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50)

12

* * *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공작부인 지금 제정신이시죠?”

휴고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내 뒤를 쫓아왔다.

내가 단호하게 못박았다.

“네. 아주 멀쩡합니다.”

“맨정신에 마물을 드실 작정이라고요?”

“제국에서는 마물을 안 먹나요?”

“당연하죠! 마물의 피는 독입니다!”

휴고가 펄쩍 뛰며 대답했다. 그 정도 상식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 피만 잘 제거하면 돼요.”

“정말 아쿠아로드에서는 마물을 먹는 겁니까? 본한테서 듣기는 했지만 사실일 줄이야…….”

“본이 아쿠아로드 출신인가요?”

“흑룡에는 타국 출신 기사들이 많습니다. 고향이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고 실력으로 대우해주니까요.”

그래서 저주받은 여자니, 남편 잡아먹는 마녀니, 지껄였던 거구나?

동향 출신끼리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본에게 관심을 끄고 토실토실 살이 오른 럼블크 시체를 살폈다.

“피 빼고, 신력으로 정화하면 먹을 수 있어요. 럼블크 고기는 돼지고기보다 쫄깃하고 육즙도 많아서 맛있어요.”

구역질이 치미는지 몇몇 기사들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죽이는 건 괜찮고 먹는 건 안 된다니. 의외로 심약한 사람들이네.

“문화가 다르다는 건 알지만, 인접국인 아쿠아로드와 제국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습니다.”

얼굴이 희끗해진 빈센트가 말했다. 쓴웃음이 밀려왔다.

“귀족들은 마도구 수출로 호의호식하지만, 아쿠아로드 백성들은 항상 식량난에 시달리죠. 고기 먹을 기회는 적고요.”

“그래서 마물을…….”

“빈센트 님도 꺼림칙하세요?”

“아, 아닙니다. 공작부인께서 맛있다고 하셨으니 분명 맛있겠지요.”

빈센트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언제 봐도 우직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바바라는 좋겠다, 이런 동생도 있고.

빈센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해졌을 때쯤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시아. 설마 직접 요리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왠지 불안한 기색이었다.

“당연하죠. 럼블크 손질하는 법은 저밖에 모르잖아요?”

“지시만 하면 된다. 굳이 그대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어.”

“굶주린 분들을 부려먹을 순 없어요. 제가 직접 할게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제가 힘들까 봐 걱정해 주시는군요?”

살로메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마물을 손질하다가 내가 다치거나, 피곤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하여간 과보호라니까.

싫지 않은 참견을 느끼며 가슴을 쭉 폈다.

“살롬은 지켜만 보세요. 곧 럼블크 통구이를 맛보게 해드릴게요.”

“신관이 없는데 정화가 가능해?”

“신력 대신 마력으로 정화하면 되죠.”

그 말과 동시에 내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목욕탕에서 수없이 연습한 결과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폭주해버리지만, 이 정도 불꽃은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어때요? 저도 꽤 하죠?”

“대단하군.”

“아직 멀었어요.”

푸른 불꽃을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감탄했다는 투로 물었다.

“불꽃을 입으로 뿜는 건 아직 못 하나?”

“드래곤 취급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 슬쩍 물러서는 살로메디안을 향해 푸른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 *

고소한 기름 냄새가 마신의 숲에 진동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놓으니, 마물인지 멧돼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기사들도 호기심과 허기를 참지 못하고 럼블크 고기에 손을 뻗었다.

“미친! 너무 맛있잖아? 본의 말이 사실이었어!”

“그동안 버린 럼블크가 수백 마리인데… 아까워서 돌아버리겠군!”

“한 마리 포장 가능할까요? 어머니께도 맛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육즙이 정말 끝내줘요!”

조심스레 맛보던 기사들이 고깃덩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살로메디안이 극구 말려서 소금 간은 휴고가 했지만, 내가 구운 고기를 맛있게 먹는 기사들을 보니 흐뭇했다.

럼블크 통구이의 폭발적 반응 덕분에 내 평판도 덩달아 올라갔다.

“공작부인은 대단하세요. 아름답고, 강하시고… 아까 마력 불꽃을 보셨습니까?”

“불꽃이 일렁거리는 모습이 환상적이더군! 마력 불꽃은 황제 폐하만 만들어내실 줄 알았는데.”

“영지를 위해 마신의 숲까지 오신 것도 대단하시지. 보통 귀부인들은 도망쳤을 거야.”

“맛난 고기도 주셨고! 각하께서 용맹하고 현명한 공작부인을 데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저기서 날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도한 찬양에 민망한 마음보다 보람이 더 컸다.

럼블크만 있으면 기사단 식비를 줄일 수 있겠네. 이제 린삼을 캐볼까?

간단히 배를 채운 나는 린삼 군락지로 돌아왔다.

살로메디안도 손괭이를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기사님들이 굶주릴까 봐 걱정 많으셨죠?”

“아니. 기사들이 식중독으로 죽을까 봐 걱정했다.”

“마력으로 정화하면 괜찮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잠시 말끝을 흐리던 살로메디안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먹을 수 있는 요리라서 다행이었지.”

먹을 수 있는 요리? 먹지 못할 요리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뼉을 짝, 쳤다.

“굶주린 기사님들이 맛없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까 봐 걱정하셨군요?”

“응? 아… 그래. 뭐,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살로메디안의 반응이 영 어색했다. 다정함을 들켜서 부끄러운 건가.

이 귀여운 남자를 어떻게 하지?

“살롬은 정말 다정하세요.”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눈매를 접었다.

칭찬할 때마다 꿈틀거리는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사랑스러웠다. 그럴수록 칭찬을 듬뿍 해주고 싶었다.

귀엽다고 혼잣말하면 다 듣겠지? 내 감정을 읽으니까, 이미 눈치챘는지도 몰라.

심장을 훔쳤다는 것이 형틀처럼 날 옥죄었지만, 그와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면 은은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시아.”

살로메디안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어색하면서도 달큰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럼블크 고기를 씹던 기사들이 우릴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생전 각하께서 연애하시는 걸 보게 되다니. 말세네, 말세야.”

“연애가 아니고 부부 생활이지 말입니다.”

“아내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애처가 세드나 공작이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먼.”

“우리가 자리를 피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숲에서… 뭘 하시기야 하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이 아저씨들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숲에서 뭘 하라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있어서 그런지 현기증이 핑 돌았다.

“조심해. 넘어진다.”

살로메디안이 내 손목을 잡았다. 기사들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하시는구먼! 곧 후계자가 태어나시겠어!”

“한창 뜨거울 때지! 공작부인 옥체 보존하십시오! 각하는 짐승입니다!”

진짜 부부처럼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이런 식의 놀림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배운 예법과도 거리가 멀었다.

기사들이 주군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농담도 정도가 있지?

수하들을 꾸짖을 법도 한데 살로메디안은 태연하기만 했다.

마치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첫날밤도 아직인데 아이를 어떻게 낳아?

살롬도 후계자는 진짜 사랑하는 여인이 낳아주길 바랄 거야.

부끄러움과 안타까움, 혹시나 기대감 때문에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놓으세요.”

“시아?”

“저는 괜찮으니까, 놓아달라고요.”

살로메디안에게 잡힌 손을 억지로 잡아 뺐다.

덕분에 균형을 잃고 늪 쪽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앗!”

“시아!”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축축한 촉감이 전해졌다.

다행히 깊은 늪은 아니었지만, 온몸이 진득진득한 초록색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검은 머리칼은 물론 얼굴도 진흙으로 범벅되었다. 온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물씬 풍겼다.

“공작부인!”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부축해드릴까요?”

기사들이 날 내려다보며 안부를 물었다.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내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니, 찬바람이 쌩쌩 불만큼 냉담해졌다.

이럴 때 감정을 숨기는 기술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부축은 필요 없어요.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서 일들 보세요. 언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기사들은 반쯤 굳은 채 물러섰다.

“아, 예.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격의 없이 장난을 치던 기사들이 경직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둘러 일어서려는데 진창 때문에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늪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들어오지 마세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또 넘어지기 전에.”

매정하게 손을 뿌리쳤던 나를 살로메디안이 일으켰다.

겨드랑이 아래를 잡고 덥석 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지만.

아무리 낑낑거려도 빠지지 않던 몸이 단박에 들어 올려졌다.

그의 손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더러워진 살로메디안의 부츠와 바짓단 때문에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이 꼴로 걸을 수 있겠나?”

진흙을 털어보려고 했지만, 딱딱하게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수구 냄새보다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때렸다.

정색하고 뿌리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맥없이 대답했다.

“저택까지 맨발로 걸어갈게요.”

“씻어야겠다.”

“여기서 목욕을 하라고요?”

헛바람을 집어삼킨 내가 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로메디안이 날 바라보며 입매를 씩 올렸다.

“그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목욕 아닌가.”

그 모습이 굶주린 맹수 같아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 * *

물론 나는 목욕을 좋아한다.

하지만 수십 명 남자의 호위를 받으며 목욕하는 취미는 없었다.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진흙 인형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라면 살로메디안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거였다.

“호수 주위로 원형 진을 쳐라. 최대한 멀리서 호수 전체를 호위하는 것이 목표다.”

“존명!”

“쥐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살로메디안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가 기사들에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마신도 울고 갈 살기를 듬뿍 담아서.

“내 아내의 목욕을 훔쳐보는 새끼가 있으면 눈깔을 파내고 그 자리에 창자를 쑤셔 넣겠다.”

“존… 명!”

“뒤돌아보지 마라. 목이 잘려나가는 걸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

살로메디안의 음산한 목소리가 마신의 숲을 울렸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생명체는 마물이 아니라, 세드나 공작이라 불리는 남자 같았다.

“존명!”

그 말을 끝으로 기사들이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난처해진 내가 살로메디안의 옷깃을 흔들었다.

“기사님들 귀찮게 왜 그러셨어요? 저택에 가서 씻어도 되는데.”

“그냥 늪이 아니라 마물의 배설물이 섞인 늪이다.”

“제가 똥 늪에 빠졌던 거라고요?!”

“안타깝게도. 마물의 배설물엔 독기가 쌓여있다. 바로 씻어내지 않으면 병에 걸려.”

마물 똥과 독이라니! 어쩐지 냄새가 고약하다 했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뒷골이 당겼다.

“기사님들께 폐를 끼치게 생겼네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죠?”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흙인 줄 알았던 똥 덩어리들을 씻고 싶은 마음 반, 민폐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이었다.

살로메디안이 문득 물었다.

“폐 끼치지 않는 게 그리 중요한가?”

그의 표정이 몹시 진지해서 ‘당연한 걸 왜 물으세요?’라고 되묻지 못했다.

“폐 좀 끼친다고 뭐라 할 놈은 아무도 없다.”

“그건 그렇지만…….”

“오히려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할 놈들뿐이다. 그러니 주눅 들지 마.”

“그냥 예의를 지키려고 했을 뿐이에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백금발을 뒤로 넘겼다.

“그대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지나치다는 거야.”

“지나치다고요?”

“늪에 빠진 건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그걸 귀찮아한다면 동료가 아니다.”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동료라는 단어의 울림이 길었다.

살롬에게 기사들은 단순한 수하가 아니라 동료구나. 신분이나 위계보다 동료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 동료에 나도 포함되고 있었다. 이 포근한 충만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물론 그대를 탓하는 건 아니다. 전부 아쿠아로드 개자식들 때문일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주의 씨앗이라 불렸던 5년.

왕세녀로서의 자존심은 진작에 사라졌고 테레사에게 얻어맞지 않기 위해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눈치를 보고, 잘못 없이 욕을 먹고, 모두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던 나날들.

나는 단순히 폐 끼치는 것이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로 비난받을까 봐, 쓸모없는 짐 취급받으며 버려질까 봐 쩔쩔맸던 거였다.

날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5년은 모질고 긴 시간이었다.

“바뀌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요.”

우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낙인처럼 새겨진 습관이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기분을 읽었는지 살로메디안이 한쪽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대 잘못이 아니야.”

“살롬…….”

“습관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는다. 그대가 노력하는 것도 잘 알고.”

살로메디안은 이번에도 내 편이었다. 그것이 눈물이 찔끔 날만큼 고마웠다.

“그대는 항상 노력이 지나쳐서 문제지.”

“골칫덩이라고 나무라시는 거예요?”

“들켰네. 하하.”

듣기 좋은 웃음이 머리끝에서부터 전신을 타고 내려왔다.

발끝이 간질거리고 배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움텄다.

동시에 내게서 풍기는 악취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았다.

정수리에서 마물 똥 썩은 내가 나고 있는데… 이대로 있다간 살롬의 코가 썩어버릴 거야!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진흙 때문에 뻣뻣해진 후드를 벗어던졌다.

“시아?”

“목욕할게요.”

“그렇다고 갑자기 옷을 벗으면……!”

“살롬의 후각은 소중하니까요.”

살로메디안이 당황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셔츠 단추를 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 * *

차가운 호수에 몸을 담갔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몸이란 게 이렇게 간사하다. 언제부터 따뜻하게 데운 물로 목욕했다고 찬물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지.

진흙 아닌 무언가가 묻은 속옷을 차마 벗지 못했다.

양팔을 앞으로 포개어 가슴을 가리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쇄골 아래까지 몸을 담그고 나서야 머리카락에 묻은 마물의 배설물을 씻어낼 수 있었다.

비누가 없어서 잘 씻겨나가진 않았다. 다행히 퀴퀴한 냄새는 금세 빠졌다.

평소라면 물의 감촉을 즐기고 주변 풍경도 구경했겠지만, 오늘은 불가능했다.

살로메디안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것 같아.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부끄러움 때문에 깊은 곳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살로메디안이 외쳤다.

“시아!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로 생각하는지 그의 감시는 살벌했다.

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같이 목욕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게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와 몇 번이나 한 욕조에 몸을 담갔으므로.

기사들이 없었다면 같이 목욕했겠지? 살롬도 옷을 벗고…….

살로메디안의 나신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을 수 없는 몸 아니었던가.

숨이 턱 막힐 만큼 완벽한 근육과 매끈한 피부… 탄탄한 가슴 근육을 되새김질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무언가가 만져진 것은 그때였다.

“이건 뭐지?”

고개를 숙였을 때 내 손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샛노란 도마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악!”

내 입에서 쇳소리가 터져나갔다.

살로메디안이 망설이지 않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시아!”

“으아악!”

손을 털어봤지만, 도마뱀은 여전히 내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발가락 빨판을 이용해서 내 피부를 빨아 당기고 있었다.

도마뱀이 날 향해 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눈앞이 빙글 돌았다.

“파충류 너무 싫어!”

“파충류?”

“살롬! 얼른 이것 좀 떼어줘요!”

나는 다가온 살로메디안에게 다급히 매달렸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요?! 도마뱀이 절 쪽쪽 빨고 있는데!”

내 급한 마음도 모르고 살로메디안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고약한 놈이군.”

“웃지만 말고 얼른 떼어줘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목청을 높였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으로 도마뱀을 떼어 갔다.

부르르 어깨를 떨며 고개만 빠끔 내밀었다.

“다 됐어요?”

“이건 도마뱀이 아니라 불 속성 마물이다.”

“마물이요?”

“해로운 종류는 아니야. 오히려 숲의 독기를 정화하는 유익한 종이지.”

마물에도 유익한 종류가 있어?

있든 없든 내게는 노란 도마뱀일 뿐이었다. 축축하고 징그러운!

“불 속성 주제에 물 안에서 놀다니. 희한한 일이지.”

“얼른 멀리 던져요!”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어린애 같은데 그냥 보내줘요. 대신 멀리, 아주 멀리 던져주세요.”

여전히 살로메디안에게 달라붙은 채 웅얼거렸다.

그가 힘껏 도마뱀을 던졌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도마뱀은 사라진 걸까? 다시 오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에 살로메디안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옷 입은 채로 호수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저 때문에 젖었네요. 미안해요.”

“괜찮아. 나도 씻고 싶었으니까.”

“옷을 벗지도 못했잖아요.”

“벗길 바라나?”

살로메디안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아니, 그냥 물은 것 같았는데 내 귀에는 미치도록 도발적이었다.

젖은 백금발이, 거기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지나치게 섹시했다.

특히 손등으로 날카로운 턱선을 훑을 때는 나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여기서 옷까지 벗었다간 심장 발작이 올지도 몰랐다.

“절대 바라지 않아요! 제발 계속 입고 계세요!”

“그대도 나와 같이 씻는 걸 원할 줄 알았는데. 조금 섭섭하군.”

섭섭하다는 말에 어깨를 움찔 튕겼다.

왜 섭섭하지? 혹시 제국에서는 부부가 같이 목욕하는 관습이 있는 걸까?

목욕을 같이 안 하면 사이가 나쁘다는 증거?

럼블크 고기만 봐도 아쿠아로드와 제국이 퍽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대욕장을 이용했을 때, 살로메디안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었는데, 문화가 달라서 생긴 일이라면 이해되는 장면이었다.

머뭇거리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국에서는 부부가 같이 목욕하나요?”

살로메디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속눈썹이 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왜 대답이 없지? 그 정도 상식도 없어서 충격 받은 건가?

“제가 모르는 관습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살롬?”

겨우 정신이 들었다는 듯 푸른 눈에 초점이 잡혔다.

잠시 날 탐색하던 살로메디안이 정적을 깼다.

“물론이지. 부부가 함께 목욕하는 건 제국의 오랜 전통이다.”

역시! 문화 차이였어.

“흐음. 제국은 제 생각보다 개방적인 나라네요……. 부부가 욕실도 같이 쓰고.”

“인접국이라 하더라도 나라마다 문화는 다른 법이지. 아쿠아로드 여인들이 몸에 천을 감고 입욕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 그것도 이상한 관습이겠네요.”

“역시 시아는 이해가 빠르다니까.”

그렇게 답하며 살로메디안이 평소보다 10배쯤 환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눈부셔서 손으로 시야를 가려야 할 만큼 고혹적인 미소였다.

“미리 설명 못 해줘서 미안하다.”

“제가 죄송하죠. 미리 공부했어야 했는데.”

“남편인 내가 미리 알려줘야 했어.”

“바비한테 제국 문화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어요. 부부 목욕에 대해서도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제국에 적응하려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예법 서적도 읽어보고 싶어요!”

열의를 활활 불태우는데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부부의 일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건 남사스러우니까.”

“하긴. 아쿠아로드에서도 내밀한 남녀 이야기는 어머니께 가르침을 받아요.”

“그렇겠지.”

“황족의 부부 생활이라면 더더욱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겠네요.”

“맞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야.”

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홀한 미소도 다시금 피어올랐다.

살로메디안은 나와 함께 목욕하길 바라는 듯했다. 어쩌면 그 이상을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계약 부부가 아닌 진짜 부부처럼.

그와 나란히 욕조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이렇게 야한 여자였나? 아냐. 제국에 적응하려면 나도 좀 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어.

그런데 그냥 목욕만 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것도 하는 걸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부부가 서로 씻겨주기도 하나요?”

“…뭐?”

“비누칠도 해주고, 문질러주기도 하냐고요.”

“컥.”

살로메디안이 짧은 숨을 삼켰다. 이내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살롬, 괜찮아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기침하던 그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큽, 콜록! 괜찮아. 좀 놀라서.”

“얼른 나가요. 감기 들겠어요.”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

“그래도 기침은 하잖아요.”

다정하지만 엄격한 간병인처럼 말했다. 왠지 낙담하는 기색으로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본은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특히 본을 들것에 실어 날라야 했던 동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너 때문에 공작부인께서 직접 구워주신 럼블크 고기도 못 먹었잖아!”

“내가 먹어보라고 할 때는 역겹다면서!”

“너랑 공작부인이 똑같냐? 한쪽은 공작령의 천사고, 한쪽은 시커먼 사내놈인데.”

“반반한 낯짝에 속으면 안 돼. 그 여자는 저주받았어! 그런 여자와 결혼하다니 각하께 실망했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내가 틀린 말 한 줄 알아? 공작령은 그 여자 때문에 망할 거야!”

본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동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닥치지 못해?!”

“너야말로 입조심해. 내가 부기사단장으로 승진한다는 거 몰라? 실력도 없는 놈이 나대기는.”

“이 자식이!”

화를 참지 못한 동료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본도 참지 있지 않았다.

본은 흑룡기사단 내에서 2, 3위를 다툴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아쿠아로드 암흑가에서 구른 전력 덕분에 주먹다짐에도 능했다.

싸움은 상대가 기절하고 나서야 끝났다.

문제는 휴고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다는 거였다. 호출을 받은 본이 기사단장 관사로 휴고를 찾아갔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본에게 휴고가 다짜고짜 손바닥을 날렸다.

촤악!

무방비 상태로 뺨을 맞은 본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듯 휴고가 그를 짓밟았다.

“크악! 단장님, 왜 이러십니까?!”

“몰라서 묻냐? 천하의 개쌍놈이!”

“갈비뼈! 갈비뼈 나가겠어요!”

“그거 잘됐다, 다섯 대쯤 분질러놓을 생각이었으니까.”

휴고의 무차별 폭행이 이어졌다. 본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공 벌레처럼 몸을 만 채 끙끙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맞았을까. 휴고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네 잘못이 뭔지 말해 봐.”

기사단 내 주먹다짐은 군율에 의해 처벌받는다.

아이시아를 호위하라는 살로메디안의 명령까지 어겼으니 본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설마 이것 때문에 승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고깝지만 지금은 휴고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복수는 기사단장 자리를 빼앗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순간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본이 본심을 숨기고 굽신거렸다. 휴고가 가소롭다는 듯 그를 훑어 내렸다.

“네놈 주먹질 때문에 이런 줄 아나?”

“아, 죄송합니다. 각하의 명을 어긴 죄는 어떤 벌이든 달게 받…….”

“틀렸어!”

본의 말을 싹둑 자르고 휴고가 짜증을 냈다.

“네놈의 가장 큰 죄는 공작령의 천사를 모욕한 것이다!”

“…천사라고요? 그게 누군데요?”

“덜 맞아서 정신을 못 차렸나?! 공작부인 말이다! 우리 영지의 빛이자, 생명줄이신 그분!”

“…….”

“뚫린 입으로 어떻게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지? 아름다운 분 면전에서 저주가 어째? 여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크셨겠나!”

본이 듣거나 말거나 휴고는 침까지 튀겨 가며 아이시아를 찬양했다.

“아리따운 미소로 천년 묵은 피로를 풀어주시고, 손짓 한 번에 기사단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주셨지. 마신이시여,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그 여자 아니, 공작부인 때문에 절 죽도록 패셨다고요?”

“주둥이를 찢었다 꿰매 버리려던 걸 참은 거다. 척추를 반으로 접어버려도 시원찮을 놈!”

“설마 제 승진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겠죠?”

“무슨 승진?”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저를 부기사단장에 임명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그냥 후보 중 하나라고 했을 뿐이다.”

“단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본이 목소리를 높이자, 휴고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처럼 군율을 우습게 여기고, 주군의 신부이자, 공작령의 구세주를 모욕하는 자를 어찌 부기사단장으로 삼겠는가?”

“제 실력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실력으로 치면 빈센트가 너보다 우위지.”

휴고 입에서 빈센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순간 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고귀한 핏줄과 명문 가문, 잘생긴 외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빈센트는 본의 자존심을 긁는 최악의 상대였다.

“공작부인 권세를 등에 업고 갓 기사가 된 애송이를 부기사단장에 올리겠다고요?”

“너도 5년 전에 입단했지? 견습 딱지를 오래 달아서 그렇지, 빈센트가 너보다 몇 달 전에 들어왔다.”

“단장님!”

“시끄러워! 제국 밖으로 쫓아버리기 전에, 발이나 닦고 자!”

그 말을 끝으로 휴고는 본을 쫓아냈다. 승진은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기사단장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개처럼 싸웠는데… 인제 와서 내치겠다고? 전부 그 마녀 때문이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존경해 마지않은 공작 각하를 현혹한 여자.

빈센트에게 날개를 달아준 여자.

기사단장의 신임을 앗아가고, 승진의 꿈마저 짓밟은 여자.

본이 핏발선 눈으로 공작저 2층, 아이시아의 방을 노려봤다.

* * *

에메랄드 린삼은 내 생각보다 파급력이 훨씬 컸다. 그저 비싼 값에 팔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인들이 찾아왔어요! 제발 와달라고 빌어도 오지 않던 작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요!”

바바라가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구하기 힘든 최상급 약초가 시장에 나오자 상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린삼을 꾸준히 출하할 수 있다니까 더 난리예요. 너도나도 독점권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고요!”

“돈 되는 일이라면 목숨도 거는 것이 상인이죠.”

“시아 말대로 경매에 붙였더니, 린삼 가격이 미친 듯이 올랐어요! 우린 이제 부자예요, 시아!”

바바라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한 촉에 10골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상인들끼리 경쟁이 붙으면서 린삼 가격은 20골드까지 치솟았다.

린삼을 팔아주기만 하면, 공작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대겠다는 상단도 나왔다.

덕분에 공작저 개보수와 의료 교육원 설립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직 린삼의 만분의 일도 팔지 않았는데 말이다.

“관리만 잘하면 린삼은 계속 자랄 거예요. 약효 연구도 진행해야죠.”

“시아 같은 천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과찬이에요. 바비.”

“절대 과찬이 아니에요. 제 모가지와 손모가지, 발모가지 모두를 걸고 맹세해요!”

바바라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바바라를 진정시키고 본론을 꺼냈다.

오래 미뤄뒀던 그 일을 해야 할 시기였다.

“온천에 가 봐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바바라에게 물었다.

급한 불을 껐다고는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상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이 영지를 되살릴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온천수가 안 나오는 온천이라니 너무 가엾지 않은가?

반대하거나, 적어도 난감해할 줄 알았던 바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당장 시찰을 가보실래요?”

“괜찮겠어요?”

“당연하죠! 그러잖아도 시아가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내가 목욕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지만, 온천을 살리고 싶어 하는 것까지 어떻게 알았지?

바바라는 예언자인가? 아님, 독심술사?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바바라가 비밀을 풀어줬다.

“각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어요. 시아가 온천을 살리겠다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그것부터 해결하라고요.”

“살롬이요?”

“네. 마신이 아니라 애처가라 불리는 그분이요!”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듯 바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시아를 바라보는 각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잖아요. 각하가 양봉업자로 전업한 줄 알았어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요! 시집 못 간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진짜 그런 거 아닌데.”

그저 계약에 충실했을 뿐이지.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달콤해서 나도 가끔 착각하곤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계약에 묶인 관계였다.

그 이상은 기대해서도, 바라서도 안 됐다.

그걸 알면서도 요즘은 혹시나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틈만 나면 날 보러 왔기 때문이었다.

“각하께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시아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지만, 아직 견딜 만해요.”

바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신의 숲에서 돌아온 후, 나도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전에도 다정했지만 뭔가 끈끈한 열기 같은 게 느껴졌다.

이상한 것은 목욕탕에 찾아오는 일은 없다는 거였다.

살롬도 기대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어쩌나?

“살롬이 집무실에 자주 오긴 하죠.”

욕실에는 오지 않지만.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바바라가 맞장구쳤다.

“영주 집무실에 각하가 출몰하다니! 적응 안 돼서 미치겠다니까요?”

그렇다고 살로메디안이 영주 업무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바라가 서류를 들이대면 눈살부터 찡그렸으니까.

대신 내게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보여줬다. 부드러운 위로와 함께.

「무리하면 병난다, 시아.」

「바바라가 너무 부려먹는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해.」

「잠깐 쉴까? 아님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내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은 뜨거웠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담긴 열기도 마찬가지였다.

계약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까.

온천 이야기까지 먼저 해준 걸 보면…….

몰래 기대를 품으며 저절로 올라가는 광대를 꾹꾹 눌렀다.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에게 맺힌 것이 많아 보였다.

“일 안 할 거면 얼쩡대지나 말 것이지! 하여간 시아랑 결혼한 것 말고는 도움이 안 되는 분이에요.”

“살롬은 기사단 훈련을 맡고 있잖아요. 국경 수호도 그분의 의무고요.”

“어머머! 지금 각하 편드시는 거예요?”

“아…….”

“신혼이라지만 정말 뜨겁네요! 눈꼴시어서 살 수가 없네요.”

나도 모르게 살로메디안을 변호하자, 바바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바바라뿐만 아니라 공작저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마신으로 불리는 세드나 공작이 폐왕녀 출신 아내에게 푹 빠져서 애처가가 되었다고.

나도 가끔은 그 소문을 믿고 싶었다.

“시아. 온천에는 언제쯤 가보실까요?”

바바라의 물음이 날 현실로 끌고 들어왔다.

“내일 갈 수 있을까요?”

“좋아요! 온천 관련 문서도 미리 다 찾아놨어요.”

바바라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과 문서 더미를 내게 건넸다.

그중엔 엄지손톱만 한 자물쇠가 달린 양장본 노트도 있었다.

처음엔 책인 줄 알았지만 표지에도, 책 등에도 아무 글씨도 적혀있지 않았다.

기묘한 무늬가 음각된 붉은 가죽 책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비. 이건 뭐예요?”

“으잉? 그게 뭐죠?”

“바비가 준 책 사이에 있었는데요.”

“노트는 본 적 없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요?”

“어딘가에서 딸려 온 거겠죠. 제가 살펴볼게요.”

유능한 집사가 챙긴 문서에 이름 없는 노트가 딸려오는 것이 가능할까?

잠시 의아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노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안에 나와 살로메디안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글귀가 들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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