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50)

18

* * *

살로메디안이 원정길에 오른 지 3주가 지났다. 시들시들하고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겨우 이어졌다.

시간은 절름발이 개나, 병든 달팽이보다 느리게 지나갔다.

살로메디안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세상은 빛을 잃었다.

주방장이 만들어주는 최고급 식사도 내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

잠 못 드는 밤은 유독 길었다.

만약 살로메디안과 한 침대를 썼더라면 혼자 보내야 하는 밤이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로메디안 없이 어떻게 산 거지? 3주 만으로 죽을 것 같은데.

“같은 방에서 안 잔 걸 고마워해야 하나…….”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바바라와 함께 있다는 걸 깜빡 잊은 상태였다.

“시아. 어제도 잘 못 잤어요?”

바바라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잘 잤어요. 꿈도 안 꾸고.”

“둘러대지 마세요. 다크써클이 목젖까지 내려오고 있으니까요.”

얼른 손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림자가 진 눈 밑은 어둑했고 피부는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까칠했다.

바바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작령 최악의 위기 상황이에요! 시아의 국보급 미모가 상했잖아요! 특별 보호 조치가 필요해요!”

“제 얼굴 상태가 그렇게 나쁜가요?”

“네! 시아가 아니라 시아인 척하는 아프고 늙은 여자 같아요!”

바바라가 묵직하게 진실을 내뱉었다.

잠시 휘청했던 나는 바바라의 말에 귀 기울였다.

“원정이 시아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줄은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각하 뜻대로 취소했을 거예요!”

살로메디안도 황제를 포함한 전 제국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토벌 원정을 취소하려 했다.

그가 세드나 공작이 아니고, 내가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그 결정을 기쁘게 찬성했을 것이다.

“저 때문에 700년간 이어진 흑룡기사단의 전통이 무너지길 바라지 않아요.”

굳은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바바라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시아는 마음씨도 비단결이시지…!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국익을 위해 희생하다니요!”

“백성들도 살롬의 출정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마물이 너무 늘어서.”

“황제 폐하께서 특별 친서까지 내리셨죠. 원정 일정을 늘릴 수는 없냐고.”

황제의 친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골이 지끈거렸다.

살로메디안이 전령 앞에서 편지를 박박 찢어버렸으니까.

그 뒤에 했던 말은 정말 잊고 싶었다.

「이래서 구걸하는 거지한테 잘해주면 안 돼. 한 푼 받던 놈이 두 푼 달라고 지랄발광이니까.」

살로메디안은 자신의 조카이자 황제인 네이선을 거지 취급했다.

자신과 흑룡에만 의지하지 말고 제국 기사단의 역량을 키우라는 뜻이었겠지만, 간담이 서늘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삼족이 처형당할 중죄 아닌가?

“시아. 오늘도 기사단장님이랑 훈련하실 건가요?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바바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난 3주 동안 나는 내 호위와 방위를 위해서 저택에 남은 휴고에게 특훈을 받았다.

몸은 고되었지만, 휴고와의 훈련은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좋아요. 실력도 많이 늘었고요.”

“설마 직접 전투에 참여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냥 호신용이에요.”

바바라를 안심시켜 주면서 시선을 돌렸다.

내 진짜 목표는 ‘마신의 숲에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실력’, 혹은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기술’이었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날 지켜야 싸울 수 있을 테니, 호신용이란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시아. 각하 새끼… 아니, 위대한 세드나 공작 각하께서 전 사용인들에게 외우게 한 십계명을 기억해주세요.”

바바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는 살로메디안이 작성한 ‘내가 없을 때 공작저 사용인들이 지켜야 할 십계명’이 적혀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앞에서 바바라가 보란 듯이 십계명을 읽어 내렸다.

“첫째, 전 사용인은 공작부인의 안전을 위해 하루 24시간 전시작전에 준하는 상태로 대기한다. 둘째, 공작부인의 건강을 해치거나 해치려는 자는 생포한다. 단, 처벌은 세드나 공작이 귀환 후 직접 실행한다. 셋째, 생포가 여의치 않을 시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살상한다. 잔혹한 정도는 귀환 후 세드나 공작이 판단한다. 넷째, 공작부인께서 엄선된 식재료로 만들어진 건강식을 하루 세끼 이상 드실 수 있도록 한다. 다섯째, 공작부인께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도록 위급한 보고를 제외한 모든 보고를 삼간다. 여섯째…….”

“제발 그만하세요.”

“뒤로 갈수록 더 가관이에요.”

“…….”

“시아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하루 세 번씩 웃기라잖아요? 이 인간은 사용인들이 광대인 줄 아나!”

바바라의 분노는 정당했다.

십계명에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나를 떠받들라는 황당한 명령으로 가득했다.

“각하는 시아한테 미친 게 틀림없어요.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짱돌 맞아 뒈지기 싫으면.”

“정말 미안해요, 바비.”

“시아가 뭐가 미안해요? 생전 처음 해보는 연애와 결혼에 돌아버린 놈이 문제죠! 그 인간 뇌에는 미안이라는 단어가 없지만요!”

바바라의 대답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롬과 진지하게 사귄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인가요?”

“당연한 걸 왜 놀라고 그래요?”

바바라가 당황스럽다는 투로 되물었다.

“저는 당연히 살롬이 세계 각국의 여인과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들이 미쳤어요? 피 뒤집어쓴 살인귀랑 연애하게?”

“하지만 살롬은 엄청 잘생겼잖아요?”

바바라의 독설에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철부지 소리는 그만하라는 듯 바바라가 혀를 찼다.

“쯧쯧. 외모만 뺀질뺀질하면 뭐 해요? 다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리는데.”

“…….”

“전 대륙에 악명이 자자한 초 SSS급 마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뜯어보겠어요? 아님, 뜯어 먹히기 전에 도망치겠어요?”

“…도망치겠죠.”

“바로 그거예요! 보통은 각하랑 눈 마주칠까 봐 덜덜 떨어요. 드물게 간 큰 여자들 빼고요.”

바바라의 말에 귀를 쫑끗 세웠다.

“그 여성분들은 어떤데요?”

“초 SSS급 마물의 생김새를 관찰하죠. 그리고 찬양하기 시작해요. 유명한 살인마에겐 추종자가 따른다잖아요. 진짜 악취미야. 우웩.”

여자들이 살로메디안의 외모에 반하는 건 다른 문제 같지만, 토 달지 않았다.

바바라가 점점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진짜 특이한 인간들도 있어요. 에드버릭 백작가 따님은 각하랑 결혼하겠다고 매파까지 보냈었죠. 완전 돌았지.”

“아, 공작부인이 되려는 분도 있었군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가난하고 위험한 영지라도 세드나 공작가는 제국 제일의 명가였다.

살로메디안의 미모는 마신의 숲이 주는 공포를 뛰어넘고도 남았다.

잘생긴 남편과 황족이라는 지위.

일신의 안위보다 그 둘을 탐하던 여인도 분명 있었을 거였다.

변방 소국의 폐왕녀보다는 제국 백작가의 영애가 공작부인으로 더 적합했을 테고.

“그 분이 살롬이 혼인하지 못한 이유는요?”

“매파를 죽였거든요.”

바바라의 무덤덤한 대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청혼서신을 가져온 중매인을 죽였다고요?!”

“목숨을 재촉하는 말을 지껄이기는 했어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저주받은 괴물 따위를 거둬주는 거니까 고마워하라고 했던가? 잘 기억 안 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잘려서.”

“그것참 잘했네요!”

내가 손뼉 치며 동의했다.

바바라가 흠칫 어깨를 튕기며 날 돌아봤다.

“시아……?”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죠. 특히 세드나 공작 앞이라면 더더욱요.”

“진심이세요?”

“네. 살롬은 제국을 위해 헌신한 영웅이에요. 살롬 덕에 안전하게 살면서 허튼 말을 지껄이는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요.”

단호하게 못 박았다. 바바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또 어떤 귀부인이 있었나요? 살롬을 유혹했거나, 유혹하려고 시도한 분도 몇 명 있었을 것 같은데.”

손깍지를 끼면서 물었다. 내 입가에 짙고 고혹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사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바바라가 딱딱하게 굳었다.

“시, 시아.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궁금해서요.”

“찾아서 죽이려는 건 아니죠?”

“어휴.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된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는 온 세상을 얼려버릴 듯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떻게 생긴 분들이신지 궁금할 뿐이에요. 왠지 꼭 기억해둬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추파를 던지는 분들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지만… 죽이진 않을게요.”

그 말을 듣고 바바라가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시아는 정말 각하랑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어떨 땐 둘이 되게 비슷해요.”

“고마워요, 바비.”

계약이 끝나면 떠나야 하는 처지지만, 천생연분이란 말은 썩 듣기 좋았다.

“아! 시아가 부탁한 자료들을 찾아봤는데요.”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지 바바라가 서둘러 서류 뭉치를 꺼내 왔다.

“마신 바실리키에 대한 신학 논문이에요. 시아 말대로 마신과 온천은 연관된 것 같아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신전 근처엔 꼭 온천이 있더라고요.”

바바라가 큰 지도를 펼쳤다. 제국 안 온천이 위치한 곳과 마신의 신전 위치가 모두 가까웠다.

신전이 세워지면 온천수가 터지는 건가? 온천수가 샘솟는 곳에 일부러 신전을 지은 건가.

만약 전자라면 신전을 세워서 온천을 되살릴 수도 있었다.

그것이 키산드라의 승천에 무슨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발견한 작은 실마리가 반가웠다.

“공작저 근처에도 신전이 있지 않았을까요? 말라버리긴 했지만 온천이 있잖아요.”

내 물음에 바바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알아봤는데 마신의 숲에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정말요?”

“지혜와 치유의 정령인 아쿠엘과 달리 마신 바실리키는 어둠과 힘을 관장해요. 마신을 모시는 신자들은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아요.”

“토착민들에게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겠군요.”

“이미 지역 토박이인 사용인들에게 묻고 있어요.”

“바비는 천재예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니!”

“집사 가문의 후예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후계자가 탈주한 마당이라면 더더욱요.”

바바라가 우쭐해서 콧대를 세웠다.

“빈센트 님도 기사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잖아요. 그만 이해해주세요.”

“능력은 무슨 능력이요?”

귓구멍을 후비며 바바라가 되물었다. 남동생을 철저히 무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번 원정에서 휴고 님을 대신해서 기사단장 직무대행을 맡으셨잖아요?”

“그거야 반반한 남자를 시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질투쟁이 때문이죠.”

“네?”

“그런 게 있어요. 개 밥그릇처럼 생긴 늙다리 기사들만 골라서 공작저에 남게 한 인간이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남긴 바바라가 시계를 가리켰다.

휴고와 특훈할 시간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거지 같은 십계명을 어겼다고 망할 질투쟁이가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 * *

“방어와 공격을 따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공격할 때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는 걸 기억하세요.”

휴고가 도끼를 깃털 펜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시범을 보였다.

“공격이 민첩하지 않으면 방어하지 못하는 빈틈이 생긴다는 거군요?”

“그겁니다. 이렇게 겨드랑이를 보이면 반격을 당합니다.”

강철 같은 근육으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몸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곧 겨울인데 춥지도 않나?

“공작부인께서는 검이나 활 없이도 공격할 수 있으니까, 최고의 무기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무기는 휴대성과 기동성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휴고가 고막이 쓰라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웃었다.

“역시 하나를 가르쳐드리면 열을 깨달으시는군요! 핫핫핫!”

고막이 상할까 걱정되긴 했지만 휴고와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했다.

낯선 남자가 아니라 친척 아저씨와 함께 노는 기분이랄까.

“좋은 선생님이 계신 덕분이죠.”

“말씀도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하실까!”

“휴고 님께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예전에 배웠던 검술이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요.”

“공작부인께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전수해드리겠습니다. 평생 지켜드리는 건 덤이고요!”

휴고가 가슴 근육을 땅땅 치며 호쾌하게 답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고 머리를 숙였다.

“휴고 님을 지켜드리는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아아, 세상에서 공작부인처럼 아름답고 마음씨까지 고우신 분은 없을 겁니다! 날개 없는 천사를 영접한 것 같습니다!”

“…과찬이세요.”

“과찬이라뇨! 공작부인에 대한 찬양은 늘 너무 부족합니다. 어떤 말로도 공작부인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휴고가 눈에 불을 켜고 항의했다.

그와 친해진 것과 별개로 정도를 뛰어넘는 과도한 찬양에는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저 때문에 원정 토벌에도 잔류하셨는데. 걱정되지 않으세요?”

“빈센트가 각하와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냄새나는 것들과 마물을 죽이는 대신 공작부인의 호위라니… 이런 선물을 허락하신 각하께 감사할 뿐입니다!”

휴고가 두 손을 모으고 주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 투명한 눈빛이 용병 출신 기사단장이 아닌 신관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휴고 님도 바실리키 교도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혹시 공작저 근처에 신전이 있다는 이야기 못 들으셨나요?”

휴고의 두툼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있었다면 제가 몰랐을 리 없고요.”

“그렇군요…….”

아쉬움을 삼키려는데 휴고가 막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이 근처에 바실리키교 성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있습니다.”

“성물이라고요?”

“용병 시절 얻어들은 소문이긴 합니다만…….”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공작부인께서 바라신다면, 뭐든 말씀 올려야지요!”

휴고가 퉁방울눈에 힘을 주고 기억을 더듬었다.

“25년도 더 된 이야깁니다. 마물이 극성을 부리는 계절이 오면 용병을 고용하는 영지가 많거든요.”

“어느 영지에 계셨는데요?”

“마신의 숲 서쪽 끝자락 생니콜 자작령이었습니다.”

“마물 시체 정화법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그곳 말인가요?”

마물이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제국 전역에서 많은 전령을 보내왔다.

대부분 마물 정화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돌려보내고 있지만, 나와 바바라에겐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마물 정화법’을 팔아 치우자는 거였다.

생니콜처럼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서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정보를 사갈 테니까.

바바라가 전해준 바실리키교 신학 논문을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성이 생니콜인 신학자들이 많던데. 무슨 관련이 있나요?”

“생니콜 자작가는 대대로 신관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는 가문입니다.”

“휴고 님도 신학 논문을 읽으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생니콜 기사단장이 자작가 후계자여서 귀동냥을 좀 한 거죠.”

나의 기대감은 더욱 상승했다.

오늘에야말로 유의미한 정보를 얻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휴고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생니콜은 기사가 턱없이 부족한 곳입니다. 영지민 대부분이 바실리키교도라는 것이 특이하고요.”

아쿠아로드와 달리 크로티무스 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였다.

바실리키를 믿는 백성들이 대다수지만, 한 영지 전체가 바실리키교도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생니콜 자작은 독실한 신자인가 보네요.”

“독실하다마다요. 마신이라 불리는 각하를 신의 환생으로 추앙할 정도로 미쳐 있죠.”

생니콜 자작 때문에 귀찮은 일이 많았었는지 휴고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살로메디안을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공작부인께서는 바실리키 교도들이 마물을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신의 사자, 혹은 신이 내린 시련이라 부른다고 들었어요. 강한 자만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요.”

“오오. 물의 정령 아쿠엘만큼 지혜로우십니다!”

“성서를 읽었을 뿐인걸요.”

“그리 예사로운 것까지 다 기억하시고. 공작부인께서는 기억력도 뛰어나시군요!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날 칭찬하려 하는 휴고를 제지하며 다시 화제로 돌아갔다.

“제국 사람들이 마물을 안 먹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아뇨. 그냥 맛없어서 안 먹었던 겁니다.”

그 부분만큼은 내 뜻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휴고가 딱 잘라 말했다.

역시 고기 맛에 민감한 흑룡기사다웠다.

“큼큼. 어쨌든 세드나 공작령은 시련이 가장 많은 영지였습니다.”

“마물 부자죠, 우리 영지는.”

“주신께서는 시련만 내리시지 않습니다. 시련을 이겨낼 검과 방패도 하사하셨답니다.”

휴고의 말에 내가 숨을 집어삼켰다.

“그 검이 혹시 살롬인가요?”

“이번에도 맞히셨습니다. 바로 세드나 공작이신 각하께서 신의 검입니다!”

휴고가 드넓은 가슴을 쭉 폈다. 그런 살로메디안의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럼 이 부근에 있다는 성물이 방패겠네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들은 건 그게 전부입니다.”

“흠.”

“검이니, 방패니 하는 것도 생니콜 자작령에서만 수군거리던 이야기고요.”

멋쩍게 뒷머리를 긁는 휴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큰 도움이 됐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볼게요.”

“공작부인께 도움이 되었다니… 태어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허허허.”

휴고가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생니콜 영지를 직접 방문할 생각이었다. 직접 가서 마신과 온천에 대한 비밀을 풀어볼 계획이었다.

그때 휴고가 반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연무장 입구에서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두 분 드시라고 간식을 만들어 봤어요!”

짙은 남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은 미소녀가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고맙다, 피오넬!”

휴고가 인자하게 웃으며 피오넬을 번쩍 안아 들었다.

피오넬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내려주세요, 휴고 아찌!”

피오넬의 혀 짧은 소리를 들으며 내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아이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 *

“공작부인께서 산딸기 파이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구미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피오넬이 속눈썹을 내리깔며 수줍은 척했다.

이래야 어른들이 좋아죽는다는 걸 알고 있는 몸짓이었다.

“허허. 네 정성을 봐서라도 공작부인께서 맛있게 드실 거다!”

몸 전체가 근육과 털로 뒤덮인 중늙은이가 피오넬의 어깨를 두드렸다.

흉터와 굳은살로 뒤엉킨 손이 제 몸에 닿자, 징그럽다는 듯 피오넬이 눈썹을 찡그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놓치지 않았다.

“휴고 아찌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기뻐요!”

표정을 가다듬은 피오넬이 애교를 부렸다.

피오넬의 귀여움에 흠뻑 빠진 휴고가 쉴 새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깜찍한 녀석.”

기사단장이라지만 뇌에는 썩은 치즈만 가득한 멍청이가 분명했다.

‘본은 이런 멍청이도 해치우지 못한다는 거야? 잘난 척만 할 줄 아는 병신이라니까. 생긴 것도 역겹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능력했다.

피오넬이 공작저 사람들을 구슬릴 때도 게으름만 피워댔다.

‘이대로라면 테레사 님께서 실망하게 될 거야! 얼른 끝장을 봐야 해!’

피오넬은 왕립 여학교 입학과 찬란한 미래를 위해 혼자서 움직이기로 결심을 굳혔다.

흑룡기사단의 대부분과 살로메디안이 없는 지금이 폐왕녀를 테레사에게 바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처음과 달리 곁을 내주지 않았다.

계획 실행은커녕 말 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일주일 뒤면 살로메디안이 돌아온다. 피오넬로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작부인은 왜 안 드세요?”

아이시아는 피오넬이 가져온 산딸기 파이에 손도 대지 않았다.

‘머리 나쁜 하녀를 구슬려서 만든 건데. 네가 안 먹으면 소용이 없잖아!’

피오넬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아이시아를 바라봤다.

“혹시 천한 제가 만든 것이라 내키지 않으세요?”

첫눈처럼 맑고 투명한 흰 피부와 물에 젖은 까마귀보다 검은 머리칼.

광택이 흐르는 고운 머릿결은 피오넬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폐왕녀에 대한 찬양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징그럽다고만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도 최고급 루비 이상으로 고귀해 보였다.

‘확실히 돈이 좋구나.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 저렇게 예뻐지는 거지? 테레사 님의 발닦개였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휴고가 피오넬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따악!

겉보기에만 꿀밤이지 피오넬은 눈앞에서 번개가 튀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끄악!”

얼마나 아픈지 눈물과 비명이 동시에 터질 정도였다.

“감히 공작부인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천사 같은 공작부인께서 신분을 차별하실 분 같으냐?”

“아으으…….”

“널 천하게 여겼으면 거두지도 않으셨겠지! 구해준 은인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쯧쯧.”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푹 빠져 헤실헤실 웃던 기사단장이 귀신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애를 때린 거야? 폐왕녀 욕을 대놓고 한 것도 아닌데?’

피오넬이 정신을 추스르기 전에 아이시아가 말했다.

“파이를 안 먹어서 서운했나 보죠.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공작부인께서는 너무 착하셔서 탈입니다. 아이일수록 어릴 때 버릇을 가르쳐야죠.”

“휴고 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아이시아의 시선이 피오넬에게 옮겨왔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눈빛이었다.

아이시아가 편을 들어주자 휴고가 더 기세등등해졌다.

“피오넬. 또다시 공작부인께 실례를 범하면 볼기짝을 때려 줄 테다! 알겠느냐?”

“…….”

“왜 대답을 안 해? 지금 당장 혼을 내줄까?”

휴고가 으름장을 놓았다.

하얗게 질린 피오넬이 아이시아에게 사과했다.

“조, 조심할게요! 죄송해요. 공작부인.”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그럼, 네가 만들었다는 파이를 먹어볼까?”

의미심장한 물음에 피오넬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산딸기 파이를 한 입 베어 문 아이시아가 눈매를 곱게 접었다.

“정말 맛있다. 내 입에 딱 맞아.”

“다행이네요! 공작부인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만들었어요!”

기다렸다는 듯 피오넬이 생색냈다.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아이시아가 차갑게 물었다.

“이 파이를 정말 네가 만들었니?”

“다, 당연하죠. 왜 그런 걸 물으세요……?”

“다시 물을게. 정말 네가 만들었느냐?”

아이시아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피오넬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의심하세요? 저는 공작부인을 위해… 흑흑.”

“울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공작부인께선 이유 없이 물을 분이 아니시다!”

휴고는 피오넬의 눈물을 보고도 무조건 아이시아 편을 들었다.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의 눈물이 안 통한다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피오넬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하는 법이었다.

“억울해요. 진짜 제가 만들었단 말이에요.”

“산딸기가 어떻게 생긴 줄 아니?”

피오넬이 거짓 눈물을 짜낼 때 아이시아가 질문을 바꿨다.

“산딸기가 산딸기처럼 생겼겠죠.”

“이건 그냥 산딸기가 아니라 마신의 숲 인근에서만 자라는 흰 수염 산딸기야.”

“흰… 뭐요?”

“수염 같은 꽃술이 달린 딸기란다. 세드나 공작령에서만 자라는. 그것도 모르면서 네가 만들었다고 우긴 거니?”

아이시아가 화염처럼 붉은 눈으로 피오넬을 내려다봤다.

피오넬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산딸기 파이 때문에 꼬리를 밟힐 줄은 몰랐다.

“이런 천하의 못된 것이 있나! 거짓말로 우리 천사님을 우롱한 거냐?”

휴고가 벌컥 화를 내며 피오넬을 노려봤다.

“진실을 고할 기회까지 주셨는데! 너 같은 꼬마는 몇 대 얻어맞는 걸로 부족하다. 당장 추방해야지!”

추방이라는 말에 피오넬의 낯빛이 달라졌다.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아쿠아로드로 돌아가면 죽어요!”

“…….”

“공작부인,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또 제물로 버려질 게 뻔하다고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아이시아는 얼음으로 조각된 인형처럼 표정이 없었다.

휴고가 피오넬의 가느다란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시끄럽다! 매질해서 쫓아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휴고 아찌!”

“누가 네 아찌냐? 우리 공작부인께 거짓말하는 쥐새끼는 아무리 어려도 용서할 수 없어!”

한 대 치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는 듯 휴고가 으르렁거렸다.

‘추방당하면 끝이야! 테레사 님이 나도, 우리 가족도 살려 두지 않을 거야!’

두려움이 목 끝까지 치민 피오넬이 아이시아의 발밑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일부러 거짓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올릴 말씀이 있는데 저 같은 거랑은 안 어울려주실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니?”

“바실리키! 마신 바실리키의 신전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피오넬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순간 무거운 정적이 세 사람을 짓눌렀다.

“공작부인께서 신전을 찾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휴고가 못 믿겠다는 투로 팔짱을 꼈다.

“하녀 언니들이 가르쳐줬어요. 공작부인께서 신전에 관해 궁금해하신다고요!”

피오넬의 변명을 한참 듣던 휴고가 무쇠 냄비만 한 주먹을 쳐들었다.

“이놈, 또 거짓말하는구나!?”

“진짜예요! 저랑 같이 가보시면 되잖아요?”

“정말 신전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마신의 숲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제물로 버려졌을 때요!”

피오넬이 아이시아와의 공통점을 상기시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시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그림 같은 무표정으로 피오넬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목구멍이 간질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쳐다볼 뿐인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테레사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피오넬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왕녀를 그곳까지 끌고 가야 해…! 테레사 님의 계획대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시아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 거기가 어딘지 안내해보렴.”

* * *

피오넬이 함정으로 날 끌어들인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마신의 숲에 들어가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공작부인!”

휴고가 결사반대했다.

“공작부인을 속인 꼬마입니다. 거짓말일 게 뻔합니다!”

거짓말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피오넬을 의심하기 시작한 후, 바바라와 나는 아이의 뒤를 추적했다.

건질 수 있는 정보라곤 피오넬이 진짜 신관 후보생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언제 신전에 들어갔는지, 부모가 누군지, 어떻게 자랐는지.

피오넬에 관한 정보는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흔적이 없었다.

피오넬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테레사가 일부러 없앤 거야. 추적할 수 없도록.

피오넬은 테레사가 보낸 아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마신의 숲에 들어가 봐야 했다.

테레사는 사악하고 용의주도한 인간이었다. 가짜 정보에 내가 속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피오넬. 그 신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수 있니?”

내 물음에 피오넬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가 먹잇감을 발견한 독사 같은 눈을 할 수 있는 걸까.

피오넬 뒤에 어른거리는 테레사의 그림자를 느끼며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신전은 마신의 숲 북쪽 끝 계곡 사이에 있었어요. 보라색 넝쿨 식물로 뒤덮인 바위처럼 보였는데, 틈으로 들어가니까 마신의 상징인 머리 두 개 드래곤이 보이더라고요!”

피오넬이 상세히 설명했다.

보라색 넝쿨 계곡이라면 빈센트가 그려준 지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약초도 없고, 동물도, 마물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휴고를 돌아봤다.

“휴고 님. 정말 그런 곳이 있나요?”

“마물이 적어서 자주 가는 곳은 아닙니다만 보라색 넝쿨로 뒤덮인 바위 계곡이 있는 건 맞습니다.”

“바위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으시고요?”

“노루 새끼나 들어갈 법한 좁은 틈이니까요.”

휴고의 말에 피오넬이 반색하며 말했다.

“맞아요! 기사단장님처럼 건장한 분은 절대 못 들어가요!”

호위기사를 떼어놓고 너랑 나랑만 들어가겠다는 뜻이구나.

함정 치기 딱 좋은 조건이네.

쓴웃음을 삼키고 휴고에게 물었다.

“바실리키 신전 근처에는 마물 출몰이 유독 적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보라색 넝쿨 계곡에 신전이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있었다면 이 지역민들이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마신의 성물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도 없었잖아요?”

내가 되묻자 휴고가 움찔했다.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가시겠다는 겁니까?”

“피오넬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죠.”

시선을 돌리자 피오넬이 부르르 떨었다.

그것도 잠시, 곧 진지한 얼굴로 고개 숙였다.

“공작부인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꼭 돕고 싶을 뿐이에요.”

피오넬의 눈빛이 얼마나 진실했는지, 정체를 아는 나조차도 속을 뻔했다.

어떻게 자라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지? 테레사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웃으며 휴고에게 말했다.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휴고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고 간청했다.

“십계명에 따르면 공작부인의 안전이 제국보다 소중합니다! 특히 마신의 숲엔 들어가시지 못하게…….”

나는 휴고 손에서 십계명이 적힌 종이를 낚아챘다.

“십계명은 잊으세요. 각하께서 안 계신 지금은 제가 영주입니다.”

휴고가 머뭇거렸다. 살로메디안에게 날 마신의 숲에 데려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온천에 가보자고 했지만 휴고는 완강히 거절했다.

혼자서 가지 못하도록 감시도 철저했다.

이번에도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휴고 님, 한 번만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함을 담아 휴고에게 부탁했다.

“송구합니다만 정말 안 됩니다. 각하께서 아시면 제 목이 날아갈 겁니다.”

“하지만 부탁드릴 수 있는 사람이 휴고 님밖에 없어요. 휴고 님 몰래 가고 싶지도 않고요.”

“아이고…! 이걸 어쩐다.”

발을 동동 구르며 휴고가 쩔쩔맸다.

내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살로메디안의 명령을 차마 어길 수 없는 듯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죠. 저는 휴고 님을 삼촌처럼 의지했는데…….”

“삼, 삼촌이라고요?”

휴고의 퉁방울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쿠아로드를 떠나면서 저는 가족들을 버렸어요. 제 가족은 살롬과 공작저 분들뿐이에요. 특히 휴고 님은 삼촌이나 마찬가지…….”

“가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고가 손을 높이 들었다.

“각하께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공작부인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물론이죠! 공작부인께서는 저를 삼촌으로 생각하고 의지하시면 됩니다!”

휴고의 전신에서 불꽃 같은 열정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삼촌이라는 말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호의를 이용한 것 같아 미안했지만, 휴고가 내 삼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내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순간 휴고의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휴고 님. 왜 그러세요?”

“공작부인께서 어여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아려서…….”

“네?”

“3주 동안 한 번도 웃으신 적 없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항상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그랬나? 그래도 휴고 앞에서는 좀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도 아름다우시지만, 웃으시는 걸 보니 너무너무 기쁩니다.”

“휴고 님…….”

“이리도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숲에 들어갈 걸 그랬습니다. 십계명대로 공작부인을 하루 3번 웃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했는데.”

휴고가 커다란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황당무계한 십계명을 지키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내 미소 한 번에 눈물까지 보이며 기뻐하는 휴고가 고마웠다.

꼭 끌어안고 고마움을 전하고도 싶었다.

용기 내어 손을 뻗어봤지만, 그와 닿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속이 메슥거렸다.

언제쯤 이 특이한 반응을 떨쳐낼 수 있을까.

한번 안아드리지도 못하고 정말 죄송해요. 휴고.

쓰라린 속말을 삼키고 피오넬을 돌아봤다.

뻔히 보이는 함정 속으로 뛰어들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