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1화 (11/50)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2권

차 례

* * *

11

12

13

14

15

16

17

18

19

11

* * *

“쿠우우우욱!”

거대한 덩치를 가진 짐승의 울음. 호랑이도, 사자도 아닌 괴수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살로메디안에게 달라붙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손끝이 달달 떨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공포가 다시금 날 덮쳤다.

“괜찮다. 내가 있다.”

그 말과 함께 살로메디안이 나를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게 되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기 전까지 바짝 굳은 채 서 있었다.

“두려워할 것 없어. 그대는 안전하다.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해.”

나는 그의 목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두근.

잔뜩 긴장되어있던 신경이 놀랍게도 진정되었다. 공포 대신 자리 잡은 떨림은 익숙한 것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제 가슴에 매달린 날 내려다봤다.

“돌아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의 눈길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겁도 많은 주제에 왜 고집을 피웠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왜 번거롭게 하느냐고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결정을 기다려 주는 남자. 내 모든 걸 이해하고, 또 괜찮다고 해주는 남자.

그런 남자가 살로메디안이어서 기쁘고, 또 슬펐다.

나한테도 이렇게 잘해주는데, 진짜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얼마나 잘해줄까?

날 끌어안은 그의 체취가 달콤할수록 심장이 쑤셨다.

알량한 질투심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이 확 들도록.

“시아? 뭐 하는 거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나는 입매에 힘주고 가능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무리할 필요 없다.”

“마신의 아내가 마물을 무서워할 수는 없죠.”

계약 공작부인이라 해도 나는 살로메디안의 아내였다.

흑룡기사단과 첫 대면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살로메디안은 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이라 불렸던 기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럼블크 울음소리가 가깝습니다. 평소처럼 선봉에 서셔야지요?”

침묵하는 살로메디안을 내가 떠밀었다.

“얼른 가세요. 항상 기사단 선봉에 서셨다면서요.”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싸우는 것이 그의 방식이라고 들었다.

지휘관은 안전한 곳에서 수하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줄만 알았는데.

나 때문에 살로메디안의 규칙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살롬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날 방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살로메디안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대륙 최강의 기사다운 말이었다.

황제가 눈앞에 있다고 해도 말을 바꾸지 않을 듯했다.

쓴웃음을 삼키며 다시 한번 그의 등을 밀었다.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어서 가세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날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그제야 선두로 향했다.

“이동한다!”

살로메디안의 넓은 어깨와 등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나도 내 역할을 해야 할 때였다.

* * *

마신의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나무 탓에 한낮임에도 어둑어둑했다.

정기적으로 가지를 치지 않으면 좁은 길은 금방 사라진다고 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 덕분에 내 얼굴은 차갑게 굳어 갔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공작부인?”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는 거구의 기사가 날 돌아봤다.

구릿빛 피부와 새까맣고 거친 턱수염,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기사라기보다는 산적에 가까워 보였다.

기사단장 휴고라고 했던가? 최초의 용병 출신 기사단장이라고 들었는데.

살로메디안의 오른팔답게 잔혹하기로 유명하다고.

바바라에게 들었던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괜찮습니다. 호위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낯선 사람들 앞이라 긴장됐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잔혹한 살인마일지 몰라도 내게는 남편 직장 부하였으니까.

“공작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기사단장님.”

“부디 휴고라고 불러주십시오.”

“네, 휴고 님.”

“허허허.”

이름을 불러주어서 기쁘다는 듯 휴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험상궂은 인상을 한 방에 녹여주는 순박한 미소였다.

“실례지만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본 휴고가 물었다.

“편히 말씀하세요.”

“목소리도… 외모처럼 아름다우십니다, 공작부인.”

수줍어하며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고백하는 소년 같아서, 찬바람이 쌩쌩 불던 내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내 착각일 뿐, 남들 눈에는 여전히 얼음 인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여인과 어찌 말하는지도 다 까먹어서…….”

“아니에요. 칭찬 감사해요.”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휴… 다행입니다. 공작부인의 심기를 상하게 했을까 봐 식겁했습니다.”

겨우 살았다는 듯 휴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휴고처럼 내게 호의적인 기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부인의 행동 탓에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살로메디안에게 선봉을 권했던 기사가 톡 쏘는 말투로 말했다.

아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싹싹하더니, 180도 바뀐 태도가 거슬렸다.

“본 존스! 공작부인께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 하지 마!”

휴고가 호통을 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공작부인이라면 충언에 귀를 기울이겠죠. 주제도 모르는 훼방꾼이라면 무시하겠지만요.”

본이 날 아래위로 훑으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런다고 내가 발끈할 줄 알아? 짐짝 취급은 익숙하거든?

“충고 감사합니다. 존스 경도 조심하세요. 마신의 숲에서는 최강의 기사도 생명이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본의 이마에 자리 잡은 십자 흉터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본의 얼굴은 벌레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고, 휴고는 고소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크하하! 너나 조심해! 각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자네는 마신의 숲에서 죽었을 테니까.”

“…….”

“훈장 정도로 끝난 걸 천운으로 알라고!”

휴고가 이마를 가리키며 놀리자, 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각하는 제 우상이자,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폐왕녀 따위를 아내로 들이시다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날 노려보며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야 본심을 밝히는구나. 살로메디안의 광신도였어? 지금 나한테 질투하는 건가?

“본, 그 입 닥치지 못해?”

휴고가 벌컥 성을 냈지만, 본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남편 잡아먹는 마녀의 호위는 사양하겠습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죽고 싶나?”

“기사단장님도 조심하십시오. 저주받은 여자 곁에 있으면 불행해지니까요.”

그 말을 남긴 채 본은 대열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주와 불행. 폐왕녀. 남편 잡아먹는 마녀.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들을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들고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처박았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주의 비밀을 알게 돼서 그럴까? 공작부인이란 신분 덕분일까? 자문하다 고개를 저었다.

모두 살로메디안 때문이었으니까.

진실을 알았다고 바뀌는 건 없었을 거야. 회귀 덕분에 기회를 얻었고, 살롬 덕분에 용기를 얻었지.

나도 빛날 수 있다는 용기.

나를 이해해주고 기꺼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랄 만큼 큰 힘이 되었다.

일부러 똥 덩어리를 던진 기사1의 헛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흔한 미친놈입니다. 미친놈이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면 박살을 내놓겠습니다.”

휴고가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위험한 보직이라 훈련만 잘하면 풀어둔 탓입니다. 기사단 내 기강을 바로 잡겠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공작부인에 대한 모욕은 각하에 대한 모욕이니까요.”

침착하던 빈센트도 분을 참지 못했다.

나 때문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건 피하고 싶었다.

“불쾌하지 않았어요. 저런 비난에는 익숙하거든요.”

“익숙하시다고요?”

안심하라고 한 말인데 휴고와 빈센트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5년간 폐왕녀로 살았으니까요. 휴고 님이나 빈센트 님처럼 절 받아주시는 분들이 특이한 거죠.”

“공작부인…….”

“원래 사람이란 소문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각하께서도 살인귀란 오명을 얻으셨잖아요.”

“기사가 조국을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낯빛이 벌게진 휴고가 벌컥 화를 냈다. 나도 동의했다.

“물론이죠. 하지만 백성들의 편견을 깨는 것도 영주의 의무예요.”

“공작부인.”

“편견을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저와 각하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

휴고가 긴 탄식을 뱉었다. 그의 퉁방울눈에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외모보다 마음씨가 더 고우신 분이었군요…! 공작부인의 고귀한 인품에 감복했습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말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세상에 공작부인처럼 현명하고 어진 분은 없을 겁니다. 천사 같은 공작부인이 각하 곁에 계셔주신다니… 저는 그만 감격해서…….”

감정이 격해진 휴고가 말을 잇지 못했다. 동감이라는 듯 빈센트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바라는 구세주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천사?

어색하게 웃으며 휴고와 빈센트를 독려했다.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기사님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으니 서두릅시다.”

“귀찮다니요? 숲 정찰은 기사단의 주요 업무입니다. 공작부인과 함께하게 되어서 가문의 영광일 뿐입니다!”

숲이 떠나갈 듯 휴고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빈센트도 조용히 거들었다.

“기사단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자주 토벌해줘야 합니다.”

“혹시 마물이 늘어난 건가요?”

“그렇습니다. 민가를 습격하는 마물도 매우 증가했습니다.”

아쿠아로드 왕궁에 있을 때도 마물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마신의 숲에 버려진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자를 제물로 바치면 마물이 잠잠해진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어떤 멍청이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민가에 피해가 없도록 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진지한 표정으로 빈센트가 덧붙였다.

“네! 공작부인도, 마을 사람들도 저희가 지킬 것입니다!”

휴고가 두꺼운 가슴을 땅땅 치며 말했다.

제국인이 아니라 마을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흑룡기사단이 지키는 사람 중에는 아쿠아로드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기에.

“고맙습니다, 휴고 님. 정말 든든합니다.”

내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휴고도 빈센트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어색한 침묵 끝에 휴고가 입을 열었다.

“웃으시니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사님이 따로 없습니다! 정말 놀라울 만큼 아름다우십니다!”

눈이 부시다는 듯 옷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휴고가 탄성을 내질렀다.

은은히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가렸다.

“과찬이십니다. 휴고 님.”

“음유시인들이 봤다면 공작부인의 미모를 찬양하는 시를 수백 편씩 써 재꼈을 겁니다! 안 그런가, 빈센트?”

“…….”

“왜 말이 없나? 자네 눈엔 공작부인이 아름답지 않단 거야?”

휴고가 닦달하자, 빈센트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떨리는 속눈썹이며 파리해진 얼굴이며 어디가 크게 아픈 사람 같았다.

내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빈센트 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공작부인. 어서 서둘룹, 아니, 서둘럽셉쇼.”

“네?”

“서, 서두르시지요.”

한층 더 파랗게 질린 빈센트가 말을 더듬었다. 침착하고 똑 부러진 남자가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왜 말을 더듬지? 공작부인의 미모에 홀리기라고 한 게야?”

“아, 아닙니다. 단장님!”

빈센트가 빽 소리쳤다. 지나칠 정도로 과장된 반응이었다.

다 안다는 듯 휴고가 빈센트의 등을 퍽퍽 쳤다.

“정식 기사가 된 후 첫 임무라 떨리는 거지? 실력이 좋아도 아직 애송이라니까! 크핫핫핫.”

휴고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빈센트의 귓바퀴를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네.”

나보다는 두 살 연상이었지만, 늘 바바라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빈센트가 남동생처럼 느껴졌다.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지만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남자랄까?

빈센트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데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다가왔다.

* * *

“우리 시아는 어딜 가도 인기가 좋군.”

한발 먼저 숲으로 들어간 살로메디안이 어느새 내 코앞에 서 있었다.

“살롬? 왜 다시 오셨어요?”

“기사들보다는 그대를 지키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서.”

“제 호위라면 충분한데요?”

“아니. 그 호위가 제일 문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빈센트를 훑어봤다.

분명한 적의가 담긴 눈빛이었다.

살롬은 왜 빈센트를 싫어하지?

아쿠아로드까지 데려온 걸 보면 꽤 신임하는 수하 같은데…….

윗스 가문과 마찰 때문인가?

나 때문에 빈센트가 미움을 받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본은 어디 갔지?”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시아를 지키라는 내 명을 어긴 건가?”

살로메디안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뒤로 검은 오러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살롬이 본을 죽일 거야! 분명 죽인다!

머릿속에 높은 경고음이 울렸다.

썩은 주둥이를 가진 비호감이었지만 내 호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어요.”

내 말에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대는 본이 어디 갔는지 아는 모양이지?”

“소… 소변이 급하다고…….”

어설프게 변명을 중얼거렸다.

살로메디안의 미소가 더욱 농염해졌다.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봤다면 현기증을 일으켰을 만큼 아찔한 미모였다.

“본이란 놈이 내 아내 앞에서 소변 따위를 운운했단 말인가?”

“네에?”

“근무지 이탈도 문제지만, 그대의 귀를 더럽힌 죄를 용서할 수 없군. 그 죄는 죽음으로 물어야겠어.”

본을 위해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사지로 몰아넣고 말았다.

파랗게 질린 내가 살로메디안에게 물었다.

“설마 죽이실 거예요?”

대답도 하지 않고 살로메디안의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물방울이 손끝에 솟아올랐다.

그가 쏜 마력 물방울이 화살처럼 숲을 가로질렀다. 이내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 정신 차리게, 이 사람아!”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아직 숨은 붙어 있어! 마물이 몰려들기 전에 숲 밖으로 호송해!”

잠시 후, 기절한 본이 들것에 실려 숲 밖으로 옮겨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낯빛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내가 살로메디안을 책망했다.

“살롬. 귀한 기사를 다치게 하면 어떡해요?”

“죽여야 할 놈을 살려줬으니 내 너그러움을 찬양하겠지.”

그가 뻔뻔한 어조로 말했다. 휴고와 빈센트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희는 자리를 뜨지 마라.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니까.”

“존명!”

두 기사가 경직된 자세로 외쳤다.

그래도 살인이 아니라 상해라 다행이네. 제 잘못도 있으니까 치료비를 요구하진 않겠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토했다.

빠듯한 영지 살림으로도 힘든데, 살로메디안에게 다친 사람들 치료비까지 물려면 등골이 빠질지도 몰랐다.

죽었으면 장례비에 합의금, 아니면 위로금까지 내야 하는 거 아냐?

이쯤 되니 살로메디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생하지 않으신 건 정말 잘하셨어요.”

“지금… 날 칭찬한 건가?”

살로메디안이 제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미묘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요?”

“그대가 날 칭찬한 건 처음이다.”

“그랬나요.”

멋쩍어서 뺨을 긁적였다.

살로메디안이 잘생겼다고, 검술도 뛰어나고, 연기도 잘하고, 자신감도 대단하다고 여러 번 감탄했지만, 입 밖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칭찬하는 것도 받는 것도 아직은 어색한 탓이었다.

“죽이지 않았는데 잘한 건가? 살인을 잘하는 것이 내 유일한 장점이라고 하던데.”

다소 혼란스럽다는 듯 그가 미간 사이를 좁혔다.

“누가 그랬는데요?”

“바바라랑 키산드라가.”

살로메디안을 키운 전대 세드나 공작도 바바라 못지않은 독설가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이 유일한 장점이라고 했다니. 너무하잖아?

살로메디안은 10살부터 전쟁터와 마물 출몰지로 보내졌다고 들었다.

선봉에서 적을 베고, 마물의 목을 잘랐을 어린 소년을 상상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흰 뺨과 눈부신 백금발을 적시는 붉은 피도. 수없이 찔리고 베였을 소년의 가슴도.

세인들은 그를 피에 젖은 마신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지만, 그가 원한 건 살육이 아니었을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한 아쿠아로드 기사들을 살려줬다. 명령을 어긴 수하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그는 내 작은 상처에 안타까워했고, 내가 마력 폭주를 일으킬 때마다 살갗이 불타는 것도 마다치 않고 구해줬다.

도둑에 불과한 계약 아내를.

따뜻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해. 살롬은 마신 같은 게 아니야. 내가 그 악명을 벗겨줄 거야.

나는 살로메디안 덕분에 남편을 잡아먹는 마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내 힘으로 그의 오명을 씻어주고 싶었다.

영민들은 물론 전 제국인들이 그의 자상한 면모를 알 수 있도록.

그것이 계약 공작부인으로서 내 사명이었다.

“살인 말고도 살롬은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내가 힘주어 말했다.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쓸모가 있다는 건가?”

“물론이죠.”

“전쟁터나 마물 토벌 말고? 그것참 신기하군.”

그는 의아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왠지 가슴 한편이 시렸다.

머뭇거리다 살로메디안의 커다란 손을 살며시 쥐었다.

심장이 미친 말처럼 날뛰고 있었지만, 그에게 꼭 해줄 말이 있었다.

“살롬은 제가 본 어떤 남자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가.”

“처음 만난 뒤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예를 들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대답을 재촉했다.

자세히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잘, 생기셨고… 솔직하고, 자신감이 강하고, 리더십도 탁월하고…….”

점점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그가 바짝 다가왔다.

덕분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잘생기셨고… 눈동자도 사파이어처럼 파랗고, 코도 높고, 피부도 여자보다 더 깨끗하고… 그래서 잘생겼고…….”

지금 내가 뭐라고 떠드는 거지? 외모 찬양만 하고 있잖아?

잘생겼다는 말을 세 번쯤 반복하고 난 뒤에 입을 다물었다.

뺨은 물론 목덜미 아래까지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렇군.”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날카로운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만으로 그의 아름다움이 한층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대륙 제일의 기사가 아닌, 대륙 제일의 미남자라 불러야 할 정도로.

민망하긴 하지만 말하길 잘했네. 살로메디안의 이런 표정도 보고.

“시아. 왜 그렇게 보지?”

넋 놓고 얼굴 구경한 것을 들킨 듯해서 얼른 말을 돌렸다.

“삼나무 아래에 뭔가 보이네요. 얼른 가보죠.”

살로메디안의 손을 놓고 약초를 채집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 * *

“살롬?”

아이시아가 석류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의아해했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살로메디안의 욕망을 충돌질한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길이 험하다. 에스코트가 필요할 거야.”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했다.

‘시아가 내 손을 먼저 잡다니.’

아이시아가 먼저 스킨십을 해온 것도, 잘생겼다고 말해준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미모에 대한 찬양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시아의 목소리로 듣는 잘생겼다는 말은 기이할 정도로 살로메디안을 들뜨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만큼.

‘시아 손은 어쩌면 이렇게 작고 하얀 걸까? 여자 손은 다 이런가?’

엉거주춤 그의 손가락 끝을 어색하게 잡은 아이시아의 작은 손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거칠게 때렸다.

힘주면 부러질 것 같아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원히 놓고 싶지 않았다.

기사들이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살로메디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시아의 떨림과 작은 손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감기 치료에 좋은 여우 버섯이에요. 불면증에도 효험이 있어요.”

하얀 버섯을 가리키며 아이시아가 재잘거렸다.

“달여서 마셔도 좋고, 볶아서 먹어도 좋아요. 날로 먹으면 설사를 하지만.”

약초에 대해 말하는 아이시아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이시아가 버섯을 따는 동안 휴고와 빈센트를 제외한 기사들은 마물의 움직임을 살폈다.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성가시기만 하던 마신의 숲이 아름다운 휴양지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다른 데도 가볼까요?”

버섯을 따고 일어나던 아이시아가 이끼 낀 돌을 밟고 미끄러졌다.

“읏.”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심해.”

“고마워요.”

허리에 손이 닿자 아이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딸기 맛 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검은 속눈썹.

살짝 벌어진 분홍빛 입술과 달큰한 체취.

살로메디안은 진심으로 숲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이시아를 안을 수만 있다면 매일 올 수 있을 듯했다. 아니, 매일 오고 싶었다.

“에메랄드 린삼이 어디였더라… 느, 늪지대 쪽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시아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말을 더듬었다.

살로메디안과의 오붓한 시간보다 약초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확인할 때마다 씁쓸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언젠가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린삼이 그렇게 중요한가?”

푹 잠긴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아이시아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약초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약효가 좋으니까요. 꼭 찾고 싶어요.”

진작 약초학을 배워둘 것을. 그랬다면 아이시아를 기쁘게 해줬을 텐데.

약초 핑계로 단둘이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또 실망하게 될 줄 알면서도 아이시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살로메디안이었다.

“가느다랗고 긴 줄기에 연두색 잎사귀가 다섯 장이라고 했지? 에메랄드빛 열매가 달려있는.”

“보신 적 있나요?”

“본 적은 없지만, 서쪽으로 가보면 있지 않을까…….”

살로메디안이 슬쩍 말꼬리를 흘렸다.

마신의 숲에 수천 번은 들어왔었지만, 풀 따위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약초든 잡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물만 죽이면 되는데.

그때 빈센트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늪지대가 있습니다. 그 부근에서 공작부인께서 말씀하신 약초를 본 것 같습니다.”

“정말요? 얼른 동쪽으로 가 봐요!”

아이시아의 얼굴이 환해졌고, 살로메디안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아이시아가 놀라운 힘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빈센트 쪽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이 지도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빈센트가 품에서 양피지 지도를 꺼냈다. 아이시아가 더욱 바짝 빈센트에게 달라붙었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구역질이 날 텐데 참는 거야? 그렇게까지 빈센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살로메디안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시아는 지도에 눈이 팔려 있었다.

“마신의 숲의 지도인가요?”

“그렇습니다.”

“설마 직접 그리신 거예요?”

“집사로 교육받은 탓인지, 뭐든 문서로 남겨두는 것이 습관입니다.”

“대단하세요. 화공이 그린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부끄럽다는 듯 빈센드가 볼을 붉혔다.

5년 전부터 함께했던 수하의 낯선 모습에 살로메디안은 기함했다.

아이시아가 입이 닳도록 빈센트의 지도를 칭찬했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면적, 지형 특성, 위험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네요? 어느 지역에 무슨 나무가 분포하는지도 적혀있고요.”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있다마다요. 빈센트 님 덕분에 약초 채집이 훨씬 수월해지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시아는 특유의 무표정도 무너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아이시아의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한 기사들까지 넋을 잃고 말았다.

낯선 남자 앞에서 저리 즐거워할 일인가? 지도 같은 건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공작부인.”

빈센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마저도 살로메디안의 눈에는 아이시아를 유혹하는 괘씸한 수작으로 보였다.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이시아.

그를 바라보는 수십 명의 사내들.

그중에서도 가장 반반하고, 자신보다 약초에 대해 잘 아는 빈센트.

살로메디안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불쾌하면서도 초조한 감각이 심장을 조여 왔다.

조금만 방심하면 눈이 회까닥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빈센트의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분노를 가라앉히며 아이시아의 손에서 지도를 낚아챘다.

“지도 나부랭이는 쓸모없다. 마물은 보이는 족족 죽이면 돼.”

“각하께서 승인해주셔서 그린 지도입니다만?”

“내가 언제?”

시치미를 잡아떼자, 빈센트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마물 토벌을 위해 체계적으로 마신의 숲을 관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적 없다.”

“각하…….”

제 변덕이 구질구질하다는 것쯤은 살로메디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빈센트와 아이시아가 희희낙락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빈센트가 자신보다 점수를 더 따는 건 더더욱.

살로메디안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빈센트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깔끔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이야.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믿음직하고.’

빈센트에 비하면 살로메디안은 좌중을 압도하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어디에 가든 시선을 받았고, 외모를 찬양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들었다. 물론 그를 칭송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이 무조건 잘생긴 남자를 좋아할 줄 알면 오산이에요. 얼굴값 하는 남자도 많으니까요. 각하처럼 살림을 도외시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진심 최악이죠.」

바바라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최악의 남편감이라는 말이 특히 오래 남았다.

살로메디안보다 빈센트는 성실하고, 마신의 저주도 없고, 살인귀라 불리지도 않았다.

나이도 어렸다. 올해로 22살이니, 20살 아가씨가 눈에는 딱 알맞은 상대일지도 몰랐다.

‘27살인 나는 늙은이로 보일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빈센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질투에 눈이 멀었다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자신을 휘젓는 불길이 질투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살롬. 괜히 트집 잡지 마세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아이시아가 경고했다. 그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고 시선을 돌렸다.

“트집이라니. 불쾌하군.”

“빈센트 님처럼 충성스러운 분이 살롬의 명령을 어기고 지도를 만들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못 믿지만, 빈센트는 믿는다는 말인가?”

“빈센트 님은 누구와 달리 변덕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요.”

아이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빈센트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녀의 신임을 받게 되어 기쁜 기색이었다.

‘시아가 나 아닌 남자를 선택하다니…! 나보다 빈센트를 더 믿는다니.’

살로메디안은 제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온몸의 피가 밖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무릎에 힘이 풀리고 뒷골이 당겼다.

그의 가슴에 폭풍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 것도 모르고, 아이시아는 에메랄드 린삼을 찾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아무래도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

* * *

“제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였어요……!”

갈대가 우거진 늪을 중심으로 에메랄드 열매를 매단 린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난날에 봤었던 에메랄드 린삼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빈센트가 안내한 마신의 숲 동쪽에는 한 뿌리에 10골드나 하는 귀한 약초가 토끼풀처럼 깔려있었다.

“이게 정말 귀한 약초란 말입니까?”

휴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퉁방울눈을 굴렸다.

“마신의 숲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인데요.”

“한 뿌리에 10골드예요. 아주 작은 것으로만 계산해도요.”

“네엣?”

“열매가 굵고 클수록 오래 묵은 린삼이 뜻이에요. 이 정도면 최소 10년산 이상이에요.”

“그럼 여기는…….”

“황금 밭, 아니 다이아몬드 밭이나 다름없어요.”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지 계산하기도 쉽지 않았다.

군락지를 이뤘다는 건 에메랄드 린삼이 자라는 데 최적의 환경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계속 자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떼로 발견한 거나 다름없었다.

“다행입니다, 공작부인.”

오늘의 주인공인 빈센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두 빈센트 님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몸 둘 발 룰, 몸 들 발 롤, 몸 둘 바를 모르겠… 삽니다.”

말까지 더듬으며 빈센트가 쩔쩔맸다.

잘생긴데다 유능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빈센트를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빈센트 같은 남동생이나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

테레사와 정을 나눠본 적 없었으므로 자매나 남매를 보면 항상 부러웠다.

사소한 것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가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혈육 아닌가.

그렇지 않은 가족이 더 많다고 해도 막연한 그리움과 부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날 버렸던 아버지. 내 지위를 빼앗은 이복동생. 날 모욕했던 계모.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게는 그들이 전부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들에게 둘러싸인 나날들.

지금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강한 남편이 생겼다.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였지만, 잠시나마 살로메디안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원하던 것을 찾아서 다행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는데 온전히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것으로 저택 수리도 하고, 의료 교육원도 세울 수 있어요.”

“그렇군.”

“살롬은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다.”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로 살로메디안이 짧게 대답했다.

내가 가난하다고 놀려서 그런가?

자존심이 센 사람이니까, 나나 부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살로메디안이 왜 우울한지 궁금했다. 이유도 모르고 넘겨짚다간 오해만 거칠 수도 있으니까.

“살롬. 혹시 제가…….”

그의 진심을 물으려는데 휴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것들을 모조리 캐야겠군요!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공작부인!”

거대한 덩치를 가진 휴고가 린삼 밭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안 돼요! 잘못 건드리면 다 죽어요!”

그가 린삼을 망칠까 봐 목소리를 높였다. 린삼은 뿌리가 그물처럼 연결된 식물이었다.

예민한 식물이라서 극히 일부만 잘못 다뤄도 군락지 전체가 말라죽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음만 앞서서 그만…….”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울상을 지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휴고 님은 주변 경계에 신경 써주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공작부인.”

“빈센트 님은 약초를 다뤄본 적이 있으신가요?”

내 물음에 빈센트가 송구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메랄드 린삼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지합니다.”

“이 정도 지도를 그릴 솜씨라면 린삼 채집은 쉬울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붓 쓰는 것보다 쉬워요. 먼저 흙을 살살 털어내면서 뿌리 모양을 살펴야 해요.”

빈센트에게 린삼 캘 때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빈센트는 내 말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연결된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한 촉씩 분리하는 게 핵심이군요?”

빈센트는 예상했던 대로 관찰력이 훌륭하고 이해가 빨랐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의 등장에 내 입가에도 미소 비슷한 것이 번졌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끼어들었다.

“잠깐.”

또 빈센트에게 시비를 걸 줄 알았는데 그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몹시 불길했다.

“빈센트 같은 훌륭한 인재를 약초 채집에 쓸 수 없지. 겨우 정식 흑룡기사단원이 됐는데.”

살로메디안이 빈센트를 칭찬하는 건 처음 봤다.

미워하는 것 아니었나?

나는 의심쩍은 눈으로 살로메디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빈센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덕담을 이어갔다.

“네가 기사단에서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네 실력이라면 곧 부기사단장이 될 수 있을 거다.”

“각하!”

“네가 만든 지도도 귀중한 자료다. 마물 토벌과 약초 채집에 큰 도움이 되겠지.”

아까는 필요 없다며? 허락해준 적도 없다고 했으면서 왜 말을 바꾸지?

살로메디안의 변덕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빈센트는 그저 주군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서 기쁜 모양이었다.

“황공합니다, 각하! 흑룡의 이름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공작부인을 제 목숨처럼 호위하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빈센트가 각오를 내비쳤다.

살로메디안이 명령하면 기름통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눈빛이었다.

“시아는 내게 맡겨라. 약초 채집도 할 필요 없다.”

“네? 공작부인께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내가 도울 테니, 너는 자랑스러운 흑룡의 아들로서 마물의 목을 베어라.”

살로메디안이 잔잔하지만 열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빈센트는 ‘흑룡의 아들’이라는 표현에 감격하며 경례를 붙였다.

“존명!”

어라? 그럼 도우미가 없어지는 거야? 이 많은 린삼을 나 혼자 캐라고?

위기를 느낀 내가 빈센트를 돌아봤다.

“빈센트 님?”

“다녀오겠습니다. 공작부인!”

“잠깐……!”

빈센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는 숲 어딘가에 숨어있을 마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로메디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롬, 뭐 하신 거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

“엄청 큰 문제가 생겼거든요? 왜 빈센트를 보내신 거예요?”

“사람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빈센트에게도 약초를 뽑는 것보다는 기사단 내에서 무공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빈센트 님이 있어야 할 곳은 기사들 곁이기는 하죠.”

입맛을 다시며 약초 채집을 위한 도구를 가방에서 꺼냈다.

괭이를 쥐고 린삼 군락지 구석에 주저앉는데 살로메디안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

“왜요?”

“왜긴 왜겠나? 그대를 도우려는 거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그가 말했다.

살로메디안이 약초를 캔다고? 대륙 최강의 기사이자 피로 물든 마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살로메디안이 내 손에서 괭이를 가져갔다.

“어떻게 하는지는 다 들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을 게 뭐 있겠나.”

“세드나 공작께서 시골 아낙네처럼 쪼그리고 괭이질을 하면 명예에 흠집이 날 텐데요?”

살로메디안은 황궁처럼 화려하고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곳에서 크리스털 잔을 흔들어야 어울릴 남자였다.

사람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 아니던가.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다.”

가슴 속까지 시린 푸른 눈을 내게 고정한 채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그대 곁. 내 아내 곁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심장이 철렁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면서 얼굴이 뜨겁고 입술이 달라붙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진심으로 보였다. 다시 곱씹어도 진심으로 들렸다.

내 곁에 있고 싶어서 허드렛일을 자청한 거라고? 빈센트까지 쫓아내면서?

억지로 잘라내고 처박아 둔 희망이 다시금 움트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 아이시아. 그냥 의미 없이 하는 말일 수도 있잖아.

마물 토벌보다 약초 캐기에 흥미가 생긴 걸 수도 있고.

이성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잠깐은, 그래도 되겠지.

이 설렘을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면 되잖아.

“그럼 같이해볼까요?”

* * *

살로메디안과 나란히 쪼그려 앉아 린삼 캐는 법을 시범해 보였다.

살로메디안은 전문 약초꾼 못지않은 솜씨로 흙을 걷어내고 린삼 뿌리를 떼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뽀얀 뿌리를 드러낸 린삼 한 촉이 바구니에 담겼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완벽히 잘하셨어요. 처음 약초를 다뤄보는 사람 같지 않아요.”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데.”

“초보들은 감히 건들지도 못하는 약초가 린삼이에요. 정말 살롬은 못 하는 것이 없네요.”

순수한 감탄을 내놓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괭이를 든 살로메디안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살로메디안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튕기며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과 선 굵은 눈썹, 소년처럼 곱고 가지런한 속눈썹까지.

내 시선을 느낀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배 속에서 기묘한 열기가 올라왔다.

“듣기 좋다.”

“뭐가요?”

“그대가 해주는 칭찬. 이쪽이 뜨끈해지는 것 같아.”

살로메디안이 손으로 반쪽밖에 남지 않은 제 심장을 짚었다.

나도 다른 의미로 심장이 뜨거워졌다.

지금은 이 시간을 즐기자. 죄책감도 잠시 모른 척하자.

샌드위치를 전해주기 전까지 냉랭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피하던 우리였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을 가진 남자가 약초밭에서 손괭이 질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평화가 깨지긴 했지만.

“꽤에에엑!”

“동맥을 잘라버려! 거기, 도망치지 못하게!”

“죽여!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귀찮아진다고!”

기사들은 마물과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나와 살로메디안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피크닉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처럼.

“우리만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요?”

내 물음에 살로메디안은 딱 잘라 말했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살롬은 흑룡기사단의 주인이시잖아요. 항상 선봉에 서셨고요.”

“항상 그랬으니 몇 번은 빠져도 된다. 기사들도 양심이 있으면 우리 부부를 방해하지 않겠지.”

우리 부부란 말에 또다시 설렜다.

나와 그를 하나로 묶는 다정한 단어. 계약이지만 진짜로 보여야 하는 관계.

문득 궁금증이 머리를 채웠다.

계약 공작부인의 의무에 첫날밤도 포함되는 걸까? 스킨십이 없으면 가짜 부부라고 의심하지 않을까?

순간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살로메디안과 첫날밤을 치르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처럼!

목욕탕에서 봤었던,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더듬기도 했던 그의 근육이 기억 속에서 넘어왔다.

왜 살색 기억만 또렷한 건지, 그 감촉은 또 왜 이렇게 생생한 건지.

덕분에 입이 바짝 마르고 손놀림이 둔해졌다. 그것을 감추려고 더 열심히 린삼을 캐냈다.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목욕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온천에 관해 묻지도 않는군.”

온천보다 당신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해서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쿠아로드 왕족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잊은 건가?”

복수란 말이 내 가슴에 풍랑을 일으켰다.

복수를 잊은 건 아니었다. 나와 어머니, 어머니 가문을 몰락시킨 그들을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복수는 피바람이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의 권력과 흑룡기사단의 손을 빌려 그들을 살육하고 싶지도 않았다.

“복수는 제 방식으로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영지를 키우고, 힘을 길러야 해요.”

“단신으로 아쿠아로드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아무리 마력 다루는 법을 깨우쳐도 그건 무리죠.”

“그대의 마력이라면 아쿠아로드 왕궁을 불태우고도 남아.”

“진심인가요?”

“그대의 남편은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시아.”

그의 입술 사이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음성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의 한마디에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도, 그의 눈빛 한 번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한심했지만.

“그대가 왜 영지 부흥에 매달리는지 솔직히 의아해.”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계약 때문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변명이나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곁에 있을 동안 만이라도요.

입 밖에 낼 수 없는 진심을 가슴에 묻고 부지런히 린삼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숲 초입에서는 떨더니, 지금은 마물이 죽어 가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군.”

“살롬이 곁에 있으니까 그런 거죠.”

“…….”

“살롬이 있으면 다 괜찮다면서요?”

내 대답에 살로메디안이 괭이질을 멈췄다.

“진심으로 믿는다는 건가?”

희미한 슬픔이 그의 푸른 눈을 가로질렀다. 가끔 그에게서 보이는 그늘이었다.

왜 그런 눈을 하는 거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 바라보는 이유가 뭐야?

그의 슬픔이 내게도 전해진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일부러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아내인 제가 살롬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대는 정말 훌륭한 아내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난 최악의 남편감이지.”

살로메디안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래요? 살롬이 최악의 남편이라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성을 냈다.

놀란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날 올려다보았다.

“또 바비예요? 아니면 키산드라 님?”

“그게…….”

“바비는 다 좋은데 말버릇이 너무 안 좋아요! 특히 살롬한테 나쁜 말을 너무 많이 하고요. 장점이 얼마나 많은데 최악의 남편? 하!”

기가 차서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나는 쉴 새 없이 분통을 터뜨리며 린삼 군락지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살롬처럼 아내를 위해주는 남편이 어디 있다고요? 신분이 빠져, 실력이 빠져, 미모가 빠져?”

“내가 그 정도인가?”

“당연하죠! 미리 알고 결혼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 알아요. 살롬이 얼마나 훌륭한 남편감인지! 최악이 아니라 최고의……!”

말을 잇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가 너무 많은 칭찬을 쏟아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이 감격과 기쁨이 뒤엉킨 표정을 짓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살로메디안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멧돼지보다 5배는 크고 검은 톱처럼 커다란 어금니를 가진 마물이 콧김을 뿜고 있었다.

“저게 뭐죠?”

“럼블크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렇게 큰 건 처음 봐요!”

“S급 초대형 럼블크니까. 마력을 가진 인간을 잡아먹으면 커진다.”

간단한 설명을 마친 살로메디안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마력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살로메디안이 물방울을 날리기 직전, 초대형 럼블크가 우릴 향해 돌진했다.

“꾸웨액!”

지척에서 듣는 마물의 울음소리는 살이 떨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저렇게 큰 마물이 어떻게 갑자기 튀어나왔지?

살로메디안 정도의 무인이 마물의 등장을 몰랐다는 것도 이상했다.

“금방 끝나니까 기다려.”

살로메디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가슴에 바짝 매달렸다.

“꾸웨웨애애액!”

마력 물방울을 정통으로 맞은 럼블크가 괴롭다는 듯 겅중겅중 뛰었다.

럼블크가 향하는 곳을 보고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린삼 군락지로 향하고 있어요! 럼블크가 짓밟으면 린삼은 다 죽어요!”

살로메디안이 침착한 얼굴로 수십, 수백 개의 물방울을 만들었다.

물이 화살로 변하고 있어!

길쭉하게 늘어난 물줄기 끝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만들어졌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에게서 걷잡을 수 없이 광포한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나와 정반대의 마력이었지만 오히려 한 쌍처럼 익숙한 탓이었다.

마신의 심장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은은한 떨림을 잠재웠다.

“감히 시아의 말을 멈추게 하다니…….”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최악의 남편에서 최고의 남편이 되는 순간이었는데.”

럼블크의 울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묻혔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그것으로 럼블크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물 화살이 럼블크를 향해 쇄도했다.

물 화살은 초대형 마물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꾸우우엑!”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럼블크가 쓰러졌다.

린삼 군락지로부터 불과 한 뼘 떨어진 거리였다.

“다행이다…….”

멀리서 울음을 듣는 것과 눈앞에서 달려오는 마물을 직접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살로메디안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 거였다.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물이 가득한 숲에서 사흘을 헤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약초를 캐며 피크닉을 즐겼다는 것도.

“윽.”

럼블크 사체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악취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날 붙든 살로메디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시아. 놀랐나?”

어마어마한 마력을 쏟아내고도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얼마나 강하면 이럴 수 있지? 정말 마신의 환생인가?

덜덜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 일에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간 한정이라고 해도 난 마신의 아내니까.

“무척 놀란 것 같은데.”

“하나도 안 놀랐는데요?”

“그럼 하던 말 계속해줘.”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데?

살로메디안이 뭘 계속해달라는 건지 몰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눈썹 사이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바바라의 흉악한 말버릇과 또…….”

“?”

“내가 얼마나… 흠, 흠.”

그가 푸른 눈을 좌우로 굴리며 헛기침을 했다.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하의 살로메디안이 수줍어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예요, 살롬?”

내 물음에 그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반듯하고 긴 목선과 목울대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게…….”

결심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때마침 휴고와 빈센트를 포함한 기사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 * *

“공작부인! 무탈하십니까? 세상에, 얼마나 놀라셨을까!”

휴고가 호들갑을 떨었다. 빈센트의 단정한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공작부인, 괜찮으신지요?”

“예. 다들 무사하시죠?”

“물론입니다! 흑룡기사단에서 마물 토벌은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죠!”

휴고가 목청을 높이며 끼어들었다.

“휴고 님 말씀을 들으니 참 든든합니다.”

“크하하! 공작부인이 계셔서 그런지 도끼날이 더 잘 들더라고요! 평소보다 많이 해치웠습니다!”

휴고가 집채만 한 도끼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초대형 도끼에도, 갑옷에도 마물의 피가 튀어 있었지만, 표정은 누구보다 밝았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지친 듯 보였으나, 산더미처럼 쌓인 마물의 시체가 자랑스러운 듯했다.

흑룡기사단이 대륙 최강이라더니 명불허전이었다.

이런 기사단이 아쿠아로드를 습격하면 어떨까?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몰살될 거야. 마도구를 꺼내기도 전에.

흑룡기사단을 다스리는 공작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살로메디안이 휴고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내 안부는 묻지 않나?”

“각하께 뭐 하러요? 보나 마나 멀쩡하실 텐데.”

“아니. 하나도 멀쩡하지 않다.”

“뭐라굽쇼?”

“내 기사들에게 실망했으니까. 럼블크 따위가 나와 시아를 방해하는 걸 왜 막지 못했지?”

살로메디안의 불만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의 시간을 방해한 것.’ 그도 나처럼 약초 캐기를 데이트처럼 느끼고 있었던 걸까.

“송구합니다. 각하. 럼블크가 떼를 지어 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휴고가 웅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살로메디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럼블크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마물이지. 초대형 럼블크가 있었다면 소형 럼블크들은 도망쳤을 테고.”

“마물 토벌 20년 만에 이런 이상한 경우는 처음 봅니다.”

마물의 잦은 출몰. 그리고 기이한 움직임.

이 숲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왠지 모를 불길함이 목 끝까지 치받았다.

생각에 잠긴 살로메디안의 낯빛도 어두웠다.

“…슬슬 시작인 건가.”

그의 혼잣말이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살롬. 무슨 뜻이에요?”

“…….”

내 물음에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짚이는 것이 있지만, 말을 아끼는 기색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휴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큰일입니다.”

“마신의 숲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 같나요?”

“그게 아니라, 점심 말입니다.”

“점심이요?”

휴고가 괴롭다는 듯 두툼한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당번 놈이 점심 식량을 저택에 두고 왔답니다! 우린 모조리 굶게 생겼습니다. 으아악!”

그게 이 정도로 괴로운 일이야?

과장인 줄 알았는데 다른 기사들도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노동 강도도 센데 밥까지 굶어야 한다니. 정말 너무 합니다.”

“토벌이 끝나면 고기로 배를 채우는 게 흑룡의 전통 아닙니까?”

“당번 놈을 거꾸로 매달아 먹어야 합니다! 그놈이라도 잡아먹든지요!”

분노한 기사들이 칼을 쳐들었다. 당번으로 보이는 어린 기사가 고개를 땅에 처박고 울먹였다.

점심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다. 수많은 마물과 혈투를 벌였으니 기사들의 허기는 극에 달했을 거였다.

약초를 캐려면 최소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이걸 어쩐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끼니를 때울 만한 열매나 풀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기사들이 채식에 만족할 것 같지 않았다.

“고기! 내 몸이 고기를 원하고 있어!”

“매끼 고기를 먹여준다고 해서 용병단을 관두고 흑룡에 들어 온 건데!”

“어디 먹을 거 없나? 이를테면 고기, 아니면 고기, 혹시 고기 같은 거!”

충혈된 눈으로 기사들이 고기를 부르짖었다.

린삼을 채집하려면 일단 기사들을 배불리 먹여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고기 드릴게요.”

“고기가 어디 있습니까, 공작부인?”

“아주 많아요. 배 터지도록 드실 수 있을 만큼이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살로메디안이 부드러운 어조로 날 타일렀다.

“시아. 이놈들에게 고기로 장난치면 위험하다. 굶주린 기사는 마물보다 포악해.”

“장난 아니에요. 저기 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잖아요?”

내 손가락이 가리킨 건 죽은 럼블크 시체였다.

기사들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들처럼 화들짝 놀라며 날 바라봤다.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눈빛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