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50)

13

* * *

“정말 개짜증이야! 시아랑 단둘이 오붓하게 산책하려고 했더니!”

“…….”

“각하가 왜 따라오냐고요? 왜 우리 사이를 훼방 놓으세요!”

바바라가 작은 주먹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였다.

지금 누가 할 말을 지껄이는 걸까?

초록색 꼬마를 죽일 수도, 쫓아낼 수도 없기에 살로메디안은 더욱 심란했다.

“너야말로 부부 사이를 방해하지 마라.”

“각하야말로 평소처럼 기사들이랑 노세요!”

“시끄러우니까 얼른 돌아가.”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그것이 바바라를 더욱 열 받게 했음은 물론이었다.

“온천에 관심도 없는 각하가 낄 자리가 아니에요!”

“나도 온천 좋아한다.”

“농담하지 마세요! 각하가 온천욕 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바바라가 코웃음 쳤지만, 살로메디안은 진지했다.

아이시아의 이상형이 온천을 가진 남자가 아니던가.

그 순간부터 온천은 살로메디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키산드라가 죽은 뒤로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온천이 말라버렸다고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서러워하던 아이시아의 표정이 아직도 그의 심장을 찔렀다.

어떡해서든 그녀가 원하는 걸 갖게 해줄 셈이었다.

일단 바바라부터 떼어놓은 다음에.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취미인 서류 작업이나 해라. 바바라.”

“서류 작업 따위가 무슨 취미예요? 책임감도 없고 능력은 더 없는 누구 때문에 떠맡은 것뿐입니다!”

바바라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아이시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함께 가도록 해요. 온천을 살리려면 바비의 지혜가 필요할 테니까요.”

“들으셨죠? 시아도 저를 원하고 있다고요.”

바바라가 뻐기듯 가슴을 쭉 폈다.

그 모습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지혜라면 각하보다 제 쪽이 월등하다는 걸 시아도 눈치챈 거죠.”

아니, 살려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짜증스러웠지만 살로메디안은 꾹 참았다.

지금 아이시아에게 중요한 문제는 온천을 살리는 것이었다.

만약 바바라가 온천이 마른 이유를 밝혀낸다면 아이시아는 저 초록색 악마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실지도 몰랐다.

마신의 숲에서 린삼 군락지를 찾은 빈센트에게 그러했듯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로메디안이 혀로 입술을 훑었다.

마주 보고 환하게 웃는 빈센트와 아이시아의 옆모습이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댔다.

마신의 숲에선 남동생이, 온천에서는 누나가? 남매가 쌍으로 날 말려 죽이려는 건가?

살로메디안이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바바라가 보란 듯이 큰소리를 떵떵 쳤다.

“저만 믿어요. 시아를 위해서 꼭 온천을 되살릴 테니까요!”

“고마워요, 바비.”

아이시아가 바바라를 내려다보며 눈매를 접었다.

입매도 딱딱하고 뺨도 굳어있었지만, 미소라고 봐줄 만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살로메디안도 아이시아가 누구보다 환하게 웃게 되길 빌었다.

하지만 그 미소를 오직 내 앞에서만 보여줬으면 하는 작은 욕망도 함께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이시아를 웃게 하는 것도 나고, 아이시아의 웃음을 보는 것도 나여야만 해.’

유치하고 졸렬한 질투심을 숨길 여유도 없었다.

온천으로 향하는 살로메디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바라가 아이시아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기 전에 온천의 비밀을 풀어야 했다.

순간 그는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살로메디안을 키웠던 전대 세드나 공작, 키산드라가 그 온천에서 죽었다는 것 말이다.

* * *

저택 후문으로 나와 좁은 오솔길을 걸었다.

우거진 숲을 지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나서야 온천이라 불렸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온천이라고요?”

바짝 마른 웅덩이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바위로 둘러싸인 웅덩이에는 자갈과 흙만 가득했다.

온천수는커녕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죽었을 때 봤던 것은 역시 환상이었나?

물의 촉감, 주변 공기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와줘야 해.』

내가 저주의 씨앗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고, 사망 5분 전으로 회귀시켜준 신비한 목소리.

그 역시 환청이었을까.

“저도 한동안 안 와 봐서 어떤 상황인지 몰랐는데… 처참하네요. 예전엔 물이 발목 정도는 있었는데.”

바바라가 침통한 표정으로 마른 흙을 만져 봤다.

“바비가 마지막으로 온천을 본 게 언제쯤이었어요?”

“반년 전이었어요. 이 근방에서 불 속성 마물이 자주 목격되어서 시찰을 왔었죠. 원래는 영주가 해야 할 일이지만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을 쏘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로메디안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런 곳을 좋아하다니 하여간 이상한 여자야.”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역시 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구나! 얼마나 이상한지 확인하러 따라온 건가?

덜컥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이상한 여자라.”

“그대한테 한 말이 아니야.”

“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상한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이 장소를 좋아하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툭, 스치듯 무심하게 지나가는 커다란 손.

반자동으로 귓불이 빨개지고 배 속이 간질거렸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설레는 내가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 키산드라 님께서도 온천욕을 즐기셨다고 했죠?”

바바라가 물었지만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서에도 키산드라 님께서 온천욕을 자주 하셨다는 기록이 있었지. 나처럼 목욕을 좋아하셨을까?

내 머릿속에 키산드라는 세드나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170년이나 수행한 여장부였다.

살로메디안을 키운 양모이자, 내게 옷을 물려준 은인이기도 했다.

살아계셨을 때 만나 뵀었다면 좋았을 텐데. 왠지 말이 잘 통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가 죽고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키산드라 님도 살롬처럼 강하셨나요?”

“마신의 힘을 가졌으니까.”

“대륙 최강의 여기사였겠네요.”

170세 할머니 기사라니. 머릿속으로 키산드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백발을 흩날리며 전쟁터를 휘어잡는 백전노장을.

초상화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저택 어디에서도 키산드라의 초상화는 없었다.

일부러 없애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성질머리도 대륙 최강이었다. 사람 괴롭히는 것도, 고집스러운 것도 둘째가라면 서러웠고.”

살로메디안이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에 왠지 모를 스산함이 스쳤다.

“각하랑 꼭 닮은 분이셨네요! 각하도 사람 잘 괴롭히고, 고집스럽잖아요!”

바바라도 키산드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했다.

평소라면 발끈했을 살로메디안은 말없이 말라붙은 온천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키산드라 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릴 때 낯선, 아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늦은 거 아니니? 너 기다리다가 또 죽을 뻔했어.

날 살려낸 신비한 목소리였다.

너무 놀라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온천에서 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히끅.”

“시아?”

살로메디안과 바바라가 날 돌아봤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해?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온천은 꼭 살아날 거다.”

희망을 놓지 말라는 듯 그가 주먹을 불끈 쥐였다.

온천을 보고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바라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 힘으로 안 되면 전 제국을 쥐 잡듯이 뒤져서라도 전문가를 데려올게요!”

온천보다 지금은 환청이 더 문제거든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내게 신비한 목소리가 조언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거라. 바위 뒤쪽으로 올라오면 작은 동굴이 있어.

온천을 둘러싼 바위를 살펴보니 좁은 오솔길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비밀이 풀리려나?

거짓말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잠시 기다려 주실래요?”

내 말에 살로메디안의 낯빛이 덜컥 어두워졌다.

“많이 아픈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내가 치유해줄 수 있다.”

살로메디안의 손바닥에서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감사하지만 치유는 필요 없어요. 그냥 잠시만…….”

“아픈데 왜 치료를 거부하는 거지?”

그는 내가 괜찮다고 하기 전까지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거 어쩐다. 신비한 목소리가 사라지면 안 되는데.

왜 날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 덕분에 나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

테레사의 마리오네트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 기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아내로 살아갈 기회.

그러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얼른 동굴로 올라와.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신비한 목소리가 까칠하게 말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의 등을 찰싹 때렸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없어! 시아가 필요없다시잖아요!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무슨 뜻인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응그렸다.

바바라가 측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나뿐인 남편이 이렇게 몰지각하다니. 불쌍한 우리 시아. 각하는 시아에게 너무 부족한 분이에요.”

“바바라, 말 똑바로 해라. 아픈데 왜 치료가 필요 없다는 거냐?”

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바바라는 철없는 남동생을 꾸짖는 누나처럼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생. 리. 현. 상. 몰라요?”

“!”

“이걸 꼭 시아 입으로 듣고 싶었어요? 눈치 없는 남자가 이렇게 무섭다니까!”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을 흘겨봤고, 그의 입술 사이가 멍하니 벌어졌다.

나는 졸지에 급똥이 마려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 변명도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푹 숙였다.

“미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살로메디안이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바바라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천천히 다녀와요, 시아. 더 참으면 큰일 나요!”

내 손에 부드러운 나뭇잎 몇 장을 쥐어주기도 했다.

덕분에 동굴로 향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지난번엔 마물 똥을 뒤집어썼는데, 이번엔 급똥쟁이가 되다니. 천년의 사랑도 식어버릴 거야.

하지만 낙담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신비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나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야. 이쪽으로 와.

나는 똑똑히 들었다. 아니, 봤다.

날 향해 손을 흔드는 희뿌연 그림자를!

* * *

날 회귀시켜준 존재가 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이 아니라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으니까.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늘씬한 키와 하나로 땋아 내린 긴 머리칼을 가진 20대 미녀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미녀였던 혼령이었다.

“귀신……!”

반투명한 그녀의 몸을 보며 나는 정신을 똑바로 잡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귀신 처음 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미녀 귀신이 도도하게 물었다.

세상에 귀신이 있다는 것도, 그 귀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도 실감할 수 없었다.

다시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해도.

“정말 절 살려주신 분이세요?”

-맞아.

“귀신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보통 귀신은 아니거든.

미녀 귀신이 뻐기듯 말했다.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게. 내가 누군지 아니?

“모르는데요.”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내 초상화를 안 보여줬어?

귀신이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싸가지 없는 꼬맹이는 또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야? 널 죽인 살인자이자, 세 번째 남편인 살로메디안이지.

“서, 설마 귀신님께서는…….”

-난 그 꼬마가 태어나기 전까지 세드나 공작이었던 여자야.

“당신이 키산드라 님이시라고요?!”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넘어왔다.

눈앞의 미녀 귀신은 내가 생각했던 키산드라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젊었고, 아름다웠으며, 대 공작으로서의 위엄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반쯤 투명하다는 것만 빼면.

“키산드라 님은 7년 전, 살롬의 성년식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키산드라 님의 영혼이세요?”

-안 믿기니?

“죄송하지만… 개수작 같아요.”

-큼. 꽤 솔직한 아이구나.

키산드라의 영혼이 떨떠름하게 뺨을 긁적였다.

아쿠아로드엔 환영을 보여주는 마도구도 있었다.

이토록 정교한 환영을 만들어내긴 어렵겠지만, 귀신을 믿느니 마도구의 발전을 믿고 싶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키산드라의 영혼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나도 안 믿긴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지박령이 될 줄이야.

“지박령이요?”

-온천 주위를 쉽사리 떠날 수 없으니까, 지박령이나 다름없지.

골치 아프다는 듯 키산드라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귀신도 두통을 느끼는 건가? 아니면 살아생전 습관인 걸까.

나는 170살이 아니라 27살 정도로 보이는 키산드라를 천천히 살폈다.

회색빛 반투명한 외모 때문에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갸름한 턱선에 날렵한 눈매, 오뚝한 콧대를 가진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임에는 분명했다.

귀신치고는 맑은 눈빛과 우아한 자태도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170세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세요.”

-호호호. 사람 볼 줄은 아는구나? 살아있을 땐 대륙 최고의 동안 미녀라고 불렸었지!

영혼 주제에 키산드라는 외모 자부심이 굉장했다.

-이게 다 꾸준한 관리 덕이란다. 수고롭기는 하지만 마신의 힘을 이용하면 안 늙을 수 있어.

“아, 예.”

-너도 젊을 때 관리해. 자만하다가 한 번에 훅 가는 인간들 많이 봤다.

“…….”

-물 많이 마시고 과일, 견과류도 챙겨 먹어야 해. 특히 잠을 잘 자야지! 피부엔 꿀잠이 특효니까.

귀신으로부터 외모 관리하라는 잔소리를 듣는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분명 아까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뒤이어 우유 목욕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키산드라의 말을 잘랐다.

“죄송한데, 저를 왜 기다리신 건가요?”

더 오래 시간을 끌다가는 살로메디안이 날 만성 변비 환자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급똥쟁이도 서러운데 변비 환자로 보일 수는 없지.

-아참!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키산드라 님과 여유롭게 대화 나누고 싶은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내 시선이 온천 쪽을 향했다.

나무와 바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로메디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서 훔친 심장 덕분에.

-너 제법 하더라? 망할 꼬마가 너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던데?

뭐가 재미있는지 키산드라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귀신도 속일 만큼 살로메디안의 연기는 훌륭했나 보다.

나도 자주 그가 내게 푹 빠졌다고 착각하게 됐으니까.

“저랑 살롬은 그런 관계 아니에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키산드라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몸서리를 쳤다.

-으엑, 살롬이라니! 저 꼬맹이한테 애칭은 어울리지 않아!

“…….”

-들을 때마다 토할 것 같았어! 무슨 생각으로 쟤한테 꽃 이름을 붙인 거야?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어울려요. 살롬의 백금발은 달맞이꽃 빛깔과 똑같으니까요.”

-내가 선택했지만, 참 특이한 애야. 다른 여자애였으면 도망쳤을 텐데. 저 꼬마가 무섭지도 않니?

“살롬은 꼬마도 아니고, 무서운 사람도 아니에요.”

내 대답에 키산드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내가 들었던 농담 중에 제일 신선하고 어처구니없는 농담이구나. 세드나 공작이 안 무섭다고?

“세드나 공작이기 전에 살롬은 좋은 사람이에요. 재능 많고, 자상하고, 선량한 사람. 살인만 잘하는 괴물이 아니라고요.”

내가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이번에는 키산드라도 비웃지 않았다.

단지 진지한 얼굴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하면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꿰뚫을 수 있다는 듯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확언할 수 있어요. 살롬이 멋진 남자라는 걸요.”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도 상관없었다.

누가 내 앞에서 그를 욕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살롬은 자기 장점이 오직 살인뿐이라고 생각했어. 다른 칭찬은 들어본 적 없다고…….

내가 잘했다고 했을 때 소년처럼 밝아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틋함이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 모습 뒤로 외로움과 편견에 웅크려야 했던 어린아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아주고 싶었고 토닥토닥해 주고 싶은 아이의 그림자가 살로메디안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여간 운 좋은 꼬맹이라니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키산드라가 중얼거렸다.

“키산드라 님?”

-내가 널 부른 건 승천하고 싶어서야.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키산드라가 날 응시했다.

“승천… 이라니요?”

-완전히 소멸하는 것.

“네?”

-내게 천국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사라질 수만 있다면.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흩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반투명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으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

-여기가 지옥인지도 모르지. 죽어서도 170년 묵은 업보를 짊어지고 있으니. 내 팔자도 참 더럽지 않으냐?

키산드라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귀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철저히 만들어진 가짜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무표정한 가면을 썼던 것처럼 키산드라는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았겠지.

그래야만 견뎌지는 삶이었을까. 170년을 그렇게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키산드라의 어깨가 가녀려 보였다. 반투명한 회색빛으로 물든 몸도 안타까웠다.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죠?”

내 물음에 키산드라가 눈을 반짝 떴다.

-날 도와줄 거야? 역시 네가 도와줄 줄 알았어!

키산드라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키산드라 때문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왠지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내 마음이 바뀔까 염려하는 것처럼 키산드라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나한테만 이득은 아니야. 너한테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온천을 살리고 싶지 않아?

“온천이랑 키산드라 님이 승천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키산드라가 내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사실 온천이 마른 것도 마신 때문이거든.

“마신이라고요?!”

귀신도 모자라 마신까지? 대체 이 온천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신 바실리키가 어떤 신인지는 알지?

“바바라에게 조금 들었어요. 물의 정령 아쿠엘과 불의 정령 파이엘의 힘을 합한 존재라고.”

물과 불은 함께할 수도, 양립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실리키는 어둠을 택한 덕분에 불가능한 것을 이뤘다.

정령이 되길 거부하고 어둠을 택한 신.

그 신이 온천이랑 관련이 있다고?

-온천과 마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야. 마신의 힘이 미친다는 건 온천으로 증명되지.

“온천이 불과 물이 합쳐지는 장소라서요?”

-바로 그거야! 아쿠아로드에는 온천이 없지?

“단 한 곳도 없어요.”

-아쿠엘의 나라에 불의 기운이 스며들긴 힘들어. 불의 힘만 가득한 땅에서도 온천은 생기지 않아.

“제국의 땅에 유독 마신의 힘이 깃든 이유가 뭐죠?”

-추악한 과거 때문이지. 황족들 사이에만 전해지는 비밀의 역사.

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키산드라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대신 서늘한 감촉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오른쪽 어깨만 얼어붙은 것 같았다. 타인과 접촉했는데도 구역질이 치밀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너도 황족이 되었으니 들을 자격이 있어. 700년 전 건국 황제가 했던 쌍놈의 짓거리를…….

키산드라가 아들을 바치고 마신과 계약한 건국 황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세드나 공작이란 제물을 바쳐 계약을 이어온 끔찍한 역사도.

“마신의 힘을 얻기 위해서 친아들을 버렸다고요? 말도 안 돼요!”

주먹을 움켜쥔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사자인 키산드라는 심드렁했다.

-권력에 미친 인간은 그것보다 더 심한 짓도 한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황제한테 이용당하고 백성들한테 미움받으면서 살인 기계로 살아야 하는데…….”

-제국 입장에서는 싸게 먹히는 거지. 고작 황족 한 명으로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으니까.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사람처럼 키산드라가 킥킥 웃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재의 희생자가 살로메디안이라는 사실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평생 이용당하고 손가락질당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오직 쌍 속성이란 이유로.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불현듯 제국의 황위 계승권 규칙이 떠올랐다.

제국은 적장자에게 황좌를 물려주지 않아. 황제가 되는 건 가장 강한 마력을 가진 황족. 만약 살롬이 쌍 속성이 아니었다면… 황제가 됐을 수도 있어!

발끝부터 현기증이 밀려 올라왔다.

불의 심장을 잃었다고 해도 살로메디안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 황제인 네이선보다 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살인귀라 멸시당하며 변방에 처박히지는 않았을 거였다.

게다가 내게 심장을 빼앗긴 탓에 살로메디안은 완벽한 물 속성이 되었다.

만약 네이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살로메디안은 어떻게 되는 걸까?

네이선은 자식이 없고, 다른 황족들은 모두 노쇠했는데?

어지러운 머리를 한 손으로 짚고 키산드라에게 물었다.

“살롬이 물 속성이 되었으니까, 마신의 계약자가 사라진 거네요?”

키산드라는 쉬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계약자가 사라지면 제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도 키산드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리 위에 드리워진 먹구름은 점점 더 짙어졌다.

린삼을 채집하러 갔을 때 휴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물 토벌 20년 만에 이런 이상한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 뒤에 이어진 살로메디안의 혼잣말도 잊히지 않았다.

「…슬슬 시작인 건가.」

그는 무언가 예측하고 있었다. 마물의 갑작스러운 증가와 이상한 움직임.

어쩌면 마신의 계약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도 몰랐다.

-온천이 말랐다는 건 마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거야.

키산드라의 말에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제가 살롬의 심장을 훔쳤기 때문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키산드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 때문에 제국이 위험에 빠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막막하고 두려워서 무릎이 달달 떨려왔다.

-너는 내가 완전히 소멸하는 방법을 찾는 데만 집중해. 계약자 문제는 꼬맹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살롬한테 맡기라고요?”

-생긴 건 비실비실해도 꽤 유능한 놈이잖아? 내 손으로 키운 놈이니까 그 정도는 알지.

실력은 인정한다는 듯 키산드라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비실비실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유능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잘못을 죄 없는 그에게 떠맡길 수는 없었다.

-마신의 힘이 왜 약해졌는지, 마신이 왜 날 여기에 묶어둔 건지 알아봐 줘.

“키산드라 님도 모르는 걸 제가 밝혀낼 수 있을까요?”

-정 어려울 것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는데…….

“다른 방법이 뭔데요?”

내 물음에 키산드라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음산한 미소였다.

* * *

“시아. 이제 괜찮나?”

걱정 가득한 얼굴로 살로메디안이 안부를 물었다.

볼일을 보겠다며 떠난 사람이 30분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걱정할 만했다.

“저도 경험해 봐서 알아요. 내보내고 싶지만, 도무지 내보내지지 않는 그 괴로움.”

변비의 고통을 되새기는지 바바라가 격하게 공감했다.

차라리 변비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키산드라의 부탁을 떠올리자 가슴 위에 납덩이를 올린 것처럼 답답했다.

키산드라의 영혼를 소멸시킬 방법을 찾는 것도 막막하고, 그녀가 제안한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 아니었으면 넌 죽었겠지? 생명의 은인을 개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니? 궁금하면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는데. 흐흐흐.』

키산드라는 악몽 속 처녀 귀신처럼 몸의 관절을 기이하게 꺾으며 다가왔다.

회색 얼굴, 흐트러진 긴 머리, 텅 빈 눈동자.

꿈이었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을 거였다.

『내가 보통 귀신이 아니란 거 너도 알지? 린삼을 말라 죽게 한다든가, 전염병을 돌게 하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공작령에 저주를 내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키산드라의 부탁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가 선택한 아이답구나! 특별 서비스로 예언해줄게.』

「…귀신이 예언도 해요?」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이복동생이나 조심해.』

키산드라가 테레사를 언급했을 때 나는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공작부인이 된 후로 테레사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믿었으므로.

『앞으로도 널 끈질기게 괴롭힐 거야. 마음 같아선 죽여주고 싶지만… 난 귀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너무 많이 했어.』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이지라도 않으면 잊은 척이라도 하겠는데, 키산드라는 날 따라서 온천까지 내려왔다.

몇 발짝 뒤에서 날 바라보는 회색 그림자. 시도 때도 찾아오는 오싹한 한기.

암담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남편 잡아먹는 마녀였을 때가 나아. 귀신 들린 공작부인보다는…….

한창 침울해하는데 살로메디안이 날 불렀다.

“시아?”

“넷?”

“왜 그렇게 놀라? 아직도 속이 안 좋은 건가?”

“아, 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할 게 많아져서.”

살로메디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의 뒤에서 발차기도 하고 머리카락 잡아 뜯는 시늉을 하는 키산드라의 영혼 때문에 더욱 골치가 아팠다.

앞으로도 계속 저 귀신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걸까?

불안이 목구멍을 꽉 막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온천이 왜 마른 건지 모르겠네요. 각하께서는 알아내신 것 없어요?”

온천을 살펴보던 바바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이상하다. 꺼림칙하고 불길한 무언가가 어른대는 것 같아.”

살로메디안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산드라도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설마 키산드라의 귀신이 보이는 걸까?

“살롬. 혹시 뭐가 보이세요?”

“보이다니?”

“익숙한 얼굴의 회색 그림자 같은 거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안 보인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키산드라도 안심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나와 키산드라를 얼어붙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어. 이곳에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 * *

황량한 온천을 보고 온 뒤부터 아이시아가 부쩍 어두워졌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수가 극도로 적어졌다.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때도 많았다.

얼마나 낙담했으면 그럴까.

‘온천을 가진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했는데. 온천도 없고, 마신의 저주를 받은 남자는 최악이겠지?’

계약을 핑계로 자신을 옭아매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시아는 어떻게 반응할까.

살로메디안은 경멸과 분노로 얼룩진 아이시아를, 처음으로 욕심내고 싶었던 여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확실히 아이시아는 뭔가 달라졌다.

가끔 던지는 질문도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살롬. 요즘 악몽을 꾸지 않으세요?”

“아니. 아주 잘 잔다.”

“어깨가 결리거나, 쉬어도 피곤한 느낌은 없으세요?”

“없다.”

“헛것이 보이거나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아요?”

아이시아의 붉은 눈동자에 근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제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시아는 어미 잃은 아기고양이처럼 불안해 보였다.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저택 보수 공사 확인도 할 겸.”

살로메디안이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갈까? 나도 산책을 하려 했는데.”

이런 것도 데이트 신청이라 할 수 있을까.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뿐이지만,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낯선 박자로 뛰었다.

온 신경이 아이시아의 입술에 쏠려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빈센트 님의 부기사단장 취임식이 있다면서요? 기사단에 가보셔야죠.”

“아내와 산책할 시간 정도는 있다.”

“감사하지만 저 혼자 갈게요.”

칼로 자른 듯 매끈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살로메디안의 훤칠한 몸이 삐끗 중심을 잃었다.

‘조금은 마음을 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 건가? 훌륭한 남편감이라고 말해준 것도 아무 의미 없는 소리였던 거야?’

배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밀려왔다.

슬픔도 아니고 서러움도 아닌 질척질척하고 구질구질한 감정.

살로메디안은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 앞에서 여유를 찾지 못했다.

“시아. 나와 함께인 것이 불편한가?”

남자답지도, 어른답지도 못한 말을 내뱉고 살로메디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았어야 했는데. 불편하다고 하면 어쩔 셈이란 말인가?’

뒤늦은 후회와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이시아가 아니라고 해줬다면 나았겠지만,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정이 있어서요…….”

어색하게 말을 흘리는 아이시아.

무슨 사정이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으나 살로메디안은 더는 질척거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대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살로메디안이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아이시아가 냉큼 허리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아이시아는 쌩하니 사라졌고, 살로메디안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빈센트의 부기사단장 취임식이 곧 거행될 테지만 살로메디안은 집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빈센트의 취임식보다는 아이시아의 변화가 100배, 1000배 이상 중요했으니까.

* * *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서류 더미 틈에서 바바라가 초록색 머리통을 빠끔히 내밀었다.

“각하가 웬일이세요? 맞아! 여기는 원래 제 사무실이 아니라 각하 집무실이었죠?! 완전 잊고 있었네!”

익숙한 비아냥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바바라. 요즘 시아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그럼 그렇지. 또 사랑하는 부인 때문에 오셨군요?”

“…….”

“부인의 반의반만큼만 영지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할 텐데.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잔소리는 나중에 해. 종일 시아랑 붙어 있으니, 뭐 좀 알 것 아니야?”

“영주 역할도 안 하는 무능한 남편보다 제가 시아와 친밀하긴 하죠!”

바바라가 우쭐거렸다.

살로메디안은 초S급 마물보다 짜증 나는 인간을 노려보다가 질문을 바꿨다.

“시아가 네게도 헛것이 보이느냐고 물었나?”

“아니요.”

“환청이 들리거나, 악몽을 꾼다고 물은 적도 없고?”

“한 번도 없어요. 시아가 정말 각하께 그런 걸 물었다고요?”

“그렇다.”

“흐음. 그거 이상하네요.”

바바라가 턱을 쓰다듬었다. 거짓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바바라가 무릎을 탁, 쳤다.

“알겠다! 시아가 왜 그런 걸 물었는지 알겠어요.”

살로메디안은 고약한 혓바닥과 비상한 머리를 동시에 가진 집사를 바라봤다.

바바라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각하. 공작부인과 침실 따로 쓰시죠?”

바바라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만.”

“부부 생활도 원활하지 않고요?”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살로메디안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주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보좌하는 것이 집사라지만 바바라와 이런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시아와의 부부 생활 문제라면 더더욱.

‘계약을 빌미로 스킨십까지 요구할 수는 없지. 시아가 진심으로 날 원할 리도 없고…….’

혼자 가겠다던 아이시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참담했고 또 외로웠다.

떠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싶었다. 그 손목을 끌고 침대로 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본심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살로메디안은 미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아이시아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절 바라볼 때,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색하게 웃을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딱딱하게 굳어있다가 자신을 향해 한껏 느슨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끓어 넘치는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살로메디안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야 했다.

아이시아 곁에서는 늘 꽃잎이 날리고 별빛도 반짝거렸다.

매 순간순간 눈앞에서 작은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여인이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지독한 최면에 걸려버린 것일까. 심장을 빼앗기면서 머리도 고장 나 버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시아의 칭찬에 천국으로 날아올랐다가, 그녀의 거절 앞에서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짓을 반복할 리 없었다.

‘이런 게 사랑일까. 이게… 사랑이라고?’

살로메디안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고서는 반쯤 돌아버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는 사랑이 생각했던 것만큼 달콤하고 행복하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는 거였다.

‘전쟁보다 고단해.’

살로메디안이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망을 잠재우느라 27년 인생, 그 어느 순간보다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때때로 이성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이시아를 품에 안고 그 작은 몸이 으스러지기 전까지 껴안고 싶었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녀의 체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꽃봉오리처럼 여린 입술을 밤새도록 탐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작정이었다.

아이시아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그가 가진 두려움도 갑절로 늘었다.

‘본심을 꺼내면 지금의 평화마저 깨져버리겠지. 시아가 영영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황제도 마신도 두렵지 않은 살로메디안의 가장 큰 공포는 아이시아를 잃는 거였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목욕하는 것이 전통’이라는 가짜 정보를 심어놓고도 욕실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아이시아에게 경멸당할까 봐. 그래서 그녀가 떠나버릴까 봐.

바짝 타들어 가는 살로메디안의 속도 모르고 바바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말하기 싫으시면 묻지도 마세요. 저도 굳이 알려드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나?”

“눈치 못 챈 각하께서 한심하신 거죠.”

살로메디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온천에서도 아이시아의 생리 현상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눈치 없고 한심한 주인을 위해 답을 좀 알려주시지?”

한껏 저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던 바바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부인께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은… 신혼이기 때문이에요!”

살로메디안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신혼과 헛것이 무슨 상관이냐?”

“신혼인데 다른 침대를 쓰신다면서요? 밤새 불타올라도 부족할 새신랑이 냉담하니까, 어딘가 부실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부실? 내가?”

충격을 받은 살로메디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영장류 최강의 사내가 부실하다니.

이보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어디 있을까?

“시아는 각하 몸이 허해서 밤일도 못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또 나를 고자로 몰려는 건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당연하다.”

“자존심 부리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정말… 아랫도리 건강에 문제없으세요?”

살로메디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바바라는 진심으로 세드나 공작의 남성적 기능을 의심하고 있었다.

“관두자. 너한테 물은 내 잘못이지.”

황당함이 지나치니 화도 나지 않았다. 씁쓸하게 뒤돌아서는 그에게 바바라가 목청을 높였다.

“사지 멀쩡하시면 얼른 아이부터 낳으세요! 공작령의 구세주가 도망가 버리기 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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