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 *
나는 후원 안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참았던 분통을 떠드렸다.
“어쩌자고 졸졸 쫓아오시는 거예요! 살롬이 키산드라 님의 정체를 눈치채면 어쩌려고요?”
살로메디안의 산책 제안을 거절하고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키산드라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랑 산책 못 해서 화난 거야?
반투명한 키산드라의 영혼이 낄낄거렸다.
정곡을 찔린 내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키산드라 님이 살롬의 가슴 근육을 쭈물거리거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면서 깐족거리셨잖아요?”
-안 보이는데 뭐 어때.
“키산드라 님 덕분에 저는 귀신 보는 여자가 되었다고요!”
-그 귀신이 전설의 여기사 키산드라 님이니까 가문의 영광이겠네.
키산드라는 여유만만했다. 나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귀신과 대화한다는 게 알려지면, 공작저 사람들도 저를 피할 거예요.”
-그 인간들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거의 여신 취급이잖아? 오페라 가수도 너만큼 인기 있지는 않겠다.
“과장하지 마세요.”
-과장 같은 소리 하네! 기사들도 너 예쁘다고 난리잖니! 내 미모는 찬양한 적 없는 놈들이……!
그것만은 분하다는 듯 키산드라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외모 칭찬이 문제야? 철없는 귀신 같으니!
“저는 가짜 예언서 때문에 5년이나 핍박받았어요. 저주의 씨앗, 남편을 잡아먹는 마녀라고 불리면서요.”
내 얼굴에 얼음으로 만든 가면 같은 무표정이 들러붙었다.
키산드라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 무시무시한 표정 좀 어떻게 해줄래? 자다가 오줌 지리겠다!
“키산드라 님은 모르세요.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테레사를 등에 업고 날 핍박했던 사람들도 처음부터 잔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왕, 기사들, 시종들, 유모와 가정교사들… 모두가 날 아껴줬고, 나도 그들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그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짜 예언서가 등장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 주위에 남은 사람은 없었어요.”
-…….
“다수가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돼요. 진실이 밝혀져도 그간의 믿음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요. 거짓 편에서 우기는 게 편하니까요.”
의술서를 전해준 르윈과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준 델마가 있었지만, 그들도 공공연한 장소에서는 날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자 친구였던 사람들의 싸늘한 눈동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낭떠러지 밑으로 떠밀리는 것처럼 괴로웠다.
공작저 사람들은 날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상상 이상으로 잘해주고. 하지만 그게 영원할 리 없어.
칭찬과 찬양을 받을 때마다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차올랐다.
그들도 아쿠아로드 사람들처럼 돌변해버릴까 봐. 내게 실망하고 등 돌릴까 봐, 그 고통을 또다시 겪게 될까 봐 자꾸 움츠러들었다.
“은혜는 꼭 갚을게요. 하지만 제가 키산드라 님과 대화한다는 건 숨겨주세요. 살롬에게도요.”
내 붉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키산드라가 쓰게 웃었다.
-겁이 많은 아이구나. 가엾게도.
“키산드라 님.”
-네 뜻은 잘 알겠다. 장난은 관둘 테니까, 날 소멸시킬 방법이나 찾아봐.
키산드라가 내 어깨에 투명한 회색 팔을 걸쳤다.
무게 없이 전해지는 차가운 촉감도 이제는 익숙했다.
-못 하겠으면 두 번째 제안도 고려해보고.
“안 돼요.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치사해!
키산드라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키산드라 님이라면 귀신한테 몸을 빌려주겠어요? 빙의하겠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시겠느냐고요!”
* * *
키산드라가 제안한 두 번째 방법은 빙의였다.
그녀의 영혼이 내 몸에 들어와 소멸법을 조사한다는 계획이었다.
귀신 보는 공작부인에서 귀신 들린 공작부인이라니!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들어가면 마력을 컨트롤하는 법도 단박에 깨우칠 수 있다니까?
키산드라가 살살 구슬렸다. 하지만 내 결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불꽃 다루는 것도 꽤 익숙해졌어요. 럼블크도 구울 만큼요.”
-지금의 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에 불과해! 그 어마어마한 힘을 썩히기만 할 거니?
“천천히 배우면 돼요.”
-강해지고 싶다며? 잠깐만 참으면 넌 내 뒤를 잇는 전설의 여기사가 될 수 있어!
“키산드라 님이 빙의하면 강해진다고요?”
-당연하지.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네 것처럼 쓸 수 있게 해줄게.
키산드라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언제나 힘을 가지고 싶었다.
적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힘. 소중한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지키는 힘 말이다.
내 동요를 눈치챈 키산드라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냥 잠들었다고 생각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빙의해도 문제없는 건가요? 후유증이 남는다거나…….”
-당연하지! 설마 내가 헬레나의 아이를 다치게 하겠니?
키산드라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아세요?”
내 질문에 키산드라가 하나로 땋은 머리를 휙 뒤로 넘겼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내가 모르는 게 뭐가 있겠니? 잔말 말고 몸이나 내놔.
“제 육체를 완전히 빼앗으려는 계획은 아니고요?”
의심을 거두지 않자, 키산드라가 회색 눈을 희번덕거렸다.
-끔찍한 말 하지 마! 난 소멸하고 싶을 뿐이야! 망할 꼬맹이랑 부부 시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정말이세요?”
-네 육체를 차지하면 꼬맹이가 가만두겠니? 보이지도 않으면서 내 존재를 눈치챈 놈인데!
“저랑 동반 자살하시려는 것도 아니고요?”
눈을 가늘게 뜨고 키산드라를 훑어봤다.
그녀는 완전한 소멸을 원했다.
마신이 얽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한 번 더 죽는 것이 편할 수 있었다.
-비록 너한테 과한 부탁을 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야. 죽일 애를 뭐 하러 살렸겠어?
키산드라가 억울하다는 투로 항변했다.
“절 선택하신 이유가 뭔데요?”
-…….
“키산드라 님을 돕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죽은 저를 살리시면서까지 저를 기다리신 이유가 뭐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나는 변방국의 폐왕녀였을 뿐이었다.
마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바실리키 신관을 찾아가는 것이 빨랐을 터였다.
텅 빈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던 키산드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과 불을 모두 가졌으니까.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무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단 말인가?
물과 불을 가졌다는 말은 또 뭐란 말인가?
“전 쌍 속성이 아니에요. 그건 키산드라 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쌍 속성은 크로티무스 황족 중에서만 태어난다.
나는 불 속성 마력을 가졌고, 그조차도 최근에야 겨우 깨달았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꼭 너여야만 한다는 것 빼고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키산드라가 시선을 돌렸다.
귀찮게 굴어도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단호함이 그녀의 전신에서 풍겨 나왔다.
-난 온천으로 돌아가야 해. 빙의에 대해서나 고민해 봐.
그 말을 남기고 키산드라가 사라졌다. 말 그대로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귀신 보는 것도 모자라서 빙의까지 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 하아…….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저주받은 여자란 편견에서 벗어났는데, 빙의까지 하라는 말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물론 키산드라의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살롬에게 말해야 하나? 키산드라 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데, 날 꺼림칙하게 여기면 어쩌지?
한참 고민에 빠져있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내가 맞았어! 너는 천사 따위가 아니라 저주의 씨앗일 뿐이야!”
이마의 십자 흉터와 악의로 가득한 눈빛. 아쿠아로드 출신 기사인 본 존스였다.
* * *
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얼어붙었다.
키산드라와 함께 있었던 후원은 공작저 안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이었다.
마신의 숲으로 이어지는 북문과 가장 가깝기도 했다.
왜 북문 쪽에서 오는 거지? 부기사단장 취임식이 한창 진행 중일 텐데?
키산드라 영혼과 대화를 들켰다는 충격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았지만, 내 표정엔 일말의 동요가 없었다.
감정이 요동칠수록 표정만은 차갑게 가라앉는 것. 오랜 시련을 통해 깨우친 기술이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어딜 다녀오는 거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본을 바라봤다.
공작령의 안주인으로서 완벽한 자태라고 확신했다.
당당한 내 태도에 주춤했던 본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 빙의 어쩌고 하면서 귀신과 떠드는 걸 다 봤다고!”
마신의 숲에서 봤을 때보다 볼품없는 행색이었다.
기사단복은 구깃구깃했으며, 다듬지 않은 수염이 지저분했다.
날 향해 토해내는 말투에도 독기가 가득했다.
“미친 여자처럼 허공에 대고 지껄이다니. 널 떠받들던 멍청이들도 이제야 진실을 깨닫겠지! 큭큭.”
“대단한 기사도군요. 남의 말을 엿들은 걸 자랑하다니.”
“닥쳐! 귀신 들린 여자 주제에!”
“…….”
“아쿠아로드의 마녀가 공작령의 천사라니, 개도 웃지 않을 소리야!”
본은 아쿠아로드에서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소문들을 들먹이며 날 모욕했다.
“너 때문에 공작령이 망할 거다! 각하께 무슨 일이 생겨도 전부 너 때문이라고!”
그는 내가 분노하거나 상처 입길 바랐겠지만, 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친아버지와 이복동생, 계모에게 들어왔던 악담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결해서 명예를 지킬 줄도 모르는 한심한 년.」
「언니는 내 노리개야. 애완동물도 못 되는 하찮은 장난감! 망가질 때까지 가지고 놀아줄게!」
「무능한 주제에 건방진 건 제 어미를 쏙 빼닮았네. 죽은 그 여자가 참 자랑스럽겠다? 호호호!」
오랜만에 그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몇 날 며칠 우울했겠지만, 지금은 놀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날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살로메디안.
비록 진짜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진실이 담겨있었다. 그것이 날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것이 주군의 아내에게 할 말입니까?”
본이 마음껏 떠들도록 내버려 뒀다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폐왕녀 따위를 공작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본이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나는 법적으로 제국 황족이자 세드나 공작부인입니다.”
“각하가 진심으로 너 따위를 아끼실 리 없어! 더러운 술수를 쓴 거겠지.”
진실에 근접한 분석이었지만 나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 말을 법정에서도 해보시죠. 황족 모독죄로 고발할 테니.”
아쿠아로드 출신이라도 황족 모독죄의 무서움을 모를 리 없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본이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날 고발하면 네 정체도 폭로할 거다. 귀신 들린 계집은 공작령에서 쫓겨나겠지!”
치사하게 나오겠다 이거지?
키산드라의 귀신을 본다는 건 숨기고 싶었지만, 본이 내 약점을 쥐고 으스대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요리해줄까?
천천히 본을 뜯어보았다. 그러다 그의 부츠에 묻은 초록색 진흙을 발견했다.
익숙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다.
린삼 군락지 늪 진흙이잖아? 마물의 배설물이 섞인.
온몸으로 체험해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부기사단장 취임식도 참가하지 않고 린삼 군락지에 다녀온 건가? 이유가 뭐지?
말이 없자, 본은 내가 겁먹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나는 부기사단장 지위까지 잃었다! 이 손해를 어떻게 보상할 건가?”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그를 보다가 되물었다.
본의 뒷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당신이 승진 못 한 것이 왜 저 때문입니까?”
“발뺌하지 마! 네가 빈센트를 기사로 인정해줬잖아!”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요?”
“당연하지! 기사단장이 멍청한 결정을 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구질구질한 핑계는 그만두세요. 그저 당신보다 빈센트 님이 뛰어났기 때문이잖아요? 그걸 당신도 알고요.”
“뭐라고?!”
아픈 데를 꼬집자 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검을 검집에서 반쯤 빼기도 했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내게 발검을 하려는 겁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닥쳐!”
“당신이야말로 목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검을 뽑는 순간 내 아량도 끝입니다.”
담담한 어조와 달리 내 양손은 새파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본을 향해 날름거리는 불꽃은 무녀의 춤 같기도 했고, 도마뱀의 혀 같기도 했다.
마력 폭주는 아니었다. 내 심장은 고요했고, 반대로 온몸에서 마력이 용솟음쳤다.
“그, 그 불꽃으로 뭘 하려는 거지?”
화들짝 놀란 본이 뒤로 물러섰다.
푸른 불꽃에 휩싸인 두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은 건 아닌데…….”
본이 내로라하는 실력자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푸른 불꽃과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내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본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었다.
죽길 바랐다면 살로메디안에게 말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멍청하고 성격이 더럽다는 이유로 죽이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기사 한 명 양성하는 데 공작령의 자원도 많이 투입됐을 텐데.
“카악 퉤! 저주받은 마녀답구나. 마력 불꽃으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무고한 사람을 부당하게 협박하는 인간은 정당합니까?”
“닥쳐! 너 같은 건 5년 전에 죽었어야 했어. 왕비 같지도 않은 네 어미가 뒤졌을 때!”
내 인내심도, 아량도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이성의 끈은 놓치지 않았다.
대신 날 휘감은 불꽃이 10배로 커다래졌다.
불꽃이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쩍쩍 갈라졌고, 나뭇잎들은 재가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저는 경솔하게 입 놀리는 인간을 경멸합니다. 어머니를 욕보이는 자는 용서할 수 없고요.”
그 말과 함께 나는 불꽃을 본에게 날렸다.
살로메디안이 물방울을 쏘는 걸 흉내 낸 거였는데 생각만큼 빠르진 않았다.
흐느적거리며 날아간 불꽃은 다행히 본의 머리카락에 가서 닿았다.
“크아아악!”
본이 펄쩍 뛰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머리카락이 횃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처음 시도치고는 꽤 훌륭한 성과였다.
살롬이 봤으면 칭찬해줬을까? 부하를 다치게 했다고 화내진 않을 거야. 살롬은 내 편이니까.
조금쯤 따스해진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본이 팔다리를 휘젓는 꼴을 지켜봤다.
“내 머리! 살려줘! 으아악!”
불을 끄지 못한 본이 구정물로 가득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구정물이 튀지 않게 치맛자락을 들고 비켜섰다.
저택 보수 공사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끄아아악!”
급한 불은 껐지만,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은 전부 사라졌고, 시커멓게 그을린 두피는 시뻘건 화상 자국과 피딱지로 뒤범벅되었다.
미안하다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례한 기사에게 내린 공작부인의 벌로서 충분한지 고민했을 뿐.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입조심하십시오. 경고는 마지막입니다.”
그 한마디가 본에게 깨우침을 주었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은 쉬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 *
나는 집무실이 아닌 방으로 돌아왔다. 켜켜이 쌓인 고민을 잠시나마 잊으려면 목욕이 필요했다.
대욕장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데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시아! 무사한 건가?”
기사단 제복을 입은 살로메디안이 뛰어 들어왔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땀. 서늘함은 사라지고 잘게 떨리는 푸른 눈.
그는 제 손으로 만져 봐야 안심할 수 있다는 듯 두 손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그 개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잡힌 건 팔인데 심장이 꽉 움켜쥐어지는 느낌이었다.
“벌써 들으셨어요?”
기사단원이 큰 화상을 입었으니, 문제가 불거질 만도 했다.
살로메디안은 소식을 듣자마자 내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대는 다치지 않은 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 착각일까?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보다시피 멀쩡해요.”
“하아… 다행이다.”
맥 풀린 목소리를 뱉으며 살로메디안이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날 붙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망막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걱정 많이 했어요?”
내 물음에 살로메디안이 살기등등한 눈을 바짝 치켜떴다.
“몰라서 묻는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렇게 대답하는 살로메디안을 보며 나는 호흡을 멈췄다.
시간의 흐름도 잠시 멈춘 듯했다. 세상엔 우리 둘뿐이고, 그것만으로 완벽한 것 같았다.
“본은 뛰어난 검사다. 그대의 마력이 월등하지만, 검에 베이기라도 했으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는 듯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내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겼을까 봐 두려워한 기색이었다.
누군가 날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는 것. 그래서 숨을 몰아쉴 만큼 바삐 달려와 준다는 것.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그대의 머리카락 한 올 상하게 했다면 본의 시체를 다져서 들개 먹이로 던졌을 거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하면 걱정하게 하지 마.”
원망이 살짝 섞이긴 했지만 날 탓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대가 무사하니 됐다.”
살로메디안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스하고 포근한 감촉 탓에 저절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을 때는 아닐걸? 그대 덕분에 취임식이 취소됐다.”
빈센트에게 미안했지만 살로메디안이 놀라서 달려와 준 것이 행복했다.
“빈센트 님께도 사과를 드려야겠네요.”
“목숨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놈은 본이겠지.”
살로메디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 사정도 듣지 않았으면서 그는 본의 잘못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보통 일이었다면 그대가 직접 손쓸 리가 없잖아?”
살로메디안의 질문이 예리해졌다.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가 곧 생각을 바꿨다.
짓뭉개진 본의 시체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시신을 뜯어먹는 들개들도.
“감히 공작부인을 봤는데 인사도 안 하더라고요. 버릇없는 기사에게 본때를 보여줬죠.”
내가 오만하게 콧대를 세웠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녀 공작부인처럼.
하지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살로메디안이 아니었다.
“시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괜한 거짓말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콧잔등을 찡끗했다.
“제가 너무 심했나요? 그래도 살롬의 직속 기사인데…….”
“아직 내막은 모르지만, 분명 놈이 저지른 잘못은 그대가 내린 벌보다 중했을 거다.”
“살롬.”
“그대의 처분을 믿는다. 그대도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지 마. 지배자는 그래야 한다.”
그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살며시 흔들었다.
계약 공작부인이 아닌, 앞으로 인생을 함께할 진짜 아내에게 하는 조언 같아서.
“믿어줘서 고마워요.”
“신중하고 책임감 강한 그대 성격 탓이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
“그래도 고마워할래요.”
“맘대로 해.”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살로메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체취가 싱그러웠다.
땀 흘리는 걸 분명히 봤는데 왜 좋은 향기가 나는 걸까?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야?
내 걱정으로 한달음에 쫓아온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살롬이 헉헉거리는 건 처음 봤어요.”
“내가 허둥대는 꼴이 재미있었나?”
“약간 흥미롭긴 했지요.”
내 말에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구겨졌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땐가?”
아니요. 다른 말을 하고 싶어요.
더 이상 담아만 둘 수 없는 말을요.
용기 내어 살로메디안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이 뺨에 닿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시아?”
그에게 듣는 애칭은 언제나 달콤했다.
나는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며 살로메디안을 어루만졌다.
그의 살결은 희고 매끄러웠다. 검을 다루는 남자가 아닌 온실 속 귀부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턱선은 강철보다 단단했고, 날 바라보는 눈빛은 바위도 녹일 만큼 뜨거웠다.
내 입술이 벌어졌다. 농익은 과일이 저절로 열리듯.
“살롬. 저는 당신의 아내죠?”
“물론이다.”
“계약 덕분이지만… 당신의 아내일 수 있어서 행복해요.”
“!”
믿을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활짝 벌어졌다.
충격과 불신으로 얼룩진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의아함을 삼켰다.
“진심인가?”
“그럼요. 살롬은 최고의 남편이잖아요.”
“정말 내 아내가 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살로메디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이었다.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한겨울 북풍보다 매섭게 날 할퀴었다.
* * *
까마득한 체념이 눈앞을 가렸다.
아… 역시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그를 어루만지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내가 용기 내서 무슨 말을 해도 살로메디안에겐 도둑의 술수로 들리는 걸까.
날 걱정하는 건 결국 온전하게 되찾아야 할 심장 때문인 건가요?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불꽃이 사그라들 때쯤 살로메디안이 꾹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가 공작부인 노릇을 잘해주어서 기쁘다.”
사랑하진 않지만, 쓸모는 있다는 뜻일까. 계약이 끝날 때까지 더 분발하라는 것일까.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그 이상을 바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날이 커지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랑이었다. 내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결과도 받아들어야 마땅했다.
“잘하는 게 당연하죠. 그게 우리의 계약이잖아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눈물을 참고 있다는 걸 들키면 살로메디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낯빛이 와락 어두워졌다.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그대는 최선을 다하겠지.”
달리 제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 당신을 영원히 잡아둘 수도 없을 텐데.
당신은 내 말 한마디도 믿지 못하는데.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네요. 심장도 돌려드려야 하는데.”
차라리 심장을 돌려줄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계약이 끝없이 연장된다면.
내 진심은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남루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계약이 끝나면 살롬은 새로운 공작부인을 얻으시겠죠?”
“…….”
“그분께 인수인계 잘해드릴게요. 살롬에게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살로메디안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이 손으로 날 만졌으면서, 새로운 공작부인을 들이라는 건가?”
화난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내가 살로메디안을 만진 거랑, 새 장가를 가는 게 무슨 상관이지?
의아해하는 날 살로메디안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만지면 안 되는 거였나요? 우린 목욕도 같이했는데요?”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는 말인가?
계약 부부의 스킨십 가이드라인을 알 수 없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껴안지 않았나?
그럼 나도 만질 수 있게 해줘야지!
어차피 계약이 끝나면 만지지도 못하는데.
“만져도 된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내가 눈을 반짝 떴다.
“정말요?”
“대신 만졌으면 책임져라.”
책임이라는 단어가 잠잠해졌던 심장을 한바탕 헝클어놓았다.
“…어떻게요?”
내가 되물었다. 살로메디안이 혀로 붉은 입술을 훑었다.
그것뿐이었는데 방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우리 둘 사이를 메웠다.
“진짜 부부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잊은 건 아니겠지?”
“스킨십도 진짜 부부처럼 해야 한다는 건가요?”
“물론이다.”
살로메디안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역시 스킨십 포함이었어!
나는 방긋 위로 올라갈 뻔한 입꼬리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그의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계약 만료 때까지 나만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 탓이었다.
테레사의 학대 속에서도 목욕이란 평화를 찾았던 나 아닌가?
계약 공작부인도 서러운데 하고 싶은 거라도 해야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바라봤다.
입술이 떨리지 않게, 채찍을 맞은 말처럼 내달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최대한 도도하게 말했다.
“좋아요. 책임질게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결심을 바꾸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같이 목욕해요. 부부는 원래 그런다면서요?”
* * *
아이시아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석류 열매처럼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지만, 그녀는 정말 함께 목욕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살로메디안은 얼빠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진심인가?”
“제 감정을 읽으시면서 중요한 건 왜 늘 못 읽어요?”
물론 읽는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이시아의 감정은 슬픔과 좌절로 뒤범벅되어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아이시아의 감정을 읽는 데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시아가 제 뺨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작고 여려서 함부로 쥐기도 어려웠던 그 손이 제 뺨을 쓸어내리기까지 했다.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눈앞이 하얘졌다.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열다섯 살 소년처럼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아이시아의 감정은 안개 속에 숨은 것처럼 모호했다.
순간순간 튀어 오르는 불안과 외로움은 살로메디안을 위축시키기 충분했다.
아이시아의 감정은 오락가락했고, 살로메디안은 쏟아지는 정보를 해석할 여력이 없었다.
차라리 감정을 읽지 못하면 막연한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을 텐데.
새로운 공작부인을 기다린다는 식의 발언은 그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시아는 그저 계약에 충실할 뿐이다. 우직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니까. 스킨십도 책임감 때문이라면…….’
기쁘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아이시아의 텅 빈 의무감만 확인할 뿐이었으니까.
“왜 망설이시는 거예요? 초대하지 않았을 때는 척척 들어오시더니.”
대욕장 문에 몸을 기댄 아이시아가 새침하게 물었다.
그 모습조차 미치도록 유혹적이었다. 의무든 책임감이든 무엇이 중요할까?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시도 떼어놓고 싶지 않은 아내가 함께 목욕하자고 하는데.
“망설인 적 없다.”
살로메디안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욕장 문을 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아이시아의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은 우스웠지만, 손꼽아 바라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아이시아에게 제국의 목욕 문화를 거짓으로 알려준 뒤 살로메디안은 꽤 자주 대욕장 앞을 서성였다.
아이시아가 마력을 감지할 수 있거나, 저택에 사용인이 많았더라면 우스운 꼴을 들켰을 게 분명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먼저 목욕하자고 유혹하던 여인이 이번에는 겁먹은 아이처럼 웅얼거린다.
그 이중성이 살로메디안의 욕망을 새빨갛게 달구고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나 미치라고?’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발치 아래로 내렸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깨끗했다. 욕조의 온도 조절 마도구도 멀쩡한 것 같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혼자서 목욕하긴 지나치게 큰 욕조야.’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야 버틸 수 있을 만큼 온 감각이 아이시아에게 쏠려 있었다.
못 들은 척하고 싶지만 사락사락, 아이시아가 옷을 벗는 소리가 살로메디안의 청신경을 자극했다.
그 작은 소리가 10만 대군의 함성보다 커다란 까닭은? 그때보다 더 떨리는 이유는?
살로메디안은 바짝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머리는 텅 비었고, 아무리 애써도 멀쩡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폭주 직전의 짐승을 가둬두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느라 바빴으므로.
그가 주먹을 쥐고 심호흡을 할 때 아이시아가 물었다.
“살롬은 왜 안 벗으세요?”
살로메디안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옷을 벗어야 하는구나. 그렇지. 목욕을 해야 하니까.
멍하니 고개를 처박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차마 아이시아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벗어야 하지?’
전부 벗어? 그랬다간 아이시아가 오해하지 않을까?
허리춤에 닿은 살로메디안의 손이 멈칫했다.
아이시아가 오해하지 않더라도 하의를 탈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명상도 심호흡도 기사단의 진군가도 아무 소용없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가라앉지 않을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런 신체적 변화 없이 아이시아와 한 욕조에 있을 수 있었던 걸까?
목욕 중인 아이시아를 찾아왔었던 과거의 여유로움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건가, 과거의 나?’
쓰디쓴 패배감이 살로메디안을 휩쓸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미끄러지는 손끝을 힘을 주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천천히 들어오세요.”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의 곁을 스쳐 욕조로 향했다.
그녀는 얇은 리넨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뿌옇게 일어난 김 사이로 아이시아의 희미한 뒷모습이 사라졌다.
오늘만큼 아쿠아로드의 목욕 문화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철부지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자신도 수치스러웠다.
“키산드라 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이시아가 불쑥 질문하지 않았다면 살로메디안은 벽에 머리를 찧으며 괴로워했을지도 몰랐다.
* * *
살로메디안이 멈칫했다. 괜한 말을 꺼낸 걸까?
후회스러웠지만 목구멍이 말라붙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그와 목욕할 자신은 없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리넨 천으로 가릴 수 없었으므로.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수증기 너머에서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키산드라 님께서도 온천을 좋아하셨다고 하셔서요.”
“좋아했지.”
“저택에 키산드라 님의 초상화가 한 점도 없던데. 일부러 치우신 건가요?”
키산드라의 영혼은 내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에 분개했다.
꼬맹이가 보여주지 않았냐며 되묻기도 했다.
“내가 치우라고 했다. 그대가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키산드라와 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키산드라는 살로메디안을 ‘짜증 나지만 능력은 뛰어난 꼬맹이’라 말하고 있었다.
반면에 살로메디안은 키산드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딘가 꺼리는 기색이었다.
세드나 공작 후계자로서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받은 건가? 설마 학대당한 거야?
하긴, 10살 아이를 전쟁터에 내보낸 것만으로도 아동 학대지!
키산드라는 다음 대를 이을 쌍 속성이 태어나지 않아서 170세까지 마신의 계약자로 살아가야 했다.
살로메디안의 잘못은 아니지만, 죄 없는 아이에게 원망을 쏟아냈을 수도 있었다.
이제야 키산드라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어두워지던 살로메디안이 이해가 됐다.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한 게 분명해. 가엾은 살롬.
괜히 살로메디안의 상처를 들쑤신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 감정을 읽었는지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시아. 왜 자책하는 거지?”
“그거야 당연히……!”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수증기를 헤치고 살로메디안이 욕조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넓다 못해 광활하게 느껴지는 어깨, 갑옷처럼 탄탄한 근육과 반대로 희고 매끈한 피부.
그보다 놀라운 건 그가 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거였다.
“…안 벗으셨네요?”
내가 모르는 제국의 문화인가? 바지는 젖으면 너무 불편할 것 같은데? 다리는 어떻게 씻는 거야?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질문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살로메디안도 별다른 대꾸 없이 욕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물결이 내 몸을 흔들었다. 가슴도, 심장도 동시에 다른 박자로 흔들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면 민망한데.”
넋 놓고 그의 상체를 바라보다가 찔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쩌자고 같이 목욕하자 했을까.
그와 한 욕조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긴장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와 시선을 맞추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하나하나 신경 쓰였다.
목욕에 집중하기엔 살로메디안의 상체가 너무 많이 보였다.
내가 저 근육질 몸을 만졌단 말이지?
마도구 후유증 탓에 정신을 잃었을 때, 살로메디안은 날 깨우기 위해 한 욕조에 들어갔다.
나는 그의 몸이 신기한 쿠션이라고 생각하며 주물럭거렸고.
다시 한번 만져보고 싶다…….
하마터면 혼잣말을 중얼거릴 뻔해서 혀를 깨물었다.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다 해도 다 들릴 거리였다.
“키산드라에 왜 관심이 생긴 건가?”
살로메디안은 내 죄책감의 근원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키산드라의 영혼을 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귀신을 본다는 이유로 살로메디안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 귀신이 살로메디안을 학대한 키산드라라면 더더욱.
“온천 정보를 찾아보다가 키산드라 님에 대한 문건을 발견했거든요.”
바바라가 전해준 온천 문서에서 키산드라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키산드라는 온천에 애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온천의 지박령이 되었겠는가.
“이상한 이야기는 없었나?”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남자나 밀회 같은…….”
“네?”
내가 되묻자 살로메디안이 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궁금하게 해놓고 말씀 안 하시기예요?”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나는 외부인이라는 뜻인 건가? 임시 공작부인이어서?
벽을 치는 살로메디안의 태도에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괜한 오해하지 말자.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키산드라는 날 회귀시켜준 은인이었지만, 살로메디안에게는 원수일지도 몰랐다.
키산드라의 반투명한 회색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특이하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소멸을 돕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몰랐다.
키산드라의 영혼이 협박한 것처럼 공작령에 저주를 내리면 어떡하지?
“시아. 오늘따라 감정이 불안정하다.”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괜찮아요.”
“거짓말하지 마. 다 느껴지니까.”
“치사해요. 전 살롬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하나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이 뾰로통해졌다.
살로메디안은 젖은 손으로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네?”
“낱낱이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의 감정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헛갈려.”
“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다는 건 스트레스가 큰일인 거였다.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구 쏟아진다면 더더욱.
“죄송해요. 살롬의 심장을 훔치지만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욕조 안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살로메디안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겠지.”
“…….”
“낯설고, 어렵고, 당황스러운 순간들도 없었을 거야.”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맑고 투명한 호수가 아니라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용암 같달까.
“살고 싶은 이유도, 기쁘게 죽을 이유도 생기지 않았을 거다.”
여전히 그의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바라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각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놈이요.」
「뭐라고요?」
「이제는 좀 바뀌신 것 같지만요.」
그렇게 말하던 바바라의 표정이 잊히지 않아서 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바바라가 그렇게 말하던가?”
“네.”
“사실이다. 그게 내 소원이었어.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
살로메디안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더욱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세드나 공작으로 선택받은 인간의 숙명이지. 죽음은 축복이다. 계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걸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야.”
“…….”
“그러니 그대가 마음 아파할 필요 없어.”
살로메디안의 말에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파할래요. 저는 살롬이 죽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시아…….”
“살고 싶은 이유가 생기셨다고 했죠?”
“그래.”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살롬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기쁘게 죽는 것 따위도 집어치우고요.”
어디서 바람이 부는 걸까.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파도쳤다.
흔들림은 길었다. 흔들림이 잦아들 무렵 살로메디안이 내게 다가왔다.
물결이 먼저 도착했고, 그의 손이 나중에 닿았다.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제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반쪽밖에 남지 않은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내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이.
“내 생애를 통틀어 이토록 살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
살로메디안이 맹세하듯 말했다.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 안에서 들끓고 있는 불꽃 역시 마찬가지였다.
착각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후회할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살롬.”
“시아.”
누가 먼저랄 것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살로메디안은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로 내 여린 살점을 머금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반면에 커다란 손으로는 내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다른 사람을 만지지도 못하는 내가 키스를 하다니!
그 놀라움조차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며 모든 감각은 입술로 몰렸다. 키스가 이토록 달콤하고 뜨거운 것인지 몰랐다.
누군가의 혀가 날 휘젓는 것도, 그로 인해 내 심장이 달아오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살로메디안은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조급해서 입술을 오물거릴 때도 섣불리 파고들지 않았다.
코를 쓸며 방향을 바꾸고 입술만으로 날 점령해 갔다. 발가락이 오그라들 만큼 특별한 감각이었다.
젖은 몸이 밀착되었다. 들락거리는 호흡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와 더 오래, 더 가까이 닿아 있고 싶었다.
살로메디안과 하나 된 느낌에 취해 있을 때 몸 안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꿈틀거렸다.
내 변화를 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시아?”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불덩이가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으읏!”
신음과 함께 내 몸 전체가 새파란 불꽃에 휩싸였다. 살로메디안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력 폭주다!”
지금까지 겪었던 마력 폭주보다 훨씬 거대한 불길이었다.
진정시키기는커녕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시아, 위험해!”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동시에 나는 그의 손이 타들어 가는 것을 목격했다.
가벼운 화상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오그라든 살로메디안의 살갗을 보면서 소리쳤다.
“떨어져요! 살롬까지 위험해요!”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날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나를 붙들었다.
충격과 공포가 깊어질수록 불꽃은 커다래졌다.
나와 살로메디안 모두 타 죽을지도 몰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마력을 잠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눈앞에 회색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내 영혼을 받아들여, 아이시아! 지금 폭주한 네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키산드라의 영혼이 내게 손을 뻗었다.
-빙의하면 모든 게 해결돼! 살로메디안이랑 함께 타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더는 늦으면 안 된다는 듯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음, 아니면 빙의.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꽃은 나와 살로메디안을 집어삼킬 듯 넘실댔다.
“으읏……!”
살로메디안의 입술 사이에서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은 물론 양팔에까지 화상이 번져가고 있었다. 눈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살로메디안이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킨 탓이었다.
-아이시아!
키산드라가 외쳤다. 나는 입술을 짓깨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할 수 없어요!”
“시아?”
“빙의는 안 돼요. 제가 해결할 거예요!”
눈물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키산드라의 등장을 알 리 없는 살로메디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살롬, 조금만 참아주세요!”
“시아……!”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오로지 내 안의 힘에 집중했다.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신력을 모아야 할 때였다.
낌새를 눈치챈 살로메디안이 서둘러 조언했다.
“마력을 가두지 마!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해!”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육체와 영혼을 태우고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꽃.
내 몸에서 오랫동안 숨죽여 살았던 불의 정령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물에 뛰어드는 것만으로 마력 폭주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력 안에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가 느껴졌다.
불꽃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토록 날 거부하는데?
-나한테 맡기라니까! 넌 아직 미숙해!
키산드라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미숙했다. 당장 상황도 위급했다.
하지만 지금 타인의 손을 빌리면 불꽃과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를 휘감는 불안을 지우고 이글거리는 불꽃을 응시했다.
할 수 있어. 해낼 거야. 오로지 내 손으로!
불꽃의 힘과 분노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소유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불길은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그대로 끓었다. 바짝 마른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낯설고도 포악한 힘이 어쩐지 익숙했다.
이십 평생 숨죽여 있다가 겨우 숨통을 터뜨린 마력 아닌가.
날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모르는 불꽃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내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으므로.
닮은 게 아니야. 불꽃은 내 분신이야……!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모든 걸 빼앗겼으면서도 무표정 뒤에 분노를 숨겨야만 했던 과거.
새로운 힘을 얻었지만 늘 불안에 시달리는 현재.
자유롭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나는 불꽃과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널 의심해서 미안해. 계속 외면해서 미안해. 앞으로 불안해하지 않을게. 널 버리지도 않을게……!’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은 걸까? 불꽃의 움직임이 사뭇 달라졌다.
하늘까지 태울 듯 솟구치던 불꽃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도 우아한 불꽃이 날 향해 다가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 팔을 벌려 불꽃을 끌어안았다.
어릴 적 헤어진 동생과 재회하듯 그리움과 반가움이 복받쳤다.
불꽃이 내 품속으로 녹아들었다. 바위를 녹일 듯한 열기는 그대로였으나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목욕물이 잔잔히 물결쳤다. 시원하고도 청량한 감촉이 날 감쌌다.
물은 불꽃과 충돌하는 대신 서서히 내 체온을 끌어올렸다. 불꽃도 물과 함께 춤추듯 너울거렸다.
완벽한 하나가 되었다는 충만함에 눈을 떴을 때, 살로메디안이 날 끌어안았다.
“시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