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 *
피오넬은 인기척을 숨기고 후원 뒤편으로 향했다.
어둠을 틈타 소리 없이 걷는 것은 피오넬의 특기 중 하나였다.
기사들의 순찰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간단했다.
머리 나쁜 어른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것도, 멀쩡한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테레사조차 어쩌지 못하는 ‘공작부인’을 골탕 먹인 스스로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여기 인간들은 죄 멍청이뿐이야. 마신의 숲에 산다고 해서 대단한 줄 알았는데. 칫.”
피오넬, 아니 피에타는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테레사 님은 정말 대단해. 폐왕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히 예측하셨으니까.”
그래도 자신을 자루에 처박고 기사들을 시켜 무지막지하게 때리도록 한 건 너무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해 낼 수 있는데.
“테레사 님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제야 알았느냐, 피에타?”
슬그머니 나타난 본이 이죽거렸다.
마신의 숲에서 도움을 받긴 했지만, 볼 때마다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얼굴에 새겨진 십자 흉터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그러나 화상으로 일그러진 대머리는 끔찍, 그 자체였다.
“피오넬이라고 불러요. 내 정체가 들키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피오넬… 귀여운 이름이야. 꼬마 악녀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암살자 출신 배신자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테레사 님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네가 귀족 영애라도 되는 줄 아냐? 뒷골목 좀도둑 주제에.”
“…전 신관 후보생이었어요.”
“크핫! 신관 후보생으로 신분 세탁하려던 좀도둑이었겠지! 빈민가에서 똥물 뒤집어쓰고 살았던!”
“…….”
“어떻게 치유 마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못된 계집애가 신관이라니. 주신 아쿠엘께서도 노하실 거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피오넬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내 몸엔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어! 너 같은 놈이랑은 비교할 수도 없는!’
숨겨진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서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말해버릴까? 그럼 감히 내 앞에서 깝죽거리지 못할 텐데?
피오넬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었다.
테레사의 명령을 어기면 오직 죽음뿐이었다. 피오넬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끼리 입씨름할 때가 아니에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피오넬이 팔짱을 끼며 훈계했다.
길게 째진 눈을 부릅뜨긴 했지만, 본도 피오넬의 말에 동의했다.
“테레사 님을 기다리게 해드릴 수는 없지. 인내심이 많은 분이 아니니까.”
“무능한 부하에게 너그러운 분도 아니죠. 폐왕녀를 아쿠아로드로 끌고 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테레사 님께 항명하는 건 아니지만… 복잡한 방법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계획대로 움직여야죠!”
“내 실력이면 호위기사 몇 명 쓰러뜨리고 폐왕녀를 납치하는 건 간단해. 그편이 더 빠르잖아?”
“뭐야. 설마 혼자서 공을 독차지하려는 거예요?”
피오넬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본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괜히 시간 끌 필요 없다는 거지.”
“당신은 시키는 일이나 잘해요! 괜히 나서서 일 망치지 말고!”
피오넬이 짙은 남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짜증을 냈다.
‘이기적인 머저리랑 한 팀이라니! 나 혼자 움직이는 편이 낫겠어!’
테레사 덕분에 피오넬은 귀족이 살 법한 집에서 비단옷을 입으며 살게 됐다.
음식도 최고급으로 먹고, 하녀도 부렸다.
그래 봤자, 들려오는 건 기분 나쁜 수군거림뿐이었다.
「빈민 양아치들이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사기를 쳤나?」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정당하게 번 돈일 리가 없잖아?」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잘난 척하는 게 역겨워요.」
피오넬의 가족을 깔보고 무시하는 자들도 고작해야 평민에 불과했다.
자기들은 얼마나 잘났다고!
복수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참으라고만 했다.
「테레사 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해. 그분 눈 밖에 나면 우린 정말 끝이다!」
피오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신관 후보생이 됐다.
기사들에게 폭행당했고, 마물의 먹잇감이 될 뻔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피오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왕립 여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쿠아로드에서 전서구를 받았다면서요?”
“폐왕녀가 마신의 성전을 뒤지고, 관련 서적을 조사한단다. 아쿠엘 님을 버리고 이교도가 된 거지.”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른 소식은요?”
“너한테 이 쪽지를 전하라더군.”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피오넬이 본의 손에서 밀봉된 쪽지를 낚아챘다.
쪽지 안에는 테레사가 아쿠아로드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찾아낸 고급 미끼가 담겨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폐왕녀를 꾀어낼 수 있어……!”
환희에 가득 찬 피오넬은 자신을 노려보는 본의 귀기 어린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무슨 내용이냐?”
“당신은 몰라도 돼요.”
“내게도 숨기겠다는 거야?”
“만약을 대비하는 거예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요.”
“흑룡 최강의 기사인 나를 네년의 졸개 취급하겠다?”
“흥. 정식 기사 지위도 빼앗긴 주제에.”
피오넬이 본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 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건방진 계집애였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테레사는 자신보다 이 조그만 계집애를 신임하고 있었다.
본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폐왕녀를 테레사 님께 끌고 간 뒤에 너부터 없애주마. 병사나 자살로 꾸미는 건 내 특기니까.’
본의 속셈도 모르고 피오넬은 왕립 여학교에 입학할 순간을 꿈꾸며 달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 펼쳐진 미래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었다.
* * *
야식이라니.
살로메디안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너무 늦었어요. 식사는 내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야밤에 먹는 것이 야식이다. 내일 먹는 건 아침이고.”
살로메디안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꾸 살이 빠지는 거야.”
“소화가 안 돼서 잠을 설칠 수도 있잖아요?”
그제야 살로메디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치료해주면 된다. 원한다면 잠도 재워주지.”
순간 어린아이처럼 다소곳하게 누운 나와 내 가슴을 토닥토닥 해주는 살로메디안의 모습이 상상됐다!
너무나 어색하고 민망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지는 걸까?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새침하게 답했다.
“사양할게요. 날밤 새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자장가도 불러줄 수 있는데.”
“됐어요!”
“그럼 얌전히 야식이나 드시지요, 공작부인.”
살로메디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기분 좋게 씩 올라갔다.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흘러나오는 미소였다.
싱그러움과 아름다움, 섹시함을 모두 가진 살로메디안의 살인 미소에 머릿속을 꽉 채우던 고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또다른 상념들이 빈자리를 메꿨다.
잘생겼다. 진짜 멋있어. 눈 호강하는구나.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살아있기 잘했어!
사람 홀리는 살로메디안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린 나는 불 꺼진 주방에 들어섰다.
불 꺼진 주방에는 서늘한 밤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청결하게 정돈된 주방을 한 바퀴 둘러본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이제 주방장을 깨워 볼까.”
“그러지 마세요. 깊이 잠들었을 시간이잖아요.”
“그대에게 야식을 먹이겠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 제가 만들게요.”
살로메디안이 흠칫 어깨를 튕겼다.
왜 저렇게 놀라는 걸까? 그저 요리하는 것뿐인데.
“꼭… 그래야만 하는가?”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윗사람은 항상 아랫사람의 처지를 살펴줘야 한다고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넌 명령만 하면 되지만, 아랫사람들은 불씨를 살리고, 물을 길어야 해. 왕족이라면 언제나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단다.」
나는 살로메디안의 옷자락을 잡고 가만히 흔들었다.
“간식 정도라면 제가 만들 수 있어요. 살롬도 그랬잖아요,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처음 만든 달걀 샌드위치를 살로메디안은 부스러기 한 점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두 번째로 만든 마물 통구이는 기사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평균 이상의 요리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빈센트 님도 그랬어요. 제가 구운 럼블크 고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고요.”
“그거야 휴고가 간을 했으니까…….”
“네?”
“아, 아니다.”
살로메디안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기색이었다.
내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살롬 뜻대로 야식 먹으러 왔잖아요. 살롬도 우리끼리 야식을 만들어 먹자는 제안을 받아주셔야죠.”
날 내려다보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에 고뇌가 가득 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고 긴 한숨.
“하아…….”
살로메디안을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방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식재료를 모았다.
“밀가루랑 마늘, 산딸기… 빵은 없네요. 달걀도 보이지 않고요.”
한 번 성공한 적 있는 달걀 샌드위치를 다시 만들려고 했는데 재료가 부족했다.
그러다 깨끗하게 손질된 생닭을 발견했다.
“닭이 있어요! 내일 아침 메뉴가 닭고기 스튜라더니.”
“그거로 뭘 하려고?”
살로메디안이 파리한 안색으로 물었다. 어쩐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음… 통구이?”
“그 정도라면 죽진 않겠지.”
살로메디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이왕 만드는 거니까 제대로 해볼까요? 산딸기랑 마늘을 닭 속에 넣고, 밀가루 반죽을 두껍게 입혀서 굽는 거예요. 설탕도 뿌리고요!”
내가 손뼉 치며 덧붙였다.
살로메디안이 흡, 하고 신음을 삼켰다.
나의 창조적인 요리 아이디어에 감탄한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드릴게요.”
팔을 걷어붙이고 조리대 앞에 섰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살로메디안을 위해 요리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심야 데이트 같기도 하고, 소꿉놀이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평범한 신혼부부 같지 않나?
“살구잼을 넣으면 더 좋을지도 몰라요!”
살구잼 병을 든 내 손목을 살로메디안이 덥석 붙잡았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놔. 야식은 내가 만든다.”
* * *
“살롬이 요리를요?”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누가 들을까 봐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댔다.
“쉿. 이건 그대와 나만의 비밀이다.”
전장을 누비며 적을 베어야 할 세드나 공작이 부엌에서 닭을 썰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웃는 놈들은 살려두지 않겠지만, 바바라나 네이선처럼 죽이지 못할 것들이 깝죽거리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야식 먹으러 가자고 꼬시더니, 손수 요리까지 만들어 바치셨다고요? 우와, 역사에 길이 남을 애처가 나셨네! 기념비라도 세워야겠어요!」
「숙부의 새로운 취미를 응원합니다. 선물로 식칼을 사드릴까요? 무쇠 냄비는 어떠십니까? 저를 위해서도 요리해주시죠!」
바바라와 네이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시아에게 요리를 맡기느니…….’
물론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가 만들어낸 생화학 무기를 감당할 수 있었다.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죽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아이시아가 제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 건 문제였다.
살로메디안이 관찰한 결과, 놀랍게도 아이시아의 미각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둔한 편이기는 했지만, 혀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충격적인 맛을 모를 리 없었다.
‘자기가 요리 똥손이라는 걸 알게 되면 실망하겠지. 내가 맛있다고 거짓말한 사실도 알게 될 테고.’
아이시아가 시무룩해하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큰마음 먹고 식칼을 쥐었다.
식칼이나 검이나 똑같은 날붙이였다. 썰어버리는 것도 닭 모가지나 인간 목이나 똑같을 터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식칼 날이 그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를 남겼다.
“살롬은 요리해본 적 있으세요?”
미심쩍은 얼굴로 아이시아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할 수 있다. 그편이 안전해.”
“제가 요리하다 다칠까 봐 걱정하시는 거군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이시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기며 긍정했다.
“바로 그거다! 세상에서 그대의 안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에이. 살롬은 과보호예요. 너무 심해요.”
아이시아가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심장을 통해 그녀의 진심 어린 기쁨이 전해졌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사락사락 고운 소리가 날 것 같은 긴 속눈썹.
달빛을 받아서 말갛게 빛나는 흰 피부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절 바라보는 붉은 보석 한 쌍도.
살로메디안은 놀림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집어치웠다.
아내를 위해서 요리하는 남편이라니! 이보다 훌륭한 전략은 없을 듯했다.
보통 연인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친밀한 시간을 갖지 않나?
부부라면 친밀함을 넘어선 농밀함,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었다.
못다 한 키스 실험처럼!
‘시아에게 점수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좋아, 살로메디안. 요리라는 걸 해보자!
살로메디안이 열의를 불태웠다.
그의 앞에 연분홍색 생닭 한 마리가 놓여있었다.
* * *
살로메디안이 완성한 음식은 닭튀김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황금빛 닭튀김을 보면서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닭고기를 이용한 요리는 수없이 봐 왔지만, 토막 낸 닭에 튀김옷을 입혀 튀기는 형식은 처음이었다.
황홀할 정도로 고소한 냄새 때문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먹어 봐.”
살로메디안이 무심하게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줬다.
“이건 제국식 닭요리인가요?”
“대륙 남서부를 정벌하러 갔을 때 먹어본 향토 음식이야. 거긴 뭐든 튀겨서 먹더군.”
“첫 요리로 다른 나라의 향토 음식을 만드셨다고요?”
“재료가 마땅치 않았으니까.”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 한 실금이 지어졌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변명하는 것 같기도 해서 어쩐지 귀여웠다.
“어떻게 먹는 거예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평소라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맨손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닭 다리를 집었다.
식사 예절도 모르는 여자라고 놀림당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머릿속은 노릇하게 튀겨진 닭다리를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포크와 나이프로 살을 발라낼 여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바사삭.
입 안에 기름진 풍미가 가득 퍼졌다.
바삭하고 고소한 황금색 튀김옷과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닭고기의 조화가 놀라웠다.
“와! 너무 맛있어요!”
“정말인가?”
“물론이죠! 주방장에겐 미안하지만, 살로메디안이 만든 게 더 맛있어요!”
살로메디안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나는 본격적으로 닭튀김을 먹어치웠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이제야 맛본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 배 속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점점 줄어드는 닭튀김이 안타까웠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
살로메디안이 내게 물을 건넸다.
“살롬은 안 드세요?”
“그대가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 배부르다.”
“정말 제가 다 먹어도 돼요? 후회하실 텐데요.”
“안 빼앗아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살로메디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뜨끔한 내가 어깨를 움츠렸다.
살로메디안의 통 큰 양보 덕분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닭 뼈와 살을 분하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닭튀김은 사라지고 한 무더기의 닭 뼈만 남았다.
한 마리를 통째로 해치우고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날 보고 살로메디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게 맛있었나?”
“이렇게 맛있는 닭요리는 먹어본 적 없어요. 맹세해요!”
“그럴 리가.”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날 의심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닭튀김의 맛을 의심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진짜예요! 기분 좋으라고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알았어.”
“그냥 알았어가 아니에요. 진짜 맛있었어요! 살롬이 만들어낸 건 놀라운 작품이었다고요.”
“그렇게 만족했다니 기쁘군.”
살로메디안이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내 미각을 점령한 요리를 만들어낸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평했다.
“살롬은 정말 못 하는 게 없네요. 요리까지 잘할 줄이야.”
약간의 패배감이 엄습했다.
내게도 요리 재능이 있다지만 살로메디안의 닭튀김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자신은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쿡쿡 웃으며 내 입가를 가리켰다.
“튀김 부스러기나 떼고 말해.”
“뭐 묻었어요?”
당황한 내가 튀김 부스러기를 떼어 내려 했다.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칠칠치 못하기는.”
탓하는 말이 아니라 귀엽다는 투였다.
내 입에 붙어있던 작은 튀김 조각을 살로메디안이 제 입으로 가져갔다.
먹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귓가에 흩뿌려지는 살로메디안의 숨소리가 심장을 내려쳤다.
“맛있네.”
닭튀김 때문에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이 은밀한 속삭임이 깊숙한 내부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뺨은 붉어졌고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이 들락거렸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훑기 전까지.
“반질반질해.”
짜르르한 전류가 온몸을 훑어 내렸다.
기름기가 묻었다는 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살로메디안의 눈빛은 화염처럼 뜨거웠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도 열기가 옮겨붙을 만큼.
“살롬.”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한 뼘 더 다가왔다.
“시아.”
그가 나를 부르며, 한 뼘 더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닿을 듯 가까워졌고, 서로의 입술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다.
야릇한 긴장감이 목구멍을 꽉 막았다. 전신의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며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렸다.
그때 이성이 가까스로 외쳤다.
‘아이시아! 닭튀김 냄새를 풍기면서 키스할 생각이야?’
‘괜찮지 않을까? 맛있다잖아!’
본능이 외쳤지만, 이성은 끈질겼다.
‘천년의 사랑도 식을 거다! 닭튀김 입 냄새 키스라니!’
거기서 항복하고 말았다. 이성의 완벽한 승리였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아쿠아로드 요리를 대접할게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던 살로메디안이 즉답했다.
“괜찮아. 그대가 먹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주겠다. 내 손으로.”
“살롬.”
“아쿠아로드 음식도 괜찮아. 말만 해라.”
어떻게 이 남자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항상 내 편이 되어주고, 날 걱정해 주고, 먹고 싶은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주는 남자라니.
너무 행복해서 두렵다는 말이 실감 났다.
언젠가 끝날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만나게 해준 운명에 감사했다.
벅차오르는 감동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도 살롬을 위해 요리하고 싶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시아. 요리가 여인의 일이란 편견은 버려.”
편견? 그런 건 없는데?
“그게 아니라 저도…….”
“나는 그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 족하니까.”
“그러니까 저도 그 기쁨을…….”
“다음엔 뭘 만들어줄까?”
살로메디안은 내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꾸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 의아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만들어준 요리를 또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살롬은 날 이렇게 생각해주는데. 난 살롬에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아.
키산드라의 영혼에 대해서 고백하지 못한 것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온천에서 털어놓을 계획이었지만 피오넬을 구하느라 기회를 놓쳤다. 이후엔 원정 준비에 바쁜 그가 잠시도 짬을 내지 못했다.
불쑥 ‘7년 전에 돌아가신 키산드라 님 귀신과 대화해요.’라고 고백하는 것도 뜬금없었다.
이걸 어쩐다?
나는 조심스레 화제를 바꿨다.
* * *
“토벌 원정은 흑룡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하셨죠?”
아이시아가 물었다.
토벌 원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살로메디안의 가슴은 납덩이를 백 개쯤 얹은 듯 답답했다.
“그래.”
“기사단에 여기사님들도 계시다고 들었어요.”
“제법 쓸 만한 친구들도 있지.”
수하들을 향한 신뢰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시아의 석류빛 눈동자가 한차례 일렁였다.
“저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순간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진득거리는 피와 진흙이 범벅된 불쾌한 감각이 뒷덜미를 덮었다.
내 아내가 기사가 된다?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곳에 아이시아를 밀어 넣는다고?
헛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돼.”
“왜요? 제가 엄청난 마력을 가졌다고 살롬도 말했잖아요?”
물론 아이시아가 대륙에서 손꼽을 만한 마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력을 가진 것과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컨트롤 실력도 제법 늘었는데…….”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더더욱 별개지.”
“하지만.”
“토벌 원정 중엔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일어난다. 그대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야.”
그래도 납득하지 않겠다는 듯 아이시아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살로메디안은 부드럽게 타이르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꿨다.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대는 지금처럼 영주 업무에 집중해줘.”
아이시아가 눈을 위로 치떴다.
도발적인 붉은 눈이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쿵 주저앉을 정도로.
“저도 토벌 원정에 함께 가고 싶어요.”
“!”
이번엔 살로메디안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아이시아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원정을 떠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해하지 않을게요.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훈련도 열심히 하고요.”
“삼 일 뒤에 떠나야 하는데 무슨 훈련을 한다는 건가?”
“살롬이 특훈해주면 되잖아요?”
아이시아는 의심의 여지 없는 진심이었다.
‘그 정도로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거군. 시아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거야?’
괜히 신이 나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기쁨과 환희가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항상 아이시아가 절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계약이 끝나고 세드나 공작령을 떠나길 바란다고.
오늘에서야 제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시아의 동행을 허락할 수 없었다.
‘너무 소중해서 바라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여인을 전쟁터에 데려간다? 야전침대나 참호 속에 시아를 재우고, 피비린내를 맡게 한다?’
살로메디안은 17년 전의 첫 출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개처럼 온몸을 감싸던 죽음의 그림자와 아무리 씻어도 가시지 않던 시체 썩는 냄새를.
자신이 죽인 자들의 마지막 눈동자와 생명이 사라지던 순간의 절망을 잊지 않았다.
그 절망을 아이시아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살로메디안이 겨우 답했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물러설 낌새가 없었다.
“왜 안 되는데요? 제가 공작부인이라서요?”
“…….”
“요리는 여자만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전쟁도 남자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살로메디안은 어떻게 아이시아를 설득시킬지 고민스러웠다.
“키산드라 님은 직접 원정대를 지휘하셨을 거 아니에요?”
아이시아가 키산드라를 들먹였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역사서에서 읽었어요. 키산드라 님은 무패의 여기사였다고요.”
“세드나 공작이었으니까 당연하지.”
“그 이상의 실력이 있으셨겠죠. 키산드라 님이 원정대를 이끌고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가 몰렸다면서요.”
“왜 키산드라에 관심을 갖게 된 거지?”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아이시아가 침묵했다.
심장을 통해 망설임, 미안함, 결심 등이 전해졌다.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읽으면서도 살로메디안은 온전히 해석할 수 없었다.
“살롬은 왜 키산드라 님을 싫어하세요?”
아이시아가 그에게 되물었다.
키산드라를 싫어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키산드라와 살로메디안은 좋다거나, 싫다는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세드나 공작과 그 후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잊고 싶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아이시아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마음은 절대로 없었지만 말이다.
“키산드라 님의 초상화를 다 치우셨다고 했잖아요. 키산드라 님의 옷을 고쳐 입는 것도 싫어하시고요.”
아이시아가 두 팔을 허리에 올리고 따지듯 물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 이유가 뭔데요?”
살로메디안은 천천히 대답을 골랐다. 허튼 거짓말로 아이시아를 속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었다. 케케묵은 일을 꺼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산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살롬. 혹시 키산드라 님께 안 좋은 일을 겪으셨나요?”
침묵을 인내하던 아이시아가 질문을 바꿨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잿빛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안 좋은 일이라면?”
“매질을 당했다거나, 어디 가둬졌다거나…….”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놀랍게도 아이시아는 그가 키산드라에게 학대당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시아. 그대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살로메디안이 탄식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물거리던 아이시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살롬이 10살 때 전쟁터에 보내졌다고 했잖아요.”
“세드나 공작이 될 아이는 더 어렸을 때 전쟁터에 보내진다. 키산드라는 6살 때부터 출정했고.”
“고작 6살짜리 여자애를 전쟁터에 보냈다고요?”
큰 충격을 받은 듯 아이시아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벌써 17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다. 지금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저주받은 공작가의 관습이라면 더더욱.
‘6살짜리를 전쟁터에 보낸 미친놈이 궁금해지는군.’
돌이켜보니 키산드라에게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자랐는지, 괴롭거나 슬프지는 않았는지.
물었더라도 키산드라는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띠었을 것이다.
「꼬맹이. 그딴 거 신경 쓸 시간에 하루라도 빨리 커라. 내가 속 편히 죽을 수 있게.」
키산드라는 그런 여자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웃던 여자. 웃는 얼굴이 늘 외로워 보이던 여자.
그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던 여자.
“키산드라는 역대 세드나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날 교육했다. 학대는 없었어.”
그렇다고 키산드라가 자애로웠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실로 엄격한 교관이었다.
살로메디안이 훈련에 태만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때는 봐주지 않고 벌을 줬다.
그중엔 보통 사람들이 학대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마신의 숲에서 식량 없이 일주일간 살아남아야 했던 건 학대가 아니겠지……?”
살로메디안이 자신 없다는 투로 턱을 쓰다듬었다. 굳은 표정으로 아이시아가 도리질 쳤다.
“학대예요.”
“눈을 가리고, 두 손을 결박한 채 늑대 무리에 던져진 건?”
“완전 학대죠!”
“흠.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지.”
살로메디안이 흘러내린 백금발을 뒤로 넘겼다.
무덤덤한 그를 보고 아이시아가 분개했다.
“살롬은 화나지 않으세요?”
“뭐가?”
“어린 시절을 빼앗긴 거잖아요?”
“가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빼앗긴단 말인가.”
아이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호수 위에 띄워진 꽃잎 같다고 살로메디안은 생각했다.
그 꽃잎을 쓸어 모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시간이 멈춰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기엔 심장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시아의 슬픔이 너무 깊었다.
“그건 정말… 너무해요. 세드나 공작도 사람이잖아요. 기계도 아니고, 신도 아닌, 그냥 사람이잖아요.”
아이시아의 눈망울에 물기가 서렸다.
그것만으로 온몸을 칼로 난도질당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통증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낯선 기쁨이 퍼져 갔다.
‘나도 사람인 건가……?’
모두가 아니라고 했고, 그래서 그 스스로도 아니라고 믿었지만 아이시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사람인가 보지. 아이시아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니까.
“왜 슬퍼하는 거야. 내가 겪은 일인데.”
“살롬이 슬퍼하지 않으니까요.”
“그대를 슬프게 하는 건 과거의 나라도 용서할 수 없어.”
“잠시만 슬퍼하게 해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그것뿐이잖아요.”
아이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살로메디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더듬었다.
온기를 머금은 보드라운 살결이 살로메디안의 마음을 온통 흔들었다.
“난 괜찮았다. 그대가 울 만한 일은 없었어.”
“그럼 행복했었나요?”
아이시아의 물음에 그는 숨을 집어삼켰다.
세드나 공작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행복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가장 뛰어난 황족. 뜻대로 살 수도, 원할 때 죽을 수도 없는 운명.
그 저주를 짊어진 자와 이어갈 자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 같은 건 까마득하게 먼 나라의 일인 것만 같았다.
아이시아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지금 행복하다. 그대를 만나서.”
살로메디안의 말에 아이시아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반절의 안심과 반절의 안타까움.
아이시아가 두 손으로 살로메디안의 뺨을 감쌌다. 아이시아를 만나고 처음 느껴본 온기가 은은히 퍼졌다.
행복이 아닌 다른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 살로메디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아이시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하게 해줄게요.”
아이시아가 다짐하듯 말했다. 그녀의 눈망울에 맑은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시야가 새하얗게 탈색되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아이시아만 남은 듯했다.
순간 살로메디안은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오늘을 위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이시아와 함께라면 영원히 행복하리란 예감이 종교처럼 자리 잡았다.
‘이미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지경이지만.’
살로메디안이 입술 끝을 씹었다.
아이시아의 손은 따뜻했고, 핏줄을 타고 퍼진 온기는 목 끝까지 치밀었다.
지금 당장 아이시아를 가지고 싶었다.
원색적인 욕망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처럼 가슴을 지져댔다.
배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가라앉히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왜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까.
그녀의 감정에 동조했기 때문이겠지만 붉게 부풀어 오른 눈동자를 아이시아가 볼까 두려웠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맹목적으로 아이시아를 추종하는 제 모습을 들킬까 봐 무서웠다.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됐을까.
“시아. 그런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편만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리란 법 있나요? 아내도 남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죠.”
아이시아가 샐쭉하고 눈을 흘겼다.
그 모습조차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가슴이 마구 벌떡였다.
남편과 아내. 살로메디안의 귀에 그보다 달콤한 말은 없었다.
‘미치도록 갖고 싶은 여자가 이미 내 아내라니. 믿기지 않는군.’
처음 심장을 빼앗겼을 때의 좌절은 씻은 듯 사라졌다.
살로메디안은 고작 심장 반쪽을 내주고 놀라운 행운을 거머쥔 것이었다.
“나도 그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제국을 제물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쪽 팔로 아이시아의 허리를 휙 감싸 안았다.
놀란 아이시아가 잠시 저항하는가 싶더니 순순히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살롬.”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
아이시아 모르게 계약 마법을 걸어놓긴 했지만 살로메디안은 다시 한번 맹세했다.
그 무엇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아이시아를 지키는 것.
그녀의 행복을 위해 목숨 바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드나 공작이 아닌 인간, 살로메디안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누군가 그 목표를 방해한다면?
죽어서도 지옥으로 갈 수 없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평생 익힌 살상 기술을 총동원해서라도.
하지만 현실은 살로메디안의 바람과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었다.
토벌 원정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려 한 달이나 아이시아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생전 처음으로 세드나 공작의 의무를 저주했다.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그다음은 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