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50)

9

* * *

계약 마법이 걸린 뒤로 2주가 지났다.

나는 식당에서도 집무실에서도 살로메디안을 보지 못했다.

일부러 피하는 걸까?

서운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했다.

그가 날 얼마나 믿지 못하는지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무표정 뒤에 숨겨놓고 싶지만, 살로메디안을 향한 감정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오만가지 감정이 끓어 넘쳤다. 겨우 지워내도 다음날이면 다시 차올랐다.

날 가장 괴롭히는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살롬이 보고 싶어.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자, 짜르르한 통증과 함께 현기증이 밀려왔다.

2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그리움을 잊기 위해 바바라와 함께 일에 파묻혔다.

다행히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시아. 어디 불편해요?”

영주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내게 바바라가 물었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표정을 지우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살로메디안이 아닌 사람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건 여전히 능수능란했다.

바바라도 순순히 믿는 기색이었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이젠 시아 없이 공작저를 꾸려갈 수 없으니까요.”

“과분한 칭찬이에요.”

“설마요. 시아가 얼마나 유능한지 전 영민을 모아놓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예요!”

바바라가 연두색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작 2주 동안 각하께서 평생 못 했던 일을 해내셨잖아요! 하인들 기강도 잡혔고, 예산 집행도 순조로워요! 역시 영지엔 영주가 있어야죠!”

살로메디안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바바라가 감격했다.

“시아는 명석하고, 현명하고, 결단력 있고, 자애로워요. 영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요!”

내버려 두면 밤새도록 날 찬양할 것 같아서 질문을 던졌다.

“바비. 저택 개보수 건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예산이 조금씩 모이고 있어요. 시아 충고대로 골동품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무서울 정도로 비싼 값에 팔리더라고요.”

“정말 다행이네요.”

“《살인자 저택의 핏빛 유물》이란 광고가 도움 될 줄 몰랐어요. 처음 들었을 땐 기겁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 바바라가 쿡쿡 웃었다.

“몰래 팔 수 없다면 최대한 흥미를 자극하는 편이 좋죠.”

“기발한 방법은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제왕학? 경제학?”

한 수 가르쳐달라는 듯 바바라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경험이죠. 남편 잡아먹는 마녀를 갖고 싶어 하던 남자들이 많았거든요.”

순간 바바라의 귀여운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시아 가족을 욕하고 싶지 않지만, 아쿠아로드 왕족들은 역겨워요. 시아처럼 착한 분을 감히!”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으니 맘대로 말해도 돼요.”

내가 허락하자마자 바바라가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아쿠아로드 왕족들은 사지를 찢어 짐승 먹이로 줘도 분이 안 풀릴 쓰레기들이에요. 눈알을 뽑아 공놀이를 하고, 내장으로 줄넘기를 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아요.”

“…네?”

“모가지를 밟아서 분질러 버리고 싶다고요. 아, 우리 저택에 세상 쓸모없는데 싸움 하난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인간이 있는데! 죽이고 오라고 할까요?”

명령만 내려달라는 듯 바바라가 물었다.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바바라의 손에 돌돌 말린 종이를 쥐여주며 말했다.

“바비. 이게 뭐게요?”

“오늘 안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에요.”

“큭.”

바바라가 두루마리를 훑어보며 덜덜 떨었다.

“우물 정화, 마물 시체 처리, 구호 약품 지급… 망할. 해도 해도 끝이 없네요!”

“이제 알았죠? 우린 너무 바빠서 누굴 죽이러 갈 시간 없어요.”

“아쉽지만 시아의 복수는 잠시 미뤄야겠네요.”

살로메디안을 써먹을 수 없어서 아쉽다는 듯 바바라가 입맛을 다셨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바비.”

“마음 바뀌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제 손으로 그 인간들 모가지를 뽑아버릴 테니까요!”

바바라는 아쿠아로드 왕족들을 벌레 취급하고 있었다.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테레사는 물론 계모와 부왕까지 몰살시킬 기세였다.

무서워서 말대꾸도 못 했었는데. 내 처지가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하지만 복수는 아직 일렀다.

“마도사 문제를 해결할 할 때까지 아쿠아로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요.”

내 말에 바바라가 안타까움을 토했다.

“눈앞에 황금 송아지가 있는데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니! 미치고 팔딱 뛰겠어요!”

나와 살로메디안은 테레사의 죄를 용서해 주는 대가로 마도구 제작 기법의 7할을 요구했다.

하지만 설계도를 가졌다 해도 기술자가 없으면 소용없었다.

아쿠아로드 특제 마도구는 왕실 마도사 교육원을 졸업한 마도사만이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도에도 아쿠아로드 출신 마도사는 없대요.”

낙담한 바바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쿠아로드 마도사들은 왕실 허가 없이 왕도를 떠날 수 없어요. 아파도 퇴직할 수 없고, 결혼도 허가받은 상대와 해야 해요.”

“완전 노예 취급인데요?!”

“대신 귀족 대우를 해주고 돈도 듬뿍 주죠.”

게다가 마도사 교육원은 교육비가 전액 무료였다.

평생 왕실에 복종해야 함에도 마도사가 되길 희망하는 소년, 소녀들이 많았다.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아쿠아로드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제작 기법을 가져오시고… 역시 시아는 세드나 공작령의 영웅이에요!”

바바라가 연두색 눈을 반짝였다.

나는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도사가 없으면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아! 우린 돈방석에 앉을 테니까요!”

큰소리를 땅땅 치며 바바라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너무 고맙지만, 속이 발칵 뒤집히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시아. 왜 그래요?”

“…….”

“어디 아파요?”

타인과 접촉하면 구역질한다는 걸 믿어줄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살로메디안한테만 괜찮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고?

겨우 얻은 친구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는데 바바라가 불쑥 물었다.

“시아. 혹시 임신하신 거예요?”

무표정을 무너뜨린 내가 쇳소리를 질렀다.

“바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임신이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신방에 들어가고, 같이 목욕하고, 살로메디안의 가슴팍을 주무르긴 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없었는데!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날 보다가 바바라가 손가락을 꼽았다.

“임신이라도 아직 입덧할 시기는 아니겠네요.”

“아니에요, 그런 거!”

시시각각 변하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바바라가 은근히 물었다.

“그래도 첫날밤은 치르셨을 거 아니에요?”

“그, 그게…….”

“설마 아직?”

머뭇거리는 날 바바라가 채근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네.”

바바라는 연두색 머리칼을 헤집으며 분노를 터뜨렸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신부를 안아주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 인간, 고자 아냐?”

“바비?”

“아,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했네요.”

사과하면서도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을 향한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다.

“사내구실도 못 하는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감히 우리 시아를 독수공방하게 해?!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도 유분수지!”

남들이 들을까, 바바라를 타일렀다.

“살로메디안은 바비의 주군이에요. 바비가 황족 모독죄로 잡혀갈까 봐 무서워요.”

“그래도 짜증 나잖아요? 얼굴만 뻔드르르하게 잘생기면 뭐 해요? 그 힘 뒀다 밤에는 쓰지도 않고, 신부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데!”

“다 제 잘못이에요. 살로메디안은 실수한 거 없어요.”

“아아, 우리 시아는 마음씨도 고우셔……!”

“진짜예요. 바비.”

“고자놈한테 주기엔 너무 아까운 분인데. 망할 고자놈은 제 분수도 모르고…….”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바바라는 살로메디안을 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순간마다 날 두고 사라지던 그가 떠올랐다.

성적 욕망이 없는 걸까. 내가 매력적이지 않은 걸까. 아니면 속성이 달라서 피한 걸까?

우리가 맺은 계약에 부부 관계가 포함되는지 안 되는지도 불확실했다.

분명한 건 내가 그의 아랫도리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거였다.

“고자면 안 되는데… 진짜 고자는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익숙한 중저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누가 고자라고?”

* * *

살로메디안의 등장에 방 안의 공기가 증발해버린 듯했다.

도자기로 빚은 듯 새하얀 피부와 달빛과 별빛을 섞은 백금발.

한겨울의 호수보다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살로메디안이 날 응시했다.

내 혼잣말을 들은 건가? 부끄러움과 함께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머! 아름다운 신부를 보름 동안 방치했던 파렴치한 아니세요?”

바바라가 호들갑을 떨며 비꼬았다. 살로메디안의 단정한 눈썹이 구겨졌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바바라가 아니었다.

“각하의 유일한 장점이 튼튼하다는 거였는데… 그것도 예전만 못하나 봐요?”

“왜? 뭐? 왜?”

“멀쩡한 남자가 힘을 못 쓰니까요. 어떻게, 사슴뿔이라도 좀 꺾어다 드려요? 뱀이라도 푹 고아드려?”

바바라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살로메디안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 훑었다.

그것만으로도 숨 쉬는 것이 곤란해졌다.

꾹꾹 눌러왔던 그리움을 들킬까 봐 입을 함부로 뗄 수 없었다.

“시아. 왜 이렇게 말랐지?”

질책이 담긴 눈빛에 절로 긴장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게 2주 만에 만난 신부한테 할 소리예요? 말 좀 부드럽게 하세요!”

“너야말로 그게 주군한테 할 말이냐? 손찌검도 막 하고?”

“제가 각하한테 함부로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거슬리시면 자르시든지요!”

“…….”

“아니, 제발 잘라줘요! 나도 보너스도 받으면서 일하고 싶으니까! 폐하는 언제든지 황궁으로 오라고 했어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바바라가 바락바락 대들었다.

괜히 말꼬리 잡았다가 잔소리를 열 배로 듣게 된 살로메디안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시아. 그대는 어떻게 시끄러운 악마랑 같이 일할 수 있지?”

“바비는 유능한 집사예요. 제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고요.”

“바비? 친구?”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되물었다.

바바라가 감격스럽다는 듯 날 향해 방긋 웃었다.

“시아는 저의 자랑스러운 친구죠! 부디 고자 남편을 버리지 말아줘요. 제가 정력에 좋은 음식을 구해볼게요.”

바바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로메디안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각하, 왜 도끼눈을 뜨고 그러세요?”

“방금 시아라고 했나?”

“그게 뭐요?”

“…….”

“설마… 나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인데 친구를 사칭하는 시끄러운 악마가 불러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바바라의 질문에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피했다. 붉은 입술이 그의 치아 사이에 물려 있었다.

정말 애칭 때문에 화가 난 걸까? 그에게 애칭이란 부부인 척하기 위한 수단일 뿐일 텐데…….

“시아. 저런 거랑 친해지지 마. 물든다.”

바바라를 해고할 수도 없고, 말로 이길 수도 없는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시 움찔하긴 했다. 이것이 도둑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바비에게 배워야 할 게 많아요. 더 친해지고 싶고요.”

“부디 참아줘. 공작령에 악마는 한 마리로 충분해.”

질렸다는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바바라를 흘낏 바라보았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어린 집사에게 쩔쩔맨다는 사실이 왠지 재미있었다.

“오늘 기마 훈련이 있다고 들었는데. 끝난 건가요?”

“대충은.”

“몸조심하세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2주 만에 만난 것 치고는 제법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얼굴도 똑바로 볼 수 없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바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각하는 연무장에 틀어박혀 계시대요. 흑룡기사단의 곡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요?」

「어제는 밤새 검을 닦으셨대요. 마신의 한숨이라 불리는 명검인데 아주 애인이 따로 없다니까요? 시아의 연적은 여자가 아니라 검이에요!」

바바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살로메디안의 일과를 알려줬다. 중간중간 내가 모르는 정보를 섞어서.

바바라의 재잘거림을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송아지 구이와 산딸기 파이를 좋아한다면서 왜 살이 찌지 않는 거지?”

살로메디안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가슴 속에 몽글몽글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2주 전보다 말랐어.”

“…….”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는가?”

아쿠아로드와 크로티무스 제국의 요리는 식재료와 향신료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오랫동안 곰팡이 핀 감자나 마른 빵 따위로 연명하던 내겐 뭐든 최고의 요리였다.

“다 맛있어요.”

“그런데 왜 마른 거지? 한 그릇 다 비우는 것 맞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바라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각하께서 직접 감시하면 되잖아요?”

“감시?”

“함께 식사하시라고요!”

살로메디안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잠깐 들른 것으로 알았는데 밥까지 같이 먹으라고? 어색해서 음식이 코로 들어가도 모를 것 같은데?

“시아도 괜찮죠? 마침 저녁 시간이네요!”

내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바바라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달려온 시종에게 바바라가 명령했다.

“각하와 공작부인께서 함께 식사하실 거예요. 만찬을 준비해줘요! 최고급 와인도!”

* * *

가끔 바바라는 100명의 기사도 못 하는 일을 해준다.

시끄럽고, 건방지고, 잔소리가 심하고, 욕도 많이 하지만.

‘나 대신 만찬을 제안하다니. 바바라의 잔소리를 견디는 보람이 있군.’

살로메디안이 상상한 건 아이시아와 오붓한 저녁 식사였다.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과 은은한 촛불, 맛난 음식을 곁들인 다정한 대화 같은 것들.

저녁 식사를 가장한 회의가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물을 팔아서 급한 돈은 해결했는데 인력 채용은 진척이 없네요, 바비.”

아이시아의 말에 바바라가 와인을 들이켜며 대꾸했다.

“저택보수 인부는 물론, 하녀, 마부, 서기관, 세금징수원… 여기저기 공고를 내는데 아무도 지원을 안 해요.”

“저택에 사용인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 놀라운걸요? 저라면 급료 2배를 줘도 안 올 것 같아요.”

아이시아 딴에는 위로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바바라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그래서 3배를 주고 있답니다, 공작부인.”

“3배라고요? 우린 돈이 없잖아요?”

“아까워서 돌아버릴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누가 마신의 숲에서 살인귀 주인을 모시고 싶겠어요?”

살로메디안을 노려본 뒤 바바라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바바라는 고급 와인을 벌써 두 병째 비우고 있었다.

‘영지 문제보다 시급한 것이 부부 문제라는 걸 왜 모를까? 일부러 괴롭히는 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살로메디안의 주먹에 핏줄이 불거졌다.

아이시아가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을 때, 당연히 바바라가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만찬주가 25년 숙성된 로제 와인이라는 걸 안 순간 바바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바바라를 믿은 내 잘못이다. 알콜 중독자 꼬마 같으니.’

스테이크인지 돌덩이인지 모를 것을 씹으며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흑발은 윤기가 반질반질 흘렀고, 장미꽃잎을 연상시키는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희고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 건드리면 쓰러질 듯 야윈 몸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어떻게 손가락이 저리 가느다랄 수가 있지? 부러질까 봐 잡지도 못하겠군.’

한 줌도 안 되는 허리에 비해 풍만한 가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에 띄게 말라 보이는데 그 부분만은 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시아나 바바라의 의심과 달리 살로메디안은 건강한 남자였다.

리넨 천 한 장 걸친 아내의 몸과 봉긋하게 솟았던 가슴.

그 사이의 은밀한 골짜기를 떠올리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문제는 하필 그때 아이시아와 눈이 마주쳤다는 거였다.

“살롬?”

의아함이 담긴 아이시아의 부름에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피했다.

‘2주 만의 만남에서 가슴이나 훔쳐보는 놈이라니! 차라리 고자가 낫겠다.’

아이시아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살로메디안은 자책하기 바빴다.

너무나 그리웠기에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2주 동안 그리움을 삼키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아이시아가 보고 싶어서 하마터면 밤손님처럼 그녀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 뻔했다.

절 보면 아이시아는 마신의 심장을 떠올릴 테고 다시 제 목숨을 가져가라며 매달릴지도 몰랐다.

함께 식사하자고, 함께 산책하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훔쳐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전처럼 기사단 훈련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저 숨죽인 채 아이시아의 혼잣말이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감정에 후회나 슬픔 아닌 무언가를 찾기를 바라면서.

왜일까.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던 아이시아의 감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잠자는 것도 잊고 아이시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밤새 검을 붙들고 있던 것도 기마 훈련을 일찍 끝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다리다 겨우 들은 혼잣말이 이것이었다.

‘고자면 안 되는데. 진짜 고자는 아니겠지?’

고자? 그게 무슨 소리지?

황당함 반, 반가움 반이었다. 그 핑계로 아이시아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시아의 여윈 몸을 보자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서. 지켜준다고 해놓고 오히려 괴롭히는 것 같아서.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놓아줄 수는 없었다. 잃을 수도 없었다.

지금 살로메디안이 할 수 있는 건, 제 욕심과 집착을 숨기는 것뿐이었다.

아이시아의 몸짓, 눈빛 하나하나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음식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와인도 향을 잃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아이시아뿐.

계속 바라보다간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살로메디안은 그리움보다 뜨겁고, 아찔한 열기를 가라앉히느라 포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 * *

바바라와 회의를 이어가면서도 내 온 신경은 살로메디안에게 쏠려있었다.

모르는 척했지만, 그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도, 그러다 포크를 내려놓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의 접시엔 음식이 반 이상 남아있었다.

나랑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한 걸까? 나라도 도둑이랑 밥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우울한 기분을 숨기고 바바라에게 말을 걸었다.

“급료 3배를 주는데도 도망치는 건 이상해요. 돈이 궁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요.”

“저택이 마신의 숲에 있다는 것보다,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치료를 못 받는다는 걸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침통한 얼굴로 바바라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마물이 들끓어서 위험성은 높은데 치료사는 한 명도 없거든요.”

“이 큰 저택에 치료사가 없다고요? 기사단도 있는데요?”

석류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내가 물었다.

흑룡기사단보다 작은 규모의 기사단을 가진 아쿠아로드 왕궁에도 치료사가 20명 이상 있었다.

그래서 놀라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치료사들은 봉급의 10배를 줘도 우리한테 안 와요.”

“물의 신관을 데려오면 되잖아요?”

내 물음에 바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인들은 주로 마신을 믿어요. 물의 정령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아쿠아로드와 달리 치료 신관은 극소수예요. 당연히 귀족 전용이고요.”

“몰랐어요. 아쿠아로드엔 작은 마을에도 치료 신관이 있거든요.”

마력이 없더라도 물의 정령을 모시는 신관은 약간의 치료술을 쓸 수 있었다.

불 속성을 철저히 배제한 차별 정책 덕에 평민들은 치료술의 혜택을 받았던 거였다.

종교적 억압이 심하고 계율을 강요당하기는 하지만.

“그럼 제국인들은 누구한테 치료를 받아요?”

“의학 교육원을 졸업한 치료사들이죠. 학비가 비싸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만 입학할 수 있어요.”

“치료비도 비싸겠네요?”

“맞아요. 가난한 백성들은 떠돌이 약장수들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실력이 거지발싸개 수준이에요.”

바바라의 대답에 나는 식탁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바비. 자금 문제와 인력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생각났어요!”

“그게 뭔데요?”

“치료사를 우리 영지 특산품으로 만들어요!”

“네?”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바바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바비도 고부가 가치 특산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당분간 마도구는 만들 수 없으니까 다른 걸 개발해야죠!”

“치료사 한 명 구할 수도 없는데 어떡해요?”

“우리가 교육원을 만들면 돼요.”

“의학 교육원을요?!”

“마력을 쓰는 치료사 말고, 약을 쓰는 평민 치료사를 육성하는 거예요.”

바바라는 물론 살로메디안의 안색까지 달라졌다.

잠시 들뜬 기색을 보이던 바바라가 회의적으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해요. 우리에겐 자본도 없고, 인력도 없으니까요.”

마신의 숲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어요. 마신의 숲은 약초가 가득한 보물 창고나 다름없거든요!”

* * *

폐왕녀가 된 후 5년.

나는 죽도록 얻어맞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며 살았다.

왕궁에는 수많은 치료사와 치료 신관이 있었다.

하지만 테레사의 눈 밖에 날까 봐 날 외면했다.

오직 한 명, 돌아가신 어머니의 전속 치료사였던 르윈만이 몰래 도와줬다.

「이것밖에 못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왕녀님.」

「오지 마세요. 절 치료해준 걸 들키면 르윈도 위험해져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돌아가신 왕비마마를 생각하셔서라도… 이 책이 도움 될 겁니다.」

「이게 뭐죠?」

「응급처치, 민간요법, 약학 의술서입니다. 이것만 익히시면 웬만한 상처는 혼자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르윈이 건네준 책에는 마력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치료술의 정수가 담겨있었다.

「받을 수 없어요. 이 책 때문에 르윈이 처형당할 수도 있다고요!」

테레사는 내가 병든 짐승처럼 근근이 먹고 싸며 목숨만 부지하길 바랐다.

의술을 전수한 것이 밝혀지면 르윈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왕녀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이 올 겁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삶도, 공부도.」

르윈은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르윈에게 보답하기 위해, 또 살아남기 위해 그 책들이 닳아빠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눈을 감고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르윈은 테레사의 눈을 피해 새로운 의술서를 건네줬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강의해줬다.

실습 교재는 테레사에게 학대당한 내 몸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느 치료사보다 많은 의술서를 읽었다.

환부를 도려내거나 봉합하는 외과 기술도 익혔다.

약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약초에는 더 능통했다.

왕세녀였다면 의술을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나는 테레사 덕분에 얻은 귀한 지식을 10배, 100배로 갚아줄 작정이었다.

피와 죽음으로.

* * *

“마신의 숲에는 책에서만 봤던 진귀한 약초가 가득해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그런 걸 거예요.”

내 말에 바바라가 손뼉을 쳤다.

“마물을 토벌하는 기사들은 약초를 모르고, 약초를 탐내는 사람들은 마물 먹잇감이 됐을 테니까요!”

“한 촉에 10골드씩 하는 에메랄드 린삼도 있었어요.”

“에메랄드 린삼이 뭔가요?”

“동대륙 깊은 산골짜기에서만 발견되는 약초 뿌리예요. 에메랄드빛이 나는 것이 가장 약효가 뛰어나고 비싸요.”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훔친 덕분에 나는 마신의 숲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살로메디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은은한 설렘이 심장을 두드렸다.

“우리 숲에 비싼 풀떼기가 많다고요?”

바바라의 귀여운 얼굴이 흥분으로 발그레해졌다.

“약초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 문제없을 정도예요. 무턱대고 캐면 씨가 마르겠지만요.”

“그래서 치료사를 키우자는 거군요?”

“우리 영지에도 치료사가 필요하잖아요.”

내 입가가 반듯하게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 덕에 미소처럼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바바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는 듯했다.

“평민들이 수업료를 낼 수 있을까? 치료사를 육성하는 데 돈이 많이 들 텐데.”

잠자코 대화를 듣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아쿠아로드 마도사 교육원은 무료예요. 대신 평생 왕실에 복종해야 하죠. 우리도 수업료를 받지 않을 거예요.”

“치료사들을 공작령에 예속시키겠다는 건가?”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면 돼요. 제가 직접 가르칠 테니,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렇게만 하면 공작령의 고질적인 인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치료사가 늘어난다면 평민들도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내 지식만으로 치료사를 키울 수 있을까?

아쿠아로드의 의술이 제국에서 통할지는 걱정스러웠으나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대는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존재니까.」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넘어왔다.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했었지만, 이제는 살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계약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날마다 커졌다.

사람 마음도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들여다볼 수 없다면 조금이나마 잊기 쉬울 텐데.

“시아는 천재예요! 아니, 구세주예요! 시아와 결혼한 각하께 감사해야겠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바바라가 내게 와락 안겼다. 역시 속이 메스꺼웠다.

“돈 없이 치료사가 될 수 있다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릴 거예요. 마신의 숲이 아니라 지옥이라 하더라도요!”

바바라가 내 품에 뺨을 비볐다.

사랑스러운 친구를 안을 수 있어서 기쁜 것과 별개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원망스러운 체질 같으니. 바바라 정수리에 토하면 어쩌지?

식은땀을 흘리며 엉거주춤 서 있는데, 살로메디안이 내게서 바바라를 떼어냈다.

“내 아내를 함부로 만지지 마라. 바바라.”

“숭고한 우정을 질투하지 마세요!”

살로메디안에게 목덜미를 잡힌 바바라가 팔을 휘저었다.

“너야말로 집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마.”

날카로운 경고에 바바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간 좀팽이.”

그와 실랑이할 시간에 발전적인 대화를 나누겠다는 듯 바바라가 날 돌아봤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요, 구세주님?”

“마신의 숲에 어떤 약초가 있는지 샅샅이 살펴봐야 해요. 제가 직접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로메디안이 읊조렸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안 된다고요?”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웬걸?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저 말고 약초에 능통한 사람이 없습니다.”

“황도에서 데려오면 된다.”

“마부 한 명 구하지 못하는데 약초 전문가를 데려온다고요?”

잠시 침묵하던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안 된다.”

“기사분들께서 호위해주신다면 안전할 겁니다.”

“안 된다고 말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살로메디안은 단호했다. 내가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으로 바바라를 돌아봤다.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지요.”

바바라는 남은 와인 병을 챙겨서 조용히 사라졌다.

살로메디안을 향한 내 목소리에 원망이 듬뿍 담겼다.

“살롬.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오랜만에 만난 그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지만 무조건 안 된다는 그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영지를 위해서 애쓰는 건데 왜 이해를 못 하지?

“마신의 숲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영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곳에서 죽을 뻔한 걸 잊은 건가?”

물론 잊지 않았다.

몇몇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마신의 숲을 헤매던 사흘만큼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대를 마신의 숲에 들여놓을 수 없다. 약초는 꿈도 꾸지 마.”

살로메디안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못 박았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을 폴폴 풍기면서.

이대로 약초를 포기해야 할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불쑥 물었다.

“혹시 살롬의 심장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뭐라?”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시는 거냐고요.”

“시아!”

기가 찬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에서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푸른 눈과 내 붉은 눈이 맹렬히 얽혔다.

팽팽한 긴장감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고, 그건 살로메디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건가?”

“그래도 갈 거예요.”

“날 거스르겠다는 뜻인가? 설마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우리 계약 조건에 복종도 있었나요?”

살로메디안의 어깨가 움찔 뒤로 밀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살롬의 조건은 제가 심장을 훔쳤다는 걸 비밀에 부치고, 공작부인 역할에 충실하라는 거였습니다.”

도발적인 눈빛으로 살로메디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대리석 조각처럼 무표정했다.

“저는 계약에 충실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살롬도 협조하세요.”

“계약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는가?”

“당신이 원했던 것 아니었나요?”

“알려줘서 고맙군, 그래.”

살로메디안의 투명한 푸른 눈에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한 남자처럼.

정말 날 걱정한 건가? 심장이 다칠까 염려한 게 아니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계약 마법을 걸 정도로 날 믿지 못하는 남자에게 또 기대를 하다니.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계약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심장을 돌려주기 전까지 나는 그의 아내였다.

그를 애칭으로 부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식사할 수도 있었다.

그와 세드나 공작령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계약 때문이라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말라버린 온천에도 가봐야 하는데… 온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겨버릴 줄이야.

쓸쓸함을 감추고 다시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로메디안의 마음을 바꾸고 마신의 숲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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