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50)

10

* * *

그로부터 일주일. 살로메디안은 여전히 날 피하고 있었다.

상의할 게 있다고 해도,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해도 듣는 척을 하지 않았다.

계약 운운해도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며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더는 팔아 치울 유물도 없었다. 저택 보수 공사는 하염없이 미뤄졌다.

돈과 인력, 모두를 해결할 방법을 두고도 쩔쩔매야 하는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살롬과 끝장을 보겠어요.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도 있고요.”

보자기에 싼 ‘비장의 무기’를 들고 자리를 박찼다. 바바라가 손뼉 치며 응원했다.

“좋아요! 그 각오라면 각하를 자빠뜨릴 수 있을 거예요!”

“…그것도 응원인가요?”

“물론이죠! 구세주님!”

바바라의 말투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각오를 되새기며 집무실을 나섰다.

이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한 번 더 비장의 무기를 점검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살로메디안 님은 연무장에 계실 거예요!”

등 뒤로 바바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세 좋게 나서기는 했지만, 자꾸 무릎이 삐걱거렸다.

황폐해진 정원과 반쯤 부서진 분수대를 지날 때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가면 결례 아닐까?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냥 내가 보기 싫은 걸 수도 있잖아?

모퉁이만 돌면 연무장인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력을 다룰 줄 알면 혼자서 마신의 숲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힘이 있으면 뭐 해? 쓰지도 못하고!

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살로메디안을 향한 원망이 더해지면서 체온이 급격히 높아졌다.

불길한 예감이 뒷덜미를 어루만졌다.

설마 또……?!

마력 제어법을 익히고 있지만, 내가 가진 마력은 걸음마를 익히는 초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으왓!”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양손에서 푸른 불길이 솟았다.

비장의 무기를 떨어뜨린 채 손을 털었다. 불길은 잦아들기는커녕 활활 타올랐다.

뒤늦은 심호흡은 소용없었다. 이미 푸른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은 뒤였다.

살로메디안도 없고, 목욕탕도 없는데 어떡해야 하지?

* * *

“거기 누구냐!”

낮은 음성과 함께 20대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살로메디안을 수행하던 견습 기사 빈센트였다.

집사 가문인 윗스 백작가의 후계자면서 기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문제아이기도 했다.

슈퍼 동안인 바바라와 달리 큰 키와 서늘한 분위기를 가졌지만, 둥그런 눈매며 높은 콧대가 누나와 똑 닮아 있었다.

“공작부인?”

빈센트가 날 알아보고 멈칫했다.

얼른 도와줘요! 숯불구이가 되기 전에!

펄쩍 뛰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나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력 불꽃을 잡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마치 영혼 없는 마리오네트처럼.

가깝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천천히 호흡하시면서 분출되는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십시오.”

불타오르는 공작부인과의 만남에도 빈센트는 차분했다.

“심장에서 움트는 마력의 움직임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심장을 상자라 생각하시고, 마력을 그 안에 가두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빈센트의 설명에 따라 마력을 운용했다.

머릿속으로 상자를 그린 뒤 그 안에 마력을 꾸깃꾸깃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조금씩 마력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침묵을 깨고 빈센트가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공작부인.”

거짓말처럼 불꽃이 사라졌다.

언제 불타고 있었냐는 듯 매끈한 두 손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됐잖아?”

불길을 잡았다는 안도감에 빈센트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

“바바라 누님께 듣기는 했지만 정말 놀라운 힘이십니다.”

빈센트가 감탄을 듬뿍 담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진심 어린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았다.

흐물흐물 풀어질 것 같은 입매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빈센트 님. 저도 바바라 님에게 말씀 많이 듣습니다.”

물론 좋은 말은 아니었다.

「미친놈이 기사 하겠다고 지랄이에요! 그놈 때문에 어머니는 몸져누우셨고, 아버지는 의절하겠다고 방방 뛰시고. 집안이 콩가루가 됐다니까요?」

바바라의 절규를 떠올리면서도 내 얼굴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작부인을 몰라뵀습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빈센트가 머리를 조아렸다. 누나와는 반대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 같았다.

“저야말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빈센트 님은 문관으로 부임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가끔은 바바라 님을 도와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바바라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혼자서 공작령을 살피고 저택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살로메디안이 주군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오나 저는 집사가 아니라 기사입니다.”

빈센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펜이 아닌 검으로 살로메디안 님을 모실 것입니다. 공작부인의 명을 따르지 못해 송구합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택한 무인의 길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황족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탄탄한 미래를 걷어차고, 일개 기사가 되길 선택한 남자.

바바라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 용기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제가 보기에도 당신은 집사보다 기사가 잘 어울립니다.”

내 말에 빈센트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절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이미 기사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도 절 기사로 봐주지 않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수려한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자신을 부정당하고, 노력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빈센트 님께 도움 된다면 얼마든지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부디 훌륭한 기사가 되어 각하를 지탱해 주십시오.”

내 말에 깜짝 놀란 빈센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부인. 진심이십니까?!”

반응이 왜 이러지? 내가 무슨 실수 했나?

“무, 물론입니다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빈센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손등에 키스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이어진 빈센트의 말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기사가 여인의 손등에 키스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평생 지키겠다는 맹세이자, 그녀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는 다짐이었다.

제국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쿠아로드에서는 그랬다.

여기서는 가벼운 인사인가? 거절하면 무안해지는 거 아냐? 제국 예법도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림 같은 무표정과 달리 내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이랬다.

“그저 인사라면요.”

복잡한 심경을 완벽히 감추고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빈센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내리려는 그 순간, 하늘에서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맑고 푸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른하늘에 장대비라니?

처음 보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가 아니었다.

연무장 쪽에서 살기를 갑옷처럼 두른 살로메디안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그가 뿜어내는 물 속성 마력이었다.

이게 다 마력이라고? 얼마나 강하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거야?!

수시로 불꽃을 내뿜는 나나, 비를 뿌리는 살로메디안을 보면 마력 실체화가 어렵다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나와 빈센트와 번갈아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달콤한 말과 달리 사신보다 살벌한 표정이었다. 누구 한 명은 죽여야 풀릴 것 같은.

살로메디안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남편의 미모 덕분에 숨 쉬는 법마저 잊어버렸다.

인간 맞아? 요정이나 천사, 남신, 그런 게 아니고?

나는 목적도 잊은 채 살로메디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혼자만 보송보송하네. 본인은 안 젖는구나. 하긴, 나도 불꽃 때문에 화상 입지는 않으니까.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살로메디안이 빈센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유도, 비를 뿌릴 만큼 분노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으니까.

“대답해, 시아. 그대의 대답에 따라 한 생명이 죽을 수도 있거든.”

코앞까지 다가온 살로메디안이 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기 때문에 나와 빈센트가 쫄딱 젖었다는 건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거죠?”

“내 저택에서. 왜. 빈센트가. 내 아내에게. 키스를 시도했는지.”

한 자, 한 자 힘주어 발음할 때마다 살로메디안을 둘러싼 물방울이 굵어졌다.

푸른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불꽃이 내 살갗을 뚫을 듯했다.

달아오르는 뺨을 꾹꾹 누르며 내가 말을 고쳤다.

“그냥 키스가 아니라, 손등 키스겠지요.”

살로메디안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그건 키스 아닌가?”

“당연히 아닙니다. 살롬이야말로 사람 목숨으로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기가 찬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내 아내는 아직 모르는 것이 참 많군.”

“네?”

“난 농담 따위 하지 않는다. 바로 증명해 볼까?”

날 바라보며 그가 눈매를 사르르 접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흐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빈센트. 네가 고하라. 키스 미수 사건은 왜 벌어진 거냐?”

살로메디안의 살벌한 시선이 빈센트를 향했다.

그는 이 일을 무려 ‘키스 미수 사건’이라 명명했다.

주군 앞에 부복한 빈센트가 대답했다.

“불기둥이 치솟아서 드래곤이 출몰한 줄 알고 달려왔습니다.”

으응? 날 드래곤으로 착각했다고?

친절하고 정중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너무하잖아?

살로메디안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나? 입으로 불 뿜는 광경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드래곤 취급이잖아?

살로메디안도 내 손이 불타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뒤늦게 나타나서 이 난리라 이거지?

화를 참고 있을 때 빈센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공작부인께서 마력 운용법을 물으셔서 알려드렸습니다.”

“그런 건 나한테 배워야지. 내가 훨씬 잘하는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내가 묻는데도 살로메디안은 빈센트만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왜 손등 키스 따위를 시도한 것이냐? 본론만 말하도록.”

“공작부인께서 절 기사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단정한 얼굴에 기쁨이 비쳤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시아, 사실인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아… 빈센트가 정식 기사가 되지 못한 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지.”

살로메디안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황실 집사인 윗스 백작가, 황족인 세드나 공작가, 친황파 대표 주자인 두 가문이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고.”

“…….”

“그 때문에 천하의 내가 기사 서임을 미룬 거다. 이해가 가는가?”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떨면서 살로메디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 설마 제가 인정했다는 것이…….”

“공작부인이 인정했으니 싫어도 기사로 만들 수밖에.”

“그냥 말 한마디 했을 뿐인걸요?”

“황족의 말 한마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나 때문에 제국의 거대 권력이 충돌하게 된다니……!

빈센트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갑자기 손등 키스를 하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나는 바바라의 지긋지긋한 잔소리에 시달리겠지. 그 후엔 윗스 백작이 쳐들어올 테고.”

지금 잔소리가 문제입니까?

불같은 외침을 밀어 넣으며 빈센트를 돌아봤다.

미안한 기색으로 날 바라보던 빈센트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제 평생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공작부인께 받은 은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인사하지 말아요. 나 지금 엄청 울고 싶으니까.

“그 인정… 무를 수는 없는 건가요?”

“죽으라 명하시면 죽겠습니다. 공작부인.”

절대 못 무른다는 말이구나.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는 윗스 백작가의 후계자를 빼앗는 동시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세드나 공작령을 위험에 빠뜨린 거였다.

살로메디안이 빈센트를 향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머리를 잘 썼구나, 빈센트.”

“공작부인께서 자애로우셨을 뿐입니다. 저 때문에 두 분께서 번거로워지실까 봐 염려스럽습니다.”

“쓸 만한 기사를 얻었으니 나는 상관없다. 뒷일은 시아가 해결할 테고.”

나보고 해결하라고? 윗스 백작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지만, 빈센트 앞이라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세드나 공작께서 직접 나서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살롬?”

“그대의 유능함을 널리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도 바바라도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처리하고 있지 않은가? 마신의 숲에 들어간다고 하질 않나, 빈센트를 기사로 인정하질 않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살로메디안은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그대라면 윗스 백작가와의 분쟁도 잘 해결할 거야.”

“하지만…….”

“자애로운 그대라면 내 깊은 뜻을 이해해주겠지,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싼 똥은 직접 치우란 깊은 뜻 같았다.

아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떨어뜨리신 물건입니다, 공작부인.”

좌절하고 있는 내게 빈센트가 말을 걸었다. 그가 젖은 보자기에 쌓인 비장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망가졌으면 어떡하지?

허겁지겁 보자기를 풀고,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았다.

도시락 안의 달걀 샌드위치는 처참하게 뭉크러진 상태였다.

“아아…….”

탄식을 토하며 샌드위치를 바라봤다.

바닥에 나뒹군 데다가 비까지 맞았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살롬이 즐기는 간식이라고 해서 점심밥도 거르면서 만든 건데. 내 손으로 만든 첫 요리이기도 하고…….

달걀 샌드위치로 살로메디안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처음 만든 요리를 건네주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쉬울지도 모르나 내게는 달걀을 삶는 것부터가 엄청난 도전이었다.

달걀 샌드위치 1인분을 만드느라 4시간 넘게 끙끙거리지 않았나.

못 먹게 된 샌드위치를 보고 빈센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이런… 제가 버려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살로메디안이 도시락을 낚아챘다.

“빈센트. 훈련을 너무 오래 쉬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공작부인만 모셔다드리고 연무장으로 복귀하겠습니다.”

“내 아내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 넌 훈련이나 해.”

살로메디안이 차갑게 읊조렸다. 빈센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첫 감촉은 서늘했고, 이어지는 체온은 뜨거웠다.

빈센트를 뒤로하고 살로메디안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내 손목을 쥔 상태였다.

“가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딜요?”

“밥 먹으러.”

* * *

황폐한 정원 한구석. 가제보 비슷한 무언가에 자리를 잡았다.

반쯤 썩은 의자와 곰팡이 슨 테이블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아이시아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다시 만들어드린다니까요.”

“그냥 먹겠다니까.”

“그걸 어떻게 먹어요? 배탈 나면 어쩌려고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아이시아가 애원했다.

달걀 샌드위치를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살로메디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배탈이 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데 배탈이 날 리가.

“진짜 버려야 해요.”

하지만 아이시아는 단호했다.

이럴 때 보면 참 고집 있는 여자란 말이야.

그래서 더 귀엽지만.

“정말 이럴 거예요? 버리게 해줘요! 네?”

힘으로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아이시아가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아기 고양이 같달까?

아기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아이시아를 닮았을 듯했다.

새초롬한 눈매도 그렇고, 앙칼진 척해도 어쩔 수 없이 귀여운 것도 그렇고.

살로메디안이 웃음을 감추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대가 처음 만들어준 음식을 어떻게 버리지?”

“망가졌으면 버려야죠!”

“안 망가졌어.”

“흐물흐물하다 못해 질퍽해졌는데, 멀쩡해 보여요? 살롬은 눈이 삐셨어요?”

눈은 진작에 삐었지. 온 세상에서 그대밖에 안 보이니까.

별도 그대로 보이고, 꽃도 그대로 보여. 새벽녘도 그대고, 노을도 그대야. 눈이 삔 건지 머리가 돈 건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온통 그대뿐이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살로메디안이 시치미를 뗐다.

“난 원래 빵을 물에 적셔 먹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싱거운 게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나?”

“농담도 하지 마시고요!”

높아진 아이시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장미꽃처럼 붉은 눈동자도,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뺨도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심장을 통해서 전해지는 감정도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떨림, 아쉬움, 황당함, 그리고 기쁨.

버리라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아이시아는 조금 기뻐하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형편없이 망가진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해서.

‘오늘따라 시아의 감정이 잘 느껴지는군. 읽으려고 애써도 읽히지 않더니.’

덕분에 오랜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계약의 무게도, 제 몸이 아니라 심장을 걱정하는 거냐는 예리한 물음도 잊을 수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살롬!”

놀란 건 아이시아만이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잘게 떨렸다.

왜 샌드위치에서 이런 맛이 나는 거야? 바닥에 떨어져서? 아님 물에 젖어서?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흙 맛이나 물비린내는 아이시아가 만든 ‘무언가’의 맛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했다.

깜짝 놀라 다시 샌드위치를 바라봤다.

모양은 분명 샌드위치인데 쓴맛과 신맛의 조화가 충격적이었다.

와그작.

어금니에서 달걀 껍데기가 씹혔다. 쓴맛 뒤로 이어진 지독한 짠맛이 혀를 마비시켰다.

음식이 아니라 생화학 무기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살로메디안의 표정을 읽었는지 아이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맛없죠……?”

그는 대답을 삼가고 ‘샌드위치일 리 없는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었다.

‘내게는 혀가 없다. 나는 미각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살로메디안은 최면을 걸면서 나머지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오랜만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먹을 만해요?”

걱정으로 어두워졌던 아이시아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맛있어.”

“정말요?”

“그래. 내 입맛에 딱 맞아.”

거짓이면 어떠랴. 사랑하는 아내가 이토록 환하게 웃어주는 것을.

“처음 만들어본 건데 다행이에요.”

아이시아는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줍어하며 다음을 약속하기도 했다.

“또 만들어드릴게요.”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배탈도 나지 않고 죽지도 않으니까.

살로메디안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하지.”

도시락을 싸서 연무장으로 찾아오는 아내라니.

둔기로 머리를 맞아도 이렇게 얼떨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마터면 절 진짜 사랑한다고 착각할 뻔했다.

일종의 뇌물, 그것도 치명적으로 맛없는 샌드위치였지만 기뻤다.

아이시아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시간 맞추느라 간도 못 봤는데. 맛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텅 빈 도시락을 보면서 아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중간에 맛을 봤다면 이 샌드위치는 그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테니까.

살로메디안은 한 번 더 하얀 거짓말을 했다.

“요리에 소질이 있는 거겠지.”

기다렸다는 듯 아이시아가 손뼉을 쳤다.

“그럼 바바라와 기사님들께도 만들어 드려야겠네요!”

“…뭐라고?”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죠.”

아이시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환하게 피었다.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는 것과 별개로 걱정이 앞섰다.

소질 있다는 말에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수하들이 위험해졌다. 그 샌드위치를 먹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시아가 속상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살로메디안이 짐짓 엄하게 답했다.

“안 된다.”

“맛있다면서요?”

“그대가 만든 음식은 오직 나만 먹을 수 있다.”

“네에?”

“황족이 손수 만든 음식을 함부로 먹여서는 안 된다. 그대는 제국 황족이자, 세드나 공작부인으로서 자각이 부족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대충 둘러댄 말이 아이시아의 죄책감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제 부주의 때문에 윗스 백작가와 문제가 생겼죠…….”

“그런 뜻은 아니었다.”

“살롬 말이 맞아요. 저는 많이 부족해요. 공작부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죠!”

“시아?”

“제국 역사 공부도 더하고, 영지 관리도 더 애쓸게요. 마신의 숲에도 얼른 들어가 보고 싶어요!”

아이시아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로메디안의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스스로 무덤을 판 기분이랄까?

“그대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탈이다. 영지 관리는 지금처럼 바바라에게 맡기고 편히 쉬어.”

아이시아의 열정을 가라앉혀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공작부인이 그러면 안 되죠.”

“보통 공작부인들은 드레스를 맞추고 파티를 준비하던데…….”

“저는 폐왕녀 출신 계약 공작부인이잖아요. 심장을 돌려드리기 전까지 최선을 다할 거예요.”

아이시아의 말에 살로메디안이 어깨가 움찔했다.

“도둑질한 덕분에 살아있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 살롬이 믿어주겠죠.”

아이시아가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 내뱉었던 날카로운 말들이 살로메디안을 다시 찔렀다.

「계약 마법을 걸겠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그대를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이시아를 곁에 두고 싶어서.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무슨 오해를 받든 감수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시아가 상처 입었다면?

가족들에게 학대당하면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 제 손으로 흉터를 남긴 거였다.

그것이 사랑일까. 사랑이 그래도 되는 것일까.

어떤 답도 내놓을 수 없어서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발치로 떨어뜨렸다.

“시아. 그렇게 계약을 지키고 싶은가?”

질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아이시아가 눈썹을 웅그렸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죽을 뻔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

“사흘 동안 괴롭지 않았나? 잊고 싶은 기억일 텐데?”

마물 때문에 위험하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시아에게 마신의 숲은 죽음과 공포로 얼룩진 괴로운 장소였다.

마도구 때문이라지만, 그녀 스스로 떠올리지 않길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 아이시아를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 따위에 휘둘린다 해도.

“살롬은 제가 그날을 기억하길 바라시잖아요?”

아이시아가 잔잔한 어조로 물었다.

“생각이 달라졌다. 괜한 기억은 잊는 게 좋겠어.”

“테레사의 습격을 무마해주시는 대가로 기억을 떠올리라고…….”

“그 말도 잊어.”

“살롬?”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변덕스러운 남자잖아.”

살로메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그를 붙든 건 아이시아의 작은 손이었다.

“아뇨. 저는 기억하고 싶어요.”

그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요염하고도 매혹적인 빛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기억해낼게요. 새로운 마도구를 개발해서라도요.”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살롬이 원하고 있잖아요. 제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아이시아의 물음이 살로메디안을 헝클어뜨렸다.

‘혹시 내 감정도 전달되는 걸까? 치졸하고 부끄러운 날 시아가 본다는 건가?’

수치스러움 탓에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아이시아의 감정을 뻔뻔하게 읽었으면서, 제 것을 읽힌다는 것에 당황하다니.

“염려 마세요. 저는 살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까요.”

살로메디안의 표정을 읽은 아이시아가 위로했다.

왠지 모를 패배감을 곱씹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

“그냥 보여요. 살롬의 눈을 보고 있으면.”

“…….”

“심장으로도 전해져요. 두근두근하는 게.”

아이시아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덕분에 살로메디안도 그녀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잃어버린 반쪽으로 하나가 된 심장이 작고 여린 몸 안에서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나 좀 봐달라는 듯이. 더 높은 곳까지 달리고 싶다는 듯이.

“저도 그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러니 마신의 숲에 가게 해주세요.”

아이시아의 말이 살로메디안을 묵직하게 때렸다.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한 방이었다.

“좋다. 함께 가도록 하지.”

어차피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를 이길 수 없었다.

질 것이 뻔한 싸움. 덕분에 그녀의 첫 요리를 먹게 되었으니 아쉬움은 없었다.

* * *

마차나 말을 타고 마신의 숲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늘까지 솟아오른 원시림과 기암괴석 탓이었다.

나는 숲에서 풍겨 나오는 습기를 삼키며 장갑 단추를 채웠다.

“키산드라의 옷을 입었군.”

못마땅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걸친 승마용 바지와 재킷, 후드, 가죽 장화까지 전부 전대 세드나 공작이었던 키산드라의 유품이었다.

소매와 바지 기장을 조금 줄이긴 했지만 키산드라와 체형이 비슷해서 다행이었다.

아쿠아로드에서 챙겨온 살림이 거의 없었는데. 하마터면 옷을 빌리러 다닐 뻔했다.

공작부인이 옷을 구걸하러 다니다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키산드라에게 감사하며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바바라가 수선하는 걸 도와줬어요.”

“직접 고쳐 입었다는 건가?”

“당연하죠. 재단사를 불러도 공작저까지 오지 않잖아요. 새 옷을 맞출 만한 여윳돈도 없고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혹시 이상한 천 쪼가리는 없었나?”

“이상한 천 쪼가리라니요?”

“짧고 얇고 부들부들한…….”

“속옷 말인가요?”

“아니다, 못 들은 거로 해.”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어색하거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속옷은 없었는데. 살롬이 전대의 속옷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고.

“키산드라 님의 옷장에 유행 안 타는 실용적인 옷이 많았어요. 옷감이나 자수는 아쿠아로드 왕궁에서 봤던 것보다 훌륭했고요.”

“드레스는?”

“파티용 드레스는 한 벌뿐이던데요? 구석에 처박아 둬서 곰팡이가 슬었지만요.”

“…….”

“키산드라 님은 파티를 즐기지 않는 소박한 분이었나 보죠?”

내 물음에도 살로메디안은 불쾌하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덕분에 궁금증은 배가되었다.

부모님 대신 살롬을 키운 분이시라던데, 키산드라 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재단사는 어떻게든 구해주겠다. 옷은 전부 새로 맞추도록.”

“고급 옷을 버리라고요? 상한 데도 없는데요?”

“내가 아내 옷 몇 벌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보이나?”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내가 악의 없이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난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난하세요.”

허를 찔린 살로메디안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영지 관리에 소홀하지 마셨어야죠.”

“그대의 솔직하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게 되어 퍽 기쁘군.”

살로메디안이 어금니를 깨문 채로 말했다. 나는 미소로 응답했다.

“모두 살롬 덕분입니다.”

“그대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나는 가난하지 않다. 키산드라가 숨긴 열쇠만 찾으면 황제보다 부유할걸?”

“키산드라 님이 무슨 열쇠를 숨겼는데요?”

“마신의 보물 창고. 역대 세드나 공작들의 재산은 전부 거기 있다.”

두통이 치민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보물 창고란 말에 내 눈이 커다래졌다.

“세드나 공작들은 전쟁터를 쏘다니느라 돈 쓸 시간도 없었을 거다. 전리품도 꽤 쌓였을 테고.”

“살롬은 보물 창고를 본 적 있으세요?”

“아주 어릴 때 한 번. 황금 천지라 눈부셔서 다신 안 갔었다.”

귀찮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손을 내저었다. 내 옷만 아니라면 보물 창고 따위는 관심 없다는 투였다.

눈부실 정도로 많은 황금은 대체 얼마나 될까?

황족이자 제국 최고의 기사였던 세드나 공작들이 모은 보물이라면?

입 안에 고인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바라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당연히 바바라는 모른다. 세드나 공작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니까.”

“그런 걸 저한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살로메디안은 오히려 의아해했다.

“내 아내인 그대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

“내 것은 모두 그대의 것인데.”

그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숨통을 조여 왔다.

기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휘몰아친 까닭이었다.

‘하지만 진짜 아내는 아니잖아요. 계약에 묶인 도둑일 뿐.’

씁쓸한 속마음을 밀어 넣었다.

이렇게나마 그의 아내로 불릴 수 있어서 다행인 걸까.

하지만 나에겐 세드나 공작의 보물 창고를 볼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새로운 공작부인이 오면 인수인계해줘야 하잖아. 잘 관리했다가 넘겨줘야지.

해일처럼 밀려온 우울 앞에서 겨우 균형을 잡았다.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나를 한심해하면서.

“새 옷이 가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공작저를 부수고라도 보물 창고를 찾아줄 테니.”

살로메디안의 말에 애써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지어보는 가짜 미소였다.

“새 옷 필요 없으니까, 얌전히 계세요.”

* * *

“시아. 그대는 휴고, 본, 빈센트의 호위를 받으며 대열 중앙에 위치한다.”

살로메디안이 손짓하자, 세 명의 기사가 다가왔다.

내 인정을 받은 빈센트는 가슴에 흑룡기사단의 상징인 용 문장을 달고 있었다.

다른 기사의 문장에 비해 유난히 빛나는 걸 보면 공들여 닦은 모양이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 역시 자부심으로 반짝거렸다.

정말 행복해 보이네요, 빈센트. 한 명이라도 행복하니 다행이에요.

쓰린 속을 쓸어내릴 때, 살로메디안이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내 아내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면 너희들은 죽는다.”

“존명!”

“내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너희들은 죽는다.”

“존명!”

말도 안 되는 명령에도 세 명의 기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아내가 목이 마르거나, 발을 접질리거나, 또…….”

살로메디안의 갑질 명령이 끝없이 이어져서 결국 내가 끼어들었다.

“살롬, 이러다 해가 지겠어요. 날이 저물면 마물이 더 날뛴다면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에서 괴이한 울음이 들려왔다.

<『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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