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50)

15

* * *

아쿠아로드와 크로티무스 제국 국경지대.

마신의 숲 어귀에서 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화상을 입은 머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검은 벨벳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본에게 물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여인의 오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본은 식은땀을 닦았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진심이냐?”

“물론입니다! 테레사 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5년 전 아쿠아로드를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인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본을 위협했다.

“닥쳐라!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천한 암살자 놈이!”

여인이 후드를 벗으며 기사들을 제지했다.

“내버려 둬. 과거에 큰 공을 세운 자니까.”

굽실거리는 하늘색 머리칼이 밤하늘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동화 속 공주님처럼 화사한 외모와 달리 독기를 품은 악녀 테레사.

그녀가 미소 짓자 별빛보다 눈부셨다.

“어쩔 수 없이 추방하긴 했지만 나도 널 잊지 않았단다, 본.”

“테레사 님……!”

감격에 겨운 본이 테레사의 발치에 엎드렸다.

“쉿. 나랑 접촉한 걸 들키면 위험해지잖니?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레사 님… 아니, 아가씨.”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잖아? 완전히 세드나의 개가 된 줄 알고.”

미소는 여전했지만, 테레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본이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감시가 살벌해서 몸을 사렸을 뿐입니다요. 흑룡기사단에 입단한 것도 테레사 님께 정보를 드리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날 배신하고 눌러앉은 줄 알았는데? 암살자 따위를 기사 취급해주니까.”

“그럴 리가요! 세드나 공작에게 잠시 현혹되긴 했습니다만 그의 정체를 깨달은 지금은…….”

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로메디안을 향한 원망과 설움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아쿠아로드를 버리고 진짜 흑룡기사단원이 되려고 했었는데… 날 내쳐?!’

아이시아에게 공격당한 후 본은 기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기사단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차기 기사단장 감이었던 자신이 견습 기사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한 거였다.

살로메디안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빌어먹을 계집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아이시아의 간곡한 부탁이 없었다면 널 죽였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해라.」

「부당합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신다면 각하께서도 절 이해하실 겁니다!」

「한 마디만 더 떠들어 봐. 혀부터 썰어줄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살기는 본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대륙 최강의 남자를 지키는 기사단장이 되겠다는 꿈은 그날 끝났다.

저주받은 마녀 때문에 머리털과 미래 모두를 잃은 거였다.

본은 동료들 눈을 피해 아쿠아로드 왕궁에 전갈을 넣었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테레사와 접촉하는 것이 찜찜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시아가 중태에 빠졌다고?”

본의 예상대로 테레사는 아이시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복 언니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빼앗은 여자니까.

본이 두 손을 비비며 테레사가 듣고 싶을 법한 말을 들려줬다.

“세드나 공작령엔 치료사도 치료 신관도 없으니까 곧 죽을 겁니다.”

“흐음. 아이시아가 죽는다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테레사.

본성은 귀여운 겉모습과 딴판이라는 걸 알면서도 본은 테레사의 미모에 넋을 빼앗겼다.

‘세드나 공작과 아이시아에게 수모를 당했다고 했지? 테레사의 복수심을 이용하면 진짜 귀족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몰라.’

본은 단승 귀족인 기사가 아닌 진짜 귀족이 되길 바랐다.

5년 전 작위를 받아 마땅할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암살자라는 출신 탓에 아쿠아로드를 떠나야 했지만 이제야 정당한 대가를 받을 때가 온 거였다.

“아이시아가 죽으면 곤란한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본이 눈썹을 구겼다.

“곤란하시다니요? 저주의 씨앗이자, 아가씨를 엿 먹인 원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간단히 죽으면 안 되지.”

“네?”

“죗값을 치러야 하잖아? 죽지 못할 상태로 만들어서 천년만년 괴롭힐 거야. 내게 대든 걸 반성하도록.”

테레사의 입가에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분명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잔인한 계획을 꾸미는 듯했다.

본이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 그러셔야죠…….”

“아이시아는 쉽게 죽을 계집이 아니야. 내 손으로 가지고 놀아봐서 잘 알아.”

“그렇군요.”

“애완견 따위가 주인을 물고 도망치다니. 용서할 수 없지. 흐응~”

테레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본이 마른침을 삼켰다.

「살해당한 티 나지 않게 죽여.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명령을 내렸을 때 테레사는 고작 14살이었다.

테레사는 5년 전보다 성장한 것 같았다. 아주 잔혹한 쪽으로.

“앞으로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참 많아, 본.”

“저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물론.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신하에게 보상도 넉넉히 할 셈이야.”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또다시 연락 끊으면… 너도 평생 죗값을 치르게 될 테니까.”

테레사가 한쪽 눈을 찡끗거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삼키며 본이 흙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믿어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흑룡기사단 내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처신 잘해.”

“또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일단은…….”

주변을 둘러보던 테레사가 본에게 귓속말을 했다.

본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정말 그런 일을 벌이시겠다고요?”

테레사가 새침하게 되물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하지만 세드나 공작과 흑룡기사단은 세계 최강입니다. 그렇게 쉽게…….”

“다 계획이 있으니까 넌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들키면 저는 죽습니다. 아니, 죽는 것보다 처참한 꼴이 될 겁니다.”

불안해하는 본에게 테레사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도움이 될 거야. 왕실 전속 마도사들이 만든 신제품이야.”

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에 든 마도구를 받아들었다.

훗날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 * *

바바라의 말에 따르면 나는 열흘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살로메디안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간호를 했다고도 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으셨어요. 시아가 조금만 늦게 정신을 차렸으면 각하께서 먼저 돌아가셨을걸요? 쯧쯧.”

황당하다는 듯 바바라가 혀를 찼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부인 간호하다가 사망이라니! 제 눈으로 보고도 안 믿기는 거 있죠?”

“그 정도로 절 걱정했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시아가 쓰러진 게 본인 탓이라고 믿는 것 같던데요?”

바바라의 말에 나는 석류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제 마력이 폭주한 게 왜 살롬 때문이에요?”

“그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어요? 유일하게 잘하던 기사단 훈련까지 내팽개치고!”

“살롬이 기사단을요?”

“완전 미친 거죠. 진작부터 미친 줄은 알고 있었는데 진짜 미친 거예요.”

“바비…….”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아내한테 미쳤다는 거?”

바바라가 날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살롬에게 기사단은 내게 목욕과 비슷한 존재였다.

기사단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곤 했으니까.

훈련마저 거른 채 날 간호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세드나 공작이 아내 걱정 때문에 매일 눈물로 지새운다는 소문까지 돌아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요?”

“전 제국 사람들이요. 변방 오지였던 공작령이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니까요. 사랑꾼 마신 때문에요.”

사랑꾼 마신이라는 황당한 말이 제국에 퍼졌단 말이야?

그 소문을 듣고 살로메디안이 잠자코 있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살롬은 지금 어디 있어요?”

“시아가 정신이 든 걸 확인하고 침실을 떠나셨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요?”

“인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간이니까 쉬러 가지 않았을까요?”

바바라의 말에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가봐야겠어요.”

“아직 시아는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바바라가 두 팔을 펼쳐 내 앞을 막았다.

“살롬을 보러 갈래요.”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실 거예요. 그러니까 침대에 누우세요!”

“저랑 만날 생각이었으면 자리를 피하지 않았겠죠.”

살로메디안은 밤낮없이 날 간호하다가 내가 정신을 차리는 즉시 떠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를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타오르는 그리움을 잠재울 수 있을 듯했다.

내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오자 바바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다 우리 구세주님 또 쓰러지시겠네!”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시아는 공작령의 마지막 희망이라고요!”

바바라가 두 손을 머리칼 사이로 쑤셔 넣고 괴로웠다.

“시아가 없는 열흘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그 정도였어요?”

“그 이상이었죠! 각하는 시체처럼 빌빌거리지, 기사들은 하루에 백 번씩 시아의 안부 묻지, 일은 미친 듯이 쌓이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무섭다는 듯 부르르 떨던 바바라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제발 저와 각하, 공작령과 세계 평화를 위해 건강해 주세요!”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을 들으며 구역질을 삼켰다.

내 곁에는 살로메디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날 필요해주고,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바라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미안하지만 손 놓고 말해줄래요, 바비?”

* * *

바바라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면서 내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말 못 한 것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각하와 이혼을 한다거나 공작령을 탈출하겠다는 말씀만 아니면 뭐든지요!”

언젠가 살로메디안과 헤어져 공작령을 떠나야 하겠지만 아직까지 그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야 했다.

“사실 저…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구역질을 해요.”

“구역질이요? 우우웩, 이런다는 말씀이에요?”

토하는 흉내를 내면서도 바바라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몸이 경직되고, 친근한 사람이라도 살이 닿으면 속이 메슥거려요. 심하면 토하기도 해요.”

“특이 체질을 타고나신 거예요?”

“어렸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이복동생한테 학대당하면서 생긴 문제 같아요.”

“그런데 왜 각하는……?”

“오직 살롬만… 빼고요.”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바바라가 날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웃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진심을 바바라가 알아줄 거라 믿었다.

불안을 지우고 소중한 이들을 믿는 것.

그것이 마력 불꽃을 품을 수 있었던 용기의 근원이었다.

바바라라면 날 이렇게 만든 인간들에게 찰진 욕을 퍼부어줄 거라고 믿었는데…….

바바라의 반응은 내 예상을 한참 비켜나 있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거군요. 얼마나 괴로웠으면…….”

바바라의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욕하는 게 아니라, 운다고?

깜짝 놀란 내가 허둥지둥 변명했다.

“지금은 다 잊었어요. 증상도 점점 나아지고 있고요!”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시아한테 안기기도 하고 손도 잡고…….”

지난날을 되새기는 바바라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이 촘촘히 배어 있었다.

“바비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미리 말을 못 한 제 잘못이죠.”

그녀를 위로하려 해봤지만 바바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주의 깊게 봤다면 알았을 일이에요. 저는 집사 자격도, 시아의 친구 자격도 없어요.”

눈물을 훔친 바바라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부인.”

“바비. 제발 이러지 말아요!”

“용서해 주신다면 공작부인의 종으로서 평생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우린 친구잖아요?”

“무능하고 눈치 없는 인간은 공작부인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바바라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펜이 아닌 검으로 살로메디안을 모시겠다고 말하던 빈센트와 꼭 닮아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를 억지로 일으키려던 나도 생각을 바꿔먹을 수밖에 없었다.

“용서하겠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바바라를 향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바닥으로 쏟아졌다.

바바라가 쇳소리를 질렀다.

“공작부인께서는 황족이십니다! 함부로 머리를 숙이시면 안 돼요!”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바바라를 바라보았다.

“평생 함께할 친구에게 이 정도 예의 표시도 못 하나요?”

바바라가 움찔했다.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친구를 안아주는 대신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제가 원하는 건 종이 아니라 친구예요. 부디 지금처럼 제 곁에 남아주세요.”

“하지만 저는…….”

“용서받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제 말에 따라줘요.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에요.”

바바라의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아랫입술을 떠는 바바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알겠어요, 시아.”

바바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겨우 날 이해해주는 것 같아서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응석을 받아줘서 고마워요. 바비.”

“시아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제가요?”

“시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바바라가 곤란하다는 투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두 손을 내저었다.

“다 바비가 착해서 그런 거죠.”

“각하 생각은 다르실걸요?”

“살롬도 바비의 본심을 알면 초록색 악마니, 시끄러운 마물이니, 하는 말은 안 하실 거예요.”

“가서 물어보세요. 각하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바뀔 테니까요.”

“지금 가도 돼요?”

내가 놀라서 묻자,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 구워삶을 정도로 회복하셨잖아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시아의 특이 체질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데 어떻게 말리겠어요?”

바바라가 평소처럼 짓궂게 물었다.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그러나요?”

“바비!”

“어머? 얼굴 새빨개지셨네요?”

“놀리지 말아요!”

“목소리에도 기운이 넘치시네요. 사랑하는 낭군님과 뜨거운 밤을 보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온몸에 또다시 열이 올랐다.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목덜미는 물론 귓바퀴까지 달아올랐으리라.

키스하다가 마력이 폭주했는데, 정말 밤을 함께 보내면 잿더미가 되는 거 아냐?

* * *

불 꺼진 방에 앉아있던 살로메디안이 날 발견하고 일어났다.

“좀 더 누워있었어야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진심을 내뱉었다.

“살롬을 보고 싶었어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마른 침을 꼴깍 넘기고 다시 한번 입술을 열었다.

“살롬이 너무 보고 싶어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요.”

얼굴에 열이 오르긴 했지만 눌러 담았던 속말을 할 수 있어서 후련했다.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데 왜 혼자서 끙끙 앓고만 있었을까.

살로메디안은 진심으로 날 걱정했고, 간호했다.

그의 마음이 나와 똑같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좋았다.

내 감정에 솔직한 것. 함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것.

지금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훔친 심장이 걸리긴 했지만, 그거야 뭐, 돌려주면 되는 거니까.

한참 말없이 날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봤으니 돌아가.”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날 밀어내는 말을 듣고 나자 활활 타오르던 용기도 증발해버렸다.

내가 어떤 감정일지 뻔히 알면서, 내 혼잣말을 다 들었으면서 돌아가라고?

서러움이 또다시 물밀 듯 차올랐다. 하지만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고개에 힘을 빳빳이 주고 살로메디안을 노려보았다.

“싫어요. 안 갈 거예요.”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단호하게 거부할 줄은 예상 못 한 기색이었다.

“바비한테 들었어요. 제가 쓰러진 것이 살롬 때문이라고 자책한다면서요?”

그는 대답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대가 쓰러진 건 나 때문이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에 자책이 듬뿍 담겨있었다.

고구마를 백 개쯤 물 없이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고 폭발시킨 건 저예요.”

“그대의 입술을 탐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다.”

입술을 탐했다고?

그날의 키스를 회상하는 살로메디안의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짱을 낀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럼 저는 살롬한테 당한 거예요?”

내 말투가 삐딱해진 걸 느낀 살로메디안이 눈꺼풀을 깜빡였다.

“제가 억지로 당할 만큼 허술한 여자로 보여요?”

“시아?”

“말은 똑바로 하세요. 살롬이 일방적으로 절 탐한 게 아니에요. 저도 살롬을 탐했다고요.”

내가 검지로 살로메디아의 가슴을 짚었다.

그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다시 한번 경고했다.

“서로가 원했던 키스였어요. 저는 무척 행복… 했고요.”

행복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은은히 볼이 달아올랐다.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살로메디안에게 흘러갈까 싶어서.

“쓰러지긴 했지만, 그 덕에 마력 불꽃도 이해하게 됐고요.”

“이해했다고?”

“이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게 됐달까요?”

내가 집게손가락 펴자, 손끝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나는 방 안의 촛대를 향해 연이어 손가락을 튕겼다.

화살처럼 쏘아진 불꽃이 차례로 촛불을 밝혔다. 마지막 불꽃은 벽난로 속에 들어가 불을 활활 지폈다.

빠르고 정확하고 강했다. 살로메디안의 물방울처럼.

“불꽃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건가?”

살로메디안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살롬의 조언 덕분이에요.”

“대단하군!”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살롬 때문이 아니라, 제가 너무 흥분한 탓이니까.”

“흥분했다고?”

살로메디안이 빠르게 되물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잖아?

이런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사이는 아닌데!

내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살로메디안이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 역시 날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대가 흥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물 속성이라서 그런 거다.”

“뭐라고요?”

아찔한 충격이 전신을 감쌌다.

속성이 다르면 아이를 못 갖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마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속성이 같은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키스도 못 할 줄은 몰랐다. 그 키스가 문제를 일으킬 줄도.

“내가 너무 성급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움직였어야 했는데…….”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래서 살로메디안이 날 만나지도 않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있었던 건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내 물음에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쌍 속성일 때를 묻는 건가? 아니면 여자 경험을 묻는 건가?”

“아.”

남편의 과거를 캐묻는 아내 같잖아? 계약 아내 주제에.

“죄송해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황급히 고개 숙였다.

멋쩍다는 듯 시선을 돌린 살로메디안이 짧게 말했다.

“속성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었다.”

역시 그랬구나. 쌍 속성이라 어떤 여자든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던 일이면서도 왠지 뒷골이 당겼다.

살로메디안처럼 아름답고 강한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인종 가리지 않고 초절정 미녀들과 뜨거운 밤을 보냈을 살로메디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와 뒤엉켜있는 여인들의 살색 난무하는 선정적인 몸매도.

“살롬은 물 속성, 불 속성 따지지 않고 만나실 수 있었겠네요.”

“뭐라?”

“저 때문에 큰 자유를 잃으셨네요. 퍽 안타까우시겠어요.”

나랑은 키스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살로메디안의 과거 여인과 마주친다면 공작부인으로서의 품위는 물론 한 줌의 이성도 지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냉담한 무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져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제 표정이 어떤데요?”

“누구 하나 걸리면 박살을 내겠다고 벼르는 싸움꾼 같다.”

“네?!”

깜짝 놀라 얼굴을 매만졌다.

살로메디안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은 좋지만 싸움꾼처럼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흠흠.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시치미를 떼 봤지만 살로메디안은 속지 않았다.

“시아. 질투한 건가?”

“아니거든요!”

속마음을 들켜서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가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질투해도 좋아. 어차피 내 여인은 그대뿐이니까.”

살로메디안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 여인이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입 안에 침이 고이고 배 속이 간질거렸다. 고작 말 한마디에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그대와 결혼했고, 그대 외의 여인과 그 무엇도 할 마음이 없다.”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내가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듯.

“그대도 그렇지 않나?”

살로메디안이 상체를 내 쪽으로 숙이며 시선을 맞춰왔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익숙한 불꽃이 다시 튀었다.

내 뺨은 농익은 사과보다 붉게 달아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계약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물론이에요.”

“앞으로가 더 문제다. 키스 정도로 그대가 또 폭주하면 안 되니까.”

살로메디안이 흘러내린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키스 정도라니? 그 이상도 계획하고 있는 거야?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등줄기가 찌릿했다.

“설마 내가 그대를 포기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살로메디안은 제 마음을 확인시켜주겠다는 듯,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숨결이 닿고 눈빛이 얽혔다.

물씬 전해지는 체취가 체온을 끌어올렸다.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셨다면서요?”

“그것보다 그대와 닿을 방법을 찾지 못해서 짜증 났다.”

“그럼 저를 만나지 않으신 건…….”

“그대의 눈동자를 보면 또 키스하고 싶어질 테니까.”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입술과 말랑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 벌거벗은 것처럼 뺨이 달아올랐다.

미안해서 자리를 피한 게 아니었어……!

살로메디안도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코끝이 찡할 만큼 행복했다.

“겨우 깨어난 그대를 또 쓰러뜨릴 수는 없지 않나. 하아…….”

살로메디안이 깊은 한숨을 토했다. 날 향한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쓰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뜻 같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야했었나?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콩콩 뛰면서 가슴이 부풀었다.

본능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괜찮을지도 몰라요.”

“뭐가?”

“불꽃과 화해했거든요. 마력이 또 폭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키스해주세요.

튀어 나갈 뻔한 말을 가까스로 갈무리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내 허리를 휘감으며 물었다.

“그럼 실험해볼까?”

꼭꼭 숨겨두려 했으나 슬그머니 튀어 나가고 만 내 감정을 이번에도 그는 읽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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