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 *
아이시아가 제 손아귀를 벗어난 뒤로 테레사는 단 하루도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본을 만나고 난 후 오랜만에 꿀잠을 맛봤다. 피부 상태도 좋고 입맛도 돌아왔다.
복수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아이시아를 잡아 오면 얼마나 컨디션이 좋아질까?
“천천히 재미나게 놀아줄 거야. 애들 장난은 이제 끝이지.”
아이시아를 괴롭혔던 건 일종의 심심풀이였다.
매춘부 출신 어미 때문에 아이시아의 그늘 밑에서 자라왔던 어린 시절의 앙갚음도 더해서.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득이 많았다.
아이시아가 괴로워할수록 아랫것들은 자신의 발밑에서 굽실거렸다.
아이시아를 적통 왕세녀라고 주장하던 귀족들도 전 왕비의 가문처럼 멸족당할까 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걸 5년이나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안 하면 찜찜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재미나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친 거였다.
감히 제 머리에 와인을 쏟고 훈계질까지 했다.
세드나 공작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후 국왕의 사랑도 예전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이시아 때문이었다.
“건방진 년. 평생 후회하게 해주마.”
물론 제멋대로 연락을 끊었던 본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배신한 개는 때려죽여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은 토끼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성급함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건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테레사의 정보망에 의하면 본은 흑룡기사단에서 완전히 버려졌다.
테레사는 그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이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었다.
배신한 개에게 모든 걸 맡기는 실수는 저지를 수 없었다.
아이시아는 제법 똘똘했고, 아이시아가 빌붙은 세드나 공작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아이시아를 다시 제 발밑에 꿇리려면 배신 전력이 있는 개가 아닌 다른 수가 필요했다.
테레사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10대 초반의 소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남색에 가까운 푸른 머리칼을 가진 미소녀는 귀족 영애 못지않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피에타가 왕세녀 전하를 뵈옵니다.”
“오랜만이구나, 피에타.”
“전하의 은총 덕분에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신전 수업은 따라갈 만하고?”
“대신관이 되어서 테레사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이 우아한 모습을 보고 누가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나 하던 아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을까?
피에타는 13살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리하고 약삭빠른 아이였다.
어린 시절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테레사는 무척 흡족했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무엇이든 명령만 내리십시오. 전하는 저와 가족의 은인이시니까요.”
“네가 능력을 인정받고, 너희 가족이 비단옷 걸치고 사는 건 모두 내 덕이지.”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요!”
피에타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답했다. 반쯤은 진심일 거였다.
테레사가 힘을 잃으면 피에타와 그 가족은 다시 뒷골목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좀 위험한 일인데 할 수 있겠니?”
“물론이죠! 뭘 하면 되나요?”
“세드나 공작부인이 된 내 강아지를 잡아 와야 해.”
“폐왕녀… 말씀이신가요?”
피에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이시아가 테레사를 엿 먹이고 제국의 공작부인이 되었다는 건 아쿠아로드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너보고 다 하라는 건 아니야. 본이라고, 멍청하지만 검 하나는 제법 다루는 뛰어난 조력자가 있거든. 그가 도울 거야.”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위험할 것 같아? 발 빼고 싶니?”
테레사가 정곡을 찔렀다.
보통 아이라면 크게 당황했겠지만, 피에타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전하의 명령을 거역하면 살아남지 못할 텐데 발을 뺄 수야 없죠.”
“똑똑하구나.”
“제가 명령을 잘 수행하면 분명 상을 내려주시겠죠?”
“호호호! 어떤 보상을 줄 건지 미리 이야기해달라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면서요.”
“좋아! 성공하면 신관 후보생은 그만둬도 좋아. 너를 왕립 귀족 여학교에 보내줄 테니까.”
테레사의 말에 피에타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거긴 시골 귀족이나 재산이 없는 귀족들은 꿈도 못 꾸는 곳이잖아요?”
“최고 명문가 영애들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지. 거길 졸업하면 너도 귀족 도련님과 혼인할 수도 있어.”
“뒷골목 출신인 제가요? 신관이 아니라 귀족 부인이 된다고요?!”
“그래. 진짜 귀족이 되는 거야. 내가 진짜 왕세녀가 된 것처럼.”
피에타의 눈동자에 어린애답지 않은 욕망이 번득였다.
고리타분한 신전 생활보다는 화려한 사교계가 더욱 매혹적이었으리라.
‘본도 그렇고, 하층민들은 신분 상승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버러지 같은 것들. 큭큭.’
테레사가 조소를 감추고 다정하게 물었다.
“실패하면 너희 가족들은 뒷골목 시궁창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할 수 있겠니?”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피에타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키겠습니다, 전하!”
“그 약속 지키는 것이 좋을 거야.”
테레사가 손뼉을 쳤다. 갑옷을 입은 기사 넷이 피에타를 포위했다.
기사 중 한 명은 커다란 마대 자루를 들고 있었다. 겁에 질린 피에타가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이러세요?!”
“얌전히 있어. 괜히 저항하면 더 아프단다.”
“전하!”
기사들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피에타를 자루에 처넣었다.
자루에 갇힌 피에타가 발버둥을 쳤다.
“살려주세요! 전하,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피곤하다는 듯 테레사가 눈시울을 주물렀다.
“시끄러우니까 얼른 데려가. 가는 동안 잘 설명하고.”
“알겠습니다. 왕세녀 전하!”
“너무 멀쩡하면 의심스러우니까 적당히… 알지?”
“예!”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테레사에게 경례를 붙였다.
시끄러운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테레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왕세녀 침전과 연결된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채찍과 낙인, 쇠못이 박힌 관과 쇠창살 형틀 등 테레사가 수집한 고문 도구들로 가득했다.
흉흉한 고문 도구들을 쓰다듬으며 테레사가 미소를 머금었다.
“얼른 와, 아이시아 언니. 선물을 잔뜩 준비했으니까.”
* * *
살로메디안의 실험(?)은 잠시 미뤄졌다.
내 허리를 만져본 살로메디안이 실험보다 식사가 먼저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하루 다섯 끼씩 먹도록.”
“소화 불량으로 쓰러질 거예요.”
“누가 보면 내가 굶기는 줄 알겠다.”
살로메디안이 못마땅한 눈으로 날 훑었다.
살이 빠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열흘 동안 굶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거나 어지럽지는 않았다.
“치료 신관이 없었다면 뼈만 남았겠지.”
“세드나 공작령에 치료 신관이 왔었다고요?!”
제국은 아쿠아로드와 달리 치료 신관이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치료 신관도 황족과 대귀족 전속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황제 주치의니까 실력은 괜찮았을 거다.”
게다가 황제 주치의를?
“살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무척 궁금했지만, 한편으로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늘 그 이상을 보여주는 살로메디안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의 대답은 날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네이선에게 내 뜻을 전달했을 뿐이다. 당장 어의를 내놓지 않으면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가슴을 편 살로메디안이 당당하게 답했다.
현기증이 핑 돌면서 손끝이 달달 떨렸다.
“내란이라면 전쟁 말인가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흑룡기사단도 동의했다.”
“기사님들까지……?”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어이없어하는 건데요?
휴고와 빈센트라면 말리기는커녕 부추겼을 게 분명했다.
왠지 이번만큼은 바바라도 살로메디안을 내버려 뒀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 순순히 받아들이시던가요?”
“그럴 리가.”
“제가 아프다는 말씀은 하셨죠?”
“내 아내의 건강 상태를 왜 황제 따위에게 말해야 하지?”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어의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셨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배시시 웃었다.
“물론이다.”
귀여운데 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고, 살로메디안을 교육시킨 키산드라도 원망스러웠다.
애를 어떻게 키우면 이렇게 되나요?
“긴급 각료 회의가 열리고 전 군에 비상 명령이 떨어진 것 같지만… 어의를 데려왔다. 그대를 위해서.”
살로메디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파랗게 굳은 내 표정을 보고 그가 물었다.
“시아, 기쁘지 않은가? 이 정도면 꽤 자상한 남편이잖아?”
자상한 남편이라고 추켜세워줄 줄 알았는데 내가 아무 말 않자 서운한 기색이었다.
나는 기나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살롬이 애써주신 건 고마워요.”
“그런데?”
“하지만 절차와 법도를 무시하고 폐하를 협박하는 건 안 돼요!”
“왜?”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를 협박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다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살로메디안만 보면 잔소리를 퍼붓는 바바라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살로메디안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1단계, 원하는 것이 생긴다.
2단계, 내놓으라 협박한다.
3단계, 거절하면 무력을 행사한다.
세상의 상식도 대륙 최악의 마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결혼식에서도 그랬다.
첫 번째 결혼식에서는 신부의 가슴을 꺼내 죽였고, 두 번째 결혼식 때는 예식을 중단시켰다.
“일단 황제 폐하는 살롬보다 높은 분이고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입식 교육을 해봤자 소용없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작부인, 말씀하신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마침 시종이 오리고기 튀김과 산딸기 파이를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보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일단 밥부터 먹지.”
살로메디안의 말이 그렇게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 * *
“회복식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보통 묽은 수프를 먹지 않나?”
살로메디안이 기름지고 달콤한 요리를 보며 물었다.
나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고기 튀김이랑 산딸기 파이가 먹고 싶은걸요?”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염려하는 거다.”
“꼭꼭 씹어서 먹을게요. 고기랑 단 것이 땅겨요.”
“그대가 뭘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다.”
“그랬나요?”
“항상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잖아?”
살로메디안이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포크로 튀김 한 조각을 찍으며 답했다.
“아무거나 잘 먹는 건 사실이에요. 가끔은 엄청 먹고 싶은 게 있었지만요.”
“그동안 왜 말 안 했지?”
“원하는 걸 말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더라고요.”
“…….”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줄 거란 믿음도 있어야 하고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떼를 쓰지 않는다.
떼 써봤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욕망을 숨기고 남들이 듣기 좋을 소리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저는 괜찮아요. 이것으로 충분해요. 아무거나 좋아요.
그러다 보면 제 말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나도 그랬다. 세드나 공작령에 오기 전까지.
“살롬은 제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게 해줄 거죠?”
화살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살로메디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질문에 담긴 외로움과 간절함을 읽었기 때문이겠지.
“말만 해. 그대가 먹고 싶다면 무엇이든 구해줄 테니.”
그가 짓눌린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거라도요?”
“세드나 공작령의 전 재산을 팔아야 한다고 해도.”
맹세하듯 살로메디안이 한쪽 손을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며 훈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그의 심장을 훔쳤다는 것도, 계약 아내라는 것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진심이었고,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와 내 곁의 사람을 믿는 것.
마력 불꽃이 내게 준 교훈이었다.
“살롬을 믿어요. 살롬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봄바람처럼 따스한 살로메디안의 진심을 느끼며 함박웃음 지었다.
그가 잠시 넋을 잃고 날 바라보았다.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튀김 조각이라도 묻은 걸까 싶어서 얼굴을 매만졌다.
“왜 그렇게 봐요?”
“너무 아름다워서…….”
말하다 말고 살로메디안이 푸른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요?”
“아, 아니…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 그렇지만, 그래.”
살로메디안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귓바퀴가 은은히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괜히 놀려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제가 좋아요?”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움찔 튕겼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제법 굵게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당황하다니!
마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제국 제일의 애처가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나는 그 소문의 진실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아내가 바로 나라는 것도 비로소 실감 났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고, 이 행복이 끝나 버릴까 두려웠다.
나는 애써 두려움을 지우고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왜 대답을 못 하세요?”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다가 눈매를 사르르 접었다.
“제가 걱정돼서 살롬이 울었다는 소문도 돌던데. 진짜인가 봐요?”
“그런 적 없다.”
“아내가 걱정돼서 쿠데타까지 일으키려 한 사람이 울지도 않았다고요?”
“나는 평생 울어본 적 없다.”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놀라운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갓난아기였을 때는 모르지만,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는 없다.”
“키산드라 님께서 돌아가실 때도요?”
“축하해야 하는 날인데 왜 울지?”
세드나 공작에겐 죽음이 축복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마저 울지 않다니. 내가 키산드라였다면 서운했을 것 같았다.
키산드라 님은 온천에 계실까?
키산드라는 빙의를 통해 마력 폭주를 잠재워주려고 했다.
지금은 온천에 있을까? 혹시 공작령에 저주를 내리려고 준비 중인 거 아냐?
그릇을 싹싹 비우고 난 뒤 살로메디안에게 말했다.
“온천에 가봐야겠어요.”
“마른 온천을 살릴 방도를 아직 못 찾았는데?”
“거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사람?”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궁금해도 참으라는 뜻으로 내가 한쪽 눈을 찡끗했다.
“곧 가르쳐드릴게요.”
키산드라의 영혼에 대해서 살로메디안에게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 * *
하지만 우리는 온천까지 가지 못했다. 마신의 숲에서 거의 죽어가는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살려주세요……!”
살로메디안이 소녀의 비명을 들은 것이 우연이었다면 소녀가 살아남은 것은 분명히 기적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웨어울프가 아이를 뜯어먹기 직전이었으므로.
“살롬! 아이를 구해주세요!”
내가 외치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의 손가락에서 물방울이 튕겨 나왔다.
그가 웨어울프를 처리하는 동안 나는 아이를 살펴봤다.
고작 11살이나 되었을까? 짙은 남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겁에 덜덜 떨고 있었다.
“많이 놀랐지? 이제 괜찮아.”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아이가 내 치맛단에 매달렸다. 초점 없는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마신의 숲에서 헤맸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발은 톱날로 긁어댄 것처럼 피딱지가 가득했다.
“아쿠아로드 아이지?”
흙먼지와 피로 더러워지긴 했지만, 소녀는 아쿠아로드 신전에서 입는 푸른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제물로 버려진 거니?”
소녀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죄 없는 소녀들을 제물이랍시고 살해하는구나.
나 역시 같은 처지였기에 심장을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구역질할까 봐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
웨어울프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살로메디안이 다가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소녀를 바라보는 눈빛도 날카로웠다.
“저는… 저는…….”
살로메디안의 기세에 눌린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그를 책망했다.
“살롬. 죽다가 살아난 아이예요. 저처럼 제물로 버려진 아이라고요.”
“보통 아이라면 여기까지 살아서 올 수 없다.”
“이 아이가 첩자라도 된다는 건가요?”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되물었다.
살로메디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소녀의 정체를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혹시 얘가 아쿠아로드인이라서 그래요?”
“마신의 숲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아쿠아로드인에게도, 제국인에게도.”
“저도 살아남았잖아요?”
“우연이 반복되면 우연이 아닌 법이지.”
의심을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챈 소녀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소녀에게 둘러줬다.
그때 소녀가 더듬더듬 입술을 뗐다.
“우, 우연이 아니에요. 저는 치료 마력을 쓸 수 있어요…….”
나도 살로메디안도 깜짝 놀랐다.
아쿠아로드인 중에 치료 마력을 가진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귀족이나 고위 신관이었다.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과 단정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귀족 영애를 제물로 바칠 리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소녀에게 물었다.
“신관 후보생이냐?”
“…네.”
“마력을 가진 신관 후보생을 제물로 쓰지는 않았을 텐데?”
“마물이 너무 늘어서 보통 제물은 안 된다고… 저 같은 특별한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흑흑.”
소녀가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마물이 급증한 것은 나 때문 아닌가? 마신의 계약자에게서 불의 심장을 훔쳤으니까.
살로메디안의 얼굴에도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뭐라 탓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울린 게 아니다.”
“말씀이 심하셨어요.”
“…….”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잡아먹힐 뻔하다가 겨우 살았는데, 구해준 사람이 의심하면.”
살로메디안을 흘겨본 후, 소녀를 바라봤다.
작고 여윈 등을 쓰다듬어줄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그래. 네 이름이 뭐니?”
“피오넬이에요.”
피오넬이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아이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밝게 빛나는 것을 그때는 보지 못했다.
* * *
살로메디안이 직접 피오넬의 상처를 돌봐줬다.
피오넬은 빠르게 회복했다. 공작저에 적응하는 속도도 놀랍도록 빨랐다.
원래부터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란 아이처럼 사용인들 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빨래 너는 것 도와드릴게요! 감자 껍질도 깎고, 손바느질도 할 수 있어요.”
“꼬마가 못 하는 게 없구나?”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죠!”
“치료 마력도 쓸 줄 안다던데 사실이니?”
“작은 상처나 병은 고쳐 드릴 수 있어요!”
피오넬의 말에 흰 앞치마를 한 하녀들이 몰려들었다.
“무릎이 밤마다 쑤시는데 도와줄 수 있어?”
“무쇠 냄비에 손바닥을 데었는데…….”
“감기몸살도 낫게 할 수 있다고?”
잔병치레에 시달리는 하녀들을 피오넬은 거절하지 않고 살뜰히 돌봐줬다.
하녀나 시종은 물론 기사들까지 피오넬을 찾아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제 막 회복한 피오넬이 기력을 잃을까 봐 내가 한마디 했다.
“어린 피오넬이 쇠약해질까 봐 걱정됩니다. 부디 주의해주세요.”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공작부인께서 직접 살리신 아이인데, 부려먹어서 죄송합니다!”
하녀들이 내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간단히 충고한 것뿐인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피오넬이 울상을 지으며 내 앞에 나섰다.
“이분들은 잘못한 것 없어요. 쉬라고 하셨는데 제가 치료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니 변명할 필요 없다.”
“공작부인. 화나셨어요?”
겁먹은 목소리로 피오넬이 물었다.
내 얼굴이 또 딱딱하게 굳어있었던 걸까?
어린아이를 겁먹게 한 것이 미안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입꼬리와 뺨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왜 너한테 화를 내겠니. 우리 저택 사람들을 돌봐주니 감사를 표해야지.”
“공작부인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어린아이답지 않게 비장한 피오넬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 너는 편히 쉬다가 가면 돼.”
“공작부인… 저를 쫓아내실 작정이세요?”
피오넬의 눈망울에 샘물처럼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하녀들이 탄식을 삼키며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피오넬을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공작부인.”
“제발 부탁드릴게요. 피오넬의 치료술 덕분에 저희도 안심하고 공작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도 부탁드려요.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쫓아낸다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는데 왜들 이러지? 내가 뭘 어쨌다고?
당혹스러움 대신 그림 같은 무표정이 얼굴에 들러붙었다.
덩달아 하녀들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덜컥 걱정이 앞섰지만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좌중을 둘러봤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우아해야 했으므로.
“피오넬을 쫓아낼 생각 없습니다. 가족에게 가고 싶다고 하면 돌려보내겠지만, 공작저에 남고 싶다면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하녀들이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피오넬이 앙증맞은 콧대를 높였다.
“그것 보세요. 공작부인께서는 저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주신다니까요?”
친동생이라고?
잘난 척하는 피오넬을 보면서 쓴웃음을 삼켰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높으신 분의 후광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피오넬을 보살피기로 한 것은 사실이라, 왜 없는 말을 지어내느냐고 무안을 주지 않았다.
친동생이면 어떻고, 의동생이면 어떻겠는가. 똑같이 제물로 버려진 처지인 것을.
“공작부인께서 보살펴주신다니. 정말 잘됐구나, 우리 피오넬!”
“타지에서 서로 챙겨주는 건 고향 사람들뿐이라니까!”
“피오넬이 귀엽고 영특하니까 공작부인께서도 아끼시는 거지.”
하녀들이 피오넬을 쓰다듬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피오넬은 그들의 친딸이나 막냇동생처럼 보였다.
“헤헤. 고마워요. 모두 언니, 이모들 덕분이에요.”
나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피오넬은 나보다 훨씬 많은 이들과 다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회에 녹아드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 나도 피오넬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타인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내게 항상 어려운 과제였다.
영주 대리로서 업무를 지시하고, 결과를 보고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모두들 나를 어려워했다.
그들 처지에서 나는 까마득하게 높은 황족님이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피오넬이 공작저에 잘 적응하면 좋지. 별문제 없을 거야.
지금은 피오넬보다 키산드라의 영혼을 승천시키고 온천을 되살리는 일이 더 중요했다.
활기를 띠기 시작한 영지를 돌보는 것도 소홀해서는 안 됐다.
마력 폭주 이후로 키산드라의 영혼은 자취를 감추었다.
귀신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는 제발 가줬으면 싶었는데,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찜찜했다.
평범한 귀신도 아니고 공작령에 저주를 내릴 수 있는 괴물급 귀신이었으니까.
온천에 가보고 싶었지만, 흑룡기사단의 정규 훈련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자신 없이는 절대 못 간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마물의 증가와 이상한 움직임.]
아쿠아로드 멸망 예언서에 적혀있었던 징조였다.
피오넬을 잡아먹으려 했던 웨어울프는 저택 주변에서 볼 수 없었던 마물이라고 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함이 움텄다.
진짜 저주의 씨앗이 태어난 걸까. 아니면 마신의 계약자가 사라진 탓일까. 테레사가 조작했다는 예언서 원본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수많은 고민을 줄줄이 매달고 집무실로 향했다.
4시간만 참으면 식사 시간이었다.
요즘 내 하루의 낙은 목욕이 아니라, 살로메디안과 함께하는 저녁 만찬이었다.
* * *
“피오넬이 오늘 큰 공을 세웠다.”
놀랍게도 살로메디안이 꺼낸 첫마디는 피오넬이었다.
나는 치즈가 들어간 흰 빵 대신 혀를 콱 깨물고 말았다.
“큽.”
“시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달콤한 식전주로 목을 축이고 살로메디안을 바라보았다.
종일 훈련을 했다고 들었는데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씻고 막 나온 사람처럼 낯빛이 발그레했다.
겨울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도 싱그럽게 빛났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그의 외모에 위로받으며 질문을 건넸다.
“피오넬이 무슨 공을 세웠나요?”
“고기가 딱 떨어졌었거든. 흑룡기사단 최악의 위기였지.”
“제가 정화해놓은 마물 고기가 있었잖아요?”
“그 고기는 진작 동났다. 기사 놈들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난리였으니까.”
“절 부르시지 그랬어요? 다시 정화해드렸을 텐데.”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전, 기사 한 명이 집무실을 찾아왔었다.
공작부인의 훈련 참관을 바란다고 했는데, 내가 허락하기도 전에 바바라가 핏대를 세웠다.
「공작부인 바쁘신 것 안 보이세요? 주둥이를 썰어버리기 전에 꺼져요! 맨날 하는 칼질, 뭐 대단한 구경이라고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요?!」
기사는 기가 질려 도망쳤고 나는 훈련 중인 살로메디안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참관을 바란 게 아니라, 마물 고기를 원했던 거구나…
고기 때문에 공작부인을 부를 수 없으니까 핑계 댄 거고.
살로메디안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긴 숨을 토했다.
“하아… 피오넬이 아니었다면 굶주린 흑룡 놈들이 쿠데타를 벌였을 거다. 썩을 놈들.”
신관 후보생이었던 피오넬이라면 마물 시체 정화법도 알고 있을 터였다.
맛은 어땠을까?
“피오넬이 정화한 고기는 어땠어요?”
내 요리 솜씨를 평가받는 것도 아닌데 왠지 두근거렸다.
흑룡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피오넬의 고기가 내 것보다 맛없길 바랐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다.
“그대가 정화한 것처럼 맛있더군.”
“아, 그래요…….”
“앞으로 마물 시체 처리는 피오넬에게 맡겨도 되겠어.”
“네?”
“그대는 바쁘지 않나?”
서운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아니, 거친 파도가 되어 날 휩쓸고 지나갔다.
마물 정화와 고기 굽기는 기사들과 친해질 유일한 기회인데. 이제 필요 없으니까 빠지라고?
그 시간만큼은 나도 주군의 아내가 아닌 공작령을 지키는 동료로서 기사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흑룡기사단원이 된 것 같은 뿌듯함에 힘든 줄도 몰랐었는데.
소중한 순간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내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피오넬은 어린애예요. 피오넬의 치료술에 기대는 사람도 많은데 마물 정화까지 하려면 힘들 거예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던데? 시켜만 달라고.”
피오넬이 어떤 표정으로 살로메디안에게 말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분명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눈웃음을 쳤겠지.
속으로 피오넬을 깎아내리는 날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피오넬을 질투하는 거야?
버려진 어린아이를,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데려온 아이를 질투한다고?
같은 고향, 같은 처지의 아이를 아껴주지는 못할망정!
부끄러움에 볼이 달아올랐다. 입맛도 싹 달아났다.
음식이 그대로 남은 접시를 바라보며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시아. 식사가 입에 안 맞는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한 식탁이었지만 오늘은 뭘 씹어도 까끌까끌하기만 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불편하면 말해. 치료해줄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배려도 날 울적하게 만들었다.
공작령에서 치료술을 쓸 수 있는 건 살로메디안과 피오넬뿐이었다.
내게 치료 마력이 있었으면 기사단 전속 치료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마물 토벌에도 따라갈 수 있고.
일 년에 두 번씩 무려 한 달 동안 흑룡기사단은 제국 전역을 돌며 마물을 토벌한다.
정기 훈련을 겸한 여정인데 긴 시간 동안 살로메디안과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서 살로메디안이 그 말을 꺼냈을 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피오넬이 허락하면 정기 토벌에 데려갈 생각이다.”
“뭐라고요?!”
“왜 그렇게 놀라지?”
“피오넬은 겨우 11살이에요! 마물 토벌에 어떻게 데려간다는 거예요?”
나는 못 가는데 피오넬을 데려가다니! 서러움을 넘어선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10살 때부터 전장에 나갔다.”
“살롬이랑 피오넬이 똑같아요? 살롬은 마신의 계약자잖아요! 보통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되죠!”
날 향한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차,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낸 말이라 거둬들일 수 없었다.
“가엾은 제물 소녀와 마신의 저주를 받은 내가 똑같을 수 없겠지.”
살로메디안이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알겠으니까 식사 마저 하도록 해.”
“살롬.”
“음식 식겠다.”
살로메디안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에 온기가 사라졌다. 대신 무거운 침묵이 심장을 옥죄었다.
온종일 기다렸던 식사 시간이 견딜 수 없이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
* * *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한밤중에 바바라의 침실을 찾고 말았다.
잠옷을 입은 날 본 바바라가 초록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억울하게 죽은 처녀 귀신처럼 그늘진 내 얼굴 때문에 놀란 건지도 몰랐다.
“시아?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바비… 정말 미안한데 들어가도 돼요?”
“당연하죠!”
“고마워요.”
“무슨 일 있어요? 설마 각하 놈이 괴롭혔어요?”
바바라가 내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 한쪽 자리를 내줬다.
꼭 끌어안을 수 있도록 깃털 베개를 건네주기도 했다.
바바라의 배려심에 코끝이 찡해졌다.
한차례 울고 나온 터라, 툭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피오넬이…….”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고, 편협한 데다가, 졸렬한 말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친구가 있기에 더욱 그랬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바바라가 활짝 웃었다.
“그 어린년 잡아 족쳐야겠는데요?”
“족친다고요? 피오넬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요?”
화들짝 놀라는 내게 바바라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시아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
“고 계집애가 잘못한 게 왜 없어요?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게 훤히 보이는데.”
“호박씨라고요?”
“하녀들의 반응이 이상했다고 했죠?”
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명탐정처럼 예리한 눈동자를 굴리던 바바라가 확신에 차 말했다.
“피오넬이 미리 주둥이를 털었을 거예요. 자기는 시아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이라고요.”
“자길 쫓아내지 말라고 울먹였는걸요?”
“그것도 개수작의 일종이죠. 피오넬은 여러 가지 술수를 동시에 부리고 있어요. 어휴, 깜찍한 년.”
바바라는 피오넬의 모든 행동을 술수라고 규정했다.
좀 너무하다 싶다가도 내 역성을 들어주는 바바라가 무척 고마웠다.
내 친구인 논리왕 바바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했다.
“첫째, 시아의 후광을 이용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둘째, 궂은일 마다치 않는 착한 아이 흉내 내기. 셋째,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어필해서 동정심 사기.”
“11살짜리 아이가 그 모든 걸 계획했다고요?”
“예언서 조작해서 시아를 모함했을 때, 테레사가 몇 살이었죠?”
“…14살이었어요.”
짓눌린 신음을 삼키며 겨우 답했다.
상식적으로 예언서를 조작하고, 왕세녀를 폐위하는 건 14살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레사는 모든 것을 해냈어요.”
“하루 이틀 준비한 계획이 아니었을 거예요. 세상에는 시아처럼 선량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침묵했고, 바바라는 분노를 터뜨렸다.
“목숨을 살려줬는데 뒤에서 수작이나 부리고. 아주 고약한 꼬마예요!”
“피오넬은 예쁜 데다가 똑똑하고 마력까지 가졌어요. 미리 계획하고 접근한 거라면 공작저 사람들을 포섭하는 건 쉬웠을 거예요.”
잠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예상이 맞는다면 피오넬이 마물에게 잡아먹힐 뻔한 장면도 연출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죄 없는 아이를 의심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악한 피를 타고난 아이도 있는 걸까.
“살롬은 처음부터 피오넬을 의심했었어요. 평범한 아이가 마신의 숲에서 살아남을 리 없다고요.”
“치료 마력 덕분이라고 했다죠? 마력도 있는데 왜 자기 몸을 치료하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아무리 기운이 떨어졌다고 해도 발은 치료했어야 정상이에요. 정말 살아남고 싶었다면.”
하지만 내가 본 피오넬의 발은 처참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얼굴과 손도 흉터로 가득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쓰디쓴 패배감이 밀어닥쳤다.
어린아이에게 속았다는 사실보다, 피오넬 뒤로 익숙한 그림자가 겹쳐 보이는 까닭이었다.
“분명 테레사 짓일 거예요.”
키산드라도 내게 충고했었다. 이복동생을 경계하라고.
내 낯빛이 덜컥 어두워졌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살롬처럼 최소한의 의심은 했어야 했는데…….”
“시아가 착해서 그런 거죠. 자책하지 말아요. 저는 시아의 그런 면을 좋아해요.”
바바라가 날 위로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선량함을 이용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뇨. 테레사는 제가 어떻게 행동할지 계산했을 거예요.”
“네?”
“일부러 피오넬을 저와 같은 처지로 만든 거예요. 그 애를 의심하기보다 공감하리라는 걸 아니까요.”
테레사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나에게 당한 전력이 있으니, 허술하게 덤빌 리가 없었다.
“저한테 복수한다고 했거든요.”
“누가 누구한테 복수를 한다고요? 천하의 개쌍년 같으니! 악마도 울고 갈 년!”
바바라가 작은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질펀한 욕이 앙증맞은 입술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창자를 썰어서 개 밥그릇에 던져버릴라!”
“궁금한 건 테레사가 피오넬을 보낸 진짜 목적이에요.”
“등장만으로 시아 복장 터지게 만들고 있잖아요?”
“피오넬의 정체는 탄로 나게 되어있어요. 어린애가 꾸밀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고요.”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살로메디안에 따르면 피오넬은 치료 마력 외에 다른 힘은 없었다.
자객이 되어 날 해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테레사는 첫 번째 반격 카드로 피오넬을 선택했다.
암살자를 보내거나 정치적 공세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어린 여자아이를 내민 것이다.
네 진짜 목적이 뭐야. 테레사…….
테레사가 신뢰하는 피오넬은 어떤 아이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둔중한 두통과 위가 지끈거렸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오래 속을 비워둔 탓 같았다.
“시아. 일단 피오넬을 감시해야겠어요. 아쿠아로드 쪽에 사람을 보내서 뒤를 파볼게요.”
맡겨만 달라는 투로 바바라가 말했다.
내일부터 피오넬을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정체가 무엇이든 피오넬이 11살이고, 테레사에게 이용당하는 처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동정심보다 중요한 것은 시아의 안전이에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바바라가 단호하게 충고했다.
“시아는 폐왕녀가 아니라 세드나 공작령의 공작부인이에요. 시아가 무너지면 공작령도 무너져요. 그걸 잊지 마세요.”
과장이 지나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바라의 얼굴에는 장난기 한 점 비치지 않았다.
나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이번 일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는 것이 좋겠어요.”
“각하께서 끼어들면 피바람만 불겠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테레사의 목적을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살롬에게는 나중에 제가 설명할게요.”
살로메디안이 피오넬의 목을 잘라버리기 전에 나는 피오넬에게 숨겨진 테레사의 계략을 파악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바바라가 있어서 든든했다.
“더러운 일은 저한테 맡기세요. 시아는 꽃길만 걸으면 된다고요!”
“더러운 일도 같이하고, 꽃길도 같이 걸어요, 바비.”
“아아, 시아 같은 천사는 세상에 없을 거예요!”
내 품에 안기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는 듯 바바라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젊은 청년의 중저음이 고막을 때렸다.
* * *
난데없이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처음엔 의아했고, 두 번째로는 바바라에게 미안했다.
동안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바바라는 25살 신체 건강한 젊은이였다.
늦은 밤 밀회를 즐기는 상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바비! 선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불쾌한 의심이에요, 시아.”
“연인이 찾아온 거 아닌가요? 이제 막 가까워지기 시작한 사이라거나…….”
“아니요. 평생 원수가 온 거예요.”
누구길래 이를 득득 가는 것일까?
내가 묻기도 전에 바바라가 문을 벌컥 열었다.
“왜 이 시간에 찾아오고 난리야? 너 같은 놈 때문에 순결을 의심받았잖아!”
문 앞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빈센트가 서 있었다.
바바라의 짜증을 들으며 빈센트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오늘 안에 온천 인근 동식물 자료를 가져오라고 한 것은 누님이셨습니다.”
단정하기만 한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바바라가 바락바락 따졌다.
“자정 전이면 오늘이냐? 업무 시간 안에 가져왔어야지, 이 멍충아!”
그 뒤로 현실 남매의 다툼이 한동안 이어졌다.
“누님께서 명령하면 없던 자료가 뚝딱 나오는 줄 아십니까? 이걸 만드느라 한시도 못 쉬었습니다.”
“내 앞에서 일했다고 생색내는 거냐? 네놈이 흑룡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누님은 과로사하게 생겼는데!”
“그 일로 언제까지 절 괴롭히실 겁니까? 저는 이미 공작부인의 인정을 받은 기사…….”
말을 하다 말고 빈센트가 눈을 크게 떴다.
침대 끄트머리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날 그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빈센트 님.”
“공작부인?!”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빈센트는 내 잠옷 차림보다 흐트러진 모습을 많이 봤지만, 일단 사과했다.
마력 폭주나, 쫄딱 젖은 모습보다 잠옷 차림을 보이는 것이 더 부끄러운 까닭이 뭘까.
“공작부인께서 계신 줄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바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빈센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랑 말할 때랑 말투가 다르잖아? 존귀하신 누님이랑 대화할 때도 공손해 봐라!”
꽤 아플 것 같은 손길이었는데 빈센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공작부인께서 누추한 곳까지 걸음 하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누추하다니? 내 방이 얼마나 깨끗한데!”
“업무가 고되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일찍 침소에 드셔야지요.”
“야! 내 말은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냐?”
바바라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빈센트는 정말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세요.”
부러움을 담아 말하자, 바바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끔찍한 말씀은 삼가 주세요, 시아. 이 멍청이랑 같은 성을 쓴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치욕적이니까요.”
“공작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송구합니다만 누님과 저는 남보다 못한 사이입니다.”
빈센트도 차분한 어조로 반박했다.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초록색 머리칼이며, 선 고운 얼굴선이 꼭 닮은 윗스 남매였다.
고집스러운 면조차도.
“앞으로 사이좋아 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내가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었다. 빈센트와 바바라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시아!”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그리곤 불쾌하다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괜스레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때 빈센트가 내게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공작부인.”
빈센트가 부탁을? 의아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신세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놈이 공작부인께 부탁이라니? 대가리에 화살이라도 맞았냐?”
“민망합니다만, 공작부인께서 꼭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빈센트가 간절함을 담아 날 바라봤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아, 가문끼리 분쟁이 생기는 것만 빼고요.”
내가 서둘러 덧붙였다. 빈센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적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뭐죠?”
“마물 시신을 정화해 주십시오.”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 빈센트가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기사단 식량 문제로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살롬에게 전해 들었어요. 고기가 떨어졌다죠?”
“럼블크 시체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요.”
“피오넬이 마물을 정화했다고 하던데요.”
그 고기도 무척 맛있었다고, 앞으로 내가 나설 필요 없다고 말하던 살로메디안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맛있었다니요? 제가 평생 먹어본 고기 중 최악이었습니다!”
빈센트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공작부인께서 정화해주신 고기와 달리 짐승 비린내가 역겨웠습니다. 식감은 악어가죽보다 질겼고요.”
“정말요?”
“굶주린 개도 뱉을 만한 고기였습니다. 그런 건 고기가 아닙니다. 고기에 대한 모독이죠.”
빈센트는 주먹까지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기 문제에 있어서만은 그도 흑룡기사단원답게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참았을 겁니다. 하지만…….”
빈센트가 말끝을 흐리자 바바라가 닦달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독성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서 기사 세 명이 쓰러졌습니다.”
“죽었단 말이야?!”
“배앓이로 고생했다고요. 누님은 왜 항상 극단적이십니까?”
빈센트의 타박을 무시하고 바바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오넬의 정화는 개똥만큼도 쓸모가 없다는 거구나.”
“그래서 공작부인께 부탁드린 겁니다. 흑룡 단원들의 입은 공작부인의 마물 고기에 길들었으니까요.”
눈이 반짝 떠질 만큼 반가운 말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왜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을까?
피오넬이 큰 공을 세웠다고 추켜세울 것까지는 없었는데.
“공작부인. 바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빈센트가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그가 기다렸을 답을 들려줬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기사님들을 도울 수 있다면 기쁘게 달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면 기사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겁니다.”
빈센트의 단정한 얼굴에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이 드리워졌다.
지나치게 정중해서 거리가 느껴지던 사람이었는데.
빈센트의 미소 덕분에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쯤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요리 재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또 생겼다는 것도 기뻤다.
“제가 정화한 고기가 그렇게 맛있나요?”
“흑룡에서 별의별 고기를 많이 먹어봤습니다만 공작부인이 구워주신 럼블크 만큼 맛있는 것은 먹어본 적 없습니다.”
“정말요?”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마물 고기의 편견을 깨준 천상의 음식이었지요.”
“고마워요, 빈센트.”
내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보통 사람에게도 미소로 보일 법한 진짜 미소였다.
멍하니 날 바라보던 빈센트의 뺨이 화르르 붉게 달아올랐다.
“흠흠. 춥지 않으십니까?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헛기침을 하던 빈센트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하나도 안 추운데요?”
“담요라도 걸치시는 편이…….”
빈센트가 왜 그러는 거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다가 잠옷 사이로 뽀얗게 드러난 살결을 발견했다.
야심한 시각에, 남편의 부하와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옷차림은 결코 아니었다!
내 얼굴에 노을처럼 붉은빛이 번졌다.
빈센트가 건넨 담요를 헐레벌떡 받아드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스 미수범이 내 아내와 야밤에 뭘 하는 것이냐?”
살갗을 떨리게 하는 위협적인 음성도, 간담이 서늘한 살기도 익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롬?”
나는 바바라의 방 앞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얼음과 천년설로 빚어낸 보석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 *
잠시 당황하던 아이시아가 차분하게 답했다.
“바비와 상의할 것이 있어서요. 빈센트 님은 바비에게 전달할 게 있었고요.”
“이렇게 야심한데?”
“살롬이야말로 이 밤에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왜 끼어들어서 방해를 하느냐는 말투였다. 살로메디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저택에서 내 아내를 찾는 게 문제가 되나?”
“살롬 말대로 밤이 늦었으니까요.”
야심한 밤에 그대를 찾으면 안 되는 거야? 난 그대의 남편인데!
그렇게 외치지 못하고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흐트러진 아이시아의 잠옷과 그녀에게 담요를 건네던 빈센트의 다정함은 살로메디안의 신경을 할퀴고도 남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식혀 보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만 해도 컨디션이 최악이었는데… 표정이 훨씬 밝아졌군. 이것도 빈센트 덕분인가?’
오늘 아이시아는 좀 이상했다.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말투도 평소와 다르게 싸늘했다.
아이시아와 함께하는 저녁이 가장 큰 기쁨인 살로메디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황궁 치료사를 억지로 끌고 온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난 것일까?
불편한 식사를 끝낸 뒤에도 아이시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낯빛이 파랗게 질린 아이시아. 시선을 피하는 아이시아.
마신의 계약자와 보통 아이가 어떻게 같을 수 있냐며 따지는 아이시아.
아이시아의 혼잣말에 귀 기울여봤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정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시아가 가져간 반쪽 심장이 멈춰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직접 아이시아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바바라 방에서, 그것도 빈센트와 함께 있는 그녀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그것만으로 아내를 찾아 나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한 끼 거른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눈가가 붉다. 안색도 어둡고.”
아이시아가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잘 익은 열매처럼 붉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녀가 난처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졸려서 그런 거예요. 이만 자러 가야겠어요.”
아이시아가 고집을 부렸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살로메디안에겐 그만 꺼지란 말과 비슷하게 들렸지만.
“시아.”
“원정 토벌을 떠나시려면 준비할 게 많잖아요? 살롬도 일찍 쉬세요.”
망할 원정 토벌 따위는 취소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한 달이나 아이시아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새까매졌다.
그동안 늑대 같은 사내새끼들이 시아에게 들러붙으면 어쩌지?
아쿠아로드의 개자식들이 아이시아를 해치려 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살로메디안은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릴 게 분명했다.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육전일 테고.
“혹시 피오넬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아이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파르라니 물결치고 있었다.
‘기분 좋게 해주려고 피오넬을 칭찬한 건데. 마물 정화를 피오넬에게 맡기면 시아도 쉴 틈이 생길 테고.’
고기가 맛없다고 아우성치는 기사들이나, 덜 정화된 고기를 먹고 배탈이 난 기사들은 걱정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시아의 기쁨과 평안이었으므로.
피오넬이란 아이는 처음부터 마뜩잖았다.
살로메디안은 마신의 숲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치유 마력을 가졌든 하늘이 내린 신력을 가졌든, 어린아이 혼자서 마신의 숲을 통과해 공작저 가까이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살로메디안에게 피오넬의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했다.
‘황족의 치유를 받은 아이는 그것만으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되는데… 이걸 어쩐다.’
아이시아의 부탁이 떨어진 이상 고민은 소용없었다.
살로메디안은 묵묵히 피오넬을 치료했다.
황족의 은혜를 받게 된 피오넬은 자동으로 제국 평민 이상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아이시아가 알 리 없었다.
‘부부가 목욕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가짜 정보가 들통나지 않도록 살로메디안이 꾸민 탓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재에서 예법 관련 책을 치우는 것이었다.
신하들에게도 아이시아 앞에서 제국의 예의범절이나 황족 문화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바바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제 손으로 피오넬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세상의 규칙 중 하나일 뿐, 살로메디안에게는 옷깃에 묻은 먼지 조각보다 하찮은 것이었다.
‘시아만 행복하다면.’
피오넬처럼 정체가 미심쩍은 아이 백 명도 거둘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감시를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나 외모만 보고 적을 만만하게 보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살로메디안은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 피오넬을 제 곁에 붙잡아둘 생각이었다.
행여라도 아이시아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그 덕에 그녀의 업무를 줄여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자신의 배려가 아이시아를 외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살로메디안은 상상조차 못 했다.
누군가의 행복을 최우선하는 것, 그를 위해 자신의 행동과 신념을 바꾸는 것.
마신으로 살아온 남자에게는 낯설고도 복잡한 문제였다.
“피오넬 때문에 제가 화났다고요? 설마요. 그 애가 잘 적응해서 안심이에요.”
아이시아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심장 박동도 반 박자 빨라졌다.
그녀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아이시아를 보며 살로메디안은 목이 탔다.
“시아. 왜 그런 말을 하는…….”
살로메디안이 뭐라 항의하려는 순간 바바라가 꽥 소리쳤다.
“그만!”
“바바라?”
“대화는 두 분 침실에 가서 하세요! 제 방에서 사랑싸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잠도 못 자게!”
“미안해요, 바비.”
아이시아가 사과했다. 바바라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쏘아봤다.
“시아는 아무 잘못 없어요! 잘못은 눈치 없고, 아내 보살피는 재주도 없는 무능한 남자가 했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요!”
시아가 바바라의 반 정도만 솔직했다면 어땠을까?
자문하다가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바바라를 닮은 아이시아라니.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
“저는 제 침실로 가볼게요.”
아이시아가 몸을 돌렸다. 살로메디안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줄 수 없었다.
“잠깐만.”
“왜요?”
“야식 먹지 않겠나?”
“야… 식이요?”
아이시아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바바라는 웬 개소리냐는 듯 이맛살을 찡그렸고, 빈센트는 각하께서 왜 저러시나 싶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살로메디안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하지만 허망하게 아이시아를 보내고 날밤을 새우느니, 실없이 야식 타령하는 공작이 되는 편이 백번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