을 당하기는 했지만, 몸에 밴 기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도 능숙했다.
정말 미안해요. 휴고. 나중에 꼭 사과할게요.
본심과 달리 입술 사이에서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묻겠습니다. 제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충신을 자처하실 겁니까? 아니면 진짜 충신이 되시겠습니까?”
날 친조카 이상으로 아껴주는 그를 협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휴고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다른 기사들도 바짝 긴장한 채 굳어 있었다.
“대답하세요. 황족으로서 명령입니다.”
내 스승이자 가족인 휴고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생포한 포로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점령군처럼.
“명 받잡겠습니다, 공작부인…….”
최강의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이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였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나는 휴고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엄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장서라. 피오넬.”
“네! 공작부인.”
내 눈치를 보던 피오넬이 바위틈 사이로 쪼르르 들어갔다.
나도 피오넬의 뒤를 따랐다. 휴고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살롬이 돌아온 후에 들어가 봐도 괜찮았을 텐데…….
후회를 털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테레사는 내가 마신의 정보를 찾는다는 걸 알았다.
쥐덫에는 진짜 치즈를 올려야 한다는 걸 테레사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독이 든 치즈를 가지러 왔다.
하지만 테레사의 바람대로 쥐새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 *
바위틈은 밖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비좁았다.
피오넬과 달리 나는 숨을 참고, 고개를 위로 쳐들어야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피오넬. 마물을 피해서 이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네.”
“이 근처엔 마물이 없었을 텐데. 어떤 마물이었지?”
“…기사님들이 잡아먹는 그 돼지였어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피오넬이 거짓말했다.
럼블크는 늪지대에서 출몰하는 4족 보행 마물이었다.
미끈거리는 넝쿨로 뒤덮인 바위 계곡에서는 절대 서식할 수 없었다.
피오넬은 내가 마물에 대해서 빠삭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멋대로 지껄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운이 좋았구나.”
축축하고 거친 바위틈 사이를 얼마나 지났을까.
길이 점점 넓어지더니 작은 방 크기의 동굴이 나타났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살로메디안처럼 키 큰 남자라면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올 수 있을 거였다.
들어오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신전이라.
불신이 피어오를 때 바위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동굴 안을 비췄다.
나는 만개한 장미처럼 활짝 눈을 떴다.
“이것은……?!”
놀란 날 보고 피오넬이 턱을 쳐들며 잘난 척했다.
“제가 진짜라고 했죠! 보세요! 벽에 바실리키의 성화가 그려져 있어요!”
그저 어두컴컴한 석혈이라고 생각했는데 동굴 전체에 섬세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쿠엘과 콰이엘처럼 정령의 길을 걷지 않고 어둠을 선택한 바실리키.
그가 신이 되는 과정을 그린 성화였다.
군데군데 변색되기는 했지만, 세월도 벽화의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못했다.
나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성화를 감상했다.
바실리키는 머리가 두 개인 드래곤이었다.
성화 속 쌍두 드래곤은 펄펄 끓는 푸른 용암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아쿠엘은 남자로, 콰이엘은 여자로 표현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하지 않나요, 공작부인? 우리나라에서는 아쿠엘 님을 여신님이라 부르잖아요.”
“남성으로 표현된 아쿠엘 님은 처음 보는구나.”
“이 나라는 도마뱀 따위를 신으로 모시나 봐요.”
신기하다는 듯 피오넬이 쌍두 드래곤을 가리키며 킥킥거렸다.
일부러 깎아내리는 척했지만 피오넬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편 드래곤의 위용에 푹 빠진 기색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딱 11살 소녀처럼 보였다.
그래서 낯설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피오넬의 순수함이.
“이교도 성화지만 아름다워요…….”
“바실리키 석상은 어디 있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피오넬이 동굴 구석에 놓인 쌍두 드래곤 석상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무릎 높이의 작은 석상이었다. 오래된 물건 같았지만, 벽화의 위용에 비교하면 만듦새도 허술했다.
피오넬을 바라보는 내 눈이 날카로워졌다.
“너 여기 들어온 게 처음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여길 본 사람이라면 석상이 아닌 성화 때문에 신전이라고 믿었을 거야. 하지만 넌 성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어.”
잠시 멈칫했던 피오넬이 싹싹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쨌든 신전을 찾았잖아요? 제게 상을 줘야 하지 않나요?”
“아니. 오히려 네가 나한테 상을 줘야지.”
“뭐라고요?”
웬 해괴한 소리냐는 듯 피오넬이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피오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아이의 코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함정에 순순히 따라와 줬으니까.”
“함, 함정이라고요?”
“발뺌하지 마. 본이 뒤쫓아 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
본의 이름을 꺼내자 피오넬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순순히 자백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여기가 함정이겠어요? 기사님들이 밖에서 대기 중이신데.”
“나도 그게 궁금하구나.”
“괜한 의심하지 마시고, 잘 찾아보세요. 공작부인께서 원하시는 게 숨겨져 있을지 누가 알아요?”
마치 내가 뭘 찾는지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테레사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나는 키산드라의 승천과 온천을 돌려놓기 위해서 마신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온천 인근에 신전이 있다는 걸 알고 수소문 중이었고.
이곳이 진짜 신전이고, 테레사가 세드나 영지민들보다 빨리 그 사실을 알아냈다면… 다른 것도 알지 않을까?
나는 슬쩍 피오넬을 찔러봤다.
“여긴 내가 찾는 게 없는 것 같아. 너 때문에 괜히 헛수고했어.”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좁은 동굴에 뭐가 있겠니? 석상엔 관심 없어.”
“왜 관심이 없어요! 그 안에 뭐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린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악하던 피오넬이 어이없게 속셈을 내비쳤다.
3주 동안 피오넬은 불안했을 것이다.
살로메디안이 없을 때 함정에 빠뜨려야 하는데 만나주지도 않았으니까.
오늘은 정체를 의심당하기까지 했다.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와 옆에서 윽박지르는 휴고 탓에 긴장감은 배가됐을 테고.
그 결과는? 허술한 도발에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악녀라도 어린애라는 뜻일까? 나한테 득인지 실인지 모르겠네.
이교도의 성화를 보고 눈을 반짝이던 피오넬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테레사의 하수인에게 동정심을 느낄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 한번 찾아볼까.”
시치미를 떼고 석상 쪽으로 이동했다. 피오넬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했다.
둔탁하게 조각된 쌍두 드래곤 석상은 귀중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석상 모양을 본떠서 만든 마도구일지도 몰랐다.
죽이려고 했으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했을 거야.
테레사는 날 생포하고 싶어 해. 석상 안에 날 납치할 무언가를 설치했겠지.
하지만 그 뒤로도 의문이 남았다.
날 포박하거나 기절시킨다고 해도 정예 기사들을 어떻게 상대한다는 걸까?
피오넬의 뒤를 쫓아온 건 본, 한 명뿐이었다.
아쿠아로드 기사들이 숨어든 걸까?
아니. 나는 부정하며 도리질을 쳤다. 이곳은 마신의 숲 한복판이었다.
훈련된 기사라고 해도 마물과 흑룡기사단의 감시를 피해 이곳까지 숨어드는 건 불가능했다.
“이 석상 어딘지 낯익네.”
가까이서 본 쌍두 드래곤이 어쩐지 익숙했다.
어디에서 본 걸까?
아쿠아로드에서는 마신과 제국을 연상시키는 드래곤 형상은 사용하지 않는데.
“아. 거기서 봤구나……!”
기억이 떠올라 손뼉을 짝 쳤다.
피오넬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물었다.
“어디서 뭘 보셨다는 건가요?”
“이 석상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지 알 것 같아.”
“네?”
“공작저 입구에서 비슷한 석상을 본 적이 있거든.”
피오넬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테레사의 명대로 날 끌어들였을 뿐이니까.
“너는 이게 어떤 마도구인지 아니?”
“마도구라니요? 그냥 석상이잖아요.”
“테레사가 너에게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았구나.”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자 피오넬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테레사라뇨? 그게 누구죠?”
“가엾은 아이 같으니. 테레사가 너한테 뭘 약속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약속은 절대 지켜지지 않아.”
“공작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피오넬은 완강히 발뺌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붉게 달아 올라있었다.
내가 무심한 어조로 읊조렸다.
“너는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거야. 이미 버려졌는지도 모르고.”
“…….”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테레사는 날 납치할 생각이겠지. 넌 테레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테고. 그런데 내가 사라지면 너는 어떻게 되니?”
“큿.”
정곡을 찔린 피오넬이 신음을 흘렸다.
피오넬의 작은 몸이 폭풍우를 견디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넌 어떻게 탈출할 거야? 혼자 국경을 넘을 수 있어? 마신의 숲을 가로질러서?”
마신의 숲이란 말에 피오넬의 낯빛이 달라졌다.
나는 조금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피오넬을 달랬다.
“솔직히 인정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정상을 참작할게.”
“…….”
“테레사가 널 해치지 못하게 지켜주마.”
“왜 저한테 이렇게 해주시는 거죠? 공작부인 말대로라면 죽어 마땅한 첩자일 뿐인데.”
피오넬이 내게 물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있었다.
그러게 왜 이러는 걸까.
“넌 아직 11살이잖아.”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피오넬이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리다고 동정하는 거예요?”
“한 번쯤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고 싶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 말이야.”
그 기회가 얼마나 간절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회를 얻은 덕분에 살로메디안과 결혼했고, 새로운 집과 친구, 가족을 얻었다.
키산드라가 회귀시켜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거였다.
키산드라처럼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피오넬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었다.
훗날 후회하게 될지라도.
“공작부인. 사실 저는…….”
피오넬이 바짝 마른 입술을 우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날 향해 다가오는 아이는 어느 때보다 작고 애처로워 보였다.
“사, 사실 제가 공작부인을 이곳까지 안내한 이유는…….”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피오넬이 말을 멈췄다.
눅눅한 침묵이 동굴 안을 꽉 채웠다.
나는 아이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망설이던 피오넬이 고개를 쳐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순수한 악의가 번뜩였다.
“순순히 알려줄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요!”
피오넬이 날 밀치고 석상의 목을 잡아 돌렸다.
그러자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화가 사라졌다.
대신 바위 계곡 뒤쪽으로 갈 수 있을 법한 길이 나타났다.
“피오넬…….”
나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기회를 선택하는 건 아니라는 걸.
새 삶을 개척하는 건 어쩌면 죽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11살 어린아이에게 익숙한 세계를 버리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피오넬은 남을 해치지 않고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 발로 찼다.
내게 더 이상의 동정은 없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존중한다. 대신 책임도 져야 할 거야.”
“잘난 척하지 말아요! 테레사 님께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언제까지 큰소리칠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요!”
피오넬이 목소리를 높였다.
바위 계곡으로 향하는 길 안에서 익숙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집에 갈 시간이다, 저주받은 년!”
* * *
화상으로 벌겋게 일그러진 대머리와 흉흉하게 새겨진 십자 모양의 흉터.
나 때문에 기사 작위를 빼앗긴 본이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있었다.
“드래곤 석상은 환영 마도구였구나?”
예상대로 석상은 환상을 보여주는 마도구였다.
공작저로 진입하는 길을 숨기기 위해 설치한 흑룡 석상처럼 말이다.
원래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아니면 테레사가 설치한 걸까.
나는 본의 등장보다 신전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용케 눈치챈 모양이지만, 너무 늦었다!”
본이 핏발 선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나는 담담하게 응수했다.
“설마 그 자루로 날 납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 타죽었을 놈이.
“네 이년! 살려두지 않겠다.”
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
“네 실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까?”
“건방 떨지 마! 곧 몸이 마비될 테니까!”
“독을 썼구나.”
“그래! 이교도 석상에서 흘러나온 독이 네년을 마비시킬 거다!”
본의 말에 눈을 부릅뜬 건 피오넬이었다.
“독이라뇨?!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내가 왜 너한테 설명해야 하느냐?”
“테레사 님의 명령을 잊은 거예요?!”
“테레사 님은 폐왕녀를 데려오라 하셨을 뿐이다.”
“뭐, 뭐라고요?”
같은 편에게 배신당한 피오넬이 입을 벌렸다.
“당신이 어떻게!”
분노에 파르르 떨던 피오넬이 배를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으윽!”
신음하며 동굴 바닥을 뒹구는 피오넬을 본이 비웃었다.
“날 시종처럼 부리더니 꼴좋구나! 내장이 반쯤 썩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까!”
“어서 해, 해독제를……!”
“너는 흑룡기사단 손에 처형당하겠지. 크핫핫핫!”
“제발 해독제를 줘요!”
피오넬이 애원했다. 초점이 흐려지는 아이의 눈동자와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보고도 본은 끝없이 조롱했다.
“그러게 분수를 알았어야지! 소매치기나 하고 다니던 년이!”
“테레사 님이 네놈을 죽일 거야! 난 테레사 님의 가족이라고!”
피오넬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며 외쳤다. 재미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본이 배를 잡고 웃었다.
“캭캭캭! 빈민가에서 뒹굴던 계집이 뭐라는 거냐?”
“진, 진짜야! 테레사 님은 내…! 끄악!”
말을 잇지 못하고 피오넬이 비명을 질렀다.
“피오넬!”
나도 모르게 아이를 불렀다.
피오넬의 목에 선명한 붉은 줄이 피어올랐다.
빛나는 붉은 줄이 피오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끄으으읍! 사, 살려… 주……!”
피오넬의 목은 달궈진 쇠처럼 빨개졌고, 얼굴은 시체보다 창백해졌다.
핏발 선 눈동자가 뒤집히며 입가에 거품이 흘러나왔다.
“피오넬! 정신 차려!”
붉은 줄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진짜 줄이 아니라, 해석할 수 없는 문자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너 계약 마법을 어긴 거냐?”
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개미 새끼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계약 마법? 테레사는 피오넬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동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눈앞에서 사지를 뒤틀며 몸부림치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게 뭔지 설명해요!”
본을 돌아보자 그의 입가에 싸늘한 비소가 걸렸다.
“건방지게 나한테 명령하지 마, 폐왕녀.”
“읏.”
순간 코끝에서 비린내가 풍기면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후끈하면서도 역겨운 무언가가 배 속을 휘저었다.
“네년도 독에 쓰러질 준비를 하는구나. 큭큭큭.”
휴고가 했던 조언이 아지랑이처럼 귓가에 어른거렸다.
「귀족님들은 독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기면 장땡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을 무너뜨리고 내가 살아남는 겁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실전에서 점잔 떤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내 패를 숨기고, 상대의 패를 읽는 것. 상대의 공격을 예상하고 미리 방어하는 것.
모두가 실력이었다. 내가 중독되었다면 실력이 부족한 거겠지.
“사지가 마비되고 토악질을 할 테지만 죽진 않을 거다.”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본이 주절댔다.
날 집어넣을 자루를 펼치는 본과 정신을 잃은 피오넬을 번갈아 바라봤다.
피오넬은 아직 죽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피오넬은 계약 마법을 어겼고, 그 탓에 마법진이 발동됐다.
단숨에 죽일 수 있음에도 마법진은 피오넬을 죽이지 않았다.
아이가 오래도록 고통받으며 제 잘못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설계된 마법진이 분명했다.
그 마법진을 그린 건 테레사일 테고.
테레사. 넌 얼마나 더 잔인해질 거니? 네 안에 인간다움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테레사에게 인정을 바라는 것은 돼지에게 카나리아처럼 울어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테레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악독함과 잔악함으로 똘똘 뭉쳐진 괴물일 뿐.
테레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직접 경험하지 않았나.
아니, 테레사는 더 성장했을 것이다. 살로메디안과 내게 패한 뒤로 더더욱.
“어서 가자! 네 주인이 기다리신다!”
본이 다가왔다. 내 사지가 마비되었을 거라고, 그래서 꼼짝 못 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멋대로 착각하길 기다렸다가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마력 불꽃을 일으켰다.
“내 주인은 오직 나뿐이다.”
“중독되지 않은 것이냐?!”
본이 쇳소리를 토했다.
나는 마력 불꽃을 본의 다리를 향해 쏘았다.
테레사의 악행을 증언할 증인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크아아아악!”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비명이 울렸다. 살점 타는 역겨운 냄새도 여전했다.
본은 날뛰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푸른 불꽃이 제 다리를 활활 태우는 것을 무능하게 지켜봤다.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익!!”
본이 까무러치거나 말거나, 나는 서둘러 피오넬의 상태를 살폈다.
마법진은 사라졌지만, 눈이 뒤집혀 흰자위가 드러났다.
다행히 경련은 멈췄고 맥은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살아있구나! 피오넬!”
내 부름을 들은 걸까. 피오넬의 검지가 보일 듯 말 듯 까딱거렸다.
살아있다고 해도 오랜 질식과 독 때문에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죽여주는 게 더 자비롭지 않을까?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너한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피오넬 몸에 두 손을 대고 불의 마력을 일으켰다. 마물의 시체를 정화할 때처럼.
피오넬에게 화상을 입히지 않고 독만 골라서 태우는 것은 까다로웠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피오넬에게 마력을 쏟아부었을까.
피오넬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으읏.”
“정신이 드니?”
“…….”
“피오넬!”
피오넬은 무거운 눈꺼풀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맥박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것으로 안심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공작부인!”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위틈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안에서 눈물 젖은 휴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공작부인!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오오!”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휴고의 절규를 듣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의식 없는 피오넬을 부축했다.
축 늘어진 아이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병자를 끌고 좁은 틈을 빠져나오는 것은 더욱 고됐다.
우둘투둘한 바위에 살갗이 쓸려 피가 배어 나왔다.
피오넬은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다시 테레사의 명령을 받고 날 괴롭힐지도 모르고.
그래도 피오넬을 놓지 않았다.
나는 왜 이 꼬마 악녀를 살리고 싶은 걸까.
동정심에 끌려다니는 선량한 주인공이 어떤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힘 빠진 손에서 피오넬이 미끄러졌다. 이대로라면 좁은 틈을 지나갈 수 없었다.
나는 옷을 찢어 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줄로 피오넬과 내 몸을 둘둘 묶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바위틈을 빠져나갔다.
아이의 몸은 뜨거웠고, 목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 * *
바바라는 화가 났다. 아이시아가 자기 모르게 마신의 숲에 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이란 놈이 반역을 저지르고, 영악한 피오넬이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도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시아의 옆모습을 보던 바바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떤 개새끼가 우리 시아 얼굴에 상처를 낸 거예요?!”
병자 앞에서 흥분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국보에 흠집 낸 새끼! 뼈와 살을 분리해서 돌절구로 빻아버릴 테다! 악마의 저주를 듬뿍 곁들여서!”
“진정해요, 바비.”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하늘이 내린 명품에 흠집이 났는데?”
얼굴에 난 생채기를 손으로 가리며 아이시아가 수줍어했다.
“미안해요.”
“시아는 피해자예요! 나쁜 건 문어대가리랑 꼬마 악녀라고요!”
“제가 조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아뇨! 시아는 함정에 빠지고도 살아 돌아온 영웅이에요! 그 신전이 진짜 바실리키 신전이라는 것도 밝혔고요!”
바바라의 말에 아이시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완전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원정을 떠난 후에 바바라는 한 번도 아이시아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주군을 더더욱 원망했던 바바라였다.
‘그 인간 때문에 우리 시아가 잘 먹지도 않고, 웃지도 않잖아? 부재중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망나니 같으니! 시아의 남편을 쫓아낼 수도 없고!’
바바라에게 대륙 최강의 사내란 사랑스러운 공작부인 옆에 딸린 성가신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친 아이시아 앞에서 속내를 비칠 수 없었다.
지금 바바라의 최대 목표는 아이시아가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였다.
‘시아를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줘야지!’
바바라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시아. 본이 어떻게, 어떤 자백을 한 줄 아세요?”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